1. 소개
고구려의 제12대 군주. 243년에 태자에 임명되었고, 248년에 동천왕이 승하하자 즉위했다.
248년 음력 11월 동생들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모반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모두 처형당했다. 이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일어난 왕족간의 다툼이 그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고구려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왕권이 점차 강화됨에 따라 서서히 부자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중천왕의 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가 목숨을 잃은 것.
250년 국상(國相)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당시 국상은 명림어수.
251년에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王后 椽氏)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대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극형을 내렸다(!). 254년에는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다. 256년 공주를 연나부 출신인 명림홀도와 혼인시켰다.
259년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임금 본인이 친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되는 양맥(梁貊)에서 친정해 이들을 격파허고 8천여 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선왕인 아버지 동천왕이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침략을 당해 작살이 났던 것을 생각해보면 단단히 복수를 한 셈.
263년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중국의 통일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중천왕도 이에 대비를 단단히 하였다.
270년에 승하했고 중천(中川)의 들에 장사지냈다.
2. 평가
인생에 꽤나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데, 어렸을 때는 위나라의 침입으로 크나큰 고초를 겪었고, 장성하여 왕이 된 후에는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동생들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또 왕을 두고 여인들의 암투도 겪었다. 왠지 대무신왕과 파란만장한 일생이 비슷하다. 결국 위나라 병사들을 괴멸시키고, 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 그의 장남은 요절하여 사후에 차남인 서천왕이 즉위했다.
정사를 제대로 펼쳐 인재를 잘 골라 쓰고, 순장을 금지시키며, 역사서에도 언급될 만큼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었고, 게다가 고구려에게 굴욕을 준 위나라를 격파하여 8천여의 수급을 베는 등 활약상이 꽤나 크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중천왕 본기
一年秋九月 중천왕이 즉위하다 (248)
一年冬十月 연씨를 왕후로 삼다 (248)
一年冬十一月 왕의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을 일으키다 (248)
三年春二月 국상 명림어수에게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다 (250)
四年夏四月 왕이 관나부인을 죽이다 (251)
四年夏四月 음우를 국상으로 삼다 (251)
四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다 (251)
252-254 : 3년 공백
八年 약로를 왕태자로 삼다 (255)
九年冬十一月 명림홀도가 부마도위가 되다 (256)
九年冬十二月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전염병이 유행하다 (256)
257-258 : 2년 공백
十二年冬十二月 조위의 침략을 물리치다 (259)
十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260)
十五年秋七月 왕이 흰 노루를 잡다 (262)
十五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262)
263-269 : 7년 공백
二十三年冬十月 중천왕이 죽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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