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국방3.2. 진대법3.3. 부자 세습제 확립3.4. 정치 체제의 정교화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1. 소개
고구려의 제9대 군주. 휘는 남무. 태조대왕, 차대왕과의 관계가 미스테리한 신대왕의 차남이다. 장수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 18년간 재위했다. 천왕으로 끝나서 오해할 수 있는데, 천왕(天王)이 아니라 고국천원(故國川原) 근교에 묻어서 고국川왕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판단력이 좋고 힘이 아주 세서 큰 솥도 들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 큰 솥을 드는 사람을 장사로 여겼다. 체격도 커서 키가 무려 9척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기준을 따라 1척을 23cm로 가정하면 신장이 207cm였던 셈이다. 9척 운운하는 부분은 왕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넣은 과장일 가능성이 꽤 높지만, 어쨌든 당시의 고구려 남성보다 훨씬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시호가 비슷한 고국원왕과는 대조되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2. 왕위 다툼
등극한 신대왕의 아들 | |
9대 | 10대 |
고국천왕 (故國川王) | 산상왕 (山上王) |
고국천왕의 형 발기(拔奇)가 재능이 용렬하여(불초하여) 동생 남무가 고국천왕으로서 왕위를 계승했지만, 발기(拔奇)는 공손강과 연노부(소노부) 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발기(拔奇)는 곧 진압당하고 요동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런데 사서의 공손강은 요동 공손씨 정권의 공손강은 아니다. 이 공손강이 요동을 확보한 것은 산상왕 시기인 204년의 일로 한참 뒤의 일이다. 고국천왕 대라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는 기주자사에서 짤리고 고생하던 시기로 요동태수가 되기 전이다. 공손도의 요동태수 임명은 삼국지는 189년, 후한서는 184년인데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고국천왕의 즉위 이후 시점인 게 문제.
때문에 고발기를 도운 인물이 공손강이 맞다면 이는 이 시기 요동지역에 존재하였던 동명이인이자 병력만 3만 명이 넘는 유력자인 공손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시기 요동 공손씨 정권의 공손강의 경우 아버지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면직되어 영향력을 잃자 요동군 양평현령 공손소가 공손강을 강제로 끌고가서 하급 관리로 부려먹는 중이었는데 이후 동탁이 집권하고 공손도가 복권되어 요동태수가 되자 공손강이 공손소를 체포해 저잣거리에서 때려죽였다는 안습한 기록만 남아있다. 공손강이 고생하던 시기의 요동태수로 유력한 인물은 장거와 장순의 반란시에 죽은 양종이다. 또한 동명이인설을 주장해도 당시 요동에 딱히 공손씨 군벌이 있었던 흔적이 없는데 평범한 어느 공손강이 과연 3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원해줄 수 있었는지도 문제.
훗날 넷째인 연우(산상왕)에게 반기를 일으키는 셋째 발기(發岐)와 동일인물이란 설도 제기되지만,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비해 세부 요소에서 동일인일 경우 일어날 수 없는 요소가 많다. 발기가 다시 고국천왕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단은 요동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을 따른다. 더러는 고국천왕이 용서를 했는데 발기가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요동 지역에서 죽은 듯이 살겠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이건 첫째 발기를 기록상 오류로 판정하고 실제로 존재했던 건 셋째 발기였다고 보면 맞는다. 참고로 셋째 발기는 산상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막내 계수에게 꾸짖음을 듣고 반란을 일으킨 게 부끄러워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고국천왕과 산상왕이 동일인물이고, 또 발기 역시 동일인물이란 설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고국천왕의 다른 이름을 이이모(伊夷模)라고 기록한 데 반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를 산상왕의 이름으로 기록하였고, 신대왕의 계승자도 고국천왕이 아닌 산상왕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중국의 사가가 고국천왕을 누락시키고, 김부식이 고유기록과 삼국지를 대조하면서 기록하다가 실수했다는 것이 정설.
3. 업적
3.1. 국방
단순히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이겨낸 것을 넘어 큰 업적을 몇 가지 남겼다.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후한의 요동 태수가 침입해오자 동생 고계수(신대왕의 5번째 아들)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막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친정해 좌원(坐原)에서 그들을 무찔렀다. 왕비 쪽의 외척 연나부의 좌가려와 어비류가 자신들의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재하려 했는데 난을 일으켜 버리자 이를 진압하고 그들을 제거했다.
3.2. 진대법
사사로운 친분관계로 관직이 주어지고, 덕이나 능력으로 관직에 나설 수 없으니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된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탓이니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라.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며
또한 을파소와 안류를 등용했다. 안류는 귀족들이 천거한 인물이었고, 안류가 또 다시 을파소를 천거했다. 을파소가 진대법을 건의했고, 고국천왕은 이를 실시하여 하호(下戶)[3]들을 구제했다.
이 진대법은 국사 교과에 나오는 구휼책으로 춘궁기에 국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이다. 현대로 따지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은행 또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과 비슷하다. 그리고 진대법은 복지의 성격이 더욱 강하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짙게 반영된 정책이었다.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굶어죽는 걸 피하려고 직접 자청해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지만 정부가 빌려주면 굳이 귀족 밑에 안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교과서에서도 서술하듯 이 시기는 국가 공민(公民)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입장에서는 국가 통제 아래 역을 지고, 조세를 납부할 공민이 필요했다. 부족 연맹체에서 하호나 호민으로서 귀족 아래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귀족의 세력은 커진다. 진대법을 실시하여 굶주린 백성이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복지 이전에 왕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다.
3.3. 부자 세습제 확립
그리고 고국천왕의 치세에 왕위의 부자간 상속제가 확립되었다. 교과과정에서는 고국천왕 대에 형제상속제에서 부자상속제로 변경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형제 상속제'라는 제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불투명해 논란이 있다. 고국천왕 이전의 왕들 중에 왕제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이것을 약한 왕권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으로 봐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고국천왕 이전에도 부자 상속제가 기본이었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었으므로, '형제 상속제'가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정작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이 부인 왕후 우씨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신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이 뒤를 이었는데, 고구려 왕실은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천왕 때에 와서야 부자 상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3.4. 정치 체제의 정교화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또한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 등 부명이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등의 방위명으로 전환되는 등 중앙 집권화를 위해 정치 체제가 더욱 정교해젔다. 이런 5방위 체제는 역사가 깊다. 부여와 백제, 발해에도 5부가 있었다. 5부를 방위명으로 개편했다는 직접적 기록이 있는 건 아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국천왕 2년에 왕후 우씨의 출신지를 연나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 고국천왕 13년 4월 조에 4부에 국상으로 추천받은 안류의 출신지가 동부(東部)로 기록되어 있는 점, 이후 고구려본기에서 인물의 출신을 설명할 때 기존 명칭이 아닌 방위명 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올 토대로 고구려의 기존 5부가 방위명 부로 개편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4. 왕후 우씨
왕후 우씨와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산상왕 승하 후 동천왕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우씨도 세상을 떠났다. 우씨는 죽기 직전에 '차마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으므로 산상왕 곁에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동천왕은 그 유언을 따랐다. 얼마 후 무당이 찾아와 동천왕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꿈에서 고국천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결국 함께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 《삼국사기》 동천왕 8년 가을 9월
동천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고국천왕의 무덤 주변에 일곱 겹의 소나무를 심어 왕의 능을 꼭꼭 가리게 했다고 한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우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봐도 꽤 재밌는 드라마 소재가 될 법한 이야기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고국천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고국천왕이 즉위하다 (179)
二年春二月 우씨를 왕후로 삼다 (180)
二年秋九月 시조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春三月 붉은 기운이 태미를 통과하다 (182)
四年秋七月 혜성이 태미에 나타나다 (182)
六年 왕이 후한 요동 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184)
八年夏四月 화성이 심성을 지키다 (186)
八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186)
187-189 : 3년 공백
十二年秋九月 좌가려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190)
十三年夏四月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다 (191)
十三年冬十月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다 (191)
192-193 : 2년 공백
十六年秋七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194)
十六年冬十月 진대법을 실시하다 (194)
195-196 : 2년 공백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197)
十九年夏五月 고국천왕이 붕어하다 (197)
[1] 선왕인 신대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삼국사기에선 77세이지만 실제론 53세 정도다. 이건 추청이지만 앞서 태조왕의 21년간의 기록이 없는 점 그리고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는 18살이 차이나는 점을 근거로 산출한 즉위 당시에 이미 40대였을 것이기에 출생연도는 137년이나 142년 근처일 것이다.[2] 참고로 체격이 8척이 넘어가는 다른 왕은 백제의 25대 왕 무령왕이 있다.[3] 평민이나 서민의 고구려식 (한자화된)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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