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당나라 영주가 있던 수나라 유성군과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은 다릅니다. |
受心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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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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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요약: 1.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은 조양시다. 2. 수나라 유성군은 북위 영주자사 고보녕이 조양을 점거한 동안(576~583)에 수문제가 581년에 만리장성 부근 남영주의 건덕군에 설치한 것이다. 3. 당나라 영주는 조양시가 아니라, 수나라 유성군 위치에 세웠으니, 남영주 건덕군 위치로서 만리장성 부근이다. 이는 후한 때 후퇴된 요서군과 같은 곳이다.
geos...// 님이 제시한 조양시 유적 대로 조양시가 유성현이었던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조양시가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이었던 것은 맞는데, 당나라 영주가 설치되었던 [수나라 유성군]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 다른 곳입니다. 먼저 문헌을 고찰하고 다음에 유물, 유적을 판단하겠습니다. 요서군과 유성군이 다르게 설명되니 이점에 유의하여 주십시오.
1. 문헌고찰 다음은 [수서지리지/요서군]입니다. (이게 조양시입니다) [수서지리지/요서군] 遼西郡舊置營州,開皇初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七百五十一。 요서군은 후위시대 영주였다. 개황초에 영주총관부를 두었고 대업초에 없앴는데 현은 하나로서 유성현이었다. [수서지리지/요서군]柳城後魏置營州於和龍城,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平剛、柳城、富平等縣。 요서군의 유성현은 영주 화룡성에 있었다. (후위시대 영주는) 건덕군과 기양군, 창려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과 용성현, 대흥현, 영락현, 대방현, 정황현, 석성현, 광도현, 양무현, 양평현, 신창현, 평강현, 유성현, 부평현을 다스렸다. [수서지리지/요서군] 後齊(550-557) 唯留建德、冀陽二郡,永樂、帶方、龍城、大興等縣,其余並廢。 후제는 앞에 말한 영주의 6군 18현을 건덕,기양 2군 4현으로 줄이게됩니다. 무슨 변고냐 하면 고보녕의 반란 때문입니다. 576년 후제의 (북)영주자사가 된 고보녕이 있습니다. 高寶寧,武平末(후제 연호 570~576),為營州刺史,鎮黃龍(조양시) 후제의 북영주자사 고보녕은 577년에 [후제]에 반란합니다. 따라서 577년에 조양시 영주치소와 4군 14현은 고보녕의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수서지리지/요서군] 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其余並廢。尋又廢郡, 改縣為龍山, 十八年改為柳城。 581년에 수문제는 건덕군과 용성현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지합니다. 이 건덕군을 개황18년에 유성군으로 개칭합니다. (이 수나라 유성군이 당나라 영주가 됩니다.) [후제]가 가졌던 기양군도 영주의 고보녕에게 또 빼앗긴 것입니다.
581년 5월 북주가 수나라 문제에게 망할 때에, 고보녕은 평주(하북성 노룡)를 침략합니다. 당시 상황은 [북사/열전/장손도]에 나와 있습니다. /新校本北史/列傳/卷二十二 列傳第十/長孫道生孫觀/ 晟子行布 開皇元年,攝圖曰:「我,周家親也.今隋公自立而不能制,何面目見可賀敦!」因與高寶寧攻陷臨渝鎮,約諸面部落,謀共南侵.文帝新立,由是大懼,修長城,發兵屯北境.命陰壽鎮幽州、虞慶則鎮并州,屯兵為之備.
고보녕이 임유관을 함락하고 돌아가니, 수문제가 장성을 수리했습니다. 그리고 음수에게 명령하여 유주에 진주하여 고보녕에게 대비를 시켰습니다. 이 상황에서 수나라가 설치한 건덕군 위치는 어디일까요? 조양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만리장성 임유관 부근이 됩니다. 아마도 임유관 동쪽 만리장성 기시부로 고려됩니다. [수서지리지/요서군] 大業初,置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고보녕은 583년에 조양시에서 토벌당합니다. /新校本隋書/紀/卷一 帝紀第一/高祖楊堅上/開皇三年 夏四月 庚辰,行軍總管 陰壽 破 高寶寧 於黃龍 대업초(605년)에 수양제는 조양시에 요서군과 유성현을 다시 둔 것입니다. 즉 대업 때에세 설치한 조양시의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과 581년에 설치한 만리장성의 수나라 유성군은 다른 곳입니다.
그러면 [구당서지리지]를 보겠습니다. 북경시 유주(幽州) 관할입니다. [구당서지리지/유주] 漁陽 後漢縣。屬漁陽國。秦右北平郡所治也。隋為漁陽縣。武德元年,屬幽州。二年,改屬玄州,又分置無終縣。貞觀元年,屬幽州,省無終。 神龍元年,改屬營州。 開元四年,還屬幽州。十八年於縣置薊州,乃隸之 북경의 어양현이 잠시 영주에 속합니다. 영주가 유주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順州下 貞觀六年置,寄治 營州南 五柳城。天寶元年,改為順義郡。乾元元年,復為順州。舊領縣一 영주 남쪽 오류성에 순주가 있었습니다. 즉 영주가 유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류성은 회유현(懷柔縣)이 되었고 지금 북경시 동쪽 조백신하 변에 있는 회유현입니다. 밀운 서쪽입니다. 즉 영주가 잠시 이 회유현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慎州 武德初置,隸營州,領涑沫靺鞨烏素固部落。萬歲通天二年,移於淄、青州 安置。神龍初,復舊,隸幽州。天寶領縣一,戶二百五十,口九百八十四。 신주는 618년에 영주에 속했다가 속말말갈인들의 오소고부락을 다스리다가 측천무후 때 산동반도로 갔다가 신룡(705) 때에 다시 유주로 옮겨갔습니다.
다음 [구당서지리지/영주]를 보겠습니다. [구당서지리지/영주]營州上都督府 隋柳城郡。武德元年,改為營州總管府,領遼、燕二州,領柳城一縣。 618년 수나라 유성군을 영주총관부라고 했고, 요주와 연주, 유성현을 두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건덕군 자리, 즉 만리장성 부근에서 영주총관부를 두어서 요주와 연주를 다스렸고, 유성현을 두었습니다. 즉 만리장성 부근의 유성군 유성현인 것입니다. 조양시 유성현과 별개입니다. [구당서지리지/영주] 七年,改為都督府,管 營、遼二州,貞觀二年,又督昌州。三年,又督師、崇二州。 624년에는 영주총관부를 영주도독부라고 했는데 그 자리의 영주(당나라 영주)와 요주를 관할했고 628년에 창주를 629년에는 사주와 숭주를 더했습니다. 사주와 숭주는 조양시 동북방으로 확인됩니다. (조양과 북표시 사이) 632년에는 유주에 속했던 순주(順州)를 더했고 636년에는 신주를 더하여 7주를 다스리게 됩니다. 六年,又督順州。十年,又督慎州。今督七州。 여기서 624년에 연주와 요주가 아니라 영주와 요주로 바뀌었으므로 만일 수나라 유성군의 영주를 이무렵 조양시로 옮겼다면, 그래서 영주와 요주를 다스렸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632년 유주의 순주(회유현)을 조양시에서 편입하여 다스린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래 위주 기록을 보시면 627년에 영주성으로 이주해 들어온 요주가 위주로 이름을 바꾸고 유주대도독부 소속이 됩니다.
[구당서지리지/영주] 萬歲通天二年,為契丹李萬榮所陷。神龍元年,移府於幽州界置,仍領漁陽、玉田二縣。 측무후 때에 697년에 영주가 이만영에게 함락되었는데 이때 영주도독부를 유주계로 옮겨서 어양과 옥전현을 다스렸습니다. 당현종의 개원 4년, 716에 다시 [유성]으로 갔다가 720년에 다시 어양으로 돌아갔습니다. 723년에 유성 옛터로 돌아갔고, 742년에 유성군이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구당서지리지/영주] 開元四年,復移還柳城。八年,又往就漁陽。 十一年,又還柳城舊治。天寶元年,改為柳城郡。乾元元年,復為營州。舊領 縣一, 開元四年,復移還柳城。八年,又往就漁陽。 十一年,又還柳城舊治。天寶元年,改為柳城郡。乾元元年,復為營州。舊領 縣一 여기 영주의 유성현은 따라서 유성군의 유성현이고 조양시의 유성현이 아닙니다. 柳城 漢縣,屬遼西郡。室韋、靺鞨諸部,並吊北。遠者六千里,近者二千里。西北與奚接界,北與契丹接界。
반면에 영주에 속한 연주가 조양시로 보입니다. 연주가 수나라 요서군이었다고 하고, 또 조양시가 북연의 수도였기 때문에 연주라고 했을 것입니다. 618년에 연주총관부를 두었고 요서현, 노하현, 회원현을 다스린 것이지요. 燕州 隋遼西郡,寄治於營州。武德元年,改為燕州總管府,領遼西、瀘河、懷遠 三縣。其年,廢瀘河縣。 그러나 623년에 바로 그 영주(옛 영주, 조양시)로부터 남천하니 유주성내로 연주가 옮기게 됩니다. 六年,自營州南遷,寄治於幽州城內。 貞觀元年,廢都督府,仍省懷遠縣。開元二十五年,移治所於幽州北桃谷山。 天寶元年,改為歸德郡。乾元元年,復為燕州。舊領縣一,無實土戶。所領戶出粟皆靺鞨別種, 이 연주 요서현이 조양시 일 것입니다. 遼西 州所治縣也。
한편 당나라 때 요주는 산서성 태원에도 있었습니다. 영주 관할의 요주는 나중에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영주의 위주 기록에 619년에 요주총관을 두었다고 합니다. 연지성에서 영주성내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624년에 요주총관부를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627년에 요주라는 이름을 위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유주에 속했습니다. 627년 영주성이 유주에 있군요. 威州 武德二年,置遼州總管,自燕支城徙寄治營州城內。七年,廢總管府。貞觀元年,改為威州,隸幽州大都督。所領戶,契丹內稽部落。舊領縣一
[신당서지리지/ 유주] 설명에 보면 수나라가 영주 지경의 여라고성에 요서군을 두어 말갈인을 있게 하였고 618년에 연주로 고쳤다고 했습니다. 幽州范陽郡,大都督府 隋於營州之境汝羅故城置遼西郡,以處粟末靺鞨降人。武德元年曰燕州,領縣三:遼西、瀘河、懷遠
[신당서지리지/ 영주]에 의하면, 거의 700년대 이후 기록입니다만, 영주의 유성군은 본래 요서군(조양시)이었는데, 거란의 이진충에게 함락당해 북경으로 들어왔다가 개원5년에 유성으로 돌아갔고 이후 당현종 때에 유성군으로 개명하였습니다. 營州 柳城郡,上都督府。本遼西郡,萬歲通天元年為契丹所陷,聖歷二年僑治 漁陽,開元五年又還治柳城,天寶元年更名 다시 해석하면 고구려 멸망후에 혹시 조양시의 요서군에 영주를 두었다가 북경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나왔는데 유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바꾼 이름으로 새로 동쪽으로 나아간 영주 유성군 위치는 [구당서]에서 수나라 유성군이라고 한 것이고 조양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당서]의 위주나 사주, 숭주 등등은 [신당서]에 사라져서 나오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700년대에는 지속되지 못했고 기록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당나라 영주와 수나라 유성군이 설치된 건덕군은 어딜까요? 위서를 보겠습니다. /新校本魏書/志/卷一百六上 志第五/地形志上/南營州 - 2491 - 南營州孝昌中營州陷,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영주가 효창 때에 실함되어 남영주가 설치되었다고 나오고 영웅성이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함락했습니다.) 이후에 북제는 북영주와 남영주가 있고 고보녕은 북영주자사입니다. 領郡五 縣十一 昌黎郡永興中置.領縣三- 2492 - 戶五百九 口二千六百五十八 龍城永熙中置.廣興永熙中置.定荒興和中置. 遼東郡永熙中置.領縣二 戶五百六十五 口二千六百三十四 太平永熙中置.新昌永熙中置. 建德郡永熙中置. 領縣二 石城 永熙中置.廣都 興和中置. 남영주에 창려군과 건덕군이 있었고 건덕군에는 석성현과 광도현이 있습니다. /新校本魏書/志/卷一百六上 志第五/地形志上/營州 營州治和龍城.太延二年為鎮,真君五年改置.永安末陷,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建德郡真君八年置.治白狼城.領縣三 石城 前漢屬右北平,後屬.真君八年併遼陽、路、大樂屬焉.有白鹿山祠. 廣都 真君八年併白狼、建德、望平屬焉. 이는 남영주가 아니라 영주의 기록입니다. 북위의 태평진군이 건덕을 설치한 곳은 백랑성(조양시 서쪽 객좌현)입니다. 우북평의 석성현과 광도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침략으로 영주가 남영주로 후퇴되었고, 건덕군이 있습니다. 건덕군과 석성현, 광도현은 후퇴한 것입니다.
한편 [요사 남경석진부/ 난주]를 보면 灤州 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末為公孫度所有.晉以後 屬遼西.石晉割地,在平州之境.[一八]太祖以俘戶置.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 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統縣三: 石城縣.漢置,屬右北平郡,久廢.唐貞觀中於此置臨渝縣,萬歲通天元年改石城縣,在灤州南三十里,唐儀鳳石刻在焉.今縣又在其南五十里,遼徙置以就鹽官.戶三千.
營州 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秦屬遼西郡.漢為昌黎郡.前燕慕容皝徙都于此.元魏立營州,領昌黎、建德、遼東、樂浪、冀陽、[一九]營丘六郡.後周為高寶寧所據.隋開皇置州,大業改遼西郡.唐武德元年改營州,萬歲通天元年始入契丹.聖曆二年僑治漁陽.開元五年還治柳城.天寶元年改曰柳城郡.後唐復為營州.太祖以居定州俘戶.統縣一: 廣寧縣.漢柳城縣,屬遼西郡.東北與奚、契丹接境.萬歲通天元年,入契丹李萬榮.[二一]神龍元年移幽州界.開元四年復舊地.遼改今名.戶三千. 여기에 석성현과 영주, 광녕현이 다 들어있습니다. 즉 이 곳이 남영주였고 결국엔 고보녕에게 빼앗긴 조양시 영주를 대신하여서 수나라 문제의 유성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석성, 광녕(=광도), 영주, 유성이 수나라 때에 설치된 곳은 이 부근입니다.
2. 다음으로 유물, 유적을 판단하겠습니다. geos님이 제가 모르던 최근 자료를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히 이런 내용입니다.
묘 주인 손측(孫則)은 영주 유성 사람이었다. 당나라 무덕4년(서기 621년) 요주총관부에서 거처를 꾸렸으나, 오래지 않아 참군(參軍)으로 전임하였다. 당태종 정관 3년(서기 629년) 북려주 창려 현령(北黎州昌黎縣令)으로 고쳐 제수받았다...정관 19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는 데에 따라가서...,영휘5년(서기 654년) 명위장군을 수여받고, 영휘 6년 5월 집에서 임종하니 이때 67세였다. 같은 해 10월 7일 유성 남쪽 5리 평원에 장사지냈다.
조양시에 창려 손씨 가문이 있었고 손측은 영주 유성 사람이었다는데...는 수나라 유성군 유성현이 아니라 영주에 속한 연주의 요서군 유성현으로 고려됩니다. 그는 621년에 요주총관부 참군으로 갔는데, 대릉하 의주 부근으로 간 것입니다. 그후 북려주 창려현령이 되었는데 이는 조양시 동북입니다. 정관 19년에 고당전에 참전하였고 654년에 죽어서 유성에 묻혔는데 이는 요서군 유성현이 되는 것입니다.
조양시에는 북연의 창려태수 최휼묘지가 있는데 그는 395년 죽었습니다. 광개토왕의 정벌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북연의 황제 풍홍의 동생인 풍소불 묘가 발굴되었으나 명문은 없고, 북위의 임천술주 유현(~?)묘와 장략(~468년)묘가 잇습니다. 임천은 고구려 장수왕이 조양시에 군대를 보냈을 때 나오는 지명입니다. 수나라 한훤묘가 있고 이는 뒤에 소개합니다. 수나라 좌재묘(), 당나라 장수(?)묘, 한정(~744)묘, 손군(~687)묘가 있었습니다. 좌재의 부인은 창려손씨였고 그가 묻힌 곳은 손씨들의 무덤이 있는 유성입니다.
한편 조양시에는 수나라 한훤 대도독의 묘가 있습니다. 612년에 조양시에 묻힌 수나라 한훤이라는 인물은 조양 사람인데, 당시 창려군 용성현(조양시) 사람이라고 묘지에 기록했으며 묻힌 곳은 유성현(조양시) 북쪽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용성현은 조양시 동북방이고 유성현은 서남방이며 둘다 대릉하 북안입니다. 앞에서 말한 “창려 용성”은 수나라 지명에 따른 창려군 용성현이라는 이름입니다. 한씨도 대대로 조양시에 살아왔고, 한훤묘지에 따르면 한훤의 조부 한곤도는 보국장군(북위국 추정)이었으며, 한훤의 부친 한상은 평주사마 참군이었습니다. 한훤묘지에 희하면 효창(孝昌 529~531) 중에 고구려에게 조양시가 약탈을 당했고, 이때 고구려의 평양에 끌려가는 도중에 태사(太奢)라는 고구려 관직을 받았으나 도망쳤고, 고향사람 500명을 데리고 수나라로 다시 도망쳤습니다. [위서]<봉범전(封軌傳)>에 이무렵 고구려가 약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양시에 돌아와서 한훤은 수나라에서 용성현령(龍城縣令)을 받았습니다. 개황 7년에 대장군이 되었고, 대도독에 승진했고, 요택(遼澤)에서 53세로 죽어서 유성현 서북에 묻혔습니다. 요택은 의주시 일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릉하의 동쪽에는 위와 같은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묘지가 없습니다. 요택도, 요동국도 대릉하 서쪽이기 때문입니다.
<受心子의생물인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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