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중,하/황룡사 9층탑
<펌> 황룡사
Chung Park
2019. 5. 23. 06:21
황룡사
최근 수정 시각:
이름 | 한국어 | 경주역사유적지구 |
영어 | Gyeongju Historic Areas | |
프랑스어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국가·위치 | ||
등재 유형 | 문화유산 | |
등재 연도 | 2000년 | |
등재 기준 | ||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 ||
분류번호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면적 | 390,418㎡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삼국시대, 645년(목탑 준공) |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에 있었던 신라 시대의 대규모 사찰. 한국 전근대 역사상 최대급이었던 80 m 가량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80 m면 현대로 치면 15층 아파트 두 배 높이인데 고려나 조선에서도 이것보다 높은 단일건물을 짓지 못했고, 천삼백여 년이 지나 한진빌딩(82 m, 1969년))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고 높이 건물이었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많이 있으나, 보통 황룡사라고 하면 아래에 서술하는 지금은 터만 남은 신라시대의 사찰 황룡사(皇龍寺)를 가리킨다. 참고로 경주시 황용동 327번지에 있는 황룡사는 黃龍寺이니 한자가 다르다.
황룡사는 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거대한 9층 목탑과 함께 남아 있었으나[3], 몽골 제국의 침공(제3차 여몽전쟁) 때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숨어 본토를 방치하는 동안 가장 후방인 경상도 지역까지 유린당하는 통에 황룡사도 불탔고 이후 지금까지 터만 남아 황룡사지라고 불린다.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4] 중 하나인 곳. 사적 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 등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황룡사지(皇龍寺址).[5]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많이 있으나, 보통 황룡사라고 하면 아래에 서술하는 지금은 터만 남은 신라시대의 사찰 황룡사(皇龍寺)를 가리킨다. 참고로 경주시 황용동 327번지에 있는 황룡사는 黃龍寺이니 한자가 다르다.
황룡사는 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거대한 9층 목탑과 함께 남아 있었으나[3], 몽골 제국의 침공(제3차 여몽전쟁) 때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숨어 본토를 방치하는 동안 가장 후방인 경상도 지역까지 유린당하는 통에 황룡사도 불탔고 이후 지금까지 터만 남아 황룡사지라고 불린다.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4] 중 하나인 곳. 사적 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 등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황룡사지(皇龍寺址).[5]
2. 역사
2.1. 황룡사의 건설과 폐사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제작한 복원 영상.
황룡사가 건재하던 당시의 모습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6]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 서라벌 중심[7], 기존의 시가지와 경주 월성 기준으로는 약간 동쪽에 새로 왕궁을 지으려고 했는데 공사 도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현대의 조사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 땅은 오랜 옛날에 늪지였다. 이미 포화된 기존 서라벌 시가지 가까운 곳에 넓은 평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늪지를 메우려고 했던 것인데, 삼국사기 미추 이사금 원년(262) 봄 3월, 왕궁(경주 월성)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면 이미 진흥왕대 이전부터 이 인근에는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용이 사는 곳을 망가뜨리기를 주저했는데 결국 내린 결론이 궁전은 때려치고, 대신 용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인 부처님을 모시는 장대한 절을 세우는 것이었다.[8] 이 때부터 진흥왕은 17년간의 공사 끝에 황룡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건 공사는 진흥왕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완공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그후 574년 거대한 불상들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장육존상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천축의 아육왕[9]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분으로 석가의 삼존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배가 바다를 떠돌아 다니다가 신라 땅에 닿게 되었으며, 신라인들이 이걸 가지고 삼존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0,198분·철 35,007근이, 두 협시보살상은 철 12,000근·금 10,136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육존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한 재료의 종류와 양 같은 부분이 고대사 기록치고는 꽤 세세하게 써있기에 일단 신라에서 이 시기에 저 정도의 금속으로 큰 불상들을 만든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 재료를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아소카왕은 기원전에 살았던 인물로 두 사건의 시간차는 대충 잡아도 800년 이상(…). 아마도 불교적인 정통성을 위한 픽션이었을 것이다. 혹시나 사실이라면 아소카왕이나 그의 후손은 정말 흠좀무스러운 대인배(…)다. 이때 만들어진 삼존불상의 높이는 장육존상이란 이름대로 1장 6척, 약 4~5 m의 큰 불상들이었으며, 그 빼어난 조형 때문에 '신라삼보(3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아무튼 이 불상들을 모시기 위해 이후 진평왕 6년(584)에 새로운 금당[10]을 짓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승려 자장의 건의이 건의하여[11][12] 그 유명한 9층 목탑을 지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93년이다. 신라삼보는 9층 목탑과 장육존상,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진평왕의 천사옥대[13]였다고 하는데, 황룡사는 그 2가지를 가지게 된 것.[14]
목탑은 백제에서 불러온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15]와 신라의 김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승려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수십알을 황룡사 목탑의 기둥에 봉안하였다.[16]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이다.[17]이 9층 중 5층의 응유는 신라가 백제를 낮게 지칭하였다고 여겨지는 말이며[18] 4층 탁라는 제주도, 9층 예맥은 고구려를 뜻한다. 설마 백제 사람 아비지는 이 탑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도와준 것인가!
참고로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실제같은 소나무 그림으로 새들을 학살했다는 동물학대의 현장이 황룡사 금당의 벽이다.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는데, 이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신라의 왕들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와서 고승이 주최하는 백고좌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였다. 즉 황룡사는 신라와 신라 불교계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절이었다. 추가로 황룡사엔 2개의 3층석탑석탑이 더 존재한다. 황룡사지 3층 석탑이라 불리고 있지만 크게 존재감이 있진 않다.
목탑과 금당, 장육존상은 통일신라를 거쳐 신라가 멸망한 이후로도 경주[21]의 랜드마크로 계속 존재하였으나, 결국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입에 의하여 불타고 그 후 다시는 짓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에 저술된 <동경잡기>에는 "오직 장륙상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볼 수 없다. 1976년 황룡사지 발굴 때 장육존상 머리의 나발이 4개 달린 파편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나발은 쉽게 말해 불상의 머리카락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2] 장육존상이 크고 아름다운 불상이었던만큼 나발도 비례해서 상당히 큰데, 장육존상의 나발이 맞다면 신라삼보 중 유일하게 일부분이라도 현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발 파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출토 나발로 추정복원한 장육존상의 머리가 전시되고 있다.
목탑 중건 이후 경덕왕 13년(754)에 구리 49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황룡사 대종을 종루에 달았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전통종 가운데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 근이라는 점을 보면 성덕대왕신종의 4배 되는 엄청난 크기다. 이것도 결국 몽골이 침입했을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대종천은 이 종을 떼어 가져가던 몽골군이 종을 빠뜨린 곳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파도가 거센 날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들린다고...[23]
2010년대에 경주시 근처의 바다에서 2 m가 넘는 종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기사 결국 찾지 못했다.
2.2. 황룡사가 다시 중건되지 못한 이유
원래 목조 건축은 불타버렸으면 다시 짓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근성을 느끼게 하는 백담사도 불타면 다시 짓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동아시아 고건축물들은 목재로 지어졌다는 특성과 및 변변한 화재진압기구가 없다는 시대적 상황, 피뢰침[24]이 없어 벼락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화재에 취약해서 화재 후 다시 중건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고대 시대의 목탑이 많이 남아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여러 차례 중건한 사례가 많다.
황룡사도 같은 상황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경우에는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갖은 수난을 당했고 결국 여러 번 다시 지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금당)을 무너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목탑의 수난사를 자세하게 적는다면, 처음 지어진 이후 53년 째 되던 해 즉 효소왕 6년(698)에 벼락에 맞았지만, 피해는 미약했고 성덕왕 17년(718)엔 지진으로 비가 샐 정도의 피해가 생겨 1년 반 정도의 보수공사를 했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나면서 문성왕(839~856) 대에 동북쪽으로 탑이 심하게 기운 상태에서 경문왕 8년(868)에 벼락을 맞아 다시 보수공사를 했다.신라판 피사의 사탑
그로부터 다시 82년이 지난 고려 광종 5년(954)때엔 벼락으로 목탑 자체가 소멸, 결국 신라 창건기의 목탑은 지어진 지 300년을 좀 넘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후 여요전쟁도 있고 해서 바로 복구되지는 못했고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012년 현종(고려) 때 다시 재건을 시작했는데, 현종의 할머니가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로, 현종 본인이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졌다는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사는 9년만에 완료했고 이후에도 정종 2년(1035), 헌종 1년(1095)에 보수공사를 하였고 마지막 보수공사가 끝난지 142년 후 고종 25년(1238)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최종적으로 소실되어 그 후엔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황룡사 목탑에 보관되어 있던 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큰 보수공사가 이루어 진 것만 따져도 5번이나 되고, 한 번 소실되어 다시 재건된 경우도 있으니 시간과 재력 그리고 의지만 있다면 다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 침입 후의 원 지배기, 그리고 대대적인 왜구 침입으로 인한 혼란스런 시대상황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불탔어도 미처 재건을 못하던 시기였다. 하물며 고려 건국 후 과거의 영화를 잃고 쇠락한 지방 도시였을 뿐인 경주의 큰 사찰을 복원할 여지는 없었다. 거기에 신라 때부터 왜구가 창궐하던 경주 인근은 고려말 왜구의 준동에 쉽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서 유교적 왕도정치를 내걸고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불교 자체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 건축의 큰 방향 역시 실용적이고 검소한 분위기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러한 거대한 불교 건축물의 중건을 국가적인 역사로 삼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남아있는 거대 사찰들 역시 유지되고 재건될 수는 없었다. 근성의 백담사 같은 경우에는 중소 사찰이며, 산중 사찰이었으니 명맥이 이어질수 있었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사찰이었던 흥왕사[25]나, 개경에 장대한 5층 목탑을 가지고 있었던 광통 보제사[26], 조선왕사라고도 불렸던 회암사[27] 같은 다른 거대사찰들은 모두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파괴된 후 명맥이 끊겨버렸다.[28] 이중 회암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한데, 태조 이성계의 비호 아래 무학대사가 거주했고 후에 태조 자신이 태종 이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준 후 말년에 기거해서 사실상 왕실원찰이었다. 그럼에도 유생들의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을 볼 때 남아있었다 한들 이 시점에서 퇴락한 지방의 일개 거찰에 불과한 황룡사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황룡사도 같은 상황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경우에는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갖은 수난을 당했고 결국 여러 번 다시 지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금당)을 무너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목탑의 수난사를 자세하게 적는다면, 처음 지어진 이후 53년 째 되던 해 즉 효소왕 6년(698)에 벼락에 맞았지만, 피해는 미약했고 성덕왕 17년(718)엔 지진으로 비가 샐 정도의 피해가 생겨 1년 반 정도의 보수공사를 했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나면서 문성왕(839~856) 대에 동북쪽으로 탑이 심하게 기운 상태에서 경문왕 8년(868)에 벼락을 맞아 다시 보수공사를 했다.
그로부터 다시 82년이 지난 고려 광종 5년(954)때엔 벼락으로 목탑 자체가 소멸, 결국 신라 창건기의 목탑은 지어진 지 300년을 좀 넘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후 여요전쟁도 있고 해서 바로 복구되지는 못했고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012년 현종(고려) 때 다시 재건을 시작했는데, 현종의 할머니가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로, 현종 본인이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졌다는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사는 9년만에 완료했고 이후에도 정종 2년(1035), 헌종 1년(1095)에 보수공사를 하였고 마지막 보수공사가 끝난지 142년 후 고종 25년(1238)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최종적으로 소실되어 그 후엔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황룡사 목탑에 보관되어 있던 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큰 보수공사가 이루어 진 것만 따져도 5번이나 되고, 한 번 소실되어 다시 재건된 경우도 있으니 시간과 재력 그리고 의지만 있다면 다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 침입 후의 원 지배기, 그리고 대대적인 왜구 침입으로 인한 혼란스런 시대상황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불탔어도 미처 재건을 못하던 시기였다. 하물며 고려 건국 후 과거의 영화를 잃고 쇠락한 지방 도시였을 뿐인 경주의 큰 사찰을 복원할 여지는 없었다. 거기에 신라 때부터 왜구가 창궐하던 경주 인근은 고려말 왜구의 준동에 쉽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서 유교적 왕도정치를 내걸고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불교 자체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 건축의 큰 방향 역시 실용적이고 검소한 분위기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러한 거대한 불교 건축물의 중건을 국가적인 역사로 삼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남아있는 거대 사찰들 역시 유지되고 재건될 수는 없었다. 근성의 백담사 같은 경우에는 중소 사찰이며, 산중 사찰이었으니 명맥이 이어질수 있었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사찰이었던 흥왕사[25]나, 개경에 장대한 5층 목탑을 가지고 있었던 광통 보제사[26], 조선왕사라고도 불렸던 회암사[27] 같은 다른 거대사찰들은 모두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파괴된 후 명맥이 끊겨버렸다.[28] 이중 회암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한데, 태조 이성계의 비호 아래 무학대사가 거주했고 후에 태조 자신이 태종 이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준 후 말년에 기거해서 사실상 왕실원찰이었다. 그럼에도 유생들의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을 볼 때 남아있었다 한들 이 시점에서 퇴락한 지방의 일개 거찰에 불과한 황룡사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3. 발굴과 연구 성과
3.1. 황룡사지의 정리와 도굴
황룡사가 있었던 터인 황룡사지는 폐사 이후 거의 천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폐허가 되어 약 100여 동의 민가가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의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전국에 있는 한국 유적에 대해 답사를 하였고, 1930년에는 황룡사를 답사한 뒤 그 가람의 배치를 1탑 1금당식이라고 잘못 추정하였다.[29]
광복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1960년대 초반에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이러한 민가로 인한 훼손을 걱정하였고, 정부를 촉구해서 이러한 민가들을 매입하고 헐어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황룡사 목탑지의 정 가운데에 있던 거대한 심초석[30]과 그것을 덮고 있던 큰 장방형 뚜껑돌이 민가 담장의 일부분으로 쓰이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민가를 철거한 것은 좋았지만, 이 때문에 도굴꾼들의 도굴에 방해되던 장애물도 사라지게 된 것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탑이라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31]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알고 있던 도굴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도 전에 심초석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고는 심초석 내의 사리공에 있던 사리구를 훔쳐가게 된다. 아 망했어요!도둑 클래스는 학자보다 민첩성이 좋다![32][33]
1964년의 도난 사건 직후 황수영 교수는 당시 유명하던 골동품업자에게 어떤 사리구 감정을 의뢰받았는데, 그것이 아마도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황룡사 목탑의 사리구는 영영 못 찾는 줄 알다가 2년 후인 1966년 9월에 그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도 털다가 미수로 그치고 붙잡히게 된다. 범인 중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직 수위가 있었다.(...) 경찰이 여죄를 추궁하던 중에 황룡사도 털었다는 정황을 알게되어 결국 황룡사 사리구를 회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는 재벌도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34]
다만 되찾은 것은 사리구 중 사리와 사리함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로, 사리와 사리함은 지금도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사리장엄구과 그 안의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게 되었다. 아무튼 사리구 중에는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이 있었고,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외함, 내함이 있었다.[35]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있었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은 부식이 심해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지만, 기록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내함의 3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중건과 수리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가 적혀 있다. 바로 그 찰주본기에 9층 목탑의 높이와 수리 내력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찰주본기
광복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1960년대 초반에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이러한 민가로 인한 훼손을 걱정하였고, 정부를 촉구해서 이러한 민가들을 매입하고 헐어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황룡사 목탑지의 정 가운데에 있던 거대한 심초석[30]과 그것을 덮고 있던 큰 장방형 뚜껑돌이 민가 담장의 일부분으로 쓰이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민가를 철거한 것은 좋았지만, 이 때문에 도굴꾼들의 도굴에 방해되던 장애물도 사라지게 된 것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탑이라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31]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알고 있던 도굴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도 전에 심초석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고는 심초석 내의 사리공에 있던 사리구를 훔쳐가게 된다. 아 망했어요!
1964년의 도난 사건 직후 황수영 교수는 당시 유명하던 골동품업자에게 어떤 사리구 감정을 의뢰받았는데, 그것이 아마도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황룡사 목탑의 사리구는 영영 못 찾는 줄 알다가 2년 후인 1966년 9월에 그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도 털다가 미수로 그치고 붙잡히게 된다. 범인 중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직 수위가 있었다.(...) 경찰이 여죄를 추궁하던 중에 황룡사도 털었다는 정황을 알게되어 결국 황룡사 사리구를 회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는 재벌도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34]
다만 되찾은 것은 사리구 중 사리와 사리함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로, 사리와 사리함은 지금도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사리장엄구과 그 안의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게 되었다. 아무튼 사리구 중에는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이 있었고,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외함, 내함이 있었다.[35]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있었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은 부식이 심해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지만, 기록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내함의 3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중건과 수리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가 적혀 있다. 바로 그 찰주본기에 9층 목탑의 높이와 수리 내력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찰주본기
9층탑은 절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 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
3.2. 본격적인 발굴
이후 69년에 1차례 소규모 발굴 시도가 있었지만, 충분하지는 못했다. 결국 문화재연구소가 출범한 이후인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황룡사의 가람배치와 4 만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황룡사가 일제강점기의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절이었으며, 금당이 하나가 아니라 3개였다는 사실이나 회랑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참고로 발굴 당시 황룡사에서 출토된 기와가 발굴사무소 옆에 가득 쌓여져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제발 개념 좀
황룡사의 사리구가 있던 심초석은 원래 발굴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주변에서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발굴단은 435 x 300 cm, 무게 28톤의 거대한 심초석을 들어 옮겨야 했다. 이를 위해 당시 한국에 3대밖에 없는 대한통운 포항지점 소속의 100t급 크레인을 동원해야 했다. 심초석이 있던 자리 아래에서는 금동 귀걸이나 청동 거울이 나왔다. 아마도 어떤 의식 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심초석의 남쪽에서 인골을 담은 항아리 등의 다른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골의 주인은 자장의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결국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참고로 인터넷에는 심초석 안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함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잘못된 기사에 의한 정보로 인한 것이다. 그 때 발굴단이 기자를 만나서 항의를 했었다는데 그 때 기자가 했던 말이 걸작이다. "기사 내용 20%만 맞으면 되는겁니다."[37]
황룡사의 치미. (높이 186 cm) 출처
유물로는 높이 20.1 cm의 금동불입상과 높이 8.3 cm의 금동보살 불두(佛頭) 등도 있으며, 측면에 용을 새긴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이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다. 그리고 높이 186 cm, 폭 105 cm에 이르는 거대한 치미(망새 기와)도 대표적인 발굴 유물. 이 치미란 것은 전통 목건물의 지붕 양 끝에 올라가는 장식용 특수기와로, 건물의 크기에 맞게 만들어지기에 황룡사의 금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38]
발굴된 기와의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려 배치한 것은 그 유례를 살펴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가람
황룡사의 담장 안의 규모는 동서 288m, 남북 281m로 담장 안의 면적은 80,928㎡이며, 불국사의 8배 정도 된다. 가람 배치(절의 건물 배치)는 1탑식 가람배치(탑 하나에 금당 하나)에서 시작하여 1탑 3금당식으로 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쉽게 이야기 하면 목탑 하나에 부처가 있는 건물을 3개를 배치했다는 것.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특이한 형태다.
가람배치. 남문3칸,[39] 중문5칸, 목탑7칸, 금당9칸 강당 11칸이 일렬로 있으며, 점차 넓어지는 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남문은 이 배치도에 없으니 찾아봐야 헛수고다.
가람배치. 남문3칸,[39] 중문5칸, 목탑7칸, 금당9칸 강당 11칸이 일렬로 있으며, 점차 넓어지는 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남문은 이 배치도에 없으니 찾아봐야 헛수고다.
4.1. 중문
정면 5칸 23.52 m, 측면 2칸 14.2 m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부의 3칸은 출입을 위한 대문을 달았고, 양쪽의 좁은 협칸은 금강역사상을 놓앗던 것으로 생각된다.
4.2. 황룡사 금당과 강당
사실 황룡사의 중심은 목탑이 아니라 정면 9칸 측면 4칸[40]의 거대한 중앙 금당이다. 정면 51.7 m 측면 26.7 m에 1,384 ㎡(419평) 면적을 가진 이중기단 위에 배치했으며 주변 1칸의 툇간(차양칸)은 아래 기단 위에 놓여져 있다. 툇간을 포함하면 정면 11에 측면 6칸이다. 아무래도 목탑보다는 이쪽이 더 빨리 지어지고 의미가 더 중요한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뭐 루저는 그냥 웁니다. 억울하면 금당도 높이 81 m로 짓던가 182 cm의 거대한 치미는 이 건물의 것으로 추정된다.
양 쪽에는 동, 서금당이 있었는데, 서금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41]에 이중기단, 툇간이 달린 형식으로 추정된다. 서금당과 동금당에서는 불단이나 대좌가 발견된 적이 없다. 불상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을 그린 그림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모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금당은 이보다 커서 정면 9칸에 측면 6칸이었으며 이중기단에 차양칸 역시 있었지만, 후대에 정면 7칸 측면 4칸에 기단도 단층으로 축소가 되었다. 균형을 위해 축소했을 수도 있다.
중앙의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다. 원래 강당은 정면 11칸으로 정면은 금당보다 넓지만, 측면은 같은 4칸에 좀 더 짧았다. 그러나 후대에는 서쪽을 잘라내서 9칸 4칸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람배치도에서 세어 보고는 "11칸이 아니라 9칸인데?"라고 따지지 말자.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러 고승의 강연과 왕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역사적인 중요성은 금당보다도 더 높다고도 할 수 있다.
복원안을 보면 주로 중층 형태의 금당이 대부분이었는데 현재까지 나온 황룡사 복원 계획에 보면 단층형태의 금당 복원안이 제시되어 있다. 좀 더 논의되어야 할 점이다. 관련 포럼에서도 단층, 중층 문제에 대한 답을 못내리고 논쟁이 있었다.
양 쪽에는 동, 서금당이 있었는데, 서금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41]에 이중기단, 툇간이 달린 형식으로 추정된다. 서금당과 동금당에서는 불단이나 대좌가 발견된 적이 없다. 불상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을 그린 그림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모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금당은 이보다 커서 정면 9칸에 측면 6칸이었으며 이중기단에 차양칸 역시 있었지만, 후대에 정면 7칸 측면 4칸에 기단도 단층으로 축소가 되었다. 균형을 위해 축소했을 수도 있다.
중앙의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다. 원래 강당은 정면 11칸으로 정면은 금당보다 넓지만, 측면은 같은 4칸에 좀 더 짧았다. 그러나 후대에는 서쪽을 잘라내서 9칸 4칸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람배치도에서 세어 보고는 "11칸이 아니라 9칸인데?"라고 따지지 말자.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러 고승의 강연과 왕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역사적인 중요성은 금당보다도 더 높다고도 할 수 있다.
복원안을 보면 주로 중층 형태의 금당이 대부분이었는데 현재까지 나온 황룡사 복원 계획에 보면 단층형태의 금당 복원안이 제시되어 있다. 좀 더 논의되어야 할 점이다. 관련 포럼에서도 단층, 중층 문제에 대한 답을 못내리고 논쟁이 있었다.
4.3.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한 변이 22.2 m에 이르는 약 490 ㎡(150평 규모)정도의 상당히 넓은 바닥 면적을 봐도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탑의 기초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단은 작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붉은 색의 진흙을 다지는 식으로 2 m 높이를 조성하였다.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있어 정면 7칸 측면 7칸을 만들고 있다.
이 목탑의 높이야말로 이 황룡사 최대의 떡밥인데, 이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신라의 길이를 재는 단위가 황룡사에 대해 기록한 시기와 황룡사 중건 당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칸 길이에서 파악된 조영(造營 건물을 완공) 당시의 길이단위(척수)인 고(구)려척/동위척(東魏尺)으로 계산하면 81 m 정도가 되는데, 이는 높게 잡으면 현대식 빌딩 약 20층 높이를 넘는 셈이다. 하지만 황룡사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함의 탑지(塔誌) 기록 당시[42]에는 당나라의 척수인 당척(唐尺)을 썼는데, 이것에 의하면 약 53.45 m, 상륜부(上輪部)[43]까지 합하면 약 66.70 m 정도다.
조영당시의 기록으로 225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면 문제가 없겠으나, 기록 당시에 주로 쓰이던 척수는 당척이고 과연 탑의 높이를 당대에서 200년 전에 통용되던, 고려척으로 높이를 기록했느냐인데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려척이 유력한 이유는 찰주본기의 높이를 기록하는 내용이 중수의 내용에서 등장하지 않고 건탑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기록된 점과 삼국유사나 찰주본기에 인용된 사중기의 내용이 동일한 점으로 보아, 그냥 건립 초기의 225척을 베껴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중수를 해도 높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황룡사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기록과 함께 크게 3번 정도 탑이 새롭게 다시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1차, 대대적인 중수로 모습이 크게 바뀌었을 2차, 고려시대에 송척을 기준으로 새롭게 지어진 3차 정도로 기본적인 양식을 유지했을 수도,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다만 고려시대 송척 기준으로 새로 세워진 목탑의 경우 중수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구조적으로 상당히 취약하고 문제가 많았던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양식도 상당히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이유인지 목탑 복원 계획에서도 고려시대의 양식(이 확정적이거나 한 것은 아닌 시기별 목탑)은 일찌감치 논외가 되었다.
또한 고건축에서 심초석의 주칸길이의 척도(고려척)와 상부 건축물을 다른 척수로 짓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려척으로 한다는 것이 유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척으로 조영된 줄 알았던 건축물들이 당대척으로 건립됐다는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있어서 여러모로 복잡한 문제.
지금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잉쉬앤의 포어꽁쓰(불궁사) 5층 목탑의 높이가 67 m정도며 일본 토지의 목탑이 55 m, 지금 사라진 백제 미륵사의 목탑이 55~60 m 수준, 역시 사라진 고려 최대였던 보제사 목탑이 60 m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황룡사 목탑도 60 m 정도일 수도 있다. 반면 여러모로 미륵사보다 더 웅장했던 황룡사 건축물의 규모[44]나 유물들, 이례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탑이었을 점들을 생각하면 81 m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견이 좀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81 m로 인정되고 있다.
이 목탑의 높이야말로 이 황룡사 최대의 떡밥인데, 이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신라의 길이를 재는 단위가 황룡사에 대해 기록한 시기와 황룡사 중건 당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칸 길이에서 파악된 조영(造營 건물을 완공) 당시의 길이단위(척수)인 고(구)려척/동위척(東魏尺)으로 계산하면 81 m 정도가 되는데, 이는 높게 잡으면 현대식 빌딩 약 20층 높이를 넘는 셈이다. 하지만 황룡사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함의 탑지(塔誌) 기록 당시[42]에는 당나라의 척수인 당척(唐尺)을 썼는데, 이것에 의하면 약 53.45 m, 상륜부(上輪部)[43]까지 합하면 약 66.70 m 정도다.
조영당시의 기록으로 225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면 문제가 없겠으나, 기록 당시에 주로 쓰이던 척수는 당척이고 과연 탑의 높이를 당대에서 200년 전에 통용되던, 고려척으로 높이를 기록했느냐인데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려척이 유력한 이유는 찰주본기의 높이를 기록하는 내용이 중수의 내용에서 등장하지 않고 건탑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기록된 점과 삼국유사나 찰주본기에 인용된 사중기의 내용이 동일한 점으로 보아, 그냥 건립 초기의 225척을 베껴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중수를 해도 높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황룡사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기록과 함께 크게 3번 정도 탑이 새롭게 다시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1차, 대대적인 중수로 모습이 크게 바뀌었을 2차, 고려시대에 송척을 기준으로 새롭게 지어진 3차 정도로 기본적인 양식을 유지했을 수도,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다만 고려시대 송척 기준으로 새로 세워진 목탑의 경우 중수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구조적으로 상당히 취약하고 문제가 많았던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양식도 상당히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이유인지 목탑 복원 계획에서도 고려시대의 양식(이 확정적이거나 한 것은 아닌 시기별 목탑)은 일찌감치 논외가 되었다.
또한 고건축에서 심초석의 주칸길이의 척도(고려척)와 상부 건축물을 다른 척수로 짓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려척으로 한다는 것이 유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척으로 조영된 줄 알았던 건축물들이 당대척으로 건립됐다는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있어서 여러모로 복잡한 문제.
지금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잉쉬앤의 포어꽁쓰(불궁사) 5층 목탑의 높이가 67 m정도며 일본 토지의 목탑이 55 m, 지금 사라진 백제 미륵사의 목탑이 55~60 m 수준, 역시 사라진 고려 최대였던 보제사 목탑이 60 m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황룡사 목탑도 60 m 정도일 수도 있다. 반면 여러모로 미륵사보다 더 웅장했던 황룡사 건축물의 규모[44]나 유물들, 이례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탑이었을 점들을 생각하면 81 m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견이 좀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81 m로 인정되고 있다.
4.3.1. 외형
경주 남산 탑골에 신라시대 새겨진 부조로 추정되는 대한민국의 보물 201호 마애조상군이 있는데 이곳에 신라시대 당시의 황룡사 9층 목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조가 있다. 이를 새기기 위해 참조할 만한 실제 9층목탑은 황룡사가 원신라 영역에서는 유일하기 때문에 자연히 남산에서 저쪽에 보이는 황룡사를 보고 새겼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곳은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신인사(神印寺)가 위치해 있던 장소. 신라시대 탑의 기본적 모습과 장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자료.
2011년 발견된 신라시대 대구 마애암각군에도 9층탑의 부조가 있는데 역시 황룡사 9층 목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옥개석을 올린 석탑의 형상에 가깝다는 것이 차이점.
고려 광종 시기에 만들어진 불일사 석탑에서 출토된 9층 청동탑도 눈여겨 볼만 하다. 황룡사 9층목탑이 벼락을 맞아 한 차례 소실된 것이 945년이고 불일사는 951년에 만들어져 시기 차이가 얼마 나지 않고, 왕건의 혼인동맹 정책으로 경순왕이 광종의 매형으로 개경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명순성왕후를 위해 세운 불일사를 세울 때 경순왕 부부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정황상 이 9층탑이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양을 본떴을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이 청동탑과 황룡사 찰주본기에 기록된 목탑의 비율이 어느정도 들어맞는것을 보면(상륜부의 비율이나 기단길이:목탑높이의 비율 등) 황룡사가 실제 모델일 가능성도 높다.
5. 관련 문학
5.1. 김극기의 시
層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穴果蟻穴轉溟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트이네
굽어보니 동도에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황룡사 9층 목탑이 층을 가진 누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시이다. 또한 사다리의 배치에 관해서도 어느정도 추정 가능하게 만든다. 실제로 황룡사지에서는 남쪽에서 계단 3개소 북동서에서 1개소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5.2. 등황룡탑
고려 중기의 승려 혜심이 황룡사 목탑에 올라서 쓴 등황룡탑(登皇龍塔).
一層看了一層看
步步登高望漸寬
地面坦然平似削
殘民破戶平堪觀
한층 다보고 또 한층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지면은 깎은 듯 평평한데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역시 누각이란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층한층 올라갈 수 있는 적층구조임도 알 수 있다. 혜심(1178~1234년)은 고려 고종 때 인물이고 백성들에 연민을 느꼈다는 걸 알 수 있다.
6. 복원 논란
6.1. 관련 연구
황룡사 발굴 이후로, 여러 연구자들이 9층 목탑에 대해 각기 다른 복원안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것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장기인 : <황룡사 9층목탑 복원공사> 삼성건축설계사무소, 1976
- 김정수·박일남 : <황룡사 9층목탑의 형태 추정에 관한 연구-문화재와 작도법을 중심으로> 건축 제25권 제102호, 대한건축학회, 1981
- 김동현 : <皇龍寺の建築計劃に關する硏究> 동경대학 박사학위논문, 1992
- 김인호 : 연대 미상
- 권종남[46] : <황룡사 9층탑> 미술문화, 2006
- 북한 : 조선력사박물관 소장 복원 모형
- 다음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있는 장기인의 도면으로 보인다. 위에 나와있는 장기인의 안과 유사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좀 차이가 있다.도면1
물론 이러한 연구들은 기존의 자료와 목탑을 참고했지만 사실 결코 역사 속의 9층 목탑의 모습과 같다는 확증은 없다. 다만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 것을 뽑은 것일 뿐이다. 잠정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90년대에 나왔던 김동현의 안이다.
김동현의 안이 채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후지시마 등 다른 연구자들의 안은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을 기초로 해서 9층 목탑을 '연속 구조'[47]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김동현의 안은 '적층 구조'였기 때문. 팔상전이 조선시대라서 그 시대가 상당히 차이나기 때문에 연속 구조 방식이 맞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일본의 고대 목탑은 그와 대비되는 적층 구조[48]다. 또한 연속 구조 방식은 구조적으로 약 하기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수십 년을 버텼다'는 기록과 상충되고, 탑이 윗층으로 갈 수록 심하게 줄어들기 때문에[49] 다소 모양이 빈약해보이는 약점이 있다.
이러한 김동현의 안을 바탕으로, 2000년 들어서 권종남[50]이 좀 더 상세한 안을 내놓았다. 백제시대의 구조 방식인 하앙[51]과 귀틀[52] 등을 추가하여 보다 합리적인 구조를 제시한 것.[53]
권종남의 안
본 문서의 맨 위에 있는 복원도는 김동현의 안을 기반으로 한 모형으로 보이며, 단청 등의 세부적인 장식 요소 등은 확정되지 않았다. 목탑의 복원 계획은 당초 권종남의 안을 바탕으로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하앙구조는 삭제되었고 김동현의 안과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살짝 차이가 있는 한국전통문화대의 복원안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문의결과 목탑 복원안은 아직 확정이 아니고 좀 더 의견 수렴과 연구가 필요하며 목탑 복원 모형의 실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문화재청의 답변과 관련 인터뷰가 있었다.
경주의 <신라 왕궁 영상관>에서 2013년부터 상영하기 시작한 영상에 등장한 황룡사의 모습. 여기에서는 남문과 주변 건물이 추가로 복원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 영상에 등장하는 남문은 기존에 알려졌던 것과 달리 정면 5칸이고, 동서의 종각은 중층으로 달라져 있다. 금당의 1층은 벽이 없이 개방된 모습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점이 단청 등과 더불어 학술적 연구 결과가 달라져 변한 것인지는 의문...
다만 대중을 위한 CG 영상이다보니 정확한 고증대로 했다기 보다는 일단 크고 아름답게를 모토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문의 경우 5칸이 최신 연구를 반영한 형태이나, 금당처럼 중층인지 단층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2가지 복원안 모두 존재한다. 그 중에서 크고 아름다운 형태인(어차피 CG니깐...) 중층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서의 종각[54]은 초기에는 중층의 종각이 당시의 흐름이었고, 발굴결과 고려시대에 단층으로 개수된 흔적이 보인다. 현재 황룡사 복원 사업은 모든 권역이 완비되고 가장 융성했던 통일신라 경문왕 대의 황룡사를 모델로 하기 때문에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황룡사 금당이 단층/중층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기에 복원 포럼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평면 규모의 비교를 통한 비례체계 적용시 중문과 금당은 중층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평면 크기를 보아 중층일 가능성이 높다는것.
실제로 2013년 중문 연구중 자문회의가 열렸을때, 대부분의 자문위원들이 중층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6.2. 복원 계획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으로 대표되는 정부와 관할 지자체인 경주시는 황룡사 복원사업을 포함한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개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약 2035년 정도를 목표로 황룡사를 복원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 월성 복원 요청이나 월정교 복원 등도 이에 따른 것.
대체적으로는 경주시의 새로운 볼거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찬성 의견이 많으나, 다만 황룡사 복원을 위한 자료가 구체적인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리수라는 의견 역시 많다. 복원할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기는 것이 문화재를 가장 잘 복원하는 것이니 복원해봐야 의미가 없다란 의견. 복원을 해도 다른 곳에다가 해야 한다는 의견. 연구도 제대로 안 하고 섣불리 복원하지 말라는 의견. 복원해봐야 높이 등을 빼면 거의 상상이니 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중건이다라는 의견 정도로 좁혀질 수 있다.[55] 아무튼 현재로써는 혼란의 극. 아무튼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경주시 세계문화엑스포 공원 내의 경주타워가 황룡사 9층탑의 실루엣을 재현하고 있다. 정확히는 남산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를 차용해 만든 것.
대체적으로는 경주시의 새로운 볼거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찬성 의견이 많으나, 다만 황룡사 복원을 위한 자료가 구체적인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리수라는 의견 역시 많다. 복원할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기는 것이 문화재를 가장 잘 복원하는 것이니 복원해봐야 의미가 없다란 의견. 복원을 해도 다른 곳에다가 해야 한다는 의견. 연구도 제대로 안 하고 섣불리 복원하지 말라는 의견. 복원해봐야 높이 등을 빼면 거의 상상이니 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중건이다라는 의견 정도로 좁혀질 수 있다.[55] 아무튼 현재로써는 혼란의 극. 아무튼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경주시 세계문화엑스포 공원 내의 경주타워가 황룡사 9층탑의 실루엣을 재현하고 있다. 정확히는 남산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를 차용해 만든 것.
최종복원안이 확정되어 공개된 목탑 상륜부 1/20 모형.
최종복원안에 따른 1/20 단면 모형.
고려되었던 5안 중에서 결국 김동현의 안으로 확정되었다. 문화재청의 답변에 따르면 권종남 교수의 안은 우선 개인 논문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신라의 요청으로 백제 장인인 아비지가 건설에 참여한 목탑이지만, 현재까지 남은 신라양식의 건축물에서 하앙구조를 찾아볼 수 없고, 하앙은 그저 추녀결구를 받치는 구조지 전체적인 뼈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 요점이다.
참고로 한국 고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봉정사 극락전이고, 그나마 고려시대 건물이다. 신라시대 당대 건축물이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드는 설명으로는 부족해보인다. 또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백제 장인이 조영에 참여한 여러 일본의 목탑들은 거의 다 하앙공포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물론 황룡사는 분명히 층이 있는 건축물이었던 차이점이 있지만, 엄연히 실물 목탑, 심지어 찰편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앙 공포를 삭제한 것은 논란 거리다.
문화재청의 답변에 따르면 하앙 방식은 일본의 5층 목탑처럼 규모가 작을 경우에 가능하며 황룡사처럼 대형일 경우에는 구조가 미끄러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다만 복원 계획안을 보았을 때 구조 해석에 있어서 여러 방안과 양식의 구조 해석을 통해 현재 형태의 복원안이 마련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56]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윤관석 의원의 감사에 따르면 현재 복원모형을 제작중인 한국전통문화대의 경우 예정보다 4년이나 지난 시점에서도 모형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기관 대행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서 수의계약이 불가능한 산학협력단이 진행한 결과 내부 직원에게 하청을 주고, 그마저도 완성을 하지 못해 외부업체에 하도급을 줬다는 모양. 일단 감사 결과를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2016년 11월, 경주 역사 문화관이 개장되면서 1/10 모형 또한 공개되었다.
현재로서는 완벽한 자료 없이 복원하는 것은 안 하는 것 보다 못하다는 기조가 대세이다. 복원이 아니라 거의 재창조의 수준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7. 기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정복자에서는 한국의 불가사의로 나왔지만 안 닮았다(...).
- 단체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지 주차장을 만드는 등 여러가지 보완이 이뤄졌다. 혹은 황룡사 복원공사의 초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못보고 지나치지만 황룡사 서편에는 작은 절터가 존재한다. 쌍탑가람을 지닌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석탑지에는 인왕상이 조각된 기단부가 남아있다. 절의 이름은 불명이다.
8.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불교건축 및 생활 문화와 관련된 뛰어난 기념물과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 있다.[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신라 왕실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르며, 남산을 비롯해 수도 경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신라 문화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3] 사실 황룡사에는 목탑 말고도 작은 쌍탑지가 있다. 황룡사 뒷편에 있는데..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묻혔다. 2중기단을 갖춘 3층 석탑 2개가 존재하였다.[4]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허'라고 하였다. 석가모니 이전 부처 시대에 존재했던 빈 절터 7곳이란 뜻. 신라 입장에서 불교가 외래의 종교가 아니라 과거부터 (석가모니불을 따르진 않았지만) 믿어온 종교라는 종교적 프로파간다이다.[5] 이렇게 터만 남은 자리를 가리키는 접미사처럼 쓰이는 '지'를 땅 지(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터 지(址)이다.[6] 문화유산기술연구소의 복원도와 김영택의 복원 펜화.[7] 신라왕경을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명활산(明活山), 서쪽 선도산(仙桃山), 북쪽 금강산(金剛山), 남쪽 남산(南山)의 정상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교차점에 놓이게 하여 왕경의 중심에 위치하게끔 고안되어 있다.[8] 당시 진흥왕의 시기는 백제, 고구려와 전쟁을 하던 시기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던 상황에서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만을 위한 새 궁궐을 계속 짓기보다는, 사찰을 짓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이는 국가의 안녕에 부처의 가호를 빈다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종무열왕 이전까지 신라 상대 당시의 왕은 곧 부처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했었기 때문에 굳이 왕궁이 아니라도 이런 장대한 사찰은 은근히 왕권의 신장 역시 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9] 인도 서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정복전쟁에 회의를 느끼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진흥시켰으며 불교의 화신처럼 여겨졌다.[10]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당. 쉽게 말해 부처상을 모시는 건물이다.[11] 삼국사기는 자장의 건의로 건립했다고 설명한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신인(神人)에게 "신라 여왕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주변에서 괴롭히는 것이니, 커다란 탑을 세우라"는 계시를 듣고는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건의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때는 643년인데, 겨우 2년 지나 645년에 황룡사 목탑을 세웠다고 하기에는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다. 우선 당시 미륵사나 정릉사 등을 보면 목탑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자장과 상관없이 탑을 염두에 두고 황룡사를 건설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황룡사 목탑과 같은 커다란 목건축물을 2년 만에 목재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 건조시켜 만든다는 것 역시 힘든 일이다. 훗날 고려시대에 탑을 재건하느라 7년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자장이 건의했다는 시기 이전부터 탑이 계획되었고 목재를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874년 보수공사 후 작성된 '황룡사 찰주본기'에도 자장 스님의 건의로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었다.[12] 2007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 수종의 변천' 논문에 의하면 고려 이전 삼국시대의 건축물들은 소나무보다 참나무속 나무로 거의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한국 건축의 대표 목재라 함은 조선시대 이미지에 매몰된 것. 소나무보다 성장속도가 훨씬 빠른 참나무 숲이 고대에 무성했다면, 목재를 구하기가 현대에 금강송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쉬웠을 것이다.[13]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귀부)를 청하며 배례할 때 증표로 이것을 넘겨주었다고.[14] 신라의 삼보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로,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지 못하는 3가지 이유다." 뭐 사실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다.[15] 생몰년은 미상이다. 백제의 장인(匠人)으로 목탑 중건을 기술적으로 총괄하였다. 이름은 '아비(阿非)'이며 '지(知)'는 이름 뒤에 붙은 삼국시대의 존칭이다. 신라에서 백제에 보물과 비단을 주고 건탑(建塔) 기술자를 요청하였는데 아비지가 발탁되었다고 한다.[16] 원래 100개를 가져와서 황룡사탑의 기둥과 통도사, 태화사에 나눠서 안치했다.[17]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1층은 왜국(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 이를 구한(九韓)이라고 한다.[18] 백제는 응준(鷹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응준과 응유(鷹遊)는 뜻이 통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9] 아니나 다를까, 삼국유사에는 "아비지가 신라 선덕여왕의 청에 응하여 신라에 가서 탑의 심주(心柱, 거대한 중심기둥)을 세우던 날 밤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꾼 후 그가 탑 역사에서 손을 떼려 하였더니 문득 천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어둑한 속에 한 노승이 금전문(金殿門 : 금당의 문)에서 나와 심주를 세우고 이내 간 데 없었다. 결국 아비지는 맘을 고쳐먹고(포기하고)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라는 슬픈 전설이 있다. 심지어 아비지가 탑을 완공한 후에 백제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0] 반대로 삼국통일 의식이 통일(정복)을 일단 하고 난 뒤에 고백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그제서야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21] 당시에는 동경으로 개칭[22] 불상의 머리카락을 자세히 보면 한 가닥씩 묘사한 게 아니라 소라 모양으로 꼬여있는 게 수백 개 달려있는 모양인데 그걸 나발이라고 한다.[23] 이 전설은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느 마을 주민의 제보를 기초로 한 것인데, 1997년 해군에서 감포 앞바다 쪽을 조사를 해 보았으나 결국 발견되지는 않았고 허황된 전설로 결론내었다. 그러나 화재로 종이 녹은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가져갔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24] 피뢰침이 발명되려면 18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지대에 위치하거나 성당과 같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벼락에 제대로 맞아 박살나기 일쑤였다.황룡사 목탑이 80 m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약 중건할 경우 피뢰침뿐만 아니라 항공법에 따라 항공장애등도 탑 끝부분 첨탑과 중간지점인 40 m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는 수준이다.[25] 건물의 규모는 2,800칸 수준이었으며,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 ㎡에 이르렀는데, 이는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이다. 참고로 100% 복원될 시의 경복궁 면적이 34만㎡다. 크기도 크기지만, 화려하기도 해서 경내에는 은 427근으로 안을, 금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금탑이 있었다.[26] 개경 도심 한복판에 있었던 거찰로서 규모가 장대해서 건물채만도 1,000여채에 연못이 2개, 우물이 9개나 있었다. 5층 목탑의 높이는 60 m정도였다.[27][28] 회암사는 불교를 숭상했던 문정왕후의 비호로 일시적으로 번창되었지만 사후 유생들이 파괴해버렸다.[29] 황룡사가 백제의 아비지가 건설에 참여한 백제 양식의 사찰로 보고는 호류사, 시텐노지 처럼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계 사찰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이라고 속단한 것으로 보인다.[30] 건물의 중심 기둥(심주)을 받치던 돌[31]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함을 포함한 유물군.[32] 30톤 짜리 장방형 심초석 뚜껑돌을 기계 정비에 쓰이는 잭으로 들고는 가져갔다고 한다.[33] 삼국유사에는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탑이 있었을텐데 심초석 안을 들여다본 것을 보면 심주를 옮기는 방법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4] 가야금관 도굴 사주 의혹이 있던 재벌이고, 고미술품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려놓은 대한민국 원톱 재벌이란 소문. 실제로 이 그룹 창업주의 형이 석가탑을 털려다 실패한 도굴단으로부터 도굴한 장물을 취득한 혐의로 구속된 전과가 있었다.[35]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방함, 은합 등. 그러나 끝내 사리병과 사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36] 콘크리트로 올리게 되면 지하로 파들어가 기초공사를 해야 해서 목탑의 기단이 훼손된다.[37] 황룡사 발굴 단장이었던 조유전의 저서 "발굴 이야기"에 나온 이야기. 상당히 세세한 이야기가 쓰여있다.[38] 다만 한국에서 가장 큰 치미는 평양의 안학궁터에서 나왔으며 무려 2 m가 넘는다고 한다. ㅎㄷㄷ 하긴 고구려 궁궐 건물이 신라 사찰 건물보다 작으면 고구려 체면이… 백제도 황룡사에 맞먹는 규모의 미륵사가 있었다.[39] 전통 건축의 기본 단위. 쉽게 말하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공간이 1칸이다.[40] 외진이 9x4이며 내진이 7x2, 초석은 총 44개[41] 3칸이라는 자료도 있다. 확인바람[42] 경문왕의 시기인 873년[43] 금속으로 된 장식부분. 피뢰침처럼 생겼다.[44] 단, 절의 총 면적은 미륵사가 더 넓다.[45]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건축학자로, 당시 조선의 건축물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연구했다. 일제강점기의 손꼽히는 한국 건축 전문가였다. 경주 시가지에 대한 연구 등으로 이름이 높지만, 황룡사 터를 1탑 1금당식으로 잘못 추측한 것으로 한국 학자들에게 꽤 까이기도 했다. 본인도 자신의 책들에서 과오였다고 인정. 한국 건축에 대한 강한 옹호를 보여주는 학자이지만, 그 시기의 학자들이 그렇듯이 문장 사이 사이로 보이는 한국 민족에 대한 편견이 조금 불편하다. 저서 <韓の建築文化> 등은 번역되어 국내에도 출판. 대단히 오래 살았다. (1899-2002)[46] 2003년에 작고하였으며 2006년에 그간 연구를 모아 <황룡사 9층탑>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 나온 자료들은 대부분 그의 책에서 나온 것들.[47] 탑 전체를 큰 기둥들이 관통하여 지탱하고 있음.[48] 한 층씩 단절된 기둥을 쌓아서 만들어짐.[49] 체감률이 높다는 이야기.[50] 권종남은 2006년에 작고하였으며, 그 동안의 연구를 모아 <황룡사 구층탑>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51] 서까래 밑에 아래로 향하는 보를 추가로 사용하는 구조.[52] 통나무집처럼 목재를 쌓아 만드는 방법[53] 이를 통해 보다 세부적인 층간 연결방법이 설계되었으며, 중국 응현에 있는 불궁사 목탑처럼 내부에 암층(숨겨진 층)이 존재할 필요 없이 명쾌한 구조가 가능해졌다.[54] 한 건물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추정. 초석도 다르고 규모도 살짝 다르다.[55] 사실 한국에서는 복원이냐 중건이냐 단어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이지만, 영문으로 발표된 관련 자료에서는 대부분 Reconstruction을 쓴다고 한다. 사실상 대외적으로는 중건이라고 선전하는 것.[56] 다만 황룡사 9층 목탑건설에 정말로 백제계 장인이 참여했는지에 관련해서도 의문점이 많은편이다. 자세한건 아비지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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