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2020. 7. 16. 11:06한민족 역사/공통

제목 :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의 역사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로마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훈족의 유럽진출 역사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그것으로 추론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라 추론했으며, 비잔틴제국은 백제라고 추론했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는 결국 비잔틴제국을 이어 받고, 아랍역사에서 말하는 우마이야 왕조, 즉 대식국도 신라라고 추정했다. (우마이야왕조를 잇는 압바스왕조, 그리고 당과 신라의 구분, 후삼국에 이은 고려, 그리고 조선까지 계속된 연구가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

 

이러한 연구결과는 결국 서로마도 우리 조상들의 역사로 추정되며,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도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결국 수메르 문명(수밀이국)을 위시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불교와 산스크리스트어의 인더스문명, 기자의  피라밋과 편두를 지닌 18왕국의 네페르티티  여왕의 이집트 문명,  모두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서구역사의 원조라 하는 그리스문명도 우리 조상들과 밀접하게 관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황하문명도 결국 우리와 무관할 수 없기에 세계 문명 발상지 모두가 우리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할 것이다. 단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에 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향후 재야 사가들의 큰 과제이다.

 

그동안 필자는 영문판 Wikipedia 자료를 많이 이용했다.  짧은 시간내에 기존의 서양 역사 내용을 파악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나름 대로 판단하며 취사선택하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그리스 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서,  고트족에 대한 Jordanes의 역사서 등의 원전을 직접 보고, 동양의 사서들도 원전을 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것을 허락할 지 모르겠다. 후세의 한인 사가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여기서는  그동안 추정해온 고구려, 신라의 활동영역에 대한 방증의 한 방법으로 춤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EBS에서 편집한 자료에서 고구려의 춤 동작이 인도 북부에서 확인되었다는 방송을 보고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즉 고구려의 호선무가 발견되고 양발을 교차하는 자세가 인도 서북부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호선무와 인도의 까탁춤

(자료 : 비디오 : EBS, 고구려 음악 대탐사, 사진 : 실크로드-고구려 음악 대탐사 1, 세티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고구려 춤 발 교차하는 모습

(자료 : 비디오 : EBS, 고구려 음악 대탐사, 사진 : 실크로드-고구려 음악 대탐사 1, 세티어)

 

인도 춤에서 발 교차하는 모습

(자료 : 비디오 : EBS, 고구려 음악 대탐사, 사진 : 실크로드-고구려 음악 대탐사 1, 세티어)

 

인도는 고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어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자료에서도 그렇다. 인도 동북부에 있는 보드가야 사찰에서는 Mangla-Gauri, Lama-Sila를 숭배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막라지역은 인도 서북부 파키스탄에 있는 지역으로 여기에 고구려의 성곽모습이 남아 있다. 막라가 고구려  4대, 대무신왕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낙랑지역과도 관계가 있는 역사이다. 이는 인더스강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강인지 결론을 내야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막라지역의 고구려 성곽 모습

 

Mangla Fort in Kashimir (Punjab) in Pakistan

 

그런데 인도 북부의 호선무 춤은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 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EBS 비디오 중 고구려춤과 관련 된 인도춤 비디오 1, 2

 

https://youtu.be/Ds7sJpW357Q

 

https://youtu.be/sna3FDlxFxU

 

그럼 중앙아시아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고구려의 영역으로 추산되는 지역에서 이러한 호선무가 있었는가 그리고 양발을 교차하는 자세의 춤이 있는가를 살펴 보면 이들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동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Romany People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집시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집시라는 말을 몹시 싫어한다 한다. 그래서 Romany People이라 칭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포가 6세기부터  인도서북부, 터어키, 이집트, 동유럽, 중부유럽, 스페인 등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데, 그들의 춤(Gypsy dance)이 여기에서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한 Wikipedia 자료를 보면, 이들은 6세기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거듭된 이동으로 스페인까지 이동한 것으로 설명된다.  나아가 브라질, 미국으로 이민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난 이들이 계속적으로 이동했다기 보다 이러한 지역에 이미 주거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집단의 로고가 수레바퀴 모형인데 위키자료는 이동하는 마차의 바퀴를 표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Romany People의 이동 경로 (source : Wikipedia, Romany People)

 

Romany People의 Logo (source : Wikipedia, Romany People) 

 

그러나 이러한 수레바퀴모형은 불교의 표시로고와 매우 유사하다. Wikipedia에서도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Romany People은 춤과 음악으로 이동생활한다. 그리고 인도서북부에서의 춤은 빙빙 도는 호선무와 현란한 발동작을 보인다.

 

불교의 로고 (자료 : 위키, 불교)

 

 

인도 서북부 집시댄스의 모습 (비디오 1, 2)

https://youtu.be/rCunGo798_c

 

KALBELYIA (GYPSY) DANCE FROM INDIA

https://youtu.be/WuIU6239Fws

 

그래서 우리 문화와 연관이 있나 싶어 자료를 살펴 보았다.  아래 남사당패, 무애희, 고구려의  

춤에 관한 자료를 살펴 보니 아래와 같이 놀라운 사실이 드러 난다.

 

남사당패에 대한 설명 (자료 : 한국 전통연희사전)

 

남사당패는 본래 남자만으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이었다. 이들은 꼭두쇠(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가면극)·덜미(인형극꼭두각시놀이) 등을 공연했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요술(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다소의 노자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현재 남사당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의 여섯 가지 연희를 전승하고 있다.

남사당은 조선 후기의 사당, 거사굿중패와 더불어 재승(才僧)계통 연희자들의 후예이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 원효의 무애희는 재승 계통 연희자에 의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재승 계통 연희자는 고려가 불교 국가가 되면서 더욱 크게 활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문종 10년(1056) 9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를 하고 기생들과 뒤섞여 놀며,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에 이름을 올려놓고 승려 행세를 했지만, 실제로는 속인과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재승 계통 연희자들이 우란분재뿐만 아니라 연등회·수륙재·불탄일 등의 불교 행사에서도 연희를 공연했을 것이다.

[출처] <펌> 남사당패,전통연희사전|작성자 죽엽

 

사당패에 대한 설명 (자료: 한국전통연희사전)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사중(四衆)이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 풍속에 우바새를 거사라고 부르고, 우바이를 사당(捨堂)이라고 부른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당과 거사를 비구승, 비구니와 함께 사중(四衆)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당과 거사가 본래 불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능화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社堂)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군(安城郡)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라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사당이 절의 노비에서 나왔다는 말은 주목을 요한다. 일본의 경우도 재승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절에 속한 노비이면서 연희를 하는 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출처] <펌> 사당패|작성자 죽엽 Paul CG Park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1)에는 사당패에 대한 시가 전한다. 이 시에서는 사당을 음만 따서 사당(沙?)이라고 표기했다. 이 시에 의하면, 사당들은 부채를 들고 춤을 췄고, 춘가(春歌)와 양산도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사당의 붉은 치마에 돈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출처] <펌> 사당패|작성자 죽엽 Paul CG Park

 

사당패들은 전통적인 농악의 춤동작과 소고를 가지고 춤추는 법고놀이를 공연했다. 거사가 먼저 소고를 치면서 장단에 맞춰 줄지어 늘어서면, 사당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했다. 먼저 수거사가 소리를 메기면 거사와 사당들이 받아 부르기도 하고, 두 패가 주고받으면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춤을 추면서 흥겹게 불렀다. 대열이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기도 하고, 손에 쥔 소고는 노래와 춤의 흥취를 한층 돋우기 위해 재꼈다 엎었다 돌렸다 하면서 장단에 맞추어 매듭지어 쳤다.

[출처] <펌> 사당패|작성자 죽엽 Paul CG Park

 

사당패 공연장면 (수락산 흥국사 감로탱, 1868) (자료 : 한국전통연희사전, 사당패)

 

 

사당패 공연장면 (경국사 감로탱, 1887) (자료 : 한국전통연희사전, 사당패)

 

 

남사당패에 대한 아래 비디오를 보면, 땅재주, 줄타기, 인형극, 등이 보인다. 

 

남사당패 비디오 (땅재주, 줄타기) (1965년)

youtu.be/rwy4WC6qjWA

 

남사당패 비디오 (덜미, 꼭두각시) (1965년)

youtu.be/dPFPRlAU2ZA

 

 

무애희에 대한 설명 (자료 : 한국전통연희사전)

 

무애희(無?戱)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향악정재로서, 무애(無?)를 놀리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은 그 도구에 주목해 무애로 부르거나, 무애지희(無?之戱)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순조(純祖) 때 간행된《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에서는 이 춤을 무애무라고 기록했으며, 이후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무애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에서 무애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하여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우인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했다. 원효가 그 형상대로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生死)를 벗어난다”란 글귀를 따서 이 도구를 무애라고 부르면서,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교화-음영하고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불타(佛陀)의 호(號)를 알게 하여,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즉 신라 승려 원효(元曉, 617-686)가 우인(優人)이 놀리던 큰 박을 본떠서 연희 도구를 만든 후 무애라고 이름 짓고,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교화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무애희는 전문적 연희자인 우인들의 연희 도구를 활용해서 만든 무애를 사용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던 연희이다.
무애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고려 말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파한집》권하(下)에서 고려시대의 무애희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옛날 원효 스님이 미천한 사람들 속에 섞이어 놀았다. 일찍이 목이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하고 이를 무애(無?)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호사자(好事者)가 금방울을 박의 위에 매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하여 두드리며 진퇴하니 모두 음절에 맞았다. 이에 불경에 있는 게송을 적취(摘取)하여 무애가라 하니, 밭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다. 무애지국(無?智國)이 일찍이 제(題)하여 이르기를 “이 물건은 오래도록 무용(無用)을 가지고 사용했고, 옛 사람은 도리어 불명(不名)으로써 이름이 났도다” 했다. 근래 산인 관휴(山人 貫休)가 게(偈)를 지어 이르기를, “양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二障)을 끊은 까닭이요,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三界)를 초월한 까닭이다” 했으니, 모두 진리로써 이를 비유한 것이다. 나도 또한 그 춤을 보고 찬(讚)을 지으니, 그 찬에 이르되 ‘배는 가을 매미처럼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처럼 꼬부라졌도다. 그 굽힌 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요, 빈 것은 물건을 용납할 만하도다. 밀석(密石)에 막히는 것을 볼 수 없고, 규호(葵壺)에 비웃음 받지 않도다. 한상(韓湘)은 이와 같이 세계에 숨었고, 장자(莊子)는 이와 같이 강호(江湖)에 떠다녔도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고? 그는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요. 누가 찬(讚)을 지었는고? 농서(?西)의 타이(駝李, 이인로)로다.(昔元曉大聖 混迹屠沽中. 嘗撫玩曲項葫蘆 歌舞於市 名之曰無?. 是後好事者 綴金鈴於上 垂彩帛於下以爲飾  擊進退皆中音節. 乃摘取經論偈頌 號曰無?歌 至於田翁亦效之以爲戱. 無?智國嘗題云 此物久將無用用 昔人還以不名名. 近有山人貫休作偈云 揮雙袖所以斷二障 三擧足所以越三界 皆以眞理比之. 僕亦見其舞作讚 復若秋蟬 頸如夏鼈 其曲可以從人 其虛可以容物. 不見窒於密石 勿見笑於葵壺. 韓湘以之藏世界 莊?以之泛江湖. 孰爲之名 小性居士. 孰爲之讚 ?西駝李)


이를 통해, 원효에 의해 생겨난 무애희가 고려 후기에도 연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삼국유사》에는 원효의 무애가 대호(大瓠)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곡항호로(曲項葫蘆) 즉 호로박으로 되어 있다. 또한 무애는 호사자에 의해 금방울을 박의 위에 매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한 형태로 개작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을 흔들면 방울 소리가 울리고, 채색 비단이 휘날릴 것이다. 그리고 무애희의 내용 중에는 무애를 두드리며 진퇴하는가 하면, 양 소매를 휘두르기도 하고, 다리를 세 번 들기도 하는 동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二障), 즉 번뇌장(煩惱障, 도(道)에 장애가 되는 모든 번뇌)과 소지장(所知障, 도에 장애가 되는 지식과 견해)을 끊는 것을 의미하고,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三界, 欲界-色界-無色界)를 초월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무애희에 대하여《고려사》악지 속악(俗樂) 무애(無?)조에 “무애희는 서역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가사가 불가(佛家)의 말을 많이 사용하고 또한 방언이 섞여 있어 싣기 어렵다. 우선 절주(節奏)만 남겨 이로써 당시에 사용하던 음악을 갖추어 둔다.(無?之戱出自西域 其歌詞多用佛家語 且雜以方言 難於編錄 姑存節奏 以備當時所用之樂)”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무애희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애희가 아니라 무애지희(無?之戱)라 기록된 것을 볼 때, 무애희가 민간의 연희나 춤으로서 궁중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무애희는 서역 전래의 연희로서 전문적 연희자들이 연행하던 것을 원효가 개작하여 불교 포교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펌> 무애희, 전통연희사전|작성자 죽엽

 

고구려 춤에 대한 설명

 

또한 한대(漢代)이래 중국의 문헌 중에 ‘고구려는 가무(歌舞)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소개하지 않은 책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구려인은 춤과 노래를 좋아했다. 고구려의 춤은 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4∼5세기 그리고 6∼7세기로 오면서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변모하며 발전하게 된다. 즉. 부족국가 시대의 고구려 춤은 신을 즐겁게 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신앙적 의식이며 공동체의 단결과 화합을 위한 집단가무(集團歌舞)에 그쳤으나 4∼5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높은 예술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 때 에는 이미 춤과 음악을 전달하는 각각의 전문인이 있었으며 가무(歌舞)를 연출하는데 있어서도 그 규모가 10인 이상의 상당히 커다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4∼5세기 고구려 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보존돼 있는 곳은 중국(中國) 길림성(吉林城)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고분(古墳)의 벽화(壁畵)이다. 고구려는 그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일대의 통구지방. 즉 현재의 집안지역과 평양 및 그 주변 지역에 수많은 고분들을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 일부는 내부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출처 : 동양일보, 2006년 1월 18일자, 박재희 글, 우리 춤을 찾아서: 4-5세기 고구려 춤)

중국 돈황 막고굴(220굴) 벽화중의 무용도 6~7세기의 고구려 춤은 4~5세기의 고구려 춤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순박한 면모를 떠나서 관객을 의식한 ‘볼만한 것으로서의 춤’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무대예술에 접근한 하나의 새로운 경지로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그 당시에 풍미했던 서역(西域)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독창적이고도 주체적인 역량으로 소화시켜 고구려의 춤과 음악으로 훌륭히 이룩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이라 함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 방면까지를 일컫는 말로 중국의 수(隋)·당(唐)시대에 걸쳐 문화의 교류 등 동서 교통(실크 로드)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채용한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말기인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무악(舞樂)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출처 : 동양일보, 2006년 1월26일자, 박재희 글, 6-7세기 고구려 춤)

 

 

즉 신라의 고승 원효가 세속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춤을 고안하고 이들을 통해 불교를 전파하려 했다는 설명이고, 발을 돌어 올리는 동작을 춤에 넣었다는 것이다.  즉 불교와 이들 가무단과의 연관성이 이들의 로고가 불교 로고와 유사한 이유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이러한 사당패들은 불교 사찰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였으며,  스님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고구려의 춤에 대한 설명에서는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춤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하고, 여기서 말하는 서역은 페르시아,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등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초기의 종교적 활동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 즐기는 행태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역사연구에서 고구려의 역사가 코카서스지역, 우크라이나, 항가리, 러시아, 아시아 등을 포함하고 있고,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시절 대서양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고 추론했다. 이 당시 5세기-6세기초의 훈족의 진출 사진이 우연히도 위의 Romany People의 이동경로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아래 지도 참조)

 

훈족의 로마 칩입시 이동 경로 (source: Wikipedia)

 

 

 

그래서 이들 지역의 춤의 형태를 유튜브에서 찾아 보았다.  

 

아래 비디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조지아, 아제르바이젠,  등 코카서스지역에서 고구려의 호선무에 해당하는 격렬한 팽이춤 같은 것을 남자들이 추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춤을 보인다. 러시아에서도 유사한 춤을 보인다. 

 

조지아 민속 춤 비디오

https://youtu.be/tNRfYJ2dWmc

 

아제르바이젠 민속춤 비디오

https://youtu.be/3ae-fN3DUSQ

 

우크라이나 민속 춤 비디오

https://youtu.be/WBrmIKf_PEM

 

러시아 민속춤(KALINKA) 비디오

youtu.be/OANzLIuxhNo

 

특히 훈족이 지배했던 아제르바이젠 북부의 다게스탄지역의 아래 민속춤에서는 우리 농악춤의 회전돌기(15분20초), 남사당패의 어름(=줄타기) 모습 (8분이후), 그리고 우리보다 더 보존이 잘 된 것 같은 살판(=땅재주) (4분이후, 11분30초이후) 등의 여러 모습이 위에서 본 남사당패의 놀이공연과 매우 흡사한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팽이춤도 보이고 다리를 교차로 잡는 동작도 보인다. 

 

다게스탄의 민속 춤 비디오

https://youtu.be/VPmK5mrYglc

*** 상기 비디오는 7/13/2020에 지워졌네요. 너무 적나나하게 우리와 닮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싫은 세력이 있나 봅니다. 상기 설명에서 Dagestan Avar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코카서스에 있는 Avar족은 훈족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다른 비디오는 이 지역에 아직 줄타기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youtu.be/H2phpEve15A

 

한국의 줄타기 비디오 

https://youtu.be/e5xTOH-JYD4

 

 

한국 전통 농악 춤 비디오

https://youtu.be/rZm_Uf6s7zo

 

 

또한 아래 비디오의  5분부터 시작하는 다게스탄의 북춤 리듬은 우리의 북춤 리듬과 너무나도 똑같다.

 또한 우리의 칼춤 배경 북소리 리듬과 너무도 닮았다.

 

다게스탄의 북춤 비디오 (5분이후)

https://youtu.be/1deFVudZhsc

 

한국전통무용 삼고무 북춤 비디오

https://youtu.be/12Il1rY_I6w

 

한국의 설장구춤 비디오

https://youtu.be/ljAfhxT0XA8 

 

우리의 전통 칼춤 (비화, 칼의 꽃) 비디오

https://youtu.be/TtJfefdr2Gc

 

동유럽에 가서는 Romany People의  춤들이 고구려의  서역으로부터 전해온 춤의 모습을 보인다.

훈족의 땅이라는 뜻의 항가리에서는 춤에서 여성들이 호선무를 보이며, 현란한 발동작의 스탭댄스를 보여준다.

 

Dance of Kalocsa (Hungarian) 비디오

https://youtu.be/WCWgFr3TnPQ

 

특히 빨간 치마에 돈을 던져 주었다는 남사당패의 이야기처럼  루마니아, 항가리의 집시댄스에서는 빨간 치마를 입고 있다. 또한 현란한 발동작은 스텝댄스의 모습을 보인다.

 

집시댄스를 교습하는 비디오에서는 탭댄스와 교차된 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루마니아의 집시댄스

https://youtu.be/BZ09kuPV8s4

 

항가리의 집시 댄스 

https://youtu.be/xiEgSgHM8cc

 

무엇이 Romany Gypsy Dance인가?

https://youtu.be/iSw0Px5rmzY

 

러시아의 집시 댄스 비디오

https://youtu.be/Ok0ijgLG5uo

 

 

우리는 앞에서 신라의 원효가 시작한 무애희가 남사당패와 같은 유랑연예집단의 시작이라는 글을 읽었다.  필자는 아랍의 우마이야왕조(대식국)가 신라라고 추론했다. 우마이야왕조는 압바스왕조에게 망할 때 일부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로 피신하여 정권을 세운 것으로 역사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기원한 것이 스페인의 플라멩코 춤이다.

 

플라멩코 춤은 스텝댄스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집시댄스의 원형이란 설명을 Wikipedia는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본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에서 시작한 집시댄스도 호선무와 스텝댄스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스탭댄스는 서역의  신라와 고구려에서 공통된 것인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플라멩코 춤 비디오 (안달루시아 발레단)

https://youtu.be/8RfAkb7LzkQ

 

Flamenco Video 2

youtu.be/elPlcVOby-8

 

 

스페인에는 또한 Bolero라는 춤이 있다. 프랑스의 Maurice Ravel (스페인 북부 Basques 지역 태생)은 Bolero라는 곡을 1928년 발표했는데, 일정한 리듬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로마 병사들의 개선행진곡 같은 오케스트라곡이다. Bolero곡은 원래 Fandango라 했다가 바꾸었는데, Fandango 리듬은 18세기 초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이에서 영감을 받아 Ravel이 편곡한 곡인지도 모른다. Ravel은 음악에 대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불러 주는 음악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다. 그의 어머니는 Basques 여인이다. 

 

"Fandango is a lively couples dance originating from Portugal and Spain, usually in triple metre, traditionally accompanied by guitars, castanets, or hand-clapping ("palmas" in Spanish). Fandango can both be sung and danced....

Eighteenth century Castilian fandango dancers (by Pierre Chasselat) (1753–1814)

Fandango rhythm.

 

The earliest fandango melody is found in the anonymous "Libro de diferentes cifras de guitarra" from 1705, and the earliest description of the dance itself is found in a 1712 letter by Martín Martí, a Spanish priest....

Widely varying claims have been made about the origin of fandango: its relation to the soleájabera and petenera; to the Andalusian malagueñagranadinamurciana and rondeña; to the canario and gitano; to the jota aragonesa.

(Source : Wikipedia, Fandango)

 

이곡은 볼레로 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볼레로 춤은 텝댄스와 가벼운 발놀림, 호선무, 그리고 카스타넷이 특징을 이룬다.  Bolero 즉 Fandango에 대해 여러 기원설이 있는데, Levante지역(the eastern Iberian coastal region of Spain)의 cantes로 분류되는, Andalusian 음악(Flamenco)의 전통 형태의 하나인, 말라가 지역의  Malaguenas가 기원이라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Levant 지역은 원래  the lands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covering Syria, Lebanon, Israel, Palestine, Jordan and Iraq 이다. 신라인 우마이야왕조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으로 피신하기 전에 있던 지역이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아래 음악과 춤을 보자. 

 

"Malagueñas (Spanish pronunciation: [malaˈɣeɲas]) is one of the traditional styles of Andalusian music (flamenco), derived from earlier types of fandango from the area of Málaga, classified among the Cantes de Levante. Originally a folk-song type, it became a flamenco style in the 19th century. It is not normally used for dance, as it is generally interpreted with no regular rhythmic pattern, as a "cante libre". " (source : Wikipedia, Bloero, Fandango, Malaguenas)

 

Ravel의 Bolero (Andre Rieu version) 음악 비디오

youtu.be/LwLABSm0yYc

 

Bolero 춤 비디오 1

youtu.be/V88z-BBtSng

 

Bolero 춤 비디오 2 (Bolshoi 발레단)

youtu.be/FWZ1xnscVCQ

 

Bolero 역시 호선무와 텝댄스의 형태를 보인다. 발동작도 현란하다. 교차되는 발모양도 보이는 것 같다. 남자들의 춤 자세는 투우사의 자세를 연상 시키기도 한다. Fandango의 의미가 Quarrel(싸움), Brilliant exploit(혁혁한 위업, 공적)라 하는데, 그 음악이 로마의 개선 장군을 위한 행진곡 같이 느껴진다. 볼레로 춤은 20세기 들어 발레 무대에서 공연된 만큼 고급스러운 춤이 되었다. 

 

스페인 북부지역으로 최근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했던 Basques지역의 전통댄스(Oinkari Fandango)는 우리의 강강술래처럼 손을 잡고 추는 춤을 보여 준다. 현란한 발동작을 보여 주고 있다. 여인들은 우리 세대전 어머니 세대가 흔히 쓰던 흰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아래 비디오 참조)

 

Basques Oinkari Traditional Dance 비디오

youtu.be/lPlopC_68No

 

피레네 산맥 주위에 있는 Basques 지역은 우리 조상들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머리에 이는 동작이나 꼬깔 모자 형태의 의복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생각된다. 

꼬깔모자의 복장은 아르메니아의 가야의 복장이라고 필자는 본 블로그에서 주장했다. 

바스크 Fandango춤이 그래서 더욱 강강술래 춤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Bolero  음악이 더 귀에 꽂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잡은 정어리를 머리에 들고 오는 바스크 여인들 (source : Wikipedia)

 

16세기 바스크지역의 나이든 여인들의 복장. 17세기 초 금지된 복장이다. (source : Wikipedia)

 

 

스페인의 Flamenco나 Bolero에서 보이는 스텝댄스는 아일랜드에서 거의 국가를 대표하는 춤으로 된다.  아래 비디오를 보면 그 현란한 발동작과 스텝댄스만으로 그리고 북소리까지 곁들여 평범한 춤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국민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군사적인 냄새가 풍긴다. 그런데 이러한 북소리와 스텝댄스의 울림이 우리나라의 전통 칼춤 (비화) 음악과 묘하게 일치한다. 즉 아일랜드까지 진출한 고구려(훈족)의 춤 잔재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양발을 교차하는 동작이 자주 보인다.

 

아일랜드의 스텝댄스 비디오 1

https://youtu.be/HgGAzBDE454

 

아일랜드의 스텝댄스 비디오 2 

https://youtu.be/rzj3DEKtCUw

 

우리의 전통 칼춤 (비화, 칼의 꽃) 비디오

https://youtu.be/TtJfefdr2Gc

 

상기 아일랜드의 step dance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칼춤과 발 스텝 모양이 비슷하다. 비록 템포는 많이 다르지만... 즉 아일랜드의 스텝댄스가 스코틀랜드의 칼춤과 함께 우리의 칼춤과 묘하게 공통점을 가진 것이다. (아래 비디오 참조)

사실 스코틀랜드의 의미는 아일랜드를 가리킨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과거 알바니아 북쪽 지역에 있던 켈트족이다. (아래 글 참조)

"Scotland" comes from Scoti, the Latin name for the Gaels. Philip Freeman has speculated on the likelihood of a group of raiders adopting a name from an Indo-European root, *skot, citing the parallel in Greek skotos (σκότος), meaning "darkness, gloom". The Late Latin word Scotia ("land of the Gaels") was initially used to refer to Ireland. By the 11th century at the latest, Scotia was being used to refer to (Gaelic-speaking) Scotland north of the River Forth, alongside Albania or Albany, both derived from the Gaelic Alba. The use of the words Scots and Scotland to encompass all of what is now Scotland became common in the Late Middle Ages. (source : Wikipedia, Scottland)

 

Scottish Folk Dance Video

youtu.be/Be59_bdC-6w

 

Scottish Sword Dance Video

youtu.be/JUFR4LcSKrs

 

이제 그리스로 가보자. 그리스는 최근 조르바 댄스로 5천명이상이 동시에 춤을 추어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다.  조르바 댄스는 영화 Zorba the Greek이라는 헐리우드 영화로 알려진 춤이다.  원래는 Sirtaki라 부르는 춤이며 크레타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크레타섬은 신라하대 김헌창의 난의 주인공으로 판단되는 Thomas the Slav가 난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본 블로그 글 참조)

 

Sirtaki는 Hasapiko라는 춤이 원류라 한다. 그런데 Wikipedia자료에 의하면, Hasapiko라는 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래한  그리스 Butcher’s Guild에서 추는 춤인데, 이의 원천은 비잔틴시대의 군사적인 것에 유래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칼을 차고 추었다는 것으로 보아 잔인한 사람 의미의 Butcher로서 칼을 차고 있는 병사들의 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우리는 앞에서 코카서스지역의 조지아 , Abkhazian춤에서 칼을 차고 호선무를 추는 비디오를 보았다.  조지아의 서쪽 흑해에 연한 Abkhazia 지역은 비잔틴제국(백제)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신라)와 다툰 Lazic war에서 비잔틴제국이 확보한 요충지이다. 따라서 이들 비잔틴제국의 칼을 차고 호선무를 추는 춤과 조르바댄스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지아 Abkhazian 민속 춤 비디오

https://youtu.be/mDIODx6mIJg

 

 

필자는 비잔틴제국은 백제라 추정했으며, 이후 신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조르바댄스는 처음에는 느린 속도로 스텝을 하며 어깨 동무를 하며 시작한다. 이후 빠른 템포로 이어진다. 음악은 부주키라 불리는 맨돌린 같은 기타의 원조로 불리는 악기로 연주된다.  조르바 댄스의 앙드레류 버전에서는 회전하는 호선무와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나 현란한 발동작을 보여 준다. 고구려 춤의 형상을 보인다. 두번째 비디오도 유사한 춤을 보인다. 양발을 교차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반면 다른 여럿이 추는 비디오 3에서는 간단한 발동작만 보인다.

단 서로 어깨동무하고 원을 그리며 도는 모습이 우리의 강강술래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조르바 댄스 배경 곡이 유난히 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르바 댄스 비디오 1 (Andre Rieu Version)

https://youtu.be/6Onu9YcDho0

 

조르바 댄스 비디오  2

youtu.be/7Et7lpVd-2M

 

조르바 댄스 비디오 3

youtu.be/f16cwfdSuOQ

 

한국전통무용 강강술래 비디오

https://youtu.be/FtXMvWOzwI4

 

그리스 조르바 댄스는 비잔틴제국 즉 백제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탭댄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의 영역인 발칸반도에는 Romany People이 현저히 많으며, 이들의 댄스도 탭댄스의 형상을 보인다.

 

카자흐스탄의 타타르족 민속춤을 보면 호선무의 동작은 적으나 앙드레류의 조르바댄스와 매우 유사하며, 우리 춤의 강강술래에서 팔로 연결된 통로 아래를 통과 하는 모습과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카자흐 타타르 전통춤 비디오

https://youtu.be/AInnu_Sw2Zg

 

이집트의 Ghawazee 집시댄스를 보면 이들의 춤이 아랍의 밸리댄스의 모습을 가미하고 있다. 이집트나 아라비아반도, 터어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들 지역이 과거 우마이야왕조의 신라 영역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이집트의 집시댄스 비디오

https://youtu.be/U0x8IoXFszY

 

아라비언 밸리댄스 비디오

https://youtu.be/B9IamvNE8is

 

프랑스의 캉캉춤을 보면  긴치마를 입고 발을 들어 올리는 춤새, 그리고 뒤로 엉덩이를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긴 치마를 흔들며 추는 모습이나 발을 들어 올리는 형상은 집시댄스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코믹하게 엉덩이를 보이는 춤으로 보아 귀족들의 춤이 아닌 평민이나 그 이하의 계급의 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집시댄스와 일맥 상통한다는 생각이다. 호선무도 보인다. 

 

프랑스의 캉캉춤 비디오

https://youtu.be/T59EDTqqW0A

 

프랑스는 고구려식 성곽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Mont Saint Michel을 비롯해서이다. 잘 보존도 되어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고구려식 성곽을 프랑스식 성곽이라 말한다. 

아래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시의 성곽을 보면 고구려성의 치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4세기에 지어졌다 한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시절이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는 몽골반점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한다. 

 

프랑스 남부 Carcasonne citywall 고구려 성곽 치의 모습 (source : Wikipedia)

프랑스 북부 Mont Saint Michel Castle (source : Wikipedia)

 

이제 서역이 아닌 아시아에서의 고구려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의 춤은 어떤가 보자

아래 위그르 전통춤을 보면 역시 호선무가 보이며, 긴치마를 이용하는 것이 서역의 Romany People의 춤과 닮아 있다.

 

위그르 전통 춤 비디오

 https://youtu.be/RqBxHH9RVLA

 

몽고의 춤은 어떨까? 아래 비디오를 보면 우크라이나의 민속춤과 유사하다. 뛰어 오르며 발을 양 옆으로 펴는 동작이 특히 그렇다. (Psy의 'Gangnam Style' 말춤이 몽고의 말춤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회전동작도 보인다. 말춤이라 그런지 무릎을 굽힌 자세에서 이동하는 동작을 보인다. 코카서스지역이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많이 보던 춤 형태이다. 그 아래 비디오의 몽고 전통춤도 현란한 발동작과 상체 움직임을 보여 주며, 빠른 템포의 춤 동작을 보인다. 호선무도 보인다. 즉 모두 고구려 영역에서 보이는 춤의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몽고 전통 말춤 비디오

https://youtu.be/lKSZKNrD-tw

 

몽고의 전통 춤 비디오

https://youtu.be/PM3e5SQJSbo

 

 

브라질에 80만 정도의 Romany People이 있는데, 19세기 포루투갈에서  카톨릭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재판하고 추방했는데, 이때 이민한 것이라 한다. 포루투갈의 Romany People은 이슬람 종교를 가졌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010년 현재 브라질에 무슬림이 4만에 불과한 것을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중간에 있는 이과수 폭포의 이름이 물수자로 끝나는 것을 보면 이지역이 조상들의 활동지역으로 보인다. 페루에서도 조선의 병사모습의 벽화가 멘시니 서양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르헨티나에도 Romany People의 자손이 30만명이 된다 한다. 따라서 이들은 토착주민이 아닌가 생각된다. 

 

브라질에는 삼바춤이 있다. 위키자료는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춤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반신과 배꼽을 드러 내고 힙을 흔드는 동작은 아라비아의 밸리 댄스와 닮은 점이 있다. 즉 Romany people의 춤인지도 모른다. 갈색의 피부도 검은 피부의 Romany People이라는 아래의 자료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브라질 삼바춤 비디오

https://youtu.be/fLdPxX8ogUU

 

미국에도 100만의 Romany people이 있다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직 그 연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도 우리 조상들과 관련된 아래 여러 흔적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 유민들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래 비디오를 보면 Native American Cherokee가 우리말로 'Amazing Grace'를 부른다. 그것도 현대어 우리말이 아닌 고대어 같은 우리말이다. 전장에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 같다. 찬송가 같은 영문 'Amazing Grace'가 Native American의 상기 음절을 이용했다 한다. 따라서 Cherokee의 이 'Amazing Grace' 곡은 오래 전부터 존재한 것 같다.

 

'Amazing Grace' 곡은 Scottish가 아래 비디오 2에서 보는 것처럼 Bag Pipe로 즐겨 부르는 곡이다. 'Amazing Grace'곡은 그 영문가사가 찬송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에서 불리워진다. 특히 아래 비디오 3에서 보는 것처럼 군악대 퍼레이드에서 연주된다. 분위기가 영문 가사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우리말 Cherokee version처럼 싸우다 죽은 전사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의 분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이 곡이 세계 곳곳에서 전사한 장병을 위로하는 곡으로 연주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세계 곳곳에서 불리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미국 동남부에서 버지니아에까지 존재했던 Cherokee Nation이 남북전쟁시 남부군에 합류해서 싸웠다. 당시 남부군은 Irish and Scottish가 대부분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남부군 국기도 Ireland와 Scotland 국기를 합쳐 놓은 모습이다. (아래 국기 그림 참조). 남부군의 장군, Robert S. Lee는 버지니아 출신 Irish이다. 'Lee'는 Irish Name 이라 한다. 당시 남부군은 Britain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있었다.  (참조 자료 : Wikipedia)

 

 

서애 유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추천했다.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을 한 이순신 장군은 빨간 수염을 가졌다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말했다 한다. 빨간 수염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사람들인 켈트족이 그렇다 한다.

 

 

그래서 여기서 남부군에 합류한 Cherokee Native American이 부른 우리말 'Amazing Grace', 남부군의 장군 Robert S. Lee의 Irish Name 'Lee', 그리고 Irish, Scottish 켈트족의 빨간 수염을 가진 '이순신' 장군의 3가지 사실이 묘하게 겹쳐진다. 

 

Amazing Grace in Cherokee Native American video 1

youtu.be/8_qFbNskjCI

 

 

Cherokee Confederates Reunion in New Orleans, 1903 (source : Wikipedia)

 

Amazing Grace Video 2 by Pipers of the World - Royal Music Shows)

youtu.be/mpUAu54Jzj4

 

 

Amazing Grace Music Parade Video 3

https://youtu.be/DYUtwEs-5zU
 

 

Amazing Grace (in English) Video 4 (sung by Nana Mouskouri)

 https://youtu.be/8_OiBGRY2EA

 

그리고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국가가 Auld Lang Syne의 음절을 이용했다. (아래 비디오 2 참조) 그런데 Auld Lang Syne은 스코틀랜드의 Patriotic Song, 즉 애국가이다. (아래 비디오 1 참조) 원래 For Old Time's Sake란 뜻이며, 1788년 Scottish poem으로 출발했다 한다. (아래 History of Auld Lang Syne 비디오 5 참조) 그러나 멜로디는 다소 달랐다 한다. 현재 Auld Lang Syne이 New year Eve에 불리는 곡이지만, 작곡자 미상인 이 곡이 여러 나라에서 많이 불리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 가사가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비장함을 노래하거나, 또는 잃어 버린 조국의 망국의 한을 달래는 것으로 들린다. 스코틀랜드의 애국가로 불리거나, 군악대가 많이 연주하는 것을 보면,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사적인 음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 작곡자 미상인 이 곡을 임시정부 애국가로 했는지 알아 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Amazing Grace'에 이어 'Auld Lang Syne'도 Scotland와 다시 연관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한 서재필, 안창호, 애국가 가사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윤치호, 지금의 애국가 작곡가라는 안익태, 나아가 Japan 국적이었다는 이승만 전대통령, 모두 미국과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다. 왜 모두 그렇게 멀고 먼 미국과 연관이 있었을까? 혹시 미국과, 일본이 모두 가까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럼 조선이 미국과 가까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특히 Scotland와 연관이 깊은 미국 동남부의 Cherokee Native American과 연관되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깊은 인연은 근대의 미국땅에서의 인연으로 그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본다. 보다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Port Hamilton은 과연 거문도인가?' 라는 글에서 북아메리카 땅에서 조선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 정도의 언급으로 100만명의 Romany People이 미국에 존재하는 것이 단순한 이민이 아닌 토착민의 가능성을 언급한 이유를 가름하고자 한다.

 

 

Auld Lang Syne video 1(Scottish Patriotic Song)

youtu.be/8XHve6cDzKo

 

 

Auld Lang Syne video 2 (National Anthem of Korean Exile Government)

youtu.be/Dc1KZExdcus

 

 

Auld Lang Syne Video 3 by Royal Scots Dragoon Guards

https://youtu.be/to1xT93IlUI

 

 

Auld Lang Syne Music Parade Video 4

https://youtu.be/gNH8L5IQTA0

 

 

History of Auld Lang Syne video 5 (by National Geographic)

https://youtu.be/pdmtnB-O31c

 

 

Auld Lang Syne Video 6 (BBC Symphony, Chorus and Singers)

https://youtu.be/rId95N2teUc

 

Auld Lang Syne Video 7 by Violin

youtu.be/IALSCIyUPXI

 

남북전쟁시 남부군의 국기 (source : Wikipedia)

 

스코틀랜드 국기

 

United Kingdom Flag (source : Encyclopedia Britannica)

 

 

 

그러면 이러한 집시댄스는 어떻게 연유되었을까? 위에서 살펴 본 우리 나라 역사에서의 남사당패, 무희애의 역사를 보면 다소 짐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Romany People은 15-20세기 들어 많은 탄압을 받는다. 그 연유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서의 남사당패의 역사를 알면 짐작이 간다. 

 

조선후기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많은 농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고 그중 일부는 남사당패로 변화한 것이 역사기록에 나타난다.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와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의 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다.

10여 년 전부터 인심이 흐려지고 사설(邪說)이 횡행해도 금하여 바로잡지 못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

거사라는 남자들과 회사(절을 찾아다니며 붙여사는 여인을 방언으로 回寺라 한다)라는 여인들은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며 횡행하여 풍속을 그르치니, 법으로 금해야 합니다.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

조선 후기에는 현격하게 진행된 전제(田制)의 문란, 수취체제(收取體制)의 모순과 부패, 그리고 토지 집중 등의 현상으로 인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유민(流民)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출처] <펌> 사당패|작성자 죽엽

 

이러한 사당패의 현상은 19-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 되었었다.

 

유럽에서도 20세기까지 이들 Romany People에 대한 억압과 탄압이 심했다. 특히 나치 독일과 루마니아에서 탄압이 매우 심했다. 기존 사회체제에 들어 오기를 거절하고 독립된 언어와 생활과 이동의 생활, 그리고 기독교에의 개종 거부,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의 남사당패와 같은 처지의 Romany People의 모습을 본다.  

 

2016년 2월  인도정부의 외무장관은 이들 Romany People을  인도의 children으로 인정하였다.

 

이들 총 2천만에 달하는 Romany People의 세계 각국에 대한 분포는 아래와 같다 . (자료 : Wikipedia)  

 



Total population



2-20 million



United States



1,000,000 estimated with Romani ancestry



Brazil



800,000



Spain



750,000-1,100,000 (1.87%)



Romania



619,007-1,850,000 (8.63%)



Turkey



500,000-2,750,000 (3.78%)



France



350,000-500,000



Bulgaria



325,343-750,000 (10.33%)



Hungary



309,632-870,000 (8.8%)



Argentina



300,000



United Kingdom



225,000 (0.36%)



Russia



205,007-825,000 (0.58%)



Serbia



147,604-600,000 (8.23%)



Italy



120,000-180,000 (0.3%)



Greece



111,000-300,000 (2.7%)



Germany



105,000 (0.13%)



Slovakia



105,738-490,000 (9.02%)



Iran



100,000-110,000



North Macedonia



53,879-197,000 (9.56%)



Sweden



50,000-100,000



Ukraine



47,587-260,000 (0.57%)



Portugal



40,000-52,000 (0.49%)



Austria



40,000-50,000 (0.57%)



Kosovo



36,000 (2%)



Netherlands



32,000-40,000 (0.24%)



Ireland



22,435-37,500 (0.84%)



Poland



17,049-32,500 (0.09%)



Croatia



16,975-35,000 (0.79%)



Mexico



15,850



Moldova



12,778-107,100 (3.01%)



Finland



10,000-12,000 est. (0.17%)



Bosnia and Herzegovina



8,864-58,000 (1.54%)



Colombia



8,000



Albania



8,301-300,000 (4.59%)



Belarus



7,316-47,500 (0.5%)



Latvia



7,193-12,500 (0.56%)



Canada



5,255-80,000



Montenegro



5,251-20,000 (3.7%)


[출처] Romani People|작성자 죽엽 Wikipedia

 

Romany people은 Rom People, Dom People, Lom people의 세부류로 나뉜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Rom people을 Roma라 부르고, Dom people은 Doma라 부르며, Lom people은 Loma라 부른다 한다. 보다 자세한 자료는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Rom means man or husband in the Romani language. It has the variants dom and lom, which are related to the Sanskrit words dam-pati (lord of the house, husband), dama (tosubdue), lom (hair), lomaka (hairy), lomanroman (hairy), romaca (man with beard and long hair). Another possible origin is from Sanskrit ??? doma (member of a low caste of travelling musicians and dancers).

[출처] Romani People|작성자 죽엽 출처 : Wikipedia

 

The standard assumption is that the demonyms of the Romani people, Lom and Dom share the same origin.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

 

The English term Gypsy (or Gipsy) originates from the Middle English gypcian, short for Egipcien. The Spanish term Gitano and French Gitan have similar etymologies. They are ultimately derived from the Greek Αιγ?πτιοι (Aigyptioi), meaning Egyptian, via Latin. This designation owes its existence to the belief, common in the Middle Ages, that the Romani, or some related group (such as the Middle Eastern Dom people), were itinerant Egyptians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

 

Many groups use names apparently derived from the Romani word kalo or calo, meaning "black" or "absorbing all light". This closely resembles words for "black" or "dark" in Indo-Aryan languages (e.g., Sanskrit ??? k?la: "black", "of a dark colour"). Likewise, the name of the Dom or Domba people of North India ? to whom the Roma have genetic,  cultural and linguistic links ? has come to imply "dark-skinned", in some Indian languages.  Hence names such as kale and cale may have originated as an exonym or a euphemism for Roma.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

 

The linguistic evidence has indisputably shown that the roots of the Romani language lie in India: the language has grammatical characteristics of Indian languages and shares with them a large part of the basic lexicon, for example, regarding body parts or daily routines.

More exactly, Romani shares the basic lexicon with Hindi and Punjabi. It shares many phonetic features with Marwari, while its grammar is closest to Bengali.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

 

Possible migration route

They may have emerged from the modern Indian state of Rajasthan, migrating to the northwest (the Punjab regionSindh and Baluchistan of the Indian subcontinent) around 250 BC. Their subsequent westward migration, possibly in waves, is now believed to have occurred beginning in about CE 500.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

 

 

The traditional Romanies place a high value on the extended familyVirginity is essential in unmarried women. Both men and women often marry young; there has been controversy in several countries over the Romani practice of child marriage. Romani law establishes that the man's family must pay a bride price to the bride's parents, but only traditional families still follow this rule.

Once married, the woman joins the husband's family, where her main job is to tend to her husband's and her children's needs, as well as to take care of her in-laws. The power structure in the traditional Romani household has at its top the oldest man or grandfather, and men in general have more authority than women. Women gain respect and authority as they get older. Young wives begin gaining authority once they have children.

[출처] Romani People, Wikipedia|작성자 죽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