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고구려

고구려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도모한 지두우는 어디인가?(수정본)

Chung Park 2022. 6. 26. 19:57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역사의 무대가 유럽과 페르시아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는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도모한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필자의 상기 주장을 검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증을 위해 우선 지두우에 관한 사료를 살펴 보고, 이어 유연에 관한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타타르로 판단되는 지두우와 아바르족으로 판단되는 유연의 위치를 검토하며,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1. 지두우

 

1) 중국의 북적 중 하나.

 

아래 자료에 의하면 5세기 당시 지두우는 중국의 16개 북쪽 이민족의 하나라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이 프랑스의 론강 서부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프랑스에 있던 중국의 위치에서 북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이 된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5세기 당시 지두우는 이른바 16개 북적(北狄, 북방 오랑캐)의 일국으로, .... ‘디더우위’의 어원에 관해서는 ‘디더우()’는 몽골어 ‘달단(, 몽골)’의, ‘위()’는 ‘간()’의 와전으로 ‘달단의 왕’, 즉 ‘몽골의 왕’이란 뜻이라고 해석하는 일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

중국의 『위서(魏書)』 「거란전(契丹傳)」에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3년, 즉 장수왕 67년인 479년에 고구려가 몰래 유연(柔然)과 디더우위를 분할통치하려고 모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동기로는 유연의 고토 회복과 고구려의 북방 진출, 그리고 배후에서 북위에 내부(內附)하는 물길(勿吉)의 통로 차단 등을 들고 있으며, 『수서(隋書)』 등 몇가지 문헌기록에 근거해 그런 모의가 실행에 옮겨졌다는 일부 견해가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디더우위 [地豆于]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정수일)

 

2) 몽골실위

 

지두우는 또한 몽골실위가 존재했던 지역이라 아래 자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실위 (= Schleswig)라는 지역은 덴마크를 포함한 광범한 북쪽지역으로 필자는 추정했다. 즉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을 포함한 지역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는 황두실위가 금발을 가진 스웨덴지역이라는 필자의 추정과도 연관이 있다. 몽골 실위는 아시안계통의 모습을 한 핀란드가 아닐까 하는 필자의 추정이다. 이 지역은 또한 아래 지도에서 보여 주는 달단, 타타르 지역과도 근접하여 있다. 따라서 지두우가 유럽 북쪽이라는 상기의 필자 추정과 궤를 같이 한다. 

 

"더더우는 달달족(타타르)를 한자음을 차용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더더우간이 존재했던 위치가 몽올실위가 존재..... 더더우간은 몽올실위가 예전에 쓰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479년 고구려 장수왕이 지두우를 유연과 분할 점령하려 하였다고 중국인이 쓴 위서(魏書)에 쓰여 있다. 나중에 지두우가 나타나지 않고 고구려의 영토가 넓어진 것을 보아 지두우족이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본다."

(자료 : 지두우, 위키백과)

 

3) 오환, 선비, 거란, 해, 실위 등의 동호 계통 세력들 중의 하나

 

지두우는 북만주의 유목민세력이라 했다. 오환, 선비족이 와해  되어 거란, 해, 실위 등의 동호세력들의 하나라는 것이다. 필자는 오환이 프랑스 북동부지역 근처라 추정했다.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와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시를 지었다는 조조의 일화를 들어서 추정했다. 조조가 실존인물인지는 아직 확인 못했으나, 당시 중국의 황제들은 갈석산에 올라 동이를 점령하려는 야망을 표출했었다. 필자는 갈석산이 프랑스 Central Massif에 있는 산으로 추정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창해는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라고 추정했다.

 

필자는 또한 선비족을 Suebi족이라 추정했다. 북유럽, 중부유럽에서 주로 활동한 Suebi족은 거란족인 Alemanni, 반달족인 Vandals, 부여족인 Burgundians 등의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이다. 실위는 Schleswig라 추정했다. 따라서 이들 동호 세력들은 흉노의 묵특선우시절부터 점령했던 지역이다. 즉 필자의 그동안의 추정과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햇족은 필자는 히타이트로 추정하는데, 히타이트족은 터어키지역, 이집트지역, 레반트지역 등에서 활동했다. 동호라는 동쪽이지만 다소 거리가 있는 지역이다. 북만주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호라는 지역은 보다 넓은 개념일 수 있다. 즉 북유럽을 포함해 흑해 지역과 그 북쪽의 지역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본다면 지두우, 즉 타타르 지역은 동호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타타르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고려하면 이러한 추정은 합리적으로 판단된다. 

 

"지두우는 북만주의..... 유목민 세력이다. 오환 - 선비족이 와해되어 지리멸렬하던 거란실위 등의 동호 계통 세력들 중의 하나이다. 4세기 말에 북위에 의해 토벌당하기도 했다.

이후 5세기 말에 유연과 고구려[1]간 지두우를 분할하자는 모의가 있었고 그후에 잠시 북위 관련으로 나오고는 고구려가 세력이 강할 때부터 기록이 사라져 있어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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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우의 지두는 디더우라고 발음되며 우의 경우에는 간(干) 자의 오류 표기로 보고 달단족 즉 현재 몽골 타타르족의 선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실위가 존재했던 지역에 살고 있었다."

(자료 : 지두우, 나무위키)

 

4) 고구려와 유연의 북쪽

 

지두우는 고구려와 유연의 북쪽이며, 또한 유연의 고토지역이라는 것이다. 최근 모계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유연은 항가리의 아바르인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있다. 또한 서양 유전자가 80%이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즉 유연은 지금 중공의 사가들이 주장하는 북아시아가 아니라 동북유럽에 있었다는 것이다. 유연의 고토지역은 항가리 등 중부유럽 보다 더 북쪽에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지두우지역인 타타르지역은 북유럽, 동북유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동기로는 유연의 고토 회복과 고구려의 북방 진출.."

 

5) 북위와 물길의 통로

 

위서 거란전에서는 479년에 장수왕의 고구려가 유연과 더블어 지두우를 분할 통치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서 그 동기로 북위에 내부하는 물길의 통로를 차단하는 목적도 있다고 했다. 즉 프랑스지역에 있던 중국의 북쪽에 위치한 북위가 중부유럽에 위치했던 물길과 내통하는 것을 막는 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조선의 일부라는 물길이 중북부유럽의 Marcomanni라 추정한다.  이는 발트해가 그 통로가 될 것인바, 발트해에 인접한 스칸디나비아지역을 점령하려 했다는 상기 목표와 일치한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의 활동지역은 이러한 해양루트를 잘 이용하였다. (아래 지도 참조)

 

"그리고 배후에서 북위에 내부(內附)하는 물길(勿吉)의 통로 차단 등을 들고 있으며,"

 

바이킹들의 해양 진출 루트 (자료 : Wikipedia)

 

6) 달단족 즉 타타르족

 

또한 '지두우'는  '디더우'로 몽골의 달단이라는 주장이다. 달단은 서구 역사에서 타타르로 통한다. 즉 타타르 지역이 지두우라는 것이다. 이후 살펴 볼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타르는 주로 북유럽에 걸쳐 있다. 즉 필자가 추정하는 고구려의 위치에서 북쪽에 있는 것이다. 장수왕 시기의 훈족 아틸라제국의 영토(AD 453)를 보면 (이후 지도 참조) 이러한 지역을 일부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장수왕은 479년 보다 북방의 지두우를 도모하려 했으므로 아틸라제국의 더 북쪽에 있는 지역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핀란드, 러시아를 포함하는 타타르지역을 보다 많이 포함하는 지역이다. 

 

"달단족 즉 현재 몽골 타타르족의 선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실위가 존재했던 지역에 살고 있었다."

 

 

2. 유연과 Gokturk

 

1) 유연의 위치와 역사

 

아래 자료에서 보면 유연은 동호 세력으로 북위와 대립하고 남북조 시대의 토욕혼, 송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세력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상당한 지역을 점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토욕혼을 포루투갈의 대서양지역이라 추정했다. 남북조시대의 송나라도, 송첸캄포(Songchencampo, 송나라지역 초원 의미, Campo는 스페인어임)라는 이름을 가진 티베트의 왕이름을 고려하면, 이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동호세력인 유연이 북위를 넘어 이들과 교류를 하려면 육로가 아닌 바다를 통해서일 것이다. 위의 바이킹 활동루트 지도에서 본 바와 같이 발트해나 대서양, 또는 지중해를 통해서일 것이다. 즉 유연이 발트해에 가까운 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선비족이나 모용선비족의 활동 지역이다. 

 

또한 유연은 튀르크에 의해 552년이후에 망하게 되었다고 아래 자료는 말한다. 이 튀르크는 Gokturk로 추정된다. 즉 유연은 Gokturk과도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유연은 발트해에 접한 중북부유럽에 있으면서도 Gokturk과도 인접한 넓은 영토를 가졌던 것이다. 479년 장수왕과 함께 지두우를 도모하려던 유연이 고토회복이라는 목표가 있었다는데, 그래서 이해가 가는 것이다. 

 

"유연(柔然)은 서기 5~6세기에 북방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 국가로 유연의 시조는 목골려(木骨閭)로 불려 그 왕족은 욱구려씨(郁久閭氏)라고 불렀다. 3세기 경에는 선비에게 종속되었지만, 모용선비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의 황족이 시작한 후에 ... 세력을 확대해, 5세기 초 사륜(社崙)의 시대에 고차(高車)를 복속시켜 ....., 북위와 대립했다. 또 사륜은 ‘가한’(可汗)의 칭호를 사용했다. 사륜은 북위의 군대에 패주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북위와의 대립이 깊어진 유연은 고구려유송하나라북량북연토욕혼과 동맹을 하여 북위를 포위망에 넣었다. 하나라, 북량은 북위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유연은 세력을 계속 유지해 토욕혼과 송과 연계를 취하였다.

북위는 429년449년 두차례에 걸쳐 유연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강한 세력을 계속 유지하였고 북위도 중국 남조의 견제 때문에 북방의 유연과의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유연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년,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차가 독립한 이후이다. 고차의 반란은 수습하였지만 튀르크가 강성해져서 552년 튀르크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유연의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한다. 유연의 잔당은 북위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튀르크는 유연의 잔당을 없애고 유연은 무너졌다.

학자들은 과거 아바르 카간국이 통치했던 동유럽 영토에서 발굴된 인골을 토대로 유연이 이후 동유럽을 점령한 아바르족(Eurasian Avars)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료 : 유연, 위키백과)

 

2) 유연과 Gokturk의 위치

 

Gokturk의 위치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코카서스산맥, 카스피해 북쪽지역의 서곡튀르크와 그 동부의 동곡튀르크로 구분된다. 서곡튀르크와 인접한 유연이라면 흑해위 지역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고토회복 지역이며 보다 북쪽지역인 타타르지역인 지두우는 러시아 볼가타타르, 우랄산맥 지역이 된다. 핀란드, 발트3국지역도 포함될 수 있다.  앞에서 추정한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아래 지도에 보이는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유연의 위치와는 거리가 멀다. 즉 중공사가들의 역사왜곡을 여실히 나타내준다. 요즈음은 Funding에 의존하는  Wikipedia에도 이들의 영향이 세지는 것을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또한 위에서 유연은 토욕혼, 남조의 송과도 연합하며 교류했다 하는데, 지금의 중공남쪽에 있는 티베트지역이 토욕혼이라면 중공의 북쪽에 있는 유연이 교류할 수 있겠는가? 수로가 없는 육로로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즉 현 중공 사가들의 역사왜곡을 드러낸다고 본다.  

 

AD 600년의 Gokturk : 서곡튀르크(분홍색)과 동곡튀르크(하늘색)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09933

 

중공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유연 칸국의 위치

 

 

 

3. 아바르칸국

 

유연과 유전적으로 관련이 깊다는 아바르칸국에 대해 좀 더 알아 보자. 이는 유연이 동북아시아가 아닌 유럽지역에 있었다는 검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아바르칸국의 역사와 위치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아바르칸국은 552년경 망한 유연의 후속 시기에 존재하였다. 즉 유연이 망한 후의 유민세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래 자료에서 보면 이들의 종교가 탱그리즘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대개 카칸국이면 그들의 종교가 탱그리즘을 포함한다. 탱그리즘은 Tengri 즉 단군을 숭배하는 샤마니즘이다. 그리고 항가리지역에 정착했으며,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프랑크왕국의  카를루스 대제에게 망한다. 항가리는 Magyar족이라 하는데 이들이 말갈족이 아닌가 한다.  말갈족은 여러 부류가 있는데, 필자는 백두산이 있는 알프스산맥에 있는 말갈은 속말말갈이라 추정한 바 있다. 

 
아바르
Άβαροι

Ávaroi
 
존속기간
558년 ~ 805년
위치
도나우강 이북, 서북 발칸반도 일부, 이탈리아 북부
고대 돌궐
?? (Apar)
Άβαροι (Ávaroi)
Avari
불명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군주
바얀(562~602)[1]
언어
종족
초기
훈족, 사바르족, 오우르족과 소수의 투르크 계열 부족
후기
아바르족, 불가르족, 슬라브족 그 외의 투르크 계열 부족
종교
주요사건
558년 건국
568년 헝가리 장악
582년 싱기두눔,시르미움 점령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격
6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30년 함락 실패 후 왕의 사망
630년 분열
791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에게 패배 후 복속
795년 반란
796년 반란군의 수도가 함락
805년 멸망
성립 이전
게피데 왕국
멸망 이후


 

1. 개요

6세기 중반에 건국되고 9세기 초에 멸망한 유목 국가. 돌궐(Gokturk)에게 밀려난 유연의 후예라는 설이 고전적인 통설이었고 해당 설에 논란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 유전자 조사에 의해 유연족의 후예라는 설이 다시 지지를 받고 있다. #

훈족이 멸망하고 1세기(100년)가 지나고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아바르족이 건너와 현 헝가리 지역에 국가를 건국했다. 'Geougen'이라고도 불렸으며 'Obrs(오브르)'라고도 불린 사료가 있다.

2. 역사

2.1. 558년, 건국

558년에 건국했지만 훈족과 같이 강대하지도 못했고 아틸라처럼 걸출한 왕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주위 민족에 의한 기록이 별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고 프랑크 왕국과도 접촉하여 슬라브 제민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졌다.

2.2. 전성기와 쇠퇴기

그 후 동로마 제국을 주기적으로 약탈하며 영토를 빼앗고 발칸 반도 일부와 이탈리아 북부 일부를 차치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때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동해 양면으로 동로마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기도 했는데, 이들의 동맹을 전해들은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근심걱정에 빠졌다고. 그러나 사산조가 예상 외로 부진을 겪으며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자 마음이 조급해진 아바르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각오하자 결국 후퇴한다.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아바르족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슬라브족들과[2] 동맹으로 삼은 불가르족까지 끌고 와서 수만 명의 대군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한 달 동안이나 계속 공격을 퍼부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워낙 두터운 데다 아바르족들이 공성 기술에 서툴러서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계속되는 피해에 지친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이 아바르족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떠나버려 결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동로마의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2.3. 모든 영토 상실

그리고 얼마 후 칸이 죽어버리고 칸의 패배로 인해 리더십에 의문을 가진 부족들이 이탈해나가고. 동로마의 지원을 받는 토착민들의 대규모 반란으로 나라가 휘청거리며 헝가리 일대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한다.

2.4. 791년, 카롤루스 대제에게 멸망

791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대규모 공격을 가해오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바르 칸국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무릎꿇는다.

 

2.5. 795년, 반란과 실패

그러나 프랑크인들은 잔혹한 폭정과 수탈을 반복했고 이것을 참지 못한 아바르인들과 토착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795년에 일어났으나 바로 다음해 반군의 수도가 점령당하면서 어이없이 종결된다.

 

2.6. 805년, 프랑크군의 학살로 멸국, 멸족

그러던 와중 805년 프랑크군은 아바르인들을 학살하였고 8세기 말에 프랑크 왕국에 의한 아바르인의 파멸은 슬라브인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 주었다. 러시아 최초 연대기(年代記)의 한 기록에 따르면, "신이 그들을 파괴시켰다. 그들 모두는 사라지고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오늘날까지 '아바르인처럼 사라졌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어떤 종족도 어떤 상속자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자료 : 아바르칸국, 나무위키)

 

  

   9세기의 유럽 지도

 

 

Pannonian Avars in Hungary

 

 

2) Gokturk의 서쪽에 위치한 아바르칸국

 

아래 자료에서는 아바르족이 Gokturk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났다 했다. 즉 Gokturk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다. 필자의 유연의 위치 추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북쪽의 게르만족을 압박하고 발트해까지 진출했다 한다. 즉 필자가 추정한 유연의 위치, 발트해 근처라는 것과 일치한다.  또한 롬바르드족을 북부 이탈리아로 밀어 내면서 프랑크왕국과의 대립을 초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 The Avar Khanate ]

아바르족은 유라시아의 투르크 유목 부족 중 하나였다. 이들은 또 중앙아시아 훈 제국의 후예이기도 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아바르족은 후안후안족과 같은 부족으로, 552년 돌궐(Gokturk)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났다. 이들은 557년 사바르스족에 승리를 거둔 이후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부 유럽을 대부분 장악한 이들은 9세기 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이어 아틸라가 1세기 전에 했던 것처럼 북쪽의 게르만족을 압박하고 발트 해까지 진출했다. 아바르족은 이어 여러 게르만족(롬바르드족과 게피드족 등)이 다투던 판노니아 평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게르만족들을 물리친 아바르족은 다뉴브 강 일대에 나라를 건설했다. 아바르족은 롬바르드족을 북부 이탈리아로 몰아냈는데, 이때가 게르만족의 마지막 대이동 시기였다.

아바르족은 626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가 실패한 뒤 자신들의 근거지로 철수했다. 발칸 반도를 슬라브족에게 내준 이후 판노니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이 독립을 쟁취했다. 9세기 초부터 안팎의 압력에 시달리던 아바르족은 결국 805년 프랑크의 샤를마뉴에 의해 멸망했다. 아바르족은 이후 중부 유럽의 토착 부족에게 동화됐으며, 대부분은 헝가리에 흡수됐다."

(자료 : 아바르칸국, 터키민족 2천년사)

 

아바르족이 있던 항가리는 Magyar족이라 한다. 이 Magyar족이 말갈족이 아닌가 한다.  말갈족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항상 함께 했으며, 고구려의 주요 부족중의 하나였다. 필자는 프랑크왕국이 북위를 거쳐 당나라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따라서 상기 나무위키 자료에서 아바르족을 프랑크왕국의 샤를 대제가 말살한 내용이  당나라가 말갈족 20만명을 살해했다는 기록과 유사하다. 시기상으로 805년이면, 고구려의 후예인 이정기의 후손들이 세운 제나라가 아닌가 한다. 즉 제나라가 당나라에게 장악당한 것이다. 이 당시 당나라는 절도사들을 강력히 제압했다. 

 

 

4. 타타르(달단)의 역사와 위치

 

지두우는 달단, 즉 타타르라 했다.  그래서 타타르에 대해 보다 알아 보자. 근대조선시대의 서양 선교사는 조선이 독일에까지 이르렀고, 타타르지역도 모두 조선이라 했다 한다.  지두우가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포함되었으니 타타르가 한국사에 포함된 것을 매우 오래전부터라 할 수 있다. 필자가 몽골의 원류라는 몽골실위 지역이 핀란드지역이 아닌가 했다. 그리고 바이킹지역이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넘어 흑해 위 러시아지역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바이킹 역사도 한국사의 일부로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고트족과 연관된 Gotaland인 Scania (스웨덴 남부 일부지역)의 문양은 수탉머리이다. 고구려는 수탉으로 묘사되곤 했다. 프랑스의 문양도 수탉이다. 필자는 고트족이 훈족 즉 고구려라 추정했다. 

 

1) 광의의 타타르

 

"엄밀히 말해 서양[2]에서 말하는 "타타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계와 튀르크계 유목민족을 모두 통칭하는 말이다. "몽골리아"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까지 "타르타리"라고 불렀을 정도다.

서유럽 및 동유럽에서 '타타르'란 단어를 본다면 그냥 몽골계와 튀르크계가 혼합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 전부를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서유럽 문헌의 '타타르'란 그냥 '중앙아시아 여러 유목민족들'을 통칭하는 말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 '타타르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터키의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가 크림 칸국의 멸망으로 쫓겨난 이들이 망명한 것이다. 이들이 바로 크림 타타르인으로 원래는 크림 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비슷하게 다른 튀르크계 부족들도 훌레구 칸의 바그다드 원정 때 선봉대로 끌려온 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눌러 앉아 하자라인이 되었다.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 이후 킵차크 칸국이 내부적으로 붕괴하면서 카잔 칸국크림 칸국아스트라한 칸국노가이 칸국 등의 여러 튀르크화된 유목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 하나 둘씩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유럽, 특히 이들과 본격적으로 역사적 접점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이런 이슬람을 믿는 몽골-튀르크계 유목민들을 모두 뭉뚱그려 '타타르'라 불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널리 퍼졌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3][4]을 일컬어 소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대충 흑해에서 현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펼쳐진 광활한 스텝 평원 전체를 그냥 뭉뚱그려 '타타르족의 땅'이란 뜻인 타타리아, 영어로는 타타리(Tartaria, Tartary)라고 불렀고, 유럽에서 나온 역사적 지도를 보면 청나라를 두고 중국령 타타리, 만주를 두고 극동 타타리, 크림 칸국이 한창 주름잡았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소(작은) 타타리,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령 타타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16세기~17세기 루스 차르국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카잔 칸국과 크림 반도의 무슬림 타타르들에게 대항하여 동시대 한창 청나라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도망치던 오이라트계 토르구트 부족, 즉 러시아 현지에서는 칼미크인이라고 불리는 불교 타타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다.

그리고 청나라는 튀르크나 몽골과 근연 관계에 있는 같은 알타이 제어 계통인 퉁구스인, 즉 만주족이 세웠고,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들도 여기 동조해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만주 및 몽골은 불교 타타르, 티무르 제국이나 킵차크 칸국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계는 이슬람 타타르로 서로 구분했으며만주족 내지 여진족의 근원지 중 하나인 연해주와 사할린의 사이 바다는 타타르 해협으로 불렀다. 심지어 인도의 몽골계 국가로 티무르의 후예들인 무굴 제국(구르카니)의 경우 인도 타타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중국 역시 청나라 정부를 놓고 '중국은 현재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자료 : 타타르, 나무위키)

 

광의의 타타르 자료를 보면, 불교타타르,  킵착한국이나 오스만제국 등의 이슬람 타타르, 무굴제국 등의 인도타타르로 구분했으며, 청나라도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한다. 우리는 청나라와 조선이 구분이 가지 않는 자료들도 많이 목격한다. 이 모든 타타르지역이 모두 조선이었다면 조선의 영역은 그야말로 광대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숙종은 조선의 강토가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시기보다 넓었다고 했다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러시아의 피터대제가 여러 모로 조선의 숙종과 유사한 것을 확인 했다. 향후 청나라와 러시아 등과의 관계를 연구하며 밝힐 시간이 있을 것이다. 

 

2) 협의의 타타르

 

협의의 타타르는 실위계 부족으로 몽골실위, Gokturk과 요나라, 금나라 등이 관련되어 있다.  필자는 몽골실위는 핀란드, 발틱3국, 서부러시아, 흑해위 우크라이나 지역등이 아닐까 한다. 바이킹의 활동지역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명칭이 비롯된 Rus라는 이름도 바이킹의 어원에서 나왔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이므로 발해국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고 자료에 의하면  발해는 프랑스 론강유역 동쪽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서쪽에는  당나라 (프랑크왕국)가 존재하고, 발해 남쪽에는 통일신라 (스페인, 이태리남부, 발칸반도, 중동지역, 페르시아지역)가 있었을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 갔으면 코카서스산맥 위 (카자르칸국)까지 걸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이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활동하는 것으로 기술되는데, 발해의 일부 또는 그 유민의 세력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가 망한 후 말갈과 돌궐로 그 유민들이 이동했다고 중국 사서에서 말한다 한다.  말갈지역이 발해지역이고 돌궐지역은 후에 연구가 되겠지만 북유럽지역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연이 아바르족 즉 말갈이 Gokturk의 서쪽이라 했으니 서곡튀르크의 서쪽으로 발해의 추정 위치와 유사하다. 그러나 요나라, 그리고 고려의 위치는  요동 요서를 가르는 요수 즉 압록수를 기준으로 갈라지므로 프랑스의 론강, 독일의 라인강 주변에 경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요나라는 발해의 수도를 포함한 일부만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발틱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협의의 타타르지역이 지두우지역에 해당하며, 발해의 강토였을 가능성을 보인다. 즉 Pinn족, Ugur족 지역, Slav족 지역도 포함한 발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자료에서 언급되는 백달단, 흑달단의 구분은 백인 타타르, 몽골계통의 황인 타타르를 의미하지 않나 한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 시키고, 중국 북부에 존재했다. 따라서 중부유럽 북쪽에 위치하지 않나 한다. 여진족이란 명칭도 중북부 유럽에 존재하는 금발의 여인을 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타타르 부족은 괵튀르크(돌궐) 제국 시기부터 명칭이 확인되는 실위계 부족으로카마그 몽골 등과 함께 몽골 고원에 자리잡고 사는 여러 부족들 가운데 하나였다.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몽골 초원으로 이주한 세대인 타타르는 점차 부족 연맹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키르기즈인들이 '9성 타타르의 나라'(Toquz Tatar Eli)라고 부른 것과 송나라의 사신 왕연덕(王延德)이 '9성 달단'(九性 韃靼)이라 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원으로 이주한 타타르는 튀르크계 돌궐 및 위구르(회흘 또는 회골) 제국과 충돌하거나 이들에게 복속되어 살았으며,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족의 요나라가 성립한 이후부터는 요나라의 속부가 되었다.

요나라에서는 몽골 초원의 실위, 튀르크계 유목 부족들을 모두 조복(阻卜)으로 불렀기에 타타르도 이 시기에는 조복의 한 일파로 간주되었고, 북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으로 불렀다.

타타르는 옹구트, 옹기라트 부족과 마찬가지로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으며[7],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북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계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다.

정치적으로 타타르는 요나라 조정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으며 요나라의 황제를 위해 군대를 제공했다. 반대로 요나라는 그 대가로 절도사나 상온, 대왕, 태사와 같은 높은 관직을 수여하고, 조공 무역을 개시해 타타르와 경제적 이익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일부 타타르인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긴 여정에 참여했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아무래도 영토가 금나라와 가깝다보니 타타르는 곧바로 금나라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요나라에서 하사한 관인을 바쳤다. 그 대가로 금나라는 타타르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들을 매개로 몽골 초원의 제부족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자료 : 타타르, 나무위키)

 

3) 중국사에서의  달단 (=타타르)

 

중국사에서 달단이 몽고부족의 호칭이라 했다. 즉 몽골실위의 핀란드, 발틱3국, 우크라이나, 우랄산맥 근처의 볼가타타르 러시아 지역까지 포함하는 지역일 수 있다. 원나라가 밀려난 북원이 이들 지역일 수 있다. 대비달자라는 말은 코가 큰  코카서스인종을 말한다. 즉 달단은 타타르이며, 북유럽지역을 포함한 것이다. 청나라도 타타르인이 주를 이루었다면, 프랑스 역사에서 언급되는 '달따냥'이란 칼을 쓰는 흑기사도 타타르인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청나라가 이 지역을 포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나라를 내몽골 초원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되찾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바로 이 내몽골에서 북원이 멸망해 차하르부, 오르도스부, 투메드부 등의 몽골 6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 부족들을 원래 호칭인 "몽고"(蒙古) 대신에 "달단"(韃靼) 혹은 "달달"(達達)이라고 불렀다. 물론 몽골인도 '달단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달자"(達子)라고 불렀다.

참고로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 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고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몽골인과 몽골을 도와 이들에 흡수, 동화된 또 다른 몽골계 민족인 거란족들이 몽골 제국이 북중국을 정복할 때, 참모 및 관료 등의 지식계층을 담당하게 되자 야만인이란 의미의 '타타르'란 말도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고, 한족에 의해 명나라가 성립된 후, 몽골을 경멸적인 용어로 '타타르'로 호칭하기 시작했으며 아예 북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 즉 여진족도 명나라에서는 당연히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오랑캐'란 말은 원래 몽골계 우량카이족에서 유래한 북방 이민족에 대한 한국어 멸칭으로 사실상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타타르'란 용어도 역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그 외 다른 퉁구스 제족들과 다우르족(몽골계 제족)도 포함시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명나라에 의해 '달자'라는 비하를 받은 여진족들이 세우고, 내몽골의 몽골계 부족들이 합류해 건국한 유목민 정복왕조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을 폐기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애초 한족 왕조 때 자신들을 비하하던 명칭을 청왕조가 굳이 그대로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달자'라는 용어는 만주와 외만주 즉 연해주로 진출해오던 러시아의 카자크 족을 청나라에서 '코가 큰 오랑캐'라는 뜻의 "대비달자"(大鼻㺚子)라고 부른 것이 조선에까지 전해져 조선에서도 '대비달자'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자료 : 타타르, 나무위키)

 

 

4) 현재 타타르인의 지역 분포

현재 타타르인의 지역 분포를 아래에서 보면, 그동안의 필자의 추론이 맞다는 것을 나타낸다.

 

타타르인
татарлар
 
총인구
6,800,000
인구분포
5,319,877 : 러시아
477,875  : 우즈베키스탄
319,377 : 우크라이나
240,000 : 카자흐스탄
175,500 : 터어키
36,355 : 투르크메니스탄
28,334 : 키르키즈스탄
25,900 : 아제르바이젠
20,282 : 루마니아
18,567 : 몽골
언어
타타르어러시아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기독교무종교
민족계통
튀르크족
킵차크 칸국
볼가강 타타르인크림 타타르인립카 타타르인아스트라한 타타르인시베리아 타타르인

타타르인(타타르어: Татарлар / Tatarlar 타타를라르, 러시아어: Татары)은 타타르스탄에 거주하며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튀르크계 민족이다.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다.

 

(자료 : 타타르인, 위키백과)

 

5) 러시아내 타타르

러시아내 타타르인들은 부여족인 불가르족의 볼가-우랄타타르,  우크라이나 돈바스지역의 아스트라한 타타르, 그리고 시베리아 타타르로 3분된다. 타타르인의 모계 유전자 분석을 보면 84%가 슬라브계와 중동계이다. 이들이 몽골인의 후예라 한다면, 필자가 추론한 몽골실위가 핀란드 주위에 있었다는 추론과 이슬람을 믿는 중동계가 신라의 후예라는 필자의 추론과 일치한다. 

 

"러시아의 타타르인은 민족지학적인 관점에서 '볼가 타타르인'(러시아어: Поволжские татары, 타타르어: Идел буе татарлары)으로도 더 잘 알려진 '볼가-우랄 타타르인'(Волго-уральские татары, Идел-Урал татарлары), '아스트라한 타타르인'(Астраханские татары, Әстерхан татарлары), '시베리아 타타르인'(Сибирские татары, Себер татарлары)의 세 집단으로 나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볼가 타타르인(특히 카잔 타타르인)과 아스트라한 타타르인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점이 거의 없고, 시베리아 타타르인 역시 공교육상에서 러시아어와 볼가 타타르어를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러시아어권에서 '타타르인'(Татары)이라고 하면, 이들 세 집단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타타르인은 2010년 기준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영내에 540만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최대의 소수민족으로 간주된다."

.......

 

"오늘날 러시아의 카잔타타르스탄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타타르인은 '볼가-우랄 타타르인' 혹은 '볼가 타타르인'으로 불린다. 이들은 불가르 칸국의 주민족이었던 볼가 불가르인의 후손에 가깝다. 다만 1,000년 넘게 러시아인들과 계속 혼혈되어 사실상 러시아인에 가까운 외형을 보인다.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16%만 동아시아에서 유래하고, 84%는 슬라브계와 중동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모계 유전으로만 따지면 러시아인에 더 가깝다."

(자료 : 타타르, 나무위키)

 

 

러시아내 타타르인 분포

 

 

5. 지두우와 타타르

 

이상의 분석을 종합하여 볼 때, 지두우는 타타르인 중에서 북유럽에 위치한 타타르인을 지칭하지 않나 판단된다. 

 

1) 몽골 실위와 Finno-Ugur

 

즉 몽골실위라 추정되는 Finno-Ugur족 지역이 보다 구체적인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상기에서 살펴 본 9세기의 유럽지도에서 Finno-Ugric Tribes지역이 아닌가 한다. 

 

2) Finno-Ugric languages distribution

 

아래 지도에서  Finno -Ugric 언어 사용 분포 지도를 보면 유사한 흔적을 보인다. 보다 북극에 가까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The Map of Finno-Ugric languages distributions By GalaxMaps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1931694 

 

2) 훈족의 아틸라 제국과 장수왕 시기 고구려

 

이 지역은 훈족의 아틸라 시대 (453년경) 점령했던 지역의 북쪽이 됨으로써, 북방 영토를 개척하려는 478년 장수왕 시기의 지두우 지배 시도와 지리적으로 일치한다. 

 

아틸라 제국

 

 

Hunnic Empire in 453 AD

 

 

3) 고트왕국과 문자왕 시기의 고구려

 

또한 고구려의 최대 강역을 확보한 문자왕 시기의 강역을 고려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아래 지도에서 서고트왕국, 동고트왕국의 지역도 고구려의 그것이라 필자는 추정했다. 여기에 슬라브족의 지역이라 표시된 흰색의 지역도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을 것이다. 지두우를 확보한 고구려를 고려하면 그렇게 추론된다.  

 

Kingdom of Goths in 526 AD

 

4) 지두우(地豆于)는 地頭于? 지두칸국?

 

이렇게 지두우를 북극에 가까운 타타르지역이라 판단한다면 지두우란 한자해석도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지두우의 두자가 콩두(豆)가 아닌 머리두(頭)가 아니였을까 하는 것이다. 후에 중국사가들이 이를 감추기 위해 콩두자로 변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于)는 칸이란 글자을 잘못한 것이라면 결국 지두우는 지두칸(한), 지구 머리에 있는, 북극에 가까운 곳에 있는 카칸국이라는 뜻이 되어 지역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상으로 지두우에 관련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오늘의 분석은 또한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바이킹과 관련한 한국사 연관성이 대두되고 있고, 러시아사와 한국사의 연관성을 연구해 볼 필요를 제시한다. 추후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