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비잔틴제국을 백제라 판단했다. 서로마제국도 일부는 백제로 판단했다. 단 비잔틴제국은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로 판단했다. 통일신라의 세력은 유럽 역사에서 무슬림으로 나타난다. 스페인지역의 무슬림화는 통일 신라가 고구려의 남부인 서고트왕국의 점령으로 판단된다. 위키피디아는 750년경 우마이야왕조가 아바스왕조에게 쫓겨 나서 스페인지역으로 갔다고 했으나, 필자는 이런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다. 망명 일부 세력이 다른 지역을 점령할 힘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약간의 연대 차이도 난다. 우마이야 왕조가 막을 내린 것은 750년경이고, 스페인의 서고트왕국은 8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까지 신라가 점령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고구려도 부흥운동이 있었으니까.
발해고를 보면 압록부가 론강의 우측편으로 판단된다. 즉 발해가 론강의 우측에서 발틱해의 동부를 포함하여 동쪽의 하자르왕국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는 그 남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스페인지역, 이태리반도, 발칸반도, 북아프리카지역, 레반토지역, 페르시아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는 프랑스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보다 세밀한 검토가 있을 것이다.
통일 신라 말기에는 비잔틴제국의 일부를 점하고 역시 백제의 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웅진성으로 판단되는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의 성은 견고한 성으로 유명하다. 이스탄불의 현재 국제공항이름은 Sabiha International Airport이다. 백제의 성왕시 이동 수도였던 사비성을 필자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신라-당나라와의 전투지역을 튀르키예의 여러 지역에서 추정한 바 있다. 아나톨리아의 포석강 (Porsuk River)의 이름이 경애왕의 포석정 연회를 떠올리게 한다. 후백제 견훤에게 당한 경애왕의 죽음이다.
필자는 우연히 유튜브 최준영박사의 지구본연구소의 불가리아 편을 듣다가 Simeon 1세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본 글을 쓰게 되었다.
먼저 후백제의 견훤 (재위 : 892-935)에 대해 알아 보고, 이후 불가리아1제국의 Simeon 1세 (재위 : 893-927)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I. 후백제의 견훤 (재위 : 892-935, 생몰 867-936)
아래 견훤에 관한 자료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경주 서남해안 변방비장으로 출발했다.
2) 경주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호응하였다.
3) 892년 (신라 진성여왕 6년)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칭왕하였다.
4) 어머니 가문은 광주(光州) 호족이었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 이라는 아자개 (출처 : 이비가기(李碑家記))이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5) 북원(北原)의 비장 양길에게 벼슬을 내렸다.
6) 900년 (신라 효공왕 4년) 완산주(完山州)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으로 칭했다.
7) 901년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했으나 함락 시키지 못했다.
8) 910년 (신라 효공왕 14년)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자 분노하여 이들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9)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일길찬 민극을 보내 축하하였다.
10) 920년 (신라 경명왕 4년)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이에 신라 경명왕은 고려에 김율을 파견해 도움을 청했다.
11) 924년(신라 경애왕 1년) 아들 수미강을 보내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했으나 성중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했다.
12) 925년 왕건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보냈다.
13) 925년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죽자 고려의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고려를 공격했다.
14) 견훤의 세력이 날로 세지자 신라는 고려와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했다.
15) 이에 927년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고 고을부(高鬱府)를 습격했다.
16)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웠다.
17)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건도 공산(公山)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18) 928년 강주(康州)를 공격하여 300여 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해 1,000여 인을 참살하였다.
19) 그러나 막강했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 전투에서 8,000여 인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면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20)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해 버렸다.
21)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전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말 300여 필을 노획했다.
22) 934년에는 운주(運州)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23)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아들 10여 인을 두었는데, 그 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냈다.
24) 양검을 강주(康州)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을 시켜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 음모를 꾸몄다.
25) 935년 3월 금강은 죽고 견훤은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 해 6월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26)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식읍으로 양주를 주었다.
27) 그 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신검·양검·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했으나, 얼마 뒤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싸여 지내다가 드디어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28) 정치가로서 견훤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29) 이듬해(926)에는 오월(吳越)과 통했으며,
30)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게 하였다.
31) 또 922년과 929년 2차례에 걸쳐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32)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내용을 주제별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말할 수 있다.
I) 사벌주의 원종과 애노의 난 세력을 흡수한 아자개와 견훤
우선 신라말기의 진성여왕 3년 889년에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농민반란이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역인 상주에서 아자개가 농민이었다가 장군이 되었다 했다.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원종과 애노의 농민 반란 세력은 어떻게 끝이 났는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을 흡수한 세력이 아자개와 후백제의 견훤세력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18]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이야기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에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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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년 결국 사벌주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영기(令奇)에게 군사를 주고 토벌을 명했는데, 영기는 막상 가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하고 정작 중앙군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지역 촌주 우연(祐連)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의 목을 베고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자개가 이곳을 근거지 삼아 거병하는 걸 봐선 언젠가 다른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자멸한 듯 하다. 아무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이상 신라 정부가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증하는 사건이었고, 곧이어 전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난세가 시작된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이 궁예에게 1백여 명의 기병을 맡겨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25]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26]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27]로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600여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893년 견당사 김처회는 당나라에 가던 도중 서해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8]"
(자료 : 진성여왕,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혜공-경순왕 참조)
"889년, 사벌주(沙伐州)의 농민 원종과 애노는 사벌주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은 나마 관등에 있는 장군 영기(令奇)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농민 반란군을 토벌하라고 했지만 영기가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 본진을 보고서 이를 두려워하여 토벌군이 진군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나서서 반란군에 맞서지만 전사했다. 진성여왕은 칙명을 내려서 장군 영기를 참수하였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촌주로 임명했다. 이후에 조정의 토벌군과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이 어떻게 대치하여 원종과 애노의 난이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났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기 어렵지만 만약 추정을 한다면 반란군이 신라 조정의 토벌군에 의해서 원종과 애노가 죽었거나, 후삼국시대가 들어서면서 호족들이 활개치면서 아자개와 양길을 비롯한 호족 세력에 의해서 격파당했거나, 세력 흡수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 나중에 아자개가 이들과 같은 상주에서 호족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자료 : 원종과 애노의 난,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혜공-경순왕 참조)
II) 세금문제로 인한 농민반란과 후삼국의 시대
그리고 농민반란의 원인은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한 결과라고 아래 자료에서 말한다. 즉 후삼국시대의 혼란은 결국 세금문제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가 성립한 후 백여 년 동안 신라는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신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끝없는 왕위쟁탈전으로 점차 지방 농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진성여왕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걷히지 않아서 서라벌의 창고는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자료 : 원종과 애노의 난,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혜공-경순왕 참조)
III) 892-918년기간의 신라와 고려와의 전쟁
- 889년 사벌주(상주) 원종 애노의 반란 (삼국사기 진성여왕 자료)
- 891년 10월 궁예가 북원과 명주 관내를 습격 (")
-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 점령하고 칭왕하였다.
- 894년 10월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
- 895년 8월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
- 896년 신라 서남쪽에 도적이 일어나다 (")
- 898년 7월 궁예가 송악군에 도읍하다 (삼국사기 효공왕 자료)
- 899년 7월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다 (")
- 900년 7월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투항하다 (")
- 견훤이 북원(北原) 비장 양길에게 벼슬을 내렸다.
- 900년 견훤은 완산주(完山州)에 도읍하고 후백제왕으로 칭왕
- 901년 궁예가 왕을 칭하다 (")
- 901년 8월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금성 남쪽 부락을 약탈하다 (")
- 903년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려하다 (")
- 904년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 (")
- 904년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다 (")
- 905년 7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다 (")
- 905년 8월 궁예가 신라를 침략하자 성주에게 수비를 명하다 (")
- 907년 신라 일선군 이남의 성을 견훤에게 빼앗기다 (")
- 909년 6월 왕건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 시키다 (")
- 910년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자 견훤이 포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 911년 1월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하다 (")
- 911년 1월 (신라) 일식이 일어나다. 효공왕의 천첩을 은영이 죽이다.(")
- 912년 4월 (신라) 효공왕이 죽다 (")
- 914년 3월 궁예가 연호를 정개로 고치다 (삼국사기 신덕왕 자료)
- 916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
- 917년 1월 (신라) 태백이 달을 범하다 (")
- 917년 7월 (신라) 신덕왕이 죽다. 경명왕 즉위 (")
- 918년 1월 (신라) 현승이 반역하여 사형을 당하다 (삼국사기 경명왕 자료)
- 918년 6월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이 축하사절을 보냈다.
- 918년 7월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하다 (삼국사기 경명왕 자료)
- 919년 왕건이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기다 (")
IV) 920년-927년 기간 동안의 전쟁 및 외교
- 920년 1월 신라와 고려의 국교 수립 (경명왕 자료)
- 920년 2월 신라 강주 장군 윤원이 고려에 항복 (")
- 920년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함락
- 921년 2월 (발해의) 견권이 말갈족을 물리치다 (")
- 922년 1월 신라 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순식, 진보성 장군 홍술, 고려에 항복 (")
- 922년 견훤이 일본에 사신 파견
- 923년 7월 신라 명지성 장군 성달,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고려에 항복 (")
- 923년 7월 신라가 후당에 조공 (")
- 924년 1월 신라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 (")
- 924년 1월 왕봉규가 후당에 공물을 바치다 (")
- 924년 견훤이 신라의 조물성(曹物城) 공격 그러나 이기지 못함
- 924년 8월 신라 경명왕 죽다 (")
- 924년 9월 신라 경애왕이 고려 왕건에게 사신 파견 (")
- 925년 견훤이 왕건과 화친하고 상호 인질 교환
- 925년 견훤이 후당으로부터 백제왕 칭호 받음
- 925년 10월 왕건이 투항한 능문 (신라)을 돌려 보내다 (")
- 926년 견훤이 오월(吳越)과 교류
- 926년 4월 후백제 인질 진호 죽자 견훤은 고려 인질(왕신) 죽이고 고려 공격
- 927년 발해 멸망시킨 거란 사신 35인 당도 및 교류, 이후 배웅 중 태풍으로 후당 등주에 도달하여 죽임 당함
- 927년 1월 고려 왕건과 신라의 연합군- 대야성(大耶城) 회복
- 927년 3월 왕건이 근암성을 깨뜨리다 (")
- 927년 4월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
- 927년 4월, 신라 강주(康州) 관할하 4개향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 (삼국사기 경애왕 기록)
- 927년 9월 견훤의 신라지역 근품성 함락, 경주 옆 고을부 습격
- 927년 9월 경주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 자결케하고 경순왕(김부) 세움
- 927년 소식을 듣고 고려 왕건이 달려왔으나 공산(公山)싸움에서 왕건 패배 - 후백제의 전성기
- 927년 12월 견훤이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태우다 (경순왕 자료)
V) 928년-935년 시기의 후백제
- 928년 1월 김상이 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
- 928년 5월 (신라)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
- 928년 견훤의 강주(康州) 공격, 부곡성(缶谷城) 공격
- 928년 秋八月 견훤이 왕충에게 쫓겨나다 (")
- 928년 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
- 928년 冬十月 견훤이 무곡성(부곡성?)을 함락시키다 (")
- 929년 견훤이 일본에 사신 파견
- 929년 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
- 929년 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
- 929년 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
- 929년 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
- 930년 春一月 (신라의)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
- 930년 1월 왕건이 견훤과의 고창군(古昌郡) 전투에 크게 승리 - 이후 후백제 열세 (")
- 930년 春二月 경순왕이 왕건에게 만나기를 청하다 (")
- 930년 秋九月 (신라)동쪽 바닷가의 주군(州郡)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다(")
- 931년 春二月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찾아가다 (")
- 931년 秋八月 왕건이 경순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
- 932년 견훤 충신 공직이 고려에 투항
- 932년 후백제군이 예성강(禮成江) 어구 침입 - 전함 100여척 불태우고 말 300여필 노획
- 934년 9월 견훤이 운주 (運州) 공격했으나 대패
- 934년 9월 운주내의 30여 군현이 왕건에 항복하다 (")
-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武州)도독, 장남 신검은 견훤 자신 옆에 둠. 견훤은 4남 금강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고려함
- 935년 3월 장자 신검은 양검, 용검과 짜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함. 4남 금강 살해됨
- 935년 6월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 왕건에 의탁, 양주를 식읍으로 받음
- 이후 후백제 내분으로 왕건에게 멸망, 신검, 양검, 용검 살해됨
- 935년 견훤은 연산(連山) 불사에서 창질로 죽음
- 944년 冬十月 신라 항복을 반대하던 왕자 (마의태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
- 944년 冬十一月 고려 왕건이 경순왕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 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다 → 신라의 멸망 (")
- 944년 冬十二月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삼다 (")
- 975년 고려 4대 경종은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왕비로 삼다 (")
- 978년 (고려 경종 4년) 경순왕이 죽다. (")
II. 불가리아제국 Simeon I (재위 : 893-927)
I) 893-927 기간동안의 Simeon I 영역
- 불가리아 1제국을 893-927년기간동안 통치했다.
- 비잔틴제국, 마자르족, 세르비아에 대한 성공적인 military campaign으로 불가리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면서, 당시 동유럽 및 동남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 Simeon I때에 불가리아는 에게해, 아드리아해, 흑해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확장된 영토를 가졌다.
Bulgaria - Byzantine Empire at 890 (source : Wikipedia)
Simeon I 때의 Bulgaria (source : Wikipedia)
II) 세금 문제로 발발한 895년 Simeon I과 비잔틴제국의 전쟁
- 불가리아 지역 Simeon I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은 895년 전쟁으로 시작한다.
- 전쟁발발 원인은 불가리아 상인들의 시장거래소를 비잔틴제국 왕인 Leo VI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카로 옮긴다. 그런데 테살로니카에서는 불가리아 상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고 한다. 이에 불가리아인들은 Simeon에게 해결을 요구했고, Simeon은 Leo VI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Leo VI는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III) 895년 마자르족과 비잔틴 연합에 의한 Simeon I 공격 성공
- 비잔틴은 아랍에 대한 대응 병력때문에 (?), 마자르족이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마자르족이 다뉴브강을 건너도록 비잔틴 수군이 도와 준다 약속. 당시 마자르는 훅해 위 지역 거주. 상기 첫째 지도(890년) 참조)
- 또한 프랑크가 마자르족과 싸우는 Simeon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얻어 냈다.
- 895년 남부 이태리에 있는 Nikeporos Phokas 장수를 불러 불가리아에 대항하는 별동대를 지휘하게 했다.
- Simeon은 Phokas군을 대적하러 쳐들어갔다. 그러나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비잔틴이 강화를 제의했다 한다. (약간 의문이 드는 설명이다). 마자르족 공격계획은 Phokas에게는 비밀로 했다 한다. (이 설명도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 Simeon은 Envoy를 믿지 않고 감옥에 가두고 비잔틴수군이 다뉴브강으로 가는 길을 로프와 체인으로 막았다. (Phokas와 협상이 될 때까지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은 마자르군이 Galati부근(흑해 근처)에서 다뉴브강을 건너게 하였고, 마자르군은 불가리아지역을 유린했다.
- 갑작스러운 침범소식을 듣고 시메온은 마자르족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일부군은 Phokas군에 대비하여 남쪽 국경에 남겨 놓았다.
- 시메온은 북쪽 Dobruja(흑해연안)의 두번의 전투에서 마자르군에게 패하여 Drastar (Dobruja 왼쪽)로 물러 났다.
- 마자르군은 불가리아 많은 지역을 유린하고 Preslav까지 도착한 후 그들의 땅(흑해 위 지역)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이는 시메온이 895년 여름에 비잔틴과 휴전협정을 결정 짓기 전이었다.
- Leo VI가 비잔틴 전쟁포로를 풀어 달라 요구했기 때문에 완전한 평화협상은 지연되었다.
Location of Preslav in Bulgaria (source : Wikipedia)
IV) 896년 시메온과 Pechenegs 연합군의 마자르족에 대한 반격
- 시메온은 마자르군을 응징하기 위해 마자르 동쪽이웃인 Pechenegs와 연합군을 형성하기 위해 협상했다
- 마자르족에 대한 정벌이 끝날 때까지 비잔틴 포로들을 폴어 주는 것을 지연 시키기 위해, 비잔틴 협상사절인 Leo Choirsphaktes를 감옥에 억류했다. 이것은 강화조건이 유리하게 재협상하게 했다.
- Siemon은 포로석방을 거절하고 Leo VI의 점성술 능력을 희화화했다.
- 896년 이웃 슬라브땅을 침범한 마자르를 전쟁선포로 간주, 시메온은 Pechenegs 동맹군과 함께 마자르를 공격하여 Southern Buh 전투에서 이들을 완전히 격파하여, 마자르족이 Etelkoz (드니에스터강, Prut강, Siret강, 드네프로강 유역) 을 떠나 Pannonia에 정착하게 했다.
Location of Southern Buh (Bug River) in Ukraine (source : Wikipedia)
Map of Pechenegs in 1030 (source : Wikipedia)
The Pontic Steppes in 1015 (source : Wikipedia)
상기 지도를 보면 당시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불가리아제국은 남부의 비잔틴제국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기 두번째 지도에서 비잔틴제국은 좀 더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자르족은 항가리지역으로 후퇴한 상태의 지도(1015년)를 보여준다. 그 전에는 흑해 북쪽지역에 있었으나, 896년 불가리아와 Pechenegs와의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마자르족은 파노니아지역(상기 지도의 항가리,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항가리나 크로아티아라는 나라가 없었으므로 단지 지역을 나타내는 의미만 가지고 있다.)
V) 896-904년 기간 Simeon의 Byzantium 공격
- 모든 포로가 풀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며, Simeon은 896년 여름 Constantinople로 직접 공격했다.
- Simeon은 트라키아에서 급조된 비잔틴 군사를 조우했으나, Battle of Bulgarophygon (현대의 Babaesk, 이스탄불 서쪽)에서 비잔틴군을 전멸시켰다.
- 절망적인 비잔틴 Leo VI는 아랍포로들을 무장시켜 싸우게 하여, Constantinople을 포위한 불가리아군을 겨우 물리쳤다.
- 전쟁은 끝나고 강화조약이 맺어져 Leo VI가 죽는 912년까지 평화는 계속되었다.
- 강화조약으로 비잔틴은 불가리아에게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다.
- 또한 흑해에서 Strandza까지의 지역을 불가리아에게 양도
- 한편 Simeon은 Serbia의 Peter Gojnikvic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다.
- Simeon은 비잔티움과의 강화조약을 자주 위반하고 여러 차례 비잔틴 영역을 공격하고 정복했다.
- 예를 들어, 904년 불가리아는 Tripoli의 Leo (비잔틴 변절자)에 의해 주도된 아랍군을 이용하여, 수군으로 공격하여 Thessaloniki를 점령했다.
- Simeon이 도시를 점령하고 슬라브인으로 채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Leo VI는 현재의 마케도니아지역에서 불가리아에게 보다 많은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 904년 조약으로 현대의 마케도니아 남부와 알바니아 남부의 슬라브인 거주 모든 땅 (Thessaloniki 북쪽 20km에 달하는 경계로 하여)을 불가리아 제국에 할양했다.
VI) 황제로서의 인정
- 913년 여름 Simeon 사절은 896년 강화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Constantinople 도착
- 어린 왕 Constantine VII 숙부 Alexander는 매년 공물 제공 거절 -> Simeon의 전쟁 준비
- 913년 6월 비잔틴은 Alexander 사망 및 regency council 지도체제 (Patriarch Nicholas Mystikos) (Simeon 공격전)
- Constantinople 주민은 어린왕 대신 남부 이태리의 반란자 Constantine Doukas 지지
- 비잔틴은 남부 이태리의 봉기와 동부 아나톨리아에서의 아랍침입으로 혼란한 상황
- Nicholas Mystikos는 여러 번의 편지로 Simeon 침입저지 노력
- 913년 8월 Simeon의 Constantinople 총공격
- Constantine Doukas 살해후 Constantinople 무정부 상태종료
- Patriach Nicholas 임시 정부 형성
- Simeon은 Constantinople 포위 풀고 평화 협상 개시
- 협상 조건 : 지체된 공물 지급, Constantine VII와 Simeon 딸들과 결혼, Simeon을 불가리아 왕으로 공식인정 (Patriach Nicholas에 의해 Blachernae Palace에서)
- Constantine VII 어머니 Zoe의 궁 복귀 및 regents 폐지
- 914년 2월 Patriach Nicholas 제거 및 Zoe 권력 복귀
- 결혼 협상 조건 거절 및 시메온의 황제 인정 모호하게함
- Simeon의 전쟁 개시 - 914년 여름 트라키아 침범 및 Adrianople 점령
- Zoe는 선물공세로 화해 및 Adrianople 반환 설득 시도
- Simeon은 Constantinople 진격 안하고 비잔틴 북서쪽 Durres, Thessaloniki 지역에 관심 표명
VII) Archeloos 와 Katasyrtai에서의 승리
- 917년까지 시메온은 비잔틴과의 전쟁 준비
- Pechnegs와 반비잔틴 연합 결성 시도
- 비잔틴제국의 Pechnegs재정지원으로 연합 결성 실패
- 비잔틴은 세르비아 왕자를 설득해 마자르지원과 함께 불가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 준비
- 917년 비잔틴의 강한 육군은 불가리아 흑해 항구에 도착한 비잔틴 수군과 함께 불가리아 침입
- 비잔틴 Phokas군은 수군에 의해 합류될 지원군 기다리느라 Acheloos 강가에서 휴식중
- Simeon왕은 침입소식을 듣고 비잔틴군을 중간에 가로막기 위해 휴식중인 비잔틴군을 급습
- 917년 8월 20일, 중세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중의 하나인 Acheloos전투에서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틴군을 완전 섬멸하고 많은 지휘자들을 죽였다. Phokas는 Mesenbra로 도주
- 계획된 북쪽으로부터의 Pechenegs 공격도 실패. Lekapenos 제독이 Pechenegs군이 다뉴브강을 건너게 수송하는 것을 거절
- 비잔틴군은 세르비아와 마자르의 도움도 없었다.
- 마자르는 프랑크와의 동맹으로 서유럽에 묶여 있었고, 세르비아 왕자는, 불가리아 동맹인 Michael of Zahumlje가 Simoen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렸으므로, 불가리아 공격에 주저함
- Simeon은 Acheloos전투 승리후 콘스탄티노플로 퇴각하는 비잔틴군을 추격
- 콘스탄티노플에 아주 가까운 Katasyrtai 마을에서 Leo Phokas 가 이끄는 비잔틴군과 조우
- 불가리아군은 비잔틴군을 다시 패배시키고 그들의 마지막 unit까지 파괴하고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Battle of Archeloos in 917 (source : Wikipedia)
VIII) 세르비아 불안정 진압과 비잔틴에 대한 마지막 공격
- 비잔틴과의 동맹으로 시메온을 배반한 세르비아를 징벌하고자, 두 장군이 지휘한 군을 세르비아에 보냄
- 불가리아 두 장군은 세르비아 ruler Peter와 개인미팅을 만들어 그를 결박하여 불가리아로 압송. 그는 Dungeon에서 사망
- 시메온은 불가리아에 망명했던 Pavle Branovic을 세르비아 왕으로 삼아 세르비아에 대한 영향력 회복
- 반면 비잔틴군의 패배는 비잔틴정부의 변화를 초래
- 919년 Romanos 제독이 어린 왕 Constantine VII의 regent가 되고 어린 왕의 모친 Zoe를 수녀원으로 다시 보냄
- Romanos는 그의 딸 Helena를 Constantine VII에게 약혼시키고 920년 겨울 co-emperor 지위에 올라 실질적 권력을 행사
- 외교적 수단으로 비잔틴왕관에 오를 수 없음을 안 시메온은 다시 전쟁을 준비
- 920-922 사이 불가리아는 비잔티움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해, 서쪽으로는 Thessaly를 거쳐 Isthmus of Corinth까지 이르고, 동쪽에서는 트라키아에서 Dardanelles를 건너 Lampsacus타운을 포위했다.
- 921년 시메온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 앞에까지 이르러 Romanos의 퇴위를 요구하고 Adrianople을 점령
- 922년에는 Pigae에서 승리하고 많은 Golden Horn을 불태웠으며, Byzye(Vize)를 함락했다.
Location of Dardanelles in Byzantine (present Turkey)
Location of Vize in Byzantine (present Turkey)
Location of Lampsacus
Thessaly in Byzantine (Greece)
Isthmus of Corinth (source : Wikipedia)
-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에 목마른 시메온왕은 924년 대공격을 계획하고, Fatimid 칼리프에 사절을 보내 수군의 지원을 요청
- 칼리프는 동의하고 자신의 대사와 불가리아 사절단과 함께 보냈으나 그들이 Calabria에서 비잔틴군에 잡힘
- Romanos는 칼리프에 많은 선물을 주며 평화를 제안하여, 칼리프와 시메온의 연합은 실패
Fatimid Caliphate 영역 (source : Wikipedia)
- 비잔틴은 세르비아 Zaharije가 시메온에 대항하여 봉기하라고 부추김
- Zaharije는 시메온의 끝없는 전쟁에 지친 많은 불가리아인들의 지지 얻음
-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은 두 장수와 군대를 세르비아에 보냈으나 참패하고 두 장수는 참수됨
- 시메온은 세르비아 봉기를 진압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비잔틴과 강화조약 맺게 함
- 924년 시메온은 세르비아의 Zaharije를 퇴위 시키기 위해 군대를 보내니, Zaharije는 크로아티아로 도주
- 이후 세르비아 귀족들을 불가리아로 초청하여 새로운 왕자에게 경배하라고 모은 후 모두 참수함
-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속국이 됨
- 924년 여름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Patriach와 황제를 만나고자 함
- 924년 9월 9일 Golden Horn에서 Romanos와 강화조약 맺음
- 이 강화조약으로 비잔틴은 매년 불가리아에 세금을 납부하고, 흑해 해안의 몇몇 도시들을 비잔틴에 돌려 줌
- 비잔틴은 비로소 시메온을 황제로 인정
IX) 크로아티아 전쟁과 죽음
- 925년 Patriarch Nicholas 죽음 직후 시메온은 926년 비잔틴의 동맹인 크로아티아를 침략
- 그러나 Bosnian Highlands에서 Tomislav왕의 군대에게 완전히 패퇴했다. 불가리아 복수를 두려워한 Tomislav는 비잔틴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현단계에서 평화에 동의 (약간 의심스러운 설명)
- 시메온은 그의 생애 마지막 달에 Romanos가 평화를 애절하게 구함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과 또 다른 대결을 준비
- 927년 5월 27일 시메온은 Preslav 궁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의심스러운 설명)
- 그의 아들 Peter I이 계승
- 927년 10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Romanos의 손녀 Maria (Eirene)와 Peter가 결혼함으로서 기존의 국경은 확인됨
- 불가리아 통치자의 황제권위와 불가리아 교회의 Patriarchal status의 수장으로 인정됨
- 훗날 H.H. Howorth는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 만약 그가 살았다면 또는 동일한 호전적 성격의 아들들이 계승되었다면, 아마도 아드리아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Turk에 장막이 되는, 거대한 슬라브국가가 다뉴브강 남부에 형성되었으리라."
III. 후백제 견훤과 불가리아 시메온과의 비교 검토
I) 세금 문제로 인한 민란의 가능성
진성여왕시 신라는 국고가 바닥나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니 농민반란,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 났고, 결국 이후 후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불가리아와 비잔틴제국의 전쟁도 비잔틴제국내 상인에 대한 더 높은 세금부과로 일어난다. 즉 세금문제로 일어난 같은 국가내 민란의 발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한국사에서는 이를 농민반란에서 시작된 internal civil war로 기록되는 것이고, 서양사에서는 비잔틴과 불가리아는 이를 별도의 국가로 분류한 역사기록이 다른 점이다.
II) 마자르족과 Pechenegs과 한국사의 발해와 고려 연관성
비잔틴제국과 불가리아는 마자르족과 Pechenegs와 연합을 서로 경쟁하며 전쟁을 했다. 이는 후백제인 견훤이 발해, 고려(후고구려)세력인 흑수국, 보로국, 흑양을 수도로한 궁예, 양길, 패서세력인 송악을 도읍으로 한 왕건의 고려와 연관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잔틴제국을 통일 신라 말기로 보고, 불가리아 지역을 견훤의 후백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Pechenegs는 양길, 궁예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백제 견훤이 양길, 궁예와 연합한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견훤이 양길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연합의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불가리아와 Pechenegs의 연합군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후에도 견훤은 왕건과 인질을 서로 주고 받으며, 교류를 했다. 견훤이 말기에는 왕건에게 몸을 의탁했다. 따라서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서로 견제하지만 동시에 교류도 하고 있었다 판단된다.
그럼 895년 불가리아를 공격하고 비잔틴제국과 연합한 마자르족은 무엇인가? 당시 마자르족은 흑해 북쪽에 있다가 불가리아와 Pechenegs의 연합공격에 의해 파노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마자르족은 필자는 말갈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럼 이들은 한국사 당시 상황에서 누구일까?
이러한 마자르족에 대한 첫째 가능성은 고구려 세력이었던 말갈과 신라가 연합한다는 것은 신라에 병합된 고구려계통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즉 신라가 흑해위 크림반도지역까지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잔틴제국의 영역이 크림반도에 있었다. 신라가 패강진의 영역을 확보한 것을 당나라가 인정했다고 했다. 패강진은 조개패자이다. 조개가 많은 드네프로강과 흑해에 접해 있는 수군기지로 판단된다. 921년 2월, 견훤은 말갈족을 물리쳤다고 삼국사기 기록에 있다. 한국사를 한반도에 상정하는 역사관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록이다.
두번째 가능성은 마자르족은 발해의 세력일 수 있다. 당시 발해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이 주 세력이었다. 따라서 895년 당시에 발해는 아직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영역이 신라의 북부에 위치하고 다뉴브강 위쪽에서 흑해북쪽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자료를 보니 이 당시 훅수말갈(흑수국,黑水國)과 보로국(寶露國)은 거의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 있었고 친 신라세력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흑수말갈이 흑해위에 있던 말갈족으로 보인다. 즉 흑수국은 흑해 위에 있는 Kara Bulgars가 아닌가 한다. 보로국(寶露國)은 노서아(露西亞 =러시아)의 노자가 들어가므로 흑수국의 왼쪽에 있는 Rus 지역일 수 있다고 본다.
" (대위해 왕의) 882년 즉위설을 따를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 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인(狄國人)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
는 15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이북 지역에 살던 여진 계통 부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이 독립 국가인 것처럼 신라에 외교를 시도하는 것을 볼 때, 발해가 멸망하기 40여 년 전인 9세기 후반, 대위해 재위 기간쯤 되면 발해가 신라와 인접했던 ...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은 고려에도 저항하고 살다가 조선에 완전히 흡수당한다.
대위해 즉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 상태인 것이 확인되는 만큼 기존 왕실에 비해 왕위의 정통성이 떨어지는 인사가 아니었는가 추정된다. 이미 대위해 시대에, 신라의 후삼국시대처럼 지방 세력들이 독립해서 찢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위의 흑수국과 보로국의 귀부 건과 더불어 평양 성주 금용이 대위해 시기(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신라로 귀부한 것이 대표적이며 최소한 남경남해부 인근과 남부 국경지대가 발해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것을 추정할 수 있고[3] 이 지역은 926년 여름에 거란에 완전히 항복한다.
(자료 : 대위해 (발해 국왕)(재위 : 882/894-906),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그런데 발해는 926년에 요나라에 의해 망한다. 즉 당시 896년 발해 세력인 마자르족이 흑해연안에서 파노니아로 밀린 것은 후백제인 불가리아와 Pechenegs세력의 연합공격에 의한 것이다. 마자르족이 비잔틴과 연합한 전쟁에서, 불가리아 공격후 자기들 지역으로 돌아 갔다는 것은 독립된 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시적으로 연합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마자르족은 친 신라였던 발해의 일부, 흑수국, 즉 Kara Khagnate (Kara는 검다는 뜻의 우리 고대어) 세력이 아닌가 한다.
Kara Bulgar in 850 AD (source : Wikimedia commons)
여기서 Pechenegs세력이 양길의 세력인지 또 다른 세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아래에서 언급되듯이 궁예의 거점이 이 지역일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후삼국시대 상황에서 후고구려의 주축세력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후 궁예나 왕건이 점했던 지역, 즉 철원, 당시 지명으로 흑양 (黑壤)이 이 지역 아닌가 한다. 부드러운 검은 흙이란 지명의 흑양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흑토, 기름진 땅 '라스푸티차 (Rasputitsa)' 지명으로 판단된다. 즉 상기 지도의 Pechenegs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Pechenegs지역이 후고구려, 태봉의 지역이고 이 지역까지 신라의 지역이거나 발해의 지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철원, 즉 흑양이 접한 한탄강이 드네프르강이 아닌가 하는 글을 올렸었다. 당시는 큰 여울이 많다는 의미의 한탄강의 이름과 드네프르강이 여울이 많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러한 추정을 했는데, 이제 점점 더 확실한 상황이 되고 있다.
또한 패강도, 패서지역의 송악의 왕건세력, 이를 피해 패서동쪽으로 흑양(철원)으로 수도를 이전한 궁예 등을 고려하면, 패강은 드네프로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패강진 확보는 크리미아반도와 드네프로강에 접한 수군기지의 확보라 할 수 있다. 당시 비잔틴제국도 크림반도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패서지역의 송악은 드네프로강 서쪽에 있는 도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후고구려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별도의 글로 미루고자 한다.
III) 강주의 위치 추정
927년 신라 관할하 강주의 4개향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했다 한다. 그리고 928년 견훤은 강주를 공격하였다 했다. 강주의 康자는 지역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료된다. 강국(康國), 강거국(康居國), 강왕(康王) (장수왕을 북위의 효문제가 강왕으로 추도함, 장수왕시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왕국을 점령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 은나라가 제물로 많이 이용해서 반발을 많이 샀다는 강족(康族), 그리고 중국사 하나라 역사에서 많이 나오는 중강왕(中康王), 소강왕(小康王), 등의 이름을 보건데 그렇다.
1) 중공사가들 주장에 의한 중앙아시아 가능성
그런데 이 강주지역을 중공 사가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주장한다. (아래 지도 참조) 즉 현재의 중공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해서 강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 유전자 검사에서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동아시아가 아닌 쿠샨제국의 지역사람으로 나타난다. 즉 중공 사가들의 주장이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또한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후백제, 통일 신라에서 언급되는 강주의 위치가 중앙아시아라고 하는 셈이 된다. 즉 그들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후백제가, 신라가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로 그 먼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필자는 강주가 이베리아반도로 짐작했는데, 중앙아시아 가능성도 검토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강주가 중앙아시아라면,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본 필자로서는 그리고 통일 신라가 결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디니아 지역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Pechenegs중에서 3부족이 Kangar (강가?)로 불리며, 중앙아시아에서 존재했다는 아래 기록을 보면 이 지역이 강주로 될 수 있다고 본다.
"The Pechenegs, three of whose tribes were known as Kangar (Greek: Καγγαρ), after being defeated by the Oghuzes, Karluks, and Kimek-Kypchaks, attacked the Bulgars and established the Pecheneg state in Eastern Europe (840–990 CE). " (source : Kangar Union, Wikipedia)
Kangju(강주) area in 200 AD
Kangju area in Central Asia insisted by Chinese historians
Kangar Union (659-750) in Central Asia (source : Wikipedia)
상기 Kangar Union 지역 왼쪽에 Khazar Kaganate (660-1050)이 있고 또한 Bulgaria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Volga Bulagria일 것이다. 즉 불가리아가 아래 불가리아 제국에서 보듯이 후백제라고 판단되는데, 발칸반도의 불가리아 뿐 아니라, 후백제 세력이 제일 전성기인 927년에 강주를 공격한 것을 보면, 이 강주가 Volga Bulgaria 옆에 있는 Kangar Union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후백제가 전성기에, 필자가 백제 지역으로 추정하는 발칸반도 뿐만 아니라 발해, 후고구려지역으로 필자가 추정하는 볼가강 유역까지 진출했었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2) 강주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을 가능성
후백제의 견훤은 외교의 폭이 넓다. 후당, 발해를 멸망 시킨 거란, 일본, 후고구려, 흑수국, 보로국 등과 교류했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시메온 I 왕도 서쪽의 프랑크왕국 (필자는 거란 또는 후당이라고 판단), 흑해 위의 마자르 및 Pechenegs, Khazar Kaganate, Rus Khaganate 등과 가까이 있어 이들과 교류할 가능성이 있다. 이당시 비잔틴제국을 통일신라로 보는 필자는 당시 이베리아반도, 남부 이태리 등이 신라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도 고려, 후백제, 신라의 경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불가리아는 이태리 남부에서 온 비잔틴군과도 싸웠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필자는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판단하는데, 신라 말기에는 신라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혼란한 사회에서 해적화된 신라인들이 신라구가 되어 지중해에서 활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가리아 시메온은 북아프리카의 Fatimide Caliphate와 연합을 추진했다. 그들의 강한 수군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비록 비잔틴제국의 견제로 실패했지만 말이다. 후백제의 견훤도 예성강 어구 싸움에서 전함 100척을 쳐부수고 말 300필 이상을 노획했다고 했다. 즉 해전을 했다는 것이다. 예성강이 어디인지 지금은 모르겠으나, 후백제가 수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주 싸움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우마이야왕조 (Umayyards of Cordova (756-1031))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11세기까지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필자는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으로 건너간 것은 거기에 있는 고구려인 서고트왕국을 정벌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따라서 당시 통일신라의 영역이었던 이곳에 수군이 와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강주 중 4개향이 고려에 귀부했다 하였다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 났을 수 있는 것이다. 후백제는 후당과 교류하며 백제왕이란 호칭을 받았다 했는데, 당이 있던 자리에 있었을 후당은 프랑크왕국 일부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남쪽인 이베리아 반도에 후백제가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후백제는 오월과도 교류했다 했다. 필자는 오월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오나라)나 북아프리카 지역(월나라, 월지국으로 필자는 추정)으로 판단한다. 실제 불가리아 시메온 왕도 북아프리카의 Fatimid Caliphate (상기 지도 참조)와 연합하려 했다.
IV) 경주, 대야성과 콘스탄티노플
후백제 견훤과 신라, 고려의 치열한 싸움터는 대야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경주에 가까운 곳으로 짐작된다. 불가리아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에서는 치열한 전쟁의 목표가 Constantinople 함락이었다.
필자는 터어키의 포석강이 가까이 있는 수도 앙카라가 혹시 포석정이 있는 경애왕이 자결한 곳, 즉 경주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불가리아와 비잔티움의 전쟁사를 보면 콘스탄티노플이 신라의 수도 경주로 판단하게 한다. 유럽의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산정하고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비잔틴제국도 동로마의 계속이라고 주장한다. 즉 로마제국을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비잔틴제국은 백제가 망한 후 백제지역을 흡수한 통일신라라 판단한다. 비잔틴제국이 7세기에 왕국(Dynasty)이 바뀌는 그런 뉴앙스도 서구학자도 내비치고 있다. 이는 추후 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기에 후일로 미룬다.
V)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아바스왕조 페르시아의 흥망성쇠 시기와 통일신라, 후백제의 흥망시기의 유사성
비잔틴제국과 통일 신라의 흥망성쇠의 시기가 묘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제국과 후백제의 흥망성쇠, 즉 927년이 최전성기로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신라로 판단되는 우마이야 왕조를 이은 페르시아의 아바스왕조도 필자는 신라의 영역이라고 추정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하지 못했다. 단편적으로 신라의 민란시기에 아바스왕조도 반란의 시기이다. 그러나 아바스왕조는 주로 칼리프 위주의 종교 역사 기록뿐이라서 구체적인 비교가 불가능하다. 튀르크 군사계급의 반란을 많이 언급하는데, 고개가 가우뚱하게 하는 기록들이다. 넓은 영토를 영위하면서도 대외적인 전쟁 역사가 전무하다. 서구 역사가들은 중공과 아랍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흑해위의 마자르, Pechenegs등의 역사를 더 연구하고, 그 동쪽의 중앙아시아 역사를 더 살펴 보면 , 후고구려, 고려의 역사를 더 알 수 있고, 아바스왕조의 페르시아에 대한 연구도 더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VI) 흑수말갈 (흑수국)과 신라의 연합과 Magyar와 Byzantium의 연합
앞에서 비잔틴은 불가리아에 대항해 Magyar와 연합한 기록을 보았다. 그런데 마자르족은 당시에 흑해 위에 있었다 (Kara Bulgars). 즉 흑수말갈이다. 흑수말갈은 흑수국으로 보인다. 그런데 흑수국이 발해의 통제를 벗어나 거의 자립국의 위치를 누리며, 친 신라가 되었다고 발해왕사에 기록된다. 필자도 이번 비잔틴역사를 보고 혹시나 하고 찾아 보았는데, 발해사에서 똑같이 나타난다. 필자도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후 흑해 동쪽지역에서 흑해위로 진출한 Pechenegs도, 초기에는 불가리아 제국과 연합하여 마자르족을 흑해위에서 파노니아지역, 지금의 항가리지역으로 몰아냈는데, 후에는 Pechenegs가 비잔틴과 연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후기의 Pechenegs가 비잔틴과 연합하는 모습은 신라의 고려와 연합과 같은 양상이다. 즉 우리 역사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VII) 패강, 한탄강, 철원(흑양)과 드네프로강과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흑토지대
필자는 한탄강이 드네프로강이 아닌가 하는 글을 이미 썼다. 즉 큰 여울이 많은 뜻의 한탄강과 실제 큰 여울이 많은 드네프로강을 비교하면서 얻은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런데 궁예가 도읍한 철원의 옛이름이 흑양(黑壤), 즉 부드러운 검은 흙이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걸쳐 있는 흑토지대(라스푸티차)와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들어 맞는다. 그리고 패강은 조개가 많은 강이라는 뜻이다. 드네프로강이 그렇다. 신라가 이 지역에 패강진을 확보했는데, 비잔틴제국이 크림반도 이 지역에 군사기지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왕건은 패서지역의 호족이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한 궁예가 동쪽인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다 한다. 패서지역에 있는 송악은 그래서 드네프로강 서쪽에 있는 도시일 지 모른다. 역사적인 도시는 키예프이다. 앞으로 이 지역의 역사와 후고구려, 고려의 역사와 비교하는 연구가 뒤따를 것인 바, 그때에 더 확실히 밝혀질 것이다.
VIII) 신라가 고려와 국교를 맺는 해(920)에서 신라가 망하는 해 (944)까지 비잔틴 왕을 지낸 Romanos I (재위 : 919/920 - 944)
신라가 경명왕시절 고려와 국교를 맺는 해, 즉 고려를 국가로 인정하는 해인 920년부터 신라가 고려에 망하는 해, 944년까지 비잔틴제국은 Romanos I이 왕이 재위한 것으로 기록된다. 즉 통일신라의 후삼국시대에서 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기간이다. 이후의 비잔틴제국 역사는 고려 역사에 흡수될 것이다. 서양역사에서는 비잔틴제국이 점점 쇠약해지지만, 1453년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고려말을 넘어선 기간이다. 즉 고려의 일부 역사로서 남았을 것이다. 고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하고 식읍으로 경순왕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신라가 망한 후 경주로 남은 지역이 비잔틴제국의 계속된 역사인지도 모른다. 즉 비잔틴제국의 앞뒤 역사가 우리 역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의 기간동안 재위한 비잔틴제국의 Romanos I 에 대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본 글에서는 불가리아 시메온왕의 역사에서 나타난 단편적인 모습을 살펴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참고로 끝부분에 Romanos I에 대한 영문자료를 첨부한다.
IX) 맺는 말
본 연구는 후백제의 견훤과 불가리아의 시메온왕과의 단순비교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후삼국시대의 신라, 고려, 태봉, 후백제, 발해, 후당 등의 상황과 마자르족, 비잔틴제국, 불가리아제국, 프랑크왕국, Pechenegs, Khazar khagnate, Kara Bulgar, Volga Bulgar, 중앙아시아 Oghur Khagnate 등 많은 관련국 역사 연구가 관계된 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직 그단계에 이르지 못한 필자의 연구로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닌 과제였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시메온왕의 역사가 후백제의 견훤의 역사와 유사한 면을 발견한 것은 매우 큰 성과이다. 그동안의 역사 연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백제는 발칸반도,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역사, 신라가 삼국통일 후에는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백제지역을 통합하여 비잔틴제국이 계속되는 것, 그리고 남부 이태리의 신라지역 가능성, 오월(904-978)의 남부 이베리아 반도 가능성, 그리고 발해, 고려는 고구려의 영토를 이어 받는 프랑스 론강 (=압록강, 요수) 동쪽지역, 당과 후당(923-936, 수도 낙양)의 프랑크왕국 지역 추정, 거란이 프랑스 론강 주위의 Alemmania로 추정, 등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동안 시기적으로 순차적으로 내려 오던 역사 연구를, 시기적으로 뛰어 넘어 도전해 봄으로써, 기존의 연구에 대한 검증차원의 의미도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 이러한 식의 연구를 서너가지 주제에 대해 해보고 다시 시기적으로 순차적으로 연구를 하는 것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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