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고구려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1)

Chung Park 2021. 9. 26. 01:42

지난 번 글 발해고를 통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추정해 보았다.  론강을 압록수, 즉 요수로 판단했을 때, 발해고 자료에 나타난 중국 사서 내용을 바탕으로 거리를 계산 한 바에 의하면, 국내성은 쥬네브 정도로 나타났고, 환도성은 Bern 또는  Fribourg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평양성은 스위스의 쥬리히가 아닌가 추정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추정 결과가 고구려 역사에서 나타나는 정황과 맞는지 아니면 틀리는지를 검증하는 글이다. 

 

국내성, 환도성은 고구려 초기 중국측과의 마찰로 인해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또한 평양성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과의 전쟁에서 언급되며, 고구려의 동천왕시기, 고국원왕 시기, 광개토태왕 시기, 장수왕 시기에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산라 진흥왕 시기와, 백제 성왕 시기에도 평양과 한성이 언급된다. 장안성은 양원왕 (552)때 장안성을 축조했고, 평원왕(586)때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다 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 상황에 따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를 감안할 때, 그리고 중국사와 관련하여 이들의 도시 위치가 제대로 추정되었는지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중국측의 이 시기에서의 정황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론강을 요수로 추정하는 필자의 추정은 관련 로마사의 검토도 있어야 한다. 단지 중국사 중 특히 오호십육국시대, 위진 남북조시대의 역사가 제대로 쓰였는지가 문제이다. 춘추필법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사와 견주어 보면 더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로마사도 춘추필법을 쓴  것으로 판단되지만, 우리의 혜안으로 가려낼 수밖에 없다. 

 

 

I. 고국천왕 시기 (179-197) 고구려와 중국상황을 고려한 고구려 위치 추정

 

六年 왕이 후한 요동 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184)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197)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후한 요동 태수가 침입해오자 동생 고계수(신대왕의 5번째 아들)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막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친정해 좌원(坐原)에서 그들을 무찔렀다. "

 

(자료 : 고국천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상, 펌글 참조)

 

고국천왕이 후한 요동태수의 군대와 싸워 이긴 연대가 184년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해이다. 후한 요동태수를 좌원에서 이긴 것과 황건적의 난이 후한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은 초기 광무제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 서술로 보아 역사가 의심되기도 한다.  왕망의 신나라 이후 2년에 걸친 현한과 유사하게 비교적 짧은 기간 (3-4대 정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야사학가 이중재선생은 후한이 고구려가 아닌가 판단했다. 197년 중국에서 난리가 나서 많은 사람이 투항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에서 더 서쪽으로 중국으로 진출하여 현주민들이 투항한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 보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것이다.

 

즉 고구려는 중국 본토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다. 프랑스의 론강 우측에 접한 것이다. 론강 좌측은 중국의 영역으로 판단되며, 이렇게 볼 때, 중국은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현 중공의 동북쪽으로 추정하는 고구려에게는 중국의 주민들이 난리를 피하여 동북쪽으로 이동한다 가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II. 산상왕 시기(197-227)의 고구려 상황을 고려한 국내성, 환도성, 장안성 위치 추정

 

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쌓다 (198) 

十三年冬十月 환도로 천도하다 (209)


二十一年秋八月 한인들이 투항해오다 (217) 

 

 

"둘째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넷째 동생인 연우가 형수인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산상왕으로 즉위하였다. 더불어 산상왕은 '형수인 왕후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택한다.

결국 발기는 요동으로 도망쳐 당시 그 곳에서 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 정권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당시 수도(국내성)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산상왕이 자신의 동생인 계수(罽須)를 시켜 반격하면서 발기는 참패했고 ..."

 

(자료 : 산상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상, 펌글 참조)

 

산상왕은 즉위초 198년 환도성을 쌓고, 209년에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산상왕은 즉위초 발기의 반란으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를 잃었다 했다. 그리고 요동태수 공손도와 함께한 발기의 반란군은 수도인 국내성을 공격했다고 했다. 따라서 환도성은 국내성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거나 위험하여 국내성 우측에 있는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성을 요수인 론강변에 있는 제네바로 추정하고 환도성을 그 우측에 있는, 론강(압록수)과 라인강(패수) 사이에 있는 Bern or Fribourg로 추정한 필자의 것과 방향이 일치한다.

 

중공의 요하를 요수로 보는 재야 사학자들은 국내성과 환도성을 어떻게 추정하는지 궁금하다. 요하 보다 서쪽에  압록수를 추정하는 것은 압록수가 남으로 바다로 흘러 간다는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강과 바다는 엄연히 다르다. 강은 물수를 써서 부르고 바다는 바다해를 이용했다. 강을 바다로 주장하는 억지는 더이상 없었으면 한다. 

 

"217년에는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

(자료 : 산상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상, 펌글 참조)

 

산상왕시기는 후한이 망하는 시기인 220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시기 중 고구려의 서진의 가능성이 많은 시기이다. 217년에 후한 평주의 하요가 투항한 것은 고구려의 서진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스카이데일리에 실린 성현식의 글에서 그 면모를 볼 수 있다.

 

"발기의 반란으로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잃은 고구려 서쪽 영역은  개마, 구려, 하양, 도성, 둔유, 장령, 서안평 (압록강 하구), 평곽군 등이다. ....산상왕은 발기를 배천형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발기는 모반하여 두눌 땅에서 칭제하였다.....계수가 두눌을 정벌해 그 뿌리를 뽑아 버리니 발기는 배천으로 패주하였다....그 아들은 박고라한다. .....발기가 죽은 후 산상왕은 배령에 장사지내고, ' 배천대왕지릉'이라 하였다......박고는 무덤을 지키면서 자신을 '위수의 어부'라 했다.... 위수는 섬서성 중부 가로지르는 물길로 황하 지류이다...."

 (자료 : 스카이데일리, 성현식, '중국대륙은 고구려초에도 강역, 반란사에서 드러나')

 

발기의 반란으로 공손도에게 일시적으로 빼앗긴 고구려의 서쪽 영역 중에 서안평, 장령 등이 언급된다. 서안평은 요수의 하구에 있는 도시라 했다. 즉 압록수인 론강의 지중해 하구에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이 근처에 장령이 있다. 장령은 산맥의 일부를 가리키므로 알프스 서쪽지역이며, 지중해에 가까운 지역일 것이다. 후에 장령진, 장령성 등이 언급되는데, 장령진은 수군기지임을 나타낸다. 즉 바다에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근처에 방비하는 성을 쌓은 것이 장령성일 것이다. 이러한 서술 내용 역시 필자의 위치 추정이 맞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중공의 동북지역의 요하 주위에 산맥이 있는가? 장령이 될 만한 산맥이 없을 것이다. 북한의 압록강도 마찬가지이다. 산서성 주위는 남쪽으로 바다가 없으니 논하지 말자.

 

고구려의 서진내용을 알기 위해 박고가 있었다는 위수에 대해 더 알아 보자. 아래 위수에 대한 나무위키 자료를 보면 위수는 관중지방을 관통한다고 했다. 그동안 관중지방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데, 이번에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남쪽에 장안이 있다 했다. 이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진시황의 진나라가 융성했다 하고, 진나라 이후 각국의 수도들은 이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에 세월을 낚았다는 강이기도 하다. 그만큼 위수의 위치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중국의 으로 황허의 지류에 해당하며 간쑤성에서 산시성을 지난다. 고대 중국에서 가장 기름진 지역이었던 관중지방을 관통하며, 이 강 바로 남쪽에 장안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 강 북쪽은 바로 오르도스라는 지방으로, 반농 반목의 경제적 특성을 띠는 지역이다. 옛날부터 중국 왕조들이 군마를 기르던 지역으로, 송나라 때 이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군마 부족으로 인한 군대의 약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과거에는 이 유역을 중심으로 통일제국 진나라가 융성했고, 진나라 이후 각국의 수도들은 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강태공주문왕과의 만남이 있기전까지 이 위수에서 고기가 아닌 세월을 낚았다고 한다."

(자료 : 위수, 나무위키,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중국,  펌글 참조)

 

 

상기 지도는 시안을 장안으로 보는 것 같다. 흔히 시안(서안)이 평양성이고 장안성이라 하는데, 어느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장안과 낙양이 중공내에서도 훨씬 남쪽으로 추정하는 지도를 보아 왔다.

 

필자는 황하가 서쪽으로 흐르는 프랑스의 Loire river이 아닌가 했는데, 장안성 위에 흐르는 위수라 했다. 그리고 위수는 황하의 지류라 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장안은 Toulouse로 판단된다. 신당서 북적 실위전에서 경사(수도)에서 동북쪽 7천리에 있는 실위라 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실위, 공유글 '실위와 거란의 언어/몽올실위 관련 정국 정사 발번역' by 길공구, 참조). 필자는 실위를 북유럽 덴마크에 있는 Schleswig지역이라 추정했다. 그래서 실위에서 남서쪽으로 7천리 거리를 고려한 것이다.  '리'에 대한 거리 개념의 오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다는 백두산, 장백산인 알프스산맥의 길이를 천리로 하고 그 일곱배의 거리를 Schelswig에서 남서쪽으로 계산하여 Toulouse를 장안으로 계산 한 것이다.실제 고트족 역사에서 Toulouse는 동쪽의 Narbonne (낙양), 강남의 스페인 Toledo (건강?, 건업?)과 함께 수도로서 역할을 하며, 중국사의 장안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장안인 Toulouse위로 지나는 위수는 Lot river가 아닌가 한다. 상기 중공지도에서 위수를 Luo river라 하는데, 유사한 이름의 Lot river이다. 이 Lot river가 배천이 되고 Lot river의 상류지역이 배령, 즉 Massif Central과 가까운 곳이 된다. 그리고 장안으로 추정되는 Toulouse위를 흐른다. 그런데 Lot river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Garonne river의 지류이다. 즉 Garonne river가 황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Caesar 활동시기에 Garonne river가 많이 언급된다. 그리고 위에서 위수가 산서성에 있다 했는데, Lot river는 Massif Central의 서쪽에 있다.

 

그런데 Lot river의 이름이 Occitan언어로 Olt, 라틴어로는 Oltis이다. Oltis -> 올티스->욀수 ->위수가 아닌가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Rhone river가 Occitan언어로 Ros라 해서 요수가 아닌가 했다. 즉 Occitan지역은 한자에 대해 우리말 발음을 하는 곳으로 판단된다. 

 

"The Lot (pronounced [lɔt]), originally the Olt (Occitan: Òlt; Latin: Oltis), is a river in France. It is a right-bank tributary of the Garonne. It rises in the Cévennes mountains, flowing west through Quercy, where it flows into the Garonne near Aiguillon, a total distance of 485 kilometres (301 mi).[1] It gives its name to the départements of Lot and Lot-et-Garonne."

(source : Lot (river), Wikipedia, 본 블로그, 카테고리, 불란서, 펌글 참조)

 

 

아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Lot river에 연결된 Garonne river가 황하와 같이 홍수 피해가 매우 많은 강이다.

 

"Floods of the Garonne

 

Flood of the Garonne from 1930, breaking of the dike in Thivras (Marmande)

In Toulouse, the Garonne has often been the cause of many floods, especially since its left bank is inhabited.

 

The earliest records of floods are from around 1177. It is also recorded to have flooded in 1220, 1258, 1430, 1523, 1536 and in 1589, 1608, 1658, 1673, 1675, 1709, 1712, 1727, 1750, 1772, 1788, 1804 and 1810. In 1772, the Garonne reached 8 meters 50.[31] In the recent centuries, in 1827, 1835, 1855 and 1856/7.

In Toulouse, in 1827, the water level of the Garonne rose four meters above the ordinary level and filled the arches of the Pont de Pierre and Pont Neuf.

In 1835, the Garonne rose to five meters above normal and 35 meters above the low water level and flowed through the four arcs of the Pont de Pierre.

Flood of the Garonne in 1835: 7,50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855: 7.25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875: 9,70 m to Toulouse Pont-Neuf (or 8m32 according to vigicrue).

Flood of the Garonne in 1879: 4,87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890: 3.30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900: 4,00 m in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905: 4.24 m at Toulouse Pont-Neuf

Crete of 1927 in Aquitaine, particularly imposing after the confluence of the Garonne with the Lot (of which it remained raw reference), insignificant upstream18.

Flood of the Garonne in 1952: 4,57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1977: 4,31 m in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2000: 4.38 m at Toulouse Pont-Neuf

Flood of the Garonne in 2004: 3,52 m at Toulouse Pont-Neuf

In 1777, the Garonne suffered an extraordinary flood to the point that the priest of Bourdelles took the trouble to retranscribe the event, at the end of the acts of the year, in the parish register of baptisms, marriages and deaths."

(source : Garonne riv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Europe rivers, 펌글 참조)

 

 

한편 Loire 강은 프랑스에서 제일 긴 강으로 프랑스의 남북을 나누는 강이다. 즉 하북과 하남을 가르는 강이다. 그리고 르와르강은 그리스인과 켈트인, 그리고 페니키아인들이 론강을 이용해 지중해에서 Lyon을 거쳐 대서양으로 가는 중요한 무역로인 수로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르와르강도 홍수피해가 있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르와르강이 황하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Garonne강에 비해 홍수의 피해가 덜하며,  몰도 깨끗해 장어, 숭어, 연어 같은 물고기가 사는 것을 보면 황하라기 보다는 한수(漢水)가 아닌가 한다. 르와르강은 5세기에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의 영역을 가르는 강이 되기도 했다. 르와르강이 한수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백제 한성 연구시 더 추가 연구하고자 한다.

 

단지 위수는 Lot river로 보이며, Massif Central이 르와르강과 위수인 Lot 강과 같은 수원인 점이 위 지도에서 확인된다. 더구나 고구려가 요수인 론강의 남쪽지역, 서안평 등을 점하였다고 하는데, 이에서 서쪽이며, 과거 오손왕국인 Occitan지역에 있는 Lot 강이 위수로 보인다. 따라서 Garonne강의 지류인 Lot강이 위수로 보이며, Garonne강이 황하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By around 5000 to 4000 BC, they began clearing forests along the river edges and cultivating the lands and rearing livestock.[11] They built megaliths to worship the dead, especially from around 3500 BC. The Gauls arrived in the valley between 1500 and 500 BC, and the Carnutes settled in Cenabum in what is now Orléans and built a bridge over the river.[11] By 600 BC the Loire had already become a very important trading route between the Celts and the Greeks. A key transportation route, it served as data-one of the great "highways" of France for over 2000 years.[7]  The Phoenicians and Greeks had used pack horses to transport goods from Lyon to the Loire to get from the Mediterranean basin to the Atlantic coast....

 

The Romans successfully subdued the Gauls in 52 BC and began developing Cenabum, which they named Aurelianis

They also began building the city of Caesarodunum, now Tours, from AD 1.[11] The Romans used the Loire as far as Roanne, around 150 km (93 mi) downriver from the source. After AD 16, the Loire river valley became part of the Roman province of Aquitania, with its capital at Avaricum.[11]....

 

 

In the 5th century, the Roman Empire declined and the Franks and the Alemanni came to the area from the east. Following this there was data-ongoing conflict between the Franks and the Visigoths.[12] In 408, the Iranian tribe of Alans crossed the Loire and large hordes of them settled along the middle course of the Loire in Gaul under King Sangiban.[13] Many inhabitants around the present city of Orléans have names bearing witness to the Alan presence – Allaines.....

 

The river has a discharge rate of 863 m3/s (30,500 cu ft/s), which is an average over the period 1967–2008.[1] The discharge rate varies strongly along the river, with roughly 350 m3/s (12,000 cu ft/s) at Orléans and 900 m3/s (32,000 cu ft/s) at the mouth. It also depends strongly data-on the season, and the flow of data-only 10 m3/s (350 cu ft/s) is not uncommon in August–September near Orléans. During floods, which usually occur in February and March[32] but also in other periods,[4] the flow sometimes exceeds 2,000 m3/s (71,000 cu ft/s) for the Upper Loire and 8,000 m3/s (280,000 cu ft/s) in the Lower Loire.[32] The most serious floods occurred in 1856, 1866 and 1911. Unlike most other rivers in western Europe, there are very few dams or locks creating obstacles to its natural flow. The flow is no longer partly regulated by three dams: Grangent Dam and Villerest Dam on the Loire and Naussac Dam on the Allier. The Villerest dam, built in 1985 a few kilometres (a few miles) south of Roanne,[33] has played a key-role in preventing recent flooding."


(source : Loire (riv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Europe river, 펌글 참조)

 

 

 

산상왕의 아우 계수가 이들 반란군과 공손도세력을 격파하고 위수지역까지 진출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즉 상기 지도의 Lot river까지 진출한 것이다. 이 지역은 또한 관중지역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강태공이 낚시한 위수라는 곳이다. 따라서 주나라도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 수도가 호경이고 호경은 평양이며, 고구려의 장안성이라 했다. 장안성은 Toulouse이니 주나라의 호경도 이곳이 된다. 단지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은 요임금이 있던 평양(平陽)이 아닌가 한다. 진시황의 진나라도 이곳에서 흥했다는 것이니 진나라도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프랑스의 대부분의 강은 서로 흐른다, 그러나 중공의  Yellow river, 양쯔강은 동으로 흐른다. 고대사서에서 황허강과 장강이 동으로 흐르는지 서로 흐르는지 밝혀지면 진실은 밝혀진다. 필자는 아직 이에 대한 자료를 접하지 못했다.  산서성, 산동성을 고려하면 산의 서쪽으로 강이 흐를 것이다. 따라서 강이 서로 흐르는 것이 정상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중공의 서쪽에 청해성이 있다. 즉 바다라는 것이다. 즉 강은 서쪽으로 흘러 청해라는 바다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 중공지역은 과거 중국사의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III. 미천왕 시기(300-331)의 고구려와 백제, 신라, 중국 상황을 고려한 위치 추정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302)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311)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313)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314)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315)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319)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320)
 

미천왕 시기의 고구려는 동천왕 시기에 위의 관구검에 의해 동으로 밀린 고구려를 다시 서쪽으로 회복한 왕으로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킨 대왕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라 기림이사금(298-310) 시기에 아래 내용이 언급된다.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AD 300)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AD 300)

 

즉 신라가 이시기에 낙랑과 대방에 인접해 있다는 것이다. 발해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백두산=장백산=태백산이라 했다. 태백산이 백두산과 장백산과 동일한 산이라면 태백산은 알프스산맥에 있는 몽블랑산이 된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알프스산맥 주위의 지역으로 이미 추정해왔다. 단지 대방군을 보다 우측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요서군에 있었다 하니 낙랑군 남서쪽에 있었는지 모른다. 즉 낙랑군과 대방군은 이미 300년에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보면, 중국의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에 영향을 받아 또는 신라의 진출에 의해 이미 멸망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림이사금은 307년 다시 국호를 신라로 했다 한다. 즉 신라의 진출확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미천왕이 15년후 이 지역을 다시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시기의 중국은 서진(266-316)이 팔왕의난 (300-307), 영가의 난(307-311) 등으로 멸망을 향해 치닫는 혼란의 시기이다. 따라서 이 혼란기에 서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319년 동쪽에 있는 고구려로 도망해오는 것이다. 316년 서진은 망하고 동진은 강남으로 내려갔으며, 중국 북부는 오호십육국시대로 접어 들어, 한조(漢趙)(304-329), 성한(成漢)(306-347), 후조(後趙)(319-351)의 시대이다.

 

이 시기의 백제는 책계왕 시기(286-298)에 대방관련 기록이 있다. 즉 고구려의 침략으로 대방군에서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 책계왕이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므로 도와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후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가 매우 나빠진다. 즉 백제는 대방군 낙랑군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접했다 하였다. 그래서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이 인접하게 되었다 했다. 앞에서 신라도 이들과 가까이 있어 낙랑, 대방이 300년 항복해 왔다고 기록된 것을 보았다. 즉 신라 백제, 고구려가 낙랑군, 대방군과 접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알프스산맥에 있다고 할 때, 이 지역에 접한 고구려, 백제, 신라를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므로 요청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고 한 말. 삼국사기 책계왕본기에서 발췌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을 염려,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3]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298)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자료 : 책계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펌글 참조)

 

위의 기록에서 298년 한(漢)이 맥인과 함께 백제를 쳐들어 오자 왕이 나아가 싸우다가 해를 입어 죽었다 했다. 그런데 나무위키는 한군이 낙랑군, 맥인이 동예라 했는데, 이는 매우 의문이 드는 추정이다. 백제는 대방군을 구하느라 고구려와 싸웠는데, 낙랑군이 쳐들어 올 리 없다고 본다. 그리고 300년에 신라에 낙랑과 대방이 항복했다고 하는데, 2년전인 298년에 백제를 쳐들어 왔다는 추정은 비합리적이다. 또한 맥인이라 했는데, 동예는 예족이다. 물론 예맥은 유사하지만 동예는 동쪽에 바다가 접해 있다.

 

그럼 한군은 누구인가? 서진은 멸망시기에 가깝고 팔왕의 난이 300-307년기간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를 칠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백제가 중국땅에 있었다면 남진하면서 공격할 수 있으나, 서진이 맥인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맥인이 함께 한다는 것은 고구려이거나 고구려 계통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호십육국의 첫 왕조인 한조(漢趙)가 304년 건국되는데, 한조를 건국하고 칭제하기 전의 한군이 아닌가 한다. 이 한조는 말이 한나라이지 흉노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다. 한조는 한(漢)(304-319)과 조(趙)(319-329)를 합해서 한조(漢趙)라 한다. 같은 흉노의 후예인데,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후 석륵에 의해 등장하는 후조(後趙)에 대칭하여 전조(前趙)라고도 한다. 

 

"조한(趙漢), 혹은 호한(胡漢), 호조(胡趙), 북조(北趙)[1], 유조(劉趙)라 불리며 5호 16국 시절의 국가로, 개중에서도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5호 16국에서 가장 먼저 개창된 왕조 중의 하나[2]로써 오호십육국, 더 나아가 남북조시대의 시작을 끊은 나라이다.

 

창건자인 유연조위(曹魏) 시절 출생한 인물로, 남흉노선우 어부라의 손자다. .... 유연의 비범함을 눈여겨 본 서진의 제왕 사마유에 의한 제거의 시도가 있었으나, 왕혼의 비호로 살아남았다.

이후 팔왕의 난이 터지자.. 유연은 당시 흉노족 전체를 관장하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거병을 하였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4] 유연은 서진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수명을 다했고 결국 그의 아들인 유총이 유지를 이어받아 진을 멸망시켰다. 이에 서진의 황족인 사마예가 도망쳐서 강남에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동진(東晉)이다."

(자료 : 한조(전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조, 펌글 참조)

 

즉 흉노의 후예인 유연이 세운 한나라이다. 따라서 맥인과 같이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 한조의 수도가 평양 (平陽), 장안(長安)이다. 필자는 이 두 도시 이름이 같은 지역, Toulouse를 나타낸다고 판단한다. 주나라의 호경이 평양이고 장안이라 했다. 필자는 호경과 장안, (요임금의) 평양이 Toulouse라 추정했다. 따라서 백제 책계왕을 친 한군은 이 (건국전) 한군이며 맥인은 압록수에 있는 대수맥, 소수맥으로 언급되는 맥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들의 침략을 받은 백제는 이들 지역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나아가 이들 한조가 고구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이미 산상왕 시기에 위수지역에 진출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우기 서진이 망하는 혼란의 시기이다. 장안과 평양(平陽)의 위치인 Toulouse는 위수인 Lot 강의 바로 아래 있다. 따라서 미천왕 시절의 고구려가 대방을 도운 백제의 책계왕을 보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오호십육국 시대 위진 남북조시대 역사를 보면 너무 조잡하고 엉성하며 악랄한 막장 왕조로 많이 표현하는 춘추필법의 흔적이 보인다. 즉 남북조 모두 조선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후일 차차 연구하면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러면 흉노가 과연 프랑스지역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흉노의 모돈선우는 고구려의 유리왕이다'란 글에서 모돈선우 즉 묵특선우의 활동을 연구한 적이 있다. 묵특선우가 북으로 혼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점령하고 남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긴 흉노 땅을 되찾은 후, 다시 연나라, 대나라로 쳐들어 갔다.  동으로 동호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달아나게 하고, 남으로 누번과 하남의 백양왕을 병합하였다. 서역 26개국을 정벌했다고 했다. 묵특은 또한 유방의 한나라를 속국처럼 대했다. 정령은 실위와 같다고 했다. 따라서 흉노는 이미 북유럽의 정령 즉 실위를 점령했다. 남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긴 흉노땅을 되찾았는데, 알프스산맥 주위의 진고공지 지역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한(漢)나라는 라인강 서쪽 지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를 거의 속국처럼 괴롭힌 흉노는 이미 유럽에 프랑스 북부에까지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역은 이 지역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흉노는 중앙아시아  Massagetae로부터 키메리언의 이동처럼 서진한 예맥조선이라 일컫는 나라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한다. 즉 이미 흉노인 예맥조선은 서유럽에 진출해 있던 것이다. 따라서 남흉노의 선우의 손자인 유연이 세운 오호십육국시대의 한(漢)나라(304-319)가 프랑스지역에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매우 필자의 위치추정과 합치되는 것이다.

 

319년 미천왕 20년에 진(晉)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왔다고 했다. 서진은 316년 망하고 동진은 강남으로 밀려 났다. 따라서 평주자사 최비는 강남으로 밀려난 동진과는 거리가 먼 평주일 것이다. 평주는 요수의 서쪽으로 추정된다. 즉 론강의 서쪽지역이다.  산상왕때 217년 후한 평주의 하요가 1천여가를 데리고 투항했다고 했다. 즉 평주는 고구려의 서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동진이 장강(Tagus river in Spain?) 이남으로 밀려난 후에는 평주 자사는 북조에 쫓기는 신세였을 것이다. 아니면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즉 한조가 고구려라는 의미) 고구려에 투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항이 아닌 도망왔다는 언급은 북조에 쫓긴 것으로 판단된다. 혹은 흉노의 후예가 세운 한조(漢趙)의 한(漢)나라가 319년 막을 내리고 흉노의 나라임을 나타내는 조(趙)나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권력다툼에 밀려 고구려로 피신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302년 현도군 공격, 315년 현도성을 공격했다고 했다. 발해고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은 한무제가 BC 109년 옥저성에 세운 지역이라 했다. (삼국지 위지 자료). 그리고 발해의 남경 남해부가 있는 지역이었다.  옥저지역은 필자는 이태리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아드리아해 북쪽 지역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한무제가 세운 현도성은 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후 현도성은 서쪽으로 이동해 갔다. 따라서 미천왕 시기의 현도성은 요동군의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요수 즉 론강의 하구인 서안평을 점령했지만, 압록수 즉 론강의 동쪽인 요동군과 그위의 현도군을 차지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IV. 고국원왕 시기 고구려와 전연, 백제 상황을 고려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 (331-371)

 

二年春三月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 (332)
四年秋八月 평양성을 증축하다 (334)

五年春一月 신성을 쌓다 (335)

九年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339)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342)
十二年秋八月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다 (342)
十二年冬十一月 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342)
十三年春二月 전연의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다 (343)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13]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343)
十五年冬十月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345)

345-349 : 4년 공백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349)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55)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355)

356-368 : 13년 공백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370)

371 : 패하에서 고구려군이 패하다 (근초고왕 기록)

371 :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다. (근초고왕 기록)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371)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 백제 근초고왕 (346-375)시기

 

348-365 : 공백

二十一年 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6)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368)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8)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69)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369)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71)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371)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371)

二十八年春二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373)
二十八年秋七月 청목령에 성을 쌓다. (373)
二十八年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도망치다. (373)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375)
三十年冬十一月 근초고왕이 죽다. (375)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는  졸본, 환도성, 평양성이 언급되는 시기이다. 졸본에서 돌아 오다는 332년의 언급은 고국원왕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졸본을 압록수인 론강의 지류인 Jadron river(졸본천) 근처로 추정했다. 론강의 하구인 서안평의 정북쪽 정도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쪽경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국원왕 시기에 백제는 근초고왕의 정복군주시기 (346-375)이며, 또한 강력한 전연(337-370)을 이웃으로 둔 시기이다. 그래서 남쪽으로는 백제에 밀리고, 서쪽으로는 전연에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먼저 전연 관련하여 살펴 보자. 전연의 침입으로 신성이 침입(339)당하고 남소성이 함락(345)되었다. 고구려 태조왕 4년(115)에 서하, 남구, 하성, 안평, 장령, 도성, 둔유, 평곽, 하양, 고현, 남소 등에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하였다고 한다. (자료 : 스카이데일리, 성현식, '중국 황하 서쪽(서하)도 고구려초 강역이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즉 남소성은 고구려 남쪽에 있는 성이다. 압록수인 론강의 하류 근처로 보인다.

 

아래 고구려를 침입한 모용황에 대해 자료를 보면, 모용황은 평곽을 거점으로 요동일대를 장악하고 연나라를 건국했다. 위의 자료에서 평곽은 과거 태조왕 시 고구려의 남쪽 지역이었다. 즉 요수인 론강의 남쪽 지역인 것이다. 즉 이 지역의 동쪽지역을 점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용황은 297년에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21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면서 모용부의 대인이 되었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모용한과 동생 모용인모용소와 대립하여 모용부는 내분을 겪게 된다. 모용인은 모용소와 반란을 꾸몄으나 발각되어 모용소가 살해당하자 평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요동 일대를 장악했다. 모용한은 단부로 망명하였다가 단부의 군대를 이용해 모용황을 공격하였다. 한때 모용황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모용한이 모용부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철군하면서 살아남았다. 336년, 모용황은 모용인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37년, 모용황은 진나라(동진)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단절하고, 연왕을 자칭하며 연나라(전연)를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단부와 대립했기 때문에 조나라(후조)와 동맹을 맺고 338년에 단부를 협공하였다. 모용황이 혼란에 빠진 단부를 약탈하고 튀자 조나라의 석호는 전연에게 분노하여 단부를 멸망시킨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조나라의 침입으로 한때 수도인 극성이 포위되기도 하였으나 모용황은 농성 끝에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역관광하여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다. 이후 조나라의 유주를 계속 공격하며 약탈전을 벌였다. 340년에는 다시 조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를 위협하였으나 모용황은 조나라의 전선을 우회하여 유주의 계를 습격, 대승하였다. 342년에 용성으로 천도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344년에는 우문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자료 : 모용황,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전연, 펌글 참조)

 

 

고구려 침입시 상황을 보면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342년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후와 태후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을 보았다고 기록된다 (아래 자료 참조).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전연은 후조와 유주에서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용성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국내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고구려는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수레에 실려 전연으로 갔으며 미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몇 달 뒤 반환되었으나, 주 태후는 인질로 붙잡혀있다가 13년이 지난 뒤에야 고구려로 귀환하였다. "

(자료 : 고국원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그래서 수도를 국내성에서 동북쪽 200리에 있는 환도성으로 천도(342)한 것으로 보인다. 환도성도 침략으로 피폐해져, 다시 동쪽으로 평양성으로 천도(343)한다. 전연의 침략은 계속되어 345년 남소성을 다시 빼앗긴다.

 

이후 10년간 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질이 된 태후 등으로 굴욕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자를 정하고 (355), 같은 해 왕모 주씨를 돌려 받은 후 13년간 공백이다. 태자가 소수림왕일 것인 바, 그후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13년 공백은 일제에 의해 삭제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연이 370년 망하는데, 그 전에 전연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전연은 전진에 의해 망하는데, 전진과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전연이 망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13년 공백이 의심스러워진다.

 

고구려는 다시 남쪽의 근초고왕 백제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369년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고, 371년에는 패하에서 백제에게 패하고, 371년 평양성에서 결국 화살을 맞아 고국원왕은 죽게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전연은 4세기 중반 동부여를 공격하여 동부여가 왕이 포로가 되는 상황에 이르러 거의 망하기 일보전까지 간다. 필자는 본 블로그글, '반달족인 Buru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에서 전연의 동부여에 대한 공격에 대해 언급했다. 이때 백제도 전연과 함께 동부여를 공격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이 있다 한다. (필자의 네이버 볼로그 공유글, '부여가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에 갔다는 기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지에 대하여' by History2, 카테고리, 백제, 공유글 참조). 한반도의 삼국역사를 상정하는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즉 전연의 모용황은 346년 동부여를 공격해 부여왕 현을 비롯한 5만여명을 포로로 데려갔다. 342년 고구려와 유사한 피해를 보았다. 이 당시 고구려 기록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동시에 동부여를 공격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인질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데, 백제는 346년이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해이다. 역시 초기 18년간 삼국사기 기록이 없다. 일제의 역사 지우기 흔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근초고왕으로 볼 수 있는 로마의 Valentinian I (r 364-375)는 이 시기에 동부여로 추정되는 Burgundians과 함께 선비족 모용부인 Alemanni에 대항해 싸웠다. Valentinian I 은 서로마황제 중 Valentinian the Great로 불리는 황제이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근초고왕은 346년 왕이 되었지만 초기 기록 18년이 공백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366-375년 기간의 기록이 전부이다. 즉 근초고왕의 주요 활동 시기 기록 기간과 Valentinian I의 재위기간이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Valentinian I의 기록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Valentinian I는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룬 황제로서 Valentinian the Great로 불리운다. 동로마에는 자신의 동생인 Valens를 공동황제(사실은 부속황제)로 임명했. 발렌티니안 I세 황제는 재위기간동안 Alamanni, Quadi, Sarmatians에 대한 성공적인 전쟁을 치룬 것으로 기술된다.

 

당시 Alamanni는 Suebi족(선비족)의 모용부로 추정된다. 선비족의 일원인 Quadi, 여진족으로 보이는 Sarmatians(여성 전사로 특징)은 말갈(Alans)을 포함한 고구려로 판단된다. 광개토태왕 시기의 Huns(훈족) 활동 이전에는 Marcomanni(물길족), Saxons(숙신족), Goths(고트족, 고구려), Quadi, Sarmatians, Vandals(Suebi 선비족의 일원인 반달족), Alans, Burgundians(반달족의 일원인 부여족), Gauls (켈트족),  등의 게르만족으로 로마 북쪽 다뉴브강 이북지역을 기술한다. 거란족은 Frank족으로 판단된다. 이들 모두 인도유럽어족이다. 즉 동쪽 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이라는 것이다.

 

Valentinian I는 또한 아프리카 북부의 반란과 영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동시에 건너 전쟁을 치룬 마지막 황제로 인식된다. 그의 죽음이후 서로마제국은 바로 쇠퇴의 길을 걷기 때문에 서로마 마지막 위대한 황제로 인식된다.

 

"Valentinian I (LatinFlavius Valentinianus Augustus;[1] GreekΟὐαλεντινιανός; 3 July 321 – 17 November 375), also known as Valentinian the Great,[2][3][4][5] was Roman emperor from 364 to 375. Upon becoming emperor he made his brother Valens his co-emperor, giving him rule of the eastern provinces while Valentinian retained the west.

 

During his reign, Valentinian fought successfully against the AlamanniQuadi, and Sarmatians. Most notable was his victory over the Alamanni in 367 at the Battle of Solicinium. His brilliant general Count Theodosius defeated a revolt in Africa and the Great Conspiracy, a coordinated assault on Roman Britain by PictsScots, and Saxons. Valentinian was also the last emperor to conduct campaigns across both the Rhine and Danube rivers. Valentinian rebuilt and improved the fortifications along the frontiers, even building fortresses in enemy territory.

 

Due to the successful nature of his reign and the rapid decline of the empire after his death, he is often considered to be the "last great western emperor". He founded the Valentinian Dynasty, with his sons Gratian and Valentinian II succeeding him in the western half of the empire....."

(source : Valentinian I,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 Roman, 펌글 참조)

 

이제 그의 Gaul지역과 게르마니아지역에서의 군사활동을 보자. (아래 자료 참조) 365년 Alamanni가 동쪽에서 라인강을 넘어 Gaul지역으로 침범했다. 선비족인 Suebi족의 일원인 Alamanni는 알프스산맥의 북쪽에 부여족인 Burgundians옆에 거주했다. 동부여와 고구려를 침범한 선비족인 전연의 모용부로 판단된다. (아래 지도 참조)

 

4세기의 로마제국의 라인강 다뉴브강 국경지역 지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위지도는 선비족의 모용부인 Alamanni가 보다 서쪽에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아래 글에서 Valentinian I는 파리로 가는 도중에 Alamanni의 침범소식을 들었다 했는데, 파리지역에 있는 Alamanni를 공격하려 가는 모습을 이렇게 애둘러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비족 모용부는 유주(론강 주위 평주의 서쪽)에서 후조를 물리치고

용성을 수도로 하였다고 위의 자료에서 보았다.  즉 용성은 황룡국 등이 있던 상기 지도의 Belgica의 좌측 지역으로 추정되며, 용성은 Remi나 Paris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기 지도의 Alamenni로 표시된 지역은 고구려 평양성(주리히) 등이 있는 고구려 서쪽지역으로 사료된다. 이 당시에는 고국원왕 시기로 전연에게 서쪽에서 많이 밀린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로마사의 서로마부문 역사는 중국지역 역사와 고구려 역사 일부를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 백제사로 보느냐도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단지 이러한 선비족 모용부에 대한 공격은 중국사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의 공격일 수도 있다. 아래 자료에서 368년 로마군이 Alamanni에게 Battle of Solicinium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Alamanni왕을 죽이는 성과를 올리는데, 370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Solicinium 전투지역은 독일 남부 Sttutgart로부터 남쪽 60km지점이며, 스위스 북쪽 국경으로부터 90km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 결판이 났다는 것이다.

 

아래 스위스의 쥬리히가 고구려의 평양성이라고 필자는 추정했다. 따라서 고구려 소수림왕이 태자시절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고국원왕 시기에 소수림왕이 태자로 된 시기(355) 이후 13년(356-368) 공백으로 남은 삼국사기 기록이 수상하다고 필자는 추측했다. 전연을 멸망 시킨 전진의 부견은 384년 사망하는데, 고구려의 소수림왕도 384년 사망한다. (백제의 근구수왕도 384년 사망한다.) 전진의 부견과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불교 진흥, 교육기관 설립, 등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소수림왕 시기가 고트족의 알렉산더라는 Ermaneric왕 시기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전진의 부견이 고구려의 소수림왕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즉 전연의 멸망은 태자인 소수림왕이 주도한 전쟁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로마사가 포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라인강 하류 좌측으로부터 공격은 중국에 있는 전연 (혹은 중국에 진출한 고구려)의 공격일 가능성이 더 크며, 라인강 상류 좌측은 고구려의 영역이었을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선비족 모용황에 밀려 동쪽으로 밀려난 고구려로 판단된다. 상기 지도의 Burgundians  즉 동부여에 대한 백제의 공격은 따라서 다뉴브강 이남의 백제로부터 온 공격일 것으로 판단된다.

 

 

"Campaigns in Gaul and Germania

 

In 365 the Alamanni crossed the Rhine and invaded Gaul.

 

Simultaneously, Procopius – the last scion of the Constantinian dynasty – began his revolt against Valens in the east. According to Ammianus, Valentinian received news of both the Alamanni and Procopius' revolt on 1 November while on his way to Paris. He initially sent Dagalaifus to fight the Alamanni[27] while he himself made preparations to march east and help Valens. After receiving counsel from his court and deputations from the leading Gallic cities begging him to stay and protect Gaul, he decided to remain in Gaul and fight the Alamanni.[28][29] Valentinian advanced to Durocortorum and sent two generals, Charietto and Severianus, against the invaders.[30] Both generals were promptly defeated and killed.[31] In 366, Dagalaifus was sent against the Alamanni but he was also ineffective.[32] Late in the campaigning season Dagalaifus was replaced by Jovinus, a general from the court of Valentinian. After several victories along the Meuse river Jovinus pushed the Alamanni out of Gaul and was awarded the consulate the following year for his efforts.[33]

 

In early 367 Valentinian was distracted from launching a punitive expedition against the Alamanni due to crises in Britain and northern Gaul. The Alamanni promptly re-crossed the Rhine and plundered Moguntiacum. Valentinian succeeded in arranging the assassination of Vithicabius, an Alamannic leader, but Valentinian was more determined to bring the Alamanni under Roman hegemony. Valentinian spent the entire winter of 367 gathering a massive army for a spring offensive. He summoned the Comes Italiae Sebastianus, with the Italian and Illyrian legions, to join Jovinus and Severus, the magister peditum. In the spring of 368 Valentinian, his eight-year-old son Gratian and the army crossed the Rhine and Main rivers into Alamannic territory. They did not encounter any resistance initially – burning any dwellings or food stores they found along the way. Finally, Valentinian fought the Alamanni in the Battle of Solicinium; the Romans were victorious[34]but suffered heavy casualties.[35] A temporary peace was reached and Valentinian returned to Trier for the winter.[36] During 369, Valentinian ordered new defensive works to be constructed and old structures refurbished along the length of the Rhine’s west bank.[37] Boldly, he ordered the construction of a fortress across the Rhine in the mountains near modern Heidelberg.[38] The Alamanni sent envoys to protest, but they were dismissed. The Alamanni attacked the fortress while it was still under construction and destroyed it.[39]

 

In 370 the Saxons renewed their attacks on northern Gaul. Nannienus, the comes in charge of the troops in northern Gaul, urged Severus to come to his aid. After several modest successes, a truce was called and the Saxons handed over to the Romans young men fit for duty in the Roman military – in exchange for free passage back to their homeland. The Romans ambushed them and destroyed the entire invading force.[40]

 

Valentinian meanwhile tried to persuade the Burgundians – bitter enemies of the Alamanni – to attack Macrian, a powerful Alamannic chieftain. If the Alamanni tried to flee, Valentinian would be waiting for them with his army. Negotiations with the Burgundians broke down when Valentinian, in his usual high-handed manner, refused to meet with the Burgundian envoys and personally assure them of Roman support. Nevertheless, rumors of a Roman alliance with the Burgundians did have the effect of scattering the Alamanni through fear of an imminent attack from their enemies. This event allowed the magister equitum Theodosius to attack the Alamanni through Raetia – taking many Alamannic prisoners. These captured Alamanni were settled in the Po river valley in Italy, where they were still settled at the time Ammianus wrote his history.

 

Valentinian campaigned unsuccessfully for four more years to defeat Macrian who in 372 barely escaped capture by Theodosius. Meanwhile, Valentinian continued to recruit heavily from Alamanni friendly to Rome. He sent the Alamannic king Fraomarius, as a Tribune, to Britain in 372-373 with an army in order to replenish troops there and made the noblemen Bitheridius and Hortarius commanders in his army although Hortarius was soon executed for conspiring with Macrian. Valentinian’s Alamannic campaigns, however, were hampered by troubles first in Africa, and later on the Danube river. In 374 Valentinian was forced to make peace with Macrian because the Emperor's presence was needed to counter an invasion of Illyricum by the Quadi and Sarmatians."

 

(source : Valentinian I,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 Roman, 펌글 참조)

 

그러나 Valentinian I의 Quadi, Sarmatians과의 동부에서의 전쟁은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으로 해석된다. 375년 근초고왕은 수곡성 싸움에서 고구려에 패한다. 그리고 그해 근초고왕은 죽는다. 필자는 소수림왕에게 패한 수곡성 싸움에서 근초고왕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지 않나 한다.

 

위의 자료에서 374년 Valentinian I은 Alamanni (선비족 모용부)와 평화협정을 맺는다. 동부로 전쟁을 가야 하기 때문으로 위에 기술된다. 그리고 375년 Quadi의 사신과의 대화에서 열이 나서 뇌출혈로 죽었다 기술된다. (아래 자료 참조). 전쟁영웅의 죽은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수곡성 싸움일 수 있는 Pannonia Valeria (항가리내) 싸움에 대한 자세한 기술도 없다. 보통 큰 전쟁의 경우 양쪽의 피해 상황 등을 요약하여 기술하는데, 패한 전쟁이라 그런지 그런 내용이 없다. 역시 로마사도 춘추필법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Revolt in Africa and crises on the Danube

 

Silver missorium (heavily worn) believed to depict Valentinian I. The armoured and haloed emperor is flanked by infantry soldiers, he holds a labarum in one hand and an orb surmounted by a figure of Victory in the other, ca. 364-375

 

 

In 372, the rebellion of Firmus broke out in the still-devastated African provinces. This rebellion was driven by the corruption of the comes Romanus. Romanus took sides in the murderous disputes among the legitimate and illegitimate children of Nubel, a Moorish prince and leading Roman client in Africa. Resentment of Romanus' peculations and his failure to defend the province from desert nomads caused some of the provincials to revolt. Valentinian sent in Theodosius to restore imperial control. Over the following two years Theodosius uncovered Romanus' crimes, arrested him and his supporters, and defeated Firmus.

 

In 373, hostilities erupted with the Quadi, a group of Germanic-speaking people living on the upper Danube. Like the Alamanni, the Quadi were outraged that Valentinian was building fortifications in their territory. They complained and sent deputations to the magister armorum per Illyricum Aequitius, who promised to refer the matter to Valentinian. However, the increasingly influential minister Maximinus, now praetorian prefect of Gaul, blamed Aequitius to Valentinian for the trouble, and managed to have him promote his son Marcellianus to finish the project.[41] The protests of Quadic leaders continued to delay the project, and to put an end to their clamor Marcellianus murdered the Quadic king Gabinius at a banquet ostensibly arranged for peaceful negotiations. This roused the Quadi to war, along with their allies the Sarmatians. During the fall, they crossed the Danube and began ravaging the province of Pannonia Valeria. The marauders could not penetrate the fortified cities, but they heavily damaged the unprotected countryside. Two legions were sent in but failed to coordinate and were routed by the Sarmatians. Meanwhile, another group of Sarmatians invaded Moesia, but were driven back by the son of Theodosius, Dux Moesiae and later emperor Theodosius.

 

Valentinian did not receive news of these crises until late 374. The following spring he set out from Trier and arrived at Carnuntum, which was deserted. There he was met by Sarmatian envoys who begged forgiveness for their actions. Valentinian replied that he would investigate what had happened and act accordingly. Valentinian ignored Marcellianus’ treacherous actions and decided to punish the Quadi. He was accompanied by Sebastianus and Merobaudes, and spent the summer months preparing for the campaign. In the fall he crossed the Danube at Aquincum into Quadi territory.[42] After pillaging Quadi lands without opposition, he retired to Savaria to winter quarters.[43]

 

Death

 

Without waiting for the spring he decided to continue campaigning and moved from Savaria to Brigetio. Once he arrived on 17 November, he received a deputation from the Quadi. In return for supplying fresh recruits to the Roman army, the Quadi were to be allowed to leave in peace. However, before the envoys left they were granted an audience with Valentinian. The envoys insisted that the conflict was caused by the building of Roman forts in their lands; furthermore individual bands of Quadi were not necessarily bound to the rule of the chiefs who had made treaties with the Romans – and thus might attack the Romans at any time. The attitude of the envoys so enraged Valentinian that he suffered a burst blood vessel in the skull while angrily yelling at them, provoking his death[44] on November 17, 375.

 

(source : Valentinian I,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 Roman, 펌글 참조)

 

근초고왕은 왜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왜의 사신들에게 위례궁에서 여러 보물들을 보여 주며, 백제이 위세를 자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만의 침미다례 지역에 대한 정벌의 역사도 있다고 나무위키는 기술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혹은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

 

(전략) 성명왕(聖明王)이 말하길: 옛 나의 선조(先祖) 속고왕(速古王)[13], 귀수왕(貴首王)[14]의 치세에 안라국(安羅), 가라(加羅), 탁순 한기(卓淳 旱岐)[15] 등에게 처음 사신을 보내 통하였다. 두텁게 연결되어 친목을 다지니 (그들이) 자제(子弟)[16]가 되어 서로 융성하길 바랬다...(후략)
聖明王曰, 昔我 先祖 速古王, 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恆隆.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기록)"

 

(자료 : 근초고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펌글 참조)

 

이러한 근초고왕의 남만 침미다례에 대한 정벌이 Valentinian I의 아프리카 반란의 진압(372)으로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Wikipedia 자료 글 참조).  Valentinian은 Theodosius를 보내 반란의 수습을 맡겼다. 

 

필자는 본 블로그의 여러 글을 통해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아섬, 샤르데냐섬, 크레타섬, 스페인 동부의 발레리아제도 섬 등, 지중해에 있는 섬들에 왜가 있음을 밝혀 왔다. 따라서 여기서는 남만 침미다례가 북아르피카에 있는 왜라고 추정하는 것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로마사에서 영국 Britain지역에 대한 관할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백제사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역사인지 아직 모르겠다. 차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

 

근초고왕 시기에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로마사의 Valentinian I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음 글에서 고구려 소수림왕시기, 백제 근구수왕 시기에 평양성 공격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오므로,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글로 미루고자 한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 사이 공방이 잦은 수곡성에 대한  위치 추정도 소수림왕 시기인 다음 글로 미루고자 한다.

 

본 글에서는 고구려의 수도 중 국내성, 환도성에 대한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장안성이 프랑스의 Toulouse로 추정되며, 관중지역을 통과하는 위수가 프랑스 Lot river, 황하는 Garonne river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전연의 위치가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이상이 이 글을 쓰면서 얻은 수확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