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62

<펌> 책계왕 (286-298 재위) - 위키백과

책계왕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백제 책계왕 百濟 責稽王지위백제의 제9대 국왕재위286년~298년대관식책계왕(責稽王)전임자고이왕(古爾王)후임자분서왕(汾西王)부왕고이왕(古爾王)이름휘부여책계(扶餘責稽)묘호책계왕(責稽王)시호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신상정보출생일?사망일298년사망지?왕조백제(百濟)가문부여씨(阿莘氏)부친고이왕(古爾王)모친?배우자?자녀분서왕(汾西王)책계왕(責稽王, ? ~ 298년, 재위 : 286년 ~ 298년)은 백제의 제9대 국왕이다. 고이왕(古爾王)의 아들로 청계왕(靑稽王) 또는 책찬왕(責贊王)이라고도 부른다. 체격이 크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고 한다.목차1생애2가계3참고4참고문헌생애《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286년에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

<펌> 고이왕 (234-286 재위) - 위키백과

고이왕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백제 고이왕 百濟 古尒王지위백제의 8대 국왕재위234년 ~ 286년전임자사반왕후임자책계왕부왕개루왕이름휘부여고이(扶餘古尒)신상정보부친개루왕고이왕(古尒王, ? ~ 286년, 재위: 234년 ~ 286년)은 백제의 제8대 국왕이다. 구이왕(久爾王)·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扶餘) 일본의 사서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 에는 구이(久爾) 또는 구이(仇爾), 고모(古慕) 등의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보는데,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

<펌> 사반왕 (234-234 재위) - 위키백과

사반왕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백제 사반왕 百濟 沙伴王지위백제의 7대 국왕재위234년 ~ 234년전임자구수왕후임자고이왕부왕구수왕이름휘부여사반(扶餘沙伴)신상정보부친구수왕사반왕(沙伴王, 생몰년 미상, 재위: 234년 ~ 234년)은 백제의 제7대 국왕이다. 사비왕(沙沸王) 또는 사이왕(沙伊王)으로도 부른다. 선왕(先王) 구수왕의 장자이다. 234년에 잠시 백제 어라하로 재위하는 동안 왕족 종실인 부여고이(훗날 백제 고이왕)가 섭정하였고, 재위한 지 1년도 채 안 돼서 그에게 보위 찬탈되었다. 왕으로서 기록된 것은 《삼국유사》이고, 정사인 《삼국사기》에서는 아예 왕 취급도 하지 않고 그냥 이름인 "사반"으로 지칭된다. 그가 죽고 70년만에 즉위한 비류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펌> 구수왕 (214-234 재위) -위키백과

구수왕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2년 1월)백제 구수왕 百濟 仇首王지위백제의 6대 국왕재위214년 ~ 234년전임자초고왕후임자사반왕부왕초고왕이름휘부여구수(扶餘仇首)신상정보부친초고왕구수왕(仇首王, ? ~ 234년, 재위: 214년 ~ 234년)은 백제의 제6대 국왕이다.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부른다.[1] 초고왕의 아들로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한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사반왕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친족인 고이왕에게 찬탈당했다. 또한 그가 죽은뒤 7..

<펌> 초고왕 (166-214 재위) -위키백과

초고왕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7년 2월)백제 초고왕 百濟 肖古王지위백제의 5대 국왕재위166년 ~ 214년전임자개루왕후임자구수왕부왕개루왕이름휘부여초고(扶餘肖古)신상정보부친개루왕초고왕(肖古王, ? ~ 214년, 재위: 166년 ~ 214년)은 백제의 제5대 국왕이다. 개루왕의 장남으로 소고왕(素古王) 또는 속고왕(速古王)이라고도 불렸다. 제8대 고이왕과의 관계는 불확실한데, 고이왕의 친형인가 여부는 이견이 있다. 또한 고이왕이 초고왕의 외삼촌이라는 설도 있다.목차1생..

<펌> 온조왕 (BC 18 - AD 28 재위) - 위키백과

온조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백제 온조왕 百濟 溫祚王 지위 백제의 초대 어라하 재위 기원전 18년~28년 대관식 온조왕(溫祚王) 전임자 ? 후임자 다루왕(多婁王) 부왕 ? 이름 휘 부여온조(扶餘溫祚) 별호 해온조(解溫祚) 묘호 온조왕(溫祚王) 시호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 신상정보 출생일 ? 출생지 ? 사망일 28년 음력 2월 사망지 ? 왕조 백제(百濟) 가문 부여씨(阿莘氏) 부친 ? 모친 소서노(召西奴) 배우자 ? 온조왕(溫祚王, ? ~ 28년 음력 2월, 재위: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은 백제의 건국자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다. 형으로는 유리명왕와 미추홀의 창업자 비류가 있다.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 소생 유리명왕이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1.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 연구의 의의 1) 신라와 당의 강역의 모호성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는 백제이다”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이고 로마가 백제라고 주장한 필자는, 통일신라이후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위치를 놓고 적잖은 고민을 한 것이 사실이다. 위치상으로 보면, 백제의 비잔틴제국 대부분을 흡수한 우마이야왕조가 통일 신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존의 서양역사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이 점령한 무슬림국가라고 나온다. 신라나 당나라가 불교는 관련이 있었어도 이슬람교와는 관련이 있었다는 우리 역사기록은 접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우리 역사에서는 엄연히 다른 국가로 나오는데, 서양 역사기록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비잔틴제국과 무슬림 아랍국가인 사라센제국이..

<펌> 발해/역사 (698-926)- 나무위키

발해/역사 최근 수정 시각: 2019-05-29 05:45:23 분류 발해 상위 문서: 발해 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1.2.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 1.3. 대조영 집단의 영주 탈출 1.4. 국호 2. 영토 확장 3. 혼란과 극복 4. 전성기 (해동성국) 5. 쇠퇴 6. 멸망 6.1. 멸망 원인 6.1.1. 백두산 분화설 6.1.2. 지배층의 내분설 6.1.3. 수도 급습설 6.1.4. 말갈과의 대립설 7. 멸망 이후 7.1. 고려의 반응 7.2. 발해부흥운동 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 형성하고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공격으로 668년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먼저 당은 평양..

발해 (698-926) 2019.06.12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 가라는 지중해에 있다. (수정본)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 가라는 지중해에 있다 최근에 본 블로그에 올린 글 ‘탐라국은 인도양의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이다’란 글을 쓰면서, ‘왜’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풀 수가 없었다. 탐라국은 백제, 신라외에도 ‘왜’와도 밀접한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왜’는 백제, 신라의 허락을 받고 교역을 하고 있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교역을 하는 왜인들을 백제는 바다에 집어 던졌다고 했다. 신라의 탐라 점령이후에는 탐라국에 표류한 ‘왜’의 사신들을 구하기 위해 접촉하는데, ‘왜’는 신라에 도움을 먼저 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탐라국과 가까운 듯하며 많은 교역을 하는 ‘왜’의 존재와 위치가 궁금하였다. ‘왜’는 백제의 역사에서 속국으로서 또는 동맹국으로서 많이 등장하고, 신라역사에서는 피해를 많이 ..

2019.06.09

탐라국은 인도양의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이다.

탐라국은 어디인가? 지난 번 세계삼한역사학회에서 탐라국이 호주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옮겨 보았다. (본 블로그 글, '탐라국은 어디인가?' 참조) 그러나 탐라국이 황룡사 9층탑에 있는 9국의 하나라는 것을 보고 다시 심층적으로 살펴 보아야 하겠다고 느껴 그동안 이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먼저 황룡사에 대해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시절 그 공사를 시작했는데, 계속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완공이 연기되었다.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장육존상의 재료는 서천축의 아육귝에서 왔다고 하는 점이 눈에 뛴다. 그리고 금과 철인 재료가 바다에 표류하다가 신라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목탑을 위해 백제의 아비지란 기술자를 초청했다.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 (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