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중 (391-559)/문자명왕(491-519)

<펌> 문자명왕 (491-519)- 나무위키

Chung Park 2020. 7. 11. 09:57

분류

 

  

 

시호

문자명왕(文咨明王)

명치호왕(明治好王)

 

성씨

고(高)

 

나운(羅雲) / 개운(个雲) / 운(雲)

 

왕태자

고흥안(高興安)

 

왕자

고보연(高寶延)

 

공주

안학공주(安鶴公主)

 

생몰연도

음력

? ~ 519년[1]

 

재위기간

음력

491년 12월 ~ 519년(28년)

 

1. 개요

2. 소개

3. 전성기

3.1. 최대 영토의 주인공?

3.2. 불교 정책

4.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4.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

4.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

4.3. 외교

5. 평가

6삼국사기 기록

1. 개요

고구려 제 21대 군주. 삼국사기 기록상으론 한국사 최초로 태손(太孫)으로서 성장하였다.

 

2. 소개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个雲)', '고운(高雲)' 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개운은 나운의 변형으로 보이고,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을 나자를 빼고 두 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공식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처럼 길었을 가능성이 큰데 문자명왕, 명치호왕 등의 명칭은 문자 명치 호태왕(文咨 明治 好太王) 같은 형식의 축약일지도 모른다.[2]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3] 다만 아버지 고조다가 할아버지인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버려서(...) 손자인 나운이 장수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

3. 전성기

교과서 등에서는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가 문자명왕의 치세까지 유지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기록들을 보면 문자명왕 말년부터 서서히 쇠퇴기에 접어드는 모습이 띄기도 하여, 6세기 중반 고구려 침체기의 근원을 이때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3.1. 최대 영토의 주인공?

문자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면서 고구려가 최대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서도 제기되지만, 반론도 있어 확실하진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당서에 고구려 국경이 기존 2천리에서 동서 3100리로 확장되어 요서의 차오양(영주)에 접했다는 기록이나 통전, 태평환우기에 수나라 시절 고구려 영토가 동서 6천리였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4][5]

3.2. 불교 정책

을 제법 세웠다.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4.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4.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

물길에게 북쪽 변방이 그대로 쓸려나갔고, 거란 등에 대한 통제가 점차 약해지는 상황이 조공 기록에서 드러난다. 특히 북위의 8대 황제인 세종[6]과의 대화를 보면 부여와 섭라가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그들이 생산하는 황금과 옥이 조공 품목에서 빠졌다고 하자 이를 두고 세종이 "니네 구역은 너네가 잘 관리해야지."[7]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광개토대왕-장수왕대에 비해 주변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4.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

장수왕 재위 후반기의 남진 정책도 그대로 계승했다. 다만 장수왕의 후광에 미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정작 기록에 나와있는 남진과 관련된 업적은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500년 이전까지는 장수왕 시절부터 매년마다 신라를 연례 행사처럼 공격하더니 신라 지증왕이 즉위하는 500년부터는 갑자기 40여년간 신라와의 전쟁이 뚝 끊겨버리는데, 기록상 뭐라고 나오는 건 아니지만 뜬금없이 전쟁이 중단된 것이 양국이 일종의 휴전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문자명왕은 신라보다는 백제 공격에만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 마저도 512년 9월 전쟁에서 무령왕에게 패한 뒤로는 전쟁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이때쯤 백제도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중흥 군주가 나타나서 단순 1:1조차 서서히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신라도 예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곤 했지만 진흥왕 이전까지는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521년 11월에 무령왕 본기에는 "백제가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고구려의 위세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

아래는 문자명왕 치세에 벌어진 고구려와 나제동맹간의 전투다.

  • 494년 7월 신라와의 살수 벌판에서 승리. 견아성 전투에서 백제의 지원군을 보고 퇴각.(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495년 8월 백제의 치양성 전투에서 신라의 원병에 의해 패배.(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신라 원군에 의해 궤멸(신라본기)
  • 496년 7월 신라 우산성 전투 패배.(고구려본기, 신라본기)
  • 497년 8월 신라 우산성 전투 승리.(고구려본기, 신라본기)
  • 502년 11월 백제의 침략. 전투결과는 불명.(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503년 11월 백제의 수곡성 공격. 전투결과는 불명.(고구려본기)
  • 506년 11월 백제를 침공했으나 동장군으로 별다른 소득없이 퇴각.(고구려본기)
  • 507년 10월 백제 한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백제의 저항으로 퇴각.(고구려본기)
  • 512년 9월 백제의 가불, 원산을 무너트리고 포로를 데려옴.(고구려본기) / 고구려가 가불, 원산을 침공했으나 위천 북쪽에서 크게 물리쳤다.(백제본기)


이처럼 수차례 남쪽을 침공했지만 확실한 승리가 기록된 것은 497년 8월에 우산성을 함락한 것 하나 뿐이다. 고구려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말갈의 침공이 고구려의 계획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506년 7월에 백제의 고목성에서 승리를 거둔 거 하나가 더해질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안장왕의 즉위 및 백제에 대한 공세 전환으로 인하여 또 다시 백제가 밀리는 형국이 되어 나제동맹을 다시 활성화시키게 된다.

4.3. 외교

북위와는 장수왕 대에 이어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허나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 북위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외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사신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일본과 "긍정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듯하다.

무인 백제가 작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사나노아히다(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안정(安定) 등이 따라와 내조(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일본서기, 514년 9월.

5. 평가

문자명왕의 앞뒤로 장수왕과 안장왕이 집권을 하다보니 무색무취한 왕, 전성기를 무난히 유지한 왕으로 보이지만 적은 사료로도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제한 왕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후대인 안장왕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전성기를 유지시켰으니 망정이지,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단 2세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정.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실책을 거듭했다. 북방의 기마민족들인 물길거란과 남방에 백제의 동성왕무령왕과 같은 중흥 군주들에게 힘에서 밀리기 시작하며 특히 백제와 1:1에서 밀리기 시작한게 문자명왕의 시대다. 덕분에 장수왕 시기에 차지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도 보이며 장수왕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남진 정책이 중지된 것도 문자명왕의 시기.[8] 또한 지지부진한 외정의 결과 주변의 장악력도 장수왕 시기에 비해 떨어졌고,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문자명왕 본기
一年 문자왕이 즉위하다 (AD 491)
一年春三月 북위 효문제가 왕의 즉위를 축하하다 (AD 491)
一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492)
三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부여가 항복해오다 (AD 493)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AD 493)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AD 494)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AD 494)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AD 495)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AD 496)
七年春一月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AD 497)
七年秋七月 금강사를 창건하다 (AD 497)
七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오다 (AD 498)
九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一年秋八月 농작물에 병충해가 발생하다
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다 (AD 501)
十一年夏四月 양 고조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침입하다 (AD 501)
十一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백제가 수곡성을 침략하다 (AD 502)
十三年夏四月 사신이 북위를 방문하여 황제를 면담하다
十五年秋八月 사냥을 하다 (AD 505)
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AD 505)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AD 506)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七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八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夏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秋九月 백제 가불· 원산 두 성을 빼앗다 (AD 511)
二十二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二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조공 기록이 전체의 절반이다. 다만 이걸 가지고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자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린 건가요?' 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삼국 시대에는 외교 사절도 조공 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기 때문. 즉, 조공을 많이 바쳤다는 건 그만큼 외교에 적극적이었다는 뜻도 된다. 상기된 항목에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북위와 친선 관계를 계속했다는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9]

[1] 장수왕의 손자이지만 할아버지 장수왕이 거의 100세 가까이 장수했기에 그 역시 즉위할 당시엔 5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문자명왕 역시 거의 80세 가까이 장수했던 것이다.

[2]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시노하라 히로가타, 2004), 『고구려 태왕호의 제정과 국강형 왕릉입지의 성립』(여호규, 2010)

[3] 참고로 고조다는 고추대가라는 직책을 겸직했는데, 이는 왕족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호칭으로, 고구려가 졸본성-국내성의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성장하면서 합병한 세력들의 호칭들을 왕 아래에 일원화시키면서 등장했고, 태자가 겸직했다. 고구려가 오부족 체제였을 때, 왕족인 계루부와 전왕족인 소노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장을 고추가라고 해서 별도의 조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루부의 최고 수장은 당연히 왕이니까, 정통 계승자가 고추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라의 갈문왕이나 백제의 길사와 같이 왕권 버금 세력의 흔적인 것. '태자'라는 공식 직위와는 별도로 붙는 타이틀로서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비슷하게 볼 수도 있다.

[4] 북한의 경우에는 이 기록을 역사 부도에 적극 반영하는 편이라, 남한의 고구려 강역 표시랑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학계에선 한국사로 취급하는 왕조 중 역대 강역이 가장 컸던 나라로 (척박한 연해주 땅이 많긴 했지만) 발해를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5] 국내에서는 경복대학교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 윤병모 작가, 정원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등이 이쪽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들은 고구려 동서 6천리라는 표현을 거란과 말갈 방면,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 ~ 연해주 방면으로 뻗은 것으로 보는 편이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수 전쟁 이후 수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동서 3100리로 요하를 넘어 영주에 이르렀다는 양당서의 기록도 윤용구, 윤병모는 동서 6천리와 뭉퉁그려서 동북쪽과 서북쪽에 있던 거란, 말갈 방면으로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본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 중에 월희주가 있었는데, 발해의 15부 중 회원부, 안원부에 있던 월희말갈로 추정된다.

[6] 선무황제 원각(元恪). 499~515.

[7] 이는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인정해준 발언이다.

[8] 고구려에겐 다행히도 다음데에 안장왕이 다시 국력을 회복, 백제와 전쟁에서 한강 유역을 되찾아 강역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남방에 대한 공세적 기조도 안장왕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9] 애초에 조공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는 식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특유의 상호 무역 체제로 보는 것이 더 맞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다. 명분을 주고 실익을 취하는 것. 때문에 대대로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와 돌궐 같은 유목 민족 역시 표면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역대 이민족 국가들 역시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고,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에는 말이 조공이지 상대적으로 대등한 취급을 하거나 아예 상전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상국 노릇하던 왕조도 임금마다 성향 차이는 있겠지만, 표현에서 마냥 하대하기보단 굉장히 위하고 사모한다는 식의 공손한 표현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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