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통

사서를 근거로 추정해 본 유럽의 마한 위치 추정

Chung Park 2025. 6. 30. 03:55

 

I. 머리말

 

필자는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의 한국사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사관에 대한 검토를 계속하는 중이다. 워낙 기존의 사관과 다르고, 서양의 역사관과도 다른 추정이기에 계속 그에 대한 검토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한 때,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백제의 관미성을 크림반도의 성이라 추정했었다. 당시 절벽인 해안의 모습과 372년 로마와 고트족의 전쟁이 있었다는 서양사 기록을 보고 그렇게 추정했었다. 사실 윤모 사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반도 주위 어디에도 관미성의 절벽을 가진 지역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백제의 북쪽, 서쪽이라는 관미성의 전략적 위치와는 로마가 백제라는 필자의 추정과 크림반도의 위치는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의 북쪽, 서쪽의 어디에 절벽을 가진 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계속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태리의 서쪽의 사르디니아섬, 코르시카섬이 혹시나 하고 찾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로마제국의 북쪽은 아니다는 판단이 들어 계속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이 영국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고려하면서 (실은 로마제국이 백제라는 생각에 잘 믿지는 않았지만) 대서양 쪽을 찾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 북쪽의 Shetland 섬들, 그리고 아일란드의 서쪽 Aran islands 등에서 유사한 지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이러한 지역 어느 곳에 관미성이 있었을까 하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지만 이 지역 어느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점점 증가하게 된다. 그 연유는 이 지역에서 발견된 BC 3500년경의 고대 집모양이 혹시 고대 마한의 집모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백제는 마한의 영역을 대부분 통합했고, 광개토태왕은 점령한 백제의 57개성이 대부분 마한의 지역이 아닐까 하는 판단에서이다.

 

그래서 마한에 관한 사료 내용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그전에 이해되지 않았던 사료 기록들이 놀랄만큼 일치하는 것에 필자 자신도 놀라서, 마한의 위치에 대한 이글을 쓰게 되었다.

 

 

 

II. 마한에 관한 사료 내용

 

 

아래 사서의 자료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산과 바다에 흩어져 있다.

 

2)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

 

3) 마한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 단지 제사에 이용할 뿐이다.

 

4) 흙집[土室]을 짓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고, 윗부분에 개호(開戶, 출입구)가 있다

 

5) 마한사람들은 활, 방패, 창, 큰 방패를 잘 쓴다.

 

6) 마한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법을 알며, 면포(緜布)를 짓는다.

 

7) 큰 밤이 나는데 배만 하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자나 된다

 

8) 금과 보배, 비단과 양탄자[罽]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영주(瓔珠, 보석과 구슬)을 중히 옷에 꿰메어 장식으로 삼았고, 목에 매달거나 귀에 걸기도 하였다.

 

9) 대체로[大率] 모두 괴두(魁頭)를 드러내 상투를 틀었으며,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었다.

 

10)그 사람들은 건장하며 용감하며, 젊은이들은 집을 지을 때 힘쓰는 자들이 있는데, 늘 밧줄로서 등가죽을 꿰뚫고 큰 나무를 메달아 큰 소리로 외치는데, 이를 건장히 여긴다

 

 

11) 항상 5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니, 춤을 출 때에는 항상 수십인이 서로를 따라 땅을 밟으며 박자를 맞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또 이와 같이 반복한다.

 

12) 또한 소도(蘇塗)를 세워 큰 나무를 세우고 이에 방울과 북을 메달아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13) 그 남쪽 경계는 왜(倭)와 가까워 (왜와) 마찬가지로 문신을 한 자들도 있다.

 

14) 마한의 서쪽에는 해도(海㠀)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사람들은 (몸집이) 단소(短小)하고, 곤두(髡頭, 머리를 깎음)를 하였으며, 위의(韋衣, 가죽옷)을 입었는데 상의는 있으나 하의가 없었다. 소와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하였다. 배를 타고 한(韓)을 왕래하며 물건을 거래하였다.

 

15)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國)이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낙랑(樂浪)과,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한다

 

 

 

 

상기 요약은 아래 후한서 동이전 한(韓)조 사료(원한의 거리 블로그님 자료 공유)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Sololife 블로그님 자료 공유), 그리고 진(晉)서 동이열전 마한(Sololife 블로그님 자료 공유)의 자료를 근거로 했다.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한(韓)에는 3종(種)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國)이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낙랑(樂浪)과,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으로는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으로 역시 왜와 접한다.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出大栗如梨. 有長尾雞,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冢, 開戶在上. 不知跪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罽,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법을 알며, 면포(緜布)를 짓는다. 큰 밤이 나는데 배만 하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자나 된다. 읍락(邑落)은 섞어 살며, 또한 성곽(城郭)이 없다. 흙집[土室]을 짓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고, 윗부분에 개호(開戶, 출입구)가 있다. 무릎꿇고 절하는 예를 알지 못한다.3 나이가 많고 적음과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금과 보배, 비단과 양탄자[罽]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소와 말에 탈 줄 모르며, 오직 영주(瓔珠, 보석과 구슬)을 중히 옷에 꿰메어 장식으로 삼았고, 목에 매달거나 귀에 걸기도 하였다.

 

大率皆魁頭露紒, 布袍草履.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縋以大木, 嚾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羣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 號爲「天君」. 又立蘇塗,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대체로[大率] 모두 괴두(魁頭)를 드러내 상투를 틀었으며,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었다. 그 사람들은 건장하며 용감하며, 젊은이들은 집을 지을 때 힘쓰는 자들이 있는데, 늘 밧줄로서 등가죽을 꿰뚫고 큰 나무를 메달아 큰 소리로 외치는데, 이를 건장히 여긴다.4 항상 5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니, 춤을 출 때에는 항상 수십인이 서로를 따라 땅을 밟으며 박자를 맞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또 이와 같이 반복한다. 모든 국읍(國邑)에는 각기 한 사람이 있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니, 이를 이름하여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한 소도(蘇塗)를 세워 큰 나무를 세우고 이에 방울과 북을 메달아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그 남쪽 경계는 왜(倭)와 가까워 (왜와) 마찬가지로 문신을 한 자들도 있다.

 

馬韓之西, 海㠀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에는 해도(海㠀)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10 그 사람들은 (몸집이) 단소(短小)하고, 곤두(髡頭, 머리를 깎음)를 하였으며, 위의(韋衣, 가죽옷)을 입었는데 상의는 있으나 하의가 없었다. 소와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하였다. 배를 타고 한(韓)을 왕래하며 물건을 거래하였다.

 

(자료 : 후한서 동이전 한조, 인용출처 : 원한의 거리 블로그님 자료,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삼한, 공유자료)

▷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 읍락에 잡거雜居하며 역시 성곽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궤배跪拜(꿇어앉을 궤, 절 배)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 금金·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말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하여
젊은이들 중 축실築室(쌓을 축, 집 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출처] 중국 정사 분류별 모음 : 한韓| (후한서 동이열전 한) 작성자 sololife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 그 백성은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 [나라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출처]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 한韓|작성자 sololife


(자료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인용출처 : Sololife 블로그님 자료, 본 블로그, 카테고리, 삼한, 공유자료)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성곽이 없다.
-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서, 각각 거수가 있다.
[출처] 진서 동이열전(晉書 東夷列傳) : 마한 馬韓|작성자 sololife
 
- 마한의 풍습은 기강이 낮아 궤배跪拜하는 예禮가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
온 가족이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어른과 어린이, 남녀의 분별이 없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단지 장사지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
[그 나라의] 풍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 따위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남자들은 머리를 틀어묶고 상투를 드러내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용감하고 굳세다.
[출처] 진서 동이열전(晉書 東夷列傳) : 마한 馬韓|작성자 sololife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에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하게 여긴다.
 
-[마한의] 풍습은 귀신을 믿으므로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떼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낸다.
10월에 이르러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별읍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소도蘇塗의 뜻은 서역의 부도浮屠와 흡사하지만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있다.
[출처] 진서 동이열전(晉書 東夷列傳) : 마한 馬韓|작성자 sololife

(자료 : 진(晉)서 동이열전 마한, 인용출처 : Sololife 블로그님 자료,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삼한, 공유자료)

 

 

III. 마한의 사료와 일치하는 점들

 

1) 마한의 집 모습과 유사한 고대 집모양의 존재

 

마한의 집은 주위에 성곽(城郭)이 없고, 흙집[土室]을 짓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고, 윗부분에 개호(開戶, 출입구)가 있다고 했다. (상기 마한의 사료 참조)

 

이러한 자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고대의 주거집들이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Skara Brae (Orkney Islands, Scotland, UK ) 지역에서 21세기 들어 발견된 아래 집모양이 마한의 집모양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BC 3200 - BC 2500시대에 주거한 흔적이라는데, 환단고기에 의하면, 마한은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우면서 생긴 삼한 중의 하나이름이므로 유사한 시기를 말하고 있다.

 

 

 

.Skara Brae, Orkney Islands, Scotland, UK (3200 BC)

 

"It is strange to think while looking at Skara Brae, with the Bay of Skaill in the background, that it was inland when it was first built more than 5,000 years ago. Yet the sea serves as a reminder of how fortunate we are that Skara Brae has survived at all.

 

The cluster of nine Neolithic houses, each with beds, hearths and drainage, spent centuries hidden under sand dunes, and was only revealed by a fierce storm in 1850. The village now attracts more than 100,000 people a year – not bad for the remote Orkney Islands – who can see original stone furniture and artefacts including tools, jewellery and dice.

 

The site was occupied from roughly 3180 BC to about 2500 BC and is Europe's most complete Neolithic village. Skara Brae gained UNESCO World Heritage Site status as one of four sites making up "The Heart of Neolithic Orkney".[a] Older than Stonehenge and the Great Pyramids of Giza, it has been called the "Scottish Pompeii" because of its excellent preservation.[5]

...

The Grooved Ware People who built Skara Brae were primarily pastoralists who raised cattle, pig and sheep.[15] Childe originally believed that the inhabitants did not farm, but excavations in 1972 unearthed seed grains from a midden suggesting that barley was cultivated.[28]"

(source : Skara Bra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reland/Scotland)

 

아래 스코틀랜드 shetland 섬의 Jarlshof지역에서도 유사한 집모양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청동기 시기의 것이므로 완전 흙집이라기 보다는 겉은 흙집인데 안은 돌로 구분되었다. 완전한 흙집이라면 오천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그 모습이 무덤 같고, 윗부분에 출입구가 있는 것이 마한의 집 형상 구조와 일치한다.

 

 
 

Jarlshof (in Shetland, Scotland)

 

"Jarlshof (/ˈjɑːrlzhɒf/ YARLZ-hof)[1] is the best-known prehistoric archaeological site in Shetland, Scotland. It lies in Sumburgh, Mainland, Shetland and has been described as "one of the most remarkable archaeological sites ever excavated in the British Isles."[2] It contains remains dating from 2500 BC up to the 17th century AD.......

 

The Bronze Age in Scotland lasted from approximately 2000 BC to 800 BC.[17] The oldest known remains on the Jarlshof site date from this period, although there is evidence of inhabitation as far back as 2500 BC.[9][18] The remains of several small oval houses with thick stone walls date to the late Bronze Age and the structures show some similarity to Skara Brae on Mainland, Orkney but are smaller and of a later date. These buildings may have been partly subterranean at the earliest period of inhabitation, a technique providing both structural stability and insulation.

(source : Jarlshof,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reland/Scotland)

 

이 지역 주위에 지하의 구조물이 많이 발견되는 아래의 내용을 볼 때, 마한의 지하구조 집들의 모습이라 판단된다. 즉 스코틀랜드지역은 마한의 영역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https://www.msn.com/en-us/news/world/the-2000-year-old-tomb-on-a-remote-scottish-island/vi-AA1EVBRa?ocid=socialshare

 

The 2000-Year-Old Tomb On a Remote Scottish Island

Exploring a 2000-Year-Old Iron Age souterrain behind my house. Souterrains are a relatively overlooked oddity, both on Raasay and around the western fringes of Europe. They are important, fascinating structures, and this particular one has sat relatively u

www.msn.com

 

2) 마한이 서쪽에 있고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산다고 했다.

 

바다에 흩어져 산다는 것은 섬들에도 산다는 의미인데, 스코틀랜드의 Orkney island, shetland island, 아일랜드의 Aran island 등에서 고대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Highlands에 사는 모습들이 있는데, 산에 사는 모습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모두 유럽의 서쪽이다.

 

3) 성곽이 없다.

 

상기 지역의 주위에는 성곽이 없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바다와 산에 사는 지형이 자연적인 보호막을 형성하므로 성곽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성곽을 지을 필요가 없는 지형에 일부러 사는 것일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던 지역들은 접근이 어려운 곳에 거주하는 이러한 모습이다.

 

4) 대체로[大率] 모두 괴두(魁頭)를 드러내 상투를 틀었으며, ....

 

상투의 흔적은 현재로서는 독일의 엘베강 오리진의 Suebian에서 나타난다. Suebian Knot라 하는 머리 모양인데, 상투와 유사하다. 수에비언은 유럽 중부에서 지내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태리 북부에 진출하기도 하고, Gaul지역에 진출하기도 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와 포루투갈 지역에 수에비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수에비언은 Marcomanni, Quadi, Hermunduri, Semnones, Lombards, Alamanni, Bavarians 등을 포함한다고 한다. 역사가 Tacitus는 Vandals, Goths, Burgundians을 Suebi에 포함시킨다. 즉 중부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Suebi (or Suebians, also spelled Suevi, Suavi) were a large group of Germanic peoples originally from the Elbe river region in what is now Germany and the Czech Republic. In the early Roman era they included many peoples with their own names such as the Marcomanni, Quadi, Hermunduri, Semnones, and Lombards. New groupings formed later such as the Alamanni and Bavarians and two kingdoms in the Migration Period were simply referred to as Suebian.

 

............

 

The definitions of the greater ethnic groupings within Germania were apparently not always consistent and clear, especially in the case of mobile groups such as the Suevi. Whereas Tacitus reported three main kinds of German peoples, Irminones, Istvaeones, and Ingaevones, Pliny specifically adds two more genera or "kinds", the Bastarnae and the Vandili (Vandals). The Vandals were tribes east of the Elbe, including the well-known Silingi, Goths, and Burgundians, an area that Tacitus treated as Suebic. That the Vandals might be a separate type of Germanic people, corresponding to the modern concept of East Germanic, is a possibility that Tacitus also noted, but for example the Varini are named as Vandilic by Pliny, and specifically Suebic by Tacitus."

 

(지료 : Sueb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uebi)

 

 

 

The approximate positions of some Germanic peoples reported by Graeco-Roman authors in the 1st century. Suebian peoples in red, and other Irminones in purple.

(자료 : Suebi, wikipedia)

 

 

** Suebian Knot를 나타내는 사진들

 

 

"The Suebian knot (German: Suebenknoten) is a historical male hairstyle ascribed to the tribe of the Germanic Suebi. The knot is attested by Tacitus in his 1st century AD work Germania, found on contemporary depictions of Germanic peoples, their art, and bog bodies.

 

Germania[edit]

 

Roman historian Tacitus reports in Germania (98 CE) that the Suebian warriors combed their hair back or sideways and tied it into a knot, allegedly with the purpose of appearing taller and more awe-inspiring on the battlefield. Tacitus also reports that the fashion had spread to neighboring Germanic tribes among the younger warriors, while among the Suebians, the knot was sported even by old men as a status symbol, which "distinguishes the freeman from the slave", with the most artful knots worn by the most wealthy nobles:[1]

(source : Suebian knot,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uebi)

 

 

 

5) 마한 사람들은 건장하며 용감하며, 젊은이들은 집을 지을 때 힘쓰는 자들이 있는데, 늘 밧줄로서 등가죽을 꿰뚫고 큰 나무를 메달아 큰 소리로 외치는데, 이를 건장히 여긴다.

 

이는 지게 지는 모습을 말한다고 해석된다.

 

아래 사진은 바이킹의 일상모습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며 지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필자의 유럽지역의 마한 추정에 힘을 보태는 자료인 것이다.

 

Everyday life in Viking Age (source : Wikipedia)

 

 

6) 마한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 단지 제사에 이용할 뿐이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는 것은 기마민족이 아니며, 이는 바다를 누비는 해양민족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말을 제사에 이용하는 것은 Norse인들인 스웨덴이나 아일랜드에서 있었다. 또한 게르만 전통신앙에서는 소와 말을 제사 지내고 제사후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later Icelandic source Hervarar saga contains a description of how the tree was used in the pagan rites, concerning an event taking place only a few years after the scholium was written. It is in reference to the ancient Indo-European ritual of horse sacrifice:

Svein, the King's brother-in-law, remained behind in the assembly, and offered the Swedes to do sacrifices on their behalf if they would give him the Kingdom. They all agreed to accept Svein's offer, and he was then recognized as King over all Sweden. A horse was then brought to the assembly and hewn in pieces and cut up for eating, and the sacred tree was smeared with blood. Then all the Swedes abandoned Christianity, and sacrifices started again. They drove King Ingi away; and he went into Västergötland.[5]

 

출처: https://lainfos.tistory.com/228 [Hidden World History 감추어진 지구촌 역사:티스토리] 카테고리: Norse

 

 

"Irish[edit]

Illustration of the Irish horse sacrifice taken from Topographia Hibernica, c. 1220

 

Following the 12th-century Anglo-Norman invasion of Ireland, Norman writer Gerald of Wales wrote in his Topographia Hibernica that the Irish kings of Tyrconnell were inaugurated with a horse sacrifice. He writes that a white mare was sacrificed and cooked into a broth, which the king bathed in and drank from:[11]

There is in a northern and remote part of Ulster, among the Kenelcunil, a certain tribe which is wont to install a king over itself by an excessively savage and abominable ritual. In the presence of all the people of this land in one place, a white mare is brought into their midst. Thereupon he who is to be elevated, not to a prince but to a beast, not to a king but to an outlaw, steps forward in beastly fashion and exhibits his bestiality. Right thereafter the mare is killed and boiled piecemeal in water, and in the same water a bath is prepared for him. He gets into the bath and eats of the flesh that is brought to him, with his people standing around and sharing it with him. He also imbibes the broth in which he is bathed, not from any vessel, nor with his hand, but only with his mouth. When this is done right according to such unrighteous ritual, his rule and sovereignty are consecrated.[12]

 

This has been seen as propaganda meant to paint the Irish as a barbaric people and thus justify Anglo-Norman conquest.[13] However, there may be some truth in the account, because there are mentions of similar horse sacrifices associated with kingship in India (the ashvamedha) and Scandinavia.[11]

 

Germanic[edit]

 

Main article: Horses in Germanic paganism § Blóts and horsemeat

The Stentoften Stone, bearing a runic inscription that likely describes a blót of nine he-goats and nine male horses bringing fertility to the land[14]

 

Horse sacrifice played a central role in Germanic paganism, with the meat typically being eaten afterwards. The most detailed account of a blót of a horse is given in the saga of Hákon the Good in Heimskringla in which horses and cattle are killed and their blood collected to be sprinkled over the walls of the hof, while their meat is cooked for the attendants.[15][16] This is consistent with archaeological finds dating to the Early Medieval Period from England and Scandinavia showing deposits of horses that have been eaten.[15]

(source : Horse Sacrifice, wikipedia)

 

 

 

 

8) 마한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법을 알며, 면포(緜布)를 짓는다.

 

상기 스코틀랜드의 고대 움집 사회에서는 농사를 지은 흔적이 있다 한다.

 

그런데 누에치는 것은 특별한 것이므로 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누에(silkworms)를 치려면 먹이가 되는 뽕잎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뽕나무(white mulberry)를 재배해야 하는 것이다. 아래 자료를 보면 뽕나무는 지구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길러진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누에를 기르기 위한 뽕나무를 재배했다고 한다. 적어도 서기 220년에 로마황제가 실크옷을 입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우리가 선입관으로 생각하는 실크로드 때문에 유럽에 뽕나무 누에치기가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치 않다는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양잠업을 권장했다고 한다.

 

따라서 마한지역에서 누에치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리스와 로마의 유럽지역에서 누에고치를 길렀다는 기록은, 이들 지역이 마한지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Distribution and habitat[edit]

 

The species is native to China and India[11] and is widely cultivated and naturalized elsewhere (including the United States, Mexico, Australia, Kyrgyzstan, Argentina, Turkey, Iran, Iraq, and many others).[7][8][12][13][14][15]

 

It is widely naturalized in disturbed areas such as roadsides and the edges of tree lots, along with urban areas in much of North America, where it hybridizes readily with the locally native red mulberry (Morus rubra). There is now serious concern for the long-term genetic viability of the red mulberry because of extensive hybridization in some areas.[16]

 

The species is now extensively planted and widely naturalized throughout the warm temperate world and in subarctic regions as well, and would survive in elevations as high as 4,000 metres (13,000 ft). They thrive in mildly acidic, well drained, sandy loam and clayey loam soils, though they can withstand poor soils as well.[17]

 

Cultivation[edit]

 

Mulberry cultivation is generally found in both tropical and temperate regions, although the temperature of 24-28 °C is ideal for cultivating mulberry. Mulberry thrives from 28 °N and 55 °N latitude under varying climatic conditions ranging from temperate and tropical situated north of the equator. It grows well in areas where annual rainfall varies between 600 and 2,500 millimetres (24 and 98 in) with a minimum of nine to 13 hours of sunshine per day. Mulberry can be grown up to 4,000 m (13,000 ft) above sea level. Mulberry blooms well in warm, rich, fertile, well-drained, loamy to clayey soils, porous with strong moisture-holding ability. The optimal soil pH range is 6.2–6.8. Because mulberry is a hardy crop, the soil moisture can be used to a greater extent by these plants. However, the analysis of India's soils stated that the status of sodium (Na), potassium (K), and phosphorus (P) should be set. When some deviation occurs then the insects or fungi will attack mulberry plants.[18]

 

Although the trees can be reproduced by seed, to maintain the proprieties of the mothertree, mulberry are usually reproduced by stem cutting, or sometimes by grafting. Depending on what the mulberry trees are used for, production of fodder, timber, leaves for silkworms or fruit, several cultivation systems are possible, such as hedges, trees or pollarded trees.[19]

The tree is vigorous and characterized by good disease resistance, as many parts of the tree (bark, leaves, etc.) are rich in antimicriobial and antifungal compounds.[20]

 

History

 

Cultivation of white mulberry to nourish silkworms began more than 4,700 years ago in China and has since been introduced in other countries. The Ancient Greeks and Romans cultivated the mulberry for silkworms. At least as early as 220 AD, Emperor Elagabalus wore a silk robe.[21] It was introduced into other parts of Europe in the twelfth century and into Latin America after the Spanish conquest in the fifteenth century.[17] In 2002, 6,260 km2 of land were devoted to the species in China.[8]

 

It has been grown widely from the Indian subcontinent[8] west through Afghanistan and Iran to southern Europe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for leaves to feed silkworms.[9] "

 

(자료 : Morus alba(=white mulberry)(뽕나무),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imals)

 

 

 

 

9) 마한사람들은 활, 방패, 창, 큰 방패를 잘 쓴다.

 

바이킹의 무기는 아래 사진과 같이 큰 방패를 이용하고, 창을 쓴다.

 

축제에서의 바이킹의 무기 (자료 : 위키피디아)

 

그런데, 진서 동이열전에 마한에 대한 묘사가 이와 유사하다. 즉 마한사람들이 활, 방패, 창, 큰 방패를 잘 쓴다고 아래 자료에서 말한다. 상기 사진에서는 활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아래 Danes족의 사냥에서, 활 및 석궁을 이용했다고 기술하였다. 즉 활도 바이킹이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이는 마한의 기록과 매우 일치한다.

 

필자는 마한이 유럽 중부와 이태리반도를 포함한다 추정했다. 동쪽 프랑스지역에 있었던 Audui족으로 추정되는, 백두산 10국의 하나인 해두국이 마한의 거수국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백두산 (=몽블랑산) 10국 중의 하나인 주나국, 조나국 (Juteland, 덴마크지역) 등도 마한의 거수국일 가능성이 있다. 즉 이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가까우므로 바이킹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북부여 지역으로 돌아간 두막루(Danes족)가 덴마크지역으로 AD 500년경 (동부여가 망한 후 일부 세력이 이 지역으로 옮김) 이동했으므로, 이들도 9세기부터 나타나는 바이킹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즉 바이킹과 마한의 연결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또한 Danes족의 훈족왕이 BC 12c경 덴마크와 앵글로족(후에 영국으로 이동)의 선조가 되었으므로, 또한 바이킹족도 영국으로 이동하여 지배하였으므로, 서쪽인 마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은 16세기에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싸울 때에도 활과 대포를 이용했다.

 

 

10) 금과 보배, 비단과 양탄자[罽]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영주(瓔珠, 보석과 구슬)을 중히 옷에 꿰메어 장식으로 삼았고, 목에 매달거나 귀에 걸기도 하였다.

 

 

- 바이킹의 Appearances

 

바이킹 여성들의 치장은 부자(Jarls계층)들은 비싼 실크옷을 입으며, 브로우치, 혁대버클, 목걸이, 팔찌 등 보석을 치장하기 좋아한다고 아래 기록된다. 이러한 보석 가공은 Norse에 특이하다고 했다. 반면, 손가락 반지나 귀걸이 등은 슬라브족에서나 보이며 바이킹들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한다. 평민들(Karls계층)도 같은 모습이나 비교적 덜 비싼 것을 한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ypical jewellery worn by women of the Karls and Jarls: ornamented silver brooches, coloured glass-beads and amulets (source : Wikipedia)

 

"The three classes were easily recognisable by their appearances. Men and women of the Jarls were well groomed with neat hairstyles and expressed their wealth and status by wearing expensive clothes (often silk) and well crafted jewellery like brooches, belt buckles, necklaces and arm rings. Almost all of the jewellery was crafted in specific designs unique to the Norse (see Viking art). Finger rings were seldom used and earrings were not used at all, as they were seen as a Slavic phenomenon. Most Karls expressed similar tastes and hygiene, but in a more relaxed and inexpensive way.[119][126] "

(source : Viking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Vikings)

 

 

마한인의 자료에서는 일부 비슷하나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마한인은 금, 은, 비단(실크), 모직물 따위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브로우치),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귀걸이나 반지는 바이킹들은 하지 않고, 슬라브인들이 한다고 했다. 슬라브인들이 사는 발칸지역도 마한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동예지역을 발칸반도로 추정했는데, 이들지역의 사람들이 동예와 같이 긴 창을 쓴다 하였다. 즉 슬라브인이 사는 발칸반도도 마한지역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1) 마한지역에서는 큰 밤이 나는데 배만 하다.

 

큰 밤은 Horse Chestnut이라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면, 발칸반도지역과 영국,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에서 자란다. 브리튼과 아일랜드에서는 아이들이 이들 씨를 이용한 놀이가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흔한 역사를 말해 준다. 아이슬란드나 Faroe islands (=Scotland 북쪽에 있는 덴마크 섬)에서도 길러지는 것을 보면 유럽의 서쪽과 발칸반도에서 많이 자라는 것을 본다. 즉 이들 지역이 마한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여름에 덮지 않은 지역에서 자라는 큰 밤나무는 한국에서는 무더운 여름때문에 있을 수가 없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국에는 마한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Faroe islands location (덴마크왕국) (자료 : Wikipedia)

 

 
 

Aesculus_hippocastanum_fruit Horse chesnut fruit (source : Wikipedia)

 

 

"Aesculus hippocastanum, the horse chestnut,[1][2][3] is a species of flowering plant in the maple, soapberry and lychee family Sapindaceae. It is a large, deciduous, synoecious (hermaphroditic-flowered) tree.[4] It is also called horse-chestnut,[5] European horsechestnut,[6] buckeye,[7] and conker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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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ually only 1–5 fruits develop on each panicle. The shell is a green, spiky capsule containing one (rarely two or three) nut-like seeds called conkers or horse-chestnuts. Each conker is 2–4 cm (34–1+12 in) in diameter, glossy nut-brown with a whitish scar at the base.....................

 

 

The native distribution of Aesculus hippocastanum given by different sources varies. As of March 2023, Plants of the World Online considered it to be native to the Balkans (Albania, Bulgaria, Greece and former Yugoslavia), but also to Turkey and Turkmenistan.[15] A 2017 assessment for the IUCN Red List restricted the native distribution to the Balkan area: Albania, Bulgaria, mainland Greece and North Macedonia.[1] It has been introduced and planted around the world. It can be found in many parts of Europe as far north as Harstad north of the Arctic Circle in Norway,[16] and Gästrikland in Sweden .............

 

It is widely cultivated in streets and parks throughout the temperate world, and has been particularly successful in places like Ireland, Great Britain...

 

Cultivation for its spectacular spring flowers is successful in a wide range of temperate climatic conditions provided summers are not too hot, with trees being grown as far north as Edmonton, Alberta, Canada,[19] the Faroe Islands,[20] Reykjavík, Iceland and Harstad, Norway.

 

In Britain and Ireland, the seeds are used for the popular children's game conkers. "

(source : Horse Chestnut (Aesculus hippocastanum), wikipedia)

 

아래 사진은 프랑스의 Reims지역에 있는 Notre Dame Cathedral 기둥에 있는 Horse Chestnut 잎의 모습이다. 즉 프랑스 이지역에도 큰 밤이 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역시 유럽 서쪽이 마한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Reims Notre Dame Cathedral column detail of horse chestnut leaves (source : Wikipedia)

 

 
 

 

12) 마한에는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자(1.5미터)나 된다

 

필자는 꼬리가 5자(1.5미터)나 되는 닭은 공작새로 판단한다. 공작이나 닭이나 모두 꿩과에 속한다. (아래 자료 참조)

 

 

"꿩과에 속하는 중형 조류.

 

닭은 현재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야생종(Gallus gallus)을 가축화한 새이며, 기원전 6, 7세기경부터 사육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닭은 이미 신라의 시조설화와 관련되어 등장한다." (자료 : 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하나 깃이 매우 화려하고 몸이 크다. 날개의 길이는 수컷이 50cm, 암컷은 40cm, 꽁지는 1.5미터 정도이며, 머리 위에 10cm 정도의 깃털이 삐죽하게 있는데 수컷이 꽁지를 펴면 큰 부채와 같으며 오색찬란하다. 암컷은 수컷보다 작고 꽁지가 짧으며 무늬가 없다." (자료 : 공작새)

 

수컷의 깃털이 매우 화려한 것이 큰 특징. 길이는 깃털까지 합치면 수컷 2 m, 암컷 1 m 정도이며 깃털을 제외하면 보다 조금 큰 정도다. (자료 : 공작, 나무위키)

 

 
 

A peacock walking freely around a zoo (source : Wikipedia)

 

 

그럼 공작새가 유럽에 있었는가? 아래 자료를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불사조로 신성시 되었고, 알렉산더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르시아의 새로 언급했다. (아래 자료 참조). 그리고 고대 로마에서는 BC 35년부터 식용하고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Ancient Greeks believed that the flesh of peafowl did not decay after death,[citation needed] so it became a symbol of immortality. In Hellenistic imagery, the Greek goddess Hera's chariot was pulled by peacocks, birds not known to Greeks before the conquests of Alexander. Alexander's tutor, Aristotle, refers to it as "the Persian bird". When Alexander saw the birds in India, he was so amazed at their beauty that he threatened the severest penalties for any man who slew one.[48] Claudius Aelianus writes that there were peacocks in India, larger than anywhere else.[49]

 

..................

 

In ancient Rome, peafowl were served as a delicacy.[65] The dish was introduced there in approximately 35 B.C. The poet Horace ridiculed the eating of peafowl, saying they tasted like chicken. Peafowl eggs were also valued. Gaius Petronius in his Satyricon also mocked the ostentation and snobbery of eating peafowl and their eggs.

 

(source : Peacock(Peafowl), Wikipedia)

 

 

또한 아래 자료에서 보면 고대로마와 중세유럽에서도 공작을 구워먹었다 한다.

 

"관상용 외에도 깃털을 화살깃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과의 조류라 식용도 가능하다. 아랍에서 구워먹기도 하며, 고대 로마중세 유럽에서도 구워먹었다. 중국청나라에서도 팔진에 속해서 귀한 식재료 취급당한 적이 있으며,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에서 '앙트르메'라고 말하는 눈으로 보고 즐기는 장식요리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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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의 천신 제우스의 아내이자 가정의 여신 헤라의 상징조이다. 헤라나 헤라가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서양 미술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헤라 옆에 공작을 한 마리씩 그려놓았다. 남편 제우스 옆에 독수리가 있는 것과 똑같은 경우. 이 밖에도 수컷 공작의 깃에 나 있는 화려한 무늬들을 별이 가득한 밤하늘의 상징으로 여기거나, 헤라의 마차를 끄는 짐승이 곧 공작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자료 : 공작, 나무위키)

 

즉 긴꼬리의 닭인 공작이 유럽과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는 것은 이들 지역이 마한지역일 수 있다는 추정과 일치한다.

 

 

13)마한의 서쪽에 주호국이 있었다.

 

마한의 서쪽 해도위에 주호국이 있었고 하의를 입지 않고 가죽옷을 입는 그들의 복식모습을 언급한 아래 기록은 이들이 왜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필자는 이 주호국이 이태리 서쪽에 있는 Sardinia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했다. 그러나 이들 무어인들은 검은 피부를 가졌으나 하의를 입지 않는 복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마한을 서쪽의 영국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주호국은 이태리 서쪽 섬이 아니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주호국과 이름이 비슷한 Jutland의 Jutes인들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주호국이 영국이나 그쪽의 섬이 되게 된다. 그러나 이 지역은 그렇게 더운 지역이 아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한(韓)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기에는 너무 서쪽 대서양에 치우쳐 있다. 주호국이 마한, 진한, 변한과 무역거래를 했다면 지중해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마한의 서쪽에는 해도(海㠀)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사람들은 (몸집이) 단소(短小)하고, 곤두(髡頭, 머리를 깎음)를 하였으며, 위의(韋衣, 가죽옷)을 입었는데 상의는 있으나 하의가 없었다. 소와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하였다. 배를 타고 한(韓)을 왕래하며 물건을 거래하였다."

 

이상을 고려한다면 지중해 서쪽에 있는 Balearic islands에 주호국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이들 섬에 사는 이들은 양가죽옷을 입거나 벌거벗은 복식을 하고 있었다 한다.

 

 
 

Balearic islands 위치 (자료 : wikipedia)

 

아래 자료를 보면 항구가 발달했다 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오일을 제외한 모든 것이 풍부하고, 토끼가 많고, 독사가 없다고 했다. 특히 소나 노새는 유명하다고 한다. (돼지 언급은 없다). 이지역 동굴에서 키워지는 달팽이는 로마인들이 특히 인정하는 요리였다 한다. 즉 로마와 무역을 했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the Lycophron's Alexandra verses, the islands were called Γυμνησίαι/Gymnesiae (γυμνός/gymnos, meaning naked in Greek) because its inhabitants were often nude, probably because of the year-round benevolent climate.

.........

In addition, Diodorus Siculus writes that the Greeks called the islands Gymnesiae because the inhabitants were naked (γυμνοί) during the summer time.[17]

.............

The islands had a very mixed population, of whose habits several strange stories are told. In some stories, the people were said to go naked or were clad data-only in sheepskins—whence the name of the islands (an instance of folk etymology)—until the Phoenicians clothed them with broad-bordered tunics. In other stories, they were naked data-only in the heat of summer......

 

The two largest islands (the Balearic Islands, in their historical sense) had numerous excellent harbours, though rocky at their mouth, and requiring care in entering them (Strabo, Eustath.; Port Mahon is data-one of the finest harbours in the world). Both were extremely fertile in all produce, except wine and olive oil.[24] They were celebrated for their cattle, especially for the mules of the lesser island; they had an immense number of rabbits, and were free from all venomous reptiles.[25] Amongst the snails valued by the Romans as a diet was a species from the Balearic isles called cavaticae because they were bred in caves.[26]

 

(source : Balearic islands,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지중해섬)

 

이상을 고려할 때, Balearic islands가 주호국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4) 마한은 중마한, 남마한의 이름이 있었다.

 

프랑스 동부에 있는 Aedui지역이 마한의 거수국 중 하나인 해두국으로 추정되는 바, 중마한은 중부유럽을 말하지 않나 추정된다.

 

남마한은 아프리카 북부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조선왕 준이 바다를 건너 마한을 격파하고 한(韓)의 왕이 되었다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를 타고 남하해 북아프리카의 남마한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필자의 마우리족 관련 글 참조). 필자는 위만이 건넌 패수를 라인강으로 추정했다. (아래 필자의 패수 관련 글 참조)

 

 

"처음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게 격파당한 바, 이에 주변의 1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해서 이를 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은 후에 멸절하였고,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으로 즉위하였다."

(자료 : 후한서 동이전 한조, 인용출처 : 원한의 거리 블로그님 자료,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삼한, 공유자료)

 

 

 

15) 항상 5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니, 춤을 출 때에는 항상 수십인이 서로를 따라 땅을 밟으며 박자를 맞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또 이와 같이 반복한다.

 

5월(단오)과 10월(추석) 축제에 대한 기록은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이 모여 춤을 추는 문화는 유럽에서 확인된다. 필자는 특히 바스크지역의 춤문화가 상기 마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비디오를 보면 여럿이 모여 발을 맞춰 춤추고 일행이 안으로 모였다가 밖으로 다시 나오는 모습은 우리의 문화처럼 보인다.

 

필자는 바스크지역의 문화가 한민족과 관련이 매우 깊다고 판단한다. 과거 전 유럽지역이 바스크인 지배가 아니었나 하는 추정도 있다. (바스크언어 지역이름이 전유럽에 있다 함). 고구려로 추정되는 Visgothic Kingdom(남프랑스와 이베리아반도지역)이 신라로 추정되는 사라센 제국(우마이야 왕국)에 의해 망할 때, 이들은 바스크지역으로 피신했다 한다. 그래서 더 그 문화가 보존되었는지 모른다.

 

 

https://youtu.be/lPlopC_68No?si=TyyD1BO3-m9Kvqyo

 

Oinkari Basque Dancers of Boise at Alive After Five

 

바스크지역의 전통리듬을 보여주는 아래 비디오는 우리의 국악 가락을 연상케 한다. 

 

https://youtu.be/5sQmU0WZyHQ?si=H-nKJgpcVt_IrAVd

Txalaparta – Traditional music from Basque Country

 

 

 

마한의 춤과 관련하여 아래 그리스의 Zorba Dance도 같은 영감을 준다. 이는 또한 고구려의 호선무와도 관련이 있지만 말이다. Sirtaki라 불리는 이 춤은 그리스 국민춤이기도 하다. 춤을 소재로 과거 필자는 조상들의 영역을 추정해 보았는데, 아래 필자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https://youtu.be/f16cwfdSuOQ

 

"Zorba the Greek" ShakallisDance2019/Just Dance

 

 

https://youtu.be/6Onu9YcDho0

Συρτάκι (syrtaki) André Rieu Zorba dance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제목 :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의 역사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로마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훈족의 유럽진출 역사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그것으로 추론한

lostcorea.tistory.com

 

 

 

16) 또한 소도(蘇塗)를 세워 큰 나무를 세우고 이에 방울과 북을 메달아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마한의 풍습에 소도를 세워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것은 스웨덴의 Uppsala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큰 나무와 우물이 있는 곳에 temple을 세워 놓고 종교적 행사를 지낸다. German paganism이 arianism인데 스키타인이나 고트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필자는 고트족이 훈족이고 고씨성의 고구려라 추정한다. 여기서도 스칸디나비아쪽이 마한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A woodcut depicting the Temple at Uppsala as described by Adam of Bremen, including the golden chain around the temple, the well and the tree, from Olaus Magnus' Historia de Gentibus Septentrionalibus (1555).

 

 

17) 그 남쪽 경계는 왜(倭)와 가까워 (왜와) 마찬가지로 문신을 한 자들도 있다.

 

남마한은 아프리카 북부로서 왜와 접경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아직 왜가 문신을 한 것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과거 스키타인들이 몸에 문신(바늘로 쪼아 만듬)을 하는 관습을 연구를 통해 알았는데, 스키타인들이 고조선의 역사라 판단하지만, 그리고 환단고기에 보면 왜도 조선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왜 유독 왜인들이 문신을 한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상기 연구에서 Balearic islands의 사람들이 주호국인이며 왜인이 아닌가 추정했는데, 이들은 황토흙(red earth)을 이용해 paintings한다고 하였다.

 

중남미에서 마야인들은 얼굴과 몸에 paintings하여 자신을 무서운 전사로 치장하였다 하는데, 이것을 문신이라 한다면 왜인들이 문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아프리카의 일부 베르베르인들이 마야인들과 같이 페인트 칠하는 성격의 문신을 말하지 않나 판단된다. 이는 차후 관심을 가지고 알아볼 과제이다.

 

 

IV. 마무리말

 

이상으로 마한에 관련된 중국사서 내용을 바탕으로 마한의 영역을 추정해 보았다. 사실 마한의 영역은 백제, 사로국 등과도 연관이 있고, 광개토태왕의 정벌지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차후 보완될 것이다. 여기서는 사서내용의 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으로 필자가 추정하는 유럽의 마한지역을 검토해 본 연구물이라 판단한다. 그결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브리튼 등의 지역도 포함되어 서쪽의 마한이 상당히 넓은 지역임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중부유럽, 북유럽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마한이라 한다면 북아프리카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발칸유럽도 마한의 지역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백제의 초기 역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바, 필자의 연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지역은 고구려 고트족의 역사지역으로 판단하는데, 이들 지역이 마한이라 한다면, 고구려가 예맥지역이면서도 단군조선 시기의 마한의 일부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진한은 마한의 우측에 있고 진(秦)나라의 피난민이 옮겨온 역사라는 기록은 앞으로 마한과 진한의 경계를 유럽의 어디로 보아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튀르키예의 소아시아가 마한과 진한의 경계 영역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들지만, 향후 추가 연구시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아직 진(辰)의 영역이 소아시아를 넘어 페르시아까지 포함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Sassanian Persia가 신라임을 확인한 필자는 조심스럽게 진(辰)의 영역이 페르시아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데, 앞으로 더 연구할 향후 과제이다. 진한의 남쪽에 변진(진의 변방, 변한)이 있고 또한 그 남쪽이 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을 상기하면 의문이 들기도 한다. 향후 과제로 삼고 여기서 마한의 영역에 대한 연구는 일단락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