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발해

흑해주변의 카자르칸국은 발해의 일부인가?

Chung Park 2022. 11. 1. 14:45

발해의 일부라 판단되는 Khazar Kaganate(650/660 - 969/1050)는 여러가지로 발해의 특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검토는 후일 발해에 관한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하고, 여기서는 Pechenegs지역에 이전에 있던 나라로서, 특히 말기에 관한 역사에 집중하고자 한다. Khazar Khaganate(650/660-969/1050)는 흑해 주변의 방대한 영토를 확보한 국가로서,  여러 튀르크계  민족이 혼합된 국가이며, 따라서 종교도 Tengrism, Buddhism, Judaism, Muslim, 샤머니즘 등이 혼재하였다.  발해 역사에서도 기독교가 있었다고 언급된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Khazar Khaganate (650-850) (source : Wikipedia)

 

1) 카자르칸국의 영역

 

"After their conquest of the lower Volga region to the East and an area westwards between the Danube and the Dniepr, and their subjugation of the Onoğur-Bulğar union, sometime around 670, a properly constituted Khazar Qağanate emerges,[60] becoming the westernmost successor state of the formidable Göktürk Qağanate after its disintegration. 

 

(번역) 동쪽으로는 볼가강 하류지방, 서쪽으로는 다뉴브강과 드네프르강 사이를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Onogur Bulgar를 복속시킨 후, 약 670년경, 카자르칸국이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카자르칸국은 찬란했던 Gokturk Qaganate가 헤체된 후 가장 서쪽의 계승국이 되었다.  

서쪽의 Gokturk를 이어 받은 나라가 카자르칸국이라는 것이다. 즉 고구려를 이어 받은 발해라는 것이다. 필자는 Gokturk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돌궐이 아니라,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필자의 판단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According to Omeljan Pritsak, the language of the onoğur-Bulğar federation was to become the lingua franca of Khazaria[61] as it developed into what Lev Gumilev called a 'steppe Atlantis' (stepnaja Atlantida/ Степная Атлантида).[62] Historians have often referred to this period of Khazar domination as the Pax Khazarica since the state became an international trading hub permitting Western Eurasian merchants safe transit across it to pursue their business without interference.[63] "

(번역) Omeljan Pritsak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의 onongur-Bulgar 연방의 언어는, Khazaria의 상업적 공용어가 되었는데, 이는 Lev Gumilev가 말하는 'steppe Atlantis'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의 카자르 지배를 Pax Khazarica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서유라시아 상인들이 비즈니스를 하는데 방해없이  이 지역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국제무역 허브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Pax Khazarica를 말할 만큼, 이 주위의 상업활동이 왕성했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상인들이 여기를 지나 중앙아시아 또는 아랍국가들과 무역하는데, 지나가는 중간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당나라를 프랑스지역에 있다고 추정했다. 즉 서유럽의 상인이란 당나라의 상인을 의미하며, 이들이 중앙아시아, 북유럽, 비잔틴제국의 신라, 이태리반도의 신라, 신라의 일부인 페르시아상인까지 모두가 지나가는 실크로드를 지나는 가운데 발해가 위치한 것이다. 당나라가 파는 조공무역 상품을 보면 비단이 많이 언급된다. 즉 실크로드는 당나라가 있는 프랑스지역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비단길이 아닌가 한다.  이 또한 일반적인 주장과 다른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발해, 그리고 이어지는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며, 동서 국제무역의 활발한 중심지가 되었다고 본다. 

2) 종교

 

아래 설명에서 보듯이 이들의 종교 Tengrism은 우리 나라 부여, 고구려, 등에서의 제천행사에 해당한다. 즉 이들의 종교가 부여, 고구려에서 내려온 제천행사라는 것은 이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이다. 즉 발해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또한 필자가 고구려로 판단한 Gokturk가  그 지도층이 불교를 믿었다 하며, 그래서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래 영문 자료 참조) 즉 지도층은 불교를 믿었다는 뉴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아래 발해 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발해에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가 있었다. 이것은 건국하던 해에서 멀지 않은 713년 12월 당나라에 갔던 발해 왕자가 절에서 예배하기를 청했던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발해 불상 상당수가 당나라보다 이른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절 지붕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의 연꽃 문양이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니, 이것은 발해 불교가 같은 시대에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과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이 많다는 것을 증언해준다. "

(자료 : 발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심지어 일부 유대교자료에서는 Khazars가 Gog and Magog의 땅(=마고의 땅)에서 유대교의 교리를 잘 지켜 할례를 했다는 기록을 보여 준다 (아래 영문 자료 참조). 그런데 이는 한국사 자료에서 발해가 기독교 일파인 경교가 들어 왔던 흔적이 보인다고 하며,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이 밖에 발해인의 종교로서 기독교 일파인 경교(景敎)가 들어왔던 흔적이 일부 보인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을 것이다."

(자료 : 발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우리가 Turks, Bulgars, Huns 등 서양에 진출한 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 Tengrism은 Khazar 칸국도 믿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위키피디아 설명자료를 살펴보자.

 

"Tengrism

Main article: Tengrism

Direct sources for Khazar religion are not many, but in all likelihood they originally engaged in a traditional Turkic form of cultic practices known as Tengrism, which focused on the sky god Tengri. Something of its nature may be deduced from what we know of the rites and beliefs of contiguous tribes, such as the North Caucasian HunsHorse sacrifices were made to this supreme deity.

 

(번역) 카자르의 종교에 대한 직접적 자료는 많지 않으나, 그들은 원천적으로 튀르크족의 전통 종교 행사인, Tengri 하늘신에 촛점을 맞춘 Tengrism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은 아마도 북코카서스 훈족과 같은 인접한 부족들의 종교의례나 믿음으로부터 온 것일 수 있다.   말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 탱그리신에 바치는 것이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카자르칸국의 종교가 훈족과 연관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역시 고구려를 이은 발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말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스키타이인들의 종교의식인데, 바이킹들도 이러한 의식을 하였다. 필자는 바이킹도 한민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발해지역이 아래에서 알게 되겠지만, 러시아지역을 많이 포함한다. 이들지역은 흑수말갈지역이고 발해의 복속지역인데, 후일 루스카칸국의 모체가 된다. 필자는 이 루스카칸국이 고려를 건설한 왕건의 해상세력이라고 판단한다. 

 

Rites involved offerings to fire, water, and the moon, to remarkable creatures, and to "gods of the road" (cf. Old Türk yol tengri, perhaps a god of fortune). Sun amulets were widespread as cultic ornaments. A tree cult was also maintained. Whatever was struck by lightning, man or object, was considered a sacrifice to the high god of heaven. 

 

(번역) 종교적 의례는 불, 물, 달, 특별한 생명체들, 그리고 길의 신들 (고대 튀르크 yol tengri, 아마도 운명의 신)들에게 봉헌하는 것을 포함했다. 태양 장신구는 종교적 치장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나무에 대한 숭배도 역시 유지되었다. 번개에 밎은 사람이나 사물은 하늘의 지고한 신에 대한 제물로 여겨졌다. 

 

The afterlife, to judge from excavations of aristocratic tumuli, was much a continuation of life on earth, warriors being interred with their weapons, horses, and sometimes with human sacrifices: the funeral of one tudrun in 711-12 saw 300 soldiers killed to accompany him to the otherworldAncestor worship was observed. The key religious figure appears to have been a shamanising qam,[178] and it was these (qozmím) that were, according to the Khazar Hebrew conversion stories, driven out.

 

(번역) 귀족들의 무덤에서 나온 것들로 판단할 때, 사후세계는 현생의 연장으로 여겼으며, 전사들은 그들의 무기들, 말들, 때로는 순장과 함께 묻혔다: 711-12년의 한 장례에는 300명의 병사들이 다른 세상에 동반하가 위해 순장되었다. 조상 숭배도 관찰되었다. 주요 종교행사는 샤마니즘으로 보인다. 카자르 유대인 개종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판단된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순장이 언급되고 있다. 한민족은 엣날부터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넘어 발해까지 순장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조상숭배, 샤마니즘 모두 우리와 관련된다. 

 

Many sources suggest, and a notable number of scholars have argued, that the charismatic Āshǐnà clan played a germinal role in the early Khazar state, though Zuckerman dismisses the widespread notion of their pivotal role as a 'phantom'. The Āshǐnà wer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Tengri cult, whose practices involved rites performed to assure a tribe of heaven's protective providence.[179] The qağan was deemed to rule by virtue of qut, "the heavenly mandate/good fortune to rule."[180]

 

(번역) 많은 자료와 많은 학자들은, 카리스마적 아쉬나(Ashi na)족은 카자르국의 초기에서 중요한 시초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Zuckerman은 그들의 주요 역할을 환상이라며 부인했다. 아쉬나는 Tengri 제례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는데, 이 제례는 하늘의 보호를 제공하는 부족을  확보하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카칸은 하늘로부터 배정 받은 지배자라서 덕목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탱그리즘을 믿는 부족은 제천행사를 한다. 즉 하늘로부터 권위를 인정 받은 지배자가 다스리는 권한을 가졌다 여긴다. 그러나 아쉬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돌궐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Buddhism also had exercised an attraction on leaders of both the Eastern (552–742) and Western Qağanates (552–659), the latter being the progenitor of the Khazar state.....

 

(번역) 불교도 동부 (552-742)와 서부 카칸국 (552-659) 양쪽 모두의 리더들에게 숭배되었으며, 서부 카칸국(Gokturk Qaganates)은 카자르국의 모체가 되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이 언급은 Gokturk가 불교를 지배층이 믿었으며, 카자르국도 그렇다는 것이다. Gokturk가 돌궐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필자의 주장을 강력히 밑받침하는 자료이며, 또한 카자르칸국이 고구려를 이은 발해라는 것을 말해준다. 위의 발해 자료에서 발해의 불교가 당나라의 불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불교 영향을 받았다는 자료와 정확히 일치한다. 

 

In Expositio in Matthaeum EvangelistamGazari, presumably Khazars, are referred to as the Hunnic people living in the lands of Gog and Magog and said to be circumcised and omnem Judaismum observat, observing all the laws of Judaism.

(번역) 마태복음에서 Gazari, 아마도 Khazars는 마고(Gog and Magog)의 땅에 사는 훈족의 사람으로 언급되는데, 유대교의 모든 율법을 지켜 할례를 한 것으로 말하여진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상기 발해에 기독교의 일종인 경교가 들어왔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3) 언어

 

카자르인들은 그 지배층들의 언어가 부여족, 훈족, 추바시족들과 같은 오구르족 언어의 변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즉 부여족, 훈족은 서양사에 나타난 한민족이므로, 카자르칸국이 한민족의 국가, 발해임을 말한다고 본다.

 

" Whereas the royal or ruling elite probably spoke an eastern variety of Shaz Turkic, the subject tribes appear to have spoken varieties of Lir Turkic, such as Oğuric, a language variously identified with BulğaricChuvash, and Hunnish ......"

(번역) 지배층들의 언어는 Shaz Turkic의 동부 변형으로 보이는데, 이 Shaz Turkic 부족들은 Lir Turkic의 변형어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Lir Turkic언어는 불가족어, 추바시어, 훈족의 언어 등과 여러가지로 동일한 언어인 오구르언어이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4) 지도층과 구성원

소수의 지배층이 다양한 부족의 속민들과 다르다는 양상과 서로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발해의 특성을 말해준다고 본다. 

 

"Ruling elite

The ruling stratum, like that of the later Činggisids within the Golden Horde, was a relatively small group that differed ethnically and linguistically from its subject peoples, meaning the Alano-As and Oğuric Turkic tribes, who were numerically superior within Khazaria.[78] ......

 

(번역) 지배계층

Golden Horde내에서의 징기스칸 후손들처럼, 지배 계층은 상대적으로 작은 그룹이며, Khazaria내에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오구르 튀르크부족과 Alans족인 속국민들과는 종족적으로 언어적으로 다르다. 

It has been estimated that from 25 to 28 distinct ethnic groups made up the population of the Khazar Qağanate, aside from the ethnic elite."

 

(번역) 지배계층의 종족외에, 카자르칸국의 인구구성은 25개-28개의 다른 부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5) 비잔틴과 아랍과의 전쟁

이 당시의 비잔틴제국은 신라이며, 또한 페르시아도 신라지역이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아랍세력도 남쪽의 고구려인 고트족을 점령한 신라로 판단된다. 따라서 카자르칸국의 비잔틴과 아랍과의 전쟁은 발해와 신라의 전쟁을 말한다. 

 

"By the 8th century, Khazars dominated the Crimea (650-c.950), and even extended their influence into the Byzantine peninsula of Cherson until it was wrested back in the 10th century......

 

(번역) 8세기까지 카자르는 크리미아(650-950)를 지배했다. 그리고 심지어 비잔틴영역이었던 크리미아 남부의 Cherson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10세기에는 다시 Cherson을 빼앗겼다. 

The Khazars launched a few raids into Transcaucasian principalities under Muslim dominion, including a large-scale raid in 683–685 during the Second Muslim Civil War that rendered much booty and many prisoners.[117] There is evidence from the account of al-Tabari that the Khazars formed a united front with the remnants of the Göktürks in Transoxiana......

(번역) 카자르는 무슬림 지배하에 있던 트랜스코카서스 지역을 공략했는데, 이중에는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가져다 준, 두번째 무슬림 내전기간동안 683-685년 기간중의 대규모 침략을 포함하고 있다. 

The Second Arab-Khazar War began with a series of raids across the Caucasus in the early 8th century. The Umayyads tightened their grip on Armenia in 705 after suppressing a large-scale rebellion. In 713 or 714, Umayyad general Maslamah conquered Derbent and drove deeper into Khazar territory. The Khazars launched raids in response into Albania and Iranian Azerbaijan but were driven back by the Arabs under Hasan ibn al-Nu'man.[118]

 

(번역) 두번째 아랍-카자르 전쟁은 8세기초에 코카서스를 건넌 일련의 공격으로 시작했다.  우마이야왕조는 큰 규모의 반란을 진압한 후 705년 아르메니아를 강력히 지배했다. 713년 또는 714년에, 우마이야왕조의 Maslamah장군은 Derbent을 정복했고, 카자르 영토 깊숙히 쳐들어왔다. 카자르는 그 반격으로 알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에 공격을 가했으나, Hasan ibn al-Nu'man의 아랍군에 의해 다시 후퇴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상기 8세기 전반기의 아랍과 카자르칸국과의 전쟁은 신라와 발해의 전쟁으로 판단된다. 시기상으로 약간의 차이 (714년과 733년)가 있으나, 아래 기록의 발해 무왕 시기, 신라의 발해공격이 위 코카서스지역에서의 전쟁으로 판단된다.

 

아래 발해, 신라, 당나라 자료를 모두 종합해 보면,  발해는 무왕시기 흑수말갈을 공격하려 하는데, 무왕(대무예)의 동생(대문예)이 그 뒤에 있는 당나라를 걱정하며 반대한다. 무왕이 제거하려 하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한다. 무왕은  망명한 대문예를 발해로 보내지 않는 당나라를 바다로 접근해 등주를 공격한다. 당현종은 신라에게 발해를 공격해달라고 부탁한다. 즉 발해의 전선을 확대시켜 당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한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측천무후시기로 토번, 돌궐 등 여러 방면에서 전쟁이 있어 취약한 상황이었다. 당나라는 등주를 공격한 발해와 싸웠으나 실패하고 반격도 실패한다.  등주는 프랑스의 지중해지역에 있는 곳이 아닌가 필자는 판단한다. 당나라의 동쪽 수도 낙양은 지중해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프로방스지방의 Narbonne로 판단한다. 

 

한편 신라는 코커서스산맥을 넘어 발해를 공격한다. 그러나 추위에 동사한 병사들이 많아 별 전과없이 후퇴했다. 이것이 아랍이 Derbent 지키기에 만족했다는 위 기록에 해당한다.  (일부 자료는 당나라가 패배하여 신라 지원군이 그냥 돌아왔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김부식 등이 왜곡한 역사로 보인다.) 당나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에 패강이남의 영역을 신라의 땅으로 인정한다. 이에 신라의 왕은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돌아 본다. 즉 패강은 다뉴브강이며, 평양주와 우두주는 필자가 평양으로 판단하는 스위스의 쥬리히 근방일 것이다. 평양은 당나라가 점령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했다. 그러나 이후 신라와의 국경문제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신라는 발해와 니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 니하도 다뉴브강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당현종이 신라에게 평양주를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필자는 패강이 드네프르강이 아닌가 했는데, 잘못된 추정으로 보인다. 

 

"(신라 성덕왕은)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발해(무왕 때) 남쪽을 공격했고 실패하였으나[10], 이 결과로 735년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신라가 실질적으로는 지배하고 있었고, 이후 당나라와 영토 분쟁의 구실이 사라진 것.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 자료>

三十二年秋七月 당 현종이 군대를 요청하다 (733)
三十二年冬十二月 김지렴을 당에 보내 사례하다
三十三年春一月 김충신이 당 황제에게 부사로 삼아줄 것을 요구하다
三十三年夏四月 김단갈단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三年 당 황제가 김지렴에게 홍려소경원외치의 관작을 주다 (734)
三十四年春一月 형혹이 달을 범하다
三十四年春一月 김의충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四年春二月 김영이 당에서 죽다
三十四年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다 (735)
三十五年夏六月 패강 이남의 땅을 준 것을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다
三十五年冬十一月 김상을 당에 보냈는데 도중에 죽다
三十五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살펴보다 (736)

 

<발해 무왕 자료>

"732년 대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그곳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733년 1월 당나라가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다.
733년 자객을 보내어 대문예를 살해하려 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당나라에 귀순해 오니, 당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는 당현종이 전후 사실을 숨긴 것을 알아채고 글을 올려 "폐하는 거짓을 천하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꾸짖으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이에 당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미터)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 "

<당 현종 자료>

"그러나 발해를 상대로는 실패를 맛보아, 등주를 공격당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이역시 실패해 버렸다.

 

 

Whatever the impact of Marwan's campaigns, warfare between the Khazars and the Arabs ceased for more than two decades after 737. Arab raids continued until 741, but their control in the region was limited as maintaining a large garrison at Derbent further depleted the already overstretched army. third Muslim civil war soon broke out, leading to the Abbasid Revolution and the fall of the Umayyad dynasty in 750."

(번역) Marwan의 공격의 충격이 어떻든간에, 카자르와 아랍의 전쟁은 737년까지 20년이상은 없었다. 아랍의 공격은 7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그들의 이 지역 통제는 Derbent에 대규모 주둔군을 유지하는 정도로 그쳤고, 그 이상 진주한 군대는 철수했다. 3번째 무슬림 내전이 일어나서,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압바스혁명이 이어졌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상기 자료는 737년이후 741년까지 카자르칸국과 아랍의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아래 신라 효성왕 자료를 보면 이 기간중 전쟁이 있었던 것 같은 징조를 말하고 있다. 즉 발해와 신라의 전쟁으로 보인다. 발해 자료는 부실해서 남아 있지 않았다. 

<신라 효성왕(737-742) 삼국사기 자료> 
二年夏四月 당의 사신 형숙이 《도덕경》 등의 책을 왕에게 바치다
二年夏四月 (738) 흰무지개가 나타나고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三年春一月 효성왕이 사당에 참배하다
三年春一月 신충을 중시로 삼다
三年春一月 (739) 선천궁이 완성되다
三年春一月 당 사신 형숙에게 선물을 주다
三年春二月 김헌영을 파진찬으로 삼다
三年春三月 김순원의 딸 혜명을 효성왕비로 삼다
三年夏五月 김헌영을 태자로 책봉하다
三年秋九月 완산주에서 흰까치를 바치다 (739)
三年秋九月 (739)여우가 월성 궁안에서 울다
四年春三月 당에서 사신을 보내 왕비를 책봉하다
四年夏五月 (740) 진성이 헌원대성을 침범하다
四年秋七月 (740) 여인이 정치를 비방하다가 사라지다
四年秋八月 (740)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꾀하다 죽임을 당하다
五年夏四月 정종과 사인이 노병을 사열하다 (741)
六年春二月 동북쪽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五月 (742) 유성이 삼대를 침범하다
六年夏五月 효성왕이 죽다

 

6) 카자르칸국의 말기

 

 

Map showing the major Varangian trade routes: the Volga trade route (in red) and the Trade Route from the Varangians to the Greeks (in purple). Other trade routes of the 8th–11th centuries shown in orange (note that Atil is the major commercial outpost from which trade extends into the far reaches of "Deep Asia"). (source : Wikipedia)

 

"Rise of the Rus' and the collapse of the Khazarian state

루스의 등장과 카자르칸국의 붕괴

 

By the 9th century, groups of Varangian Rus', developing a powerful warrior-merchant system, began probing south down the waterways controlled by the Khazars and their protectorate, the Volga Bulgarians, partially in pursuit of the Arab silver that flowed north for hoarding through the Khazarian-Volga Bulgarian trading zones,[122] partially to trade in furs and ironwork.[123] Northern mercantile fleets passing Atil were tithed, as they were at Byzantine Cherson.[124] 

 

(번역) 9세기에, 바랑기언 루스그룹은 강력한 전사-상인 시스템을 발달시키면서, 카자르와 그의 지배를 받는 볼가불가리아인들에 의해 장악한 물길 남쪽을 따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부는 카자르-볼가 불가리아 무역지대를 지나 북쪽으로 통하는 아랍의 은을 추구하기 위해서이고, 일부는 모피와 철물의 무역을 위해서이다. Atil(카스피해 북쪽, 상기 지도 참조)을 지나는 북쪽의 상선들은 1/10의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들이 남크리미아의 비잔틴영역인 Cherson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카자르와 볼가 불가리아가 같은 무역지대로 묶여 언급된다. 즉 같은 나라에 속했다는 것이다. 발해는 볼가 불가리아 즉 보로국을 속국으로 하고 있었다. 바랑기언 루스그룹은 발해의 속국인 흑수국(흑수말갈)으로 보인다.  흑수는 모스크바강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추정한다. 모스크바강이 흑수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해 무왕 자료에서, 흑수말갈이 발해에 언급을 하지 않고 당나라와 돌궐과 교류하는 것을 보고 공격하려 했다. 흑수말갈이 발해를 사이에 두고 서쪽 건너편에 당나라와 돌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루스지역의 흑수말갈은 발틱해를 건너 프랑스지역의 당나라, 북해나 발틱해의 돌궐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해상로는 동쪽의 바이킹인 바랑기언이 이용하던 해상로이다. 즉 필자가 추정한 위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거란의 별종인 실위의 좌측에는 돌궐이 있고, 우측에는 흑수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새삼 기억난다. 실위는 덴마크지역의 Schleswig라 필자는 추정했다. Swede와도 관련된 발음으로도 생각된다. 

 

Their presence may have prompted the formation of a Rus' state by convincing the SlavsMerja and the Chud' to unite to protect common interests against Khazarian exactions of tribute. It is often argued that a Rus' Khaganate modelled on the Khazarian state had formed to the east, and that the Varangian chieftain of the coalition appropriated the title of qağan (khagan) as early as the 830s: the title survived to denote the princes of Kievan Rus', whose capital, Kiev, is often associated with a Khazarian foundation.[125][126][127][128] 

 

(번역)이들의 출현은 루스국의 형성을 촉진하였을 수 있는데, 이는 슬라브족, Merja족, Chud족이 카자르가 부과하는 공물에 대항하여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뭉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논란이 있지만, 카자르국에 모델을 둔 루스카칸국은 동쪽으로 형성되었고, 이들 연합의 바랑기언 지도자는 830년대에 벌써 칸의 타이틀을 가졌다 : 이 타이틀은 키예프에 수도를 둔 Kievan Rus왕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키예프는 카자르 건국과 자주 관련된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루스카칸국을 언급하고 있다. 즉 키예프루스국도 카칸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키예프루스국이 고려의 초기 해상세력으로 판단한다. 바랑기언은 동쪽의 바이킹이다. 즉 바이킹이 한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위글의 마지막에 키예프가 카자르국 건국과 관련된다 언급한다. 후고구려(태봉) 궁예의 수도 흑양, 철원이 이 근방일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고려 왕건의 수도 송악(개경)의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쓰고자 한다. 

 

The construction of the Sarkel fortress, with technical assistance from Khazaria's Byzantine ally at the time, together with the minting of an autonomous Khazar coinage around the 830s, may have been a defensive measure against emerging threats from Varangians to the north and from the Magyars on the eastern steppe.[129][130] By 860, the Rus' had penetrated as far as Kiev and, via the Dnieper, Constantinople.[131]

 

(번역) 그 당시 카자르의 비잔틴 동맹의 기술적 지원을 얻은 Sarkel 요새 건축과 약 830년대의 자체적인 카자르의 동전 발행은 북쪽으로부터의 바랑기언과 동쪽스텝으로부터의 마자르족의 커져가는 위협에 대항한 방어적 조치일 수 있다. 860년에 이르러, 루스는 드네프르강,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키예프까지 침투했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830년대에 이르러 바랑기언과 마자르족의 세력이 위협적이었다고 언급된다. 북쪽의 바랑기언은 흑수국으로 판단되며 흑수말갈로 추정된다. 마자르족도 원래 여기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갔다가 흑해위로 이동하고 미구에는 항가리지역의 판노니아지역으로 이동했다. 루스카칸국은 860년에 이르러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에까지 상업활동한다는 언급이다. 이 당시 비잔틴제국은 신라였다. 발해사에서 9세기말에 흑수국과 보로국이 거의 독립세력이 되어 친신라세력이 될려고 한다고 언급된다. (아래 자료 참조)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루스국은 흑수국이다. 

886년, 남부 국경의 보로국과 흑수국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자료 : 대현석(발해) (제위 : 871-882/894),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Site of the Khazar fortress at Sarkel (aerial photo from excavations conducted by Mikhail Artamonov in the 1950s).

Alliances often shifted. Byzantium, threatened by Varangian Rus' raiders, would assist Khazaria, and Khazaria at times allowed the northerners to pass through their territory in exchange for a portion of the booty.[132] From the beginning of the 10th century, the Khazars found themselves fighting on multiple fronts as nomadic incursions were exacerbated by uprisings by former clients and invasions from former allies. The pax Khazarica was caught in a pincer movement between steppe Pechenegs and the strengthing of an emergent Rus' power to the north, both undermining Khazaria's tributary empire.[133] 

(번역) 동맹은 가끔 변한다. 바랑기언 루스 침략자들에 위협을 받는 비잔티움은 카자르를 지원하고, 이때 카자르는 북쪽사람들이 일부 전리품과의 교환으로 이들이 자국 영토 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다. 10세기초부터는 카자르는 여러 국경에서 싸우게 됐는데, 이는 유목민들의 침략에 더해 이전의 고객들의 봉기와 이전의 동맹으로부터의 침입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팍스 카자리카는  초원의 Pechenegs와 북쪽에 등장한 강력한  루스 사이에 끼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둘이 공물수입의 카자르제국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10세기초라면 신라가 거의 망하는 혼란의 후삼국시기이다. 따라서 발해도 신라도 새로운 후고구려세력, 고려, 후백제의 세력과 전쟁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발해의 쇠퇴 상황을 위에서 이야기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발해 자료를 보면 말갈의 부상으로 발해의 영토가 줄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의 루스국(흑수말갈)과 볼가 불가리아지역의 Pechenegs가 발해를 쇠퇴케한 세력으로 판단된다. 

 

According to the Schechter Text, the Khazar ruler King Benjamin (ca.880–890) fought a battle against the allied forces of five lands whose moves were perhaps encouraged by Byzantium.[134] Though Benjamin was victorious, his son Aaron II faced another invasion, this time led by the Alans, whose leader had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entered into an alliance with Byzantium, which, under Leo VI the Wise, encouraged them to fight against the Khazars.

 

(번역) Schechter Text에 의하면, 카자르왕 벤자민(880-890)은 비잔티움에 의해 부추켜진 다섯 지역의 동맹군들과 전투를 했다. 비록 벤자민은 이겼으나, 그의 아들 Aaron II는 Alans족 주도의 침략에 마주하게 되었는데, Alans족 리더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비잔티움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비잔티움 왕 Leo VI the Wise가 이들이 카자르와 싸우도록 부추켰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대인수, 대이진, 대건황의 약 60여 년간 잠잠했던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이 때부터 다시 심화되었다. 대현석 재위 후기 신라와 발해 사이에 보로국 흑수국이 있었고, 이들이 헌강왕 대의 신라와 교섭을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발해가 혼란에 빠지면서 ... 말갈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며 영토의 상당수를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현석 시기를 기점으로 융성하던 발해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사후 아들 혹은 친척인 대위해가 왕위를 승계하였는데 《신당서》의 서술 범위가 906년까지인데도 불구하고 대현석 이후의 발해 국왕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882년을 기점으로 발해의 주류 세력이 정당성의 양씨에서 문적원의 배씨로 교체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대현석이 정변에 의해 시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류 세력 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위해 문서에 자세히 적혀 있다.

대현석부터는 군주의 즉위년도와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871년~882년 동안에는 정당성의 양씨가 하정사를 맡았으나 882년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 문적원의 배씨가 하정사 지위를 독점하기 때문에 882년에 비정상적으로 왕계가 넘어가고 대위해-대인선 계열 군주가 즉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자료 : 대현석(발해) (제위 : 871-882/894),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By the 880s, Khazar control of the Middle Dnieper from Kiev, where they collected tribute from Eastern Slavic tribes, began to wane as Oleg of Novgorod wrested control of the city from the Varangian warlords Askold and Dir, and embarked on what was to prove to be the foundation of a Rus' empire.[135] The Khazars had initially allowed the Rus' to use the trade route along the Volga River, and raid southwards. See Caspian expeditions of the Rus'. According to Al-Mas‘udi, the qağan is said to have given his assent on the condition that the Rus' give him half of the booty.[132] 

(번역) 880년대에 이르러, 카자르는 키예프에서 드네프르강 중류지역을 지배했는데, 여기 키예프에서 카자르는 동부 슬라브족들로부터 공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카자르의 지배는, Novgorod의 Oleg가 바랑기언 전사들 Askold and Dir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은 후로, 약화되었으며, 이것이 루스제국의 건설에 초석이 되었다. 카자르는 초기부터 루스가 볼가강을 따른 무역로를 이용하여 남쪽을 약탈하는 것을 허락했다. Caspian expedition of the Rus' 참조. Al-Mas'udi에 의하면, 카칸은 루스가 그에게 전리품의 반절을 주는 조건에 동의했다 말하여진다. 

 

In 913, however, two years after Byzantium concluded a peace treaty with the Rus' in 911, a Varangian foray, with Khazar connivance, through Arab lands led to a request to the Khazar throne by the Khwârazmian Islamic guard for permission to retaliate against the large Rus' contingent on its return. The purpose was to revenge the violence the Rus' razzias had inflicted on their fellow Muslim believers.[136] The Rus' force was thoroughly routed and massacred.[132] The Khazar rulers closed the passage down the Volga to the Rus', sparking a war.

(번역) 비잔티움이 911년 루스와 평화조약을 맺은 2년후, 913년에, 카자르의 묵인하에 아랍땅을 통한 Varangian습격은, 호레즘 이슬람 경호대가 카자르 왕관을 요구하게 했는데, 이는 이들 경호원들이 돌아 오는 길에  대규모 루스 파견대에 대한 보복을 가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목적은 루스 약탈이 그들의 동료인 무슬림 신자들에게 가한 폭력에 대한 보복이었다. 루스군은 완전히 패배되고 학살되었다. 카자르 지배자는 볼가강으로부터 루스에 이르는 통로를 막았는데, 이는 전쟁을 촉발했다. 

 

In the early 960s, Khazar ruler Joseph wrote to Hasdai ibn Shaprut about the deterioration of Khazar relations with the Rus': 'I protect the mouth of the river (Itil-Volga) and prevent the Rus arriving in their ships from setting off by sea against the Ishmaelites and (equally) all (their) enemies from setting off by land to Bab.'[137]       

 

(번역)  960년대초에, 카자르 지배자 Joseph는 Hasdai ibn Shaprut에게, 카자르와 루스의 관계가 악화된 것에 대해 서신을 보냈다. : 나는 볼가강 하구 (Itil-Volga)를 보호하여, 루스가 그들의 배로 바다로 출발하여 Ishmaelites에 도달하는 곳을 막고, 또한 Bab(=Derbent)으로 육지를 통해 출발하는 모든 적들(루스)을 또한 막고 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10세기에 들어 발해(926년 멸망)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서 그 세력이 약해지고, 신라 또한 935년 망하기 전에, 후백제 (900년 건국), 후고구려 (901년 건국), 고려 (918년 건국)가 왕성한 정복전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960년대 기록은 이미 고려의 시대에 들어 벌어진 전쟁으로 보인다. 

 

The Rus' warlords launched several wars against the Khazar Qağanate, and raided down to the Caspian sea. The Schechter Letter relates the story of a campaign against Khazaria by HLGW (recently identified as Oleg of Chernigov) around 941 in which Oleg was defeated by the Khazar general Pesakh.[139] The Khazar alliance with the Byzantine empire began to collapse in the early 10th century.

 

(번역) 루스전사들은 여러 차례 카자르카칸국과 전쟁을 하여, 카스피해까지 급습했다. Schechter는 941년경 카자르에 대한 공격이야기를 언급하는데 (최근에 Chernigov의 Oleg로 확인됨), 이때 Oleg는 카자르 장군 Pesakh에 의해 패배하였다. 비잔틴제국과 카자르의 동맹은 10세기초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Byzantine and Khazar forces may have clashed in the Crimea, and by the 940s emperor Constantine VII Porphyrogenitus was speculating in De Administrando Imperio about ways in which the Khazars could be isolated and attacked. The Byzantines during the same period began to attempt alliances with the Pechenegs and the Rus', with varying degrees of success. Sviatoslav I finally succeeded in destroying Khazar imperial power in the 960s, in a circular sweep that overwhelmed Khazar fortresses like Sarkel and Tamatarkha, and reached as far as the Caucasian Kassogians/Circassians and then back to Kiev.[140] Sarkel fell in 965, with the capital city of Atil following, c. 968 or 969........

 

(번역) 비잔틴군과 카자르군은 크리미아에서 격돌했다. 940년대에 Constantine VII Porphyrogenitus 황제는 카자르가 고립되어 공격받는 방법에 대해 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추정했다. 이 기간동안 비잔틴은 Pechenegs와 Rus와 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으나, 성공정도는 다양했다. Sviatoslav I는 마침내 960년대에 카자르제국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Sarkel 이나 Tamatarkha와 같은 카자르요새들을 쓸어 버리고 코카서스 Kassogiams/Circassians까지 진출했고 다시 Kiev로 돌아왔다. Sarkel은 965년에 함락되었고, 수도인 Atil은 968년 또는 969년 함락되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The 10th century Zoroastrian Dênkart registered the collapse of Khazar power in attributing its eclipse to the enfeebling effects of 'false' religion.[158] The decline was contemporary to that suffered by the Transoxiana Sāmānid empire to the east, both events paving the way for the rise of the Great Seljuq Empire, whose founding traditions mention Khazar connections.[159][160] Whatever successor entity survived, it could not longer function as a bulwark against the pressure east and south of nomad expansions. By 1043, Kimeks and Qipchaqs, thrusting westwards, pressured the Oğuz, who in turn pushed the Pechenegs west towards Byzantium's Balkan provinces.[161]

 

(번역) 10세기의 조로아스타교 Denkart는 카자르국의 붕괴가 사교(false religion)의 나쁜 영향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당시 카자르 쇠퇴는 추세였는데, 동쪽으로는 Transoxiana Samanid 제국에 의해 고통을 받았으며, 이 두가지 사건은 Great Seljuq 제국의 태동에 길을 닦아 주었다. 그런데 셀주크제국의 전통은 카자르와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누가 계승국가로 살아남든, 동부와 남부의 유목세력의 확장에 대항하여 더이상 보호망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043년에 Kimeks와 Qipchaqs이 서쪽으로 밀고 가서 Oguz를 압박하고, Oguz는 다시 Pechenegs를 서쪽으로 가서 비잔틴 발칸지방을 압박하였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카자르의 전통이 셀주크제국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위에서 언급하는데, 앞으로 유의해서 새겨야 할 언급으로 판단된다. 1043년 Kimeks, Qichaqs이 서쪽으로 Oguz를 압박하고, Oguz는 다시 Pechenegs를 서쪽으로 가서 비잔틴 발칸지방을 압박하였다는 언급에서, 몽고의 출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서양사학자들은 징기스칸이 천산산맥 동쪽으로 이동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필자는 몽고제국이 송나라가 있던 프랑스지역까지 진출하여 원나라를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즉 몽고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놀라운 결과가 도출될 것으로 기대한다. 

 

Khazaria nonetheless left its mark on the rising states and some of their traditions and institutions. Much earlier, Tzitzak, the Khazar wife of Leo III introduced into the Byzantine court the distinctive kaftan or riding habit of the nomadic Khazars, the tzitzakion (τζιτζάκιον), and this was adopted as a solemn element of imperial dress.[162] The orderly hierarchical system of succession by 'scales' (lestvichnaia sistema:лествичная система) to the Grand Principate of Kiev was arguably modelled on Khazar institutions, via the example of the Rus' Khaganate.[163]

 

(번역) 카자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등장하는 국가에 그들의 전통과 행정기구의 흔적을 남겼다. 훨씬 전에, Leo III의 카자르인 부인 Tzitzak은 비잔틴 궁에 특별한 kaftan (여자들이 입는 소매가 넓고 헐렁하며 긴 원피스), 그리고 유목민 카자르의 승마 습관인, tzitzakion을 도입했다. 그리고 이것은 궁정옷의 근엄한 요소로 채택되었다. 등급에 따른 질서있는 계급 체계의 Grand Principate of Kiev에의 승계는 카자르 조직에 모델을 두고 있으며, 루스카칸국의 예가 그것이다. 

 

카자르는 발해이므로, 고려에 많은 유민이 흡수되었으며, 비잔틴제국도 신라에 이어 고려로 이어진다. 즉 비잔틴에 카자르의 일부 모습이 이어진 것은 이후 비잔틴이 신라를 흡수한 고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루스카칸국에도 이어졌다고 위에서 언급한다. 필자는 루스카칸국도 고려의 일부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아니 고려의 건국세력이 이들 해상세력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키예프 루스카칸국에 대해 별도의 글을 쓰고자 한다. 그때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이때에 신라의 말기, 후삼국시대의 상황 속에서 키예프 루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한민족사 후삼국시대에서 누구인지에 대해 보다 심도있게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The proto-Hungarian Pontic tribe, while perhaps threatening Khazaria as early as 839 (Sarkel), practiced their institutional model, such as the dual rule of a ceremonial kende-kündü and a gyula administering practical and military administration, as tributaries of the Khazars. A dissident group of Khazars, the Qabars, joined the Hungarians in their migration westwards as they moved into Pannonia. 

 

(번역) 흑해지역의 범 항가리부족은 아마도 839년 (Sarkel)부터 카자리아를 위협했는데, 카자르 부족처럼, 제사장(kende-kundu)과 행정적 군사적 관리(gyula)를 별도로 하는 제도적 모델을 시행했다. 카자르에서 이탈한 한 그룹, Qabars는 항가리에 합류하여, 이들이 판노니아로 이주할 때 같이 서쪽으로 이주했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Elements within the Hungarian population can be viewed as perpetuating Khazar traditions as a successor state. Byzantine sources refer to Hungary as Western Tourkia in contrast to Khazaria, Eastern Tourkia. The gyula line produced the kings of medieval Hungary through descent from Árpád, while the Qabars retained their traditions longer, and were known as "black Hungarians" (fekete magyarság).........

 

(번역) 항가리주민 속에서의 요소들은 계승국가로서 카자르 전퉁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비잔틴 자료는 카자리아를 동부 Tourkia로 언급하는 것에 반하여 항가리를 서부 Tourkia로 언급한다. Gyula line (행정적 군사적관리 계층)이 Arpad 후손들을 통해 중세 항가리의 왕들이 되었으며, Qabars는 그들의 전통을 더 오래 간직하며, black Hungarians (흑수 항가리인)으로 알려졌다. 

항가리는 흑수강인 모스크바강의 지역에 origin을 두고 있다. 마자르족은 말갈이 아닌가 한다. 말갈은 고구려와 오랫동안 함께 한 부족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는 말갈인을 20만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 발해도 말갈인이 고구려 유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카자르와 항가리는 많은 공통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 자료에서 카자리아를 동부 튀르키아, 항가리를 서부 튀르키아로 부른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자료 : Khaza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 Corea, 카테고리, Khazar)

 

 

6) 발해의 영역

 

발해의 영역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 의하면 카자르칸국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구당서, 신당서 자료를 보면, 요수를 건너 요동에 읍루의 동모산에서 발해의 건국이 대조영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나라의 추격과 전쟁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 이해고는 발해의 대조영군대에게 패했다. 그리고 이후 거란이 해와 함께 돌궐에 귀속하게 됨에 따라, 길이 막히게 되어 더이상 발해를 공격할 수 없었다.

이는 거란과, 해(=스위스의 Helvetii), 그리고 이당시의 돌궐이 당나라의 동쪽, 그리고 발해의 서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후에 요나라가 되는 이 거란지역을 신성로마제국이 있던 독일지역으로 추정한다. 이에 대해 이미 필자가 강동6주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어, 잘 확인된 바 있다. 즉 발해는 독일지역에 있던 거란의 우측에서부터 흑수말갈을 포함한 동쪽의 먼바다까지 영토를 이루었고, 남으로는 니하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니하를 다뉴브강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카자르칸국은 넓은 발해의 일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대조영은 진국왕이라 칭하고 돌궐과 교류하였으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발해지역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해북의 여러나라를 얻었다는 표현은 필자는 부여, 옥저의 중부및 동부유럽,  진한 밑의 변한은 지중해 동쪽끝지역을 말한다고 추정한다. 조선의 지역은 이태리반도와 그위지역, 발칸반도와 그위의 지역 등을 포함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하는데, 이중 어떤 지역을 말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진국이란 나라는 고대에서도 언급되는 나라로 페르시아지역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의 글, 낙랑 시리즈 참조). 따라서 진국이라 칭한 대조영의 건국 위치가 동모산이라 했는데, 고구려의 계루부가 있던 곳이라 하며, 읍루가 있던 곳이라 하는데, 현재는 아직 모른다. 앞으로 파악해야할 과제이다. 

 

 

해와 함께 

<구당서 기록>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既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려(高麗)[7]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가족을 데리고 영주(營州)로 이주했다.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保阻以自固. 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만세통천년[8]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則天)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무후가 보낸 병력(王師)[9]은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為振國王, 遣使通於突厥.

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에 뛰어났기 때문에 말갈 무리 및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698년∼699년)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고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연락했다.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越熹靺鞨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 編戶十余萬, 勝兵數萬人. 風俗瑟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

 

영토는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맞닿았다. 월희말갈(越熹靺鞨)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렀고, 영토가 사방 2000리에 편제된 가구(編戶)가 10여만 호, 강군(勝兵)이 수만 명이었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거의 같았으며, 제법 문자를 쓰고 기록을 할 줄 알았다.

(자료 : 고왕(발해),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신당서 자료>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爲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 씨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武后封乞四比羽爲許國公,乞乞仲象爲震國公,赦其罪。比羽不受命,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象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於是契丹附突厥,王師道絕,不克討。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측천무후[武后]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그 죄를 사면했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中郎將) 삭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이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그때 거란이 돌궐에 붙어 길이 막히게 되어서 당군이 토벌할 수 없었다.

祚榮即並比羽之衆,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다. 제법 글을 쓸 줄 알았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자료 : 고왕(발해),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