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발해

발해가 당에 승리한 마도산전투는 프랑크의 Tours-Poitiers전투이다

Chung Park 2023. 7. 30. 08:13

I. 머리말

 

지난 두 번의 글에서 발해가 공격한 당나라 등주가 어딘가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리고 당시 발해와, 거란, 돌궐의 협력에 대해 당은 신라, 해족 등과 동맹을 맺어 대결하였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 세력간의 대결은 733년 마도산 전투에서 절정을 이룬다. 따라서 주위 연합세력에 대한 연구도 필요로 한다. 이번 글도 프랑크왕국이 당나라로 추정되는 바, 이 글은 이에 대한 필자의 추정이 다시 한번 검토 및 검증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II. 마도산 전투 분석

 

지난 번 발해의 등주 공격에 관한 글 (1)편(https://lostcorea.tistory.com/1742)에서 발해와 그 주변 세력들과의 관련 상황에 대해서 파악한 바 있다. 그런데 이글에서는 관련 세력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마도산 전투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아래 마도산 전투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를 살펴 보자. 

 

"정의

733년 발해가 이민족과 더불어 당군(唐軍)을 마도산(馬都山)에서 격파한 전투.

 

개설

 

733년 윤3월 발해가 거란(契丹)의 가돌우(可突于)를 후원하여 당군을 하북성 천안현 북쪽에서 궤멸시킨 전투이다. 이때 가돌우는 돌궐(突厥)의 병력을 동원했고, 당군을 돕던 해(奚)는 변심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섰다. 발해와 당 이외에도 거란·돌궐·해가 개입된 국제적인 전투였으며 발해가 국제정세를 잘 활용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역사적 배경

 

732년 9월 5일경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를 급습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733년 정월 18일 당 현종은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발해국왕 대무예의 동생 대문예(大文藝)를 유주(幽州)로 보내 군대를 발동케 했다. 한편, 같은 달 21일에 신라 왕족인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파견하여 발해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게 했다.

 

이러한 당의 양동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발해국왕 대무예는 당에 적대적인 거란의 가돌우를 돌궐과 함께 후원하였다. 당의 발해 침공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그해 윤3월에 당군과 가돌우가 이끄는 거란·돌궐군이 마도산에서 격돌하여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경과 및 결과

 

733년 윤3월 6일 발해의 후원을 받은 거란의 가돌우가 거란·돌궐 군사를 인솔하여 당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같은 달에 유주절도사 설초옥(薛楚玉)이 부총관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鄔知義)·나수충(羅守忠) 등을 출동시켰으나 부총관 곽영걸 휘하의 1만 정예기병은 유관(渝關) 마도산 주변에서 가돌우 휘하 군사에게 전멸당했다. 마도산전투 직전에 당군의 진영에 속해 있었던 해족(奚族) 기병대가 당군 진영을 이탈함으로써 당군의 사기 저하와 더불어 전체 군영의 붕괴를 가져온 것이 주효하게 작용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권6을 보면, 가돌우를 후원했던 발해 군대가 마도산에 도착한 것은 마도산전투 직후였다. 발해군의 마도산 도착 소식이 전해지자 당은 진군해오는 발해와 돌궐 기병을 막기 위해 깊이 3장(丈)에 달하는 참호를 4백 리에 걸쳐 팠다고 한다."

 

(자료 : 마도산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자료는  733년 하북성 천안현 북쪽의 마도산 공격에서 발해, 거란, 돌궐의 연합이 당과 해족의 연합세력을 전멸시킬 정도로 패배시킨 것을 말하고 있다.

이후 당은 3장에 달하는 참호를 400리에 걸쳐 팜으로써 발해 연합세력 기병의 추가 진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한다.

 

당군에서는 유주벌도사 설초옥 휘하 군사들이 동원되었으나, 유관(渝關) 마도산 주변에서 가돌우 휘하 군사에게 전멸당했다정예기병 1만명이라면 보병 등 군사와 합하면 4-5만명을 됨즉하다. 특히 해족의 기병이 당군 진영을 이탈한 것이 패배의 주요원인이라 설명한다. 해족은 이민족의 지원병으로 차출된 것으로 보이며, 전세가 불리하자,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1) 거란 장수 가돌우

 

이 마도산 전투에서 거란의 가돌우가 특히 언급된다. 가돌우가 발해의 후원을 받아 거란-돌궐군을 인솔하고 공격했다 한다. 아래의 가돌우에 대한 위키자료와 거란전 번역문을 보며는 매우 용맹한 장수로서 기록된다.

 

가돌우는 이미 718-722년 사이, 당군과 해왕 이대보, 그리고 당나라 영주로 달아난 거란수령 이소고와 이미 한판 붙어,  해왕 이대보와 거란수령 이소고를 전사시키고, 당군 장수 설태를 생포했었다. 그리하여 당군이 크게 놀라 서쪽의 유관으로 물러났다 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이 시기에는 프랑크왕국의 Toulouse 전투(721)가 있었으며, 아랍군의 초반 승리와 아키텐군의 승리가 말하여지나, 이것도 역사왜곡으로 의문시된다.) 

 

 

"가돌우(可突于, ? ~ ?)는 거란의 장수였다.

 

이소고(李邵固)의 부하로 있던 가돌우는 날래고 용감하여 무리의 환심을 얻으니 이소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이소고를 공격하니 이소고는 당나라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첨(許欽澹)이 설태에게 용감한 군사 500명을 거느려, 해왕(奚王) 이대보(李大輔) 및 이소고의 무리를 징발하여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관군이 불리하여 이소고와 이대보는 진중에서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영주도독부가 크게 놀라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유관(渝關)으로 후퇴시켰다."

(자료 : 가돌우, 위키백과)

 

"대신 가돌우(可突于)가 파고(婆固)를 살해하고 파고(婆固)의 종제 울우(鬱于)를 군주로 옹립함


[개원] 6년(718), 실활(失活)이 죽자 황제[上]주 001가 그를 위해 슬퍼하며 특진(特進)을 추증했다. 실활의 종제 파고(婆固)가 [그의 뒤를] 이어 그 무리를 다스리게 되자 사자를 보내 [그를] 책립(冊立)하고 그의 형의 관작(官爵)을 이어받게 했다. 파고의 대신인 가돌우(可突于)가 용맹하여 민심을 두루 얻게 되자 파고가 모의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파고를 공격하자 파고 영주(營州)로 달아났다. 도독(都督) 허흠담(許欽澹) 설태에게 명하여 용맹한 병사[驍勇] 오백 명을 거느리고 또 해왕(奚王) 이대보(李大輔) (주 002)라는 자 및 파고가 모은 무리를 징발해 가돌우를 토벌하게 했다. 관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파고 대보는 진영에 임했으나 모두 가돌우에게 살해되었고 설태를 생포하였다. 영주의 관아[府]가 놀라고 두려워하자 허흠담이 군대를 옮겨 서쪽의 유관(渝關) (주 003)으로 들어갔다. 가돌우 파고의 종제 울우(鬱于)를 세워 군주[主]로 삼고 이어서 또 사자를 보내 죄(罪)를 아뢰고 사면을 청하자, 황제는 곧 울우를 군주로 정하여 파고의 관작을 이어받게 하였고 이로 인해 가돌우의 죄를 면해 주었다.

 

[개원] 10년(722), 울우가 들어와 알현하고 혼인을 청했다. 황제가 또 종매부(從妹夫)인 솔경령(率更令) 모용가빈(慕容嘉賓)의 딸을 봉해 연군공주(燕郡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내고,(주 004) 이어 울우를 봉해 송막군왕(松漠郡王)으로 삼고 [그에게] 좌금오위원외대장군(左金吾衛員外大將軍) 겸 정석군경략대사(靜析軍經略大使)를 제수하고 재물[物] 천 조각[段]을 하사했다. 울우는 번국[蕃]으로 돌아가고 가돌우(可突于)가 와서 알현하니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을 제수하고 병주(并州) (주 005)를 순행하는 데 수행하게 했다.

(자료 : 가돌우, 동북아역사넷 번역)

 

위의 자료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당나라 영주(營州)의 서쪽에 유관(渝關)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도산은 유관에 있었다 한다.

 

 

2) 해족과 당의 관계

 

아래 자료 구당서 해전을 번역한 내용을 보면, 해족은 흉노의 별종이라 했다. 동호의 경계에 거주한다 했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하다고 하며,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 옮겨 다닌다 했다. 사람들은 화살로 사냥을 잘하며, 거란과 자주 전쟁을 했다 하였다. 즉 거란과 이웃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기 순서로 이들의 활동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648년 추장 '가도자'가 '누번현공'으로 책봉 받았다. (모돈선우가 정벌한 누번이 이 지역이다는 자료)

 

- 거란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돌궐에 복속되었다. 이후 수령 이대보는 당(장수 손검, 이해락, 병사 12만명)과 전쟁(712년)하여 승리했다. 이때 당나라 사상자가 수만명에 달했다 한다. 손검 등은 돌궐 묵철가한에 보내져 죽었다 한다.

 

- 715-717년 당에 항복하니, 요락군왕, 송막군왕에 봉해졌다. 이대보는 당의 고안공주와 결혼했다.

 

- 개원 18년(719) 해의 무리가 거란의 대신 가돌우(可突于)에게 협박받아 다시 배신하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 720년 이대보는 군대를 보내 거란을 구원하였는데, 싸우다 죽었다. 

 

- 개원 20년(721) 신안왕(信安王) 위(禕)가 조서를 받들어 배반한 해를 토벌하였다. 해의 추장 이시쇄고(李詩瑣高) 등이 부락의 5,000장(帳)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조서를 내려 이시를 귀의왕(歸義王) 겸 특진(特進)·좌우림군대장군동정(左羽林軍大將軍同正)에 책봉하고 귀의주도독(歸義州都督)의 임무를 맡겼다. 물품 10만단을 하사하고 그 부락을 유주(幽州)의 경계에 안치하였다.

 

- 개원 10년(722) (노소가) 입조하니 형의 관작인 요락군왕·우금오원외대장군 겸 보장군경략대사(保塞軍經略大使)를 계승하도록 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다시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 개원 14년(726) 다시 노소를 봉성왕(奉誠王)에 책봉하고 우우림군원외대장군(右羽林軍員外將軍)을 제수하였다.

 

- 천보(天寶) 5년(746) 다시 그 왕 사고(娑固)를 소신왕(昭信王)에 책봉하고 요락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대력(大曆) 이후로는 조공이 때때로 왔다.

 

- 정원(貞元) 4년(788) 7월 해와 실위가 진무(振武)를 습격하였다.

 

- 정원 11년(795) 유주에서 해의 6만명을 물리쳤다고 보고하였다.

 

- 원화(元和) 원년(806) 해의 왕 요락주도독이며 귀성왕(歸誠王)을 계승한 매락(梅落)이 내조하니 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해주고 돌려보냈다.

 

- 3년(808) 해의 수령 색저(索低)를 우무위장군동정(右武威衛將軍同正)에 임명하고 단주(檀州)와 계주(薊州)의 유혁병마사(遊奕兵馬使)의 임무를 맡기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 8년(813)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11년(816) 사신을 보내 명마를 바쳤다. 이후로 매년 조공이 끊이지 않았고 한 해에 두세번 이르기도 하였다.

 

 

"해족(奚)은 대개 흉노(匈奴)의 별종이다. 거주지는 선비(鮮卑)의 옛 땅이니 바로 동호(東胡)의 경계로서 당나라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4,000여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 돌궐(突厥)에 이르며 남쪽으로 백랑하(白狼河)까지 이르며, 북쪽으로 습(霫)에 이른다.

 

영주(營州)에서 서북쪽의 요락수(饒樂水)부터 그 나라에 이른다.

 

뛰어난 병사는 3만여명이며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족마다 사근(俟斤) 한 사람이 있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해서 항상 물과 풀을 쫓아다니며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 옮겨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다. 머무는 곳은 융단 장막이며 수레를 사용하여 군영을 만드는데 항상 500명을 두어 지키도록 한다. 이 밖의 부락은 모두 산간 계곡에 흩어져 있으므로 세금이 없다. 사람들은 화살로 사냥을 잘하며 거란과 자주 전쟁을 벌인다.

 

무덕(武德)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관(貞觀) 22년(648) 추장 가도자(可度者)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오니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설치하고 가도자를 우령군(右領軍) 겸 요락도독(饒樂都督)으로 삼고 누번현공(樓煩縣公)에 책봉하고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다. 현경(顯慶) 초에 다시 우감문대장군(右監門大將軍)을 제수하였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거란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해의 무리는 돌궐에 복속되었다. 두 나라가 항상 표리를 이루기 때문에 양번(兩蕃)이라고 불렀다.

 

경운(景雲) 원년(710) 수령 이대보(李大輔)가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치지 예종(睿宗)이 가상히 여겨 연회를 크게 베풀어 주었다.

 

연화(延和) 원년(712)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검교유주대독(檢校幽州大都督) 손검(孫儉)이 병사 12만을 거느리고 그 부락을 습격하였다. 군대가 정형(冷硎)에 주둔하였을 때 전군(前軍)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이해락(李楷洛) 등이 이대보 등과 회전하였는데,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손검이 두려워 나아가 구원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이대보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칙을 받들어 너희 변방의 장수들을 달래러 왔는데, 이해락 등이 지시를 받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였으니 목을 베어 사과한다”라고 하였다. 이대보가 말하기를 “만약 칙서를 받들어 달래러 왔다면 어찌 나라의 예물이 없는가?”하였다. 손검이 군중에 있는 비난 만여단과 도포와 띠를 주었다. 이대보가 말하기를 “장군이 남쪽으로 돌아간다면 서로 놀래킬 일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손검의 군대가 점차 대오를 이탈하자 이대보가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이로 인해 대패하니 병사 중에 죽거나 부상입은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손검과 부장 주이제(周以悌)는 이대보에게 사로잡혀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에게 보내져 모두 해를 입었다.

 

개원(開元) 3년(715) 이대보가 신하 월소매락(粵蘇梅落)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다시 그 지역을 요락주(饒樂州)로 삼고 이대보를 요락군왕(饒樂郡王)에 책봉하고 좌금오원외대장군·요락주도독에 임명하였다.

 

개원 5년(717) 이대보와 거란의 수령 송막군왕(松漠郡王) 이실활(李失活)이 모두 유성(柳城)에 예전대로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설치하도록 요청하니 현종이 들어주었다.

 

태자첨사(太子詹事) 강사도(姜師度)에 칙서를 내려 건설 작업을 감독케 하였는데, 동원된 사람이 8,000여명이나 되었다. 이해 이대보가 입조하니 사촌외질녀 신씨(辛氏)를 고안공주(固安公主)로 책봉하여 시집보냈다. 이때 물품 1,500필을 하사하였으며 우령군장군 이제(李濟)에게 임명장을 가지고 송환하도록 하였다.

 

개원 8년(720) 이대보가 군대를 보내 거란을 구원하였는데 싸우다 죽었다. 동생 노소(魯蘇)가 계승하였다.

 

개원 10년(722) (노소가) 입조하니 형의 관작인 요락군왕·우금오원외대장군 겸 보장군경략대사(保塞軍經略大使)를 계승하도록 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고안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공주와 시어머니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번갈아 고하니 조서를 내려 이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개원 14년(726) 다시 노소를 봉성왕(奉誠王)에 책봉하고 우우림군원외대장군(右羽林軍員外將軍)을 제수하였다.

 

개원 18년(719) 해의 무리가 거란의 대신 가돌우(可突于)에게 협박받아 다시 배신하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노소가 제어할 수 없어 유관(渝關)으로 달아났고 동광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도망갔다.

 

그해 가을 유주장사(幽州長史) 조함장(趙含章)이 청이군(淸夷軍)의 병사를 동원하여 해를 격파하고 이백명을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해가 점점 (당나라에) 항복해 왔다.

 

개원 20년(721) 신안왕(信安王) 위(禕)가 조서를 받들어 배반한 해를 토벌하였다. 해의 추장 이시쇄고(李詩瑣高) 등이 부락의 5,000장(帳)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조서를 내려 이시를 귀의왕(歸義王) 겸 특진(特進)·좌우림군대장군동정(左羽林軍大將軍同正)에 책봉하고 귀의주도독(歸義州都督)의 임무를 맡겼다. 물품 10만단을 하사하고 그 부락을 유주(幽州)의 경계에 안치하였다.

 

천보(天寶) 5년(746) 다시 그 왕 사고(娑固)를 소신왕(昭信王)에 책봉하고 요락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대력(大曆) 이후로는 조공이 때때로 왔다.

 

정원(貞元) 4년(788) 7월 해와 실위가 진무(振武)를 습격하였다.

 

정원 11년(795) 유주에서 해의 6만명을 물리쳤다고 보고하였다.

 

원화(元和) 원년(806) 해의 왕 요락주도독이며 귀성왕(歸誠王)을 계승한 매락(梅落)이 내조하니 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해주고 돌려보냈다.

 

3년(808) 해의 수령 색저(索低)를 우무위장군동정(右武威衛將軍同正)에 임명하고 단주(檀州)와 계주(薊州)의 유혁병마사(遊奕兵馬使)의 임무를 맡기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8년(813)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11년(816) 사신을 보내 명마를 바쳤다. 이후로 매년 조공이 끊이지 않았고 한 해에 두세번 이르기도 하였다.

 

옛날부터 항상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를 압해·거란양번사(押奚·契丹兩蕃使)로 삼았다.

 

지덕(至德) 이후로 변경의 신하들이 마음대로 책봉을 하여도 조정에서 용납해주니, 저들이 스스로 갖추어 변방에서 일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해와 거란이 또한 침략이 가장 적었다.

 

그들이 매년 조하(朝賀 ; 동지, 정조(正朝), 즉위, 탄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할 때 항상 수백명이 유주에 이르면, (유주에서) 추장 35인을 뽑아 장안의 대궐에 보내었고, (장안에서는) 인덕전(麟德殿)에서 맞이하여 금과 비단을 하사해 주고 돌려보냈다. 나머지는 (관사에) 머무는 것이 대체로 관례였다.

(자료 : 구당서 해전 번역, 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구당서舊唐書 해奚傳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즉 해족은 거란과 싸우기도 하고 거란을 구원하기도 하고, 당과 싸우기도 하고 당에 항복하기도 하고, 돌궐에 복속되기도 하는 등, 여러 모습을 보여 준다.  당나라는 이들에게 공주를 보내 결혼시키며, 관리를 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788, 795년 다시 해족과 당은 크게 전투를 하였으나, 806년이후로는 직책을 하사하고 이씨 성을 주는 등 유화정책으로 인하여,  이후는 사신들이 자주 당에 내조하는 평화로운 관계가 되었다. 

 

 

III. Battle of Tours - Poitiers in 732 (or 733) 분석

 

이제 상기 정보를 염두에 두고, Battle of Tours or Battle of Poitiers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 보자. 

 

"The Battle of Tours,[6] also called the Battle of Poitiers and the Battle of the Highway of the Martyrs (Arabic: معركة بلاط الشهداء, romanizedMaʿrakat Balāṭ ash-Shuhadā'),[7] was fought on October 10, 732, and was an important battle during the Umayyad invasion of Gaul. It resulted in the victory for the Frankish and Aquitanian forces,[8][9] led by Charles Martel, over the invading Muslim forces of the Umayyad Caliphate, led by Abd al-Rahman al-Ghafiqi, governor of al-Andalus. Several historians have credited the Christian victory in the battle as an important factor in curtailing the Islamization of Western Europe.[10]

​(번역) Tours전투는 또한 Poitiers 전투 그리고 Martyrs (romainized: Ma rakat Balat ash-Shuhada) 고속도로전투로 불리는 전투는 732년 10월 10일 일어났으며, 우마이야왕조의 Gaul 침입기간동안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 결과는 Charles Martel이 지휘하는 프랑크군과 아키텐군의 승리였다. 우마이야 무슬림군은 al-Andalus의 통치자인 Abd al-Rahman al-Ghafiqi가 지휘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서유럽의 이슬람화를 막는 중요한 요소로서 이 전쟁의 기독교 승리에 의미를 둔다. 

 

Details of the battle, including the number of combatants and its exact location, are unclear from the surviving sources. Most sources agree that the Umayyads had a larger force and suffered heavier casualties. Notably, the Frankish troops apparently fought without heavy cavalry.[11] The battlefield was located somewhere between the cities of Poitiers and Tours, in northern Aquitaine in western France, near the border of the Frankish realm and the then-independent Duchy of Aquitaine under Odo the Great.

(번역) 전쟁의 세부내용, 예를 들어 전투 참가자수, 정확한 위치 등은 현존하는 자료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자료는 우마이야군이 더 많은 병력을 가졌고 더 큰 피해흫 입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프랑크군은 중기병(heavy cavalry)이 없이 싸웠다는 것이 명확하다. 전쟁터는 서프랑스의 아키텐북쪽에 있는 프와티에(Poitiers)시와 뚜르(Tours)시 어딘가이다 이곳은 프랑크왕국과 Odo the Great가 이끄는 이 당시 독립적인 Aquitaine 공국과의 국경 근처이다. 

 

Al-Ghafiqi was killed in combat, and the Umayyad army withdrew after the battle. The battle helped lay the foundations of the Carolingian Empire and Frankish domination of western Europe for the next century. Most historians agree that "the establishment of Frankish power in western Europe shaped that continent's destiny and the Battle of Tours confirmed that power.[12] 

(번역) Al-Ghafiqi는 전투에서 전사했고, 우마이야군은 전투에서 철수했다. 이 전투는 Carolingian Empire가 형성되는데 일조했고, 프랑크왕국의 서유럽지배는 이후 1세기동안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동의한다: "서유럽에서의 강력한 프랑크왕국의 확립은 서유럽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Tours 전투는 그  힘을 확인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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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historians assume that the two armies met where the rivers Clain and Vienne join between Tours and Poitiers. The number of troops in each army is not known.

(번역)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양측의 군대가 Tours와 Poitiers사이의 Clain 강과 Vienne강이 만나는 곳에서 조우한 것으로 추정한다.각자의  병력의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River map in France. Loire river runs through Tours

 

Clain river runs through Poitiers (source : Wikipedia)

 

Vienne river runs through Limoges and runs near Poitiers and  joins Loire river near T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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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ta Pardulfi, written in the middle of the eighth century, reports that after the battle 'Abd-al-Raḥmân's forces burned and looted their way through the Limousin on their way back to Al-Andalus, which implies that they were not destroyed to the extent imagined in the Continuations of Fredegar.[23]

(번역) 8세기 중반에 쓰여진 Vita Pardulfi 는 이 전투이후 Abd-al-Rahman의 병력은 그들이 Al-Andalus로 돌아가는 길에 Limousin을 지나는 길을 불태우고 약탈했다고 보고한다. 이는 그들이 Continuations of Fredegar에서 상상하는 정도(사상자수 :1500명(프랑크) : 37.5만명(무슬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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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mayyad campaign into Aquitaine suffered a temporary setback at the Battle of Toulouse. Duke Odo the Great broke the siege of Toulouse, taking Al-Samh ibn Malik's forces by surprise. Al-Samh ibn Malik was mortally wounded. This defeat did not stop incursions into old Roman Gaul, as Moorish forces, soundly based in Narbonne and easily resupplied by sea, struck eastwards in the 720s, penetrating as far as Autun in Burgundy in 725.[25]

(번역) 우마이야의 아키텐에의 원정은 Toulouse전투(721)에서 일시적인 차질을 겪었다. Odo the Great 공작은 Toulouse 포위를 뚫어, Al-Samh ibn Malik군을 놀라게 했다. Al-Samh ibn Malik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이 패배는 그러나 Narbonne에 튼튼한 기지를 두고 바다를 통해 용이하게 재보급되는 무어인 병력이 고대 로마 Gaul지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720년대에는 동쪽으로 침범해서 725년에는 부르군디에 있는 Autun까지 침투했다. 

 

Location of Tours, Autun, Narobonne. Toulouse in France

Modern-day French borders. Septimania runs along the Mediterranean (southeast) coast from the Spanish border, and Aquitaine is along the Atlantic (west) coast running north from Spain. (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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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o collected his army at Bordeaux, but was defeated, and Bordeaux plundered. During the following Battle of the River Garonne, the Chronicle of 754[27] commented that "God alone knows the number of the slain".[28] The Chronicle of 754 continues, saying they "pierced through the mountains, trampled over rough and level ground, plundered far into the country of the Franks, and smote all with the sword, insomuch that when Eudo came to battle with them at the River Garonne, he fled.

 

(번역) Odo는 보르도에서 병력을 모았으나 패배했고, 보르도는 약탈당했다. 이어진 가론강 전투(732)동안, 754 연대기가 말하길,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 라 했다. 754연대기는 이어서 말하기를, " Eudo가 가론강에 병력과 함께 도착했을때, 산들을 관통 당하고, 거칠고 평평한 땅은 짓밟혔으며, 프랑크내 깊숙한 곳까지 유린되었으며, 칼로 모든 것을 쳐부수어 져서, 그는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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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Bordeaux and again at Garonne, the Umayyad forces were mostly cavalry and had the chance to mobilize, which led to the devastation of Odo's army. Odo's forces, like other European troops of that era, had no stirrups at that time and therefore no heavy cavalry. Most of their troops were infantry. The Umayyad heavy cavalry broke Odo's infantry in their first charge and then slaughtered them as they ran.

(번역) 보르도에서 그리고 가론강에서, 우마이야군은 대부분 기병이었으며, 이들을 동원하여 Odo의 군을 황패화시켰다. 이 시기의 다른 유럽의 병력처럼, Odo의 군은 이 때에 등자가 없었으며 그러므로 중무장한 기병이 없었다. 그들 병력의 대부분은 보병이었다. 우마이야의 중무장한 기병은 제일선의 Odo의 보병을 뚫고서 달리며 그들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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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accounts, the invading forces were caught off guard to discover a large force sitting directly in their path to Tours. Charles achieved the total surprise he had hoped for. He then chose not to attack and rather began fighting in a defensive, phalanx-like formation.[19] According to Arab sources, the Franks drew up in a large square, with hills and trees in their front to diminish or break up Muslim cavalry charges.

(번역) 침입군은 Tours로 가는 길에 바로 자리잡은 거대한 병력을 맞닥뜨렸다. Charles는 그가 바라는 바와 같이 전혀 놀라운 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공격하지 않고 밀집대형을 이루며 방어전을 하며 싸웠다. 아랍자료에 의하면, 프랑크는 그들 앞에 언덕과 나무들을 방해물로 넓은 지역에 진을 쳐서 무슬림 기병 공격을 줄이거나 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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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d into a phalanx formation, they were able to withstand a cavalry charge better than might be expected, especially as Charles had secured the high ground – with trees before him to further impede any cavalry charges. 

(번역) 팔랑크스 밀집대형을 이루어, 그들은 기대했던 것 보다 더 잘 기병의 공격을 견딜 수 있었다. 특히 Charles는 높은 지형을 확보했다. 그의 앞의 나무들은 기병의 공격을 더 방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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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eventually became a waiting game in which the Muslims did not want to attack an army that could possibly be numerically superior and wanted the Franks to come out into the open. The Franks formed up in a thick defensive formation and waited for them to charge uphill. The battle finally began on the seventh day, as 'Abd-al-Raḥmân did not want to wait any longer, with winter approaching.

(번역) 전투는 결국 기다리는 게임이 되었는데, 무슬림은 그들보다 더 많은 수의 병력을 공격하지 않고, 프랑크군이 개활지로 나오기를 원했다. 프랑크군은 두터운 방어막을 형성했고, 무슬림군이 언덕으로 올라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전투는 마침내 7일째에 시작되었는데, Abd-al-Rahman은 겨울이 다가오므로 더 이상 기다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source : Battle of Tours,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ostcorea.tistory.com/1743)

 

 

IV. 마도산 전투와 Battle of Tours의 비교

 

발해, 거란, 돌궐의 연합군이 당과 해족의 연함군과 싸운 마도산 전투와 아랍군과 프랑크군, 아키텐지역군과 싸운 Tours-Poitiers 전투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동일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 르와르강을 따라 들어올 수 있는 Tours 위치에서의 Tours전투는 해상세력인 돌궐의 지원을 얻은 발해 무왕이 당과 싸운 마도산 전투일 수 있다. 

 

2) 마도산의 위치는 하북성이라 한다. 즉  황하 북쪽 가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르와르강을 황하로 추정하는데,  르와르강변의 Tours시는 하북성의 위치가 된다. 

 

3) Tours전투는 Tours와 Poitiers 사이, Clain river와 Vienne river가 만나는 지역에서의 전투로 추정한다. 즉   발해, 돌궐 등의 수군이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강가에서의 전투지역이다. 또한 Tours전투후 Vienne river를 따라 내려가면 Limorges지역이 되는데, 아랍군은 Tours 전투후 Limousin지역을 유린했다고 한다. 이 역시 강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수군의 이동경로를 보여 주는 전투지역이므로 해상세력인 발해, 돌궐의 전투지역일 수 있다. 

 

4) 마도산 전투는 거란, 돌궐, 발해의 기병과 당나라의 보병의 전투였다. 당군에 합세한 해족의 기병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이미 거란의 가돌우 장수에게 여러번 패한 해족이 가돌우의 협박에 당군과의 연합전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 (상기 구당서 해전 번역 자료 참조) 

 

그런데 Tours전투에서도 우마이야군의 기병공격과 프랑크군의 보병 방어전투가 있었다. 특히 프랑크군은 등자가 없어 heavy calvary (중무장한 기병)가 없었다고 누차 강조된다. 아마 이는 언덕에서의 프랑크군의 유리한 위치선점과 나무들에 의한 방해물 설치에도 불구하고, 프랑크군은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프랑크군은 Tours전투에서,  언덕을 선점하고 무슬림군이 언덕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고 기록된다. 즉 마도산에서의 전투와 같은 이미지를 준다. 

 

6) 프랑크군은 언덕과 나무들에 의한 방해물을 이용한 방어 전략을 구사했다. 마도산 전투에서 당나라군은 3장 높이의 참호를 400리에 걸쳐 파놓은 방어전략을 펴서 발해 거란 연합 기병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한다. 즉 방해물을 통한 방어전략을 당군과 프랑크군이 사용한 것이다. 기병이 없는 병력으로 취할 수 있는 제한된 전략으로 판단된다. 이는 또한 이미 한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방어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프랑크군이 Tours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록은 의문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확한 동원병력수와 위치도 불확실하다고 했다. 이는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패배한 전쟁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7) 프랑크군은 롬바르트군의 연합한다 하니 아랍군이 철수했다고 말하여진다. 당시 롬바르디지역은 스위스지역을 일부 포함한다. 즉 당나라와 해족의 연합을 말한다고 판단된다. 스위스의 Helvettii족이 해족으로 필자는 추정했다. (필자의 글, 참조) 해족의 기병이 철수했다는 말은 감추고 싶고, 이들과 연합했다는 것은 사실이니, 프랑크군과 롬바르디군이 연합했다 기록하며, 롬바르디군의 기병이 철수해서 패배한 것을 감추고자 한 기록으로 보인다. 참고로 해족은 흉노의 일종으로, 당나라 보다는 거란, 돌궐, 발해와 더 가까운 민족이다. 

 

8) 가돌우의 거란족은 유관지역인 마도산의 우측에 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도산으로 추정되는 Tour지역의 우측에 가돌우의 거란군이 있어서, 프랑스의 남쪽 (Gallo-Roman sites)과 라인강을 따라 내려온 동쪽의 돌궐과 합세하여 마도산 전투 즉 Tours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8가지 면에서의 유사한 면은 다음과 같은 유추를 할 수 있다. 즉 프랑크군의 Battle of Tours 승리가 아닌 당나라의 마도산 전투 패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크군의 상대는 Umayyards군이 아닌 발해,거란, 돌궐의 연합군이라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Tours전투가 732년이 아닌 733년에 일어난 것으로 연구된다는 기록도 733년 일어난 마도산전투가 아닌가 하는 필자의 추론을 강하게 밑받침한다. 또한 무슬림군이 돌아 가는 길에 Limousin지역을 유린한 것으로 보아, Tours전투에서 철저한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Tours전투에 관한 기록에서 설명되었다. 이는 Tours전투는 프랑크군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마도산전투에서 당군이 패배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으로 마도산전투, Tours전투에 관한 분석은 일단락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어서 발해의 마도산 전투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프랑크왕국의 상황과 비교하며, Tours전투가 마도산 전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방증하고자 한다. 

 

V. Expansion to Provence and Charles Martel

발해의 무왕은 당나라에 망명한 동생 대문예를 암살하고자 자객을 보냈으나 암살에 실패했다고 기록된다. 암살 시도 장소는 낙양 근처의 천진교였다 한다. 필자는 이것이 프로방스 지역에서의 프랑크군의 진출로 나타난다고 판단한다. 

 

Odo still found the opportunity to save his grip on Aquitaine by warning the rising Frankish commander Charles of the impending danger against the Frankish sacred city of Tours. Umayyad forces were defeated in the Battle of Poitiers in 732, considered by many the turning point of Muslim expansion in Gaul.

(번역) Odo는 아직 아키텐지역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가론강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부각하고 있는 프랑크군 사령관 Charles에게 프랑크의 성지 Tours시가 긴박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경고해 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마이야군은 732년 Poitiers전투에서 패배했는데, 이는 무슬림의 Gaul지역에의 확장에서 전환점이 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With the death of Odo in 735 and after putting down the Aquitanian detachment attempt led by duke Hunald, Charles Martel went on to deal with Burgundy (734, 736) and the Mediterranean south of Gaul (736, 737).

(번역) Odo가 735년 죽고 뒤를 이은 Hunald에 의해 시도된 아키텐의 독립을 저지한후, Charles Martel은 부르군디지역(734, 736)과 지중해의 남부 Gaul지역(736, 737)으로 갔다. 

Still, in 734, Umayyad forces (called "Saracens" by the Europeans at the time) under Abd el-Malik el FihriAbd al-Rahman's successor, received without a fight the submission of the cities of AvignonArles, and probably Marseille, ruled by count Maurontus. The patrician of Provence had called Andalusi forces in to protect his strongholds from the Carolingian thrust, maybe estimating his own garrisons too weak to fend off Charles Martel's well-organised, strong army made up of vassi enriched with Church lands.

(번역) 아직 734년, Abd al-Rahman의 후계자, Abd el-Malik하의 우마이야군은 (당시 유럽에서 사라센이라 불리었다) 싸우지 않고도, Maurontus count에 의해 지배된 아비뇽(Avignon), 아를르(Arles), 그리ㅗ 아마도 마르세이유(Marseille) 시들이 복속해왔다. 프로방스 귀족들은 프랑크 카롤링가 위협으로부터 그들의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해 안달루시군을 불러 들였다. 아마도 그들의 약한 군대로는 잘 정비된 Charles Martel의 강한 군대(교회 토지로 풍족한 Vassi로 만들어진)를 물리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Frankish Empire from 481 to 814 (source : Wikipedia)

(By Sémhur - Own work using:Image:Frankish empire.jpg, itself from File:Growth of Frankish Power, 481-814.jpg, from the Historical Atlas by William R. Shepherd (Shepherd, William. Historical Atlas.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11.),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919958)

- Expansion of Frankish Empire : Provence(736), Septimania (759)

 

 

VI. 프랑크왕국과 롬바르드의 연합은 당나라와 해족의 연합

 

프랑크왕국이 롬바르드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랍군이 철수했다고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나? 필자는 당과 해족의 연합 또는 신라와의 연합으로 볼 수 있다 판단한다. (필자의 글, https://lostcorea.tistory.com/1690, https://lainfos.tistory.com/320 참조)

 

"Charles faced the opposition of various regional actors. To begin with the Gothic and Gallo-Roman nobility of the region, who feared his aggressive and overbearing policy.[7] Charles decided to ally with the Lombard King Liutprand in order to repel the Umayyads and the regional nobility of Gothic and Gallo-Roman stock. He also underwent the hostility of the dukes of Aquitaine, who jeopardized Charles' and his successor Pepin's rearguard (737, 752) during their military operations in Septimania and Provence. The dukes of Aquitaine in turn largely relied on the strength of the Basque troops, acting on a strategic alliance with the Aquitanians since mid-7th century.

(번역) Charles는 여러 지역의 반대세력에 직면했다. Charles의 공격적이고 고압적인 정책을 두려워한 고트족과 'Gallo-Roman 지역'(아래 자료 참조)의 귀족들에 대항하여,  우마이야와 지역의 고트족 귀족과 Gallo-Roman 귀족들을 쫓아내기 위해, 롬바르디왕 Liutprand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아키텐 공작들의 적대적 대응을 겪었는데, 이들은 Charles와 그의 후계자 Pepin이 프로방스와 Septimania를 원정할 때(737, 752), 이들의 후위부대를 위태롭게 하였다. 아키텐의 공작들은 대부분 강력한 바스크군에 의존했는데, 바스크군은 7세기 중반이래 아키텐과 전략적 제휴를 하였었다. 

(source : Umayyard invasion of Gaul,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ainfos.tistory.com/381 )

 

"Gallo-Roman sites

The two most Romanized of the three Gauls were bound together in a network of Roman roads, which linked cities. Via Domitia (laid out in 118 BC), reached from Nîmes to the Pyrenees, where it joined the Via Augusta at the Col de Panissars. Via Aquitania reached from Narbonne, where it connected to the Via Domitia, to the Atlantic Ocean through Toulouse to Bordeaux. Via Scarponensis connected Trier to Lyon through Metz." 

(번역) 갈로-로만 지역들  3개의 Gaul지역 중 가장 로마화된 2개지역은 로마도로 네트워크로 함께 연결되어 묶여 있었다. 이 연결된 도시들은 Via Domitia를 경유하여 (BC 118 건설), 님므(Nimes)로부터 피레네까지 이르고, 피레네에서 Col de Panissars에서 Via Augusta에 합쳐진다.  Via Aquitania는, Via Domitia에 연결되는 Narbonne로부터, Toulouse를 거쳐 보르도까지 대서양까지 이르렀다. Via Scarponesis는 Trier(Treves, 독일 중서부 끝)를 Metz를 거쳐 Lyon에까지 연결했다.   

(source : Gallo-Roman culture, wikipedia)

 

 Via Domitia(in pink), Via Aquitania (in red) (source : Wikipedia)

 

Via Augusta Map (source : Wikipedia)

 

상기 자료를 참고하면, 737-759 시기에, Charles and Pepin의 프랑크왕국과 주위 세력의 대결은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Charles (당군), Lombards (해족 또는 신라)의 연합세력

 

against

 

Umayyards (신라군이 아닌 발해군 추정),

Regional nobility of Gothic : Aquitaine area (구 고구려세력, 발해 우군세력?)

Gallo-Roman nobles (구 고구려지역, 가돌우의 거란군?)

 

여기서 혼동되는 것은 아키텐지역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키텐지역의 Odo가 가론강 전투(보르도전투, 등주 전투)와 Tours-Poitiers전투에서 무슬림과 대적하여 싸운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런데, 상기 자료에서는 다시 프랑크왕국과 적대적으로 싸운 것으로 기술된다.

필자는 가론강전투나 Tours전투에서 아키텐지역은 발해 무왕을 지원한 돌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갈로로만 귀족들은 이 지역에 오래전에 이주한 돌궐의 세력이나 또는 근처에 있던 거란군의 일부로서 가돌우세력이 아닌가 한다. 마도산전투에서, 발해 무왕의 발해군과 거란의 장수 가돌우가 돌궐과 거란군을 이끌고 당군-해족 연합세력과 싸웠다 하였다. 따라서 필자의 이런 추정은 합리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Tours전투에서 프랑크군의 승리로 왜곡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VII. 이후 Avignon, Narbonne의 Provence 지방 프랑크 점령 (737)

 

"In 737, Charles captured and reduced Avignon to rubble, in addition to destroying the Umayyad fleet. Charles' brother, Childebrand, failed however in the siege of Narbonne. Charles attacked several other cities which had collaborated with the Umayyads, and destroyed their fortifications: Beziers, Agde, Maguelone, Montpellier, Nîmes. Before his return to northern Francia, Charles had managed to crush all opposition in Provence and Lower Rhone. Count Maurontus of Marseille fled to the Alps.

(번역) 737년, Charles는 우마이야함대를 파괴한 것에 더해, 아비뇽을 함락시키고, 잔해로 만들었다​. Charles동생, Childebrand는 Narbonne를 포위하는데 실패했다. Charles는 우마이야에 협조한 다른 몇몇 도시들을 공격해서 그들의 요새를 파괴했다 : Beziers, Agda, Maguelone, Montpellier, Nimes. 프랑크북쪽으로 돌아 오기 전에,  Charles는 프로방스와 론강 하류지역에 있는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렸다. 마르세이유의 Maurontus 백작은 알프스로 도주했다. 

(source : Umayyard invasion of Gaul,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ainfos.tistory.com/381)

 

 

Location of Agde in Southern France (source : Wikipedia)

 

Charles의 이러한 프로방스지역에 대한 원정(736)은 발해 무왕이 보낸 대문예 암살단이 암살에 실패한 후, 당나라가 이들 지역을 토벌하는 모습과 시기적으로 지리적으로 유사하다. 대문예는 낙양 근처의 천진교에서 발해 무왕이 보낸 자객의 암살 공격을 받았다 한다.

 

천진교는 천진(天津)(항구의 의미)에 있는 다리라고 판단된다. 천진이 중국에서는 텐진으로 발해만에 접해 있다. 그러나 낙양은 천진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현재 중공지역의 지리이다. 즉 역사에서 나오는 기록과 현 중공의 지리가 맞지 않는다는 증명이다.

 

그러나 낙양을 프랑스 남부의 Narbonne라 한다면, 이는 지중해에서 가까와 근처에 천진과 천진교가 있을 수 있다. Narbonne은 서고트왕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우리 전통문화의 판소리에서 '낙양성 십리하에...' 등의 판소리가 있는지 모른다. 또한 이 지역은 유주, 범양이라 칭해지는 지역과 가깝다. 동북쪽에 거란의 세력인 Alemanni가 있었기 때문이다. 

 

 

VIII. 거란의 당에 복속 (734)과 유사한 이야기 (746 in Franks)

 

발해와 함께 마도산 전투(733)에서 당나라를 공격한 거란과 돌궐은 이후 약해지면서, 돌궐의 지원 없는 거란은, 734년 당나라에 격파당해, 당나라에 복속하게 되고, 돌궐도 묵철가한이 횡사 하면서 이후 분열로 세력이 약해진다. (지난 필자의 글,  '발해가 공격한 당의 등주는 어디인가? (1)' 참조). 마도산 공격이후 그래서 발해는 당나라와 다시 평화로운 관계가 된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란의 모습이 서양사에서 Alemanni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래 지료 참조) 필자는 Alemanni를 거란족으로 추정했다. 

"Despite his piety, Carloman could be ruthless towards real or perceived opponents. After repeated armed revolts and rebellions, Carloman in 746 convened an assembly of the Alemanni magnates at Cannstatt and then had most of the magnates, numbering in the thousands, arrested and executed for high treason in the Blood Court at Cannstatt. This eradicated virtually the entire tribal leadership of the Alemanni and ended the independence of the tribal duchy of Alemannia, which was thereafter governed by counts appointed by their Frankish overlords.[5]

(번역) 그의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Carloman(프랑크왕국의 mayor of palace, Charles Martel의 장자)은 실질적인 반대세력에 무자비할 수 있었다. 반복된 무장반란후에, 746년 Carloman은 Alemanni족의 거물들을 Cannstatt에 불러 모았는데, 수천명에 달하는 모인 대부분의 거물들을 배반했다고 Cannstatt의 피의 법정에서 체포해서  살해했다. 이는 Alemanni의 전 부족의 리더쉽을 근절했고, Alemanni 부족공국의 독립에 막을 내렸다. 이후 프랑크왕국의 지배자에 의해 임명된 백작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source : Carloman, wikipedia, 인용출처: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9161649)

 

 

IX. Loss of Septimania

프랑스 남부 Septimania지역은 낙양으로 추정되는 Narbonne가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서고트왕국의 지역, 즉 고구려의 지역이었으나, 고구려가 망한 후, 고트족의 귀족세력들이 신라인 우마이야 왕조의 정벌에 버티어 왔다. 그런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프랑크족과 무슬림이 다투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무슬림 고트족은 신라인 우마이야왕조가 아닌 것으로 아래 설명된다. 이들 역시 발해의 당나라 공격에 합류한 세력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후 당이라 판단되는 프랑크왕국의 정벌 대상지역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Muslims reasserted their authority over Septimania for another 15 years. However, in 752, the newly proclaimed King Pepin, the son of Charles, led a new campaign into Septimania, when regional Gothic allegiances were shifting in favour of the Frankish king. That year, Pepin conquered Nimes and went on to subdue most of Septimania up to the gates of Narbonne. In his quest to subdue the Muslim Gothic Septimania, Charles had found the opposition of another actor, the Duke of Aquitaine. The Duke Waiffer, aware of Pepin's expansionist ambitions, is recorded as attacking him on the rearguard with an army of Basques during the siege of Narbonne.

​(번역) 무슬림은 또 다른 15년동안 Septimania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752년, 새로이 왕이 된 Pepin(Charles의 아들)은 Septimania에 대한 새로운 원정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지역의 고트족 연합이 프랑크왕의 편에 섰다. 이해에 Pepin은 Nimes를 정복하고, Narbonne의 문턱까지 대부분의 Septimania지역을 복속시켰다. 그가 무슬림 고트족 Septimania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Charels는 또 다른 적군, 즉 아키텐 공작을 발견하였다. Waiffer 공작은, Pepin의 확장적 야망을 알고서, Pepin이 Narbonne를 포위할 때, 바스크군과 함께 Pepin군의 후위를 공격했다고 기록된다. 

 

It was ultimately the Frankish king who managed to take Narbonne in 759, after vowing to respect the Gothic law and earning the allegiance of the Gothic nobility and population, thus marking the end of the Muslim presence in southern Gaul. Furthermore, Pepin directed all his war effort against the Duchy of Aquitaine immediately after subduing Roussillon.

(번역) 결국 프랑크왕은 759년 Narbonne를 취하게 되며, 고트족의 법을 존중한다는 약속으로 고트족의 귀족과 주민들의 충성을 얻게 된다. 이로써 남부 Gaul 지역에 대한 무슬림의 출현의 종말을 찍게 된다. 더구나, Pepin은 Roussilon을 복속시킨 후, 곧 바로, 아키텐공국에 대한 모든 전쟁노력을 기울인다.  

(자료 :  Umayyard invasion of Gaul, Wikipedia, 인용출처 : https://lainfos.tistory.com/381 )

 

 

X.  눈이 1장이나 쌓인 추위의 장소는 알프스 가까운 지역

 

즉 733년 당나라가 반격한 싸움 장소는 등주가 아니다. 따라서 보르도나 가론강전투도 아니다. 또한 마도산 전투로 판단되는 Tours전투도 아니다. 즉 눈이 1장이나 쌓인 추위의 장소는 피레네 산맥 또는 알프스에 가까운 지역으로 보인다.

 

당군이 10만의 군사를 보냈으나, 추위에 반이상의 병력이 죽거나 동상을 당해 철수했고, 신라군은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 기록된다. (신당서에는 범양지역 당군과 신라군 연합 10만명이 출정했다 기록된다). 전투병력이 범양 지역과 유주지역이 언급되는 것을 고려하면, 알프스쪽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범양지역은 거란이나 해족과 가까운 지역이며, 당나라의 동부지역에 해당한다. 거란군은 Alemanni로 프랑크의 동쪽에 있으며, 해족은 Helvetii로서 스위스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전투장소는 알프스산맥에 가까운 지역이 된다. (아래 지도 참조). 즉 피레네 산맥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Tours 전투(732)에서 패배한 우마이야왕조 아랍군은 신라군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XI. 결 론

 

이상으로 마도산 전투 즉 Tours-Poitiers전투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는 처음에 우마이야군이 프랑크왕국과 싸웠다는 기록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분석을 시작했다. 필자는 우마이야를 신라로, 프랑크왕국을 당나라로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긴 연구 끝에 밝혀낸 결론은, 우마이야군의 아랍군이 아니라, 무슬림(비기독교)의 고트족과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연합세력이 당나라인 프랑크왕국과의 전쟁을 한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무슬림교의 북진을 막았다고 서양사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찬사를 받은 Tours전투는 마도산 전투에서의 당나라의 패배를 감춘 역사적 왜곡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글, 발해가 공격한 당의 등주는 어디인가? (1), (2) 시리즈에서도 밝혔듯이, Gaul지역에 진출한 아랍세력은 신라인 우마이야세력이 아니라, 거란, 돌궐과 연합한 발해의 세력임을 밝혀 냈다. 

서양사가들은 로마사를 미화하고, 훈족이나 고트족의 이방인의 침략사를 깎아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로마사는 백제의 일부인데, 백제가 망한 후의 비잔틴제국은 신라로, 이후 다시 고려로 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은 15세기까지 살아 남았다고 기술하는 것이 대표적인 이러한 경향의 발로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신라가 아닌 발해의 세력을 유사한 동이족의 역사로 혼동하여, 우마이야왕조의 Gaul 지역침입이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마도산 전투와 Tours-Poitier전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점은 필자의 연구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특히 프랑크왕국의 방어전략과 기병이 없는 보병전략이, 해족의 기병이 이탈한 당나라의 전략과 너무도 일치한다. 그리고 나무 등 방해물 설치와 높은 언덕지형을 이용한 프랑크왕국의 전략은, 마도산에서의 전투와, 깊이 3장의 참호를 4백리에 걸쳐 파서 발해, 거란, 돌궐 연합군의 기병진격을 막은 당나라의 전략과 매우 일치하는 모습이다.

 

또한 마도산 전투이후, 분열된 돌궐의 지원이 없는 거란이 당나라에 다시 복속되는 모습이, 서양사에서도 거란으로 추정되는 Alemanni가 프랑크에 복속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즉 여러 가지 정황상 마도산 전투는 Tours-Poitiers 전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구나 이들 전투지역이 가까운 곳에 강을 끼고 있어, 발해의 수군, 해상세력인 돌궐의 합류가 용이한 위치라는 것도 이들의 전투가 같은 것이라는 필자의 추정에 큰 설득력을 주고 있다.  결국 서양사가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 패한 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묘사하는 우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전투의 사상자가 프랑크군 1500명 대 무슬림군 37.5만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propaganda를 보이는 것은 필자의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특히 기독교에 관련된 언급에서 심한 왜곡의 역사를 보이고 있어, 기독교 신앙인인 필자가 부끄러운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고구려지역이었던 아키텐지역이 프랑크군과 합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또한 이후 프랑크군에 적대세력이 되었다는 기록도 함께 있어, 어느 정도 독립적 세력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나, 어느 편에 우군이었는지는 매우 모호하게 되었다. 발해의 등주 공격시점(732)에서는 유주자사 위준이 죽었으므로, 이때는 아키텐지역의 독립세력이 프랑크군 즉 당나라의 우군이었다는 판단을 하게 하나, 이후 전개되는 아키텐지역의 고트족 후예와 바스크군의 연합은 프랑크군과 전쟁을 하고 있어, 필자가 판단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후예인 이들 세력이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경우는 프랑크 즉 당군과 협력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프랑크군 (당군)과 적대세력으로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에 관한 신라나 당나라의 역사자료가 일천하므로, 확인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단지 발해 세력과 연합한 돌궐의 일부세력이나 구고구려세력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왜곡을 고려할 때, Toulouse 전투(721)도 왜곡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이에 대해 분석해 볼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