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기타

견이, 흉노는 키메리언인가?

Chung Park 2023. 2. 5. 03:00

부제 : 구야한국은 키메리언의 후손인가? (I)

 

구야한국의 개구 자를 보면서, 견이가 생각났고, 견이를 보면서 키메리언이 개를 끌고 전장에 다니는 사진이 생각났다.

 

키메리언은 스키타인의 일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하여 유럽까지 온 것으로 지난 글 키메리언 시리즈에서 필자는 알게 되었다. 그전부터 혹시 이들이 견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구야한국을 보면서 다시 견이 생각이 났고, 그래서 이번에 키메리언과 견이, 구야한국에 대한 상관관계를 알아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만약 이들이 같은 부류라 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견이, 구야한국에 대한 많은 역사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흉노의 모돈선우가 서역 26개국을 정복했다는 기술을 보았지만, 그들 26개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정보도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본 론

 

1. 구이 중 하나인 견이

 

구야 (狗, 개구, 耶 어조사 야) 한국(韓國), 견이(犬개견, 夷), 견융(犬戎) 모두 개와 관련한 표현이 들어 간다. 그러나 왜 이러한 표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던차, 스키타인의 일종인 키메리언에 대해 글을 쓰면서, 키메리언의 사진에 개가 함께 전장을 누비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키메리언은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흑해위 지방을 거쳐, 아나톨리아에 오게 된다. 리디아 왕국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서진을 계속한다. 그래서 Thraco-Cimmerians의 가설이 생긴다. 이들은 더 서진하여 프랑크족이나 로마공화국의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키메리언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잘 모르던 견이, 견융, 구야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들이 같은 부류라는 가정에서 말이다.

 

1) 구이(九夷)에 대한 자료

 

아래 구이에 대한 자료를 보면, 후한서 동이전에 구이의 구체적 명칭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견이'로 나온다. 즉 견이는 동이 중 하나라는 것이다. 즉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논어정의에서는 구이의 명칭이 현토,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 등으로 표현된다 한다. 즉 견이가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중, 현토, 낙랑, 고려, 부유(부여), 왜인 등은 익숙하나, 만식, 소가, 동도, 천비 등은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즉 이 자료로는 견이에 대하여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견이가 우선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보면, 현토, 낙랑, 고려(고구려) 중 하나와 관련이 있을까 짐작할 뿐이다. 개와 같이 전장을 누비는 키메리언은 로마공화국의 모습과 같다고 했으며, 키메리언은 이태리 북부, 알프스, 등지에 진출했다고 했다. 즉 요수의 동쪽에 가까이 있는 현토, 낙랑, 고구려 지역이 견이지역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요수가 프랑스의 론강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키메리언이 진출한 이태리 북부, 알프스지역은 론강(즉 요수)의 동쪽에 가까이 있다.

 

 

 

"구이(九夷)는 흔히 아홉가지 이족(夷族)을 의미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구이의 구체적 명칭으로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나온다. 그런데『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국어(國語)』노어하(魯語下)의 “통도우구이백만(通道于九夷百蠻)”,『상서(尙書)』와『이아(爾雅)』등에 나오는 구이는 반드시 동이족의 9종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九)는 고대 중국인들이 많다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했던 용어로, 구이의 구는 실제 아홉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많다’는 의미를 갖는 형용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논어정의(論語正義)』등에는 구이의 명칭이 현토(玄菟)·낙랑(樂浪)·고려(高麗)·만식(滿飾)·부유(鳧臾)·소가(素家)·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동이와는 별도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범칭(凡稱)으로서의 ‘이(夷)’를 사용한 우이(嵎夷)·화이(和夷)·도이(島夷)·회이(淮夷)·서이(徐夷)·주이(邾夷)·개이(介夷)·거이(莒夷)·기이(杞夷)·내이(萊夷)·패이(郥夷)·여이(黎夷)·관이(串夷) 등의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구이는 중국 고대에 존재했던 동이 집단들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으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이의 명칭이 문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구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제로 이의 종족이 단지 아홉 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적어도 이 집단 중 대표적인 것이 아홉 개 정도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는 구이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구한(九韓)’이라는 표현이 있었음이『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다. 즉,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각 층에 대응되어 신라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일본(日本)·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靺鞨)·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이 [九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중국사에서의 견웅

 

견이에 대한 자료도 매우 제한적이다. 서융의 일족이라 하는데, 견이가 동이의 하나라는 위의 기록과 비교하면, 동이 중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는 중국의 서쪽에 있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압박에 의해 쇠퇴했다는 기록은 진나라와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견이 (犬夷)

 

중국 고대에, 산시성(陝西省)에 살던 서융(西戎)의 일족. 전국 시대에, 진나라의 압박을 받아 쇠퇴하였다. " (자료: 네이버 국어 사전)

 

 

견이와 유사한 견융의 자료는 보다 상세히 나온다. 견웅은 '견이', '곤이'라고도 한다는 자료가 눈에 띈다. '곤이(昆, 맏곤, 夷)'는 구이 중 맏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즉 구이 중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은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견이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역시 서융의 일족으로 염윤, 험윤, 훈국과 동일한 부족이라 한다. 염윤, 험윤의 한자에도 역시 개의 의미가 들어 간다.

 

곤이의 '곤'이라는 말은 흉노에 의해 또는 월지에 의해 망했다는 '오손'의 왕이름에 '곤'자가 들어 간다. 필자는 오손왕국이 프랑스 남부에 걸쳐 있는 Ossetians이라 추정했다. 프랑스의 부르군디언왕국의 왕이름에도 '곤 또는 군' 발음의 이름이 들어 간다. 부르군디언 왕국은 프랑스 서부에서 동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 서융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들이 서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견융[ 犬戎 ]

 

요약 고대 중국 산시[陝西]·산시[山西] 지역에 거주한 부족.

 

견융(畎戎)·견이(犬夷)·곤이(昆夷)라고도 하였다. 서융의 일족으로 《시경》 이나 《서경》 또는 금문(金文)에 나오는 염윤(獫狁) ·험윤(玁狁) · 훈국(獯鬻)과 동일한 부족이며, 또 상나라 때 세력을 떨친 귀방(鬼方)과도 같은 민족이라는 설이있다. 견융은 주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주나라 문왕(文王)은 서융(西戎)의 패자(覇者)로서 주나라 왕조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목왕(穆王)이 견융을 정벌하여 태원(太原)으로 쫓은 이래 주나라는 견융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나라 말기에 유왕(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BC 771년 견융은 신후(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고 주나라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견융은 징수이[涇水]·웨이수이[渭水]에 진출하여 주를 위협하다가 진(秦)의 양공(襄公)·문공(文公)의 토벌을 받고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춘추시대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진과 흉노(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견융을 흉노의 조상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견융 [犬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견융은 상나라때 세력을 떨친 '귀방(鬼方)'과도 같은 민족이란 설이 있다고 했다. 상나라는 기원전 1600-1046년까지 존재한 나라이다. 즉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세력이라는 것이다. 잠시 귀방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자.

 

우선 귀방은 상나라 황제와 인척관계를 맺은 대외씨의 기원이라는 기록, 그리고 상나라 고종이 정벌했다는 기록이다. 즉 귀방은 상나라가 정벌과 인척관계로 회유를 번갈아 할 만큼, 복속되지 않는 강력한 위협세력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귀방은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 띠곤, 종족이름 혼, 夷), 관이(串, 곶곶관, 夷) 등의 명칭과 혼용되었으며, 청나라의 방준익은 귀방은 서방 여러 융의 통칭이었다 했다. 즉 서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흉노의 전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낙천이나 관이란 이름은 위치의 특성을 말하지 않나 생각한다. 프랑스 서부에서 곶을 이룬 곳은 Bretagne지역이다. 이 지역은 해양세력인 삭슨족이나 북유럽의 돌궐족이 근거를 가지고 있던 곳이다. 돌궐족은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 귀방이 그러므로 흉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상나라  현재의 섬서성 동부, 산서성 북부, 내몽골 자치구 서부에 존재했으며, 황제와 인척 관계를 맺은 씨족인 대외씨(大隗氏)가 기원이라고 한다.[1] 유목과 수렵을 하며 살아갔고, 그 수령은 귀후(鬼侯), 귀공(鬼公) 등으로 호칭되었다. 상나라의 외부 위협이 된 민족으로, 《주역·기제(旣濟)》에는 "고종(高宗)이 귀방을 정벌하여 3년이 지나 크게 이겼다.[高宗伐鬼方,三年克之。]"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귀방과 당시 화하족은 또한 인척 관계가 있었다.[2] 상나라의 제신은 귀방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귀후(鬼侯)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기도 했다.[3] 비록 적지 않은 문헌에 고종이 귀방을 정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갑골문의 복사(卜辭) 중엔 귀방에 대해 정벌을 나갔다는 내용을 명확히 담은 문구는 없다.[4] 또한 귀방이 바이칼호에서 와서 몽골고원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또한 허타오 지역으로 남하해 황하를 돌아 섬서, 산서 지역으로 들어 왔고 적적(赤狄)으로도 지칭되었으며, 정령, 위구르 및 현재의 위구족, 위구르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5]

 

귀방은 보통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夷), 관이(串夷) 등의 명칭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방준익(方濬益)은 "귀방은 서방 여러 융(戎)의 통칭이다."라고 하였다.[6] 또한 상나라 때에는 여러 소국들이 모두 방(方)으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방(邦)의 의미에 해당하며 상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여겨진다.[7] 예를 들면 귀방 외에 토방(土方), 설방(𢀛方), 고방(苦方), 용방(龍方), 마방(馬方), 촉방(蜀方), 우방(盂方), 강방(羌方), 사방(𠭯方), 비방(轡方), 이방방(二邦方) 등이 있다.

 

현재 귀방이란 족속과 귀방의 발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정론은 아직 없다.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는 귀방은 곧 흉노의 전신이라고 여겼다.[8]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선진 시대의 귀방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하였다.[9] 고고학자들은 현재의 산베이(陝北) 지역의 리자야(李家崖) 문화를 귀방과 견주어 비교하고 있는데[10] 리자야 문화의 선주민들은 산지의 농업경제를 주로 하였고, 소량의 목축활동을 생업 형태로 경영하였다고 한다.[11]"

 

(자료 : 귀방, 위키백과)

 

 

견융은 주나라(BC 1046-BC 256)와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서융(西戎)의 패자(覇者)로서 주나라 왕조의 기초를 쌓았다. 즉 주나라의 기초가 되는 세력의 일부이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를 위협하던 세력이었던 만큼, 합세하여 주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목왕(穆王)(재위 : BC 976-BC 922)이 견융을 정벌하여 태원(太原)으로 쫓은 이래 주나라는 견융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 목왕 이후 주와 견융은 서로 싸우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주목왕 시기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왕은 부왕인 소왕의 원정으로 국력이 쇠락했기 때문에 그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재 등용에 힘썼다. 백경(伯臩)을 태복에 임명했고, <경명>(冏命)을 반포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했다.[2] 그리고 어느 정도 국력이 다시 강성해지자 주 목왕은 서쪽의 견융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공인 모보(謀父)가 내실을 다지자고 간했으나 목왕은 듣지 않았다.

 

목왕 12년[3] 봄, 견융족 토벌에 나섰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

(자료 : 주목왕, 나무위키)

 

"서쪽으로 견융(犬戎)을 치고 5왕(王)을 사로잡았고, 도읍을 태원(太原)으로 옮겼다. 초(楚)나라 사람을 시켜 동쪽으로 서융(徐戎)을 정벌했다. 도산(涂山)에서 제후(諸侯)들을 모았다. 월(越)을 공격하고 동쪽으로 구강(九江)까지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목왕 [周穆王]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서방(西方)의 견융(犬戎)을 토벌하려다가 실패하여 제후(諸侯)의 이반(離反)을 초래하였으므로 형벌을 정하고, 이 때부터 나라의 덕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자료 : 목왕, 두산백과)

 

"서역을 순수하던 중 즐거워서 돌아올줄 모르자 서나라의 언왕이 난을 일으켜 대서제국(大徐帝國)을 세우니 장강과 회수 일대의 36국이 복종했다. 이에 목왕은 급히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으나 평정하지 못하였다. 목왕은 일단 중국을 서쪽은 주나라가, 동쪽은 서나라가 가지기로 하였다. 후에 목왕은 초나라를 끌어들여 서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자료: 주목왕, 위키백과)

 

위의 자료들을 보면, 주목왕은 무리를 해서 서쪽의 견융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과 정벌하고 태원으로 수도를 옯겼다 하는 기록이 양존한다. 여하튼 견융의 세력을 크게 약화 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말기에 견융의 공격을 당하는 아래 내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서(徐)나라의 언왕이 반란을 일으켜 장강과 회수 일대의 36국이 이에 복종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주나라의 서쪽에 견융이 있고, 주나라의 동쪽에는 서(徐)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견융에 대한 자료를 다시 보자. BC 771년에 견융은 신후와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 왕을 살해하고,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했다는 것이다. 그후 견융은 경수(涇, 통할경, 곧을 경, 水), 위수(渭, 강이름위, 水)에 진출하여 주나라를 위협했다.

(아래 자료 참조)

 

 

"주나라 말기에 유왕(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BC 771년 견융은 신후(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고 주나라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견융은 징수이[涇水]·웨이수이[渭水]에 진출하여 주를 위협하다가 진(秦)의 양공(襄公)·문공(文公)의 토벌을 받고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춘추시대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진과 흉노(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견융을 흉노의 조상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자료: 견융, 두산백과)

 

이후 견융은 진(秦)나라의 양공 (- BC 764), 문공(BC 764-BC 716)시기에 경수(涇水), 위수(渭水), 기(岐, 갈림 기) 지역에서 전투를 했다. 문공시기에는 BC 763년, 경수, 위수 지역의 견융을 쫓아내고, 이 지역에 수도를 세우고, BC 750년, 서융을 공격해 이들이 달아났다 했다. 기산(岐山)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장공(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7년 서융(西戎)과 견융(犬戎)이 신후(申侯)와 함께 주왕실(周王室)을 공격하여 역산(酈山) 아래에서 유왕(幽王)을 살해하자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말았다.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구해 평왕(平王)을 호송해 동천(東遷)하는 데 공을 세워 주나라에서 진기(秦岐) 서쪽의 땅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진나라가 부용국(附庸國)에서 제후국이 되었다. 나중에 견융으로 진격하다가 기(岐)에서 죽었다. 12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양(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양공 [秦襄公]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기원전 764년에 양공(襄公)이 죽자 그의 아들인 문공(文公)이 계승하였다.

기원전 763년, 문공은 군사 7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다음해가 되어서야 견하(汧河 = 견수)와 위하(渭河=위수)가 맞닿는 곳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풍수 점을 치니 길하게 나와 그곳에 새 도성을 지었다.

 

기원전 753년, 문공은 사관(史官)을 설치하여 나라의 큰일을 기록하게 하였고, 대부분의 백성들을 교화시켰으며, 기원전 750년에는 군사를 보내어 서융(西戎)을 토벌하니, 서융이 패하여 달아났다. 또한, 문공은 서주(西周)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기산(岐山)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기산의 동쪽 토지를 주 평왕(周平王)에게 바쳤다. 기원전 746년, 처음으로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만들었다.

(자료 : 진(秦) 문공, 위키백과)

 

 

3) 견융과 흉노

 

이제까지 견융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이렇게 상나라, 주나라 중국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견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흉노라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그것도 청나라의 '왕국유'가 지은 '귀방, 곤이, 험윤고'에서 밝혔으니, 중국사가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훈죽(獯鬻) 험윤(獫狁), 적(狄) 모두 개사슴록변이 들어가는 특색을 보인다. 훈죽은 후일 훈족이란 이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서양에서 Huns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견융과 하나라 사람은 같은 조상이라는 언급이 눈에 띤다. (아래 자료 참조)

 

 

‘사기 흉노열전’에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의 묘예인 순유다. 요순시대 있던 산융과 험윤과 훈죽이 북쪽을 살면서 목축하면서 떠돌아 다녔다”는 기록과 ‘산해경 대황북경’에 “견융과 하나라 사람은 같은 조상으로 모두 황제로부터 나온다”는 기록이 있다. 하나라 시조는 순임금 때 우사공(禹司空)으로 동이족이었다.

 

청나라 때 왕국유가 지은 ‘귀방·곤이·험윤고’에 “흉노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은나라 때는 귀방(鬼方)·곤의(昆夷)·훈죽(獯鬻), 주나라 때는 험윤(獫狁), 춘추시기에는 융(戎)·적(狄)으로, 전국시기에는 호(胡)로 이 모두 후세에서 말하는 소위 흉노다”고 설명돼 있다."

 

(자료 :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청나라 때 왕국유가 지은 ‘귀방·곤이·험윤고’에 “흉노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은나라 때는 귀방(鬼方)·곤의(昆夷)·훈죽(獯鬻), 주나라 때는 험윤(獫狁), 춘추시기에는 융(戎)·적(狄)으로, 전국시기에는 호(胡)로 이 모두 후세에서 말하는 소위 흉노다”고 설명돼 있다.

[출처] 약수 , 흉노|작성자 가면 리

 

 

위의 견융의 역사에서 언급되는, 기(岐) 지역은 단군조선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지명으로, 단군이 하나라 걸왕을 상나라와 낙랑과 함께 멸하고, 관청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태원, 위수지역은 고구려 고국원왕시 연나라와 다투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필자는 위수가 프랑스 중남부 지역에 있는 Lot river로 추정한다.(이강은 Ossetians말로 Olt로 불린다). 즉 기, 위수 지역은 한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이며, 동시에 위에서 살펴 본 견융의 진출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견융이 흉노의 조상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기도 한다.

 

 

2. 흉노와 단군조선

 

우리는 흉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중국사에서 의도적으로 흉노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흉노에 관한 역사를 펌한 글들을 보시라. (본 블로그, 카테고리, 흉노). 흉노의 왕들의 역사를 보면 중국사에서 두만선우, 모돈선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공에 관련된 역사만 나열하고 있다. 가히 쓰레기 같은 내용만 언급하고 있다. 한(漢)나라의 태조인 유방이 흉노에 당한 역사를 보면 중국에는 악몽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역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단군조선의 역사에서 이들 흉노에 대한 언급이 있다. 특히 갸륵 단군 6년 (BC 2177)에, 열양의 욕살 색정을 약수에 유배하였다가 풀어준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땅에 봉하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가륵 단군 6년 (B.C 2177, 갑진)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索靖)에게 명해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匈奴之祖)가 됐다” (자료 : 환단고기, 단군세기)

 

즉 열양이나 약수를 알면, 흉노의 근거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약수에 대해 좀 더 알아 보자. 후한서 동이전에 약수는 부여국 북쪽에 있다고 했다. 필자는 북부여 위치를 덴마크지역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필자는 약수가 북유럽의 어디에 있지 않나 판단한다. 아래 자료에서 진서 사이전에 '읍루국 동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라 했다. 또 약수는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했다. 읍루가 어디인가가 문제인데, 북유럽의 어디라 한다면, 여기서 동해는 발트해, 보트니아해, 또는 바렌츠해(백해)가 될 수 있다. 즉 스웨덴이나 핀란드가 읍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6세기의 고트족 역사학자 Jordanes는 동고트족의 고향이 스웨덴이라 했다. 필자는 고트족을 고구려라 판단한다. 고구려가 흉노의 후예라 한다면, 결국 약수는 스웨덴 북부지역에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읍루국은 스웨덴이 되는 결과이다.

 

 

//<후한서 동이전>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에 “읍루국 동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다”

// <호위우공추지(胡渭禹贡锥指)에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

[출처] 약수 , 흉노|작성자 가면 리

 

그런데 이 흉노가 기원전 1286년, 22대 단군으로 즉위했다 한다. 즉 흉노가 조선의 일부라는 것이다.(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견융의 역사도 모두 조선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흉노를 다스리던 색정(索靖)의 후손으로 보이는 색불루(索弗婁)가 흉노의 우현왕이 됐다가 기원전 1286년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즉위하고 그 후손들이 제위를 이어간다. 이렇듯 흉노는 조선의 제후인 동시에 조선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료 :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중국 사서에 다시 흉노가 등장한다. 즉 기원전 318년 흉노가 한, 조, 위, 연, 제의 다섯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이들이 조선 연방인지도 모른다. 한(韓), 조(趙), 위(魏)는 진(辰)나라에서 갈라 졌고, 연(燕), 제(齊)나라는 요수 주위에 있던 나라들이다.

 

"중국 사서에서 흉노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말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가 한(韓)·조(趙)·위(魏)·연(燕)·제(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진(秦)을 공격했다가 6국의 참패로 끝났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이 장군 몽염을 보내 흉노를 축출한 뒤 하남을 점령하고 장성을 쌓아 북방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고 한나라가 흉노에게 공주와 매년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있다."

 

(자료 :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2) 묵특선우(BC 207-174 BC)의 서역 26개국 정복

 

우리는 흉노의 역사에서 묵특선우를 특별히 주목한다. 그가 북이지역과 서역의 26개국을 정벌했다고 하는 정복군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역을 프랑스 서부 또는 이베리아 반도 정도로 추정한다. 또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할 수도 있다고 본다. 26개국 중에는 누란이란 나라명만 알려져 있다. 매우 유감이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혼유, 굴역, 정령, 격곤, 신려 등의 북이 등을 복속시켰다. 북유럽지역 또는 그에 가까운 중부유럽의 북부지역이었을 것이다. 반면, 서역 26개국은 이들이 아닌 서쪽지역이다. 누란국도 천산산맥에 있는 나라가 아닌 이베리아반도 어디에 있는 나라로 보인다.

 

묵특선우의 재위기간이 BC 207-BC 174 기간이다. 이 당시는 로마공화국은 Punic Wars를 한창 하고 있을 때이다. 따라서 로마공화국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개와 동반한 키메리언의 전쟁 수행 모습이 견융, 견이, 흉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키메리언의 모습은 로마공화국에서 있었다는 서양사가의 언급이 있었다.

 

로마공화국의 어느 시기에 키메리언의 역할이 있었는지가 관건이다. 아래 키메리언의 기록처럼, 기원전 8세기-기원전 6세기의 활동이라면, Etruscan활동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살펴 볼 예정이다.

 

그러나 Punic wars는 기원전 3세기- 기원전 2세기기간에 있었다. 이시기는 중국사의 진(秦)나라 시기이다. 위에서 우리는 흉노가 한, 조, 위, 연,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秦)과 싸우다가 대패했다(BC 318년)는 기록을 보았다. 이후 BC 215년 진시황의 몽염장군에 의해 흉노는 쫓겨났다 했다. 하남을 점령하고, 성을 쌓아 북방민족에 대항했다 한다. 하남이 장강이남이라면, 성은 장강변에 쌓았을 것이다. 필자가 장강으로 추정하는 프랑스 르와르강은 주변에 유독 성곽이 많다. 그래서 Chateaux de la Loire(르와르의 성곽들 의미)라 한다. 진시황시 점령했지만 후에 버려진 진공상하장이란 곳이 조선의 왕험성과 가깝다 했다. 위만이 와서 차지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곳을 알프스산맥 바로 위 스위스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Punic Wars를 진(秦)나라와 연관해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진(大秦)제국이란 말은 로마공화국의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일부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흉노는) 순유(淳維)[21]로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때로는 커지고 때로는 작아졌으니, 흩어지고 갈라짐도 무상하였다. (중략) 그러나 묵돌(冒頓)에 이르자 흉노는 가장 강대해져서 북이(北夷)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中國)과 대적하기에 이르렀다.[원문]

《사기》 권110 〈흉노열전〉

후에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역(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신려(薪犂)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인(貴人)과 대신(大臣)들이 모두 탄복하였으니, 묵돌선우(冒頓単於)를 현명하다고 여겼다.[원문]

《사기》 권110 〈흉노열전〉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인 "바야투르(Bayatur, 용감한 자)"의 한자 음차로 알려져 있다.아버지인 두만선우(頭曼單于)와 갈등을 빚다가 그를 제거하고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이후 초한전쟁 시기에 동호(東胡) ·월지(月氏) ·정령(丁零) 등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漢)의 고제(高帝)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서역의 누란(樓蘭) 등 26개의 나라를 평정하여 흉노의 세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지료: 위키백과)

 

 

3. 스키타인의 일종인 키메리언의 서진

 

아래 그림을 보면 Cimmerians with dogs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배사법의 활쏘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사진에서 보듯이 고깔모자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다. (필자 글 : 스키타이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 (II) 참조)

 

 

Cimmerian Warriors with dogs (source : The History files)

BC 652년이 키메리언의 전성기인데, 이때 리디아왕국을 정복했다.

The year 652 BC marked the apogee of Cimmerian power, with their conquest of the kingdom of Lydia, but their supremacy would last only another eleven or so years before defeat and total eclipse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이들은 아래 자료 글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다. 아나톨리아의 리디아왕국을 BC 652년 정복했다 한다. 이들은 서진을 계속해 갔다. 특히 트라키아지방에서는 환영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과 공통의 문화를 이루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즉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문화는 다키아지역으로 늑대와 관련이 있는 문화권이다. 고조선의 영역으로 필자는 주정한다. 위에서 우리는 흉노와 조선은 하나라는 자료를 많이 보았다. 즉 스키타인의 일종인 키메리언도 흉노와 관련이 있으며, 조선의 일부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그림은 초기 그리스와 싸우는 키메리언을 보여준다. 말탄 키메리언 전사들은 개와 함께 하였다. (로마공화국도 동일했다)

This image shows Cimmerians battling early Greeks - prior to the advent of accepted 'Classical' Greece - with the mounted Cimmerians warriors apparently being accompanied by their dogs (republican Romans did much the same thing)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그런데 이러한 키메리언이 로마공화국에서도 있었다는 위그림의 자료 설명이다. 즉 이들이 로마공화국의 일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4. 키메리언의 이태리, 알프스, 북유럽진출

 

그래서 키메리언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 보니, 이들은 이태리와 알프스지역, 북유럽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이들은 발칸반도의 일리리아지역(발칸반도 서쪽, 현재 크로아티아지역)에서 다뉴브강을 따라 서진하여 이태리와 알프스산맥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유럽까지도 진출했다고 한다. 이 당시 이태리는 로마공화국이다. 이시기는 이태리에서 Etruscan 문명시기이다. 그리고 북유럽에 진출했다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흉노의 조상이 약수에서 출발했었다는 것과 북유럽에 약수가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추정과 궤를 같이 한다. 기원전 21세기의 갸륵단군 시기와는 시기상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기원전 8-6세기의 이러한 북유럽에의 이동은, 기원후 6세기의 Jordanes가 말하는 동고트족의 고향이 북유럽 스웨덴지역이라는 언급이, 이 키메리언의 이동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The kingdom of Kolkis is overrun by Cimmerians and Scythians, and it disintegrates. Whatever had taken place between Scythians and Cimmerians in the previous century to push the latter out of their homeland, the two seem to be acting in unison now.

 

(번역) Kolkis왕국이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에 의해 짓밟혀서 해체되었다. 스키타인과 키메리언 사이에 그전 세기에 키메리언을 쫓아내기 위해 어떤 일이 벌어졌든 둘은 이제 하나가 되어 행동하는 것 같다.

 

It seems to be around this time that the window for the 'Thraco-Cimmerian Hypothesis' first opens. The Cimmerians and Scythians have suddenly positioned themselves as a more powerful collection of tribes which are not afraid of thundering around the Black Sea coast (on either side of the sea itself) and waging war against established kingdoms. It is known that Cimmerians later settle amongst the Thracian tribes, so to be that welcome they must share some common points of interest, such as language or culture.

 

(번역) 이 즈음에 Thraco-Cimmerians 가설이 처음 등장한다.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은 갑자기 흑해 연안 주위의 세력에게 위협을 주는 세력으로 자리잡고, 이미 확립된 왕국들과 전쟁을 한다. 키메리언들은 후에 트라키언 부족사이에 정착하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러한 환영은 언어나 문화 등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The common points would seem to be old Urnfield traditions in metalwork mixed with new Cimmerian influences from the Caucuses. Could they already be mixing with Thracians in this period, with some groups beginning to explore further along the River Danube to enter regions that are controlled by the Celts of the Hallstatt C culture and also to influence the Illyrians on the western side of the Balkans? The weight of evidence shows that there is indeed a warrior culture of the horse/wagon complex in the eighth century BC and also a shift in production centres from Hungary to Italy and the Alpine region. This would match well with a Thraco-Cimmerian migration along the Danube (whether in person or by osmosis through neighbouring migratory groups).

 

(번역) 그 공통점은 코카서스로부터의 키메리언의 새로운 영향력과 금속가공에서의 오랜 Urnfield 전통일 것이다. 이 시기에 키메리언은 트라키언들과 이미 같이 섞여 정착하였을까? 이 문제는 다뉴브강을 따라 전진하여 Hallsttat 문화의 켈트족 지역으로 들어 가고 발칸의 서쪽에 있는 Ilyrians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Thraco-Cimmerians culture를 나타내는 증거로는 기원전 8세기에 말과 마차 체계의 전사문화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과 또한 항가리에서 이태리와 알프스지역으로 생산 거점이 이동하는 것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뉴브강을 따라 이동한 Thraco-Cimmerian 이주 사실을 잘 설명한다. (이웃한 이주그룹에 의해 개인적으로든 또는 집단적으로 서서히 영향을 받아서든)

 

In successive waves from the ninth to the sixth centuries BC these migrating warrior groups push west towards the headwaters of the Danube before veering off to the north. Ultimately, one branch follows the course of the River Elbe and a second backtracks west from the headwaters of the Rhine, heading north-east to the Elbe and then north into Jutland (where it theoretically forms, or merges with the ancestors of, the Cimbri)."

 

(번역)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이러한 전사그룹의 이동은 계속되어 다뉴브강의 상류를 향하여 서쪽으로 이동하고 미구에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향한다. 결국 하나의 그룹은 엘베강을 따라 가고, 또 다른 하나의 그룹은 라인강의 상류 서쪽을 거쳐 역으로 엘베강 북동쪽과 북쪽 Jutland (이론적으로 여기서 Cimbri의 조상과 결합한다)로 이동한다.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본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5. 키메리언과 Etruscan 문명

 

키메리언과 Etruscan은 개와 늑대라는 동물과 관련성이 있다. 그런데 개는 늑대를 가축화 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진도개도 늑대를 개로 가축화한 것이라 용맹성과 충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늑대 관련 문화권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널리 퍼져 있다.

 

늑대관련 문화권은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아나톨리아, 발칸지역을 거쳐 로마공화국에 이른다. 필자는 늑대를 매개로 하여 중앙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우리와 관련 있는 문화권으로 추정했다. (필자의 글,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 Dahae는 누구인가? I,II,III' 참조). 북아메리카의 Native Americans 들도 늑대와 같이 하는 사진을 보여 주기 좋아한다. 그래서 이들 늑대와 관련한 문화권이 개와 관련 있는 견이, 견융, 흉노, 키메리언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필자는 생각한다. 더 나아가 구야한국, 구노국등도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위에서 키메리언의 서진 방향을 우리는 기억한다. 특히 중앙아시아, 발칸지역, 다뉴브강을 따른 서진으로 알프스, 이태리에 이르는 경로는 늑대의 문화권과 일치한다. 즉 늑대 문화권과 키메리언의 이동 경로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를 세웠다는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는 Etruscan 조각상이 있는지 모른다.

 

 

The Capitoline Wolf, long considered an Etruscan bronze, feeding the twins Romulus and Remus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는 Etruscan 청동 조형물 (이태리, Capitolini 박물관) (source : Wikipedia)

 

 

또한 Etruscan 전사는 아래 동상에서 보듯이 고깔모자 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우리는 위의 키메리언의 사진에서 역시 고깔모자 같은 모자를 쓴 전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즉 키메리언과 Etruscan의 모습에서 늑대와 개 관련 이외에 또 한가지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고깔모자는 가야를 상징한다는 것을 정약용은 언급했다. 필자는 이전글에서 구야한국이 가야라 추정했다. 즉 구야한국, 키메리언, Etruscan, 견융, 흉노가 개와 관련된 것 외에 고깔모자라는 공통점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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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ruscan warrior, found near Viterbo, Italy, dated c. 500 BC

(source : Wikipedia)

 

그런데 필자는 흉노가 고구려의 전신이라 했다. 그리고 필자는 고트족이 고구려라 했다. 고트족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었다. 후일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인 아랍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다. 이에 특히 지배층인 고트족들은 바스크지역으로 피신했다 한다. 아래 사진은 19세기까지 바스크여인들이 입던 전통의상이다. 지금은 금지된 복장이다. 그런데 고깔모자가 눈에 띤다. 즉 고구려, 흉노의 고깔모자, Etruscan, Cimmerians의 고깔모자인 것이다. 그러면 구야한국도 협보가 남으로 내려가서 세운 나라이므로 고구려계통이 가야를 세운 것인지 모른다.

 

 

Senior Basque women during 19 century (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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