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지난 글에서는 당나라와 신라, 발해, 돌궐, 거란, 토번의 관계를 살펴 보며, 발해의 당나라 등주공격(732년)의 배경을 분석하고, 또한 733년 신라와 당의 반격의 실패, 그리고 당의 낙양 근처의 천진교에서의 대문예 암살시도 및 마도산에서 당 - 발해/거란 전투를 살펴 보며, 그 위치를 추정해 보았다.
그리고 춘추시대(기원전 7세기)의 등나라가 있던 등주, 927년 후당의 등주에서의 후백제 수군 및 거란 사신의 죽음 사건을 통해 등주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또한 돌궐과 발해의 연합이 가능한 상황이 현 중공지역에서 가능한지 알아 보고, 필자의 추정인 북유럽의 돌궐 해상세력이 발해의 해상세력과 연합하기 더 용이하며,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등나라를 정벌한 초나라의 초문왕이 장강일대의 강국이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등나라, 등주가 장강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이 현 중공지역을 중심으로한 중국역사에는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제 이러한 지난 편에서의 분석 결과가, 프랑스지역의 프랑크왕국과 사라센 세력인 우마이야왕조의 이베리아반도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물론 이 상황에서 돌궐과 거란의 개입이 있을 것인데, 프랑크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II. 등주에 관한 추가적인 위치 정보
지난 글에서 접하지 못했던 등주에 관한 추가자료를 접하게 되어 이글에서 싣는다. 아래 자료에서 산남도에 관한 자료에서 '등주'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당현종 시기 733년 산남도를 동도와 서도로 분리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동도에 등주가 속해 있다. 산남도가 어디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동쪽에 등주가 있었다는 것을 유념하고자 한다.
"산남도(山南道)는 당나라 시기에 설치된 중국의 옛 행정 구역으로 지금의 허난성 난양시 일대, 후베이성 장강 이북 지역, 쓰촨성 동부, 산시성 장안 이남 산간 지역을 관할했다......
627년(당 태종 정관 원년)에 정식으로 설치되었고 733년(당 현종 개원 21년) 관할지역중 동부지역이 동도, 서부지역이 서도로 분리되었다. 이후 각지에 절도사가 파견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행정 구역
동도
강릉부(江陵府) · 협주(峽州) · 귀주(歸州) · 기주(夔州) · 예주(澧州) · 낭주(朗州) · 충주(忠州) · 부주(涪州) · 만주(萬州) · 양주(襄州) · 필주(泌州) · 수주(隋州) · 등주(鄧州) · 당주(唐州) · 균주(均州) · 방주(房州) · 복주(復州) · 정주(郢州) · 금주(金州)
서도
흥원부(興元府) · 양주(洋州) · 이주(利州) · 봉주(鳳州) · 흥주(興州) · 성주(成州) · 문주(文州) · 부주(扶州) · 집주(集州) · 벽주(壁州) · 파주(巴州) · 봉주(蓬州) · 통주(通州) · 개주(開州) · 낭주(閬州) · 과주(果州) · 거주(渠州)
(자료 : 산남도(당), 위키백과)
현 중공지역을 전제로 언급하는 위의 자료를 수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자료는 산남도가 장강이북지역, 그리고 황허 이남 (현 중공지역의 장안이남지역) 산간지역을 의미하지 않나 추정한다. 그리고 그 동쪽에 등주가 있었다.
현 중공지역에서는 하남도와 산동반도지역을 등주지역으로 보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장강을 Ebro river로 보고, 황허를 Loire river로 보면, 그리고 산남이니,
산악지역 이남을 고려하면, 아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프랑스의 Limoges, Bordeaux 등이 포함된 Aquitaine지역이 산남도가 될 수 있다. 산남도 중에서도 등주가 동도에 속한 것을 고려하면, 등주는 보다 우측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Massif Central이나 Alps이남지역은 상기 자료의 여러 주가 속한 산남도로서는 지역이 너무 좁다는 판단이다.
프랑스 지역의 지형 및 도시 지도 (자료: WorldAtlas.com)
한편 고려 성종시대에 등장하는 산남도 자료를 고려하면, 신라 구주의 하나인 강주(康州)의 영역을 토대로 편성되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강주를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 추정했다. 고려시대의 산남도의 산의 기준은 피레네산맥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공사가들은 강주가 강거 지역 즉 중앙아시아로 추정한다. 신라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고 중공사가들이 주장하는 꼴이 된다.
고려의 자료는 보다 세밀한 자료를 보이나, 한반도를 상정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는 그 한계가 있으므로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자 한다. 단지 이 자료는 고려시대에도 강주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필자는 해상세력인 왕식렴의 강주 점령을 근거로 고려가 초기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정했다. (필자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724 )
"산남도는 고려 성종 때 시행된 십도(十道)의 하나로서,...... 신라 구주(九州)의 하나인 강주(康州)의 영역을 토대로 편성되었다. "
(자료 : 산남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상의 두가지 자료를 고려하면, 산남도는 보다 넓은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사료되며,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당현종 시기의 등주를 고려하면, 고려시대 자료보다는 당나라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럴 때 프랑스의 Aquitaine지역이 산남도에 해당하며, 등주는 이 지역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III. 당시 프랑크왕국의 아랍과의 전쟁 상황
1. Umayyard invasion of Gaul (719-732)
우마이야왕조는 719년부터 732년까지 Gaul지역 (프랑스지역)을 침범했다고 위키자료는 말한다. 프랑스 동남부 지역에서는 Septimania지역을 확보하였으나 르와르강, 론강 계곡지역은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759년에는 다시 Septimania지역을 프랑크에 빼앗겼으나, 10세기에 들어 지중해연안의 Fraxinet지역을 확보했다고 기술한다. (아래 자료참조)
"The Umayyad invasion of Gaul occurred in two phases in 719 and 732. Although the Umayyads secured control of Septimania, their incursions beyond this into the Loire and Rhône valleys failed. By 759 they had lost Septimania to the Christian Franks, but would return in the 10th century to establish Fraxinet on the Mediterranean coast in France.
Gaul지역 침입은 우마이야왕조가 이베리아반도 정복의 계속인데, 피레네산맥 북쪽의 서고트왕국의 마지막 지역인 Septimania지역의 침입으로 시작한다. 720년 서고트왕국의 수도인 Narbonne 가 함락된 후, 아랍군과 베르베르족으로 이루어진 우마이야군은 북쪽인 Aquitaine지역으로 향한다. 이들의 진군은 721년 Toulouse전투에서 멈추는데, 그러나 그들은 아비뇽, 리용, Autun까지 남부 Gaul지역을 유린했다. (아래 지료 참조)
The invasion of Gaul was a continuation of the Umayyad conquest of Hispania into the region of Septimania, the last remnant of the Visigothic Kingdom north of the Pyrenees.[1] After the fall of Narbonne, the capital of the Visigothic rump state, in 720, Umayyad armies composed of Arabs and Berbers turned north against Aquitaine. Their advance was stopped at the Battle of Toulouse in 721, but they sporadically raided southern Gaul as far as Avignon, Lyon and Autun.[1]
주요 우마이야군은 Tours까지 향했으나, 732년 Tours전투에서 패배한다. 732년이후 프랑크군은 Aquitaine과 Burgundy지역에서 권위를 확보했으나, 759년에 이르러서는 Septimania지역을 관리하는데 그쳤다. 이는 무슬림의 무관심과 지역 고트족의 불만에 따른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A major Umayyad raid directed at Tours was defeated in the Battle of Tours in 732. After 732, the Franks asserted their authority in Aquitaine and Burgundy, but only in 759 did they manage to take the Mediterranean region of Septimania, due to Muslim neglect and local Gothic disaffection.[1]
이후에 9세기에 들어, 무슬림의 프랑스에서의 급습은 프로방스지역의 요새인 Fraxinetum의 설립으로 결과되는데, 이는 약 1세기동안 지속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 later Muslim incursion into France, in the ninth century,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Fraxinetum, a fortress in Provence that lasted for nearly a century.
(source : Umayyard invasion of Gaul,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ainfos.tistory.com/381 )
아래 서고트왕국(고구려)의 500년 시기 (문자왕 시기) 점령지역(갈색)을 보면,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수에비왕국(토욕혼지역)과 북쪽 약간의 지역을 제외한 지역을 포함하며, 프랑스지역에서는 Aquitaine지역과 동남부 프로방스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부르군디언 지역은 요서에 있는 백제지역으로 판단된다. 즉 아키텐지역과 프로방스지역은 원래 고구려지역이었으며, 신라인 우마이야왕조가 고구려(평양성지역)가 멸망한 후, 712년이후 고구려의 이들 지역을 확보하는 과정이 우마이야왕조의 Gaul지역 침입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Visgothic Kingdom in 500 (source : Wikipedia)
그러나 이후 고트왕국은 아키텐지역을 잃은 것으로 기술된다. (아래 지도 참조) 고트족의 Theodoric the Great왕인 문자왕은 507년 한성(Clermont-Ferrand)을 되찾으려 백제를 공격을 했다가, 무령왕에게 패배하고 횡악(피레네산맥?)으로 물러났다 하였다. 이때 아키텐지역도 잃지 않았나 한다. 아래 두번째 지도에서 프랑크왕국은 507년에 아키텐지역을 확보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이 아닌 백제인 Burgundians이 확보했을 수도 있다.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래 아키텐왕국(584-585) 지도를 보면, 백제(위덕왕 시기)인 동로마군(Constantinople)이 병력을 파견하여 아키텐지역을 공격한 경로를 보여준다. 아니면 문자왕 시기 백제에 패한 즈음에, 이틈을 타 프랑크왕국이 아키텐지역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아무튼 아키텐지역은 프랑크왕국(당나라), 서고트왕국(고구려), 부르군디언, 동로마제국(백제)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지역이 된 것이다.
Empire of Theodoric the Great in 523 (source : Wikipedia)
프랑크왕국의 확장 (자료 : 위키피디아)
Kingdom of Aquitaine in 584-585
아래 지도는 732년의 시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피레네산맥이하로 이미 내려가 있는 상태이다. 즉 일부 프랑스동남부 Septimania지역(카르카손지역)을 제외하고는 Gaul지역에 진출하지 못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산맥 근처는 프랑크왕국도 아닌 제 3국의 지역임을 표시한다.
Al Andalus in 732 (source : Wikipedia)
아래 지도는 750년경의 우마이야왕조가 이베리아반도지역의 점령지역을 표시하고 있다. 일부 북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프랑크왕국과 접하고 있으나, Narbonne지역은 우마이야왕조의 지역으로, Toulouse지역은 프랑크왕국의 지역으로 묘사된다.
Umayyard caliphate in 750 (Iberia Region) (source : Wikipedia)
이러한 개괄적인 상황을 미리 살펴보는 것은, 고구려인 서고트왕국의 지역이 신라인 우마이야왕조로 넘어 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살피고자 함이다. 이는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지역에서의 전투가 우마이야왕조인 신라와 프랑크왕국인 당나라의 전투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즉 아키텐지역과 프랑스 프로방스지역 (동남부)에서의 전투는 발해와 당나라의 전투지역일 수 있다는 필자의 판단인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싸웠다면 733년 당나라가 신라에 군사원조를 청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이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을 위키피디아 자료를 통해서 알아 보자.
1) Umayyad conquest of Septimania
760년 경 피레네 산맥 남북 지역 (source : Wikipedia)
716년까지 우마이야 칼리프의 남쪽으로부터의 압박에 의해, 서고트왕국은 Narbonesis(Septimania)지역(현대의 Languedoc-Roussillon지역)으로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713년 Septimania의 서고트족은 Ardo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Narbonne로부터 지배했다. 717년, 우마이야왕조는 처음으로 피레네산맥을 건넜다. 이후 Septimania지역을 정복하는데 3년이 걸렸다. 무슬림 자료에 의하면, Musa ibn Nusayr(712-714)는 서고트왕국의 동쪽인 Rhone강까지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 자료는 의문시된다. (아래 자료 참조)
"By 716, under the pressure of the Umayyad Caliphate from the south, the Kingdom of the Visigoths had been rapidly reduced to the province of Narbonensis (Septimania), a region which corresponds approximately to the modern Languedoc-Roussillon. In 713 the Visigoths of Septimania elected Ardo as king. He ruled from Narbonne. In 717, the Umayyads under al-Hurr ibn Abd al-Rahman al-Thaqafi crossed the Pyrenees for the first time on a reconnaissance mission. The following campaign of conquest in Septimania lasted three years.[2][3] Late Muslims sources, such as Ahmad al-Maqqari, describe Musa ibn Nusayr (712–714) as leading an expedition to the Rhône at the far east of the Visigothic kingdom, but these are not reliable.[2]
다음 우마이야왕조의 지배자 al-Samh는 719년 피레네산맥을 건너 720년 Narbonne를 정복했다. Moissac 연대기에 의하면, 도시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한다. 이 도시의 함락은 Ardo의 7년 지배를 끝내고, 서고트왕국도 그러했으나, 서고트족 귀족들은 카르카손(Carcassone)이나 님므(Nimes) 같은 Septimania도시들을 계속 지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l-Samh는, Al-Andalus에 영구적으로 포함시키고자, 721년 Septimania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아래 자료 참조)
The next Umayyad governor, al-Samh, crossed the Pyrenees in 719 and conquered Narbonne (Arbuna to the Arabs) in that year or the following (720).[2] According to the Chronicle of Moissac, the inhabitants of the city were slaughtered.[4] The fall of the city ended the seven-year reign of Ardo and with it the Visigothic kingdom, but Visigothic nobles continued to hold the Septimanian cities of Carcassonne and Nîmes.[2][3] Nevertheless, al-Samh established garrisons in Septimania (721), intending to incorporate it permanently into al-Andalus.[3]
그러나 우마이야왕조의 기세는 Toulouse 대전투(721)에서 al-Samh가 아키텐의 Odo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당분간 멈추었다. 고트족의 Septimania는 무슬림에게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했는데, 이는 우마이야왕조가 이들 지역의 주민과 고트족 귀족들의 조건부 지원을 얻어 지배하는 것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 참조)
However, the Umayyad tide was temporarily halted in the large-scale Battle of Toulouse (721), when al-Samh (Zama to the Christian chronicles) was killed by Odo of Aquitaine. In general terms the Gothic Septimania surrendered to the Muslims in favourable conditions for them, allowing the Umayyads to rule the region with the conditioned support of the local population and the Gothic nobles.
725년, 후계자 Anbasa ibn Suhayn al-Kalbi는 Carcassone시를 포위했는데, 카르카손시는 영토의 반을 주고, 공물을 바치며, 무슬림군과 연합하여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으로 동의하였다. Nimes와 다른 Septimania 도시들도 우마이야왕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720년대의 대량학살과 파괴적 야만적인 전쟁은 특히 Ebro강 계곡과 Septimania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피레네산맥과 프로방스지역을 건너 남부 아키텐지역에 정착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In 725, his successor, Anbasa ibn Suhaym al-Kalbi, besieged the city of Carcassonne, which had to agree to give half of its territory, pay tribute, and make an offensive and defensive alliance with Muslim forces. Nîmes and all the other main Septimanian cities fell too under the sway of the Umayyads. In the 720s the savage fighting, the massacres and destruction particularly affecting the Ebro valley and Septimania unleashed a flow of refugees who mainly found shelter in southern Aquitaine across the Pyrenees, and Provence.[5]
이 기간동안 어떤 시기에, 베르베르족 commander Uthman ibn Naissa (Munuza)가 Cerdanya (또한 현재의 Catalonia의 긴 지역을 포함한) 지역의 governor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랍 지배자에 대한 베르베르족 군대의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아래 자료 참조)
Sometime during this period, the Berber commander Uthman ibn Naissa ("Munuza") became governor of the Cerdanya (also including a large swathe of present-day Catalonia). By that time, resentment against Arab rulers was growing within the Berber troops.
2) Raid into Aquitaine and Poitou (아키텐과 프와뚜에서의 약탈)
Umayyad Hispania in 732, Septimania is to the northeast, around Carcassonne
|
Uthman ibn Naissa's revolt (Uthman ibn Naissa의 반란)
725년에 Septimania의 모든 지역은 우마이야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 피레네의 베르베르족 지배자 Uthman ibn Naissa는 Cordova로부터 분리되어, 베르베르족 힘에 의한 공국을 세웠다(731). 베르베르족 리더는, 국경을 안정시키고 싶어 하는 아키텐지역 Odo 공작과 동맹을 맺었고, Odo의 딸 Lampegia와 결혼한 것으로 보고된다. Uthman은 Urgell의 bishop이며, Toledo교회의 명령에 의한 공식적인 대리인인 Nambaudus를 죽이러 갔다. (아래 자료 참조)
By 725, all of Septimania was under Umayyad rule. Uthman ibn Naissa, the Pyrenean Berber lord ruler of the eastern Pyrenees, detached from Cordova, establishing a principality based on a Berber power base (731). The Berber leader allied with the Aquitanian duke Odo, who was eager to stabilize his borders, and is reported to have married Odo's daughter Lampegia. Uthman ibn Naissa went on to kill Nambaudus, the bishop of Urgell,[6] an official acting on the orders of the Church of Toledo.
새로운 Cordova의 우마이야 지도자 Abdul Rahman Al Ghafiqi는 베르베르족 사령관의 불복종을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 Cerdanya를 포위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Mozarabic 연대기에 의하면, 이는 단지 Gothic bishop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new Umayyad governor in Cordova, Abdul Rahman Al Ghafiqi, mustered an expedition to punish the Berber commander's insubordination, surrounding and putting him to death in Cerdanya, according to the Mozarabic Chronicler, a just retribution for killing the Gothic bishop.
3) Umayyad expedition over Aquitaine (우마이야의 아키텐지역 원정)
성공에 고무된 그는, Uthman의 아키텐 동맹 Odo 공작을 공격했는데, Odo는 바로 직전 Charles Martel의 Bourges 지역과 Aquitaine 북쪽에 대한 대단히 파괴적인 공격(731)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필요한 병력을 모아서, 독립적인 Odo는, 서부 피레네를 통해 북진하는 al-Ghafiqi 군대를 맞닥트려야 했는데, 보르도에 대한 아랍 사령관의 밀고 들어 오는 것에 지탱할 수 없었다. 아키텐 리더는 732년 가론강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우마이야군은 더 북진하여 Basilica of Saint Martin de Tours를 노략질하기 위해 북진하여 Poitou를 침략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Emboldened by his success, he attacked Uthman ibn Naissa's Aquitanian ally Duke Odo, who had just encountered Charles Martel's devastating offensive on Bourges and northern Aquitaine (731). Still managing to recruit the necessary number of soldiers, the independent Odo confronted al-Ghafiqi's forces that had broken north by the western Pyrenees, but could not hold back the Arab commander's thrust against Bordeaux. The Aquitanian leader was beaten at the Battle of the River Garonne in 732. The Umayyad force then moved north to invade Poitou in order to plunder the Basilica of Saint-Martin-de-Tours.
(source : Umayyard invasion of Gaul,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ainfos.tistory.com/381 )
2. Battle of the River Garonne (=Battle of Bordeaux)(732)
가론강 전투 또는 보르도전투 (732)는 필자는 발해에 의한 등주 공격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자료는 아랍세력에 의한 독립세력 아키텐지역 공격이라 설명한다. 필자는 이 당시의 이베리아 반도의 아랍세력은 신라로 추정한다. 따라서 733년 당나라가 신라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아키텐지역을 공격한 아랍세력은 다른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혹시나 발해 세력을 같은 아랍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Poitiers전투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들 가론강 유역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 그래야 역사왜곡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The Battle of the River Garonne, also known as the Battle of Bordeaux,[1] was fought in 732 between an Umayyad army led by Abdul Rahman Al-Ghafiqi, governor of Al-Andalus, and Aquitanian forces led by Duke Odo of Aquitaine.
(번역) 가론강 전투는 또한 보르도전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Al-Adalus의 통치자 Abdul Rahman Al-Ghafiqi에 의해 리드되는 우마이야군과 아키텐의 Odo공작에 의해 리드되는 아키텐군과의 732년 전투이다.
Background (전쟁의 배경)
At the beginning of his governorship of Al-Andalus in 730 Abdul Rahman was opposed by a local Berber commander called Uthman ibn Naissa (Othman Ibn Abi Nes'ah Manuza; Othman-ben-Abou-Nessa; aka Munuza) whose stronghold was the town of Cerritania (Cerdanya, possibly the fortress of Llívia) in the Pyrenees. Munuza, hearing of the oppression of Berbers in North Africa, had made a truce with Odo, and detach from Cordovan central rule. Some accounts claim that Odo promised his daughter Lampade to Munuza in a marriage alliance.[2][3]
(번역) Al-Andalus 통치 초기 730년에, Abdul Rahman은 Uthman ibn Naissa (Munuza)라 불리는 피레네의 Cerritania(Cerdanya) 타운에 요새를 가진 베르베르족 사령관에 의해 반란을 맞는다. Munuza는,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족의 탄압을 듣고서, Odo와 평화조약을 맺고, Cordova의 중앙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어떤 자료는 Odo가 그의 딸 Lampade를 Munuza에게 결혼시키는 것을 약속했다 한다.
Odo was busy trying to fend off Charles Martel's thrust on the northern fringes of Aquitaine, so preventing the duke from assisting his southern ally. Munuza's death immediately preceded Abdul Rahman's expedition, which crossed the Pyrenees at their west end, through Navarre and rampaged its way through Gascony with great speed, first ravaging Auch, and moving on all the way to Bordeaux. The city was captured by storm, the commander of the garrison being killed in the battle.
(번역) Odo는 아키텐의 북쪽으로부터의 Charles Martek의 압박을 방어하는데 바빴는데, 그래서 그의 남쪽 동맹을 도울 수가 없었다. Munuza의 죽음이후, Abdul Rahman의 원정은 곧 피레네서쪽 끝을 지나, Navarre를 통해, Gascony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먼저 Auch를 유린하고 보르도를 향해 진격했다. 보르도 시는 함락되고, 지역 사령관은 전투에서 죽었다.
Map of Gascony
Battle (전투)
Following the victory at Bordeaux, Abdul Rahman engaged Odo's forces on the Garonne, or possibly at the Dordogne, in his march northward. Abdul Rahman's army numbered 70,000 to 80,000 men who defeated Odo, according to Benett.[1] However, such huge figures on the tradition of medieval chronicles have been questioned, since the expedition was an unusually large raid against the Aquitanian duke Odo (Lewis, A.R.; Collins, R.). The defeat was comprehensive and most of Odo's forces were wiped out or ran in disarray, after which the Umayyads looted the rich monasteries of northern Aquitaine before resuming their march towards Tours, a town said to be holding abundant wealth and treasures.
(번역) 보르도전투의 승리이후, Abdul Rahman은 북진중에 Odo의 병력을 가론강에서 또는 Dordogne강에서 만났다. Benett에 의하면, Odo를 패배시킨 Abdul Rahman의 병력은 7만 내지 8만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숫자는 중세시기의 전통에서는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아키텐의 Odo공작에 대한 원정이 비정상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패배는 완벽했으며, Odo군의 대부분은 전멸했으며 또는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우마이야군은 북아키텐지역의 부유한 수도원을 유린했으며, 이후 다시 Tours를 향해 진군했다. 풍족한 부와 보물을 지닌 마을 Tours를 향해.
Aftermath (전쟁 이후)
This plundering gave Odo enough time to re-organise his Aquitanian troops and according to chronicles notified Charles of the impending danger to the Frankish kingdom. The Frankish leader took notice, accepted Odo's formal submission and Odo joined Charles's army to form its left wing. The Umayyad armies were finally defeated by forces (size of the two armies is debated by modern historians) led by Charles Martel at the Battle of Tours that took place somewhere between Poitiers and Tours on 10 October, 732 (or 733 according to latest research).
(번역) 이러한 약탈은 Odo로 하여금 아키텐병력을 재정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으며, 연대기에 의하면, Charles에게 프랑크왕국에 대한 임박한 위험을 알렸다고 한다. 프랑크 리더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고, Odo의 형식적인 복속을 받아들이고, Odo는 Charles의 군대 왼쪽 날개를 형성하는데 합류했다. 우마이야군은 마침내 Charles Martel이 이끄는 Tours 전투에서 패배했다. (양 군사의 크기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논쟁이 있다). Tous전투는 732년 10월 10일 (또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733년), Poitiers와 Tours사이 어디에서 일어난 것이다.
The far reaching political consequences of this defeat were Charles Martel's intervention in Aquitaine, the temporary end of Basque-Aquitanian sovereignty and Odo's formal submission to Charles, confirmed after the Battle of Tours-Poitiers.
(번역)이러한 패배의 정치적 결과는 Charles Martel이 아키텐에 관여하는 것이었으며, 바스크-아키텐 지배의 일시적 종말과 Odo의 Charles에의 형식적 복속이었으며, 이는 Tours-Poitiers 전투후에 확인되었다.
(source : Battle of the River Garonne, Wikipedia)
이러한 가론강의 전투, 보르도의 전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문이 든다.
1) 피레네 서쪽 끝을 통한 우마이야군의 북진
이 당시 (732년) 우마이야왕조는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피레네산맥에 접한 북부지역은 우마이야왕조의 영토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2) 베르베르족 사령관의 피레네 지역에서의 반란
이 지역은 바스크지역에 해당하며, 서고트왕국의 잔존 세력들이 있던 지역이다. 따라서 단순히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족이 탄압을 받는데 하여, 기반이 없는 이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3) 우마이야 아랍군의 병력이 7만 또는 8만명이었다 한다.
당시 아키텐 지방정부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많은 병력으로서 합리적이지 않지만, 만약 이지역을 포함한 당나라를 대상으로 발해가 침입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숫자의 병력이 된다.
4) 아키텐의 Odo군 대부분 전멸했으며, 지역 사령관이 전사했다.
이 당시 Odo의 존재가 없다. 일부 자료에는 Eudes라는 장수가 전사했으며, Eudes가 Odo라는 설명이 있다.
5) Odo가 Charles Martel에 임박한 위험을 알렸다 했다.
만약 Odo가 독립적인 세력이라면, 평소에 경계하는 Charles Martel에 임박한 위험을 알리는 것이 이상하다. 오히려 지역 세력인 동부지역의 서고트족세력이나 바스크지역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의 일부 지방관이므로 중앙에 알리고 중앙군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Odo가 독립적인 세력이니, 형식적 복속이니 하는 언급은, 전투에서의 패배 역사를 감추고자, 일부러 독립세력으로 왜곡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6) 우마이야군의 진격로도 이상하다.
피레네 서쪽 끝을 지나 바로 보르도에 달할 수 있는데, 우측으로 이동해 Auch에 들렀다가 다시 왼쪽으로 보르도에 도달한다. (위의 Gascony 지도 참조). 그런데 우연히도 Auch시나 Bordeaux 모두 강과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수군의 공격루트를 연상케 한다. 만약 대서양을 통해 수군이 공격해 왔다면, 보르도에서 최대 격전이 있었을 것이다. 수군이 도달한 강어구인 보르도근처에서는 지형적 계곡이나 산이 없는 평지일 것이므로, 수비하는 쪽에서 유리한 곳이다. 만약 발해의 장문휴 수군이라면, 보르도에서 큰 전투후 승리하고, 가론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와 험한 Tarn 계곡을 타고 들어와 Auch 등지에서 싸웠을 것이다.
7)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Poitiers(Tours)전투는 그동안 알고 있던 732년이 아니라, 733년에 있었을 것으로 연구된다고 한다.
발해가 거란 돌궐과 연합한 마도산전투는 733년 있었다. Tours전투가 하북지역에 있었던 마도산전투라면 733년이 있었던 것이 맞다. Tours는 황허강일 수 있는 르와르강에 바로 접해 있다.
이상의 의문점을 염두에 두고, 발해의 등주 공격과 보르도전투를 비교하며, 그 연관성 가능성을 검토해 보자.
IV. 발해의 등주 공격(732)과 Battle of Bordeuax (732)
1. 발해의 당나라 등주의 공격 (732) : 장문휴 해상세력의 공격
고구려 해상세력이었던 장문휴가 발해 무왕의 명에 의해 등주를 공격했다 한다. 그러면 고구려 수군은 과거 북해, 발트해, 대서양에서 활동을 하였는가? 필자는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따른 정벌지역 추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본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는 '가루성'이라는 정복지 성이름이 있다. 필자는 이를 아일랜드의 Carlow Castle 로 판단한다. (아래 그림 참조) 전형적인 고구려 성곽이다. (필자의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 지역 추정,
https://lostcorea.tistory.com/1459 참조)
Carlow castle(가루성) in Ireland (source: Wikipedia)
아래 지도는 바이킹의 8세기 이후의 활동 영역이다. 고구려와 이를 이은 발해도 이러한 수군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그렇다면 대서양쪽에서 가론강을 따라 보르도로 침입하는 발해의 장문휴의 등주 공격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바이킹의 영토와 활동 경로 (자료 : 위키피디아)
2. 호타하를 건너 공격
나무위키 자료를 보면 호타하가 언급된다. 장문휴가 협곡의 호타하를 지나 등주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등주가 산남도 동편에 있는 동도에 위치한 것을 고려하면, 가론강을 타고 들어와 보다 내륙지역에 호타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호타하가 Garonne river의 왼쪽 지류인 Tarn River가 될 수 있다고 본다.
Map of Tarn River
상기 Gascony지역 지도를 보면, Toulouse 서쪽에 Auch 도시가 있다. 아랍군은 Auch 도시를 공격했다고 위에서 언급되었다. 즉 보르도에서 전쟁을 이긴 후, 더 내륙으로 들어와 Auch에서 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등주는 이 근처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Tarn Gorges가 있어 강을 따라 들어 오는 수군이 육로군 공격에 비교적 안전한 지형이다. Garonne river도 계곡으로 되어 있어 유사한 지형을 보이는 것도 유리한 상황이다. (아래 지도 참조)
Gorges of Tarn river (source : Wikipedia)
Garonne River Valleys
3. Aquitaine지역은 과거 서고트왕국(고구려) 지역
아키텐지역은 과거 서고트왕국인 고구려의 영토였다. (아래 지도 참조). 따라서 과거 고구려의 해상세력인 장문휴가 지리적 이점을 잘 알고 공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Visgothic Kingdom in 500 (source : Wikipedia)
아래 프랑크왕국의 팽창 지도를 보면, 507년에 아키텐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고구려 문자왕 시기 507년 백제의 한성(Clermont-Ferrand)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횡악(피레네 산맥)으로 물러났다고 한 기록을 근거로, 아키텐지역의 상실 가능성을 위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은 아키텐지역의 남부지역인 Gascony 지역은 778년, Septimania지역은 759년, Provence 지역은 736년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732년 가론강 전투 당시에는, 보르도는 프랑크왕국 지역으로 나타나나, Gascony지역은 프랑크왕국 지역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Gascony지역이 독립세력인 Odo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르도 전투중 사망한 지역사령관은 프랑크왕국의 장수라는 것이 되고, 발해군에 의해 사망한 당나라의 위준 등주자사일 수 있다고 본다.
Frankish Empire (source : Wikipedia)
4. 장강유역의 초문왕의 등나라 공격
등주는 등나라가 있던 지역이라 한다. 춘추시대 등나라는 초나라의 초문왕에게 정복되었으며, 이후 초문왕은 장강유역의 강자가 되었다 한다. 즉 등나라는 장강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래 프랑스 지역의 강 지도를 보면, 대서양으로 흐르는 르와르강 이남에, 피레네 산맥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가론강이 대표적인 강이다.
그리고 아래 이베리아반도의 강 지도를 보면, 피레네산맥 아래, Catalonia지역에, 지중해로 흐르는 Ebro river가 있다.
강 길이로 보면 1) 르와르강(625마일), 2) 에브로강(580마일), 3) 론강(506마일)의 순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중국에 3대강이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수라 했다. 즉 르와르강이 황하, 에브로강이 장강, 론강이 요수인 압록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Garonne river 는 황하와 장강 사이에 있는 회수가 될 수 있다. 회수이남의 초나라는 이민족 취급을 받았다 한다. 즉 초문왕이 장강인 Ebro river 근처에 있고, 등나라도 이 근처에 있으면, 등주는 Garonne river 근처에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Rivers in France
Rivers in Iberia
5. 당나라 등주 자사 죽음 : local commander killed in the battle
발해의 등주 공격에서 당나라의 등주 자사 위준이 죽었다 했다. 그런데 보르도 전투에서 지역사령관이 전투중 죽었다 한다. Eudes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즉 위준이 Eudes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등주는 보르도가 된다. 한편 가론강 전투라는 말도 있어, 좀더 내룩에 들어와 Auch 시에서도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아랍군의 경로와 역으로 됨으로, 수군의 공격루트가 정당화되며, 아랍군의 육로공격이라는 것이 역사 왜곡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6. 필자는 발해의 강왕을 근거로 이베리아 반도지역에 발해의 영토가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https://lostcorea.tistory.com/1724 참조).
발해 무왕시 등주의 공격(732년)이후, 이에 가까운 이베리아반도 지역에서 발해 강왕(재위 : 795-809)이 영토를 확보하지 않았을까 한다.
7. 등주는 후백제의 견훤시절에도 언급된다.
견훤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을 배웅하려 사절을 보냈는데,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서 잡혀서 모두 죽었다 한다. (https://lostcorea.tistory.com/1653 참조)
거란(요나라)이 론강 우측에 있을 확율이 높으므로, 지중해의 지역, Septimania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등주가 산남도에서 동도에 있던 지역이므로 지중해 가까이 등주가 있을 수 있다.
또 한편, 발해 영역을 일부 거란이 인수할 수 있고, 등주 근처의 영역인 발해의 영역을 거란(요나라)가 인수했다면, 이 지역에 오는 과정에서 후한 수군의 공격으로 등주에서 잡혀서 죽었을 수 있다. 즉 대서양쪽의 가론강 어구지역에서 잡혀 죽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Map of Septimania in 537 (source : Wikipedia)
V. 결 론
이상으로 등주에 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보로도전투, 가론강 전투의 침입 병력이 7만 - 8만명에 달했다는 자료는 단순히 아키텐지역을 목표로 한 전투가 아니고, 프랑크왕국 자체를 목표로 한 공격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는 아랍의 공격이 우마이야왕조의 공격이 아니라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격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등주는 장강인 Ebro river 근처에 있는 것이 맞으며, 실제 전투역사 자료를 고려하면, 보르도나 Auch시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전투중 지휘자의 사망한 사례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가론강의 협곡 등 강의 흐름 등을 고려한다면, Auch 보다는 보르도 근처가 등주로 더 가능성이 높다.
가론강 주위에서의 전투는 수군의 침입이라는 것을 용이하게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육로에 의한 우마이야왕조의 침입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아랍권과 아키텐지역의 전쟁에서 졌을 뿐이라는 변명이 목적으로 보인다. 프랑크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미화작업을 위한 역사왜곡을 자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이 다음에서 알아 보는 Tours전투 즉 마도산 전투에서도 동일한 역사조작으로 이어지는 framework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서구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역사적 왜곡은 이미 훈족의 침입에서도 많이 목도한 필자이다. 서구 학자들은 중공과 아랍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하는데, 서구학자들도 역시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 제도권 사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니, 역사는 왜곡하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 > 발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가 당에 승리한 마도산전투는 프랑크의 Tours-Poitiers전투이다 (0) | 2023.07.30 |
---|---|
발해 무왕이 공격한 당의 등주는 장강 주위에 있었다 (0) | 2023.07.05 |
흑해주변의 카자르칸국은 발해의 일부인가? (1) | 2022.11.01 |
볼가 불가리아는 고구려와 발해, 고려의 영역인가? (1) | 2022.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