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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를 통해 본 신라와 당의 유사점 자료 및 메모

IV. 전쟁사를 통한 신라와 당의 유사점 1) 탈라스 전투(751)와 호라산출신의 아바스왕조 개시(751) 2) 당태종과 고구려 전쟁, 당고종과 서돌궐 (고구려) 전쟁 고구려와 전쟁시 수군 7만, 보병 기병 20만(?) : 왜 수군이 필요? 트랜스옥시아나에 있다면 수군이 왜 필요한가? 평양까지 수군으로 가기에는 너무 돌아 간다. 아프칸남쪽, 홍해, 이집트운하 거쳐 지중해, 흑해를 거쳐야 함 3) 백강, 기벌포 전투와 우마이야 왕조의 이집트 수군 당 (당국공, 안록산, 요임금의 당요)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집트와는 너무 먼거리 : 의문점 3) 천문령 전투와 발해 : 철문관 근처 (코카서스산맥아래 우측) 이 경우 당은 신라와 위치가 겹친다. 거란인 이전충의 대조영 보호 : 거란 ..

참고 NOTE 2021.09.20

반란사와 민란사를 통해 본 신라와 당 유사성 자료 및 메모

제목 : 반란과 민란을 통해 본 신라와 당의 유사성 반란의 경우를 본 신라와 당의 유사성 1) 안록산의 난(755)과 탈라스 전투(751) : 규모 안록산 : 15만 +, 탈라스전투 : 아랍군 20만, 당 10만 (고선지장군)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안(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명(兒名)은 안녹사(安綠絲)이며 녹산(禄山)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영주에서 호시아랑을 맡았는데 6개 국어를 능통하였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년에는 ..

참고 NOTE 2021.09.20

고구려사, 백제사, 신라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을 위한 자료

I. 고구려사를 통한 국내성, 환도성 위치 추정 1) 고국천왕 시기 (179-197) 고구려 六年 왕이 후한 요동 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184)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197)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후한의 요동 태수가 침입해오자 동생 고계수(신대왕의 5번째 아들)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막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친정해 좌원(坐原)에서 그들을 무찔렀다. -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또한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 등 부명이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등의 방위명으로 전환되는 등 중앙 집권화를 위해 정치 체제가 더욱 정교해젔다. 이런 5방위 체제는 역사가 깊다. 부여와..

고구려 2021.09.20

고구려 문자왕과 고트족 Theodoric the Great 자료

- 문자왕 (491-519) 개요 고구려 제 21대 군주. 삼국사기 기록상으론 한국사 최초로 태손(太孫)으로서 성장하였다. 2. 소개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个雲)', '고운(高雲)' 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개운은 나운의 변형으로 보이고,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을 나자를 빼고 두 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공식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처럼 길었을 가능성이 큰데 문자명왕, 명치호왕 등의 명칭은 문자 명치 호태왕(文咨 明治 好太王) 같은 형식의 축약일지도 모른다.[2]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3] 다만 아버지 고조다가..

참고 NOTE 2021.09.18

신라하(新羅河)와 조선하(朝鮮河) (updated)

며칠 전, 발해고 지리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글을 쓰는 중에, 스위스(Switzerland)의 쥬리히 (Zurich) 근처에 있는 Sihl river라는 자료를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 강이름이 Sylaha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고대 유럽어 또는 켈트어 원천인 Sila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aha어미는 고대 독일어로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고 위키자료는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아래 원문을 옮겨 싣는다. "Etymology The first written reference to the name dates to 1018, in the form Sylaha.[3] The name may be of Old Eur..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 성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여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고 신주를 세웠다 했기 때문이다. 즉 평양성의 위치가 정확하면, 한성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가 더 용이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기 앞서, 발해고의 지리지 자료를 바탕으로 먼저 추정하고자 한다. 발해고는 1784년 정조 6년에 유득공에 의해 쓰여진 역사 지리지이다. 비록 조선 후기의 역사서라 천년 전의 고구려와 발해 시대의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만, 발해고에..

로마사 자료를 통한 위례성, 한산의 추정 : S(IV)

부제 : 낙랑군 동부도위의 낙랑군은 발칸반도 트라키아(동예)의 좌측에 있었다. 부제 : 동예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다. 그동안 낙랑을 알아 보기 위해 다키언에서 출발해서 키메리언, 마사게태까지 분석해 보았다. 그래서 얻은 지식에 근거하여 숙고해보니, 동예는 흑해, 에게해에 접한 트라키아로 판단된다. 즉 스키타이, 사카의 일원인 우리 개념으로는 예맥족인 Thraco-Cimmerians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을 거듭하여 아나톨리아를 거쳐 발칸반도, 더 나아가 중부유럽, 이태리 북부 알프스지역, 북유럽의 Jutland(조나국, Cimbri), 프랑스의 Gaul족 (켈트족)의 후예인 Franks (Sicambri)까지 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에서 터어키 아나툴리아에 있는 Sakarya river ..

서양사 자료를 통한 위례성 추정 : S(III)

앞의 두글에서 필자는 위례성과 한산, 한산성, 한성 등에 대해서 백제와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 보았는데, 그 중에서 위례성은 한성과는 다른 위치임을 알았다. 그래서 먼저 위례성에 대한 서양사 자료를 검토하고자 한다. 위례성은 백제의 건국지로서 그 의미가 있다. 현재로서는 한산이 위례성 가까이 있는지 보류하며, 위례성의 위치 추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위례성이 우선 발칸반도 일리리아 지역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백제의 건국지 설에 패대지간설, 대방고토설과 진번지간설이 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패대지간설은 패수와 대수를 건너 가서 건국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패수는 북으로 흐르는 라인강, 동남으로 흐르는 다뉴브강으로 추정했다. 대수는 현재로서는 대방군지역에 있는 강이 아닌가 한다...

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위례성, 한산성, 한성의 위치 검토 ; S(II)

부제 : 백제의 위례성은 어디이고 한산성, 한성은 어디인가? (II) 낙랑과 관련한 온조 백제 초기의 위치 때문에 낙랑의 위치를 연구 하느라 한참 이후에 다시 백제의 위치 분석을 다시 찾게 되었다. 낙랑군의 위치를 떠나 낙랑 조선까지 내친 김에 알아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동안 알아본 낙랑의 위치는 낙랑군과 낙랑조선의 위치는 별개의 것으로 판단되며, 낙랑군은 초기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판단된다. 나중에는 발칸반도 주위의 형식적인 진번군,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 동부도위는 토착 세력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정도 선지식을 가지고 위례성과, 한산성, 한성에 대해 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자료를 가지고 추정해 보고자 한다. I. 백제 개로왕 시기 ..

중앙아시아 Massagetae, Dahae는 낙랑조선인가? (II)

부제 : 중앙아시아의 Dahae는 누구인가? 필자는 그동안 Massagetae, 그리고 같은 스키타인이면서도 다른 키메리언에 대해 살펴 보며, 낙랑조선, 진국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제 아케메네스제국에 이르는 보다 후대에 해당하는 Dahae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한다. Livius 자료와 Wikipedia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Dahae는 누구인가? Parthian Empire의 원천이라는 Dahae는 3개부족의 연합체로 출발했다 한다. 그 위치도 카스피해 동쪽에 위치하여, 스키타인 Massagetae와 가까이 있었다. Archaemenid Empire (500 BC) with detail of regions such as Dahae, Hyrcania, Parthia etc.(source ..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I)

지난 글에 이어 BC 1200 - BC 450 기간의 키메리언의 활동을 살펴 보자. 이 글 또한 The History Files에서 올린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의 내용을 주로 살펴 보고,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2. BC 1200-450 BC 기간의 Cimmerians 활동 분석 1) BC 1200 - BC 900 시기의 Cimmerians 청동기시대의 범 발트해 지역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왔다.과거 프러시아지역인 동부 폴란드지역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서부지역을 포함한 서부영역은 중부유럽의 금속산업의 영향하에 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동부지역에서 볼가강 상류지역까지 걸쳐있는 숲속의 동부 또는 대륙영역에서는, 사람들..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

지난 글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에 대한 분석에 이어, 같은 스키타인이면서도 중앙아시아가 아닌 흑해주변, 코카서스산맥, 아나톨리아 및 유럽에서 활동한 Cimmerians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 글은 The History Files에 실린 'Kigdom of Anatolia - Cimmerians'의 글 자료를 주로 바탕으로 하여 소개하며, 이에 대한 필자의 검증자료와 판단을 추가한다. 1. 스키타인의 일원인 Cimmerians의 정체성 분석 먼저 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그 다음에 BC 12c부터 나타나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1) BC 9c부터의 Cimmerians에 대한 기록 및 그들의 고향 호머는 이미 기원전 9세기에 Cimmerian..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는 훈족인가?

​ 필자는 지난 글의 분석에서 Massagetae와 Cimmerians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근거로 이들이 흑해 주변의 지역에 고향을 둔 스키타인, 사카족이라는 것을 확인 했고, 이들은 이동을 계속하여 메디아제국, 아나톨리아지역 등에 진출함으로써, 이들이 결국 발칸반도 Thracians지역, 이태리 북부지역까지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이 BC 11C부터 존재했던 낙랑조선(=기자조선)이나, 우리가 역사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진국(辰國)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위키피디아 자료가 아닌 다른 자료를 분석하며, Massagetae에 대해 분석하고, 이어서 다음 글에서 Cimmerians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Dacians과 연관이 있으며, 신..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 Dahae는 낙랑조선인가? (I)

​우리는 지난 글, '낙랑은 어디에 있었는가? (III), (IV)'에서 Dacians, Etruscan, Phrigians 등이 Wolf(늑대)라는 매개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이들이 낙랑조선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했다. '낙랑조선'이란 표현은 기자조선에서 처음 언급된다. 즉 상나라 말기의 현자였던 '기자'가, 주 무왕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의 질문에 홍범 9주를 말했다 한다. 기자는 동쪽으로 조선에 가서 다스렸다 하는데, 이때 '낙랑조선' 사회에서는 8조금법이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서 지리지 연조에 기록되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BC 11c에 '낙랑조선'이라고 나타난 바, 기자조선을 낙랑조선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

호경 (鎬京) (고려 : 서경(西京)) - 나무위키

호경 최근 수정 시각: 2021-04-17 01:35:31 분류 중국의 옛 수도 상주시대 고려 태조의 조상에 대한 내용은 호경(신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鎬京, 춘추시대 이전 주나라(서주)의 수도. 춘추시대 이전까지 희주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이후엔 동주의 낙양에게 수도의 역할과 지위가 넘어간다. 2. 상세 주나라 문왕 대의 수도였던 풍경(豊京)에서 주나라 무왕 대에 새로 천도한 수도. 풍경과 아울러 풍호(豊鎬)로도 불리워졌다. 주나라 유왕 11년(BC770)에 견융족에 함락당할 때까지 주나라의 수도였다. 일명 종주(宗周), 서도(西都). 현재 산시성 시안 서남쪽에 성터 유적이 남아 있다. 호경(종주)를 지키는 군대로 육사(六師)가 있었다. 육사(六師)는 ..

고려 (918-1392) 2021.07.29

호경 (鎬京) - 나무위키

호경 최근 수정 시각: 2021-04-17 01:35:31 분류 중국의 옛 수도 상주시대 고려 태조의 조상에 대한 내용은 호경(신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鎬京, 춘추시대 이전 주나라(서주)의 수도. 춘추시대 이전까지 희주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이후엔 동주의 낙양에게 수도의 역할과 지위가 넘어간다. 2. 상세 주나라 문왕 대의 수도였던 풍경(豊京)에서 주나라 무왕 대에 새로 천도한 수도. 풍경과 아울러 풍호(豊鎬)로도 불리워졌다. 주나라 유왕 11년(BC770)에 견융족에 함락당할 때까지 주나라의 수도였다. 일명 종주(宗周), 서도(西都). 현재 산시성 시안 서남쪽에 성터 유적이 남아 있다. 호경(종주)를 지키는 군대로 육사(六師)가 있었다. 육사(六師)는 ..

서주(1100-771BC) 2021.07.29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V)

부제 : 낙랑은 발칸반도 Dacians을 포함했다. 이제 보이족과 끝까지 싸운 독립된 낙랑지역으로 추정되는 Dacians에 대해 살펴 보자. 아래 글에서 Dacians지역은 Carpathian Mountains지역에서 흑해의 서쪽까지 위치한다고 했다. 현재 나라에서는 루마니아, 몰다비아, 우크라이나 일부, 세르비아 동쪽, 불가리아 북쪽, 슬로바키아, 항가리, 그리고 폴란드 남부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The Dacians (/ˈdeɪʃənz/; Latin: Daci; Greek: Δάκοι,[2] Δάοι,[2] Δάκαι[3]) were a Thracian[4][5][6] people who were the ancient inhabitants of the cultural region of Dacia, ..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I)

부제 : 켈트족 보이족의 동방행은 진(秦)나라의 동방정벌이 아닌가? 부제 : 로마제국의 설립자인 에트루리아문명은 마한이 아닌가? 지난 글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I)'에서 우리 역사 자료를 통한 분석에서 낙랑의 위치는 알프스산맥인 이태리 북부지역 또는 단단대령 (=Dinaric Alps) 서쪽인 판노니아지역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물론 이는 그동안 필자가 쓴 글을 바탕으로 추정한 결과이다. 그리고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에서 동양의 고대사 자료를 바탕으로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또 한번 검토하였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고죽국이 있던 요수지역으로 결국 알프스 산맥에 있는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8세기부터 있던 낙랑지역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으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알프스..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

부제 : 낙랑은 BC 18c부터 존재했으며, 압록수 론강의 고죽국에 있었다. 낙랑에 대한 국내 역사 자료를 더 살펴 보아야 하겠다. 삼국사기와 환단고기에 있는 자료를 더 검토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서양자료를 통한 분석은 그러므로 (III)이후로 미룬다. 아래 글에서 단군조선이 견이, 낙랑, 상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멸망시킬 때 (BC 1767년), 이미 낙랑이 존재함을 알려 준다. 단군조선의 위치는 상나라, 하나라, 낙랑 등과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BC 1767년 겨울에, 하(夏)나라 걸왕이 폭정을 하자 상(商)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하(夏)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니, 단제께서 읍차 말량을 시켜 다른 제후국들(구이九夷, 구환九桓)의 군사로 지원하니 상(商)의 탕(湯)이 사죄하고 물러났..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

부제 : 낙랑은 압록수인 론강(Rhone river)의 동쪽 요동에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에 대한 회의를 간간히 언급해 왔다. 우리의 고대사에서 낙랑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낙랑의 위치는 고대 한국사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까지 그 위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 온조왕 시기 낙랑은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하며, 위례성을 불태우기도 했다. 고구려도 낙랑과의 관계는 대무신왕시기부터 미천왕 시기까지 대립을 이어 왔다. 물론 낙랑은 한사군의 일원인 낙랑군이 있고, 또 독립국인 최유의 낙랑국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은 565년 북제로부터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따라서 이는 신라의 당시 위치를 언급한다고 판단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Cherokian..

백제의 초기 역사자료를 고려한 위례성과 한산의 위치 추정 : S(I)

부제 : 백제의 위례성은 어디이고 한산, 한성은 어디인가 (I)? ​ 백제는 초기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BC 18)하였다. 하남 위례성이니 강아래라는 것이다. 위례성 북쪽으로는 강(한수?)이 흐르고, 동쪽에 높은 산 부아악 (한산)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이며, 남쪽은 기름진 땅이라 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남으로 가서 한산에 도읍했다고 했다. 그런데 기원전 5년에 한산으로 수도를 옮긴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389년을 지냈다고 했다. 따라서 위례성, 한산 등의 위치는 가까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강(한수?)이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선, 한산(漢山)을 키워드로 찾아야 하고, 지형상 동쪽은 높은 산, 서쪽은 큰 바다, 남쪽은 기름진 땅이며, 고구려의 졸본 부여의 남쪽이어야 한다. 이런 ..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2)?

창해는 푸를 창(蒼) 또는 큰 바다 창 (滄)자를 쓴다. 한무제 당시에 예군 남려가 항복하여 세운 창해군은 푸를 창(蒼)자를 썼다. 반면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시를 읊었다는 창해는 큰 바다 창(滄)자를 썼다.  즉 창해는 푸르며 큰 바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허강 등이 창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지중해는 예전부터 푸른 색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Carthago가 있는 튀니지아에서 푸른 색 바다색갈을 신성시하는 것도 그렇고, 터어키 아나톨리아지역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강을 Goksu (=Blue Water in Turkish)라 칭한 것도 그러하다.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창해군이 설치된 예군 남려의 지역을 알프스산맥이 있는 론강과 라인강의 상류지역으로..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우리는 역사에서 창해에 대한 아래 4번의 언급을 본다. 이 창해에 대한 위치추정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해는 동예의 위치를 알려 주며, 또한 신라와 금관가야와 관련 있는 실직곡국의 위치도 알려 준다. 동예, 실직곡국, 파조국이 창해 3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동예는 바로 북쪽에 동옥저가 있으며,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며,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때, 백제에 매우 적대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낙랑도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으나 곧 매우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였다. 따라서 창해의 위치추정은 초기 백제의 위치와 위례성의 위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의 창해에 대한 위치추정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창해에 대한 언급은 다음의 4가지이다. 1) 진..

정치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었으면...

오랫만에 정치계에 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30대 야당 당수가 생긴 것이다. 국회의원 0선인 그가 선출된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동안 국회의원 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동안 야당에서 투사 역할을 자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막말 프레임으로 점철된 역할이 투사역할을 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평가를 받지 못했나 하는게 아닌가 한다. 기존 정치인들의 반성을 요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2030세대의 바람이 더 불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의 바람의 연속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또한 그동안 지역감정의 프레임에 갇혀 안일하게 대처한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판단된다. 대..

죽엽평론 2021.06.13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updated)

제목 :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필자는 지난 번 글, '반달족(Vandals)은 월지족인가?'에서 반달족의 일원인 Burgundians이 부여일지 모른다는 언급을 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 보다 상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부여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살펴 보자. 아래 삼국유사의 자료를 보면, 기원전 239년 홀승골성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다 한다.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도읍을 옮겨 동부여를 열었다 한다.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10]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

반달족(Vandals)은 월지족인가?

Vandals족은 Huns의 migration period의 서진에 따라 Huns의 공격을 피해 게르만족의 일원으로 서쪽으로 옮겨 갔다고 서양사는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고트족이나 반달족, 그리고 Alans족 등 모두 훈족의 서진에 함께한 그룹으로 판단된다. 위키피디아 자료를 살펴 보면, 이런 정황이 곳곳에 나타난다. 사실 훈족 즉 고구려의 원래 위치가 요수인 론강유역을 점하고 있었다면, 서진이 아니라 반달족이나 Alans족 등을 동원하여 라인강 서쪽의 중국지역을 정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동안 마한이 이태리반도, 발칸반도,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하지 않았나 하는 분석을 해왔다. 그런데 마한에는 목지국이 주도 역할을 했다고 한다. 목지국(目支國)은 월지국(月支國)을 잘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