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위나라와 충돌하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 삼국사기 기록 7. 기타
1. 개요
고구려의 제11대 군주. 휘는 우위거 혹은 위궁. 위궁은 진수의 삼국지를 따른 것인데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본 것이 증조부인 태조대왕과 닮았기 때문에, 그의 휘인 궁(宮)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3] 아명은 교체(郊彘). 교제(郊祭, 제사)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4]
삼국사기에선 동양왕(東襄王)이라는 다른 존호도 전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소왕후(小王后)이며,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213년에 태자로 책봉된 후, 227년 5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위하였다. 참고로 동천왕 시기부터 부자 세습이 확립되기 시작한다.[5] 중천왕(동천왕의 장남) → 서천왕(중천왕의 차남) → 봉상왕(서천왕의 장남) 순으로 부자간의 세습으로 이어진다. 그후 봉상왕 → 미천왕은 질백간의 세습이지만 미천왕 이후 아들 고국원왕부터는 모두 직계로 세습되어 쭉 그의 후손들이다.
2. 성격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의붓어머니인 왕후 우씨가 궁녀를 시켜 일부러 뜨거운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 했는데도 궁녀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았고, 다음 번엔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잘라버리게 하자 말을 쓰다듬으면서 "말이 불쌍하구나."라고만 했다고. 심지어는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 우씨의 괴롭힘에 시달렸는데 동천왕은 오히려 우씨를 왕태후로서 모시기에 이른다. 고구려 시대에 있던 진정한 대인배 본좌인 임금이었던 셈.
그런데 이것은 동천왕의 착한 본래 성격도 있었겠지만, 성씨도 전하지 않을만큼 한미한 집안 출신 후궁의 소생인 동천왕이 고국천왕의 왕후였고 산상왕을 스스로 선택해서 왕위에 앉혔으며 또 왕후가 될 만큼 여걸이었던 왕후 우씨에게 숙이지 않으면 안되는 권력의 오묘한 역학 관계 때문인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천왕의 어머니는 삼국사기에는 '주통촌의 여인' 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력가가 아닌 일개 촌에서 살던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 자연히 동천왕 역시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수틀리면 반대 세력이 "촌 출신이 설친다." 라며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승하하자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신민들에겐 꽤 존경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성군으로 제법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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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정
재위 4년째 되던 해, 국상 고우루가 사망하고 국상의 자리에 명림어수를 앉혔다.
4. 외교
4.1. 위나라와 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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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 도읍을 임시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다.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이 평양성이 평양에 있는 대성산성이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10]
동천왕 때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는 70여년 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미천왕 시기인 313년에 비로소 서안평, 낙랑군 등을 공격해 싸그리 집어삼키면서 확실히 앙갚음하게 된다.
248년, 신라와 화친했고[11] 그 해에 동천왕이 승하하자 신하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한 나머지 동천왕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후임 중천왕은 이것은 예가 아니라고 금지했지만 결국 장례일에 장지에서 왕을 따라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백성의 시신들을 죄다 땔나무로 덮어버려서 동천왕릉이 있는 곳을 땔나무 시(柴)를 써서 시원(柴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임금이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삼국사기》 동천왕 22년(서기 248년)조
그 후 아들인 중천왕이 왕위에 올랐고, 중천왕이 위나라 소속의 선비족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이를 물리치고 선비족 8천여명의 수급을 베어버리면서 아버지인 동천왕의 원수를 제대로 갚았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 본기
一年夏五月 동천왕이 즉위하다 (227)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단행하다 (228)
二年春三月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228)
四年秋七月 명림어수를 국상에 임명하다 (230)
231-233 : 3년 공백
八年 조위가 사신을 보내오다 (234)
八年秋九月 태후 우씨가 죽다 (234)
十年春二月 오의 손권이 사신을 보내오다 (236)
十一年 조위가 연호를 개정한 것을 축하하다 (237)
十二年 조위를 도와 공손연을 공격하다 (238)
239-241 : 3년 공백
十六年 서안평을 공격하다 (242)
十六年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사면을 실시하다 (242)
243-244 : 2년 공백
十九年春三月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다 (245)
十九年冬十月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245)
二十年秋八月 위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침략해오다 (246)
二十年冬十月 위의 관구검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246)
二十一年春二月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다 (247)
二十二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248)
二十二年秋九月 동천왕이 죽다 (248)
7. 기타
2000년대 중반 동천왕 벽비, 동천왕 양위 벽비라는 정체불명의 유물이 나왔지만 전부 위작으로 밝혀져서 사료적 가치는 없다. 동천왕 11년명 벽비, 또다른 자료. 애초 근래 이전에 사용되지 않는 한자가 쓰인 점을 미뤄보면 20세기에 조작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1]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고구려어 이름을 한자로 가차한 이상 연우보다는 우위거가 위궁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지만, 삼국지의 기록을 인정할 경우 고국천왕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삼국지에서는 차대왕의 존재도 누락되어 있기에, 고국천왕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삼국지에서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산상왕 본기에는 산상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라 한다. 이 무슨...[2] 아명(兒名).[3] 그런데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 기록에 똑같이 나와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이름을 이이모 또는 위궁이라 한다.[4] 왕이 들판으로 멧돼지 사냥을 나갔는데 멧돼지가 도망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수색하던 도중 한 여인이 멧돼지 다리를 맨손으로 잡고 버티며 놓아주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그 여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교체는 한자 뜻 그대로 '들돼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5] 사실 부자 상속이 정해진 시기는 이보다 전대인 고국천왕 때였으나 정작 왕 본인부터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승하한 탓에 또 한 번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동천왕의 부왕이자 고국천왕의 셋째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이었다.[6] 일단 실제로 여기에서 동천왕의 목숨을 구해준 밀우, 밀우를 구출한 유옥구, 위나라 장수와 동귀어진한 유유는 밀우와 유옥구는 식읍을 받는 것으로 유유는 아들 다우가 대사자로 임명되는 것으로 보상받기는 한다. 이는 기본적인 논공행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못해 말아먹는 사람도 있는걸 보면 기본적인 정치력은 있다고 봐야 할지도. 위 기록이 사실이라면 기본적 수준이 아니라 정치력 만렙 수준이다.[7] 신채호는 수만(數萬)여 명이라고 주장하기도.[8] 남옥저로 도망쳤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이고,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조에는 북옥저로 도망쳤다고 나온다.[9] 왕기는 고구려 침공 이후로도 활동하기에 이 때 죽은 위나라 장수는 왕기의 부하로 추측된다.[10] 일단 우리가 아는 평양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그 당시 그 지역은 낙랑군의 영역이었던데다가, 이름도 평양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었다.[11] 245년 10월, 신라 북쪽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자국 백성에겐 관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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