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고조선

환단고기의 단군시대 삼한(삼조선)의 위치 비정 검토 (I)

Chung Park 2024. 7. 5. 12:37

 

I. 머리말

 

지난 두개의 글에서 흉노의 고향인 약수가 동아시아에 있는 것이 아닌 북유럽에 있는 것으로 필자는 추정하였다. 이번에는 환단고기의 내용 중 태백일사의 삼한관경의 내용을 직접 살펴 보며, 현 재야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삼한, 삼조선의 위치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홍산문명의 실체가 무엇이든 동아시아에도 발달한 고대 문명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나, 이 홍산문명이 삼한과 관련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러한 의문을 더 확실히 검토하는 방법은 실제 문헌에 있는 내용과 현재의 지형 지리를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형 지리도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역사적 고증이 없는 상황에서는 상식선에서 판단하고자 한다.

 

II. 태백일사 삼한관경 중 마한세가의 위치 관련 내용

 

환단고기 중 태백일사에 삼한관경이란 부분이 있다. 주로 단군시대의 삼한, 삼조선에 관련된 내용이다. 필자는 이들 내용에서 지형 지리에 관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형 지리는 필히 위치 추정이 뒤따른다. 따라서 현 재야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동북아시아의 삼한 위치 비정이 이러한 지형 지리 내용과 일치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삼한관경 내용에는 총론, 마한세가, 상, 하, 그리고 번한세가 상, 하가 있는데, 본 글에서는 총론, 마한세가의 상, 하 내용의 분석에 한하고자 한다. 번한세가 상, 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총론 및 마한세가의 본문 내용과 해설은 너무 길어 본 글에 삽입하지 않았다. 필자의 본 블로그에, 카테고리, 단군조선에 펌글자료로 실려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아래에서는 상기 내용 중 위치관련 내용 30개 항목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분석하였다. 이들 내용과 삼조선의 위치 추정과의 비교는 III. - IV. 에서 하고자 한다.

 

1) 태백산 북쪽으로 달리면 홀연히 높게 서있는, 강과 산을 끼고 있는 비서갑(斐西岬, 방황하는 모양 비, 서녁서, 곶갑) 지역: 환웅천황이 순수하셔 사냥하시던 곳으로서, 환웅천왕을 제사지내는 곳, 환웅천왕이 임한 산의 이름은 불함(不咸 다 함)이며, 요즈음 또한 완달(完達 통달할 달)이라 함.

 

  • 태백산 북쪽으로 달리면 높게 서있는 비서갑지역
  • 비서갑 지역은 有負水(負=陰, 그늘진 강이 있고) 抱山(산을 안고) 而又回焉之處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지역)

- 비서갑은 환웅천황이 사냥하신 곳이며, 환웅천왕을 제사 지낸 곳

  • 환웅천황이 임한(사냥한) 산은 불함산 또는 발음이 같은 완달산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 有負水抱山而又回焉之處

乃大日王祭天之所也 世傳桓雄天王 巡駐於此 佃獵以祭 風伯 天符刻鏡而進 雨師 迎鼓環舞 雲師 佰劍陛衛 盖天帝就山之儀仗 若是之盛嚴也 山名曰不咸 今亦曰完達 音近也

 

태백산에서 북쪽으로 달리면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삼신 오제에 뿌리를 두고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를 삼백이라 한다.(삼신오제본기 참고) 풍백(風伯: 입법관)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 행정관)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영고迎鼓 의식), 운사(雲師: 사법관)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2) 비서갑(斐西岬)의 초대 왕검(王儉)이 된 웅녀군(熊女君)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以天王諭國人之意

 

뒤에 웅녀의 군(君-웅족 여왕)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3) 사와라(斯瓦羅) 환웅(=13세 환웅) 초기, 웅녀군의 후손 여(黎)는 처음으로 단허(檀墟)지역에 책봉 받은 왕검(王儉)

 

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黎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

 

사와라(斯瓦羅-13세환웅)한웅 초기에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가 천 여명을 헤아렸다.

 

 

4) 이후 460년후 신인(神人) 왕검이 왕을 보필하는 비왕(裨王)이 되었다가, 24년후 웅씨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이어 받아, 구환(九桓)을 통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됨

 

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椑王-임금을 보필하는 직위)이 되었다. 섭정하신 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환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5) 아사달(阿斯達)은, 구환(九桓)을 삼한(三韓 )으로 나누어 지배하던, 단군왕검(檀君王儉)인 천왕이, 직접 통치한 진한(辰韓)의 수도였으며,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乃召國人 立約 曰自今以後 聽民爲公法 是謂天符也

夫天符者 萬世之綱典 至尊所在 不可犯也

遂與三韓 分土而治 辰韓 天王自爲也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是爲 一世檀君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되,「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했는데,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6) 아사달(阿斯達)은 삼신(三神)을 제사지내는 곳이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남아 있어 왕검성(王儉城)이라 부른다.

 

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 稱王儉城 以王儉舊宅 尙存故也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 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 상 馬韓世家 上 >

 

7) 웅씨족 일파인 소전(少典)은, 안부련 환웅(8세) 말시기에, 강수(姜水)지역에서 병사를 감독하였다.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은 많은 약초로 약을 만들었다. 이후 열산(烈山)으로 이주하여 교역하게 하며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였다.

 

- 한족 시조 헌원軒轅은 웅씨족 소전少典의 후예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 嘗百草制藥 後徙列山 日中交易 人多便之

 

웅씨(熊氏)에서 갈려져 나간 자중에서 소전(少典)이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8세환웅) 한웅 말기에 소전(少典)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8) 소전의 다른 지파 공손(公孫)씨는,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집헌,수레헌 丘)에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헌원(軒轅, 끌채원, 수레원, 성씨원)의 조상

 

少典之別派 曰公孫 以不善養獸 流于軒丘 軒轅之屬 皆其後也

 

<해설>

소전의 다른 지파<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다. 헌원(軒轅-공손(성)헌원(이름))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9) 백아강(白 흰백 牙어금니아, 관아아, 岡산등성이 강), 법수교, 삼청궁에 모인 헌원, 창려, 공공, 대요

 

鳳鳥 聚棲於白牙岡 仙人 來往於法首橋 法首 仙人名也

人文 早已發達 五穀豊熟 適以是時 紫府先生 造七回祭神之曆 進三皇內文於天陛

天王嘉之 使建三淸宮而居之 共工軒轅倉呂大撓之徒 皆來學焉

 

 

<해설>

봉황새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마한의 수도)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치우천황의 스승)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치우천황)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려(倉呂)(창힐(倉頡)?-문자를 만든이), 대요(大撓-십간 십이지 만든 이)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10) 산정상에 있는 산의 모습 웅상(雄수컷웅,常항상상)의 소도(蘇塗)

 

自是蘇塗之立 到處可見 山像雄常 山頂皆有 四來之民 環聚墟落 四家同井

二十稅一 時和年豊 露積邱山 萬姓歡康之 作太白環舞之歌以傳

 

이때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의 웅상(雄常)이 항상 산 정상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방에서 온 백성들은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하나의 정전법을 시행하여 함께 농사를 지었으며, 20분의 1의 세금을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청색부분은 필자의 해석으로 수정한 곳)

 

 

11) 치우가 헌원을 이긴 탁록대전의 탁록(涿 칠탁鹿 사슴록)은 지금의 산서 대동부 (山西大同府)

 

 

-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헌원軒轅 토벌討伐- 탁록涿鹿 대전쟁

 

繼有蚩尤氏 作造九治以採礦 鑄鐵作兵 又制飛石迫擊之機 天下 莫敢讐之

時 軒丘不服 蚩尤 躬率往征之 大戰於涿鹿 今山西大同府也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치(治 다스릴 치, 강이름 이)에서 광물을 캐어 (구야(九冶 대장간 야)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투석기)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징벌코자 하여 탁록涿鹿에서 크게 싸웠다. 탁록涿鹿은 지금 산서 대동부이다.

12) 단군왕검이 천하를 삼한으로 나누고,웅백다(熊伯多)를 마한(馬韓)에 봉하니, 그 도읍지가 달지국(達支國) 또는 백아강이며, 웅백다는 마한산(馬韓山)에 올라 제천행사를 했다.

 

檀君王儉 旣定天下 分三韓而管境 乃封熊伯多爲馬韓 都於達支國 27

亦名曰白牙岡也 登馬韓山祭天 天王下詔 曰人視鏡則姸醜自形 26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馬韓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가로되,「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13) 단군왕검 51년(BC 2283년)에 천왕은 운사, 배달신에게 명해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건축하게 하고, 제천단을 마리산(摩 문지를 마 유리 리 山)에 세우는데, 강남의 장정 8천명이 이를 돕게 했다. 신유년 (BC 2280년) 3월, 천왕은 마리산에 친히 행차하여 제천행사를 했다.

 

-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다.

 

檀君王儉五十一年 天王 命雲師倍達臣 築三郞城于穴口

設祭天壇于摩璃山江南民丁八千人以助役 辛酉三月 天王 親幸摩璃山祭天

熊伯多薨 在位五十五年 子盧德利立

盧德利薨 子弗如來立

 

단군왕검 51년(무오 B.C.2283)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을 혈구(穴口)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머리산)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B.C.2280)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 지냈다.

 

웅백다(熊伯多)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盧德利 : 2대)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弗如來 : 3대)가 즉위하였다.

 

14) 부루단군이 BC 2228에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으며, BC 2225년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웠다. 기원전 2221년 벼를 재배하게 하였다. BC 2182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是檀君扶婁十二年壬子 秋十月 以命頒七回曆于民 明年春三月 始敎民種柳于白牙岡 作都亭

丙辰 刻立三一神誥碑於南山 庚申 作稻田 己亥 立蘇塗 施三倫九誓之訓 治化大行

 

이때가 단군 부루 12년 임자(B.C.2229)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七回)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듬해(계축년 B.C.2228)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B.C.2225)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우게 했다.

경신년(B.C.2221)에 도전(稻田-벼를 재배하는 논)을 일구고 기해년(B.C.2182)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15) 기원전 2131년, 오사구(烏까마귀오 斯이사 언덕구) 단군은, 진한(辰韓)의 남해안에 있는 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했다

 

杜羅門薨 子乙弗利立 乙弗利薨 子近于支立 乃檀君烏斯丘乙酉也

庚寅 遣民丁三十人 造船舶于薩水 乃辰韓南海岸也

 

두라문(杜羅門)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乙弗利 : 5대)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近于支 : 6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을유년(B.C.2136)이다.

경인년(B.C.2131)에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16) BC 2109년, 한(韓)은 명을 받아 상춘(常春)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께 제사지냄

 

壬子 韓以命入常春 助祭三神于九月山

 

임자년(B.C.2109)에 한(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주성자)에서 삼신님께 제사 지내는 것을 도왔다.

 

 

17) 이궁(離宮)을 목단봉 중려(牧丹峰 中麓)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는 장소로 함

 

十月 起離宮於牧丹峰中麓 爲天王巡駐之所

 

10월에 이궁(離宮)을 목단봉 중려(中麗)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18) 단군 도해道奚가 대성산(大聖山)에 대시전(大始殿)을 건설하고 대동강(大同江)에 대교(大橋)를 만들게 명하였다. 환도문명의 번성함이 역외까지 들리자, 하주(夏主) 근(媚)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檀君魯乙壬寅 莫延薨 弟阿火立

時 檀君道奚 方銳意開化 平等爲治 以命建大始殿大聖山大橋大同江

三忽爲佺 設句堂 定七回祭神之儀 講三倫九誓之訓 桓道文明之盛 聞于域外

夏主媚 遣使獻方物

단군 노을(魯乙10세단군)제의 임인년(B.C.1939)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阿火 : 10대)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道奚)가 바야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3고을)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애,례,도 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 나라의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19) BC 1632년 탐모라인(耽牟羅人)이 말 30필 헌납

 

己酉 耽牟羅人 獻馬三十匹

 

기유년(B.C.1632)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 필을 바쳐왔다.

 

20) 출생지역 명의 단군 이름과 은나라에 가까운 마리산

 

  • BC 1550년 두막해(豆莫亥) 즉위 : 두막루 지역 출신 단군?
  • BC 1549년 두막해 단군, 마리산 행차, 참성단 제사,
  • 은왕 외임이 사신 파견하여 제사 도움 : 마리산은 은나라 가까이
  • BC 1472년 독로(瀆盧) 단군 즉위 : 독로국 지역 출신 단군?
  • BC 1323년 아라사(阿羅斯) 단군 즉위:아라사 지역 출신 단군?

 

乙阿薨 檀君余乙辛未 子豆莫亥立

壬申三月十六日 親幸摩璃山 祭三神于塹城壇 殷主外壬 遣使助祭

豆莫奚薨 戊寅 子慈烏漱立 薨 己丑 子瀆盧立 瀆盧薨 檀君固忽庚午

子阿婁立 阿婁薨 戊午 弟阿羅斯立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餘乙帝)의 신미년(B.C.1550)에 아들 두막해(豆莫奚 : 15대)가 즉위하였다. 임신년(B.C.1549) 3월 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은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B.C.1472)에 아들 독로(瀆盧 : 17대)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固忽帝)의 경오년(B.C.1371)에 아들 아루(阿婁 : 18대)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B.C.1323)에 동생 아라사(阿羅斯 : 19대)가 즉위하였다.

21) 개성의 고등 반역과 우현왕 임명 및 마한군의 홍석령 철수

해성의 욕살 서우여에 선양시도 및 마한 반대,

색불루 단군 즉위(BC 1285) 및 해성 전투에서 마한 참패

 

是歲 高登 叛據開城 抗命天王 馬韓 擧兵討之 到紅石嶺

聞天王許高登 爲右賢王 乃止 乙未 天王

欲讓禪于海城褥薩徐于餘 馬韓 諫不可而不允

索弗婁之立 而馬韓 整師躬率 往戰于海城 戰敗不還

이 해(단군세기에는 BC1289년)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 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B.C.1286)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즉위(B.C.1285)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馬韓世家 下 마한세가 하>

22) 색불루 단군의 삼한 제압 및 백악산에 도읍

 

- 삼한에서 삼조선 시대로 전환

우현왕 색불루의 대권당

 

檀君索弗婁 承祖父功 手握重兵 辰韓自潰 二韓亦未一勝而敗滅

前帝 使人傳玉冊國寶以讓 新帝 相都於白岳山 諸褥薩執不可

黎元興蓋天齡等 奉詔諭之 於是 諸褥薩畢服

 

<해설>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할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馬韓)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해 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지방관)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23) 색불루 단군은 녹산,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위에 오름

삼한은 백두산에 천단을 쌓고,

색불루 단군은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냄

 

- 색불루단군, 녹산 즉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천도遷都

丙申元年正月 遂卽位于鹿山 是爲白岳山阿斯達

三月下詔 曰 邇者 阿斯達 使人傳玉冊國寶以讓 前帝

今雖襲號以尊 而其海內山川 旣歸名帳 祭天之禮 當在國典 不可濫也

必須徵古實 以達誠敬者 今當祭迎 前往擇齋 審掃神域 潔備牲幣 用答三神

於是 帝擇齋七日 授香祝于黎元興 至十六日早朝 敬行祀事于

三韓大白頭山天壇 帝親祭于白岳山阿斯達

 

<해설>

병신원년(B.C.1285)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소태단군이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 19대-마한부단군)에게 내려 주었다. 3월16일(대영절-단군천제)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색불루단군)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24) 삼한땅은 오만리에 달한다.

 

白頭山誓告之文 曰

朕小子檀君索弗婁 拜手稽首 自天帝子之修我以及民 必自祭天以敬

皇上 受三神明命 普恩大德 旣與三韓五萬里之土境

共享弘益人間 故遣馬韓黎元興 致祭于三神一體上帝之壇 神其昭昭 體物無遺 潔齊誠供

降歆黙佑 必能賁飾新帝之建極 世保三韓千萬年无疆之祚業

年穀豊熟 國富民殷 庶昭我聖帝空我存物之至念

<해설>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 들여 바쳐 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 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25) 진(眞)조선(과거 辰韓)- 색불루 단군 직할 통치,

막조선(마한)-여원흥,

번조선(번한)-서우여

 

통틀어 진한(辰韓) 즉 단군조선

 

五月 改制三韓 爲三朝鮮 朝鮮 謂管境也

眞朝鮮 天王自爲 而地則仍舊辰韓也 政由天王 三韓 皆一統就令也

黎元興爲馬韓 治莫朝鮮 徐于餘爲番韓 治番朝鮮 總之名

曰檀君管境 是則辰韓 史稱檀君朝鮮 是也

<해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친히 다스리니 그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이다.

삼한(三韓)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한(辰韓)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다.

 

26) 마한 여원홍이 명을 받들어 대동강 장악,

천도 건의 영고탑은 진조선에 있다.

 

- 대동강의 왕검성을 막조선의 여원흥이 주재主宰함

 

元興 旣受大命 鎭守大同江 亦稱王儉城

天王 亦以每年仲春巡駐馬韓 勤民以政 於是 藉供厚斂之弊 遂絶

先是 有詔 曰惟朕一人之養 煩民以斂 是乃無政也 無政而君何用哉 嚴命罷之

戊子 馬韓 承命入京師 諫以寧古塔遷都爲不可 從之

元興薨 己丑 子阿實立 阿實薨 弟阿闍立

<해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가로되「생각건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영고는 만주어로 6, 영고제를 지내는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에 아들 아실(阿實 : 21대)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阿闍 : 22대)가 즉위했다.

 

27) 은 멸망후 기자의 태행산 서북지역 은거 및 막조선 순찰 열병

 

- 기자의 은둔隱遁 생활

 

己卯殷滅 後三年辛巳 子胥餘 避居太行山西北地 莫朝鮮聞之 巡審諸州郡 閱兵而還

阿淞薨 庚戌 子阿火只立 阿火只薨 丙戌 弟阿斯智立 阿斯智薨 檀君摩休丁亥 兄之子阿里遜立 阿里遜薨 子所伊立 所伊薨 丁亥 子斯虞立

<해설>

기묘년(B.C.1122)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20) 자서여(子胥餘-기자)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31)에 아들 아화(阿火 : 22대)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B.C.995)에 동생 아사지(阿斯智 : 23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摩休)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 : 24대)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所伊 : 25대)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B.C.934)에 아들 사우(斯虞 : 26대)가 즉위했다.

 

28) BC 727년 협야후가 500척 전선으로 해도(海島) 왜인 반란평정

 

- 협야후陜野侯가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함

戊子 周主宜臼 遣使賀正 斯虞薨 甲辰 子弓忽立

甲寅 命陜野侯戰船五百艘 往討海島倭人之叛

弓忽薨 子東杞立 東杞薨 檀君多勿癸酉 子多都立 多都薨 壬辰 子斯羅立

斯羅薨 子迦葉羅立 迦葉羅薨 甲寅 子加利立

乙卯 隆安獵戶數萬叛 官兵 每戰不利 賊遂迫都城甚急 加利亦出戰 中流矢而薨

<해설>

무자년(B.C.933)에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B.C.737)에 아들 궁홀(弓忽 : 27대)이 즉위하더니 갑인년(B.C727)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29) 단군 다물(多勿), 단군 가섭라(迦葉羅, 31대) : 지역 이름?

BC 426년 융안(隆安)의 사냥족 모반으로 도성까지 칩입하여, 단군 가리(加利 : 32대) 전사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東杞 : 28대)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多勿)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에 아들 사라(斯羅 : 30대)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迦葉羅 : 31대)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加利 : 32대)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에 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30) 상장 구물(丘勿)이 모반한 화웅(和熊)의 두목 참살 후

장당경으로 도읍 옮김

가리의 손자 전내 막조선 계승

수유인 기대(箕代)가 번한 점령후 번조선왕 칭함

연나라 연합작전 막조선이 거부

단군 고열가 왕위 버리고 아사달에 은거

진(眞)조선 5가가 5년 공화정후 멸망

 

 

 

丙辰 上將丘勿 遂斬獵戶頭目于和態 移都藏唐京 先以加利之孫典奈

入承莫朝鮮 自是國政益衰 典奈薨 子進乙禮立 進乙禮薨 乙卯 子孟男立

戊戌 須臾人箕代 兵入番韓以據 自稱番朝鮮王 燕遣使 與我共伐之 莫朝鮮不從

癸亥 檀君高烈加 遂棄位入阿斯達 眞朝鮮與五加從政 終未復而終焉

 

<해설>

병진년(B.C.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44세)이 마침내 화웅지역 사냥꾼들의 두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내(典奈 :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이때부터 삼조선의 병권을 나눠가짐)

 

전내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 : 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孟男 : 35대)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王)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에게 맏기었으나 5년 동안 공화정으로 이어오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III. 재야사학계의 삼한 관경의 위치 비정 지도

 

 

환단고기 진서론 강의 하는 분이 말하는 단군조선 시기 삼한관경 위치

(유튜브 자료 캡쳐한 것)

 
 

홍산문화 강의 하는 윤창열씨의 삼한관경의 위치지도 (유튜브 자료 캡쳐한 것)

 

 

IV. 환단고기와 재야 사학계의 삼조선 위치 비정의 비교

 

1) 태백산 북쪽으로 달려서, 강과 산을 끼고 있는 비서갑(방황하는 모양 비, 서녁서, 곶갑) 지역: 환웅천황이 순수하셔 사냥하시던 곳으로서, 환웅천왕을 제사지내는 곳, 산의 이름은 불함(不咸 다 함)이며, 요즈음 또한 완달(完達 통달할 달)이라 함.

 

 

태백산(백두산) 북쪽으로 달려 바다에 있는 곶의 비서갑 지역이 아래지도에서는 없다. 곶의 뜻은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쪽하게 뻗은 육지'이다.

 

(자료 : 환단고기 진서론 2, STB 상생방송, 유튜브 자료 캡처한것)

 

산해경에 불함산은 숙신의 북쪽에 있다, 또는 숙신씨지국에 있다 했다. 읍루는 숙신의 후예라 한다. 부여와 읍루의 북쪽 접경에 약수가 있다 했다. 이러한 논리를 연결하면, 불함산은 약수 근처에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제일 먼저 실은 지도에서 약수 위치를 중공의 북부 내륙에 비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리 어디에도 들어 맞지 않는다.

 

2) 비서갑(斐西岬) 지역의 초대 왕검(王儉)이 된 웅녀군(熊女君)

 

비서갑의 초대 왕검이 웅녀군이 되었으니, 곰이 많이 있는 지역에서 여인이 왕검 즉 지역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활동이 많은 지역에 비서갑지역이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비서갑지역은 환웅천황이 사냥을 다니던 곳이라 했으며, 그 산이 불함산으로 추정된다. 또한 환웅천황을 제사 지내는 곳이라 했으니, 아사달과 일맥 상통한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웅녀군이 단군신화에서 환웅과 곰과의 연합에 의해 단군이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즉 비서갑지역, 아사달, 단군왕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환인씨가 환국을 건국한 파내류산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산과 바다가 접하는 비서갑지역, 그리고 곰이 많은 지역, 그리고 단목인 박달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비서갑지역, 아사달 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지역은 상기 지도의 하얼빈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

 

 

3) 사와라(斯瓦羅) 환웅(=13세 환웅) 초기, 웅녀군의 후손 여(黎)는 처음으로 단허(檀墟)지역에 책봉 받은 왕검(王儉)

 

웅녀군의 후손 여(黎)가 처음으로 단허지역에 왕검이 되었다 한다. 상기 비서갑지역과 다른 지역이라는 뉴앙스이다. 단허지역은 박달나무가 많은 지역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단군 왕검이라는 단의 표현이 비롯되지 않았나 한다. 따라서 단허지역 또한 단군조선의 주요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단허지역을 단국이라고 해설하는 공유자료였으나, 필자는 원문을 충실히 번역하는 의미에서 그냥 단허지역으로 했다.

 

필자가 두막루지역으로 추정하는 덴마크지역은 Dan이란 왕이 있었으며, 이 지역 부족을 Danes라 했다. 덴마크란 이름도 Dan에서 왔다고 한다. 이 지역이 단허지역일 수 있다고 본다.

 

4) 이후 460년후 신인(神人) 왕검이 왕을 보필하는 비왕(裨王)이 되었다가, 24년후 웅씨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이어 받아, 구환(九桓)을 통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됨

 

비서갑의 초대 왕검이 된 웅여군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후 웅씨왕의 대가 끊기고, 웅씨족의 비왕이었던 사람이 계승하였다. 당시 웅씨왕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기록은 치열한 전투였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왕위를 이어 받은 후, 구환을 통일하였다 한다. 이는 단군왕검이 무예에도 뛰어나거나 리더쉽이 매우 좋은 왕이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구체적 내용이 없이 단순히 구환을 통일했다는 자료가 아쉽지만 말이다. 이미 12환국을 통치하던 환국시대의 연속이라 가정하면, 그 중 3개국이 이탈했다는 의미도 된다.

 

여하튼 단군왕검은 웅씨왕의 지역이 중심이 되었고, 단허지역 등을 포함했기 때문에 단군왕검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2환국 중에서 9환국이 통일하였다 하면, 어느 3개 환국이 독립적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환단고기의 다른 자료에서 소태단군시절, 은왕 무정시기에, 단군조선의 고등이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귀방족을 정벌하자, 일군국, 양운국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는 것을 보면, 이들은 단군조선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들 일군국, 양운국이 9환국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들이 은나라와 가까운 서강지역의 저족, 강족이라는 자료를 고려하면, 포루투갈, 스페인의 남부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이들 지역에 고대국가의 흔적이 있으며, 독립적인 위상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북쪽에 있는 프랑스 서북지역의 Bretagne지역 또는 영국의 Briton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리국이 나머지 9환국에 포함되지 않은 12환국의 하나로 판단된다. 이들 3개국은 서쪽에 치우쳐 있어, 9환인 삼한의 남북 오만리에 포함되지 않지만, 남북 5만리의 12환국에는 포함될 수 있다.

 

 

5) 아사달(阿斯達)은, 구환(九桓)을 삼한(三韓 )으로 나누어 지배하던, 단군왕검(檀君王儉)인 천왕이, 직접 통치한 진한(辰韓)의 수도였으며,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아사달은 단군이 직할 통치하는 진한(辰韓)의 수도였다는 것, 그리고 조선(朝鮮)이라 처음 나라 이름을 정한 때의 수도라는 것이다. 즉 아사달은 최초 조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위치에 대해 산해경의 자료를 고려하면, 북해 지우, 동해지내 라는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해의 모퉁이, 그리고 동해의 안에 있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환인씨의 나라가 북해의 동쪽 즉 천해의 동쪽에 있었다는 환단고기 삼성기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같은 북해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하며, 또한 천해(天海)라는 표현도 천해(踐海)가 아닌가 한다. 실제 지금의 북해(North Sea)는 수심이 90m - 120m의 얕은 바다이다. 이 지역에서 북해의 모퉁이, 동해의 안에 있는 조선의 위치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지역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한자를 보면, 선이 물고기와 양을 합쳐 놓은 글자이다. 즉 바닷가에서 수산물을 취하고, 또한 양으로 목축을 하는 동쪽 (아침)의 지역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유럽에서 동해라 하면 발틱해가 동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사달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지역이 되어야 한다. 비서갑 지역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사달은 웅녀군 후손 여, 신인왕검, 단허의 지역 주위이며, 웅녀군이 초대 왕검이 된 비서갑지역 주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사달을 하얼빈으로 추정하는 것은 비서갑지역 주위가 될 수 없으므로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다. 또한 조선의 위치에 관한 산해경의 내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6) 아사달(阿斯達)은 삼신(三神)을 제사지내는 곳이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남아 있어 왕검성(王儉城)이라 부른다.

 

이 표현은 왕검성이 여럿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왕검이란 지역의 지도자가 있던 곳이면 왕검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마한세가 상>

 

7) 웅씨족 일파인 소전(少典)은, 안부련 환웅(8세) 말 시기에, 강수(姜水)지역에서 병사를 감독하였다.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은 많은 약초로 약을 만들었다. 이후 열산(烈山)으로 이주하여 교역하게 하며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였다.

 

여기서 웅씨족 일파인 소전은 환웅의 통치지역에 살았다는 의미이다. 강수(姜水)지역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강족(姜族)의 땅에 있는 강(江)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후 열산(烈山)으로 이주했다 한다. 열산은 열양(烈세찰열 陽)과 연관이 있다면, 연나라지역으로 보인다. 열양지역을 연나라지역으로 본다면, 이 지역에 공손씨가 주로 있었으므로, 다음의 공손씨 이야기와 연관된다. 그러나 필자는 열산이나 열양이 다른 한자로 와 닿는다. 열산은 熱(더울 열)山으로 열양은 熱洋 즉 따뜻한 바다가 아닐까? 북해는 다른 바다에 비해 상당히 온도가 높은 바다이다.

 

환단고기에 이러한 내용을 싣는 이유는 치우와 싸운 헌원이 원래 웅씨족의 후손으로 환웅의 지배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굳이 마한세가에 싣는 이유는 마한이 이들지역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판단된다.

 

필자는 강족의 지역을 스페인지역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후에 백제의 온조왕 시기의 활동을 고려하면, 마한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 필자는 중국사의 장강을 스페인의 피레네산백 남쪽 에브로강으로 추정하고, 한수(漢水)는 이의 지류 아라곤강으로 추정했다. 백제사를 보면, 한수(漢水)유역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또한 횡악이란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피레네산맥이 횡악이 아닌가 한다. 즉 백제의 마한지역 점령은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은나라 지역을 현재의 프랑스지역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하에서는 상기 내용이 마한세가에 실리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를 마한으로 추정하는 재야사학계의 위치 추정은 이러한 황제 헌원의 이야기가 상황에 맞지 않는다.

 

8) 소전의 다른 지파 공손(公孫)씨는,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집헌,수레헌 丘)에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헌원(軒轅, 끌채원, 수레원, 성씨원)의 조상

 

즉 헌원의 조상 공손씨는 웅씨족의 후손 소전의 또 다른 지파라는 설명이다. 즉 황제 헌원도 웅씨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웅씨족이 환웅시기나 단군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 헌원도 그 근원은 단군조선과 뿌리가 같다는 의미를 말하고자 함으로 판단된다.

 

9) 백아강(白 흰백 牙어금니아, 관아아, 岡산등성이 강), 법수교, 삼청궁에 모인 헌원, 창려, 공공, 대요

 

백아강은 마한의 수도라 한다. 그런데 봉황새가 백아강에 날아 들고, 선인들이 법수교를 건넌다 하니, 백아강의 강자는 강(江)인 것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한에 건축한 것으로 생각되는 삼청궁에 치우천황이 거하니, 헌원, 창려, 공공, 대요 등 중국의 유명 인사들이 와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치우천왕의 위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한이 중국의 위치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들이 와서 배워갈 것이 아닌가? 은나라, 하나라가 사신을 보내 천제를 지내는 것을 돕거나 사신을 보냈다 했는데, 그때마다 마한이 거론된다.

 

위의 본문 및 해설의 13), 18)의 기록에서,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았는데, 강남의 장정 8천명을 동원했다 한다. 강남이라 하면 중국 장강의 이남지역을 역사에서는 말한다. 즉 마리산은 장강 주위에 있으며, 그래서 은나라가 사신을 보내 제사를 도왔다 한다. 마한세가에 이러한 내용이 실린 것을 보면, 마리산도 마한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백아강, 마리산, 대동강 모두 마한의 영역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중국과 가까와, 은나라, 하나라가 사신을 보낸 것이다.

 

재야 사학가들이 추정하는 한반도의 마한지역이 중국에서 가까운가? 더구나 배까지 타고 와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마한지역은 이베리아 반도지역으로 바로 위의 프랑스에 있는 중국지역에서 매우 가깝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상기 지도의 삼한 위치 비정은 매우 의문스럽다.

 

 

10) 산정상에 있는 산의 모습 웅상(雄수컷웅,常항상상)의 소도(蘇塗)

 

산정상에 있는 산의 모습 웅상의 소도는 우리에게 낯설은 모습이다. 웅상은 곰의 형상 즉 熊像이 정상이지 않나 생각된다. 즉 산 정상에 있는 소도이며, 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마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한반도의 마한에게 낯선 모습이 이상하다. 그래서 한반도 마한의 위치 비정이 의문스럽다.

 

스웨덴에 있는 Uppsala도시(스톡홀름 바로 위쪽)에 있는 Sacred tree는 필자에게는 소도로 판단된다.

 

 

11) 치우가 헌원을 이긴 탁록대전의 탁록(涿 칠탁鹿 사슴록)은 지금의 산서 대동부 (山西大同府)

 

마한에 초대된 헌원이라면, 헌원과 치우의 대전은 마한과 중국이 가까운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탁록 지역이 산서의 대동부라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마한과 현 중공지역의 중국을 가정하면, 거리가 멀어 탁록대전의 위치가 될 수 없다. 현재의 중공 산서성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마한세가 보다는 번한세가에 실려할 내용이다.

 

그러나 산서를 피레네산맥의 서쪽이라 한다면, 필자가 추정하는 마한과 중국이 가까운 지역이 된다. 탁록은 사슴과 관련된 지역일 것이다. 즉 산에 사는 사슴이 있는 곳이다. 피레네산맥 서쪽 칸타베리아지역에는 알타미라 동굴이 있는데, 프랑스 서남부의 라시코동굴 벽화와 함께 구석기 시대의 벽화로 유명하다. 이들 지역에는 물론 사슴그림이 많다.

 

"while the cave paintings at Lascaux in southwestern France include some 90 images of stags (=수사슴)." (source : deer, Wikipedia)

 

 

 

12) 단군 왕검이 천하를 삼한으로 나누고, 웅백다(熊伯多)를 마한(馬韓)에 봉하니, 그 도읍지가 달지국(達支國) 또는 백아강이며, 웅백다는 마한산(馬韓山)에 올라 제천행사를 했다.

 

마한 수도가 달지국이라 하는데 월지국일 수도 있다. 마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지역이름 또는 국가이름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수도 또한 백아강이라 불린다 한다.

 

백아강 한자는 흰백, 어금니아 또는 관아아, 그리고 산등성이 강이다. 눈이 덮혀 흰 어금니 모양의 산등성이라 해석할 수 있다. 추운 지역이라 눈이 덮힌 산등성이 지역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추운 지역은 수도로서 입지가 나쁘다. 따라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백색 관아의 언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뭔가 백색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백이(白夷)를 말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백인을 말할 수도 있다고 본다. 신라의 석탈해, 일성왕, 아달라왕,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왕 모두 백인이었다고 한다.

 

웅백다 이름은 곰이 많은 지역 출신이름으로 판단된다.

 

달지국(또는 월지국)이 한반도에 있는가? 중국사에서 월지국은 많은 이동을 한 나라로 서술된다. 한편 마한은 월지국이 중심국가였다고 한다. 이 둘이 지금 역사계의 해석으로는 양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유럽에서는 반달족이 월지족이 아닌가 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사의 월지국의 이동과 마한의 중심국 위치 역할이 양립한다.

 

즉 달지국을 월지국으로 해석할 때, 한반도 비정의 마한 위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13) 단군왕검 51년(BC 2283년)에 천왕은 운사, 배달신에게 명해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건축하게 하고, 제천단을 마리산(摩 문지를 마유리 리 山)에 세우는데, 강남의 장정 8천명이 이를 돕게 했다. 신유년 (BC 2280년) 3월, 천왕은 마리산에 친히 행차하여 제천행사를 했다.

 

 

(1) 마한 강남의 마리산

 

강남 장정 8천명을 동원하여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았다.

 

設祭天壇于摩璃山江南民丁八千人以助役 辛酉三月 天王 親幸摩璃山祭天

 

 

강남을 장강의 남쪽으로 해석한다면, 마리산 제천단이 한반도 강화도에 있을 수 없다. 즉 마한은 한반도로 본다면, 강남 즉 장강이남과 거리가 멀다. 중공에서 장강이라 주장하는 양자강과도 거리가 멀다. 즉 마한의 한반도 위치 추정이 틀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한번 언급한 것처럼, 장강을 스페인 에브로강으로 본다면, 마리산은 에브로강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지역은 마한의 지역으로 판단된다.

 

또한 마한의 마리산은 은나라와 가까와, 은나라 사신이 와서 제사를 돕기도 했다. 마한을 한반도로 추정하면, 이런 추리가 성립할 수 없지만, 필자와 같이, 은나라를 프랑스지역으로 추정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마한 혈구의 삼랑성

 

운사 배달신으로 하여금 혈구에 삼랑성을 쌓다.

 

檀君王儉五十一年 天王 命雲師倍達臣 築三郞城于穴口

 

 

삼랑은 사무라이를 말한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그렇다면 삼랑성은 왜 지역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럼 혈구가 어디일까? 필자는 지브롤터 해협 같은 곳을 말하지 않나 생각한다.

 

중국 후한서 동이전이나 위지 동이전에서는 마한 남쪽에 왜가 있다고 했다. 마한을 한반도로 추정하면, 마한 남쪽에 왜가 있는가? 그리고 혈구와 같은 지형이 있는가?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이베리아반도 마한은 남쪽에 혈구와 같은 지형이 있으며, 그 남쪽인 아프리카 북부지역은 왜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협보가 배를 타고 내려간 남마한의 지역으로 서북부 아프리카지역으로 추정된다. 즉 왜의 지역이지만 마한의 지역으로 단군조선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이후 28)에서 궁훌단군시 BC 727년, 왜의 반란에 대해 협야후가 전선 5백척으로 가서 해도를 정벌했다고 나오는 기록을 보면, 왜 지역도 단군조선의 한 지역으로 관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자료 : 환단고기 진서론 2, 유튜브 자료 캡쳐한 것)

 

 

14) 부루단군이 BC 2228년에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으며, BC 2225년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웠다. 기원전 2221년 벼를 재배하게 하였다. BC 2182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여기서는 부루단군이 백아강에 버들나무를 심었다는 것과 벼를 재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위치와 관련될 수 있다. 즉 백아강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버들나무가 있다는 것과, 이들 지역에서 벼농사가 지어졌다는 것이다. 버들나무가 심어지고, 주위에서 벼농사를 지은 것을 보면, 백아강은 강 주변일 수 있다. 강이 있어야 물을 논에 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범람으로 주위가 기름진 땅이 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어쩌면 백아강의 강자는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江일 수도 있다고 본다. 마한의 수도 백아강이 있을 수 있는 스페인에서는 벼농사로 쌀도 생산된다.

 

15) 기원전 2131년, 오사구(烏까마귀오이사언덕구) 단군은, 진한(辰韓)의 남해안에 있는 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했다

 

 

진한(辰韓)의 남해안에서, 살수에서, 기원전 2131년, 오사구 단군시기에, 장정 30인을 동원하여 배를 만들었다는 상기 삼환관경의 기록이다.

 

여기서 진한은 단군조선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면 한반도 남부에 살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고, 만약 진한을 동북부의 진한으로 본다면, 이의 남해안은 어디가 되는가? 재야사학가들의 추정 지도에서 동해 동북부나 발해 북부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살수가 있어야 한다. 과연 살수가 이런 곳에 있는가? 의문시된다. 진한을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 마한인 한반도 남해안에 살수가 있어야 한다. 과연 있는가?

 

여기서 살수는 고구려 을지문덕이 세운 살수대첩의 살수가 아닐 수도 있다. 살수대첩의 살수는 평양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필자가 마한지역으로 고려하는 이베리아반도와 이태리반도의 남쪽, 시실리섬에서 살수(Salsu river)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이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환단고기가 이제까지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셈이다.

 

 

16) BC 2109년, 한(韓)은 명을 받아 상춘(常春)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께 제사지냄

 

상춘, 구월산은 어디인가? 상춘은 항상 봄이라는 의미의 지역이다. 그리고 구월산은 가을인 구월에 특이한 매력을 나타내는 산인지도 모른다. 혹시 단풍이 아름다운 산인가? 그렇다면 상춘이라는 지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상춘은 항상 봄날씨 같은 기후지역이라는 의미와, 항상 녹색을 띠는 사철나무, 예를 들어 소나무가 있는 지역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두가지를 종합하면, 단풍나무가 있는 구월산과 소나무가 많은 상춘지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반도 마한은 이런 지역이 많다. 그렇다면 필자가 마한으로 추정하는 유럽에도 이런 나무가 많은가? 역시 그렇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위치 추정에 큰 도움은 안된다. 단지 배재하는 지역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부 고서 자료에서는 구월산이 아사달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아사달이라면 굳이 한(韓)에 명령하여 제사를 지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된다. 이는 앞으로 염두에 두고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 이궁(離宮)을 목단봉 중려(牧丹峰 中麓)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는 장소로 함

 

목단봉 중려는 어디인가? 공유자료에서는 모란봉 중턱이라 해설하였는데, 필자는 원문에 충실하고자 이렇게 적었다. 목단은 모란을 의미하며, 특히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대표적으로 사랑받는 꽃이다. 중려는 여(麗 고을려)지역의 가운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려(麗)자는 고려에서 쓰이는 한자로 한민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주 쓰인다. 그래서 중려는 한민족이 사는 가운데라고 해석할 수 있어 원문 그대로 적었다. 이 경우 이궁은 夷宮이 될 수도 있다. 이 이궁을 건설한 지역은 마한에 있으니 마한세가에 실린 것으로 판단한다.

 

목단 즉 모란은 영어로 peony로서,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 아시아, 유럽, 서북아메리카가 원산지라 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마한지역도 모란꽃이 만발한 산이 있을 수 있다. 중공지역도 포함되나 북동부 일부와 중서부 일부 지역에 한한다.

 

 

 

The range of the plant family Paeoniaceae (source: Wikipedia)

(By Ninjatacoshell - This file was derived from: BlankMap-World6.svg:,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1697283)

 

유럽에서는 남부유럽과 서부 러시아지역, 우랄알타이지역이 모란이 피는 지역이다. 특히 필자가 마한으로 여기는 이베리아반도, 이태리반도가 포함되며, 발칸반도, 흑해주위지역, 그리고 터어키의 소아시아지역이 포함된다. 프랑스지역과 서북아프리카지역도 작은 지역이지만 포함된다. 그러므로 모란으로는 어느 지역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마한으로 추정하는 남유럽지역이 포함된 것을 의미있게 생각한다.

 

Distribution maps of the species of Paeonia in Europe and Western Asia.

(source: Wikipedia)

 

 

18) 단군 도해道奚가 대성산(大聖山)에 대시전(大始殿)을 건설하고 대동강(大同江)에 대교(大橋)를 만들게 명하였다. 환도문명의 번성함이 역외까지 들리자, 하주(夏主) 근(媚)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대동강에 대교 세웠다는 것은 이 지역에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대동강과 산서 대동부는 관련이 있을까?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탁록지역이 산서 대동부라 했는데, 대동의 한자가 똑같다. 대동은 大東의 한자인 것을 중국 사가들이 변형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우가 헌원을 이긴 탁록대전의 탁록(涿 칠탁鹿 사슴록)은 지금의 산서 대동부 (山西大同府)"

 

위에서 우리는 탁록지역인 산서 대동부가 피레네 산맥 서쪽, 알타미라 동굴이 있는 칸타베리아지역일 수 있다고 했으며, 또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이 있는 프랑스 중부지역(지형적으로도 산서지역)일 수도 있다. 필자는 하나라가 프랑스지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단군조선이 이 대동강 지역까지 진출하니, 하주(하나라 왕) 근이 염려되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칠 수 있다.

 

그럼 하나라는 어디인가? 중공지역에는 하나라 흔적이 없다 한다. 그러면서도 중공은 하나라가 중공지역에 있다고 주장하니 그렇다고 해보자. 그리고 산서 대동부가 대동강의 위치이며, 현재 중공의 산서성에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마한의 지역과 가까운가? 한반도의 마한과는 너무 먼 곳이기에, 이곳까지 진출할 리도 없고, 더구나 하나라가 두려워 방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재야사학가가 추정하는 상기 삼한의 위치 지도와 전혀 매칭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라를 프랑스지역으로 본다면, 마한이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하므로, 이러한 추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게 된다.

 

 

19) BC 1632년 탐모라인(耽牟羅人)이 말 30필 헌납

 

기원전 1632년의 탐모라가 어디일까? 명마를 키우며 이런 긴 역사를 가진 곳이어야 한다. 마한을 한반도로 본다면, 탐라국이라는 제주도를 말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제주도일까? 제주도에 명마가 있었는가?

 

탐라국은 백제나 중국에서 배로 석달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라 했다. 그만큼 한참 가야하는 지역이다. 더구나 탐라국은 남북으로 이백리, 동서로 백리가 되는 남북으로 긴 섬이라 했다. 그러나 제주도는 동서로 긴 섬이다. 필자는 탐라국은 타밀문화권인 인도 남부 스리랑카의 섬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섭라국이나 탐모라국은 탐라국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섭라국이 (또는 탐모라국이) 이태리반도의 서쪽에 있는 Sardinia섬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는 명마, 명견, 양, 그리고 우리의 씨름과 같은 켈트식 레슬링이 유명하며, 신석기 시대의 우라게 문명이 존재하는 특이하고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은 지역이다. 사로국 시절 신라가 있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필자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이곳과 시실리아섬 두 곳에 기지가 있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필자는 원나라에서 제주도(?)에 말을 길러 후일을 도모했다는 곳이 이 곳이 아닌가 한다. 고려에서는 이곳을 돌려 달라고 해서 돌려 받았는데, 정동행성이란 원나라 관청은 계속 있었다 한다.

 

프랑스 역사에서도 9세기의 샤를마뉴대제가 코르시카섬과 샤르디니아섬을 빼앗은 것으로 위키피디아 역사에 기록되었다.

 

20) 출생지역명의 단군 이름과 은나라에 가까운 마리산

 

  • BC 1550년 두막해(豆莫亥) 즉위 : 두막루 지역 출신 단군?
  • BC 1549년 두막해 단군, 마리산 행차, 참성단 제사,
  • 은왕 외임이 사신 파견하여 제사 도움 : 마리산은 은나라 가까이
  • BC 1472년 독로(瀆盧) 단군 즉위 : 독로국 지역 출신 단군?
  • BC 1323년 아라사(阿羅斯) 단군 즉위:아라사 지역 출신 단군?

 

단군조선의 단군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환단고기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단군 이름들은 지역이름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인다. 특히 아라사 단군의 아라사는 러시아를 나타내는 단어로 한자도 똑같다.

 

광개토태왕이 안 지역에서 태어나 이름이 '안'(安)이라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과거 왕들의 이름이 출생지역이름을 이용한 사례가 흔한 것으로 판단된다. 로마사에서도 왕이름 뒤에 출신지역이름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단군의 이름이 출생지역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러시아는 20세기 들어 동 시베리아에 진출했다. 따라서 아라사라면, 서부 러시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1919년 쓰인 환단고기가 그 시절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도 있다고 본다. 여하튼 동북아시아의 러시아를 가리키는 아라사 단군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곰의 분포지역이나, 박달나무의 신성시하는 지역으로 서부 러시아는 포함되며, 심지어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문명이 이 지역에서 있었다.

 

또한 조선을 북해지우 동해지내로 본다면 발트해 부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자는 약수가 스웨덴의 남부지역의 Dalalven river라고 추정했다. 단군조선은 약수의 우측에 있어서 약수에 신지를 보내, 금철과 고유를 캐오게 하였다 한다.

 

또한 에스토니아, 핀란드지역에 신석기 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며, 고대로부터 발달된 문명이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진(眞)조선의 진한(辰韓)지역이 북유럽, 동북유럽지역이 아닌가 한다.

 

두번째 두막해 단군이 마한의 마리산의 제천행사에 갔을 때, 은나라 사신이 와서 제사를 도왔다고 했다. 위에서 한번 언급한 것처럼, 마리산은 마한의 땅에 있었는데, 장강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으며, 필자는 장강을 스페인의 에브로강으로 추정했다. 그러므로 프랑스지역에 있던 은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마한의 마리산 제천행사를 도운 것이라 추정했다.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한반도 마한과 현 중공땅의 은나라를 가정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

 

 

 

21) 개성(開城)의 고등 반역, 우현왕 임명 및 마한의 홍석령 철수, 해성(海城)의 욕살 서우여에 선양시도 및 마한 반대, 색불루 단군 즉위(BC 1285) 및 해성 전투에서의 마한 참패

해성(海城)은 낙랑국왕 최승과 관련되어 언급된다. (아래 자료 참조)

 

"기원전 169년 낙랑왕 최승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북부여 3세 단군 고해사에게)

그보다 먼저, 기원전 195년 최승은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수도 왕검성에 이르니..."

(자료 : 북부여기 상, 3세 단군 고해사)

 

북부여와 관련 있는 해성 지역은 어디인가? 해성은 바다에 접한 성곽일 것이다. 또한 낙랑국의 위치에서 배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어야 하며, 낙랑국은 또한 배로 마한의 수도에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 낙랑국의 위치, 마한의 위치, 북부여의 위치가 관련된 해성의 지역이다.

 

그리고 해성은 욕살(=지방관) 서우여가 있던 지역으로 단군이 선양하려 하자 마한이 반대했다고 한다. 후일 색불루 단군이 서우여를 번한(번조선) 왕에 봉했다. 또한 색불루 단군이 해성에서 마한과 전투를 하여 마한을 참패시켰다.

 

색불루 단군은 고등의 아들이라 한다. 즉 고등이 반란을 일으킨 개성지역에 색불루 단군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지역의 추정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지리적 추정은 어렵게 보인다. 우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는 최승의 낙랑국의 위치부터 비정해 보자. 낙랑국은 낙랑군과 다르다.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최리의 낙랑국을 호동왕자를 이용하여 멸망 시켰지만, 낙랑군은 미천왕 시기 313년에 가서야 멸망시켰다. 낙랑군은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하자, 중국과의 연결이 막혀 바로 망했다 했다. 즉 서안평은 중국과 낙랑군, 대방군이 연결되는 전략적 지역인 것이다. 필자는 이곳이 압록수인 요수가 바다에 닿는 지점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낙랑국은 보다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무신왕이 개마국을 점령하자 주위의 구다국이 항복해 왔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낙랑국을 점령한 것을 고려하면, 낙랑국은 개마국, 구다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야 사학계는 낙랑국이 한반도 평양 근처에 있다고 하는 것 같다. 개마국은 한반도 개마고원에 있다고 추정할 것이다. 그럼 구다국은 어디에 있다고 추정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낙랑국이 북부여의 해성에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한반도 낙랑국에서 북부여에 가는데 배를 탈 필요가 있는가? 육지로 갈 수 있다. 따라서 해성의 위치가 애매모호하다. 즉 이러한 위치비정이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을 따라 올라갔나? 그러나 한반도 평양근처에서 북부여로 흐르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없다. 따라서 이런 논리도 불가하다.

 

필자는 개마국을 루마니아 동북쪽 Carparthian mountains에 개마대산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여, 항가리, 루마니아 근처로 추정했다. 최승의 낙랑국은 여기서 흑해까지의 지역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구다국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리투아니아 지역이 아닌가 한다. 리투아니아가 Gudas로 불렸다는 기록을 "Name of the Goth" 라는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보았다. 구다국은 구다천국과 더불어 12환국의 하나로 언급된다. 구다천은 스웨덴 남부의 Gota Alv, 즉 고트족의 강이라 불리는 강으로 추정된다. 구다천국이 남부 스웨덴 Skane County로 추정된다. 필자는 북부여 지역을 덴마크, 스웨덴남부 등의 북유럽 지역으로 추정한다. 두막루지역도 이 지역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필자의 추정에 의하면, 낙랑국 최승은 강을 따라 북으로 가서 발트해에 접해 있는 해성에 간 것이 아닌가 한다. 발칸반도나 흑해지역에 발트해로 연결되는 강들은 많다.

 

그러면 마한이 발트해변에 있는 해성까지 가서 색불루단군과 전투를 할 수 있는가? 개성에서 반란한 고등에 대해 마한이 토벌하여 나섰다가 홍석령에 철수했다 한다. 개성은 해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홍석령은 붉은 암석이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차후 찾아 보아야 할 지명이다. 서우여가 해성에서 욕살을 하고 있었다 하며, 역시 고등과 서우여가 경쟁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단군은 이들에게 휘둘려 선양을 하려는 분위기이며, 마한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럼 마한은 번한, 진한지역의 세력과 대적할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이다. 해성에까지 이를 만큼 그 영역이 컸을까? 한반도의 마한을 추정하는 위치 비정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지역에서는, 마한의 주도국이 월지국이라는 것에 착안하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된다. 그러나 이는 기원후 시기의 역사인 점이 다르다. 색불루 단군 즉위 시기는 BC 1285년이다. 월지국으로 추정되는 반달족, Vandals족은 스웨덴지역의 Suebi족(=선비족) 중의 일원으로 후에 중부유럽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기원전 1300년 경에는 달지국, 월지국, 백아강인 마한의 수도가 보다 북쪽지역인 북유럽으로 추정되는 결과를 낳는다. 여하튼 마한의 수도 월지국은 발트해변의 해성에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한의 세력이 이베리아반도, 이태리 반도지역으로 추정했는데, 마한의 세력이 더 넓어졌다 해도 북유럽까지는 힘들지 않을까 판단된다.

 

참고로 신석기시대 중기의 유럽지도를 아래 싣는다.

 

 

BC 4200 - BC 2000 시기의 유럽 문명 (자료 : 위키피디아)

Comb ceramic cultures

Eastern native cultures

Danubian cultures

Western native cultures

Mediteranian neolithic

Old Balcanic cultures

Andalusian neolithic

Cultures of the black and grey pottery

Hybrid Balcanic cultures

Culture of Hamangia

Greek neolithic

 

 

<馬韓世家 下 마한세가 하>

22) 색불루 단군의 삼한 제압 및 백악산에 도읍

 

백악산은 어디인가? 백악이란 눈 덮힌 높은 산을 의미한다. 아래에서 아사달이 있고, 동시에 백악산은 녹산이라 했다. 녹산의 녹은 사슴록자이다. 따라서 사슴과 관련이 있는 산이다.

 

위의 탁록에서도 사슴 관련하여 언급하였었는데, 또 다시 사슴과 관련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흰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우리 역사는 사슴과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3) 색불루 단군은 녹산,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위에 오름

삼한은 백두산에 천단을 쌓고,

색불루 단군은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냄

 

녹산 = 백악산 = 아사달​이라 했으니 녹산, 백악산을 찾으면 아사달을 찾게 된다. 왜 녹산이라 했을까? 사슴이 많이 있는 산이라서? 그러나 사람들이 사슴을 자주 접하지 않는 한 녹산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1300년경 사람들이 사슴을 자주 접하는 것은 산에 가서 사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식량으로 취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백악산이라 했으니 눈이 덮힌 높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사달이라 했으니 제천행사를 그 산에서 지냈을 것이다. 즉 아사달은 찾는 3가지 조건은 사슴이 많을 것, 눈에 덮힌 산일 것, 그리고 제천행사를 지낸 곳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사슴고기를 식량으로 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을 필자는 북유럽에서 찾아 보았다. 약수가 북유럽에 있고, 덴마크에 단군의 흔적이 있으니, 북유럽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산들 중에서 파내류산이라 할 수 있는 Fannaraki mountain이 노르웨이에 있었다. 물론 북해의 오른쪽에 있다.

 

파내류산으로 추정되는 Fannaraki mountain in Norway

 

Fannaraki mountain location in Norway (source : Wikipedia)

 

그래서 노르웨이 산을 조사하고, 사슴관련 자료를 찾으니, Jotunheim 산맥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들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 많은 사슴들이 산다는 자료가 나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사슴고기를 지금도 좋아하여 많이 먹고 있으며, 아직도 신석기 시대부터의 사슴사냥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Reindeer사슴은 북쪽의 추운지방에 주로 사는 사슴종류라 한다.

 

"Wildlife in the park include the lynx, moose, Norwegian red deer, reindeer, roe deer, and wolverine. Most lakes and rivers hold trout."

(source: Jotunheimen National Park,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Norway)

 

 

"Humans started hunting reindeer in both the Mesolithic and Neolithic Periods, and humans are today the main predator in many areas. Norway and Greenland have unbroken traditions of hunting wild reindeer from the Last Glacial Period until the present day. In the non-forested mountains of central Norway, such as Jotunheimen, it is still possible to find remains of stone-built trapping pits, guiding fences and bow rests, built especially for hunting reindeer. These can, with some certainty, be dated to the Migration Period, although it is not unlikely that they have been in use since the Stone Age." (source : Reindeer,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animals)

 

Jotunheim 국립공원에 있는 산중에서 Galdhopiggen산이 있는데, 그 산 정상에 제천행사를 한 것 같은 아랫부분이 있다. (아래 사진 및 자료 참조)

 

 

Galdhopiggen산 정상의 Cabin (source : Wikipedia)

 

Fannaraki 산으로부터 본 Galdhopiggen 산의 모습 (source : Wikipedia)

 

"Galdhøpiggen (Norwegian pronunciation: [ˈɡɑ̀ɫhøːˌpɪɡn̩]) is the highest mountain in Norway, Scandinavia, and Northern Europe. The 2,469-metre-tall (8,100 ft) mountain is located in Lom Municipality in Innlandet county, Norway. It is in the Jotunheimen mountains within Jotunheimen National Park. The mountain sits about 25 kilometres (16 mi) southwest of the village of Fossbergom and about 45 kilometres (28 mi) northeast of the village of Øvre Årdal. The mountain is surrounded by several other notable mountains including Keilhaus topp to the east; Store Styggehøe to the southeast; Svellnosbreahesten, Midtre Tverråtinden, and Store Tverråtinden to the south; Storjuvtinden and Skardstinden to the west; Veslpiggen, Storgrovtinden, and Storgrovhøe to the northwest; and Galdhøi and Juvvasshøi to the northeast.[1]

Etymology[edit]

Galdhøpi

ggen means "the peak/spike (piggen) of the mountain Galdhø." The first element in the name of the mountain is gald (m.) which means "steep mountain road". The last element is (f.) which means "(big and) rounded mountain." An old road between Gudbrandsdalen and Sogn passes beneath the mountain."

(source : Galdhopiggen,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Norway)

 

즉 위에서 언급한 아사달, 백악산, 녹산의 조건 3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것이다.

 

24) 삼한땅은 오만리에 달한다.

 

"皇上 受三神明命 普恩大德 旣與三韓五萬里之土境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색불루 단군이 보낸 (삼한의 천단이 있는) 백두산 서고문의 일부)

 

상기 재야 사학계에서 동북아시아에 비정한 삼한의 지도는 오만리가 되는가? 남북으로 오만리에 달하는 삼한으로 추정된다.

 

유럽에서 남북으로 5만리, 약 2만km의 거리는 북유럽의 북쪽끝에서 아프리카 남단까지의 거리이다. 필자의 추정보다 더 긴 거리이다.

 

이는 앞으로 삼한의 식민지가 아프리카 남단까지 달했는가를 찾는 일이 과제가 된다. 필자는 아프리카 남단의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등을 고려하면, 구리나 금 등 광물 자원을 얻기 위해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과거 단군조선의 지역을 찾아 유민들을 구하려한 뜻을 가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이곳에 들러 잡진성, 모수성을 경략하지 않았나 추정했다.

 

25) 진(眞)조선(과거 辰韓)- 색불루 단군 직할 통치,

막조선(마한)-여원흥,

번조선(번한)-서우여

통틀어 진한(辰韓) 즉 단군조선이다. 막조선이 마한을 그대로 이어 받았는지 아니면 다소 변화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번조선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상기 신석기 시대의 유럽 지도에서 지중해권의 이태리반도, 이베리아반도 지역 등은 마한의 영역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중부 유럽의 노란색부분(폴란드, 독일 지역)은 번조선이 아닌가 하며, 진조선은 스칸디나비아 지역 및 발트3국 지역, 서러시아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후 번한세가 내용을 검토한 후에 다시 추정할 것이다.

 

 

26) 막조선의 여원흥이 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했다.

여원흥이 천도를 건의한 영고탑은 진조선에 있었다.

 

막조선의 여원흥이 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했다 하는 것은 대동강은 그전에는 마한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마한과 가까운 위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18)항목에서 단군 도해가 대동강에 대교를 세우라 하였는데, 그동안 이 지역을 빼앗겨서, 은나라 말기인 이 시기에 다시 장악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탁록이 산서 대동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동강은 중국과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마한과 하나라를 이은 은나라의 접경 부근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재야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삼한의 지도에서 마한이 삼한을 넘어 새로이 점령할 수 있는가? 이건 불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재야 사학계의 삼한 추정 위치를 고려하면, 한반도에 있는 마한(막조선) 보다 요하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번조선이 더 가능할 것이다. 굳이 막조선 (마한)을 시킬 이유가 있는가? 즉 재야사학계가 추정한 삼조선의 위치 비정은 맞지 않는다는 추리이다.

 

여원흥이 천도를 건의한 영고탑은 진조선 어디에 있는가?

 

제천행사를 지내는 장소로 추정되는 영고탑은 부여의 영고(迎鼓)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황도를 영고탑으로 천도하였다는 발해 대야발이 저술한'단기고사'의 내용을 고려하면, 그 명칭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떠나서, 만주지역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명, 청 시대에 언급되는 지명인 것을 고려하면, 중국측에 가까운 지역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부여의 영고(迎鼓)는 일종의 제천행사로서, 12월에 열려, 농경문화의 수확에 대한 감사의 추수 행사가 아닌, 수렵문화의 축제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문헌 기록에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여러 날을 두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노는데 이것을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 기간에는 형옥(刑獄)을 다스리지 않고 죄수를 석방한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도 “은정월(殷正月)이 되면 하늘에 제사 지낸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 안에 모두 모여서 날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를 영고라고 한다. 이때가 되면 감옥에서 형벌을 다스리지 않고 죄수들도 풀어 내보낸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후한서』에서 납월(臘月)이라고 된 부분이 『삼국지』 에서 은정월(殷正月)이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은력(殷曆)의 정월은 하력(夏曆)이지만 오늘날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달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제천의식을 추수와 관련 있는 10월에 지냈다. 이로 미루어 오직 부여에서 농산물의 수확기가 아닌 12월에 지냈다는 점과 부여의 지리적 특징을 고려하면 이 제의가 추수감사제 성격의 농경의례라기보다 수렵의례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영고는 제사의 시기가 납월이라고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수렵과의 관련성이 보인다. 납월은 12월의 다른 이름이며, 왕이 짐승을 수렵하여 제사하는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이 풍속은 그대로 전승되어 납일(臘日)․납향(臘享)․납평제(臘平祭)라 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이러한 풍속은 중국에서 유래한 왕 중심의 제의이다.

 

부여는 육축(六畜)으로 벼슬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저가(豬加) 등이 있었다. 이처럼 그 고을에 모두 동물로 가(加)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농경보다 수렵과 가축을 중심으로 생업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시사한다."

 

(자료, 영고,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인용출처: 본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따라서 영고탑이 있는 진조선은 부여 등이 있던 북쪽, 만주지역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원흥의 천도 추천을 거절한 것은, 수도가 제천행사의 의미보다, 방어 등의 지형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색불루 단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만주, 부여와 발해가 있던 만주는 재야사학계가 생각하는 동북아시아의 만주가 아니다. 필자는 만주 지역이 북유럽에 가까운 독일 북부나 덴마크 남단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 프랑스 지역의 중국지역과 가까우니, 명나라나 청나라가 이곳을 점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7) 은나라 멸망후 기자의 태행산 서북지역 은거 및

막조선 순찰 및 열병

 

기자가 은거한 태행산 서북지역은 막조선(마한)의 가까운 지역인가? 재야 사학계가 추정한 삼한의 지도에서 한반도의 마한과 중국의 태행산 서북지역은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 지도의 위치 비정은 옳지 않다. 반면 기자를 봉한 지역은 (기자는 거절했다 함) 조선과 중국이 경계를 이루는 패수지역이다. 기자의 후손 기후가 점한 지역도 이 지역이다. 후일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 기씨가 다스리던 조선지역을 점하였다. 만번한 이라고도 하니 번한지역도 일부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러나 조선의 기준은 바다를 건너 왜지역에 가서 한왕이 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한반도의 마한과 요하지역의 번한은 모두 차지한 위만조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재야사학계가 추정한 삼한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패수를 독일의 라인강으로 추정했으며, 이를 건너 온 위만이 이태리지역과 그 북쪽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판단한다. 즉 번한의 일부와 마한의 일부를 차지한 것이 된다. 또한 이 당시 진공 상하장이란 곳에 왕험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진(秦)나라가 진출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삼한의 위치는 이러한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으나, 필자가 추정한 이태리반도에서는 가능한 시나리오가 된다. 필자는 고대 로마의 포에니 전쟁의 역사를 고려할 때, 당시 진(秦)나라가 이태리반도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한다.

 

 

28) BC 727년, 궁흘 단군시기, 협야후가 500척 전선으로 해도(海島) 왜인 반란 평정

 

진조선의 협야후가 해도의 왜인 반란 평정했다는 것은 왜지역도 삼한의 지배를 받았었는데, 반란을 일으키니 평정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상기 13) 항목에서 혈구에 삼랑성을 축성했다는 것과 15) 항목의 진한 남해안 살수에서 배를 건조했다는 기록과 연관할 필요가 있다. 즉 마한의 남쪽이 바다이므로 마한에 의뢰할 수 있는데, 진조선이 직접 출병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혈구의 삼랑성이 왜의 지역인데, 혈구가 스페인 남단의 지형을 의미한다고 했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당항성이 모로코의 북쪽 탕헤르가 아닌가 추정했다. 즉 지중해의 해도나 북아프리카에 왜의 지역이 있었다 판단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마한지역 위치 비정으로는 혈구란 지형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현재 일본지역은 해도라기 보다 큰 섬으로 이루어진 육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29) 단군 다물(多勿), 가섭라(迦葉羅, 31대) : 지역 이름?

BC 426년 융안(隆安)의 사냥족 모반으로 도성까지 칩입하여, 단군 가리(加利 : 32대) 전사

 

다물, 가섭라의 단군 이름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출신 지역이름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물은 고주몽이 송양의 나라를 합병한 후 다물도라 했다 한다. 가섭라는 동부여가 된 가섭원 지역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가섭이란 한자도 같다. 즉 이들 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송양의 나라 비류국 지역이 북유럽에 있었다 추정한다. 송양이 찾아온 고주몽에게 한 말이 '우리는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어, 그대를 잘 모르겠다' 하였다. 즉 다물 단군의 출신지역이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 자료가 쌓이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신에 가까와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재야사학계가 비정하는 삼조선의 위치 어디에서 이런 송양의 비류국 지형을 찾을 수 있는가? 따라서 삼조선의 위치 비정은 동북아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융안(隆安)은 어디인가? 네이버에서 찾아 보니, 융안은 위진 남북조 시대의 동진의 안제(安帝)가 사용한 연호(397-401)라 한다. 한자도 같다. 즉 동진이 있던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동진은 장강이남에 있는 것으로 모두들 알고 있다. 재야사학계가 비정한 삼한의 위치가 장강 이남과 어떻게 가까울 수 있나? 역시 잘못된 위치 비정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융안이 함락한 도성은 마한의 도성으로 보인다. 융안의 모반으로 전사한 가리단군의 손자, 전내가 후일 막조선(마한)을 계승한 것을 보면 그렇게 판단된다. 또한 융안의 사냥족의 모반이란 단어를 이용했다. 그전에는 삼한의 통치지역이라는 것이다.

 

융안은 서융의 지역이고 안(安)지역과 연관이 되는데, 서융과 안지역 연관된 지역이라면 필자가 추정하는 스페인지역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프랑스지역의 중국이라면 서역 등은 이베리아 반도가 된다. 이 지역은 또한 Andalus지역이며 안(安)지역으로 판단된다. 이 지역은 또한 장강, 즉 에브로강의 이남지역이다. 따라서 동진의 지역이 될 수 있다. 이 지역이 마한의 통치지역이라는 것이 된다.

 

마한의 도성은 아직 어디인지 모르겠다. 백아강에 헌원과 창려가 와서 배웠다는 상기 기록, 그리고 달지국이 백아강이란 마한의 수도, 마리산에 은나라 사신이 왔다는 것과 강남의 장정 8천명을 이용해 제천단을 쌓게 했다는 것에 기반하면, 백아강과 마리산 제천단이 강남 근처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마한의 수도 백아강은 강남지역인 스페인 지역에 있을 수 있다. 상기 융안이 동진지역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필자는 달지국이 월지국이란 것을 고려하여 중부 유럽으로 추정했지만, 스페인지역으로 수정하여야 할 것 같다.

 

 

30) BC 425년, 상장 구물(丘勿) (44세 단군)이 모반한 화웅(和熊)의 두목 참살 후 장당경(藏 감출장, 숨을 장, 품을 장 唐京)으로 도읍 옮김

 

화웅(和熊)지역은 진조선의 웅녀군 지역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구물단군이 화웅지역의 두목을 참살한 후 왜 도읍을 옮겼을까?

모반한 화웅지역 잔존 세력이 두려워서일까?

 

장당경은 어디인가? 아래 자료에 의한 중국의 유주지역이라 한다. 유주지역은 중국과 조선의 중간지역인 연나라지역이다. 안록산의 난이 있던 지역이다. 이는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진조선지역이 아니다. 오히려 번조선지역에 가깝다. 따라서 상기 위치 비정은 의문시 된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평양성에 도읍을 하였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으며, 주나라 초기에 기자(箕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했다.[1] 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장당경을 당장경(唐臧京)이라고 표시하였으며, "유주(幽州)에 당장경(唐臧京)이 있었으니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2]라고 되어 있다.

(자료: 장당경, 위키백과)

 

 

장당경 위치를 필자가 추정하는 지역에 비교한다면, 프랑스의 동쪽 지역, Alemannia지역으로 보인다. 론강과 손강 지역 부근으로 판단된다. 이 근처에서 기원전 425년부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도시를 찾아야 한다. 현재로서는 Lyon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Vienne 도시가 될 수도 있다. Vienne 도시의 문양이 박달나무라 한때 필자는 이 지역이 송양의 비류국 지역이 아닌가 했다.

 

 

단군 가리의 손자 전내가 막조선을 계승했으며, 수유인(須臾人) 기대(箕代)가 번한을 점령한 후 번조선왕을 칭했다 한다. 삼조선의 통합체인 단군조선이 무너지는 혼란의 모습이다.

 

이 당시 연나라가 연합작전을 단군에게 건의했다지만, 막조선(전내)이 거부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단군 고열가는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은거했다 한다.

 

진(眞)조선은 5가(五加)의 귀족들에게 이양되어, 5년동안 공화정으로 존속하다가,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한문 원문에 이상한 내용이 있다. 즉 진조선이 정(政)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眞朝鮮與五加從政 終未復而終焉

 

이 시기가 진시황인 정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라서, 진나라에게 복속되었다는 해석이라 한다. 진(秦)나라는 한(韓)을 멸망시켰다 했다. 그래서 창해 역사를 동원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이 진조선이냐 막조선이냐를 놓고 논란이 되는 것 같다. 이후 북부여로 계승한 해모수단군을 고려할 때, 북부여 위치에 있던 진조선은 진나라의 정복 대상이 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상기 기록은 막조선 대신 진조선으로 가필했다는 의문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원문 내용도 누군가의 손을 타서 한자가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백아강이 강으로 판단된다든지, 비서갑은 비자가 뜻으로 볼 때 이해가 안간다든지, 웅상의 소도에서 웅상의 한자가 뜻으로 볼 때 이상하다. 필자는 웅상이 곰웅, 형상상이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수컷웅, 항상상자로 되어 있다. 즉 중국의 어떤 놈이 한자를 바꿔치기 하여 역사를 감추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사가들이 흔히 하던 수법이다.

 

번한세가의 내용중에, 노자의 사상이 퍼진 지역이름으로 내몽고, 아유표란 지역이름이 나온다. '내몽고'란 지명은 너무 근대적 지역이름 표현이다. '아유표'(표범 표자 이용)를 해설자는 '아유타'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천해'의 표현을 쓴 북해에서 하늘천이 아닌 얕을 천으로 보아 현재의 North Sea (유럽)인 북해로 판단했다. 즉 여러 가지의 가필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내용은 귀한 자료로 보인다.

 

상기 진조선 대신 막조선으로 판단되는 것은, 당시 진(秦)나라가 정복한 한(韓)은 창해를 끼고 있는 막조선 즉 마한으로 판단된다. 즉 바다를 끼고 있는 한(韓)이라는 것이다. 삼한 중 남쪽에 바다를 접하고 그 남쪽에 왜가 있는 지역은 삼조선 중 막조선이다. 필자는 창해를 지중해로 추정하는데, 이 진나라 시기에 포에니전쟁이 있었는데, 당시 승리자는 로마지역의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진공상하장이란 지역도 이태리반도 북쪽의 알프스지역으로 추정했다. 이곳이 왕험성 자리로 위만이 도읍한 과거의 기자조선의 왕검성으로 보인다. 이곳은 아사달로 옮기기 전의 단군이 있었던 평양으로 보인다. 번조선의 수도는 '탕지'라 하는데, 탕지는 끓을 탕, 연못지이다. 즉 천연 노천 온천지역이라는 것이다.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스위스에는 이러한 Hot Springs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번한세가 내용 분석하는 다음 글에서 더 언급하고자 한다.

 

 

V. 맺음말

 

이제 긴 분석을 요약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본 글은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삼한, 삼조선의 위치 비정에 대한 검토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 분석의 원문은 환단고기 중 태백일사의 삼환관경를 대상으로 하였다. 환단고기의 진서 여부는 본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환단고기를 근거로 한 재야사학계의 삼한 위치 비정이 원문에 비하여 옳은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의 목적이다. 만약 삼한관경의 원문에 비하여 재야 사학계의 삼한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다면, 재야사학계는 환단고기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여야 한다. 아니면 삼한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판단보다는, 비록 약간의 20세기 표현들이 있다고 해도, 원문에 충실하게 반영한 편집본이라 판단한다.

 

필자의 이제까지의 분석에 의하면, 환단고기 삼환관경의 총편과 마한세가 내용에 비하여, 일부 재야사학계의 삼한 위치 비정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문시된다고 할 수 있다.

 

 

1) 비서갑지역과 단군조선 건국지에 대하여

 

우선 비서갑 지역에 대한 검토가 제일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환국이나 단군조선이나 모두 그 원류가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웅녀군의 존재를 말하는 곳이다. 또한 단허지역에 웅녀의 후손 여가 왕검이 되었었고, 이후 약 500년후에 웅씨왕의 왕위를 이어 받은 신인 왕검이 구환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 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기 때문이다.

 

비서갑지역은 곶갑자가 들어 간다. 곶은 바닷가의 뽀족한 모양의 지형을 말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 비정한 진한(진조선) 지역은 이러한 지형을 가질 수 없다.

 

바닷가의 지형이지만, 이 지역은 웅녀군이 최초로 왕검이 되는 웅씨족의 고향이 되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웅녀군의 후손 중에 여가 있어 단허지역에 왕검이 되었다 하니 단허지역도 비서갑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판단된다. 단허지역은 단수 즉 박달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판단된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거의 지구 북반구 모든 지역에 걸쳐 박달나무가 자라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Range of Birch tree (source : Wikipedia)

 

그러나 동시에 웅씨족 즉 곰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웅씨왕의 뒤를 이은 신인 왕검이 구환을 통일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조선은 산해경에 북해의 모퉁이, 동해의 안에 있다 했다. 이는 구환을 통일한 지역이라기 보다는 원래의 출발지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웅씨족의 지역일 수도 있다.

 

따라서 조선의 지형 조건을 갖추고, 비서갑의 조건을 갖추고, 곰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조건을 만족시키면 된다. 필자가 추정하는 북유럽 지역은 이 3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 시킨다. 특히 비서갑은 노르웨이의 서쪽에 있는 피요르드지역이 아닌가 한다. 유럽의 곰 서식지에 관하여는 아래 지도를 참조하기 바란다. 유라시아 Brown Bear의 서식지인데, 현재의 서식지인 만큼 과거에는 보다 넓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참고할 수 있다고 본다.

 

 

 

Ursus Actors Range map Europe (Eurasian Brown bear) (source : Wikipedia)

 

 

 

2) 진한(辰韓)의 수도 아사달 및 백악산에 대하여

 

진국의 본거지인 진한은 수도를 아사달에 두었다 했다. 그리고 후일 색불루 단군도 아사달에 수도를 두었는데, 녹산, 백악산이라고 했다. 일부 재야사학자가 아사달로 주장하는 동북아시아의 하얼빈시는 주위에 백악산 지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녹산이니 사슴을 많이 사냥하는 산이고, 백악산이니 눈이 덮힌 높은 산이다. 이곳 산 정상에서 제천행사를 했다는 것이다. 주민이 사는 도성은 이러한 산아래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노르웨이의 Jotunheimen 산맥에 있는 국립공원에 사슴들이 많으며, Norvegian red deer란 이름을 가진 사슴이 있다. 주위에는 곰을 의미하는 Bergen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city of seven mountains'이라 불리운다.

 

Bergen 시가 속한 서부 노르웨이 지역 특히 Rogaland에는 만년전부터, 즉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있고, 2469m의 높이를 가진 Galdhopiggen 산위에는 눈 덮인 정상에 제천행사를 지낸 것 같은 cabin이 있다. 북해의 오른쪽인 주위에는 파내류산으로 추정되는 Fannaraki 산도 있다. Asa라는 말은 스웨덴에서는 신(God)을 뜻한다 한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Aesir라는 신을 숭배한다고 한다.

 

색불루 단군시기에 마한을 통치하던 여원흥은 색불루 단군에게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적 방어조건을 중시한 색불루 단군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고탑도 진조선에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영고탑과 한자가 같은 '영고'라는 부여의 축제는 12월에 열리는 수렵문화의 감사축제라 한다. 즉 진조선은 부여가 있던 북쪽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후한서나 위서에서 진한이 남쪽 바닷가 지역에 있다는 후대의 기록과 대조되지만, 기원전 단군시대에 환단고기의 기록이 맞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필자는 최근에 부여와 읍루의 북쪽에 위치한 흉노의 고향 약수가 스웨덴에 있다는 글을 썼다.

 

 

3) 마한의 위치에 대하여

 

환단고기의 진서론을 주장하는 재야사학가들은 마한의 위치를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환단고기의 삼환관경, 특히 마한세가의 내용을 살펴 보건데, 마한은 중국지역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1) 마한의 수도를 백아강이라 하는데, 마한에 세운 삼청궁에 중국의 헌원, 창려, 등이 와서 치우천왕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따라서 마한은 중국과 가까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 마한의 마리산에 제천단을 건축하는데, 강남의 장정 8천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한다. 강남은 중국 장강의 남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은나라의 사신이 와서 제사를 도왔다 한다. 마한의 마리산은 중국에 가까이 있던 것이다.

 

(3) 은나라 멸망 후 기자가 태행산 서북쪽에 은거했는데, 막조선(마한)의 병사가 순찰하고 열병을 하였다 한다. 이는 마한이 중국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4) 융안지역의 사냥군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BC 425년 마한의 도성이 침입을 받았다. 융안은 동진의 안제가 쓴 연호이므로, 강남지역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마한은 중국에 가깝다는 것이다.

 

(5) 대동강에 대교를 세우니, 하나라왕 근이 사신을 보냈으며, 색불루 단군시 대동강을 막조선 여원흥에게 명하여 장악하게 하였다. 대동강이 산서의 대동부에 있는 탁록지역과 연관이 있다면, 마한은 이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국에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중기 신석기시대 (between 4200 and 2000 BC) (자료 : 위키피디아)

Comb ceramic cultures

Eastern native cultures

Danubian cultures

Western native cultures

Mediteranian neolithic

Old Balcanic cultures

Andalusian neolithic

Cultures of the black and grey pottery

Hybrid Balcanic cultures

Culture of Hamangia

Greek neolithic

 

4) 단군의 이름에 대하여

 

단군의 이름이 출신지역명을 이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막해, 독로, 아라사, 다물, 가섭라 등에서 알 수 있다. (번한세가에서는 임나 라는 단군명도 있다) 각각 두막루, 독로국, 러시아인 아라사, 송양의 비류국 지역인 다물, 가섭원 동부여지역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송양의 비류국은 바다 한 쪽에 있다고 송양이 말했다. 러시아인 아라사는 이시기 서부 러시아지역 뿐이다. 즉 동북아시아의 삼한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5) 진한 남해안 살수에 대하여

 

여기서 진한은 삼조선을 모두 합한 진국의 의미 진한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해안에 살수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배를 만들었다는 수군기지 정도이다. 마한으로 추정한 한반도 남해안에 살수가 있는가? 필자는 우연히도 이태리 남단 시실리섬에서 salsu river를 발견했다.

 

 

6) 왜인과 관련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구축했다 한다. 삼랑성은 삼시랑과 관련지어 왜인지역을 말한다 하는데, 왜를 일본으로 보는 경우 일본 어디에 혈구란 지형이 있는가? 필자는 혈구가 지브랄타 해협 같은 곳을 의미한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섬들에 왜가 있었다 추정했다.

 

 

7) 삼한 영역의 규모에 대하여

 

색불루 단군이 백두산 제천행사 서고문에 말하기를 삼한은 오만리라 하였다. 12환국이 남북 5만리라 하였는데, 9환을 통일한 삼한이 남북 5만리라는 것으로 판단된다. 과연 동북아시아에 있다고 추정하는 삼한의 크기가 남북 5만리가 되는가? 아니면 환단고기 기록이 틀렸다 또는 위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삼한의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