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154

후백제의 견훤은 불가리아 1제국의 Simeon왕인가?

필자는 비잔틴제국을 백제라 판단했다. 서로마제국도 일부는 백제로 판단했다. 단 비잔틴제국은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로 판단했다. 통일신라의 세력은 유럽 역사에서 무슬림으로 나타난다. 스페인지역의 무슬림화는 통일 신라가 고구려의 남부인 서고트왕국의 점령으로 판단된다. 위키피디아는 750년경 우마이야왕조가 아바스왕조에게 쫓겨 나서 스페인지역으로 갔다고 했으나, 필자는 이런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다. 망명 일부 세력이 다른 지역을 점령할 힘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약간의 연대 차이도 난다. 우마이야 왕조가 막을 내린 것은 750년경이고, 스페인의 서고트왕국은 8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까지 신라가 점령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고구려도 부흥운동이 있었으니까. 발해고를 보면 ..

볼가 불가리아는 고구려와 발해, 고려의 영역인가?

볼가강 유역에 있었던 Volga Bulgaria(7c-1240)는 자료에 따라 조그만 지역으로 묘사하는 지도도 있고, 카스피해 위에서 극지방까지 지역을 차지한 지도도 있다. (아래 지도 참조) 추후에 살펴 보는 Kievan Rus는 흑해위에서 극지방까지 이르는 지역을 차지 했는데, 그 오른쪽에 있는 볼가 불가리아인 것이다. 볼가 불가리아는 Old Great Bulgaria가 망한 후 Kubrat의 둘째아들인 Kotrag가 북쪽으로 이동해 볼가강과 카마강이 만나는 지점에 볼가 불가리아를 세웠다 한다. (아래 지도 참조) 때문에 초기에는 볼가강 유역의 지역에서 출발하여 점차가 그 영역이 커졌울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미 'Old Great Bulgaria는 고구려 말기의 역사의 일부이다'라는 글에서 살펴 보..

흑해 위 Old Great Bulgaria(632-668)는 고구려 말기 역사의 일부이다

흑해위 지역에는 AD 632년부터 불가리아가 나타난다. Old Grea Bulgaria, Kara Bulgar, Volga Bulgaria 등이 그것이다. 서양사에서는 Huns, 즉 훈족과 Bulgars, 즉 부여족을 아시아에서 온 부족으로 판단한다. 필자는 Bulgar 부족을 부여족으로 판단한다. 부여족은 가는 곳마다 부류 등 '불'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볼가강 이름도 Bulgars라는 부여족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리고 Vulga latin이란 언어를 쓰는 로마제국도 결국 부여족의 일부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가- 이름이 붙는 지역은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부여족은 백제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부여의 전통을 더 계승했다..

흑해 위 Magyar족은 흑수말갈인가?

I. 흑해 위의 Magyar족 지난 글, 견훤과 시메온 왕과의 비교에서 살펴 보았듯이, 당시 흑해 위에 있던 마자르족은 비잔틴제국과의 연합으로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아래 지도에서 오른쪽 상부에 MAGYARS가 나타난 것이 보인다. 즉 890년에 드니에스터 강유역에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시메온왕은 당시 마지르족의 우측에 있었던 Pechnegs와 연합하여 흑해위에 마자르족에 반격 공격하여 이들이 지금의 항가리지역, 즉 판노니아지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마자르족의 흑해위의 존재 여부에 대해 자료를 다시 보고자 한다. Bulgaria and Magyar at 890 AD (source : Wikipedia) 아래 자료 Magyar tribes에서 보듯이, 그들은 원래 기원전 5세기 ..

고구려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도모한 지두우는 어디인가?(수정본)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역사의 무대가 유럽과 페르시아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는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도모한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필자의 상기 주장을 검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증을 위해 우선 지두우에 관한 사료를 살펴 보고, 이어 유연에 관한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타타르로 판단되는 지두우와 아바르족으로 판단되는 유연의 위치를 검토하며,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1. 지두우 1) 중국의 북적 중 하나. 아래 자료에 의하면 5세기 당시 지두우는 중국의 16개 북쪽 이민족의 하나라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이 프랑스의 론강 서부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프랑스에 있던 중국의 위치에서 북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

호랑이와 한민족 역사

올해가 호랑이 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호랑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단군 신화부터 호랑이와 곰이 등장하고 마늘이 언급된다. 고구려에 관한 고구리사 초략을 보면 고국원제가 369년 치양싸움에서 백제 근구수왕(태자시절)에게 패하여 지쳐 있을 때 또한 호랑이 피해를 보았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자료에서 보면 치양은 대암산과 가깝고, 북한산과 가까우며, 수곡성과도 가깝다. 또한 백제는 해로로 군사를 보충하고 치양을 쳤으니, 치양은 바다와도 가깝다는 것이다.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근초고왕은 한수 이남에서 군사를 사열(369)하고, 패하에서 고구려군에 승리하고 (371), 평양성 싸움에서 고국원제가 죽게 만들고(371), 그리고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371) 한다. 그러나 375년 수곡성을 ..

연나부 부여는 프랑스에 있었던 Kingdom of the Burgundians이다

성현식님의 글 중에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이란 글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에서 7개 부여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그중에서 우리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연나부 부여(椽那部 夫餘)가 언급된다. "(5) 연나부부여(椽那部 夫餘) : 대소 왕의 6촌 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고구리는 그를 왕(제후)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편입시켰다. 뒤에 자립해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니 연(燕)나라 땅과 가까웠다고 한다. 문자명제 때인 494년 나라를 들어 바치고는 아예 고구리의 연나부에 편입되는데, 이를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라 한다." (자료 : 성현식,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 스카이데일리, 필자의 네이버..

순장, 편두 관습을 통해 본 한민족의 활동 지역(updated)

한민족은 순장(殉,따라 죽을 순, 葬, 장사 장)(Retainer Sacrifice)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누가 죽으면 따라 죽어 묻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이 죽으면 그 신하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노비가 함께 묻히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사에서 동천왕(東川王) (재위 : 227-248) 사후 이러한 풍습을 언급한 기록이 있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임금이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

진(鎭/津), 포(浦), 령(嶺)의 지명을 통해 본 한반도 한국사와 중공지역 한국사 주장들의 의문점

오늘은 한민족사에 나오는 수군(水軍) 기지 즉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닷가에 접한 곳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보통 수군(Marine) 기지에 대해서는 진(鎭, 진압할 진, 또는 津, 나루 진)을 끝으로 하는 지명이름이 등장한다. 바다에 접한 대표적인 지명이 통일신라 장보고 장군이 설립한 청해진(凊海鎭)이다. 주위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서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당나라에서 돌아와 청해진을 설립하고 무역로 해상을 지배했다고 한다. 즉 당과, 신라, 왜 등의 무역 해상로를 지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반도 한민족사를 주장하는 제도권 사학자들은 청해진이 전라남도 완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해’와는 연관성이 없다. 재야사학자 고 이중재씨는 중공의 내륙 북서부에 있는 청해성(靑海省)의 명칭을 고려하여, 중공..

산, 골의 지명을 통한 한반도 한국사와 중공지역 한국사 주장들의 의문점

한민족은 수도를 정할 때, 배산임수(背山 臨水)를 지리적 요건으로 삼았다. 즉 뒤로는 산을 그리고 앞으로 강을 두는 지형을 선호했다. 비록 그것이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민족은 산과 강을 많이 접한 지역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라는 동요는 그래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언덕 (Hill)에 성을 쌓고 성곽내에서 사는 삶을 고구려인들은 선호했다. 군사적으로 방어 하기 쉬운 지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민족에게 산(山, Mountain)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영산(靈山, 성스러운 산)으로는 백두산, 태백산 등이 있다. 현재의 한반도에는 북쪽 국경에 있는 백두산, 강원도의 태백산, 설악산,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 ..

바다, 강의 지명을 통한 한반도 한국사와 중공지역 한국사 주장들의 의문점

현재 한반도 (Korean Peninsula)에는 서해, 동해, 남해가 있다. 한국사의 고구려는 서해, 동해, 남해에 접했었다. 고구려 중천왕 시기에는 질투심이 심한 관나부인을 서해에 수장했다고 한다. 고구려 태조왕과 문자왕 시기에 남해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 동천왕은 동해의 미인을 후궁으로 받아 들였다. 중국 북위의 효문제는 492년 티베트의 전신인 토욕혼의 모용부연수에게 '서해군 개국공 토욕혼왕'이라는 직위를 주었다. 즉 티베트의 전신인 토욕혼은 서해에 접했다는 것이다. 현재 티베트가 있다는 중공에는 서해가 없다. 즉 한국사를 현재 한반도로 추정하는 제도권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의 남해에 대한 설명이 불가하며,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국사의 중공지역으로 추정하면, 고구려의 서해,..

371년 삼국사기 백제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리사 초략의 한성공격 (revised)

성현식님이 스카이데일리에 쓴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에서 삼국사기의 371년 평양성공격이 고구리사 초략에서는 한성공격으로 기록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평양성과 한성의 위치 추정에 고심하고 있던 필자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어 펜을 들었다. 동 기사에서는 352년 관미령 전투에서부터 언급하고 이어서 치양성 전투도 언급하고 있어, 평양성내지 한성의 전투를 분석하기 앞서 이들 지역의 전투도 같이 보고자 한다. 1. 352-369년 관미령 전투 및 이후 1) 삼국사기 기록 (352-369) 고구려 고국원왕: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

한국 고대사의 숙신은 누구인가?

한국 고대사에서 숙신에 대한 언급은 필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그전에는 숙신이 읍루나 말갈 정도의 것으로 생각하고, 혹시 유럽의 북해에 접해있는 Saxons족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스카이데일리지에 실린 이을형씨의 글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오손/오환/숙신, 펌글 참조). 이을형씨는 숙신씨가 동이족의 일원으로 가장 오래되었으며, 예맥조선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글을 통해, 예맥조선, 낙랑조선을 언급하는 것을 들어 필자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언급인 것이다. 이미 필자는 낙랑조선에 대해 관심이 있어, 낙랑 시리즈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낙랑조선의 범위가 ..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2) (수정본)

부제 1: 고구려의 평양성 위치 추정의 검증 부제 2: 고구려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인가? 부제 3: 백제의 수곡성, 치양성 위치 추정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소수림왕시기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고구려의 수도, 특히 평양성의 위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이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평양성 공격과 관련되기도 하므로, 관련하여 분석하며, 수곡성, 치양성에 대한 위치 추정도 겸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과 많은 유사점이 있는 바, 이에 대해서도 1차적으로 검토하며, 고국원왕 시기의 분석도 겸하고자 한다. V. 소수림왕 시기 고구려와 백제, 전진 상황을 고려한 평양성 위치 추정 -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시기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372) 二年夏六月 태학을 ..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1)

지난 번 글 발해고를 통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추정해 보았다. 론강을 압록수, 즉 요수로 판단했을 때, 발해고 자료에 나타난 중국 사서 내용을 바탕으로 거리를 계산 한 바에 의하면, 국내성은 쥬네브 정도로 나타났고, 환도성은 Bern 또는 Fribourg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평양성은 스위스의 쥬리히가 아닌가 추정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추정 결과가 고구려 역사에서 나타나는 정황과 맞는지 아니면 틀리는지를 검증하는 글이다. 국내성, 환도성은 고구려 초기 중국측과의 마찰로 인해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또한 평양성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과의 전쟁에서 언급되며, 고구려의 동천왕시기, 고국원왕 시기, 광개토태왕 시기, 장수왕 시기에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산라 진흥왕 시기와..

장수왕 (413-491) 시기의 고구려와 아틸라 포함 훈족 왕들과 오도아케르 자료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413)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414)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415)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415)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415) 416-419 : 4년 공백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420) 421-424 : 4년 공백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425)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425)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426)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427) 428-435 : 8년 공백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436)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436)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신라하(新羅河)와 조선하(朝鮮河) (updated)

며칠 전, 발해고 지리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글을 쓰는 중에, 스위스(Switzerland)의 쥬리히 (Zurich) 근처에 있는 Sihl river라는 자료를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 강이름이 Sylaha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고대 유럽어 또는 켈트어 원천인 Sila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aha어미는 고대 독일어로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고 위키자료는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아래 원문을 옮겨 싣는다. "Etymology The first written reference to the name dates to 1018, in the form Sylaha.[3] The name may be of Old Eur..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 성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여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고 신주를 세웠다 했기 때문이다. 즉 평양성의 위치가 정확하면, 한성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가 더 용이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기 앞서, 발해고의 지리지 자료를 바탕으로 먼저 추정하고자 한다. 발해고는 1784년 정조 6년에 유득공에 의해 쓰여진 역사 지리지이다. 비록 조선 후기의 역사서라 천년 전의 고구려와 발해 시대의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만, 발해고에..

로마사 자료를 통한 위례성, 한산의 추정 : S(IV)

부제 : 낙랑군 동부도위의 낙랑군은 발칸반도 트라키아(동예)의 좌측에 있었다. 부제 : 동예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다. 그동안 낙랑을 알아 보기 위해 다키언에서 출발해서 키메리언, 마사게태까지 분석해 보았다. 그래서 얻은 지식에 근거하여 숙고해보니, 동예는 흑해, 에게해에 접한 트라키아로 판단된다. 즉 스키타이, 사카의 일원인 우리 개념으로는 예맥족인 Thraco-Cimmerians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을 거듭하여 아나톨리아를 거쳐 발칸반도, 더 나아가 중부유럽, 이태리 북부 알프스지역, 북유럽의 Jutland(조나국, Cimbri), 프랑스의 Gaul족 (켈트족)의 후예인 Franks (Sicambri)까지 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에서 터어키 아나툴리아에 있는 Sakarya river ..

서양사 자료를 통한 위례성 추정 : S(III)

앞의 두글에서 필자는 위례성과 한산, 한산성, 한성 등에 대해서 백제와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 보았는데, 그 중에서 위례성은 한성과는 다른 위치임을 알았다. 그래서 먼저 위례성에 대한 서양사 자료를 검토하고자 한다. 위례성은 백제의 건국지로서 그 의미가 있다. 현재로서는 한산이 위례성 가까이 있는지 보류하며, 위례성의 위치 추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위례성이 우선 발칸반도 일리리아 지역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백제의 건국지 설에 패대지간설, 대방고토설과 진번지간설이 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패대지간설은 패수와 대수를 건너 가서 건국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패수는 북으로 흐르는 라인강, 동남으로 흐르는 다뉴브강으로 추정했다. 대수는 현재로서는 대방군지역에 있는 강이 아닌가 한다...

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위례성, 한산성, 한성의 위치 검토 ; S(II)

부제 : 백제의 위례성은 어디이고 한산성, 한성은 어디인가? (II) 낙랑과 관련한 온조 백제 초기의 위치 때문에 낙랑의 위치를 연구 하느라 한참 이후에 다시 백제의 위치 분석을 다시 찾게 되었다. 낙랑군의 위치를 떠나 낙랑 조선까지 내친 김에 알아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동안 알아본 낙랑의 위치는 낙랑군과 낙랑조선의 위치는 별개의 것으로 판단되며, 낙랑군은 초기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판단된다. 나중에는 발칸반도 주위의 형식적인 진번군,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 동부도위는 토착 세력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정도 선지식을 가지고 위례성과, 한산성, 한성에 대해 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자료를 가지고 추정해 보고자 한다. I. 백제 개로왕 시기 ..

중앙아시아 Massagetae, Dahae는 낙랑조선인가? (II)

부제 : 중앙아시아의 Dahae는 누구인가? 필자는 그동안 Massagetae, 그리고 같은 스키타인이면서도 다른 키메리언에 대해 살펴 보며, 낙랑조선, 진국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제 아케메네스제국에 이르는 보다 후대에 해당하는 Dahae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한다. Livius 자료와 Wikipedia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Dahae는 누구인가? Parthian Empire의 원천이라는 Dahae는 3개부족의 연합체로 출발했다 한다. 그 위치도 카스피해 동쪽에 위치하여, 스키타인 Massagetae와 가까이 있었다. Archaemenid Empire (500 BC) with detail of regions such as Dahae, Hyrcania, Parthia etc.(source ..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I)

지난 글에 이어 BC 1200 - BC 450 기간의 키메리언의 활동을 살펴 보자. 이 글 또한 The History Files에서 올린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의 내용을 주로 살펴 보고,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2. BC 1200-450 BC 기간의 Cimmerians 활동 분석 1) BC 1200 - BC 900 시기의 Cimmerians 청동기시대의 범 발트해 지역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왔다.과거 프러시아지역인 동부 폴란드지역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서부지역을 포함한 서부영역은 중부유럽의 금속산업의 영향하에 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동부지역에서 볼가강 상류지역까지 걸쳐있는 숲속의 동부 또는 대륙영역에서는, 사람들..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

지난 글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에 대한 분석에 이어, 같은 스키타인이면서도 중앙아시아가 아닌 흑해주변, 코카서스산맥, 아나톨리아 및 유럽에서 활동한 Cimmerians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 글은 The History Files에 실린 'Kigdom of Anatolia - Cimmerians'의 글 자료를 주로 바탕으로 하여 소개하며, 이에 대한 필자의 검증자료와 판단을 추가한다. 1. 스키타인의 일원인 Cimmerians의 정체성 분석 먼저 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그 다음에 BC 12c부터 나타나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1) BC 9c부터의 Cimmerians에 대한 기록 및 그들의 고향 호머는 이미 기원전 9세기에 Cimmerian..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는 훈족인가?

​ 필자는 지난 글의 분석에서 Massagetae와 Cimmerians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근거로 이들이 흑해 주변의 지역에 고향을 둔 스키타인, 사카족이라는 것을 확인 했고, 이들은 이동을 계속하여 메디아제국, 아나톨리아지역 등에 진출함으로써, 이들이 결국 발칸반도 Thracians지역, 이태리 북부지역까지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이 BC 11C부터 존재했던 낙랑조선(=기자조선)이나, 우리가 역사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진국(辰國)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위키피디아 자료가 아닌 다른 자료를 분석하며, Massagetae에 대해 분석하고, 이어서 다음 글에서 Cimmerians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Dacians과 연관이 있으며, 신..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 Dahae는 낙랑조선인가? (I)

​우리는 지난 글, '낙랑은 어디에 있었는가? (III), (IV)'에서 Dacians, Etruscan, Phrigians 등이 Wolf(늑대)라는 매개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이들이 낙랑조선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했다. '낙랑조선'이란 표현은 기자조선에서 처음 언급된다. 즉 상나라 말기의 현자였던 '기자'가, 주 무왕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의 질문에 홍범 9주를 말했다 한다. 기자는 동쪽으로 조선에 가서 다스렸다 하는데, 이때 '낙랑조선' 사회에서는 8조금법이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서 지리지 연조에 기록되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BC 11c에 '낙랑조선'이라고 나타난 바, 기자조선을 낙랑조선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V)

부제 : 낙랑은 발칸반도 Dacians을 포함했다. 이제 보이족과 끝까지 싸운 독립된 낙랑지역으로 추정되는 Dacians에 대해 살펴 보자. 아래 글에서 Dacians지역은 Carpathian Mountains지역에서 흑해의 서쪽까지 위치한다고 했다. 현재 나라에서는 루마니아, 몰다비아, 우크라이나 일부, 세르비아 동쪽, 불가리아 북쪽, 슬로바키아, 항가리, 그리고 폴란드 남부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The Dacians (/ˈdeɪʃənz/; Latin: Daci; Greek: Δάκοι,[2] Δάοι,[2] Δάκαι[3]) were a Thracian[4][5][6] people who were the ancient inhabitants of the cultural region of Dacia, ..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I)

부제 : 켈트족 보이족의 동방행은 진(秦)나라의 동방정벌이 아닌가? 부제 : 로마제국의 설립자인 에트루리아문명은 마한이 아닌가? 지난 글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I)'에서 우리 역사 자료를 통한 분석에서 낙랑의 위치는 알프스산맥인 이태리 북부지역 또는 단단대령 (=Dinaric Alps) 서쪽인 판노니아지역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물론 이는 그동안 필자가 쓴 글을 바탕으로 추정한 결과이다. 그리고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에서 동양의 고대사 자료를 바탕으로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또 한번 검토하였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고죽국이 있던 요수지역으로 결국 알프스 산맥에 있는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8세기부터 있던 낙랑지역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으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알프스..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

부제 : 낙랑은 BC 18c부터 존재했으며, 압록수 론강의 고죽국에 있었다. 낙랑에 대한 국내 역사 자료를 더 살펴 보아야 하겠다. 삼국사기와 환단고기에 있는 자료를 더 검토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서양자료를 통한 분석은 그러므로 (III)이후로 미룬다. 아래 글에서 단군조선이 견이, 낙랑, 상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멸망시킬 때 (BC 1767년), 이미 낙랑이 존재함을 알려 준다. 단군조선의 위치는 상나라, 하나라, 낙랑 등과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BC 1767년 겨울에, 하(夏)나라 걸왕이 폭정을 하자 상(商)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하(夏)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니, 단제께서 읍차 말량을 시켜 다른 제후국들(구이九夷, 구환九桓)의 군사로 지원하니 상(商)의 탕(湯)이 사죄하고 물러났..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

부제 : 낙랑은 압록수인 론강(Rhone river)의 동쪽 요동에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에 대한 회의를 간간히 언급해 왔다. 우리의 고대사에서 낙랑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낙랑의 위치는 고대 한국사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까지 그 위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 온조왕 시기 낙랑은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하며, 위례성을 불태우기도 했다. 고구려도 낙랑과의 관계는 대무신왕시기부터 미천왕 시기까지 대립을 이어 왔다. 물론 낙랑은 한사군의 일원인 낙랑군이 있고, 또 독립국인 최유의 낙랑국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은 565년 북제로부터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따라서 이는 신라의 당시 위치를 언급한다고 판단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Cherok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