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기 (迦葉原夫餘) 시조 해부루(BC 86-BC 47) -> 2대 금와(BC 47-BC 6) -> 3대 대소(BC6-AD22) |
시조 해부루(解夫婁)
첫해(乙未 기원전 86년)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 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 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기원전 5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39년(기원전 47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고주몽은 졸본부여의 3대왕이다. 당시 여달의 나이는 19세나 20세밖에 되지 않으므로 자력으로 고주몽을 밀어낸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구신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 강제로 퇴위된 고주몽(高朱蒙)은 도망쳤든지, 은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은거지는 다름아닌 비류수(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동명(東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이다. 고주몽의 다른 아들들인 비류, 온조 등도 이미 소서노(召西努)를 앞세워 백제로 떠나간 것이다. 고주몽의 구려국(句麗國) 재건국 시기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기원전 37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한 것이 기원전 58년이므로 21년을 재위하였다가 물러난 것이다.】 |
2대 금와(金蛙)
첫해(甲戌 기원전 47년)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
3대 대소(帶素) 첫해(乙卯 기원전 6년)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서기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 (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 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 (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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