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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3. 14:07고구려 상(BC37-AD 391)

양맥 전투

최근 수정 시각: 2020-08-27 07:02:36

 

분류

양맥 전투
梁貊戰鬪

1차 전투 시기

244년 8월

2차 전투 시기

259년 12월

장소

고구려, 양맥[1]

원인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위(魏)의 관계 악화.

교전국

고구려

1차 전투 지휘관

동천왕

관구검

2차 전투 지휘관

중천왕

울지해

1차 전투 병력

20,000 명

10,000 명

2차 전투 병력

5,000 명

병력 규모 불명

1차 전투 피해

피해 규모 불명

3,000여 명 사상

2차 전투 피해

피해 규모 불명

8,000여 명 전사

결과

고구려군 승리

1차 전투 영향

동천왕관구검, 비류수에서 재결전.

2차 전투 영향

13년전 비류수 전투 설욕.

 

1. 개요2. 1차 양맥 전투3. 2차 양맥 전투

1. 개요[편집]

고구려위나라간의 전쟁 중 양맥에서 벌어진 2차례 전투를 말한다. 첫번째 교전은 동천왕 대에, 두번째 교전은 15년 후인 중천왕때 발생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

2. 1차 양맥 전투[편집]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44년 8월, 관구검이 1만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2만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양맥 계곡에서 위군 3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후... 이와 관련된 내용은 비류수 전투 항목 참조.

3. 2차 양맥 전투[편집]

12년(서기 259) 겨울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2]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十二年 冬十二月 魏將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중천왕

동천왕이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도가 불타버린 굴욕을 겪은 지 약 13년 후, 위나라의 울지해가 다시금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강역에 쳐들어왔다. 이에 중천왕이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양맥에서 맞붙어 적군 8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10년 전 아버지가 당했던 치욕적인 패배를 단단히 복수한 셈.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 기병을 『삼국사기』는 철기(鐵騎)라고 명기했지만, 중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은 정예기병(精騎)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짐작건데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참패를 복기하고 위나라가 방진으로 나올 때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 있겠다. 즉, 방진이 고구려의 중장 철기병을 막는데는 효율적이지만,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먼저 경기병이 위나라의 방진을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장 철기병이 정면으로 돌격해서 방진을 격파하고 궤멸시키는 전술을 쓴 듯하다. 이런 복합 기병들이라 경기병이나 철기병이 아닌 정예기병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1]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요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요녕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2] 고려 인종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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