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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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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진지왕(眞智王) | |
연호 | 홍제(鴻濟)[1] | |
성씨 | 김(金) | |
휘 | 사륜(舍輪) / 금륜(金輪) | |
왕후 | 지도부인(知刀夫人, 知道夫人) 박씨, 도화랑(桃花娘)(?)[2] | |
왕자 | 김용춘(金龍春), 비형랑(鼻荊郞)(?)[3] | |
부왕 | 진흥왕 | |
모후 |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 | |
묘지 | 영경사(永敬寺) 북쪽 | |
생몰년도 | 음력 | ? ~ 579년 7월 17일 |
재위기간 | 음력 | 576년 ~ 579년 7월 17일 (4년) |
1. 개요 2. 이름에 대한 이모저모 3. 생애
3.1. 왕위에 오르다 3.2. 재위 기간 3.3. 폐위와 의문
4. 가족 관계 5. 삼국사기 기록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드라마 선덕여왕 6.2. 드라마 대왕의 꿈
7. 같이보기
1. 개요
신라 제25대 왕. 본인은 비록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일찍 왕위에서 물러났지만, 훗날 왕위에 올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김춘추의 할아버지라는 점에서 마냥 단순하게 짧은 치세를 보낸 군주는 아니다.
2. 이름에 대한 이모저모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 이 이름은 불교의 전륜성왕에서 따온 이름이다. 전륜성왕은 불법을 펼쳐 세상을 평정한다고 예언된 인물. 석가모니 탄생 시 아시타 선인이 '이 아이는 자라서 출가하면 부처가 될 것이요, 왕이 된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유명한 일화다. 전륜성왕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의 네 종류로 구분되는데, 금륜이 4개국, 은륜이 3개국, 동륜이 2개국, 철륜이 1개국을 다스린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 국가에서 왕이 전륜성왕을 자칭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아소카왕이나 백제의 성왕도 그러한 인물들.[4]
자칭 전륜성왕인 진흥왕은 아들들에게 전륜성왕 전설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사륜'의 사는 순우리말 쇠를 음차한 것, 즉 '철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륜과 철륜은 있는데 금륜과 은륜이 없기 때문에 기록에 남지 않은 진흥왕의 아들이 실은 더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고, 이를 반영하였는지 위서로 의심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진흥왕과 사도부인의 딸(동륜, 사륜의 여동생)인 은륜공주가 나온다.
하지만 형 김동륜이 태자로 언급된 것을 봐서는 여동생 이름에 동보다 먼저인 은을 넣은 은륜을 집어넣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전개이고, 왕비에게 붙이지 않았다면 동륜 이전에 요절해서 역사 기록에 굳이 적히지 않은 다른 아들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사학계에서는 왕가의 순혈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듭된 근친혼이나, 부족한 의학 지식으로 인한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어려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고 있고, 불교학계에서는 금륜 ~ 철륜을 한 세대에 모두 지어준 게 아니라 신라에서 불교를 최초로 공인한 법흥왕을 금륜왕으로 추존하고 진흥왕은 은륜왕을 자처했다는 설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륜성왕의 등장 순서는 철 > 동 > 은 > 금이기 때문에 금륜왕과 은륜왕은 후대에 나오면 나왔지 역순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이고, 3남의 이름이 금보다 높다고 보기는 힘든 구슬에서 이름을 딴 점, 무엇보다 전륜성왕 중 가장 급이 높은 금륜일 경우 자손들이 진골로 취급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면 철륜 쪽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철륜왕을 자처했던 진흥왕이 태자에게 동륜왕이라는 작위를 내려주고 차남인 진지왕은 자신의 작위였던 철륜왕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생애
3.1. 왕위에 오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사도부인.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 형 동륜태자가 죽자 어린 조카 백정[5]을 제치고 즉위한다.
신라 왕실은 자신들을 석가족의 가계에 일치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현대인이 보기에 오해할 만한 이름이 붙어버렸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에서 따온 이름. 정반왕은 동생 백반(白飯)[6]왕과 곡반왕을 두고 있었고, 이들이 바로 불교 태동기 고대 인도의 아난존자와 데바닷타의 아버지이다. 실제로 진평왕도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이름이 김백반과 김국반. 그리고 진평왕의 정비는 이름이 마야. 이쪽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따온 이름. 따라서 진평왕이 아들만 낳았으면 "얘가 바로 석가다!"라고 할 판인데...계속 딸만 태어나니 망했어요...
3.2. 재위 기간
선대 진흥왕 시대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빼앗겼던 백제 위덕왕 부여창은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를 크게 공격했으나, 진흥왕 때부터 장군으로 활약했던 노리부[7]가 이를 막아내고 3천 7백 백제군의 목을 베는 등 대승리를 거뒀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백제 전선 전방에 성을 쌓는 등의 기록이 있다.
3.3. 폐위와 의문
즉위한 뒤 횡음하다 하여 579년 화백 회의를 통해 끝내 폐위당했고 곧 승하하고 말았다. 기록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폭풍 같이 검열삭제를 하다가 왕의 자리에서 내쳐졌고 이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 물론 패자는 말이 없으니 진실을 알 순 없다.
일단 《삼국사기》를 보면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일체의 언급도 없으며 진지왕이 딱히 방탕한 짓을 했다는 기록 자체도 없는 실정이다. 삼국사기 <진지왕 본기>만 놓고 보면 노리부를 통해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고 성을 새로 쌓고 제사를 지내는 등 그냥 평범하게 일하다가 짧게 재위하고 승하한 것으로 보이는 임금이다.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끝내 폐위되어 쓸쓸하게 승하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그리고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기록. 하지만 삼국유사를 봐도 도화녀 설화 외에 진지왕이 어떻게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진지왕이 귀족들과의 모종의 정치적 갈등 끝에 폐위당했고, 이후로도 정치적 목적으로 폄하된 것이 아닐까 라고 보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다른 설도 있는데, 진흥왕의 중신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형인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후의 진평왕)에게 갈 예정이었던 왕위를 빼앗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 진지왕 본기에서 진지왕이 즉위하고 곧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거론된다. 그러나 거칠부가 연로해서 곧 세상을 떠나 진지왕의 정치적 기반이 갑작스레 약해져서 백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정치적 공세 끝에 결국 폐위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약 8년 뒤인 587년에 내물왕의 7세손인 대세(大世)가 신라를 떠나 남해 바다로 건너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연계해서 거칠부를 비롯한 내물왕계가 579년의 정변으로 몰락했다고 보는 관점도 일부 있다.[8]
또 다른 설로는 폐위된 것이 아니라 조카인 백정에게 양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사실 왕조 국가에서 정통 후계자가 너무 어려 대신 왕위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원래 왕위를 이었어야 할 사람이 장성하면 양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라에서도 이전 시대에 그런 케이스가 실제로 많았다. 따라서 진지왕은 단순히 잠깐 왕위에 올랐다가 백정이 장성한 후 양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므로 그냥 이런 시각도 있다는 것 정도로만 보는 것이 이롭다. 어쨌든 금방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임금이지만 제법 작지 않은 떡밥을 남긴 왕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진지왕 치세에 하자가 있어 폐위되었다라고 하기에는 바로 다음 진평왕 시대에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이 중용되다가 나중에는 사위로 삼아 사실상 차차기 후계자로 확정되는 등[9] 여러모로 단순하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혹은 퇴위가 아니라 형인 동륜태자처럼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삼국사기 기록대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다만 백성들 사이에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서 후대에 부정적으로 폄하되었을 여지도 있을 수 있다.
여담으로 형설 출판사에서 단비(단숨에 합격하는 비법) 한국사능력검정 시험 고급(1•2) 책에서 진지왕 부분에서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에서 폐위를 결정하여 쫓겨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가 묻힌 진지왕릉은 폐위된 왕답게 동시대 다른 신라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진지왕릉으로 지정된 그 무덤이 진지왕릉이 맞느냐는 이설이 있다.
4. 가족 관계
아들로는 용춘(김용춘. 일명 용수)[10]이 있으며, 삼국유사의 설화에 나오는 서자 비형랑이 있다. 몇몇 학자는 비형랑이 김용춘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설화, 즉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용춘의 아들이자 진지왕의 손자가 바로 태종 무열왕. 《삼국유사》에는 비형랑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걸 보면 의외로 유부녀는 그냥 놔두는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지만 유부녀의 남편이 죽자마자 저승에서 돌아오는 집념의 소유자로 그려지고 있다.(...)
즉 내용에 따르면 진지왕이 사량부의 서녀(庶女)인 도화녀의 미색에 반해 그녀에게 동침을 제의했는데 도화녀가 자신이 유부녀라고 밝히며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진지왕은 쿨하게 물러났는데 그 뒤에 폐위되어 죽고 이어서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도화녀에게 진지왕의 혼령이 찾아와서 이제는 동침하자고 제의하여 그 혼령이 도화녀에게 며칠간 머물렀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비형랑이라는 것이다. 비형랑은 귀신을 부리는 능력이 있었는데 진평왕이 사촌뻘인 비형에게 관직을 주어 북천에 다리를 놓는 등의 일을 시켰다고 한다.[11]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즉위한 뒤 정사를 멀리하고 쾌락에 빠져 어머니 사도태후가 폐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미실 역시 자신에게 황후의 자리를 약속하고도 지도황후에게 빠져 말을 바꾼 진지왕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태후의 뜻을 알고 힘을 합쳐 폐위시켰다고 한다. 다만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현재까지도 위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책이므로 그냥 참고만 하자.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진지왕 본기
一年秋八月 진지왕이 즉위하다 (AD 576)
一年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AD 576)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AD 577)
二年冬十月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와 군에 침입하다 (AD 577)
二年 내리서성을 쌓다 (AD 577)
三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8)
三年 백제에게 알야산성을 주다 (AD 578)
四年春二月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AD 579)
四年秋七月十七日 왕이 죽다 (AD 579)
실제로 기록만 따지고 보면 이 사람이 폭군인지 확실히 의심스러워진다. 그리고 백제 침공을 받은 사람이 바로 노리부인데 진평왕 때 상대등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노리부는 바로 김유신의 큰할아버지이다. 당시 백제는 3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군사로 침공했는데 이를 막았다. 그렇다면 노리부가 진지왕을 배신했을 수 있는데 나중에 김춘추와 사돈이 되었다는 것은 원수와 손을 잡았다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 뭐 역사 속에서 정치적 이유로 원수와 손을 잡은 사례가 어디 한둘이냐마는.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드라마 선덕여왕
6.2. 드라마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손효원.
김용춘과 비형의 아버지이며, 김춘추의 할아버지가 된다. 여기서는 여타 사극과 다르게 부패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혁가로 묘사된다. 그 때문에 기존의 귀족들과 대립하다가 끝내 친어머니인 사도태후와 숙흘종을 위시한 귀족 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바로 위에 기술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금방 사라졌다.
7. 같이보기
[1] 진흥왕 말년의 연호를 이어서 사용했다.
[2] 지도부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3] 김용춘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4] 여담이지만, 시대가 좀 지나면 전륜성왕은 한물 가고 미륵이 유행하게 된다. 이후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던 것도 시대상을 반영한 셈.
[5] 후에 진평왕이 되는 인물. 백정은 이름이다. 당연히 조선 시대의 도축업자와는 아무 상관없다.
[6] 실제 뜻도 흰 쌀밥이다!!
[7] 이름이 '노부' 혹은 '세종'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김유신의 큰 할아버지기도 하다.
[8] 이호영, 삼국통일, 신편 한국사 9권(2002) 국사편찬위원회, 16~17
[9] 신라에서는 적장자가 없으면 왕족을 사위로 삼고 나중에 그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사위 계승 사례가 많았다.
[10]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일인물로 나온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용수가 형이라고 나온다. 다만 《화랑세기》는 위서 논란이 있기때문에 곧이 곧대로 믿을수가 없다.
[11] 건국대학교 사학과의 김기흥 교수는 자신의 저서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비형랑은 용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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