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은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공격하고 북연의 왕 풍홍을 고구려로 데려 왔다 한다.
고구려에 적대적인 후연을 광개토태왕이 멸망 시키고, 후연에 이은 북연이 생길 때에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축하사절을 보냈다 한다. 그리고 고씨가 왕에 올랐다 기록되었다. 이를 해석하면 북연은 고구려의 위성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씨의 왕이 된 것도 고구려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 시절에 동고트족 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필자는 후연의 멸망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고트족의 진출과 더불어 해석하여, 연나라가 프랑스의 Gaul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본 글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에 밀서를 보내 북위의 공격으로 위험하니 고구려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듬해 북위에서도 북연을 공격할 것이라고 고구려에 연락이 왔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다. (아래 자료 참조). 그래서 장수왕은 436(437)년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공격하여 폐허로 만들고 북연의 왕 풍홍을 데려왔다 했다.
즉 북연과 북위 모두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어쩌면 이들 모두 고구려와 관련 있는 위성국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리고 북연과 북위의 싸움은 형제간 왕권다툼을 위한 싸움인지도 모른다. (로마사에서 이런 가능성을 언급함. 아래 자료 참조). 그래서 서로 고구려의 도움이나 승인을 받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필자의 추정은 아래 훈족의 아틸라와 Gaul지역 전투에서 나타난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북연을 멸망시키고 생긴 북위는 이후 내내 고구려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우호국으로 지냈다. 북위는 백제 개로왕이 장수왕을 헐뜯으며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는 국서를 보냈을 때, 이를 고구려에 알리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치는 계기가 된다. 즉 북위는 백제보다 고구려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고구려가 북연을 멸망 시키고 북위라는 위성국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 문자명왕 시기에 많은 북위와의 교류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 장수왕의 북연 공격(436년, 삼국사기는 437년) 자료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 된 북연(北燕, 407년 ~ 436년) 2대 황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436년),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의 지휘 하에 군사 2만을 파견해 화룡성의 주민들을 구출한뒤 화룡성을 약탈, 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고 대접을 바라다가 더 천대를 받게 되었다. 이후 풍홍은 송(육조)(宋, 420년 ~ 479년)에 망명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풍홍은 이 때문에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 기록, 장수왕>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436)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437)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437)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437)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438)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439)
“용성왕 풍씨 임금이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龍城王 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 북연 황제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을 때 비꼬며 건넨 위로의 말. 삼국사기 발췌."
(자료 : 장수왕, 나무위키)
아래 아틸라의 Gaul 지역 military campaigns (451)이 이러한 장수왕의 북연 공격(436)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단 연대가 15년의 차이가 난다.
아틸라는 451년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의 오를레앙 (Orleans)까지 진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패가 애매하다고 아래 보다 자세한 자료에서 기술된다.
"During his reign, he was one of the most feared enemies of the Western and Eastern Roman Empires. He crossed the Danube twice and plundered the Balkans, but was unable to take Constantinople. His unsuccessful campaign in Persia was followed in 441 by an invasion of the Eastern Roman (Byzantine) Empire, the success of which emboldened Attila to invade the West.[3] He also attempted to conquer Roman Gaul (modern France), crossing the Rhine in 451 and marching as far as Aurelianum (Orléans) before being defeated at the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He subsequently invaded Italy, devastating the northern provinces, but was unable to take Rome. He planned for further campaigns against the Romans, but died in 453."
(source : Attila, Wikipedia)
Attila in Gaul at 451 (source : Wikipedia)
아래 자료에서 보면, 훈족의 아틸라는 로마 Gaul지역에 위성국을 두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많은 타격을 가해 로마와 서고트족의 군사력을 현저히 약하게 했다고 기술한다.
서고트족과 로마가 한편이 되어 싸웠다고 한다. Jordanes는 반달족의 Genseric왕이 서고트족, 로마와의 싸움을 아틸라에게 부추켰다고 한다. 이 전쟁의 동기에 대해서는 로마사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 중의 하나는 Valentinian III의 여동생이 아틸라에게 구조를 요청하며, 후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로마사에서 후일 아틸라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도 북위와의 혼인설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북위의 요청을 거절하고, 10여년 후에는 오히려 고구려에서 북위와 혼인을 요구하여 북위에 고구려 여인이 가서 성사되었다고 한다. 즉 북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어, 로마사와 정반대의 내용을 보여 준다.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이와 관련한 아틸라의 죽음은 로마사 작성자들의 인위적인 구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틸라 이후에 훈족의 활동이 없었다고 강변하는데, 고구려로 판단되는 고트족의 계속적인 활동이 이 지역에서 있었음을 볼 때, 이는 훈족의 아틸라를 인위적인 죽음으로 모는 목적을 나타낸다고 판단된다.
"이후 북위는 고구려 왕실과의 혼인을 바랐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저 놈들 연나라도 저렇게 뺑끼치고 침공했음"이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로, 그녀의 오빠 고조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무른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 장수왕이 승하했을 때 북위 황제가 애도 의식까지 치렀다고 한다."
(자료 : 장수왕, 나무위키)
또 다른 하나는 프랑크왕의 자리를 놓고 형제가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한다. 형은 아틸라 편을, 동생은 로마편인 Aetius와 힘을 합쳐 싸웠다는 것이다.
Jordanes는 서고트족 왕인 Theodoric I (419-451, Alaric I의 계열인 Balt dynasty,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Goths, Balt Dynasty, 펌글 참조)은 적관계인 Amaling Goths, 즉 동고트족(Amal dynasty, Ermanaric (소수림왕 추정) 계열, Theodoric the Great 계열,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Goths, Amal Dynasty, 펌글 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한다. 즉 고트족 내의 왕권다툼으로 본 것이다. 훈족의 Attila의 453년 죽음은 서고트족의 Theodoric I의 죽음(451)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472년)에서 고구려의 내분을 언급하고 있어 (아래 자료 참조), 상기 왕권 다툼이 고구려 내에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로왕이 보낸 국서에서 장수왕 (연)이 472년에도 살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453년 훈족 아틸라의 죽음 또는 서고트족 Theodoric I의 죽음(451)은 장수왕이 아닌 다른 왕족의 죽음을 말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로왕이 472년에 북위에 보낸 국서에 "지금 연(璉)[12]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자료 : 장수왕, 나무위키)
"Whether the battle was strategically conclusive is disputed: the Romans possibly stopped the Huns' attempt to establish vassals in Roman Gaul. However, the Huns successfully looted and pillaged much of Gaul and crippled the military capacity of the Romans and Visigoths.......
The historian Jordanes states that Attila was enticed by the Vandal king Genseric to wage war data-on the Visigoths. At the same time, Genseric would attempt to sow strife between the Visigoths and the Western Roman Empire.....
Other contemporary writers offer different motivations: Justa Grata Honoria, the sister of the emperor Valentinian III, had been betrothed to the former consul Herculanus the year before. In 450, she sent the eunuch Hyacinthus to the Hunnic king asking for Attila's help in escaping her confinement, with her ring as proof of the letter's legitimacy....
Another conflict leading into the war was that in 449, the King of the Franks (possibly Chlodio) had died and that his two sons argued over the succession: while the older son sought Attila's help, the younger sided with Aetius, who adopted him......
The most likely explanation for Attila's widespread devastation of Gaul is that Attila's main column crossed the Rhine at Worms or Mainz and then marched to Trier, Metz, Reims, and finally Orleans, while sending a small detachment north into Frankish territory to plunder the countryside. This explanation would support the literary evidence claiming North Gaul was attacked, and the archaeological evidence showing major population centers were not sacked.
Attila's army had reached Aurelianum (modern Orleans, France) before June. According to Jordanes, the Alan king Sangiban, whose Foederati realm included Aurelianum, had promised to open the city gates. This siege is confirmed by the account of the Vita S. Aniani and in the later account of Gregory of Tours, although Sangiban's name does not appear in their accounts. However, the inhabitants of Aurelianum shut their gates against the advancing invaders, and Attila began to besiege the city, while he waited for Sangiban to deliver data-on his promise. There are two different accounts of the siege of Aurelianum, and Hughes suggests that combining them provides a better understanding of what actually happened. After four days of heavy rain, Attila began his final assault data-on June 14, which was broken due to the approach of the Roman coalition. Modern scholars tend to agree that the siege of Aurelianum was the high point of Attila's attack data-on the West, and the staunch Alan defence of the city was the real decisive factor in the war of 451.....
Jordanes goes data-on to state that Theodoric, whilst leading his own men against the enemy Amaling Goths, was killed in the assault without his men noticing. He then states that Theodoric was either thrown from his horse and trampled to death by his advancing men, or slain by the spear of the Amaling Andag. Since Jordanes served as the notary of Andag's son Gunthigis, even if this latter story is not true, this version was certainly a proud family tradition.
(source : Battle of Chalons, Wikipedia,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서유럽, 펌글 참조)
따라서 필자가 추정한 바와 같이, 북연과 북위 싸움이 고구려인 고트족 내의 왕위 다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간 싸움일 수 있다는 추론도 있고, Jordanes의 증언도 있으며, 또한 고구려와 북연, 북위와의 긴밀한 관계를 보면 이러한 추정이 매우 현실성 있는 것이 된다. 아틸라도 이러한 과정의 한 복판에 있는 것이 된다. 북위에 보낸 개로왕의 국서에서 언급된 장수왕에 대한 언급도 이러한 왕위 싸움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Theodoric the Great 시기 (474-526, 문자왕 추정) 서고트족, 동고트족이 확보한 대서양에서 아드리아해까지의 영역 확보도 결국 고구려의 그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후일 백제의 동성왕이 북위와 484, 488, 490 세 번에 걸쳐 전쟁을 했는데, 이러한 전쟁도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북위와 백제가 싸운 것이 되는 것이다. 국내 사학자들은 이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북위가 고구려의 위성국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백제가 요서지역인 스페인지역에 있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북위가 프랑스 남부지역에 있을 가능성은 필자의 글 '론강이 요수라면 갈석산은 어디인가?'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정사인 『북사(北史)』 '고종 문성제(高宗文成帝)' 태안(太安) 4년(458)조는 문성제 탁발준(拓拔濬)이 동쪽으로 순행해 요서(遼西) 황산궁(黃山宮)에서 연회하고 다시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산 위에서 군신들과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에서 갈석산은 프랑스의 Central Massif의 동쪽끝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여기서 요서의 황산궁은 프랑스 남부 역사적인 도시, Toulouse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은 이상하게 황토 흙이 많은 지역임을 필자는 실제 가 보아서 안다. 여기가 '실위'에서 남서쪽 7천리에 있는 낙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북위는 북쪽에 있는 북연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북위가 카롤로스대제의 프랑크왕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무위키, 북위 자료 참조).
그런데 이러한 필자의 추정 즉 아틸라의 Battle of Chalons (=장수왕의 북연 공격전쟁)이 왕권다툼 전쟁이라는 추정을 밑받침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즉 Battle of Chalons에서 로마와 서고트족 편에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린 Alans족에 관한 아래 기록이다. 이란인 부족 Alans족이 갑자기 언급되는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함께한 말갈족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Orleans지역에 이들의 후손으로 보이는 많은 이름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즉 고구려와 함께한 말갈족이 이러한 왕권다툼의 전쟁의 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이 전쟁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고 본다. 백제는 대대로 말갈족과 치열하게 싸웠지, 결코 한편이 되어 싸운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지역의 프랑스가 아직도 수탉(신라 자비마립간 (458-479)때 고구려의 상징)을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In 442 Flavius Aetius, the Roman commander in Gaul, requested Goar, head of the Iranian tribe of Alans in the region to come to Orleans and control the rebellious natives and the Visigoths. Accompanying the Vandals, the Alans crossed the Loire in 408. data-one of their groups, under Goar, joined the Roman forces of Flavius Aetius to fight Attila when he invaded Gaul in 451, taking part in the Battle of Châlons under their king Sangiban. Goar established his capital in Orléans. His successors later took possession of the estates in the region between Orléans and Paris. Installed in Orléans and along the Loire, they were unruly (killing the town's senators when they felt they had been paid too slowly or too little) and resented by the local inhabitants. Many inhabitants around the present city have names bearing witness to the Alan presence – Allaines. Also many places in the region bear names of Alan origin."
(source : Orleans, Wikipedia,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서유럽, 펌글 참조)
아래 당시 전쟁 당시의 양측 병력 규모를 보면, 서고트족이 3만-8만 규모, 동고트족, 훈족의 편이 수만명이라고 추정되어 있는데, 장수왕은 2만명의 병력을 보내어 북연의 풍홍을 구했다고 했다. 유사한 규모을 말해 주고 있다.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Part of the Hunnic invasion of the Western Roman province of Ga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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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s at the Battle of Chal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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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andCommanders and lead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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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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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ualties and lo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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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Battle of Chalons, Wikipedia)
이러한 것을 감안하면, 용성국인 북연의 수도 화룡성이 Orleans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Orleans 옆에 있는 Paris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용의 무늬가 있는 것을 안다. 이 용성국인 북연지역이 고구려의 유리왕시의 황룡국 (필자는 독일 서북부지역으로 추정함), 신라 석탈해의 출신국인 용성국이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에 온 풍홍은 대우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남조의 송나라에 연락하여 망명을 하려 한다. 이를 안 고구려는 고구, 손수 등이 풍홍 일행을 살해한다. 이때 송나라의 사신 왕백구가 도착하여 고구, 손수 일행의 고구려와 충돌한다. 그 와중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사로 잡히게 된다. 이에 장수왕은 군대를 보내 왕백구 일행을 사로 잡는다. 그리고 송나라에 보내 처벌을 요구한다. 이때가 438년 (삼국사기 439년)이니, 15년을 더하면 로마사의 453년이 된다. 로마사에서는 아틸라가 Gaul지역 정벌 (451) 2년후인 453년 죽었다고 한다. 즉 왕백구와의 충돌에서 죽은 고구려의 '고구' 장수 (고씨 성을 보니 왕족으로 보임)의 죽음을 아틸라의 죽음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자료 참조)
"438년(장수왕 26)고구(高仇)와 함께 왕명을 받아, 고구려 북풍(北豊)으로 망명한 중국 북연(北燕)의 마지막 왕인 풍홍(馮弘)과 그 자손 10여 인을 살해하였다.
이에 앞서 풍홍은 3월에 고구려로 망명하였는데, 고구려가 그를 박대하자 그는 마침내 송(宋)과 접촉하였으며, 송나라에서는 왕백구(王白駒)를 파견하여 풍홍을 송나라로 데려가고자 하였었다.
손수는 고구와 함께 풍홍을 죽인 다음, 왕백구의 습격을 받아 고구는 전사하고 손수는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뒤 고구려가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나라로 압송한 것으로 보아, 왕백구에게 사로잡힌 손수는 풀려났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자료 : 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Map of Attila the Hun Empire (source : Wikipedia)
즉 서로마제국의 Gaul지역은 중국의 역사 북연, 북위지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로마사가 여러 나라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이미 판단하였다. 라인강 서쪽의 Gaul지역은 중국사 지역으로 보인다. 북아프리카는 왜의 지역으로 판단된다. 동로마지역은 백제의 역사로 보인다. 서로마제국은 중국사 외에, 부여사, 고구려사, 신라사, 왜의 역사가 섞인 것으로 판단된다. 후일 차차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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