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혜초 1200년전 서역행 끝은 어디? -한겨레신문

2020. 7. 30. 11:03신라-중,하/왕오천축국전

혜초 1200년전 ‘서역행’ 끝은 어디?

등록 :2006-04-17 21:12수정 :2006-04-1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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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이란으로 넘어가는 코베트 산맥 줄기. 저 산맥들 넘어 남서쪽에 있는 니샤부르는 신라의 고승 혜초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또한 각별한 곳이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27〉혜초가 발자취 남긴 땅, 페르시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투르크메니스탄 아슈하바트까지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데 꼬박 열이틀이 걸렸다. 숱한 볼거리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여행’이었지만, 얻은 것이 적지 않아 그나마 위안이었다. 2005년 8월5일 아침, 중앙아시아 서쪽 가장자리의 아슈하바트를 떠나 다음 목적지 이란을 향했다. 두 나라는 코페트 산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차로 30분을 달리니 첫 국경초소가 나타난다. 국경 통과를 전담하는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며 20분 만에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다시 20분 더 달려서 이란 국경초소에 당도했다. 언덕바지에 있는 이란 쪽 출입국관리소는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빈다. 사막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코페트 산맥은 산세는 그리 험하지 않으나, 나무 없는 민둥산으로 산이 여러 겹 뻗어 있었다. 그래서 산맥을 넘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듣던 바와 달리 입국 수속은 순조로웠다. 기다리던 이란 쪽 안내자도 무척 친절했다. 수천 ㎞ 떨어진 수도 테헤란에서 국경까지 마중 나온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따뜻한 차와 시원한 물, 향긋한 당과를 대접했다. 국경 산악지대를 벗어나니 밋밋한 초원이다. 한참 달리다 시선을 서남쪽에 돌리니, 저 멀리 죽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아스라히 보인다. 유헤트 산맥이다. 그 중에는 해발 3천m를 넘는 산들도 더러 있다. 문득 그 산맥 너머 기슭에 있는 고도 니샤푸르(네이샤부르)가 떠올랐고, 더불어 옛적 그곳을 찾았던 신라 고승 혜초의 당찬 모습이 뇌리를 스쳐갔다. 분명 극적이었을 역사적 대서사시의 한 장면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 하마터면 영영 모를 뻔도 했다. 이제 1200여년 전 역사의 그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신라 고승 혜초의 가 쓴 <왕오천축국전>중 파사(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 오른쪽 밑줄 친 내용을 보면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와 왼쪽 밑줄 친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혜초는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723년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으로 향한다. 인도양을 건너 동천축에 상륙한 뒤 불교 성지들을 두루 돌아보고 남천축, 서천축을 거쳐 북천축에 이른다. 당시 서역 요충지인 토화라(吐火羅: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파사(波斯: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역방한다. 그리고 귀로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구자(龜玆: 쿠처)에 이른다. 장장 4년 동안의 ‘서역기행’이다.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학계 압도적 견해는 아프간까지만 여행
페르시아와 동로마는 들은 것 적었다고 봐

 

1908년 이 여행기를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이래, 여행기와 혜초에 대해 국내외에서 상당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직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럿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론이 분분한 것이 혜초가 서쪽 어디까지 다녀왔는가 하는 문제다. 일부에서는 대불림(大拂臨: 동로마)까지 갔다 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압도적 견해는 그가 토화라에서 페르시아와 대식, 대불림 등 인근 나라들에 대해 들은 것을 기술했을 뿐, 현지에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법을 구하러 인도에 간 불승이 이교인 이슬람, 기독교가 지배하는 지역에 갈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논리지만 구법승들이 설사 종교적 아집 때문에 이교 지역의 여행을 삼갔다손 치더라도 예외는 있지 않았을까 한다. 어쩌면 여기에 바로 혜초의 남다른 예지가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의 천축 행각은 구법 수학보다는 순방의 성격이 다분하다. 그의 선행자들인 법현은 11년, 현장은 16년, 의정은 18년 동안 천축에 머무른 데 비해 혜초의 여행기간 3년은 너무 짧으며, 내용도 순수 순방에 불과하다. 이런 그가 어떤 다른 계기나 동인으로 비불교 지역에 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고 개연성을 짚어본다. 실제로 혜초 자신이 언급하다시피, 그는 이미 대식의 내침을 받은 서천축, 북천축을 여행했고, 특히 대식의 지배 아래 이슬람화가 상당히 진행된 토화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따라서 이교 지역이란 이유만으로 여행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런 반론과 더불어 여행기를 문맥과 내용 면에서 세밀히 검토하면 그의 여행 서쪽 끝은 토화라가 아니라, 대식에 예속됐던 페르시아란 결론을 얻게 된다. 우선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여행기 전편에 걸쳐 혜초는 직접 다녀간 곳에 대한 기술에는 반드시 ‘어디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從… 行… 日… 至)라는 식의 시문구(始文句)를 쓰고 있다. 이런 시문구는 모두 23개가 있는데, 직접 방문한 곳들임을 뜻한다. 파사와 대식 여행에 관해 본문에는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 …”고 했다.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지칭하는데, 대식국에 병합된 뒤에는 주로 남부 지역에만 한정되었으며, 북부는 대식의 다른 총독부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혜초는 대식이 파사의 북쪽에 있다고 봤다. 보다시피 이 두 문장에는 직접 답사한 곳임을 말해주는 시문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혜초가 페르시아나 대식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또 다른 근거는 두 곳에 관한 기술 내용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이다. 페르시아가 토화라 서쪽에 있고, 페르시아가 대식에 병합되어 있으며, 대식국 왕이 소불림(시리아)에 가서 산다는 등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또, 이 두 나라는 ‘하느님을 믿고 불법은 모르며’, ‘왕과 백성들 옷은 한가지로 구별이 없고’, 음식을 먹는 데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한 그릇에서 먹으며, ‘무릎 꿇고 절하는 법이 없다’는 등의 구체적 생활상과 풍습을 묘사한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고 정확하다. 이런 정확성은 직접 답사해보지 않고는 얻기 어려운 것으로 파사, 대식에 관한 역사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오천축국전’엔 파사국과 대식국 기록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 직접 답사 흔적 곳곳에

 

문제는 그가 페르시아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점이다. 여행기에는 토화라에서 진로를 서쪽으로 잡아 한 달 뒤 페르시아에, 다시 북쪽으로 열흘 동안 가서 산속의 대식국, 즉 페르시아에 도착했다고만 했으며 구체적으로 도달한 지점을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역사적 배경과 여행기 문구상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유추의 방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역사적 배경을 보면,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카스피해 남쪽과 동쪽은 대식국 치하였으며, 중심지는 호라산 총독부 소재지인 니샤푸르였다. 이곳은 ‘현인과 학자들의 고향’이라고까지 불리는 유명한 도시로서 실크로드 ‘동방통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이미 이슬람화한 상태였다. 우리는 테헤란 ‘이란 유리도자기박물관’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품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니샤푸르에서 출토된 3~11세기 유물들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새머리형 유리병을 닮은 유리병도 여러 점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많은 중국 도자기도 바로 이곳에서 나온 것이다. 더불어 지리적 방위와 여행 기간, 지세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윤곽이 드러난다. 방위에서 도착지는 토화라의 서북쪽에 있는데, 거기까지 여행 기간은 총 40일이다. 혜초의 선행 여정을 고려할 때, 서행 1개월, 북행 10일이면 대체로 니샤푸르 일대에 도착한다. 지세를 봐도 니샤푸르는 유헤트 산맥의 서남쪽 기슭이어서 주변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사실 이 길은 일찍이 알렉산더를 비롯한 수많은 서구 사람들이 동방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답사단은 혜초가 지나갔을 법한 그 길과 어느 지점에서 엇갈리거나, 아니면 나란히 갈 수도 있는 길을 따라 첫 방문지 마슈하드를 향해 남하했다. 마슈하드에서 서너 시간 거리의 그곳에 그의 거룩한 발자국이 찍혔으련만, 일정상 갈 수가 없어 절망감에 휩싸였다. 현장 확인이 지닌 막중함 때문이다. 혜초는 한국의 첫 세계인이며, 문명교류의 선구자다. 현장을 비롯한 누구도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고, 더욱이 그 서쪽 끝까지 다녀와 불후의 현지 견문록을 남긴 적은 없었다. ‘위대한 한국인’의 체취가 묻었을 현장에 첫발을 들이면서, 내내 응어리로 남아왔던 불효막심을 새삼 느꼈다. 아직 그의 사적비 하나 제 땅에 세우지 못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파리의 한 도서관에 유폐된 여행기 진본을 집으로 되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6530.html#csidxf3b3921466b372c986454d43d1d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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