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고조선

스키타인 역사(1) - Early Scythian (BC 12 c - BC 500)

Chung Park 2024. 5. 10. 01:26

III. 키타이 역사

 

지난 글 "사카에 대한 고찰"에 이어 스키타인에 대한 연구를 함에 있어서,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스키타이가 유럽의 어느 지역까지 진출했느냐이다. 이는 12환국이 단군조선이 서유럽에 있었는지를 판가름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색족이라 불리는 사카, 스키타이의 활동 영역은 12환국이나 단군조선의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색족으로 추정되는 흉노의 조상, '색정',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경에 단군조선을 이어 받은 '색불루'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https://lostcorea.tistory.com/1879

 

사카(Sakas)에 대한 고찰

I. 머리말 필자는 최근에 고대 사카인과 스키타이인, 그리고 튀르크인에 대해 한창 자료를 보고 있다. 이들이 뭔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전부터 Old Turk말로 무엇을 말할 때

lostcorea.tistory.com

 

 

스키타이 역사에 대한 자료는 인접국 앗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의 기록과 봉분의 고고학적 연구 자료로 구성된다. 

Because the Scythians did not use writing and they did not leave much material remains due to their nomadic lifestyle, most of the information regarding them has been pieced from the accounts of outsiders such as the Assyrians, Persians, and Greeks, as well as from archaeological study of their burial mounds.[6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I) Origins

 

스키타인의 고향에 대해서는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가 더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아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Literary evidence (문헌적 증거) (2021 Wikipedia source)

 

 

The 5th-century BC Greek historian Herodotus is the most important literary source on the origins of the Scythians

 

 

스키타이는 기원전 8세기 역사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헤로도투스는 스카티인의 고향에 대하여 3가지 상반된 버전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헤로도투스는 이 버전에 가장 신뢰를 두었다. 

 

The Scythians first appeared in the historical record in the 8th century BC.[26] Herodotus reported three contradictory versions as to the origins of the Scythians, but placed greatest faith in this version:[35]

 

또한 관련된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것보다  이것에 더 신뢰를 주고자 한다. 방랑하는 스키타인이 일단 아시아에 머무르게 되자, 그곳에서 마사게태와 전쟁을 하게 되고, 성공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고향을 떠나, Araxes강을 건너, 키메리언 땅에 들어 갔다. 

There is also another different story, now to be related, in which I am more inclined to put faith than in any other. It is that the wandering Scythians once dwelt in Asia, and there warred with the Massagetae, but with ill success; they therefore quitted their homes, crossed the Araxes, and entered the land of Cimmeria.

 

 

Herodotus presented four different versions of Scythian origins: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고향에 대해 다음의 상이한 4가지 버전을 소개했다. 

 

1. Firstly (4.7), the Scythians' legend about themselves, which portrays the first Scythian king, Targitaus, as the child of the sky-god and of a daughter of the Dnieper. Targitaus allegedly lived a thousand years before the failed Persian invasion of Scythia, or around 1500 BC. He had three sons, before whom fell from the sky a set of four golden implements—a plough, a yoke, a cup and a battle-axe. Only the youngest son succeeded in touching the golden implements without them bursting with fire, and this son's descendants, called by Herodotus the "Royal Scythians", continued to guard them.

첫째, 스키타인 전설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초대 왕 Targitaus는 천신의 아들이고 드네프르 강의 딸이다. Targitaus는 페르시아의 스키타이 (실패한) 침략하기  천년전에, 약 BC 1500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4개의 금 도구 - 쟁기, 멍에, 컵 그리고 전투용 도끼 - 가 떨어졌다. 오직 막내아들만이 불내지 않고 금도구를 만지는데 성공하였고, 이 아들의 자손들이 (헤로도투스가 말하기를 "스키타인 왕족들") 계속하여 그들을 보호했다. 

 

2.Secondly (4.8), a legend told by the Pontic Greeks featuring Scythes, the first king of the Scythians, as a child of Hercules and Echidna.

두번째 버전은 스키타의 첫째 왕인 Scythes에 대해 Pontic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전설로서, 이 왕은 헤라클레스와 Echidna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3. Thirdly (4.11), in the version which Herodotus said he believed most, the Scythians came from a more southern part of Central Asia, until a war with the Massagetae (a powerful tribe of steppe nomads who lived just northeast of Persia) forced them westward.

 

세번째는 헤로도투스가 가장 믿는 버전으로서,  스키타인은, 페르시아의 북동쪽에 사는 강력한 유목부족 마사게태와의 전쟁이 그들을 서쪽으로 가게 해서, 중앙아시아의 남쪽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4. Finally (4.13), a legend which Herodotus attributed to the Greek bard Aristeas, who claimed to have got himself into such a Bachanalian fury that he ran all the way northeast across Scythia and further. According to this, the Scythians originally lived south of the Rhipaean mountains, until they got into a conflict with a tribe called the Issedones, pressed in their turn by the "one-eyed Arimaspians"; and so the Scythians decided to migrate westwards.

 

마지막 버전은 (헤로도투스가 말하기를) 그리스 시인 Aristeas가 전한 전설인데, 그는 박카스 축제의 열기에 빠져 스키타이를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더 달렸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원래 Ripaean 산맥의 남쪽에 살았는데, Issedones이라 불리는 부족과 갈등이 생겨, " 눈 하나의 Arimaspians"에 의해 압박을 받아, 스키타인은 서쪽으로 이동하기를 결정했다 한다. 

 

 

Accounts by Herodotus of Scythian origins has been discounted recently; although his accounts of Scythian raiding activities contemporary to his writings have been deemed more reliable.[3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August 2021)

 

스키타이의 고향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는 최근에 들어 신뢰가 저하되었지만, 당시의 그의 기록에 의한 스키타인의 약탈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믿을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스키타인의 고향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4가지 버전 이야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첫번째 버전의 스키타이 전설에 의한 Targitaus(본 블로그, 스키타이 항목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에 관한 내용을 보면 더욱 그렇다. 

 

2) 고고학적 근거 

 

고고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스키타인은, 아마도 기원전 9세기경, 서부 중앙아시아의 볼가-우랄 초원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의했다. 이들은 Srubnaya culture의 한 부분으로 출발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Srubnaya culture는 시베리아의 안드로노보 문화에서 비롯된 의미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스루브나야 문화 사람들은 최초의 유목 목축인 그룹중 하나인데, 이들 유목 목축인 그룹은 기원전 9세기경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초원에서 나타난 사람들인데, 이는 그 당시 이 지역의 춥고 건조한 날씨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Based on initial archaeological evidence, it was generally agreed that the Scythians originated in the region of the Volga-Ural steppes of western Central Asia, possibly around the 9th century BC,[63] as a section of the population of the Srubnaya culture[47][66] containing a significant element originating from the Siberian Andronovo culture.[67] The population of the Srubnaya culture was among the first truly nomadic pastoralist groups, who themselves emerged in the Central Asian and Siberian steppes during the 9th century BC as a result of the cold and dry climate then prevailing in these regions.[5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Srunaya culture area (1800 -1200 BC)(source : Wikipedia)

 

 Andronovo culture area (2000 - 1150 BC) (source : Wikipedia)

 

더욱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동부 중앙아시아와 알타이지역이 스키타이 물질문명의 원래 시작된 장소로 선호된다. 스키타이 물질 문명은 후에 서쪽으로 영향을 주는데, 이는 사카와 같은 그룹을 통해, 이동을 하면서 전파하는 양상을 수반한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출현은 청동기 시기 스루브나야문화가 바로 계승된 것이 아니고, 보다 후에 발달한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Based on more recent archaeological evidence, eastern Central Asia and the Altaian region is now favored as initial place of origin of the Scythian material culture, which later would have been mediated westwards, paired with at least some demic-diffusion via Saka-like groups. The Saka themself arose from admixture between earlier Eastern Iranian peoples with local Siberian groups. As such, the emergence of Scythian cultures is not a direct continuation of the Bronze Age Srubnaya culture, but a later development.[6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3) 유전적 근거

 

(1) 2024 Wikipedia source

 

유전적 증거는 서부 스키타인은 아마도 스루브나야 문화와 밀접하게 연계된 것을 말하며, 그러나 이는 스루브나야 문화를 바로 계승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서부 스키타인들 자신이 다른 부족들로부터의 혈통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Genetic evidence has suggested that Western Scythians may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the Srubnaya culture, however, this does not imply direct continuity from Srubnaya, and the Western Scythians themselves derived ancestry from other populations as well.[24][69][7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인의 고향에 대해 유전적 근거에 대해서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 2021 Wikipedia source

 

2017년 연구에서는 스키타인이 Yamnaya culture의 후손이라는 것과 스루브나야 문화의 직계 자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부 사카의 연관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 연구에서는 스루브나야 문화와 스키타인이 Yamnaya culture라는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으나, 동쪽 Pontic - Caspian  초원과 남부 우랄지역이 Sarmatians과 같은 고향이라고 제시한다. 

 

2019년 연구에서는 스키타인이 Pontic Steppe에 나타난 것은 동부로부터의 이주에 의한 요인이 컸다고 언급한다. 즉 동부 사카와의 연관성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Genetic evidence>>

 

In 2017, a genetic study of the Scythians suggested that they were ultimately descended from the Yamna culture, and emerged on the Pontic steppe independently of peoples belonging to Scythian cultures further east.[6] Based on the analysis of mithocondrial lineages, another later 2017 study suggested that the Scythians were directly descended from the Srubnaya culture.[39] A later analysis of paternal lineages, published in 2018, found significant genetic differences between the Srubnaya and the Scythians, suggesting that the Srubnaya and the Scythians instead traced a common origin in the Yamnaya culture, with the Scythians and related peoples such as the Sarmatians perhaps tracing their origin to the eastern Pontic-Caspian steppes and the southern Urals.[40] Another 2019 study also concluded that migrations must have played a part in the emergence of the Scythians as the dominant power of the Pontic steppe.[41]

 

(source : Scythians, Wikipedia, August, 2021)

 

즉 2021년 자료는 동부의 사카와 스키타인의 연관성, 그리고 Yamnaya culture와 Srubnaya culture와 스키타인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 자료는 동부 사카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언급을 구체적 자료 없이 언급하고 있다.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Yamnaya culture area (BC 3300-BC 2600, copper age and bronze age) (source : Wikipedia)

 

 

스키타이 역사는 3개의 시대 구분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즉 Early Scythian ( - 약 BC 500), Classical Scythian (약 BC 500 - 약 BC 300), Late Scythian (약 BC 200 - AD 3세기 중반)의 그것이다.

 

그리고 자료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 그리고 The History Files 자료를 모두 살펴 보기로 한다.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는 그리스 문헌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는 서아시아 편향적 자료의 특성을 보인다. The History Files자료는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보다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고, 비교가 가능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3가지 자료를 살펴봄에 따라, 스키타이 역사에 관한 글이 길어져, 여기서는 초기 스키타이 역사기간 (BC 12c - BC 500)만 살펴 보고, 이후 Classical Scythians (BC 500 - 300 Bc)와 late Scythians (BC 200 - AD 3c)에 대해서는 다음글에서 계속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II) Early Scythian  ( 12 c BC - 약 BC 500)

 

 

1. The History Files Source

 

스키타이 역사를 연대순으로 잘 정리한 자료는 The History Files자료가 으뜸이다. 따라서 이에 관련된 자료를 먼저 살펴 보자. 

 

1) 12 c BC - 9c BC

 

기원전 1200년대에 이미 드네프르강 중부 유역의 많은 부분이 이미 스키타인의 지배에 속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동부 발트지역의 피노-위그루부족 지역은 아직 스키타이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 언급한다. (아래 자료 참조)

 

(1) BC 1200s

 

From an early date, quite probably before their existence is recorded (and the 1200s BC has been mentioned as a likely period), a large proportion of the early Slavs in the Middle Dnieper basin fall under the rule of the Scythians. The Finno-Ugric tribes and the eastern Balts living in the forested areas to the north remain outside the orbit of strong Scythian influence.

 

Map of Eastern Europe, the Balkans, and Greece 1200 BC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2) 12th century BC

 

기원전 12세기에 중부 유럽에서 철이 등장은 했으나, 생활에서의 혁명은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이고, 단지 북유럽에 이르렀을 뿐이다. 기원전 8세기-6세기에 사이에서도 철은 발트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매우 귀해서, 실제 일반 문화 수준에서는 거의 순수 청동기시대의 성격을 가졌다. 기원전 8세기말에 이르러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이 되는데, 이는 기술적 혁신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스키타인의 등장에 따른 것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Iron appears in Central Europe in this century, but not until the eighth century does it revolutionise lives and only then does it reach Northern Europe. Between the eighth and sixth centuries iron is still extremely rare in territory that is controlled by the Balts, and the general cultural level continues to have almost a pure Bronze Age character. The dividing line at about the end of the eighth century BC signifies a change in culture due not so much to technological innovation as to new historical events - the appearance of the Scythians (any precise dating for that appearance being, of course, debatable).

 

즉 기원전 8세기말에 스키타인이 북유럽지역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기시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키타인이 기원전 8세기말에 북유럽지역을 지배했으며, 그래서 북유럽지역은 기존의 청동기문화에서 철기시대 문화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3) 9th century BC

2018년 영구동토층에서 고대 시베리아 왕자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보고된다. 그전에 도굴되지 않은 무덤은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서 얼음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무덤양식은 전형적인 인도 유럽식 봉분이었다.이러한 내부의 순환적 구조들은 이시기 이지역의 스키타인의 왕족무덤이었다. 이들 지역은 '시베리아 왕들의 계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In 2018 it is reported that a 'permafrost tomb' of an ancient Siberian prince has been unearthed. The previously undisturbed tomb is located in southern Siberia (in the Russian republic of Tuva), with its contents additionally being entombed in ice. It lies underneath a typical Indo-European kurgan burial mound. These circular structures, consisting of a stone packing with a circular arrangement of chambers, are royal tombs that belong in this period and region to the Scythians. The impressive find is declared the largest and oldest of its kind ever discovered in what is increasingly becoming known as the 'Siberian Valley of the Kings'.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2) 800 BC - 645 BC

 

(1) c.800 - 600 BC

BC 800 - BC 600 시기에 스키타인은 흑해지역에서 중부유럽으로 팽창하는 시기이다. 이들 초원의 말타는 사람들은 모라비아(지금의 동부 체코), 루마니아, 항가리에 나타났는데, 이들은 남부 러시아의 스루브나 문화(청동기시기)의 계승자들로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했다. 이들 스키타인들은 동부 형식의 마구들, 동양적인 동물 에술, 목곽식 무덤, 그리고 매장의례를 가지고 있었다. (Timber-Grave culture라 명명) 이들은 중부유럽으로 들어오기 전에, 흑해 북쪽 해안과 코카서스북쪽에 있는 키메리언들을 정복하고 이들을 쫓아 내고 흑해 북부지역을 지배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is is the period of Scythian expansion from the Black Sea area into Central Europe. These steppe horsemen who appear in Moravia (now eastern Czechia), and what is now Romania and Hungary (and who are almost certainly but not inarguably Scythians) are the successors of the southern Russian Srubna culture of the Bronze Age which itself had constantly been pushing towards the west. These Scythians introduce eastern types of horse gear, oriental animal art, timber graves, and inhumation rites (gaining the name of Timber-Grave culture from this). Before entering Central Europe, they conquer the Cimmerians on the northern shores of the Black Sea and in the northern Caucasus, driving them out and dominating the northern Black Sea region.

 

Map of Scytian Lands around 500 BC (source : The History Files)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 fl c.700s? BC : Koloksai

Legendary dynasty founder mentioned by Alcman of Sparta.

 

** ? - c.675 BC : Ishpaka / Ishkapai / Ishpakai

Scythian king. Killed in battle.

 

 

(2) c.675 BC

 

메디언 통치자 Xshatrita II는 기원전 678년경 스키타이의 왕 Ishpaka의 동맹이 된다. 그러나 스키타이왕 Ishpaka는 약 BC 675년경 앗시리아의 Esarhaddon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표면적으로는 Ishpaka의 추종자들은 Van 호수의 남쪽에 계속 거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이 특별한 스키타이 그룹은 스키타이의 훨씬 남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edian ruler, Xshatrita II, becomes an ally of Ishpaka's around 678 BC, but the Scythian king is killed in battle against Esarhaddon of Assyria around 675 BC. Apparently his followers are confined (by the terms of their surrender?) to the land to the south of Lake Van. Clearly this particular group of Scythians is operating and presumably living far south of Scythia itself.

 

 

Van호수의 위치 (자료 : 위키피디아)

 

Map of the Neo-Assyrian Empire in 824 BC (dark green) and in its apex in 671 BC (light green) under King Esarhaddon (source : Wikipedia)

 

 

BC 900년경의 중근동 지역 왕국의 위치 (자료 : 위키피디아)

 

** c.675 - 645 BC : Bartatua / Par-ta-tu-a

Scythian king around Lake Van.

 

(3) c.674 BC

메디아의 동맹 키메리언, 만네언, 그리고 패배한 스키타인과 함께, 바르타투아는 이 시기에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는다. 앗시리아 왕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그렇게 추정된다. 이들 스키타인들은 아마도 강력한 키메리언왕  Tugdamme의 지배하에 있을 수 있다. Tugdamme왕은 Ashurbanipal 통치하의 강력한 앗시리아제국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Saka와 Qutium(Gutium)의 왕으로 기록된다. 즉 사카와 스키타인은 하나이며 동일한 사람들이다. (아래 자료 참조)

 

With Media's alliance of Cimmerians, Mannaeans, and Scythians having crumbled, Bartatua seals an alliance with the Assyrians around this date, presumably by marrying a daughter of the Assyrian king. It is possible that these Scythians become dominated by the powerful Tugdamme of the Cimmerians. He begins to threaten the borders of the powerful Assyrian empire during the reign of Ashurbanipal and is recorded as being 'King of the Saka and Qutium' - Sakas and Scythians are one and the same people.  

 

 Zagros Mountains

The Zagros Mountain range provided the Medes with their home, but it was also the Assyrian gateway into Iran, one that was used in later attacks on the Indo-European Persians and Medes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Tugdamme왕은 키메리언왕으로 설명되는데, 그는 앗시리아 inscriptions에 사카와 Gutium의 왕으로 기록되었다. 즉 키메리언이 사카이고 스키타인이라는 역사적 물증이다. Tugdamme는 메디아왕이라는 말도 있다. 메디아, 만네언, 키메리언, 스키타인이 자주 연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래 History Files 내용을 보면 Tugdamme는 켈트족과도 연관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앞에서 스키타인이 할슈타트문화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을 보았다. 따라서 켈트족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 

 

** Tugdamme에 대한 History Files의 자료 (Cimmerians자료 중 일부)

fl c.660 - 640 BC

Tugdamme / Dugdammi

Cimmerian king of the 'Ummân-Manda'. Median king?

 

c.660 BC

Tugdamme (or Dugdammi, depending upon the translation of the ancient source material) was also rendered in Greek as Lygdamis. He becomes a Cimmerian king possibly by 660 BC, but is possibly not the only one as the Cimmerians are a tribal group or several groups. The first attacks carried out by him as king of the Ummân-Manda (nomads) seem to be against Greek coastal cities in Anatolia, although the reason for such attacks or for him leading his people around the Black Sea coast to reach the Greek cities is unknown. Population pressure is usually the cause of such semi-migratory expeditions, and this would not be the first time that population pressure in the Pontic-Caspian steppe has caused such a migration.

Fritz Hommel has stated that Tugdamme must be an ancestor of the later Cimmerian ruler, Sandakhshatra. He identifies this ruler as Cyaxares of the Medians, implying that Tugdamme is Phraortes, which seems far less likely than the Sandakhshatra connection. Instead, the name Tugdamme strikes Edward Dawson as being Celtic, with an automatically reconfiguration to the Celtic 'Togodumnos' being an easy leap. Given the possibility that it may be Thraco-Cimmerians who influence the Celtic progression from Hallstatt to La Tène culture during the proposed migration west from the Black Sea, Tugdamme could be a name type that is adopted by the Celts from the Cimmerian warrior elite and is afterwards rendered as Togodumnos (or variants). The alternative is that a reverse migration occurs from Central Europe, perhaps of a small Celtic warrior group coming down the Danube to take command of a Cimmerian group and impose a Celtic leader over them.

 

 

653 BC

Tugdamme begins to threaten the borders of the powerful Assyrian empire during the reign of Ashurbanipal. Assyrian inscriptions record him as being 'King of the Saka and Qutium'. This is very telling, because it suggests that he rules not only over his own Cimmerian people (which is so obvious that it need not be mentioned), but also the Scythians (identifying them as 'Saka', a form of the name that very soon becomes prominent amongst Scythian groups to the east of the Caspian Sea, in Transoxiana).

 

The year 652 BC marked the apogee of Cimmerian power, with their conquest of the kingdom of Lydia, but their supremacy would last only another eleven or so years before defeat and total eclipse

The 'Qutium' in point would seem to be 'Gutium', homeland in the Zagros Mountains between modern Iran and Iraq of the nomadic Gutians (often thought to be the precursors of the Kurds). Clearly Tugdamme has already conquered territory very close to the heartland of the Assyrian empire, making it more possible that the Scythian masters of the Medes at this time are in fact the Cimmerians.

 

Assyrian inscriptions also refer to Tugdamme as 'Sar Kissati' which translates as 'King of Kish' or 'King of the World'. Kish is an ancient and highly important city state in southern Mesopotamia, which suggests that Tugdamme now rules a vast area of land to the east and south of the Assyrians.

 

652 BC

One serious invasion of Anatolia by Cimmerians has already been repulsed, with the states or regions of Hilakku, Lydia, and Tabal requesting help from Assyria. Now the Cimmerians return (leader unknown, but Greek tradition states that it is Tugdamme). King Gyges of Lydia is killed during a second attack. His capital of Sardis is captured, all except the citadel which manages to hold out. The fact that it does suggests either that either the Cimmerians do not hang around for long after their victory or that (as before) they are moved along by an Assyrian force (with Ardys II of Lydia helping them on their way at the point of a sword). Excavations at the site of Sardis later discover a destruction layer that appears to be associated with this event.

 

 

641 - 640 BC

After more than a decade of controlling a vast domain, Tugdamme is now defeated. Unfortunately the details of how this happens have failed to survive, so the manner of his defeat and death are unknown. Strabo suggests that Madyas, the Scythian overlord of the Medes, kills him and defeats his forces. Ashurbanipal states that Marduk (also Madyas?) defeats Tugdamme, which seems to support the idea that it is not the Assyrians who kill him but his allies the Scythians.

 

 

다시 Scythians (of the History Files) 자료로 돌아 간다. 

 

 

(4) 653 BC

 

Media의 Xshatrita II는 동맹을 이끌고, 앗시리아의 통제하에 있는 자그로스산맥을 위협한다. 그러나 앗시리아 전투에서 전사한다. 메디아는 그의 어린 아들이 계승하는데, 메디아는 곧바로, 초원의 스키타인의 침입을 받아 예속된다. 스키타이왕 Madys가 Medes와 관련된 이란 부족들을 통치하는데, Huwaxshatra 지배하의 메디아는 스키타이로부터 독립을 회복하는데 거의 30년이 걸린다. (아래 자료 참조)

 

Xshatrita II of Media leads the league that endangers Assyrian control of the Zagros Mountains and is himself killed in battle against Assyria. He is succeeded by his young son, but the Medians are quickly subjugated by a Scythian invasion of the steppes. One of their number - Madys - rules the Medes and associated Iranian tribes, and it takes the Medians under Huwaxshatra almost thirty years to restore their independence.

 

앗시리아와의 전투에서 Xshatrita II 왕이 전사한 후, 메디아제국은 30년동안 스키타이에 종속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위에서 스키타이와 메디아는 동맹이었다 했다. 그래서 Ishpaka 스키타이왕이 앗시리아 전투에서 전사하고, 뒤를 이은 바르타투아는 앗시리아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그후 전투에서는 메디아왕이 전사하고 이후 30년간 스키타이의 지배를 받는다는 설명이다. 스키타이, 만네언, 키메리언, 메디아는 연합체를 형성한 집단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한 역사, 언어, 문화를 살펴보면 필자는 그렇게 판단된다. 따라서 바르타투아의 앗시리아 공주와의 결혼은 서로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판단된다. (앗시리아는 이런 결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의도적인 숨기기로 보인다) 이후 앗시리아가 아닌 스키타인이 메디아를 지배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3) 645 BC - 500 BC

 

** c.645 - 625 BC : Madys / Madius / Madyes / Madya

Son. Scythian king of the Medians (653-625 BC). Killed.

 

(1) 625 BC

헤로도투스는 메디아의 Huwaxshatra가 스키타인의 지배시기를 포함하여 40년을 통치했다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스키타인의 지배기간을 제외하고 40년이라 생각한다. Huwaxshatra왕은 그의 통치 초기 스키타인의 속국으로 출발했는데, 기원전  625년에 그 멍에를 벗어나서 나라를 다스렸다. (아래 자료 참조)

 

Herodotus says that Huwaxshatra of Media reigns for forty years including the time of the domination of the Scythians, but virtually all historians agree that what is meant is forty years excluding the time of the domination of the Scythians. At the beginning of his reign, Huwaxshatra is considered a vassal of the Scythians until he throws off their yoke in 625 BC and takes sovereign control of his country.

 

Huwaxshatra 재위기간은 헤로도투스의 언급이 더 타당성을 갖는다 판단한다. 30년을 스키타이 지배하에 있었다 하는데, 이후 40년을 지배하면 총 70년을 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상하게 헤로도투스의 기록물에 근거없이 시비를 거는 역사가들이 있다고 본다. 또 하나의 역사왜곡하는 자들일 것이다. 

 

 

Madys와 그의 동료 지배층은,  그의 패배한 사람들이 코카서스 산맥 남쪽의 과거 영토를 버리고, 흑해위 스키타이지역으로  도망할 때, BC 625년, 메디안에 의해 학살된다. 거기서 스키타인은 다시 정복을 시작하고,  작아진 스키타이부족들 지배를 다시 시작한다. 이중에는 아마도 슬라브족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Madys and his fellow leaders are massacred by the Medians while his defeated people flee back into Scythia, abandoning their former territory to the south of the Caucuses Mountains. Once there they begin the reconquest and renewed domination of the 'lesser' Scythian tribes. Presumably included amongst this number are the Slavs.  

 

즉 스키타이가 서아시아의 메디아에 밀려 흑해위 지역으로 가서, 다시 재정비하여 발칸반도(슬라브족)쪽으로 진출했다는 언급이다. Madys는 앗시리아와 친척관계의 스키타이왕이다. 메디아왕 Tugdammis를 살해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앗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키메리언, 만네언, 스키타이의 연합을 꾀하였던 메디아로서는 Madys가 Target이 될 수 있었다 본다. 

 

 

(2) 600 - 500 BC

 

루사티언 문화(1300 BC - 500 Bc)는 초기 철기시대의 첫세기들동안에 아직 존재한다. 호박구슬(Amber) 무역은 중단되지 않았고, 루사티언은 계속하여 발틱과, 게르만 호박구슬 수집자, 그리고 동부 알프스지역의 할슈타트문화, 그리고 BC 7세기부터는 이태리의 에트루스켄인 사이의 호박구슬 무역 중재자 역할을 했다. 스키타인의 약탈로 인한 큰 압박하에서, 루사티언은 결국 포메라니언 Face-Urn 문화로 넘어간다. (아래 자료 참조)

 

The Lusatian culture still persists in the first centuries of the Early Iron Age. The amber trade is not cut off and the Lusatians continue to be mediators between the Baltic and Germanic amber gatherers and the Hallstatt culture in the eastern Alpine area and, beginning in the seventh century, the Etruscans in Italy. Under great pressure due to Scythian raids, the Lusatian eventually gives way to the Pomeranian Face-Urn culture.

 

호박 구슬 (Prussian Amber) (자료 : History Files)

폴란드지역의 Pomeranian Culture(650 BC - 200 BC)가 스키타이의 침입으로 인한 스키타이 문화일 수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The Scythians reach the southern borders of the western Baltic lands, seemingly due to their becoming involved in wars against the Persians who are invading Scythia from the south. Herodotus describes these wars in Book IV of his history, these being the earliest surviving written records concerning the history of Eastern Europe at the end of the sixth century BC. Apparently, though, the Scythians do not succeed in penetrating farther north. Only a few arrowheads of Scythian type have been found in East Prussia and southern Lithuania. A chain of western Baltic strongholds in northern Poland and in the southern part of East Prussia arise which very probably are built for resisting the southern invaders. The Scythian high tide lasts only until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BC. After that they no longer appear in the north, and possibly it is Baltic resistance which helps to end the Scythian threat.

스키타인은 서부 발틱지역의 남쪽 국경에 다다른다. 아마도 스키타이를 남쪽으로부터 침략하는 페르시언과의 전쟁에 관여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헤로도투스는 그의 역사서 Book IV에서 이 전쟁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것이 기원전 6세기말에 동유럽에 관한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키타인이 좀 더 북쪽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인 형태의 소수의 화살촉만이 동부 프러시아와 남부 리투아니아에서 발견되었다. 폴란드북부와 동부 프러시아의 남부에서 서부 발틱 요새들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남부 침입자들(스키타인)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 지어진 것일 것이다. 스키타인의 세찬 물결은 기원전 5세기말까지 지속된다. 그후로는 북부에서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발틱지역의 저항이 스키타인의 위협을 종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상기 자료 참조)

 

스키타인이 폴란드 북부, 남부 리투아니아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6-5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에 진출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의견이 다르다. 박용숙 교수에 의하면 헬펜교수는 스칸디나비아, 남프랑스까지 스키타이가 진출했다고 한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단군조선이나 아사달 등이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좀더 유심히 이에 대해 관찰하고자 한다. 

 

Allusions to some tribal names may be regarded as references to the Baltic and Finno-Ugric tribes. Herodotus describes an expedition undertaken by the Persian King Darius against the Scythians in 515 BC. He mentions and approximately locates the seats of the 'Neuri', 'Androphagi', 'Melanchlaeni', 'Budini', and other tribes living to the north of Scythia. Marija Gimbutas especially uses Herodotus to locate the Neuri by establishing the Pripet marshes to be the natural border between Scythia and the Neuri, while the 'Scythian farmers' of the lower and middle Dnieper basin are almost certainly subject Slavs.

 

몇몇 부족명에 대한 암시가 발틱부족과 피노-위그루 부족에 관련될 수 있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에 의해 기원전 515년 스키타이에 대한 원정에 대해 기술했다. 그는 Neuri, Androphagi, Melanchlaeni, Budini 등과 스키타이 북쪽에 사는 다른 부족들을 언급했고 대략 위치도 말하였다. Marija Gimbutas는 특히 Neuri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헤로도투스를 인용하여, 스키타이와 Neuri사이의 자연적인 국경이 Pripet marshes (프리파치 습지 : 구소련의 유럽부 서부에 있는 광대한 삼림소택지대. 강 호수 운하들이 교차하고 있다)지역이라 하였다. 반면 드네프르강 하류와 중류유역의 스키타인 농부들은 거의 확실하게 예속된 슬라브족이다. (상기 자료 참조)

 

(3) 6th Century BC

 

The Harii probably belong to the Hallstatt culture of Celts. They are to be found around the central Germanic lands, and in Bohemia, Moravia, Slovakia, and the edges of Poland and Ukraine. Around this time a large-scale expansion begins that sees many Hallstatt Celts migrate outwards, (towards northern Italy, Gaul, or Iberia)  but generally towards the west without disturbing the Scythian lands.

 

Harii는 아마도 켈트의 할슈타트문화 지역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중앙 게르만족 영토근방,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변경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에, 큰 규모의 팽창이 시작되어, 할슈타트 켈트족은 밖으로 이주하는데(이태리 북부, 프랑스, 또는 이베리아), 스키타이 땅을 방해하지 않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상기 자료 참조)

 

스키타이의 압박에 의해 할슈타트 켈트족이 이태리 북부, 프랑스, 이베리아로 이동한다는 말이다. 즉 이 지역국경까지 스키타이가 진출했다는 암시이다. 

 

 

 (4) 500 BC

 

Between about 500 to 400 BC large numbers of Iron Age La Tène Celtic peoples migrate to the east to locations in Poland, the Czech Republic, Slovakia, Hungary, the Balkans, and east to Ukraine. Also from this period comes the 'Siberian Ice Maiden' (alternatively referred to as the Princess of Ukok or the Altai Mummy), a tattooed Scytho-Siberian mummy discovered by archaeologists in 1993. She lives at this time on the Eurasian steppe as a member of the Pazyryk culture which is current at this time. Aged between twenty and thirty at the time of her death, her remains are entombed in a subterranean chamber beneath a kurgan mound.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기원전 500-400년 사이, 많은 수의 철기시대 La Tene culture(BC 450 - BC 1)의 켙트족 사람들이 폴란드,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항가리, 발칸 그리고 우크라이나 동부로 동쪽 대이동이 있었다.  이시기에 또한 시베리아의 얼음공주 (Ukok 공주 또는 알타이 미라의 별칭)가 등장하고, 문신을 한 스키토-시베리언 미라가 1993년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녀는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 사는 파지릭 문화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녀가 20-30살 사이에 죽었는데, 그녀의 유해는 봉분아래 지하 석실에 매장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이러한 언급은 스키타이가 다시 동쪽으로 이동 또는 퇴각이라 볼 수 있는데, 기원전 500-400년 사이에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나열하고 별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스키타이가 단군에 등극하고 단군조선에 융합하였다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 켈트족의 할슈타트문화(BC 1200 - BC 45), La Tene 문화(BC 450 - BC 1)가 단군조선 문화라면 말이다. 필자는 켈트족이 단군조선이 아닌가 하는 글을 썼다. 

 

https://lostcorea.tistory.com/1712

 

https://lostcorea.tistory.com/1713

 

 

**스키타인에 대한 헬펜교수의 주장이라는 박용숙 교수의 인용문:

 

셋째, 흉노는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라고 불렀고, 풍류(神仙道)를 신봉했으며,

 

헬펜 교수에 의하면,  

 

이들의 흔적은 흑해 일대에서부터 동유럽,스칸디나비아,남프랑스로 그리고 남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그리고 광활한 북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있는데,

 

동북아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 들어와 헝가리를 거쳐 스칸디나비아에 미치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무덤에서 발굴되는 두개골의 모습이,<유럽

인종>,<몽고인종>,<유럽인종+몽고인종>의 혼합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아직 헬펜교수의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2. 2021 Wikipedia source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는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와 시각과 내용이 많이 다르다. 2024년 자료는 편견을 가진 작가들에 의해 많이 오염된 자료로 보인다. 난잡한 문장 구성을 보면 많이 사람들이 추가로 개조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굳이 2021년 자료를 여기에 소개한다. 

 

1) Early history

 

 

Gold Scythian belt title, Mingachevir (ancient Scythian kingdom), Azerbaijan, 7th century BC

 

 

Herodotus provides the first detailed description of the Scythians. He classifies the Cimmerians as a distinct autochthonous tribe, expelled by the Scythians from the northern Black Sea coast (Hist. 4.11–12). Herodotus also states (4.6) that they consisted of the Auchatae, Catiaroi, Traspians, and Paralatae or "Royal Scythians".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인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서술을 했다. 그는 키메리언을 별도의 자생적인 (토착적인) 부족으로서 스키타인에 의해 흑해 북쪽해안에서 추방된 것으로 본다. (Hist,4,11-12) . 헤로도투스는 또한 스키타인이 Auchatae, Catiaroi, Traspians, 그리고 Paralatae 또는 "스키타이왕족"으로 구성되었다고 언급한다. (4.6) (상기 자료 참조)

 

 

In the early 7th century BC, the Scythians and Cimmerians are recorded in Assyrian texts as having conquered Urartu. In the 670s, the Scythians under their king Bartatua raided the territories of the Assyrian Empire. The Assyrian king Esarhaddon managed to make peace with the Scythians by marrying off his daughter to Bartatua and by paying a large amount of tribute.[5] 

 

기원전 7세기 초에 , 스키타인과 키메리언은 Uratu왕국을 정복한 것으로 앗시리아 문서에 기록된다. 670년대에, 바르타투아 치하의 스키타인은 앗시리아 영토를 유린한다. 앗시리아왕 Esharhaddon은 공주를 바르타투아에게 시집보내고, 또한  많은 금액의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스키타인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한다. (상기 자료 참조)

 

상기 스키타이 바르타투아와 앗시리아 에샤르해돈과의 내용은 2024년 자료와 정반대이다. 필자는 2024년 자료가 서아시아에 편향된 시각이라 비판했는데, 2021년 자료가 정확히 언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Bartatua was succeeded by his son Madius ca. 645 BC, after which they launched a great raid on Palestine and Egypt. Madius subsequently subjugated the Median Empire. 

 

바르타투아는 그의 아들 마디우스에 645년 BC에 계승된다. 이후 스키타인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고, 이어서 메디언 제국을 복속시킨다. (상기 자료 참조)

 

 

During this time, Herodotus notes that the Scythians raided and exacted tribute from "the whole of Asia". In the 620s, Cyaxares, leader of the Medes, treacherously killed a large number of Scythian chieftains at a feast. The Scythians were subsequently driven back to the steppe. In 612 BC, the Medes and Scythians participated in the destruction of the Assyrian Empire at the Battle of Nineveh. During this period of incursions into the Middle East, the Scythians became heavily influenced by the local civilizations.[42]

 

이시기에,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인이 "모든 아시아"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기원전 620년대에, Medes의 리더 Cyaxares는 속임수를 써서 축제하의 많은 스키타인 장수들을 죽였다. 스키타인은 그후 초원으로 물러났다. 612년 BC에 Medes와 스키타인은 앗시리아제국을 파괴하는 Nineveh전투에 참여했다. 중동에 급습하는 이 시기에, 스키타인은 지역 문명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상기 자료 참조) 

 

 

기원전 620년에 메디어왕 Cyaxares는 (Madys왕 포함) 스키타이 장수들을 죽였다. 그런데 기원전 612년에는 다시 스키타이와 메디아가 힘을 합쳐 앗시리아 제국을 파괴하는 전쟁에 참여한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 전개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앗시리아와 인척관계였던 Madys왕이 죽은 후 스키타이가 반앗시리아 연합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In the 6th century BC, the Greeks had begun establishing settlements along the coasts and rivers of the Pontic steppe, coming in contact with the Scythians. Relations between the Greeks and the Scythians appear to have been peaceful, with the Scythians being substantially influenced by the Greeks, although the city of the Panticapaeum might have been destroyed by the Scythians in the mid-century BC. During this time, the Scythian philosopher Anacharsis traveled to Athens, where he made a great impression on the local people with his "barbarian wisdom".[5]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는 Pontic Steppe의 강과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스키타인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스와 스키타인과의 관계는 평화로와 보인다. 스키타인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그리스 도시 Panticapaeum을 파괴했지만, 그리스에 의해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스키타인 철학자 Anacharsis는 아테네로 여행하여, 그의 "barbarian wisdom"으로 아테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상기 자료 참조)

 

스키타인 철학자 아나카르시스의 언급은 스키타인의 문화적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War with Persia

 

Reliefs depicting the soldiers of the Achaemenid army, Xerxes I tomb, circa 480 BCE. The Achaemenids referred to all nomads to their north as Saka,[31] and divided them into three categories: The Sakā tayai paradraya ("beyond the sea", presumably the Scythians), the Sakā tigraxaudā ("with pointed caps"), and the Sakā haumavargā ("Hauma drinkers", furthest East).[43]

 

 

By the late 6th century BC, the Archaemenid king Darius the Great had built Persia into becoming the most powerful empire in the world, stretching from Egypt to India. Planning an invasion of Greece, Darius first sought to secure his northern flank against Scythian introads. Thus, Darius declared war on the Scythians.[42] 

기원전 세기 말에, 아케메네스왕 다리우스대제는 페르시아를 이집크에서 인도까지 뻗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리스 침입을 계획하면서, 다리우스는 먼저 스키타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측면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스키타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상기 자료 참조)

 

 

At first, Darius sent his Cappadocian satrap Ariamnes with a vast fleet (estimated at 600 ships by Herodotus) into Scythian territory, where several Scythian nobles were captured. He then built a bridge across the Bosporus and easily defeated the Thracians, crossing the Danube into Scythian territory with a large army (700,000 men if one is to believe Herodotus) in 512 BC.[44] 

 

처음에 다리우스는 카파도키아 태수 (총독) Ariamnes에게 대함대(헤로도투스에 의하면 600척의 배로 추정됨)를 주어 스키타이 영토로 보냈다. 그래서 스키타이 몇몇 귀족들이 생포되었다. 다리우스는 그후 보스포러스해렵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했고 트라키언을 쉽게 격파했으며, 다뉴브강을 건너 스키타인 영토로 512년 BC에 대규모 군대(헤로도투스를 믿는다면 70만군)를 보냈다. (상기 자료 참조)

 

 

At this time Scythians were separated into three major kingdoms, with the leader of the largest tribe, King Idanthyrsus, being the supreme ruler, and his subordinate kings being Scopasis and Taxacis.[citation needed]

 

이 시기에 스키타인은 3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가장 큰 부족의 왕 Idanthyrsus가 최고 지배자였으며, 그의 예하 왕들은 Scopasis와 Taxacis였다. (상기 자료 참조)

 

이 당시 스키타이가 3개왕국으로 나뉘었다는 상기 기록이 당시 단군조선이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상기 시킨다. 

 

 

Unable to receive support from neighboring nomadic peoples against the Persians, the Scythians evacuated their civilians and livestock to the north and adopted a scorched earth strategy, while simultaneously harassing the extensive Persian supply lines. Suffering heavy losses, the Persians reached as far as the Sea of Azov, until Darius was compelled to enter into negotiations with Idanthyrsus, which, however, broke down. Darius and his army eventually reatreated across the Danube back into Persia, and the Scythians thereafter earned a reputation of invincibility among neighboring peoples.[5][44]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이웃 유목부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스키타인은, 그들의 시민과 가축들을 북쪽으로 피신시키는 초토화작전을 폈다. 동시에 페르시아 대규모 보급선을 교란시켰다. 큰 손실을 당한 페르시언은 아조프해에 이르러, 다리우스가 Idanthrsus와 협상할 수밖에 없었으나, 협상은 깨졌다. 다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결국 다뉴브강을 건너 페르시아로 철군했으며, 스키타인은 이후 이웃 부족사이에 무적의 명성을 얻었다. (상기 자료 참조)

(source : Scythians, Wikipedia, August 2021)

 

스키타인이 아케메네스제국의  다리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잘 말해준다. 이를 고려할 때, 스키타인은 몇몇 부족의 연합체 수준이 아닌 대제국의 면모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3. 2024 Wikipedia source

 

기원전 9-8세기동안에, 마사게태 또는 Issedones라는 동부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인과 밀접한 관련 있는 유목부족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다른 스키타이 유목부족이  Araxes 강을 건너 흑해연안의 초원에 키메리언과 함께 정착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및 지도 참조)

 

Herodotus World Map (source : Wikipedia)

 

During the 9th to 8th centuries BC, a significant movement of the nomadic peoples of the Eurasian Steppe started when another nomadic Iranic tribe closely related to the Scythians from eastern Central Asia, either the Massagetae[45] or the Issedones,[71] migrated westwards, forcing the early Scythians to the west across the Araxes river,[72] following which some Scythian tribes had migrated westwards into the steppe adjacent to the shores of the Black Sea, which they occupied along with the Cimmerians, who were also a nomadic Iranic people closely related to the Scythians.[4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1) Arzhan kurgan (8-7th century BC)

 
 

 

 

 

 

Some of the earliest Scythian artefacts in Animal style, Arzhan kurgan, Southern Siberia, dated to 8-7th century BC.

 

Arzhan 무덤의 첫째 Kurgan에서 나온 화살촉이 구리로 만들어져 스카타이의 대표적인 것인데, 이 시기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글 참조)

Arrowheads from the 1st kurgan of the Arzhan burials suggests that the typical Scythian socketed arrows made of copper alloy might have originated during this period.[73][7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8-7세기에 걸쳐, 스키타인은 코카시언, 카스피해 초원으로 몇단계를 거쳐 이주해서 유사한 부족인 키메리언을 흡수, 통합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Araxes 강(코카서스남쪽의 Aras강, 참고로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볼가강을 Araxes강이라 불렀다 함), 코카서스, Maeotis lake(=Sea of Azov) 사이 지역에 정착했다. (상기 헤로도투스 세계 지도 참조) (아래 글 참조)

 

Over the course of the 8th and 7th centuries BC, the Scythians migrated into the Caucasian and Caspian Steppes in several waves, becoming the dominant population of the region,[45] where they assimilated most of the Cimmerians and conquered their territory,[47] with this absorption of the Cimmerians by the Scythians being facilitated by their similar ethnic backgrounds and lifestyles,[75] after which the Scythians settled in the area between the Araxes, the Caucasus, and the Lake Maeotis.[72][44][47][45][4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고고학적으로, 중앙아시아로부터 카스피해 초원으로의 초기 스키타이의 서진은 스루브나야 문화가 볼가강 서쪽으로 팽창하는 가장 최근의 2-3번의 흐름에 해당한다.  가장 마지막이며 세번째 흐름인 스키타인 이주는 기원전 9세기에 있었다. 스키타인은 이 이른 시기에 이미 금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 글 참조)

 

Archaeologically, the westwards migration of the Early Scythians from Central Asia into the Caspian Steppe constituted the latest of the two to three waves of expansion of the Srubnaya culture to the west of the Volga. The last and third wave corresponding to the Scythian migration has been dated to the 9th century BC.[76] The Scythians were already skilled at goldsmithing at these early dates.[7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물질적으로는, 키메리언과 관련 있는 Cherogorovka-Novocherkassk culture는 중앙아시아동부와 시베리아(특히,Karasuk, Arzhan, Altai cultures)로부터 비롯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  문화의 발달에 기여한 코카서스의 Kuban  culture 영향도 받았다. 그러므로 흑해 초원지역에서 지배적인 자가  되고,  코카서스 초원에서 키메리언을 대체한 초기 스키타인의 말기 스루브나야 문화와,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이 일부가 된 보다 넓은 Chernagorovsk-Arzhan culture complex를 구분하는 어렵다. 스키타인이 코카서스와 흑해위 초원에 도착했을 때, 스키타인과 키메리언은 Novocherkassk 물건을 사용했다. (아래 글 참조) 

Materially, the Chernogorovka-Novocherkassk culture with which the Cimmerians are associated showed strong influences originating from the east in Central Asia and Siberia (more specifically from the KarasukArzhan, and Altai cultures), as well as from the Kuban culture of the Caucasus which contributed to its development,[45] thus making it difficult to distinguish from the Late Srubnaya culture of the early Scythians who became dominant in the Pontic steppe and replaced the Cimmerians in the Caucasian steppe, with both the Cimmerians and the Scythians being part of the larger Chernagorovsk-Arzhan cultural complex,[78] and both Scythians and the Cimmerians used Novocherkassk objects when the Scythians initially arrived into the Caucasian and Pontic steppes.[75] The transition from the Chernogorovka-Novocherkassk culture to the Scythian culture appears to have itself been a continuous process,[78] and the Cimmerians cannot be distinguished from the Scythians during the period of transition from the Chernogorovka-Novocherkassk culture to the Scythian culture.[79]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Cherogorovka-Novocherkassk culture로부터 스키타이 문화로의 이전은 계승된 과정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러한 설명은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의 동질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필자는 판단한다.

 

키메리언, 스키타인과 관련 있는 Cherogorovka-Novocherkassk culture가 코카서스의 Koban culture의 영향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하는데, Koban culture에 대해 잠시 살펴 보자. 

Kuban river map (source : Wikipedia)

 

"The Koban culture or Kuban culture (c. 1200 to 350 BC),[1] is a late Bronze Age and Iron Age culture of the northern and central Caucasus. It is preceded by the Colchian culture of the western Caucasus and the Kharachoi culture further east.

Kuban culture(1200 - 350 BC)는 북코카서스와 중앙 코카서스지역의 후기 청동기와 철기시기의 문화이다. 이는 서부 코카서스의 Colchian culture와 더 동쪽의 Kharachoi culture가 Kuban culture의 앞선 문명이다. (상기 자료 참조)

It is named after the village of Koban, Northern Ossetia, where in 1869 battle-axes, daggers, decorative items and other objects were discovered in a kurgan. Later, further sites were uncovered in the central Caucasus.......................

 

Kuban(Koban) 문화는,  1869년, 전투용 도끼, 단검, 장식품과 다른 것들이 봉분에서 발견된 북 오세티아의 Koban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후에 다른 사이트들이 중앙 코카서스에서 발굴되었다.... (상기 글 참조)

 

Jaimoukha postulates that the end of the Koban culture was brought about by Scythian invasions.[5]

Jaimoukha는 Koban culture가 끝난 것은 스키타인의 침입때문으로 추정한다. 

 

Johanna Nichols has written that, "There is fairly seamless archeological continuity for the last 8000 years or more in central Daghestan, suggesting that the Nakh-Daghestanian language family is long indigenous."[12]

Johanna Nichols는 중앙 다케스탄지역에서 지난 8천년이상 상당한 고고학적 유물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Nakh-Dagestanian 언어집단이 매우 오랫동안 토착언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A genetic study in 2020 analysing samples from Klin-Yar communities, including the Koban culture, found that the ancient population had one sample of Haplogroup D-Z27276, which is associated with the modern Tibetan people. [citation needed] Other haplogroups were Haplogroup J1 and Haplogroup G-M285.[13] "

Koban culture를 포함한  Klin-Yar 공동체의 샘플을 분석한 2020년 유전자 연구에 의하면, 고대사람들은 하나의 haplogroup D-227276 샘플을 가졌는데, 이는 현대의 티베트사람들과 연관된다. 다른 것은 Haplogroup J1과 Haplogroup G-M285이다. 

(source : Koban culture, Wikipedia)

 

 

코카서스의 Koban culture가 결국 스키타이문화로 이어지며, 이들 다게스탄지역은 매우 오랫동안 고고학적 유물이 연속성을 가지며 토착언어의 오랜 지속성을 의미한다 한다. 그리고 유전자 연구에 의하면 현대의 티베트인들과 연관되어 있다 한다. 이는 스키타인이 동부의 티베트인들과 연관성을 가지며, 이는 스키타인과 사카의 연관성을 말해준다고 본다. 또한 지난 연구에서 동북아의 홍산문화와  황하의 앙소문화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 근거를 둔 주어 목적어 동사(SOV)의 어순을 갖는 언어가 티베트-버마어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 본 바 있다. 이와도 연결되는 튀르크어 계열로 보인다. 필자는 또한 현대의 다게스탄지역의 전통놀이가 우리의 줄타기, 등 민속놀이와 유사한 것을 말한 바 있다. 

 

 

다시 2024년 스키타이 위키피디아 자료로 돌아 가자.

 

이 초기 이주기간에, 스키타이 몇몇 그룹은 Ciscaucasia와 Kuban 강의 동쪽 코카서스산맥 언덕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원주민과 함께 정착했으며,남으로 서아시아에  이주하지 않았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is early migratory period, some groups of Scythians settled in Ciscaucasia and the Caucasus Mountains' foothills to the east of the Kuban river, where they settled among the native populations of this region, and did not migrate to the south into West Asia.[8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2) Arrival into West Asia (서아시아 진출)

 

Now also dominating eastern Anatolia and the Zagros Mountains they acquire much of the Caucasian and Cimmerian cultural legacy and mix this with their own Pontic-Caspian steppe cultural elements. These oriental influences appreciably change the material culture of Central Europe. The Baltic and Germanic cultures in Northern Europe remain untouched by the Scythian incursions, but the new cultural elements reached them through continuous commercial relations with Central Europe.

동부 아나톨리아와 자그로스산맥을 지배하면서, 이제 스키타인은 코카서시언과 키메리언문화와 그들의 흑해위 초원 문화요소와 혼합했다. 이러한 동양적 영향은 중부유럽의 물질문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북유럽의 발틱문화와 게르만문화는 그러나 스키타인의 급습에 닿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적 요소들은 중부유럽과의 지속적인 상업적 관계로 인해 북유럽에 도달했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 warriors (reconstruction)

 

 

스키타인의 압박에 의해, 이동한 키메리언은 흑해 연안따라 남쪽으로 이주해서 아나톨리아에 도착했고, 스키타인은 후에 남쪽으로 확장해서 카스피해를 따라 시스코카시안 초원에 도달해서, 그들은 구라강과 Aras강 사이 지역에 정착했다. 후에는 더 확장하여 현재의 아제르바이젠지역의 구로강 남쪽지역에 정착했다. 그후에는 동쪽의 Transcaucasia로 가서 서아시아의 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Under Scythian pressure, the displaced Cimmerians migrated to the south along the coast of the Black Sea and reached Anatolia, and the Scythians in turn later expanded to the south, following the coast of the Caspian Sea and arrived in the Ciscaucasian steppes, from where they settled in the area between the Araxes and Kura rivers before further expanding into the region to the south of the Kuros river in what is present-day Azerbaijan, where they settled around what is today Mingəçevir, Gəncə and the Muğan plain, and turned eastern Transcaucasia into their centre of operations in West Asia until the early 6th century BC,[48][49][50][47][80][51][81] with this presence in West Asia being an extension of the Scythian kingdom of the steppes.[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초기 스키타인은 스루브나야 문화에 속했다. 고고학적으로 Transcaucasia로의 스키타이의 이동은 스루브나야문화의 한 부분의 이동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를 Srubnaya-Khvalynsk 문화라 부르며, 코카서스산맥의 북쪽 언덕까지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그후로 카스피해 서쪽해안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 Transcaucasia와 이란에까지 이동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earliest Scythians had belonged to the Srubnaya culture, and, archaeologically, the Scythian movement into Transcaucasia is attested in the form of a migration of a section of the Srubnaya culture, called the Srubnaya-Khvalynsk culture, to the south till the northern foothills of the Caucasus Mountains, and then further south along the western coast of the Caspian Sea into Transcaucasia and Iran.[67][47][82]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비록 초기 스키타인은 원래 스키타인 이전의 중앙아시아 오리진의 고고학적 문화에 속하지만, 그들의 original Srubnaya culture는 안드로노보문화와 상당히 혼합된 요소를 가졌지만, 이것이 스키타이 문화로 발전했다. 이 스키타이 문화는 Transcaucasia부족들과 Urartians과 접촉하고, 또 서아시아 문명과 접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접하면서 이들로부터 스키타이 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스키타인은 기원전 8세기까지 청동기 사회였으며, 이들이 서아시아로 확장하면서, 철기 다루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lthough the Early Scythians initially belonged to a pre-Scythian archaeological culture of Central Asian origin,[83][18] their original Srubnaya culture, which contained significant admixture from the Andronovo culture, evolved into the Scythian culture from coming in contact with the peoples of Transcaucasia and the Urartians,[67] and further contacts with the civilisation of West Asia, and especially with that of Mesopotamia, would also have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Scythian culture.[45][46] The Scythians were still a Bronze Age society until the late 8th century BC, and it was only when they expanded into West Asia that they became acquainted with iron smelting and forging.[8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시기의 스키타이왕국의 본부는 시스코카시언 초원에 위치했었으며, 이 트랜스코카시아지역에의 출현은 스키타이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 전형적으로 스키타이 무기라고 여겨지는 Akinakes 칼, 3면을 가진 청동기 화살촉 등은 사실, 트랜스코카시아 오리진이었으며, 그들이 코카서스에 머무는 동안 스키타인들이 수용한 것이다. 그렇치 않으면,  스키타이 타입의 화살촉은 기원전 9세기에 시베리아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이들이 스키타인에 의해 서아시아에 들여왔을 수도 있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is period, the Scythian kings' headquarters were located in the Ciscaucasian steppes, and this presence in Transcaucasia influenced Scythian culture: the akīnakēs sword and socketed bronze arrowheads with three edges, which, although they are considered as typically "Scythian weapons," were in fact of Transcaucasian origin and had been adopted by the Scythians during their stay in the Caucasus.[85][80] Alternatively, the typical Scythian arrowheads might have originated in Siberia during the 9th century BC[73][74] and was introduced into West Asia by the Scythians.[7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3) Arrival in the Pontic steppe (흑해위 초원 진출)

 

 

 

Scythian horse-mounted warrior (reconstruction).

 

코카서스 초원의 근거지로부터, 스키타인은,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기간동안에, 흑해북쪽에서부터 다뉴브강까지 Pontic초원과 키메리언초원을 정복했다. 그리고 이것이 향후 스키타인의 영토 서쪽경계가 된다. 이러한 흑해위 초원의 스키타이 점거 과정은 기원전 7세기에 가서 완성된다. (아래자료 참조)

From their base in the Caucasian Steppe, during the period of the 8th to 7th centuries BC itself, the Scythians conquered the Pontic and Crimean Steppes to the north of the Black Sea up to the Danube river, which formed the western boundary of Scythian territory onwards,[63][45][63][86][87] with this process of Scythian takeover of the Pontic Steppe becoming fully complete by the 7th century BC.[8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고고학적으로, 스키타인의 흑해위 초원으로의 확장은, Srubnaya-Khvalynsk 문화의 서쪽 이동으로 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이르며, 카스피해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우크라이나의 Srubnaya-Khvalynsk 문화는 학자들사이에서는 '말기 스루브나야'문화라 칭해진다. (아래 자료 참조)

 

Archaeologically, the expansion of the Scythians into the Pontic Steppe is attested through the westward movement of the Srubnaya-Khvalynsk culture into Ukraine contemporaneous with its movement to the south along the coast of the Caspian Sea. The Srubnaya-Khvalynsk culture in Ukraine is referred to in scholarship as the "Late Srubnaya" culture.[82]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이의 서쪽으로의 이동은, 시베리아 Karasuk culture에서 비롯되는 특별한 칼과 단검과 같은 물건이 흑해위 초원 북쪽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수반한다. 청동가마솥, 단검, 칼, 마구 등으로 구성되는 초기 스키타이 고고학적 문화의 특징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westward migration of the Scythians was accompanied by the introduction into the north Pontic region of articles originating in the Siberian Karasuk culture, such as distinctive swords and daggers, and which were characteristic of Early Scythian archaeological culture, consisting of cast bronze cauldrons, daggers, swords, and horse harnesses,[46][89] which had themselves been influenced by Chinese art, with, for example, the "cruciform tubes" used to fix strap-crossings being of types which had initially been modelled by Shang artisans.[9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이의 흑해위 초원으로의 이동은 기존의 문화를 파괴했다. 기존의 문화는 Sabatynivka culture는 드네프르강 계곡에 있었는데, 기원전 약 800년경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키메리언의 청동생산 중심지는 기원전 8-7세기동안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시기에 Chernogorovka-Novocherkassk 문화도 역시 방해 받았다. 스키타인의 이동은 남동유럽의 초원과 숲초원에 영향을 주었으며, 지역의 소규모 그룹의 부족들은 좀더 먼 지역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중에는 북코카서스그룹은 서쪽으로 후퇴하여 트란실바니아와 항가리 평원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이곳에 Novocherkassk문화 형태의 칼, 단검, 마구 등 물건을 들여왔다. 이러한 코카서스에서 이동한 소규모 부족들 중에는 Sigynnae가 있으며, 이들은 파노니아 유역의 동쪽 부분으로 서진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The Scythian migration into the Pontic Steppe destroyed earlier cultures, with the settlements of the Sabatynivka culture [uk] in the Dnipro valley being largely destroyed around c. 800 BC, and the centre of Cimmerian bronze production ceasing to exist during the 8th to 7th centuries BC, around the time which the Chernogorovka-Novocherkassk culture was also disturbed. The migration of the Scythians affected the steppe and forest steppe areas of south-east Europe and forced several other populations of the region, especially many smaller groups, to migrate towards more remote regions,[63] including some North Caucasian groups who retreated to the west and settled in Transylvania and the Hungarian Plain where they introduced Novocherkassk culture type swords, daggers, horse harnesses, and other objects:[91] among these displaced smaller populations from the Caucasus were the Sigynnae, who were displaced westward into the eastern part of the Pannonian Basin.[92][93][4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인의 팽창에 의헤 이동된 많은 부족중에는 Gelonians, Agathyrsi가 있는데, Agathyrsi부족은 스키타이와 관련있는 또 하나의 아리안 유목민이며, 흑해위 초원을 지배한 가장 오래된 아리안 사람들이다. Agathyrsi부족은 스키타인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는데, 초원과 그들의 원래 고향인 Maeotis호수(Sea of Azov)로부터 밀려 났으며, 이후 두 부족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흑해주위 초원에서 일부 스키타이 부족들은 이미 있던 원주민 좌식생활하는 트라키언 부족들과 통혼을 하였는데, 이로써 유목 스키타인이나 Alazones 같은 새로운 부족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mong the many peoples displaced by the Scythian expansion were also the Gelonians and the Agathyrsi, the latter of whom were another nomadic Iranic people related to the Scythians as well as one of the oldest Iranic population[94] to have dominated the Pontic Steppe. The Agathyrsi were pushed westwards by the Scythians, away from the steppes and from their original home around Lake Maeotis,[45][94] after which the relations between the two populations remained hostile.[45] Within the Pontic steppe, some of the Scythian tribes intermarried with the already present native sedentary Thracian populations to form new tribes such as the Nomadic Scythians and the Alazones.[7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The Scythian Kingdom in the Pontic-Steppe (source : Wikipedia)

 

(By Antiquistik - Own work based on:Batty, Roger (2007) Rome and the Nomads: The Pontic-Danubian Realm in Antiqu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 204−214 ISBN: 978-0-198-14936-1.Ivantchik, Askold (2018). Scythians. Encyclopædia Iranica.Olbrycht, Marek Jan (2000) "Remarks on the Presence of Iranian Peoples in Europe and Their Asiatic Relations" in Collectanea Celto-Asiatica Cracoviensia, Kraków: Księgarnia Akademicka, pp. 101–140 ISBN: 978-8-371-88337-8.Olbrycht, Marek Jan (2000) "The Cimmerian Problem Re-Examined: the Evidence of the Classical Sources" in Collectanea Celto-Asiatica Cracoviensia, Kraków: Księgarnia Akademicka, pp. 71−99 ISBN: 978-8-371-88337-8.Sulimirski, T. (1985) "The Scyths" in Gershevitch, I. , ed.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49–199 ISBN: 978-1-139-05493-5."The Scythians" in (1991)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3.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547–590 ISBN: 978-1-139-05429-4.Background from [1],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2858338 )

 

 

스키타인의 지배하에 있던 북쪽 Pontic 지역의 많은 지역에서, 스키타이인은 이미 주거하던 좌식생활하는 부족위에 지배계층으로 있었다. 이들의 지배하에 있던 부족들은 서쪽지역의 트라키언, Maeotis호수의 동쪽 해안의 Maeotians, 그리고 후에 흑해위 북쪽해안에 있던 그리스인들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In many parts of the north Pontic region under their rule, the Scythians established themselves as a ruling class over already present sedentary populations, including Thracians in the western regions, Maeotians on the eastern shore of Lake Maeotis, and later the Greeks on the north coast of the Black Sea.[18][9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650-625년 사이, Pontic 스키타인은, 스키타인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자 하는 그리스인들과 접촉하게 된다. 이런 지역은 Maeotis호수위 Taganrog 가까이 있는 Borysthenes섬, Panticapaeum, Pontic Olbia, 그리고 Taman 반도에 있는 Phanagoria, Heronassa 등이다.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인의 북쪽에 사는 이러한 좌식생활하는 숲과 초원의 부족들과 활발한 상업거래를 하였다. 이들 지역은 동유럽의 큰 강들이 흑해로 흘러 들기 때문에, 북쪽 시장에 대한 주요 접근 통로였다. 이러한 과정은 스키타인과 그리스인들이 항상 접촉하게 했으며,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식민지들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스키타인이 기원전 6세기 중반에 Panticapaeum을 파괴하기는 했지만. Pontic Olbia 주위의 영토는 이 시의 직할 통치였으며, 오직 그리스인들만이 살았다. (아래 자료 참조)

 

Between 650 and 625 BC, the Pontic Scythians came into contact with the Greeks, who were starting to create colonies in the areas under Scythian rule, including on the island of Borysthenes, near Taganrog on Lake Maeotis, as well as more places, including Panticapaeum, Pontic Olbia, and Phanagoria and Hermonassa on the Taman peninsula; the Greeks carried out thriving commercial ties with the sedentary peoples of the forest steppe who lived to the north of the Scythians, with the large rivers of eastern Europe which flowed into the Black Sea forming the main access routes to these northern markets. This process put the Scythians into permanent contact with the Greeks, and the relations between the latter and the Greek colonies remained peaceful, although the Scythians might have destroyed Panticapaeum at some poin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BC.[18][96] The territory around Pontic Olbia was under the direct rule of that city and was inhabited only by Greeks.[9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Scythian mounted archer, Etruscan art, early 5th century BC.[98]

 

Pontic 초원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아, 스키타인은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주변지역을 자주 약탈했다. 중부유럽은 그들의 빈번한 약탈 목표가 되었으며, Padolia, 트랜실바니아, 그리고 항가리 평원에 이르렀다. 기원전 7세기말부터 이후로 무기와 마구등을 포함한 새로운 물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초원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초기 스키타인과 연관되었다. 스키타인은 현재의 Bessarabia, Transylvania, Hungary, Slovakia지역에 해당하는 중부유럽안에서, 특히 트라키언과 항가리평원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Lusatian culture(1300-500 BC)의 많은 성곽지역이 이 시기의 스키타인의 공격에 파괴되었으며, Lusatian culture자체를 아예 파괴했다. (아래 자료 참조)

Using the Pontic steppe as their base, the Scythians over the course of the 7th to 6th centuries BC often raided into the adjacent regions, with Central Europe being a frequent target of their raids, and Scythian incursions reaching Podolia, Transylvania, and the Hungarian Plain, due to which, beginning in this period, and from the end of the 7th century onwards, new objects, including weapons and horse-equipment, originating from the steppes and remains associated with the early Scythians started appearing within Central Europe, especially in the Thracian and Hungarian plains, and in the regions corresponding to present-day Bessarabia, Transylvania, Hungary, and Slovakia. Multiple fortified settlements of the Lusatian culture were destroyed by Scythian attacks during this period, with the Scythian onslaught causing the destruction of the Lusatian culture itself.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즉 스키타인은 Lusatian문화 지역의 중부유럽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아래 루사티언문화지역(폴란드) 지도 (녹색지역) 참조) 그러나 아래에서 언급되는 스키타인의 서쪽 경계는 이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Lusatian culture area (Green Zone) (최대 지역) (자료 : 위키피디아)

(By Palkin - Own work, CC BY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64980 )

 

 

4) Presence in West Asia (서아시아 출현)

Gold Scythian belt title, Mingəçevir (ancient Scythian kingdom), Azerbaijan, 7th-4th century BC[103][104]

 

서아시아 진출 초기에, Ispakaia 왕 치하의 스키타인은 키메리언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 두그룹은, Mannaeans뿐만 아니라, 먼 관계가 있는 서아시아의 아리안 부족인 Medes와 동맹을 맺고, BC 714-680기간동안 Argishti II왕의 지배에 있던 Urartu왕국의 동쪽 국경을 위협했다. Argishti II왕의 후계자 Rusa II왕은 Teishebaini를 포함한 Urartu영토의 동쪽에 여러 요새를 쌓았다. 이는 키메리언, 만네언, 메데스, 그리고 스키타인에 의한 공격을 모니터하고 격퇴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e earliest phase of their presence in West Asia, the Scythians under their king Išpakaia were allied with the Cimmerians,[47] and the two groups, in alliance with the Medes, who were an Iranic people of West Asia to whom the Scythians and Cimmerians were distantly related, as well as the Mannaeans, were threatening the eastern frontier of the kingdom of Urartu during the reign of its king Argishti II, who reigned from 714 to 680 BC.[105] Argishti II's successor, Rusa II, built several fortresses in the east of Urartu's territory, including that of Teishebaini, to monitor and repel attacks by the Cimmerians, the Mannaeans, the Medes, and the Scythians.[10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당시 서아시아의 초강대국인 신앗시리아제국의 기록에 스키타인이 처음 언급된 것은 BC 680/679-678/677 사이이다. 이때 스키타인의 왕 Ispakaia가 Neo-Assyrian 제국을 공격하는데 있어, Mannaeans과 키메리언과 동맹에 가담했다. 이 시기에 Ispakaia왕의 스키타인은 Urartu의 Rusa II왕과 연합하여, Zamua의 앗시리아 지방에 이르는  남쪽 멀리까지 약탈하였다. 이 연합군은 앗시리아왕 Esarhaddon에 의해 패배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first mention of the Scythians in the records of the then superpower of West Asia, the Neo-Assyrian Empire, is from between 680/679 and 678/677 BC,[18] when their king Išpakaia joined an alliance with the Mannaeans[107] and the Cimmerians in an attack on the Neo-Assyrian Empire. During this time, the Scythians under Išpakaia, allied to Rusa II of Urartu, were raiding far in the south till the Assyrian province of Zamua. These allied forces were defeated by the Assyrian king Esarhaddon.[108][5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Scythian Kingdom in West Asia (source : Wikipedia)

 

Mannaeans는 이란고원으로 이주한 키메리언의 동부 그룹과 스키타인(Hubuskia왕국의 영토를 건너 앗시리아 국경지역을 공격했다)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를 제물로 삼아 Sarru-iqbi 와 Dur-Ellil 요새를 함락해 그들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annaeans, in alliance with an eastern group of the Cimmerians who had migrated into the Iranic plateau and with the Scythians (the latter of whom attacked the borderlands of Assyria from across the territory of the kingdom of Ḫubuškia), were able to expand their territories at the expense of Assyria and capture the fortresses of Šarru-iqbi and Dūr-Ellil.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앗시리아와 키메리언 사이 협상이 뒤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 협상에 따르면, 키메리언은 앗시리아와 Mannai사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바빌론 에언자는 Esarhaddon에게 Mannaeans도  키메리언도 신뢰하지 말고 양자를 감시하라고 조언했다. BC 676년에 Esarhaddon은 Mannai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였고, 이 전쟁에서 Ispakaia는 살해 되었다. Ispakaia후로 그의 아들로 판단되는 Bartatua가 계승했다. (아래 자료 참조)

Negotiations between the Assyrians and the Cimmerians appeared to have followed, according to which the Cimmerians promised not to interfere in the relations between Assyria and Mannai, although a Babylonian diviner in Assyrian service warned Esarhaddon not to trust either the Mannaeans or the Cimmerians and advised him to spy on both of them.[50] In 676 BC, Esarhaddon responded by carrying out a military campaign against Mannai during which he killed Išpakaia.[50] Išpakaia was succeeded by Bartatua, who might have been his son.[10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670년대 후반에 동부의 키메리언과 연합하여, 스키타인은 앗시리아 지방 Parsumas와 Bit Hamban을 위협했고, 이 키메리언-스키타인의 연합군은 앗시리아제국과 그의 속국 Hubuskia사이의 연락을 위협했다. Mannaeans, 동부 키메리언, Medes는 곧 거대한 연합을 이루고, 메디아 족장  Kashtariti가 지휘하게 된다. (아래 자료 참조)

 

In the later mid-670s BC, in alliance with the eastern Cimmerians, the Scythians were menacing the Assyrian provinces of Parsumaš and Bīt Ḫamban, and these joint Cimmerian-Scythian forces together were threatening communication between the Assyrian Empire and its vassal of Ḫubuškia.[109] The Mannaeans, eastern Cimmerians, and Medes soon joined a grand coalition headed by the Median chieftain Kashtariti.[11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5) Bartatua and the alliance with Assyria (바르타투아와 앗시리아 연합)

 

Ispakaia가 죽운 후, 그의 아들 Bartatua가 계승하자, 앗시리아와 바로 협상을 시작하고, 기원전 674년 그들은 Kashtariti를 패배시킬 수 있었으며, 이후 그들의 연합은 깨졌다. (아래 자료 참조)

Išpakaia was succeeded by Bartatua, who might have been his son,[108] and with whom they had already started negotiations immediately after Išpakaia's death[50] and they had been able to defeat Kashtariti in the meantime in 674 BC, after which his coalition disintegrated.[10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672년, Bartatua는 앗시리아와 접근을 추구했고, Esarhaddon의 딸 Seru a-etirat와 결혼을 청했다. 이는 Esarhaddon이 태양의 신 Samas의 신탁에 청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실제 결혼이 이루어졌는지 앗시리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Bartatua치하의 스키타인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 Madyes와 앗시리아의 밀접한 동맹은 이 결혼을 앗시리아 사제가 추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앗시리아 역사에서 앗시리아 왕의 공주와 유목민 수장이 결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스키타인은 Medes로부터 분리되었고, 앗시리아와 군사적 동맹을 가졌으며, Seru a-etirat는 아마도 Bartatua의 아들 Madyes의 어머니일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In 672 BC[18] Bartatua himself sought a rapprochement with the Assyrians and asked for the hand of Esarhaddon's daughter Šērūʾa-ēṭirat in marriage, which is attested in Esarhaddon's questions to the oracle of the Sun-god Šamaš. Whether this marriage did happen is not recorded in the Assyrian texts, but the close alliance between the Scythians and Assyria under the reigns of Bartatua and his son and successor Madyes suggests that the Assyrian priests did approve of this marriage between a daughter of an Assyrian king and a nomadic lord, which had never happened before in Assyrian history; thus, the Scythians were separated from the Medes and were brought into a marital alliance with Assyria, and Šērūʾa-ēṭirat was likely the mother of Bartatua's son Madyes.[50][47][108][106][111][112][7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앗시리아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을 고려할 때, 앗시리아가 마지못해 결혼동맹에 부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기고 싶지 않은 기록일 수 있다.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Esharhaddon 앗시리아왕이 바르타투아 스키타이왕에게 패해, 공주를 시집보내고 거액의 공물을 지불한 후 평화적 관계가 되었다 기록하였다. 

 

 

바르타투아의 Seru a-etirat와 결혼은 그가 앗시리아의 위성국가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앗시리아의 법에 따라, 그가 지배하는 영토는 앗시리아왕이 수여하는 봉토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스키타인의 서아시아에의 출현은 명목적으로는 신앗시리아의 팽창이 되며, 바르타투아는 앗시리아의 총독이 된다. 이러한 정리하에, 서아시아에서의 스키타인의 힘은 앗시리아제국과의 협력에 크게 의존했으며, 이후로 스키타인은 앗시리아 제국의 동맹으로 남게 되었다. 바르바투아는 앗시리아를 도와 Mannai국을 패배시키고 스키타이의 패권을 강요했다. 이 시기에 우라르트 왕 Rusa II는 그의 서쪽 국경지역을 지키는 스키타이 군대로 등록하였을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Bartatua's marriage to Šērūʾa-ēṭirat required that he would pledge allegiance to Assyria as a vassal, and in accordance to Assyrian law, the territories ruled by him would be his fief granted by the Assyrian king, which made the Scythian presence in West Asia a nominal extension of the Neo-Assyrian Empire and Bartatua himself an Assyrian viceroy. Under this arrangement, the power of the Scythians in West Asia heavily depended on their cooperation with the Assyrian Empire; henceforth, the Scythians remained allies of the Assyrian Empire,[46] with Bartatua helping the Assyrians by defeating the state of Mannai and imposing Scythian hegemony over it.[113] Around this time, the Urartian king Rusa II might also have enlisted Scythian troops to guard his western borderlands.[10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위의 결혼동맹에 대한 해석은 너무 앗시리아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 이후 스키타이가 계속 주위에 패권을 행사한 것을 보면, 앗시리아보다 스키타인의 영향력이 더 큰 것을 보여 주는데, 스키타이가 앗시리아에 복속되었다면 앗시리아의 패권이 더 영향력이 커야 할 것이다. 2021년 자료가 더 정확히 언급했다 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 자료가 일부 작가에 의해 왜곡되는 사례를 보여 준다. 

 

스키타이왕과 앗시리아 지배왕조사이의 군사적 동맹과 앗시리아 영향을 받은 Mannai와 Urartu와 스키타이의 근접성은 스키타인이 앗시리아 문화의 강한 영향하에 있게 하였으며, 서아시아 문명과의 접촉은 스키타이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메소포타미아와 트랜스코카시언 부족들로부터 받아 들인 스키타인에게 다소 외국적인 개념중에서는, 왕권이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왕족 장례에서 순장이 행해지는 것을 들 수 있으며, 스키타이왕이 이후로 서아시아왕의 통치스타일을 흉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arital alliance between the Scythian king and the Assyrian ruling dynasty, as well as the proximity of the Scythians with the Assyrian-influenced Mannai and Urartu, thus placed the Scythians under the strong influence of Assyrian culture,[46] and contact with the civilisation of West Asia would have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Scythian culture.[45] Among the concepts initially foreign to the Scythians which they had adopted from the Mesopotamian and Transcaucasian peoples was that of the divine origin of royal power, as well as the practice of performing human sacrifices during royal funerals, and the Scythian kings henceforth imitated the style of rulership of the West Asian kings.[114][4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왕권이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은 고대에 널리 퍼진 개념으로 중앙아시아에서도 존재했던 사상이므로 사카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사상일 수 있으며, 순장 풍습도 그렇다고 판단된다. 서아시아문명이 아니라도 있을 수 있는 사상이다. 단군시절에도 있었던 사상이다. 

 

6) West Asian influence on Scythians (스키타인에 대한 서아시아 영향)

 

 

The Scythian Snake-Legged Goddess and other artifacts, from Kul-Oba.

 

스키타인은 Uratu부족들과 Transcaucasia부족들의 문화 요소들을 채택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효울적인 무기에서 더 그렇다: akinakes 칼과 3개의 날을 가진 청동 화살촉은 스키타인의 전형적인 무기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트랜스코카시언 오리진이며, 스키타인이 코카서스에 머물 때 채택한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Scythians adopted many elements of the cultures of the populations of Urartu and Transcaucasia, especially of more effective weapons: the akīnakēs sword and socketed bronze arrowheads with three edges, which, although they are considered as typically "Scythian weapons," were in fact of Transcaucasian origin and had been adopted by the Scythians during their stay in the Caucasus.[85][8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이 본래의 전형적 예술은 기원전 650-600년 사이에 기원하는데, 이는 스키타이 왕족이 서아시아의 넓은 길죽한 땅을 통치할 때에 필요에 의한 것으로서, 지비에 창고의 물건이 첫째 예가 된다. 이후 기원전 6세기에 서아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는 서부 Ciscaucasia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우크라이나의 Melhuniv kurgan과 지금의 폴란드의 Witaszkowo kurgan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예술 스타일은 원래 스키타인 상류층에만 국한되었으며, 서아시아와 흑해위 초원지역에서 스키타인 하층계급에서는 채택하지 않았으며, 단지 뼈로된 볼치장 물건과 장식되지 않는 단순한 청동 버클만을 사용했다. 반면, 흑해 초원 그룹은 아직도 Srubnaya문화와 Andronovo문화 타입의 기하학적 패턴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art typical of the Scythians proper originated between 650 and 600 BC for the needs of the Royal Scythians at the time when they ruled over large swathes of West Asia, with the objects of the Ziwiye hoard being the first example of this art. Later examples of this West Asian-influenced art from the 6th century BC were found in western Ciscaucasia, as well as in the Melhuniv kurhan [uk] in what is presently Ukraine and in the Witaszkowo kurgan [pl] in what is modern-day Poland. This art style was initially restricted to the Scythian upper classes, and the Scythian lower classes in both West Asia and the Pontic steppe had not yet adopted it, with the latter group's bone cheek-pieces and bronze buckles being plain and without decorations, while the Pontic groups were still using Srubnaya- and Andronovo-type geometric patterns.[11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7) Conquest of Mannai (Mannai 의 복속)

 

BC 660-BC 659기간에 걸쳐, 앗시리아의 Esarhaddon의 아들로서 계승자인 Ashurbanipal은 Mannai에 대한 정복원정에 그의 장군 Nabu-sar-usur를 보냈다. 앗시리아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한 후, Mannaean왕 Ahseri는 주민 폭동에 의해 전복되어 그의 왕족들 대부분 살해되었다. 살아 남은 아들 Ualli는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Ashurbanipal의 친척 스키타인왕 Barbatua가 보내졌으며, 이후 스키타인은 그들의 패권을 Mannai에게 확장했다. (아래 자료 참조)

Over the course of 660 to 659 BC, Esarhaddon's son and successor to the Assyrian throne, Ashurbanipal, sent his general Nabû-šar-uṣur to carry out a military campaign against Mannai. After trying in vain to stop the Assyrian advance, the Mannaean king Aḫsēri was overthrown by a popular rebellion and was killed along with most of his dynasty by the revolting populace, after which his surviving son Ualli requested help from Assyria, which was provided through the intermediary of Ashurbanipal's relative, the Scythian king Bartatua, after which the Scythians extended their hegemony to Mannai itself.[113][10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설명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앗시리아의 원정으로 시작했는데, Mannai에 대한 패권이 앗시리아에게 가야 하는데, 스키타이에게 갔다고 설명한다. 실질적인 힘은 앗시리아가 아니라 스키타이가 가졌다는 의미이다. 즉 2021년 자료가 말하는 것처럼 스키타이 힘으로 만네를 정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앗시리아 편향적인 편집자가 왜곡을 일삼는 것 같다. 앗시리아 관련하여 2024년 스키타이 위키피디아 자료를 계속 언급해야 할 지 고민된다. 

 

이 같은 시기에, Bartatua의 스키타인은 Urartu의 남동쪽 영토의 상당부분을 인수할 수 있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Around this same time, Bartatua's Scythians were also able to take over a significant section of the south-eastern territories of the state of Urartu.[10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역시 실질적 힘은 스키타이에게 있고, 앗시리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로 판단된다. 

 

8) Madyes

 

Bartatua의 아들 Madyes가 Urartu나라의 스키타이 패권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Bartatua was succeeded by his son with Šērūʾa-ēṭirat, Madyes, who soon expanded the Scythian hegemony to the state of Urartu.[117][47][4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역시 스카타이의 활동이 앗시리아를 넘어서는 것을 보여 준다. 

 

9) Conquest of Media (메디아 복속)

 

기원전 650년대에 걸쳐 앗시리아가 쇠퇴함에 따라, Esarhaddon의 다른 아들 Sams-suma-ukin은 바빌론왕으로 승계했는데, 그의 형제 Ashurbanipal에 기원전 652년 반란을 일으켰고, Medes는 그를 지원했다. 스키타이왕 Madyes는 Medes를 침공함으로써 Ashurbanipal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외부적으로 도왔다. 메디언 왕 Phraotes는 전쟁에서 죽었다. Madyes는 이후 28년간 Medes에 대한 스키타이 패권을 행사한다. 이 시작을 그리스 저자는 "아시아에 대한 스키타이의 지배"라 부른다. Media, Mannai, 그리고 Urartu 모두 스키타이의 지배하에 왕국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아래 자료 참조)

When, following a period of Assyrian decline over the course of the 650s BC, Esarhaddon's other son, Šamaš-šuma-ukin, who had succeeded him as the king of Babylon, revolted against his brother Ashurbanipal in 652 BC, the Medes supported him, and Madyes helped Ashurbanipal suppress the revolt externally by invading the Medes. The Median king Phraortes was killed in battle, either against the Assyrians or against Madyes himself, who then imposed Scythian hegemony over the Medes for twenty-eight years on behalf of the Assyrians, thus starting a period which Greek authors called called the “Scythian rule over Asia,”[117][51][47][46] with Media, Mannai, and Urartu all continuing to exist as kingdoms under Scythian suzerainty.[11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시기에, Medes는 스키타이의 활쏘는 기술과 장비를 택하는데, 이는 그들의 서아시아 부족들에 대한 우월함때문이다. 서유라시아로의 실크무역이 바로 이시기에 스키타이가 서아시아에 머물 때 스키타이의 중개로 시작했다. 이는 실크의 최초 출현이 Urartian 요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의 중개로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is period, the Medes adopted Scythian archery techniques and equipment due to their superiority over those of the West Asian peoples,[50] and the trade of silk to western Eurasia might have started at this time through the intermediary of the Scythians during their stay in West Asia, with the earliest presence of silk in this part of the world having been found in a Urartian fortress, presumably imported from China through the intermediary of the Scythians.[10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이의 중개로 중국의 비단이 서아시아 Urartu까지 비단무역이 있었다는 가정은 스키타이와 동방의 사카가 동일체라는 것을 가정한다. 여기서 중국은 지금의 중공위치를 상정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An Assyrian relief depicting Cimmerian mounted warriors

 

10) 키메리언의 활동 및 패배

 

기원전 7세기동안에, 키메리언 집단이 아나톨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는 BC 669년부터 통치하고 있는 Ashurbanipal의 앗시리아의 위협이 되었다. BC 657년 앗시리아의 기록은 이러한 위협 또는 시리아에서 신앗시리아제국의 서쪽 지역 정복을 언급했다. 이러한 키메리언의 공격성은 Ashurbanipal이 제국의 북서쪽 국경의 안전을 근심하게 했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e 7th century BC, the bulk of Cimmerians were operating in Anatolia, where they constituted a threat against the Scythians’ Assyrian allies, who since 669 BC were ruled by Madyes's uncle, that is Esarhaddon's son and Šērūʾa-ēṭirat's brother, Ashurbanipal. Assyrian records in 657 BC might have referred to a threat against or a conquest of the western possessions of the Neo-Assyrian Empire in Syria,[118][119] and these Cimmerian aggressions worried Ashurbanipal about the security of his empire's north-west border.[12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657년까지, 앗시리아 신탁기록은 키메리언 왕 Tugdammi를 "온 세계의 왕"(King of the Universe)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보통 신앗시리아왕에게만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Tugdammi의 앗시리아에 대한 성공은 그가 고대 서아시아에서 앗시리아의 Ashurbanipal과 동등한 정도의 강력한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주의 왕이라 불리는 것은 키메리언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키메리언왕이 그렇게 불린 것을 의미하며, 앗시리아가 되찾아와야 할 영광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650년대에서 기원전 64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By 657 BC the Assyrian divinatory records were calling the Cimmerian king Tugdammi by the title of šar-kiššati ("King of the Universe"), which could normally belong only to the Neo-Assyrian King: thus, Tugdammi's successes against Assyria meant that he had become recognised in ancient West Asia as equally powerful as Ashurbanipal, and the kingship over the Universe, which rightfully belonged to the Assyrian king, had been usurped by the Cimmerians and had to be won back by Assyria. This situation continued throughout the rest of the 650s BC and the early 640s BC.[1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상기 글은 키메리언의 Tugdammi왕 시기의 위세가 서아시아를 압도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심지어 스키타인도 키메리언의 Tugdammi아래 연합한 것을 우리는 앞의 History Files 자료에서 살펴 보았다. Tugdammi는 앗시리아 부조에 사카의왕, Gutium의 왕이라 적혀있다. 여기서도 키메리언과 스키타인, 사카인의 동질성을 확인 할 수 있다. Tugdammi는 메디어왕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우리는 위에서 History Files 자료를 통해 살펴 보았다. 즉 Medes, Cimmerians, Scythians, Sakas의 연관성이 깊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기원전 644년, Tugdammi에 의해 리드되는 키메리언은 리디아 왕국을 공격하여 리디언을 패배시키고 그 수도 Sardis를 함락했다. : 리디아 왕 Gyges는 이 전쟁에서 죽었다. Sardis를 포위한 후 Tugdammi의 키메리언은 아나톨리아 서쪽 해안에 있는 Ionia와 Aeolis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범했다. (아래 자료 참조)

 

In 644 BC, the Cimmerians, led by Tugdammi, attacked the kingdom of Lydia, defeated the Lydians and captured the Lydian capital, Sardis; the Lydian king Gyges died during this attack.[121][120][122] After sacking Sardis, Tugdammi led the Cimmerians into invading the Greek city-states of Ionia and Aeolis on the western coast of Anatolia.[1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리디아와 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공격후, 약 기원전 640년경, 키메리언은 신앗시리아의 북서쪽 국경에 있는 Cilicia로 이동했다. 여기서 Tugdammi는 그에 대한 반란에 직면하고, 앗시리아와 연합하고, 앗시리아를 지배자로 인정하고 Ashurbanipal에 공물을 보내고 충성을 맹세했다. Tugdammi는 곧 맹세를 깨고 신앗시리아를 다시 공격했으나, 병이 들어 기원전 640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Sandaksatru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fter this attack on Lydia and the Asian Greek cities, around 640 BC the Cimmerians moved to Cilicia on the north-west border of the Neo-Assyrian empire, where, after Tugdammi faced a revolt against himself, he allied with Assyria and acknowledged Assyrian overlordship, and sent tribute to Ashurbanipal, to whom he swore an oath. Tugdammi soon broke this oath and attacked the Neo-Assyrian Empire again, but he fell ill and died in 640 BC, and was succeeded by his son Sandakšatru.[121][12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Tugdammi에 대한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는 Tugdammi는 Madys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죽었다고 Strabo는 언급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historian Strabo suggest that Madys killed Tugdamme and defeated his forces. Ashurbanipal says Marduk defeated Tugdamme, which may suggest that an outside element had defeated Tugdamme and not the Assyrians; this outside element may have been Madys.[1]

(source : Tugdamme, Wikipedia, 2021)

 

BC 637년, 트라키언 Treres 부족은 트라키언 보스포러스를 건너 아나톨리아를 침범했다. Kobos왕은 키메리언과 연합하여 리디아왕국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리디아왕 Ardys(Gyges 아들)이 전사했을 것이다. Ardys 아들 Sadyattes왕도 BC 635년 키메리언의 공격에 전사했을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In 637 BC, the Thracian Treres tribe who had migrated across the Thracian Bosporus and invaded Anatolia,[123] under their king Kōbos and in alliance with Sandakšatru's Cimmerians and the Lycians, attacked Lydia during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Gyges's son Ardys.[121] They defeated the Lydians and captured their capital of Sardis except for its citadel, and Ardys might have been killed in this attack.[124] Ardys's son and successor, Sadyattes, might possibly also have been killed in another Cimmerian attack on Lydia in 635 BC.[12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BC 635년이후 곧, 스키타인왕 Madyes는 리디아와 연합하여 아나톨리아로 진입하여 Trees를 소아시아에서 쫓아내며, 키메리언을 패배시킨다. 이로써 스키타인은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그들의 지배력을 넓혀갔다. (아래 자료 참조)

Soon after 635 BC, with Assyrian approval[125] and in alliance with the Lydians,[126] the Scythians under Madyes entered Anatolia, expelled the Treres from Asia Minor, and defeated the Cimmerians so that they no longer constituted a threat again, following which the Scythians extended their domination to Central Anatolia.[51][121]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키메리언의 마지막 패배는 스트라보는 Madyes의 연합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고, 헤로도투스와 Polyaenus는 리디아왕 Alyattes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장한다. Polyaenus의 키메리언 패배 설명에서는 리디아왕 Alyattes는 war-dogs을 이용했다 한다. 그리스 해석에 의하면 war-dogs는 젊은 스키타인 전사를 말하며, 이들은 Koryos(고려?)의 전해오는 인도 유럽식 의례를 따라, 늑대전사 또는 dog-warriors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is final defeat of the Cimmerians was carried out by the joint forces of Madyes, whom Strabo credits with expelling the Treres and Cimmerians from Asia Minor, and of the son of Sadyattes and the great-grandson of Gyges, the Lydian king Alyattes, whom Herodotus of Halicarnassus and Polyaenus claim finally defeated the Cimmerians.[118][127] In Polyaenus' account of the defeat of the Cimmerians, he claimed that Alyattes used "war dogs" to expel them from Asia Minor, with the term "war dogs" being a Greek folkloric reinterpretation of young Scythian warriors who, following the Indo-European passage rite of the kóryos, would ritually take on the role of wolf- or dog-warriors.[12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상기 자료에 의하면, 스키타인도 war-dogs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 그림과 같이 키메리언도 war-dogs을 이용했는데,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Cimmerians with war-dogs in Anatolia (source : The History Files)   

 

 Cimmerians warriors with dogs (source : The History Files)

 

서아시아에서 스키타인의 힘은 Madyes왕 시기에 절정에 달한다. 그의 영토는 서로는 아나톨리아의 halys river에서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메디아의 동쪽국경에 달하고, 북으로는 트랜스코카시아에서 남으로는 신앗시리아의 북쪽 국경에 달한다. (아래 자료 참조)

Scythian power in West Asia thus reached its peak under Madyes, with the territories ruled by the Scythians extending from the Halys river in Anatolia in the west to the Caspian Sea and the eastern borders of Media in the east, and from Transcaucasia in the north to the northern borders of the Neo-Assyrian Empire in the south.[52][51][5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한 스키타이그룹은 메디아를 떠나 돈강과 볼가강사이의 지역, 북코카서스의 Azov해 근처로 이동했는데, BC 7세기의 일이며, 이후 이들은 모계중심의 문화를 가진 Maeotians과 섞여서 Sauromatian 부족을 이루었다. (아래 자료 참조)

A Scythian group might have left Media and migrated into the region between the Don and Volga rivers, near the Sea of Azov in the North Caucasus, during this period in the 7th century BC, after which they merged with Maeotians who had a matriarchal culture and formed the Sauromatian tribe.[4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11) Revolt of Media (메디아의 봉기)

 

기원전 620년대에, 신앗시리아제국은 BC 631년 Ashurbanipal의 사망이후 흐트러지기 시작하는데, 내부적 불안정도 더해져, 바빌론왕 Nabopolassar이 BC 626년 앗시리안에 봉기했다. 다음해 BC 625년, 미디어왕 Cyaxares는 스키타이 지도자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그들이 취한 후, Madyes왕을 비롯한 모두를 참살했다. (아래 자료 참조)

By the 620s BC, the Neo-Assyrian Empire began unravelling after the death of Ashurbanipal in 631 BC: in addition to internal instability within Assyria itself, Babylon revolted against the Assyrians in 626 BC under the leadership of Nabopolassar;[113] and the next year, in 625 BC, Cyaxares, the son of Phraortes and his successor to the Median kingship, overthrew the Scythian yoke over the Medes by inviting the Scythian rulers to a banquet and then murdering them all, including Madyes, after getting them drunk.[129][130][131][47][10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상기 메디어왕 Cyaxares의 스키타이 지도부 참살은 Tugdamme를 Madyes왕이 죽였다는 것에 대한 보복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Tugdamme왕은 메디왕 Phraortes라는 추정이 사실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메디아는 스키타이 지배에서 벗어나지만, 이후 스키타이와 연합하여 신앗시리아제국을 무너뜨리는 전쟁에 협력한다. Madyes왕이 아버지 Bartatua왕때 맺은 앗시리아 공주와 결혼관계로 인해 친앗시리아 정책을 편 것에 대한 메디아의 대응이라 여겨진다. 

 

12) 레반트, 이집트까지 진출

 

Shortly after Madyes's assassination, some time between 623 and 616 BC, the Scythians took advantage of the power vacuum created by the crumbling of the power of their former Assyrian allies and overran the Levant.[18][132]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Madyes의 암살 직후, BC 623-BC 616년 사이 어느 시기에, 스키타인은 동맹이었던 앗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Levant지역(현재의 레바논, 이스라엘, 시리아 등 지역)을 침략했다. (상기 자료 참조)

 

This Scythian raid into the Levant reached as far south as Palestine, and was foretold by the Judahite prophets Jeremiah and Zephaniah as a pending "disaster from the north," which they believed would result in the destruction of Jerusalem,[108] but Jeremiah was discredited and in consequence temporarily stopped prophetising and lost favour with the Judahite king Josiah when the Scythian raid did not affect Jerusalem and or Judah.[108][13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레반트지역에 대한 스키타인의 침략은 팔레스타인까지 이르며, 성경의 이스라엘 예언자 에레미야가 말하는 "북으로부터의 재앙"으로 예루살렘의 파괴를 의미했다. 그러나 스카타인의 침략은 예루살렘이나 유다에 이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유대왕 여호수아의 신임을 잃었다. (상기 자료 참조)

그러나 이집트국경까지 다다른 스키타인의 팽창은 이스라엘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상기 내용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The Scythian expedition instead reached up to the borders of Egypt, where their advance was stopped by the marshes of the Nile Delta,[18][132] after which the pharaoh Psamtik I met them and convinced them to turn back by offering them gifts.[51][13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인의 팽창은 이집트국경까지 이르렀으며, 이들의 진격은 나일강 델타의 습지에 의해 멈쳐졌다. 파라오 Psamtik I는 스키타인을 만나 선물을 주고 이들이 되돌아가게 설득했다. (상기 내용 참조)

이집트 파라오가 선물을 주었다는 것은 공물을 바치고 평화협정을 맺은 것으로 해석된다. 즉 실질적으로 이집트까지 복속한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이집트 영역이 그리스지역과 더불어 하나라의 영역이 아닌가 추정했다. 중국의 하나라는 흉노의 조상이라 한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719

 

12) 앗시리와의 전쟁

 

According to Babylonian records, around 615 BC the Scythians were operating as allies of Cyaxares and the Medes in their war against Assyria, with the Scythians' abandonment of their alliance with Assyria to instead side with the Babylonians and the Medes being a critical factor in worsening the position of the Neo-Assyrian Empire,[136] and the Scythians participated in the Medo-Babylonian conquests of Aššur in 614 BC, Nineveh in 612 BC, and Ḫarran in 610 BC, which permanently destroyed the Neo-Assyrian Empire.[137][52][13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바빌로니아 기록에 의하면, 약 기원전 615년에, 스키타인은 Medes의 Cyaraxes왕의 동맹으로서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전쟁을 했다. 바빌론과 Medes, 스키타인이 연합을 이룬 것은 앗시리아를 악화 시키는 치명적 요소였다. 스키타인은 메디아-바빌로니아의 Assur정복(BC 614), Nineveh정복 (BC 612), Harran정복(BC 610)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는 신앗시리아의 멸망을 초래했다. (상기 자료 참조)

 

The presence of Scythian-style arrowheads at locations where the Neo-Babylonian Empire is known to have conducted military campaigns, and which are associated with the destruction layers of these campaigns, suggests that certain contingents composed of Scythians or of Medes who had adopted Scythian archery techniques might have recruited by the Neo-Babylonian army during this war.[13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원정을 한 곳에서 스키타인 양식의 화살촉이 발견된 것은 신바빌로니아 군에 합류한 스키타인이나 메디아군의 파견대가 참여하여 스키타인 활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상기 자료 참조)

 

These contingents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Carchemish in 605 BC,[138] while clay figurines depicting Scythian riders, as well as an Ionian shield and a Neo-Hittite battle-axe similar to those found in Scythian remains in the Pontic steppe, suggest that actual Scythian mercenaries had also participated at the final Neo-Babylonian victory over the Egyptians at Carchemish.[7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러한 일부 파견대는 BC 605년 Carchemish전쟁에도 참여했는데, Pontic초원에서 발견된 스키타인의 유물과 유사한, 이오니언 방패나 신히타이트 전투용 도끼뿐만 아니라, 스키타인 기병을 나타내는 진흙 모형은 스키타인 용병이 신바빌로니아의 이집트에 대한 마지막 승리전쟁(Carchemish)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cythian or Scythian-style contingents also participated in the Neo-Babylonian campaigns in the southern Levant, including in the Babylonian annexation of the kingdom of Judah in 586 BC.[13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인 또는 스키타인 형태의 파견대는 또한 남부 레반트에 대한 신바빌로니아 원정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전쟁으로 BC 586년 유대왕국은 바빌로니아의 부용국이 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13) 서아시아에서의 철수

 

 

Scythian warrior with axe, bow, and spear. Possibly Greek work 4th-2nd century BCE (archaic). Marble with red paint and gold leaf

 

The rise of the Medes and their empire allowed them to finally expel the Scythians from West Asia in the c. 600s BC,[139] after which, beginning in the later 7th and lasting throughout much of the 6th century BC, the majority of the Scythians migrated from Ciscaucasia into the Pontic Steppe, which became the centre of Scythian power.[114][108][4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메데스제국의 부흥은 서아시아에서 BC 600년대에 스키타인을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그후 BC 7세기후부터 6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스키타인은 코카서스로부터 Pontic Steppe으로 이동하였으며, 이곳이 스키타이의 중심부가 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The inroads of the Cimmerians and the Scythians into West Asia over the course of the 8th to 6th centuries BC had destabilised the political balance which had prevailed in the region between the states of Assyria, Urartu, Mannaea and Elam on one side and the mountaineer and tribal peoples on the other, resulting in the destruction of these former kingdoms and their replacement by new powers, including the kingdoms of the Medes and of the Lydians.[5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BC 8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스키타인과 키메리언의 서아시아 진출은 앗시리아, 우라르트, 만네아, 엘람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정치체계를 불안정하게 했으며, 또한 산에 사는 사람들과 부족들도 불안정하게 하여, 결국 기존의 왕국들을 메데스나 리디안 왕국 같은 새로운 세력으로 대체시켰다. (상기 자료 참조)

 

Some splinter Scythian groups nevertheless remained in West Asia, in the southeast Caucasus, and settled in Transcaucasia, especially the area corresponding to modern-day Azerbaijan[45] in eastern Transcaucasia,[46] due to which the area where they lived, and which corresponded to the core regions of the former West Asian Scythian realm, was called Sakašayana, meaning "land inhabited by the Saka (i.e. Scythians)," by the Medes after they had annexed this region to their empire.[140] The Median name for this territory was later recorded by Titus Livius under the form of Sacassani, and as Sakasēnē by Ptolemy, while the country was called the “Land of the Skythēnoi” by Xenophon.[8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일부 갈라진 스키타인 그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아시아, 코카서스 남동쪽, 트랜스코카시아, 특히 현대의 아제르바이젠 (동부 트랜스코카시아)에 남아 있어, 메데스제국이 이지역을 제국에 부용시키면서, 사카사이아나(Sakasayana), 즉 "사카(스키타인)이 사는 땅" 의 의미로 불렀다.  이 지역에 대한 미디언 이름은 후에 Titus Livius에 의해 Sacassan 으로 기록되었으며, 프톨레미에 의해서는 Sakasene, Xenophon에 의해서는 " Skythonoi의 땅"으로 불리웠다. (상기 자료 참조)

 

One such splinter group joined the Medes and participated in the Median conquest of Urartu, with Scythian arrowheads having been found in the destruction layers of the Urartian fortresses of Argištiḫinili and Teišebani, which were conquered by the Medes around c. 600 BC.[141][108] One group formed a kingdom in what is now Azerbaijan under Median overlordship, but eventually hostilities broke out between some of them and Cyaxares, due to which they left Transcaucasia and fled to Lydia.[142]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러한 분리된 그룹은 Medes에 합류하여 메디언의 우라르트 정복에 참여하였다. 우라르트의 요새 Argistihinili, Teisebani의 파괴된 부분에서 스키타인 화살촉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Medes에 의해 BC 600년경에 정복되었다. 하나의 그룹은 메디언 지배하에 지금의 아제르바이젠에 왕국을 건설했는데, 결국 그들의 일부와 Cyaxares와 적개심이 터져, 이들은 트랜스코카시아를 떠나 리디아로 옮겼다. (상기 자료 참조)

 

 

Ancient Lydia map (source : Wikipedia)

 

River map in Turkiye (source : Wikipedia)

 

상기 지도를 보면 과거 리이아왕국 지역에 지금의 튀르키예 지도에서 흑해로 흐르는 Sakarya river라는 사카의 강이라는 이름이 눈에 띤다. 필자는 과거 이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By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BC, the Scythians who had remained in West Asia had completely assimilated culturally and politically into Median society and no longer existed as a distinct group.[143]

Meanwhile, other Transcaucasian Scythian splinter groups later retreated northwards to join the West Asian Scythians who had already previously moved into the Kuban Steppe.[8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BC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서아시아에 남았던 스키타인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메디아 사회에 동화하여 더이상 구별된 그룹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반면, 다른 트랜스코카시언 스키타인 그룹은 후에 북쪽으로 후퇴하여 이미 Kuban초원으로 이동한 서아시아 스키타인에 합류했다. (상기 자료 참조)

 

 

14) Pontic Scythian kingdom

 

(1) Early phase

 

An Attic red-figure vase-painting of a Scythian archer. Epiktetos, 520–500 BC.[144]

 
 
 
 

Red-figured amphora with a Scythian warrior, 480-470 BC, from Athens

 

 

After their expulsion from West Asia, and beginning in the later 7th and lasting throughout much of the 6th century BC, the majority of the Scythians, including the Royal Scythians, migrated into the Kuban Steppe in Ciscaucasia around 600 BC,[96] and from Ciscaucasia into the Pontic Steppe, which became the centre of Scythian power,[45] Although Herodotus of Halicarnassus claimed that the Scythians retreated into the northern Pontic region through Crimea, archaeological evidence instead suggests that the Royal Scythians migrated northwards into western Ciscaucasia,[145] and from there into the country of those Scythians who had previously established themselves in the Pontic steppe.[96][4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기원전 7세기후반부터 6세기에 걸쳐 서아시아로부터 철수한 후, 스키타이왕족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키타인은 약 BC 600년경 Ciscaucasia의 Kuban 초원으로 이주했고, 다시 Pontic 초원으로 이주하여 여기가 스키타이의 중심지가 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인이 크리미아를 거쳐 북쪽 Pontic지역으로 이동했다 주장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로는 스키타이왕족이 서쪽 Ciscaucasia를 거쳐 북쪽으로 이주하고, 다시 거기서 이미 Pontic 초원에 그들이 과거 확립했던 스키타이 나라로 이동한 것이다. (상기 자료 참조)

 

Some of the Scythian groups who had settled in the eastern Pontic steppe to the east of the Dnipro river were displaced by the arrival of the Royal Scythians from West Asia, and they moved north into the region of the forest-steppe zone,[146] outside of the Pontic Scythian kingdom itself. These groups formed the tribes of the Androphagi, Budini, and Melanchlaeni.[14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드네프르강 동쪽에 동쪽 Pontic초원에 살았던 일부 스키타인 그룹은, 서아시아로부터 왕족 스키타인이 도착함에 따라, 이들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Pontic 스키타이왕국의 바깥쪽인 숲-초원의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그룹들이 Androphagi, Budini, Melanchlaeni 부족들이다. (상기 자료 참조)

 

During this early phase of the Pontic Scythian kingdom, the hold of the Royal Scythians on the western part of the steppe located to the west of the Dnipro was light, and they were largely satisfied with the tribute they levied on the sedentary agriculturist population of the region. Meanwhile, the tribe of the Aroteres, which consisted of a settled Thracian population over which ruled an Iranic Scythian ruling class, imported Greek pottery, jewellery and weapons in exchange of agricultural products, and in turn offered them in tribute to their Scythian overlords.[147][97] However, the country of the Alazones tribe appears to have become poorer during this time, in the early 6th century BC, when many of the rebuilt pre-Scythian settlements in their territory were destroyed by the Royal Scythians arriving from West Asia.[5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Pontic스키타인왕국의 초기에는 드네프르강 서부의 서부초원의 스키타이왕족들의 지배는 느쓴했고 그들은 이 지역의 좌식생활하는 농민들의 공물에 매우 만족했다. 반면, Aroteres부족은 트라키언 주민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아리언 스키타이 지배층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 농민들은 그리스에 농산물을 팔고, 도자기, 보석, 무기들을 수입하여 이것들을 스키타이 지배틍에 공물로 바쳤다. 그러나 Alazones부족국가는 이 시기 BC 6세기초에, 더 가난하게 되었다. 스키타이 정착이전에 세워졌던 많은 것들이 서아시아로부터 도착한 스키타이왕족들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상기 자료 참조)

 

In Crimea, the Royal Scythians took over most of the territory up to the Cimmerian Bosporus in the east.[148] In western Ciscaucasia, where the Scythians were not large in number enough to spread throughout the region, they instead took over the steppe to the south of the Kuban river's middle course, where they reared large herds of horses.[9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크리미아에서는, 스키타이왕족들이 동쪽의 크리미언 보스포러스까지의 대부분의 영토를 취했다. 서부 Ciscaucasia에서는, 스키타인이 전지역에 퍼질 만큼 그렇게 많지 않아, Kuban강의 중류남쪽의 초원을 취하여, 그곳에서 많은 말들을 사육했다. (상기 자료 참조)

 

It was at this time[90] that the Scythians brought the knowledge of working iron which they had acquired in West Asia with them and introduced it into the Pontic Steppe, whose peoples were still Bronze Age societies until then.[84] Some West Asian blacksmiths might also have accompanied the Scythians during their nortwards retreat and become employed by Scythian kings, after which the practice of ironworking soon spread to the neighbouring populations.[8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인이 서아시아의 철 다루는 지식을 이 Pontic초원에 들여온 것은 이 시기이다. 이 지역은 아직 청동기사회였다. 몇몇 서아시아 철기장인들이 스키타인이 북쪽으로 이동할 때 같이 들어 와서 스키타인왕에 의해 고용되어 , 이후 철 다루는 기술을이 이웃 부족들에게 퍼진 것이다. (상기 자료 참조)

 

During this period, the tribe of the Royal Scythians would primarily bury their dead at the edges of the territories they occupied, especially in the western Cisaucasian region, instead of within the steppe region that was the centre of their kingdom; due to this, several Scythian kurgan nekropoleis were located in Ciscaucasia, with some of them being significantly wealthy and belonging to aristocrats or royalty, and the Royal Scythians' burials in the Kuban Steppe were the most lavish of all Scythian funerary monuments during the Early Scythian period.[149][18] [96] During the early 6th century BC, the some groups of Transcaucasian Scythians migrating northwards would arrive into the Pontic Steppe to reinforce the Royal Scythians who had already arrived there.[9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시기에, 스키타이왕족들은 그들의 죽은 사람들을 그들이 점령한 영토의 중앙지대 대신에 서부 시스코카시언지역인 가장자리에 묻었다. 때문에 스키타인 Kurgan Nekropoleis가 스시코카시아에 묻혔으며, 이중 일부는 상당히 부유하고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것으로서, Kuban초원에 있는 스키타이왕족의 무덤이 모든 초기 스키타이 시기의 스키타이 장례 기념물중에서 가장 호화롭다. BC 6세기초에, 트랜스코카시언 스키타이그룹 일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Pontic초원에 다달아 이미 도착한 왕족스키타인들을 강화했다. (상기 자료 참조)

 

Meanwhile, the Median, Lydian, Egyptian, and Neo-Babylonian empires that the Scythians had interacted with during their stay in West Asia were replaced at this time by the Persian Achaemenid Empire founded by the Persian Cyrus II. The Persians were an Iranic people just like the Scythians and the Medes, and, during the early phase of the Achaemenid empire, their society still preserved many archaic Iranic aspects which they had in common with the Scythians.[150] The formation of the Achaemenid empire appears to have pressured the Scythians into remaining to the north of the Black Sea.[139]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반면, 스키타인이 서아시아에 있을 때 교류했던 메디언, 리디언, 이집트인, 신바빌로니아 제국들은 이 시기에 Cyrus II가 건설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제국에 의해 대체되었다. 페르시언은 스키타인이나, 메디언 같은 아리언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사회는 스키타인과 같이 공유한 많은 오래된 아리언 측면을 아직 보존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제국의 형성은 스키타인이 흑해 북쪽에 머무르게 하도록 압박을 한 것 같다. (상기 자료 참조)

 

Soon after, during the Early Scythian period itself, the centre of power of the Royal Scythians shifted from the eastern Pontic steppe to the north-west, in the country of the Aroteres tribe, where was located the main industrial centre of Scythia:[147] and which corresponded to the country of Gerrhos, which was located in the eastern part of the country of the Aroteres, on the boundary of the steppe and the forest-steppe. During this period, the Royal Scythians buried their dead in the country of Gerrhos.[151]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초기 스키타이시대동안 스키타이왕족들의 힘의 중심은 동쪽 Pontic초원에서 북서쪽, Aroteres부족의 나라로 스키타이의 주요 산업중심지로 옮겨졌다. 이곳이 Gerrhos 나라에 해당하는데, 이는 Aroteres나라의 동쪽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초원과 숲-초원의 경게에 있다. 이 시기에, 스키타이왕족은 그들의 시신을 Gerrhos에 묻었다. (상기 자료 참조)

 

At this time, there were close links between the new political centre of Scythia in Gerrhos and the Greek colony of Pontic Olbia, and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ften visited this city.[152]

이 시기에, Gerrhos의 스키타이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는 그리스 식민지 Pontic Olb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왕족 가족들 구성원이 이 도시를 자주 방문했다. (상기 자료 참조)

 

 

During this period, the Scythians were ruled by a succession of kings whose names were recorded by Herodotus of Halicarnassus:[18]

  • Spargapeithes
  • Lykos, son of Spargapeithes
  • Gnouros, son of Lykos
  • Saulios, son of Gnouros
  • Idanthyrsus, son of Saulios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시기에, 스키타인은 헤로도투스에 의해 기록된 다음의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Spargapeithes

Lykos,  Spargapeithes 아들 

Gnouros, Lykos 아들 

Saulios, Grouros 아들

Idanthysus, Saulios 아들

(상기 자료 참조)

 

At the time of Idanthyrsus, and possibly later, the Scythians were ruled by a triple monarchy, with Skōpasis and Taxakis ruling alongside Idanthyrsus.[18]

Idanthyrsus 시기에 그리고 그후, 스키타인은 3개 왕국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Skopasis와 Taxakis는 Idanthysus와 함께 다스렸다. (상기 자료 참조) (18 source : Ivantchik, Askold (2018). "Scythians"Encyclopædia IranicaNew York CityUnited StatesEncyclopædia Iranica FoundationBrill Publishers. Retrieved 8 August 2022.)

 

Scopasis was himself the king of the Sauromatians, who maintained peaceful relations with the Scythians, with a long road starting in Scythia and continuing towards the eastern regions of Asia existing thanks to these friendly relations.[15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Scopasis는 Sauromatians의 왕이었으며, 스키타인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우정의 관계로 인해, 스키타이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동쪽지역까지의 긴 길이 계속 유지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2) The Persian invasion (페르시아의 침범)

 

Map of the Scythian campaign of Darius I.

 

Persian soldiers (left) fighting against Scythians. Cylinder seal impression.[154]

 

 

In 513 BC, the king Darius I of the Persian Achaemenid Empire carried out a campaign against the Pontic Scythians. In response, the Scythian king Idanthyrsus summoned the kings of the peoples surrounding his kingdom to a meeting to decide how to deal with the Persian invasion. The kings of the Budini, Gelonians, and Sarmatians agreed to help the Scythians against the Persian attack, while the kings of the Agathyrsi, Androphagi, Melanchlaeni, Neuri, and Tauri refused to support the Scythians.[15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BC 513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제국의 다리우스I왕은 Pontic 스키타인에 대해 군사적 원정을 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스키타인왕 Idanthyrsus는 왕국 주위의 부족왕들을 소집하여 페르시아 침범에 대해 어떻게 할지를 미팅을 했다. Budini, Gelonians, Sarmatians 왕들은 페르시아 공격에 대해 스키타인을 도우는데 동의했다. 반면 Agathrsi, Androphagi, Melanchlaeni, neuri, Tauri왕들은 스키타이를 지원하기를 거절했다.  (상기 자료 참조)

When the armies of the Scythians fled to the territories of their neighbours in front of the advancing Persian army, the Agathyrsi refused to provide refuge to the Scythians, which forced them to retreat back into their own territory.[15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스키타이군이 페르시아군의 진격에 이웃 영토로 도주하자, Agathyrsi는 스키타이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를 거절했으며, 이것이 스키타이로 하여금 다시 자신들의 영토로 다시 후퇴하게 했다. (상기 자료 참조)

 

Darius's invasion was resisted by Idanthyrsus, Skōpasis, and Taxakis, with the Scythians refusing to fight an open battle against the well-organised Achaemenid army, and instead resorting to partisan warfare and goading the Persian army deep into Scythian territory. The Persian army might have crossed the Don river and reached the territory of the Sauromatians, where Darius built fortifications, but resumed their pursuit when the Scythian forces returned.

다리우스의 침략은 Idanthyrsus, Skopasis, Taxakis에 의해 저항받았으며, 스키타인은 아케메네스군에 열린 공간에서 싸우기를 거절하고 페르시아군대를 스키타이 영토 깊은 곳까지 유인했다. 페르시아군은 돈강을 건너 Sauromatians영토까지 이르렀으며, 다리우스는 이곳에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스키타인이 다시 오면 추격을 하였다. (상기 자료 참조)

 

 

The results of this campaign were also unclear, with the Persian inscriptions themselves referring to the Sakā tayaiy paradraya (the "Saka who dwell beyond the (Black) Sea"), that is to the Scythians, as having been conquered by Darius, while Greek authors instead claimed that Darius' campaign failed and from then onwards developed a tradition of idealising the Scythians as being invincible thanks to their nomadic lifestyle.[157][47][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이 원정의 결과는 불분명하다, 페르시아 부조에는 "흑해 건너에 사는 사카"라 언급하여다리우스에 의해 정복된 것으로 언급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사카의 종류을 말하는 기록임), 그리스 저자들은 다리우스 원정이 실패하고, 이후 스키타인을 무적이라 우상화하는 전통이 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이 원정은 다리우스의 패배로 보인다. 그 이후 이웃나라에게 무적의 스키타인이라 소문이 났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초토화 작전으로 페르시아의 보급선을 붕괴시키는 작전이었지만, 이는 러시아가 나폴레옹군이나 히틀러군에 대항하여 이용한 성공한 작전이므로, 이미 역사적으로 기록된 승리로 판단된다. 

 

스키타인 역사 전체에 대한 요약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