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기타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I)

Chung Park 2021. 8. 15. 08:50

지난 글에 이어 BC 1200 - BC 450 기간의 키메리언의 활동을 살펴 보자. 이 글 또한 The History Files에서 올린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의 내용을 주로 살펴 보고,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2. BC 1200-450 BC 기간의 Cimmerians 활동 분석

 

 

1) BC 1200 - BC 900 시기의 Cimmerians

 

청동기시대의 범 발트해 지역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왔다.과거 프러시아지역인 동부 폴란드지역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서부지역을 포함한 서부영역은 중부유럽의 금속산업의 영향하에 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동부지역에서 볼가강 상류지역까지 걸쳐있는 숲속의 동부 또는 대륙영역에서는, 사람들은 옛날 방식을 고수했는데, 이 동부 발트지역 사람들은, 우랄어를 사용하는  핀족 위구르족, 키메리언, 범 스키타인, 그리고 초기의 슬라브인들과 매우 적극적인 접촉이 있었다.


기원전 13세기 후반부터 쇠퇴하는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아마도 Tarhuntassa  (아나톨리아 남부 지중해연안 지역, 아래 지도 참조),  Kaskans (흑해 남부연안에 사는 비 인도유럽인)과 Sea peoples (지중해의 도리언)를 포함한 주위의 여러 민족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BC 1450시기의 Anatolia 지역 지도 (source : Kingdom of Anatolia-Arzawa, The History Files)

이어진 암흑기 시기에, 아르메니언은 기원전 8세기까지 동부 아나톨리아를 점하고 있었다. 비록 이 지역은 범키메리언과 같은 Pontic-Caspian Steppe의 여러 Barbarian 민족들에 의해 자주 침략을 당하기는 했지만..

 

BC 1183-1173경 바로 이시기에, 오딧세이의 Ithaca가 십년의 모험여행을 하며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는 역할을 해낸다. BC 9C 호머에 의해서 기록된 문서에서, Kimmerior라 불리는 부족이 언급되는데, 그들은 Oceanus (흑해를 의미) 건너, 이 세상 끝, 지옥의 문턱에 있는, 암흑과 안개의 지역에 산다고 언급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proto-Baltic sphere has become divided into several zones of influence during the Bronze Age.

 

The western zone, covering eastern Poland, the former region of Prussia, and western parts of Lithuania and Latvia, is under the influence of the Central European metallurgical centre.

 

In the eastern or continental zone, amid the forests which extend from eastern Lithuania and Latvia to the upper Volga basin, the people retain an archaic character, with these eastern Balts being in active contact with the Uralic-speaking Finno-Ugrians, Cimmerians, proto-Scythians, and early Slavs. 

 

Decaying from late in the thirteenth century BC, the Hittite empire, and probably Tarhuntassa, are looted and destroyed by various surrounding peoples, including the Kaskans and Sea Peoples.

 

Following the subsequent dark age, the Armenians occupy eastern Anatolia by the eighth century BC, although the region is often overrun by barbarian peoples from the Pontic-Caspian steppe such as the proto-Cimmerians. 

 

It is during this period, nominally 1183-1173 BC, that Odysseus of Ithaca rounds off his part in the successful defeat of Troy by conducting a ten year voyage of discovery and adventure. Written down by Homer in the ninth century BC, the text mentions a people called the Kimmerior. They live beyond Oceanus (taken in this instance to mean the Black Sea), in a land of fog and darkness at the edge of the world and the entrance to Hades."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남코카서스 아르메니아의 Sevan호수 서부연안에 있는 Lchashen에서 발견된 원시형태의 Yamnaya문명의 마차 (이 모형은 북코카서스지역과 Pontic-Castipan Steppe지역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This primitive Yamnaya Horizon wagon was unearthed at Lchashen, on the western shore of Lake Sevan in modern Armenia in the South Caucuses, but the style would have been very similar in the North Caucuses and on the Pontic-Caspian steppe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2) BC 900년경 스키타인 Cimmerians

  

BC 900년 이시기부터 풍요롭고 잘 조직된 왕국이나 부족국가들이 코카서스에서 발달한다. 그들은 남쪽의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습격함으로써 이들 문명과 교류를 한다. 초기 Thraco-Cimmerians 타입의 전형적인 Horse bits나 Cheek pieces 등이 코카서스의 같은 지역에서 유물로 발견된다. 초기 키메리언들은 일반적으로 우크라이나 남러시아의 Chernogorovka 문화와 Novocherhassah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기원전 9세기 후기에 키메리키언은 스키타인에 의해 코카서스 북쪽의 고향으로부터 쫓겨난다. 가장 큰 가능성 있는 이유는 인구과잉과 두 세력간 국경긴장의 증가이나, 유목민에게는 여건이 너무 비좁으면 이동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아마도 스키타인은 이러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경솔하게 먼저 키메리언 땅을 침략했을 수 있다. 어느 경우든, 키메리언은 이동할 수밖에 없고, 아마도 남쪽으로 흑해 연안을 따라 Kolkis왕국에 이르기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Pontic 고향으로부터 서쪽으로, 흑해를 돌아 트라키언 부족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스키타인은 코카서스/키메리언 문화에서 많은 것을 얻어 그들의 범 코카서스 문화에 혼합했다. 이러한 동방의 영향은 상당한 정도로 중부유럽의 물질문화를 변화시켰다. 북유럽의 발틱 게르만 문화는 스키타이 급습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요소가 등장했는데, 이는 바로 계속된 중부유럽과의 교역에 의한 것이며, 특히 Lusatian Culture에 관련되어서이다. (아래 자료 참조)

 

"From around this date, rich, well-organised 'kingdoms' or 'chiefdoms' dvelop in the Caucuses. They interact with civilisations to their south, in Anatolia and Mesopotamia, usually by raiding into their territory. Typical horse bits and cheek-pieces of an early Thraco-Cimmerian type are found by archaeologists in the same region of the Caucuses. The early Cimmerians here are generally associated with the Chernogorovka and Novocherkassk cultures of Ukraine and southern Russia. 

 

It is later in this century that the Cimmerians are pushed out of their homeland in the North Caucuses by the Scythians. The most probable reason is over-population and increasing border tensions between the two, but it is common for pastoral tribal groups to migrate when conditions become too cramped. Possibly the Scythians have jumped the gun and invaded Cimmerian territory before this can take place.

 

Either way, the Cimmerians are forced to move on, some seemingly following the Black Sea coastline southwards until they meet the kingdom of Kolkis. Others would seem to head west from their Pontic homeland, circling the Black Sea until they make contact with Thracian tribes. 

 

The Scythians acquire much of the Caucasian and Cimmerian cultural legacy and mix them with their own Ponto-Caucasian cultural elements. These oriental influences appreciably change the material culture of Central Europe. The Baltic and Germanic cultures in Northern Europe remain untouched by the Scythian incursions, but the new cultural elements reached them through continuous commercial relations with Central Europe, notably in relation to the Lusatian culture."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3) BC 730-720 BC 시기의 Cimmerians and Scythians


Kolkis왕국이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에 의해 짓밟혀서 해체되었다.  스키타인과 키메리언 사이에 그전 세기에 키메리언을 쫓아내기 위해 어떤 일이 벌어졌든 둘은 이제 하나가 되어 행동하는 것 같다.
이 즈음에 Thraco-Cimmerians  가설이 처음 등장한다.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은 갑자기 흑해 연안 주위의 세력에게 위협을 주는 세력으로 자리잡고, 이미 확립된 왕국들과 전쟁을 한다. 키메리언들은 후에 트라키언 부족사이에 정착하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러한 환영은 언어나 문화 등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통점은 코카서스로부터의 키메리언의 새로운 영향력과 금속가공에서의 오랜 Urnfield 전통일 것이다. 이 시기에 키메리언은 트라키언들과 이미 같이 섞여 정착하였을까? 이 문제는 다뉴브강을 따라 전진하여 Hallsttat 문화의 켈트족 지역으로 들어 가고 발칸의 서쪽에 있는 Ilyrians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Thraco-Cimmerians culture를 나타내는 증거로는 기원전 8세기에 말과 마차 체계의 전사문화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과 또한 항가리에서 이태리와 알프스지역으로 생산 거점이 이동하는 것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뉴브강을 따라 이동한 Thraco-Cimmerian 이주 사실을 잘 설명한다. (이웃한 이주그룹에 의해 개인적으로든 또는 집단적으로 서서히 영향을 받아서든) (아래 자료 참조)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이러한 전사그룹의 이동은 계속되어 다뉴브강의 상류를 향하여 서쪽으로 이동하고 미구에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향한다. 결국 하나의 그룹은 엘베강을 따라 가고, 또 다른 하나의 그룹은 라인강의 상류 서쪽을 거쳐 역으로 엘베강 북동쪽과 북쪽 Jutland (이론적으로 여기서 Cimbri의 조상과 결합한다)로 이동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kingdom of Kolkis is overrun by Cimmerians and Scythians, and it disintegrates. Whatever had taken place between Scythians and Cimmerians in the previous century to push the latter out of their homeland, the two seem to be acting in unison now.

 

It seems to be around this time that the window for the 'Thraco-Cimmerian Hypothesis' first opens. The Cimmerians and Scythians have suddenly positioned themselves as a more powerful collection of tribes which are not afraid of thundering around the Black Sea coast (on either side of the sea itself) and waging war against established kingdoms. It is known that Cimmerians later settle amongst the Thracian tribes, so to be that welcome they must share some common points of interest, such as language or culture. 

 

The common points would seem to be old Urnfield traditions in metalwork mixed with new Cimmerian influences from the Caucuses. Could they already be mixing with Thracians in this period, with some groups beginning to explore further along the River Danube to enter regions that are controlled by the Celts of the Hallstatt C culture and also to influence the Illyrians on the western side of the Balkans? The weight of evidence shows that there is indeed a warrior culture of the horse/wagon complex in the eighth century BC and also a shift in production centres from Hungary to Italy and the Alpine region. This would match well with a Thraco-Cimmerian migration along the Danube (whether in person or by osmosis through neighbouring migratory groups). 

 

In successive waves from the ninth to the sixth centuries BC these migrating warrior groups push west towards the headwaters of the Danube before veering off to the north. Ultimately, one branch follows the course of the River Elbe and a second backtracks west from the headwaters of the Rhine, heading north-east to the Elbe and then north into Jutland (where it theoretically forms, or merges with the ancestors of, the Cimbri)."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독일 서남쪽 켈트문화의 중심지 Heuneburg에서 발견된 켈트족 왕자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BC 520년경)

다뉴브강을 따라 이동한 트라코-키메리언의 이동이 가져온 문화적 변화로 추정됨.

Could the 'Thraco-Cimmerian'-driven or influenced migration along the Danube have brought with it the cultural changes that, around two hundred years later, resulted in the burial of the 'Celtic princess' at the Heuneburg, a centre of Celtic culture in south-western Germany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4) BC 714 - 712 BC 기간의 Assyria와 Cimmerians

 

(1) BC 714 - 713 BC 

 

뉴앗시리아(BC 911-609 BC)의 사르곤왕이 놀랍게도, 그의 주력부대가 동쪽에 머무를 때, Tabal의 Ambaris는 Phrygia의 Midas와 Urartu의 Rusa와 동맹을 맺고 (아마도 이들이 자살하기 직전에), Tabl 지역 지배자들과 함께, Que(현재의 Adana, 터어키 동남해안 Cilicia의 중심지)를 침략하려 한다.  사르곤은 신속히 대응하여 Tabal을 침략해서 Ambaris, 그의 가족, 그리고 귀족들을 전부 인질로 앗시리아로 데려 온다. Tabal은 앗시리아의 부용국이 된다. 사르곤은 이 전쟁에서 키메리언을 이용한다. 아마도 그들의 Mounted Archers 능력뿐만 아니라, Urartu 지형에 대한 그들의 지식 때문일 것이다. 키메리언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십년간 유린했다. (아래 자료 참조)

 

"Much to the shock of Sargon of Assyria, while his main army is occupied in the east, Ambaris of Tabal allies himself with Midas of Phrygia and Rusa of Urartu (possibly immediately before the latter's suicide), as well as the local Tabalean rulers in an attempt to invade Que. Sargon reacts quickly, invading Tabal and capturing Ambaris, his family and the nobles of his country, all of whom are taken to Assyria. Tabal is annexed as an Assyrian province. Sargon is noted for using Cimmerians within his army on this campaign, possibly for their knowledge of the Urartuan hills as much as their ability as mounted warriors. Cimmerians have been raiding into Mesopotamia for decades."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Map of the Neo-Assyrian Empire in 824 BC (dark green) and in its apex in 671 BC (light green) under King Esarhaddon (source : Wikipedia)

 

(2) BC 712 

 

사르곤이 Musasir의 숭배 중심지를 포위한 2년후, 앗시리아의 Sargon II는 뉴 히타이트의 수도 Kummuhu를 포위한다. 동시에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고, 이 도시들은 쇠퇴한다.  Urartu역시 이러한 부족의 급습을 겪었을 것이고, 이들은 결국, 중앙 자그로스산맥을 차지하기 위해, 지나는 지역들의 모든 왕국들을 파괴한다. (아래 자료 참조)

 

"Two years after he sacks the cult centre of Musasir, Sargon II of Assyria sacks the neo-Hittite capital of Kummuhu. At the same time Cimmerians and Scythians invade Anatolia and the city declines. It is possible that Urartu also suffers from the same tribal incursions, and that the people responsible eventually destroy the kingdom as they pass through the region to control the central Zagros Mountains."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Kummuh among the Neo-Hittite states (source : Wikipedia)

 

5) BC 695-690년경의 Phrygia, Lydia와 Cimmerians

 

프리기아는 BC 695년경 리디아왕국에 Pergamum 영토를 상실한다. 이때 Midas III왕은 대패하여 자살한 것 같다. 5년후, 키메리언 유목민 전사들은 프리기아를 유린하고 수도 Gordon을 포위한다. 그러나 이 포위로 Midas왕이 자살하게 만든 것으로 언급되므로, 다소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리디아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중심세력이 되고 프리기아는 쇠퇴한다.   이세기에 키메리언과 스키타인들은 전사그룹과 용병으로서 방대한 지역을 누비는 것 같다. 초기 BC 7세기에는 이들은 리디아와 에게해의 그리스 해안 도시들을 공격한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여기서 격퇴된다 언급함). 스키타이식으로 지역 이름을 짓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키메리언이 역시 이 지역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들이 Edoni와 Theres의 트라키언들과 연합한다는 것은 적어도 일부 트라키언들과 매우 밀접한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러한 사실은 유물의 발견으로 확인된다. 아나톨리아에서 키메리언의 존재는 고고학적으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데, 아마도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흑해 남부해안의 Sinope는 그들의 임시적 본부로 추정된다. (아래 자료 참조)

 

 "Phrygia loses the territory of Pergamum to Lydia about 695 BC, seemingly upon the defeat and suicide of King Midas III. Five years later, nomadic Cimmerian warriors overrun Phrygia and sack the capital, Gordion. However, this Cimmerian sacking is also stated to be the cause of Midas committing suicide, so the situation seems to be mildly confused. Either way, Lydia becomes the dominant power in western Anatolia whilst Phrygia is eclipsed. During this century the Cimmerians and Scythians seem to be wandering over vast distances as warring groups and mercenaries. 

 

During the early seventh century they also attack Lydia and Greek coastal cities on the Aegean, and Herodotus states that they are later expelled from there. Place names in Scythia show that Cimmerians are also present in this region at some point. Further involvement, this time when they are allied to the Thracian tribes of the Edoni and Threres, supports a close social and cultural relationship with at least some Thracians, which is confirmed by archaeological discoveries. The Cimmerian presence in Anatolia is archaeologically much more tenuous, probably revealing the briefness of their presence here. Sinope, however, on the Black Sea's southern coast, is suggested as a temporary headquarters for them."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다음은 키메리언의 왕들에 대해 살펴 보자 4대에 걸친 왕들은 메디아제국의 왕들과 대비된다. 

 

6) Cimmerian King : Teushpaa ( - BC 679)

 

앗시리아의 Esarhaddon왕(BC 681-669 BC)은 키메리언(앗시리아인들은 이들을 Gimmirai라 불렀다)을 공격했다. 그는 키메리언과 그들의 리더 Teushpaa (Hubusna지역, 아마도 Hupisna-Cybistra 지역)를 패배시켰으나, 그 지역에 평화가 확보되지는 않았다.  같은 해, Esarhaddon의 병력도 역시 Hilakku(Khilakku) (상기 지도 참조)에서 전쟁을 했고, 몇년후에는 앗사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페니키안과 연대를 한 Kundu(Cyinda)와 Sissu(Sisium, modern Sis)의 아나톨리아 왕자를 처벌했다.  Cilician 평원의 북쪽지역은 앗시리아에게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아래 자료 참조)

 

"Esarhaddon of Assyria conducts a campaign against the Cimmerians (or Gimirrai as the Assyrians term them). He defeats them and their leader, Te-ushpa-a, in the region of Hubusna (probably Hupisna-Cybistra), but the area is not pacified. In the same year Esarhaddon's troops also fight a war in Hilakku (Khilakku), and a few years later they punish the Anatolian prince of Kundu (Cyinda) and Sissu (Sisium, modern Sis), who has allied himself with Phoenician rebels against Assyrian rule. The regions to the north of the Cilician plain repeatedly cause trouble for Assyria."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이 그림은 초기 그리스와 싸우는 키메리언을 보여준다. 말탄 키메리언 전사들은 개와 함께 하였다. (로마공화국도 동일했다)

This image shows Cimmerians battling early Greeks - prior to the advent of accepted 'Classical' Greece - with the mounted Cimmerians warriors apparently being accompanied by their dogs (republican Romans did much the same thing)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Te-ushpa-a는 '멀리 있는 본국으로부터 Khu-pu-us-na (Khupushna) 나라 영토까지 와서 그의 군사들과 함께 칼을 가지고 달리는 barbarous solider'로 묘사된다. 이것이 어디까지 propaganda이고 어디까지 진실인지 불확실하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의 판단으로는 메디아제국의 Deioces (700-649 BC)기간과 다소 겹치는 것을 보면, 키메리언왕이 이 시기부터 메디아왕일 수 있다고 본다. 

 

"Te-ushpa-a is described as a 'barbarous (?) soldier whose country [is] remote [namely] in the territory of the country of Khu-pu-us-na (Khupushna), together with the whole of his army, I ran through with the sword...' How much of this is propaganda for a home audience and how much fact is entirely unclear. ..."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7) Cimmerian and Median King : Tugdamme (BC 660-BC 640)

 

Tugdamme (BC 660-640 BC)왕은 특히 주목되는데, 키메리언왕으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고 한다. King of Kish라고 앗시리아 암석문에 새겨진 것을 보면, 메디아왕국의 왕으로서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자세히 보고자 한다.  

 

(1) 660 BC

 

Tugdamme (고대 자료의 번역에 의하면 Dugdammi)는 그리스에서는 Lygdamis로 언급된다. 그는 BC 660년에  키메리언 왕 또는 부족그룹이나 여러 부족의 왕이었을 수 있다. Umman-Manda지역의 왕으로서 처음 공격대상은 아나톨리아에 있는 그리스 해안도시였다.  Fritz Hommel은 Tugdamme가 후의 키메리언 왕 Sandakhshatra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Sandakhshatra는 메디아제국의 Cyaxares왕이라고 추정한다. (아래 자료 참조) Edward Dawson은 Tugdamme가 켈트족의 'Togodumnos'가 아닌가 했다. 트라코-키메리언이 흑해로부터 서쪽으로 이동하는 시기에 켈트족의 할슈타트문화가 라텐문화로 진보하는데 영향을 준 것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나 켈트족의 Togodumnus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필자에게는 유감이다. 그리고 켈트족이 배사법의 활을 이용한 부족이라는 말을 필자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켈트족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알 것 같다. 

  

"Tugdamme (or Dugdammi, depending upon the translation of the ancient source material) was also rendered in Greek as Lygdamis. He becomes a Cimmerian king possibly by 660 BC, but is possibly not the only one as the Cimmerians are a tribal group or several groups. The first attacks carried out by him as king of the Ummân-Manda (nomads) seem to be against Greek coastal cities in Anatolia, although the reason for such attacks or for him leading his people around the Black Sea coast to reach the Greek cities is unknown. Population pressure is usually the cause of such semi-migratory expeditions, and this would not be the first time that population pressure in the Pontic-Caspian steppe has caused such a migration. 

 

Fritz Hommel has stated that Tugdamme must be an ancestor of the later Cimmerian ruler, Sandakhshatra. He identifies this ruler as Cyaxares of the Medians, implying that Tugdamme is Phraortes, which seems far less likely than the Sandakhshatra connection. Instead, the name Tugdamme strikes Edward Dawson as being Celtic, with an automatically reconfiguration to the Celtic 'Togodumnos' being an easy leap. Given the possibility that it may be Thraco-Cimmerians who influence the Celtic progression from Hallstatt to La Tène culture during the proposed migration west from the Black Sea, Tugdamme could be a name type that is adopted by the Celts from the Cimmerian warrior elite and is afterwards rendered as Togodumnos (or variants). ...."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2) 653 BC 

 

Tugdamme는 앗시리아제국의 전성기를 이룬 Ashubanipal왕 시기(BC 669-631 BC)에 앗시리아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앗시리아 암석문은 Tugdamme를 사카와 Qutium (=Gutium, 현재 쿠르드족의 조상이라는 Gutian peooples, 자세한 것은 본 블로그, 카테고리, 메소포타미아, 펌글 참조)의 왕이라 기록했다. 이는 그가 키메리언의 왕일 뿐 아니라, Transoxiana의 카스피해 동쪽까지 지배하던 스키타이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아래 자료 참조)

 

 

"Tugdamme begins to threaten the borders of the powerful Assyrian empire during the reign of Ashurbanipal. Assyrian inscriptions record him as being 'King of the Saka and Qutium'. This is very telling, because it suggests that he rules not only over his own Cimmerian people (which is so obvious that it need not be mentioned), but also the Scythians (identifying them as 'Saka', a form of the name that very soon becomes prominent amongst Scythian groups to the east of the Caspian Sea, in Transoxiana). "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BC 652년이 키메리언의 전성기인데, 이때 리디아왕국을 정복했다. 

The year 652 BC marked the apogee of Cimmerian power, with their conquest of the kingdom of Lydia, but their supremacy would last only another eleven or so years before defeat and total eclipse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Qutium은 Gutium으로 보이며, 이들의 고향은 현대의 이란과 유목민 Gutians의 이라크 사이에 있는 자그로스산맥이다. Tugdamme는 확실히 앗시리아제국의 중심부 매우 가까운 영토까지 정복했으며, 이는 당시 Medes Empire의 스키타이왕이 사실은 키메리언이란 가능성을 높혀준다. (아래 자료 참조)  앗시리아의 암석문은 또한 Tugdamme를 'Sar Kissati' 번역하면 'King of Kish 또는 King of the World'로 언급한다. Kish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매우 중요한 고대 도시국가인데 (아래 지도 참조), 이 의미는 Tugdamme가 앗시리아의 동부와 남부에 이르는 방대한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Qutium' in point would seem to be 'Gutium', homeland in the Zagros Mountains between modern Iran and Iraq of the nomadic Gutians (often thought to be the precursors of the Kurds). Clearly Tugdamme has already conquered territory very close to the heartland of the Assyrian empire, making it more possible that the Scythian masters of the Medes at this time are in fact the Cimmerians. Assyrian inscriptions also refer to Tugdamme as 'Sar Kissati' which translates as 'King of Kish' or 'King of the World'. Kish is an ancient and highly important city state in southern Mesopotamia, which suggests that Tugdamme now rules a vast area of land to the east and south of the Assyrians."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Map of Old cities in Sumer including Kish (지도 중앙부분) (source : Wikipedia)

  

Kish 지역은 당시의 제국들의 주요한 쟁탈지역으로 삼을 만큼 종교적 의미도 있는 주요도시였다. 박용숙 교수는 Kish가 13세 흘달단군이 BC 1767년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관청을 둔 '기'지역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아직 하나라지역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연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고대사에 있어서 Kish 지역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고 본다. 이는 또한 역으로 당시 키메리언, 스키타이, 메데스제국왕인 Tugdamme가 당시에 가장 강력한 제국의 왕이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652 BC  

 

키메리언은 리디아의 Hilkku지역과 Tabal지역을 한차례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나 다시 재침하여 (리더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리스에서는 Tugdamme라 한다) 리디아 왕 Gyges (BC 687-652 BC)를 살해했다. 수도 Sardis가 점령되었으나 Citadel은 점령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발굴에서 드러났다. (아래 자료 참조)

 

"One serious invasion of Anatolia by Cimmerians has already been repulsed, with the states or regions of HilakkuLydia, and Tabal requesting help from Assyria. Now the Cimmerians return (leader unknown, but Greek tradition states that it is Tugdamme). King Gyges of Lydia is killed during a second attack. His capital of Sardis is captured, all except the citadel which manages to hold out. The fact that it does suggests either that either the Cimmerians do not hang around for long after their victory or that (as before) they are moved along by an Assyrian force (with Ardys II of Lydia helping them on their way at the point of a sword). Excavations at the site of Sardis later discover a destruction layer that appears to be associated with this event."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즉 Tugdamme가 Sardis(아래 지도 참조)까지 점령했다는 것은  아나톨리아의 서쪽 끝까지 정복해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키메리언이 트라키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당시의 위세로 보아 메디아제국을 통합하고 서진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리디아 왕 Gyzes는 보이지 않게 하는 반지 (ring of invisibility) 덕분에 (플라톤의 신화적 이야기 자료), 외부인(발칸반도지역 출신)으로서 최초로 리디아 왕이 되었는데 (성경학자들은 Magog 땅의 지배자 Gog으로 인식함), 왕이 된 후 군사혁 증강에 힘을 쏟았다. 필자는 혹시 발음상 유사한 점으로 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Gyzes왕은 앗시리아에 대항해 이집트의 독립을 도운 리디아왕이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의 인물로 기원전 11세기의 인물인 기자와는 시기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이 Gyzes왕 신화의 이야기를 일부 차용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 카테고리, Anatolia, 펌글 참조)

 

 

 Map of Sardis and other cities within the Lydian Empire (source : Wikipedia)

 

 

(4) 641 BC - 640 BC 

 

십여년이상 방대한 지역을 지배한 Tugdamme는 BC 640년경 패배를 맛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에 패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Strabo는 메디아의 스키타이 군주 Madyas가 Tugdamme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키메리언과 스키타이 사이에 분열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왕 Ashurbanipal은 Marduk이 Tugdamme를 패배시켰다고 말한다. (아래 자료 참조)  Marduk은 수메르의 신이다. 즉 신의 뜻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After more than a decade of controlling a vast domain, Tugdamme is now defeated. Unfortunately the details of how this happens have failed to survive, so the manner of his defeat and death are unknown. Strabo suggests that Madyas, the Scythian overlord of the Medes, kills him and defeats his forces. Ashurbanipal states that Marduk (also Madyas?) defeats Tugdamme, which seems to support the idea that it is not the Assyrians who kill him but his allies the Scythians. 

 

This would appear to be the point at which the Cimmerians largely break up as a cohesive force. Elements settle in Tabal (Classical Cappadocia) and Thrace, destroy Sinope, and may well also contribute greatly to a thrust of hose-borne warrior groups migrating westwards along the Danube to influence the Celts (even if this is only in terms of cultural and military influences upon Indo-European elements which are already migrating in that direction). Scythian culture takes over in the Caucuses and Pontic steppe, so it is clear that whatever Cimmerians remain there are no longer at all dominant or powerful."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Tugdamme의 패배에 대해서 약간의 검증을 해보자.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앗시리아 Ashurbanipal왕의 암석 에서는 Tugdamme의 아들이 Sandakhshatra이며, Tugdamme는 전쟁에서 죽었고, Sandakhshatra는 살아서 다음 사카, 스키타이부족의 왕이 되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앗시리아왕 암석문에 새긴다는 것은 앗시리아에서 Tugdamme를 패배시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태여 암석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Ashurbanipal왕의 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According to the Assyrian inscriptions provided by Ashurbanipal, King of Assyria, he was the son of Tugdamme. These inscriptions show that Tugdamme was killed in battle but that Sandakhshatra survived and thus became the next King of the Saka, a Scythian tribe. "

 

(source : Sandakhshatr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 펌글 참조 )


아래 위키자료에서 보듯이, Ashurbanipal 앗시리아왕이 엘람왕국을 공격하는 동안, 메디아, 키메리언, 페르시아인이 연합하여 앗시리아를 공격하니, 앗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연합하여 이들에 대항해 싸워서 이겼다고 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메디아 왕 Phraortes가 전사했다고 했다. 

 

"While the Assyrian forces were on campaign in Elam, an alliance of Persians, Cimmerians and Medes marched on the capital Nineveh and managed to reach the city's walls. To counteract this threat, Ashurbanipal called on his Scythian allies and successfully defeated the enemy army. 

 

The Median king, Phraortes, is generally held to have been killed in the fighting.[4] This attack is poorly documented and it is possible that Phraortes wasn't present at all and his unfortunate death instead belongs to a Median campaign during the reign of one of Ashurbanipal's successors.[37]"

 

(source : Ashurbanipal,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메소포타미아, 펌글 참조)

 

그래서 스키타이왕 Madyas (645-628 BC ?) 자료를 보니, 그는 Bartatua 왕(675-645 BC)의 아들인데, Bartatua왕은 앗시리아왕 Esarhaddon의 딸과 결혼했다 (BC 675년경). 앗시리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것 같다. 따라서 스키타이왕 Madyas는 앗시리아왕  Ashurbanipal왕과 함께 싸워, 키메리언왕 Tugdamme를 죽이고 Cimmerians의 군대를 패배시킨 것 같다. 즉 이 당시는 Medes제국의 Cimmerians과 그에 접해있는 Scythians이 적이 되어 싸운 것이다. 이후  스키타이왕이 Medes제국을 28년 정도 지배한 것을 보면, 앗시리아왕이 스키타이왕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앗시리아왕 Ashurbanipal은 Marduk 신이 Tugdamme를 패배시켰다고 정당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자료 참조)

 

"Bartatua (Akkadian: m Bar-ta-tu-a[1] or Par-ta-tu-a,[2] Scythian *Pṛθu-tavā or *Pṛθu-tuvā,[3] Ancient Greek: Προτοθύης, romanizedProtothýēs[2]) was a Scythian king.[4] 

 

Kashtariti, a Median chieftain, planned an incursion into Assyrian territory. His allies included the Cimmerians and the Mannaeans. Scythian king Ishpaka allied himself with the Medians in ca. 678 BCE.[5] In the meantime, Ishpakai died in battle against Assyrian king Esarhaddon in ca. 675 BCE,[6] and was succeeded by Bartatua. Kashtariti's alliance crumbled shortly thereafter, and the Assyrians thwarted Kashtariti's forces. In an effort to forge peace with the Assyrians, he married a daughter of Assyrian king Esarhaddon in 674[7] or 676 BCE.[8] As a consequence, Bartatua would have had to serve as a vassal to Assyria.[9] Ultimately, although no concrete evidence for the marriage exists, it is implied by the alliance formed between Assyria and Scythia.[10] 

 

The Scythians, aiding the Assyrians, subjugated Media between 653 and 652 BCE. As a reward for their help, the Assyrians left control of Media to the Scythians.[11] The Scythians maintained rule over Media until 625 BCE with the rise of Cyaxares as king of Media.[12]

 

Bartatua died in ca. 645 BCE, succeeded by his son, Madys.[13]"

 

(source : Bartatu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 펌글 참조)

 

"Madius (Ancient Greek: Μάδιος), Madyes, or Madya was the Scythian king after his father BartatuaHe "invaded and subjugated Media (c. 628)", but the "Medes soon rebelled, however; their king Cyaxares massacred the Scythian leaders, and the remainder of the Scythians turned back via the Caucasus to southern Russia."[1] according Strabo it was he who led the raids Scythians against Ancient Egypt"

 

(source : Madya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 펌글 참조)

 

필자가 상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다소 공식적인 연대가 차이 나지만, 메디아 왕 Phraortes는 키메리언왕 Tugdamme로 추정되고, 그의 아들 Sandakhshatra는 메디아왕 Cyaxares왕으로 보인다.  즉 Strabo와 Fritz Hommel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재기한 메디아왕 Cyaxares는 보복으로 scythian leaders를 몰살시키고, 남은 스키타이부족들은 코카서스를 거쳐 남러시아로 돌아갔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십여년 후 Cyaxares가 스키타이와 연합하여 신앗시리아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면 스키타이족이 모두 이동한 것 같지는 않는 것 같다.)

 

8) Cimmerian and Median King : Sandakhshatra (BC 600년경)

 

 Map of Median Empire in 600 BC

 

키메리언과 메디언은 한세대에 걸쳐 역사를 공유한 것으로 보이며, 인도유럽인 유산을 고유한 것을 보면 문화적으로 아주 분리된 것 같지는 않는다.

The Cimmerians and Medians appear to have shared a history for the span of about a generation, and with a shared Indo-European heritage they may not have been too divided in cultural terms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Fritz Hommel은 Sandakhshatra가 메디아 왕 Cyaxares이고 그의 아들 Ishtivegu가 메디아 왕 Astyages라고 주장한다. 둘 이름 모두 헤로도투스가 준 이름이고 이들은 스키타인에 의해 지배되던 기간 또는 그 이후의 메디아 왕 이름 Huwaxshatra와 Ishtumegu에 연결될 수 있다. Hommel은 또한 앞의 키메리언왕 Tugdamme를 Sandakhshatra의 선조로 연결한다. Sandakhshatra란 이름은 분명 형태상 인도 이란인 이름 같다. (아래 자료 참조)

 

"Fritz Hommel identifies Sandakhshatra with the ruler of Media, Cyaxares, and his son, Ishtivegu, with Astyages. Both of these names are given by Herodotus and can be tied to the Median kings, Huwaxshatra and Ishtumegu, who ruled during or after a period of domination by Scythians. Hommel also connects the earlier Cimmerian king, Tugdamme, as an ancestor of Sandakhshatra. The name Sandakhshatra certainly does seem to be Indo-Iranian in form (and far less Celtic than Tugdamme)....."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메디아왕 Cyaxares에 대해서 아래 위키자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한다.  

 

(1) Median King Cyaxares (BC 625/640? - 585 BC)의 뉴앗시리아 정복 

 

Cyaxares왕은 메디아의 선조 다른 왕들보다 훨씬 큰 군사적 평판을 가지고 있으며 (by 헤로도투스) 그는 군대를 처음으로 창병, 궁병, 기병으로 나누었다. 그는 이란인 부족 모두를 통합시켜 주변국들을 정복해 나갔으며, 뉴앗시리아의 붕괴를 쉽게 하였으며,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인을 메디아에서 쫓아냈다. 그는 아케메니스제국을 세운 Cyrus 대제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아래 자료 참조)

 

 

"Cyaxares (Ancient Greek: Κυαξάρης; Old Persian: ?????? UvaxštraAvestanHuxšaθra "Good Ruler"; AkkadianUmakištar;  Old Phrygianksuwaksaros; r. 625–585 BC) was the third and most capable king of Media, according to Herodotus, with a far greater military reputation than his father Phraortes or grandfather Deioces. He was the first to divide his troops into separate sections of spearmen, archers, and horsemen.[7]

 

By uniting most of the Iranian tribes of ancient Iran and conquering neighbouring territories, Cyaxares transformed the Median Empire into a regional power.[8] He facilitated the fall of the Neo-Assyrian Empire, and according to Herodotus repelled the Scythians from Media.[9] He was one of the great-grandfathers of Cyrus the Great."

 

(source : Cyaxare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페르시아, 펌글 참조)

 

Cyaxares는 메디언국의 수도 Ecbatana에서 태어났으며, 그이 아버지 Phraortes는 앗시리아왕 Ashurbanipal왕이 이끈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후 스키타인은 메디아를 약탈했으며, 28년에 걸쳐 이 지역을 지배했다.  Cyaxares는 스키타인 리더들을 죽이는 복수를 하고 메데스왕으로 선언했다. 스키타인을 몰아낸 후 그는 앗시리아에 대한 전쟁 준비를 했다. 군대를 재조직하고, 앗시리아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바빌로니아 Nabopolassar왕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동맹은 Cyaxares 딸, Amytis와 Nabopolassar의 아들 Nebuchadnezzar II이 결혼함으로써 공식화했다.  Cyaxares는 또한 십여년전에는 서로 싸웠던 스키타인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BC 612년 Cyaxares와 그의 군대는 Assur를 정복했고 앗시리아의 수도 Nineveh를 정복했음을 주장했다. 메디언, 바빌로니언, 그리고 스키타인은 BC 612년 앗시리아 제국을 붕괴시키고 Nineveh를 파괴했다. 앗시리아와 메데스와의 전투는 BC 609년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아래 자료 참조)

 

"Cyaxares was born in the Median capital of Ecbatana. His father Phraortes was killed in a battle against the Assyrians, led by Ashurbanipal, the king of Assyria. After Phraortes' demise, the Scythians overran Media and controlled the area for a period of twenty-eight years.[10] 

 

Cyaxares, seeking revenge, killed the Scythian leaders[11] and proclaimed himself King of Medes. After throwing off the Scythians, he prepared for war against Assyria.[12] Cyaxares reorganized the Median army, then allied himself with King Nabopolassar of Babylonia, a mutual enemy of Assyria. This alliance was formalized through the marriage of Cyaxares' daughter, Amytis, to Nabopolassar's son, Nebuchadnezzar II

 

Cyaxares also allied with the Scythians even though they warred against each other a decade earlier.[13] In the year 612 B.C.E, Cyaxares and his army was able to conquer Assur and he also claimed the Assyrian capital of Nineveh. The Medians, Babylonians, and Scythians overthrew the Assyrian Empire and destroyed Nineveh in 612 BC. Fighting between the Medes and the Assyrians would finally come to an end in the year 609 B.C.E."

 

(source : Cyaxare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페르시아, 펌글 참조)

  

(2) Lydia왕국과의 전투 및 결혼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 

 

앗시리아에 승리한 후, Mees는 북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Halys강 동쪽 소아시아 일부를 정복했다.  BC 585년 일식으로 끝난, 리디아와 메디아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Halys 강 전투)가 끝난 후, Halys강은 Medes가 리디아에 접한 국경이 되었다. Cyaxares가 리디아군의 위협에 직면하기 전에, 리디아왕 Alyattes는 이미 프리기아의 동쪽지역과 프리기아 수도 Gordion에서 군사적전을 폈다.  리디아와 Medes는 5년동안 서로 일진일퇴하며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6년째 일식이 와서 낮이 밤이 되자 전쟁을 멈추고 평화조약체결을 했다. 주위의 권고도 있고 전쟁에 지친 탓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혼동맹 (Alyattes 딸과 Cyaxares 아들 Astyages의 결혼)으로 이어지고 이후 서로간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그후 Cyrus 대제와의 갈등에서 Medes의 Astyages가 Lydia의 지원을 요구했으나 리디아의 Croesus왕은 거절했다.)  전쟁후 바로 Cyaxares는 죽고 그의 아들 Astyages가 왕위를 이었으니, 이는 Cyrus 대제의 생물학적 할아버지가 된다. (아래 자료 참조)

 

"War against Lydia

Qyzqapan tomb, likely relief of Cyaxeres (detail).[1]

 

After the victory in Assyria, the Medes conquered Northern Mesopotamia, Armenia and the parts of Asia Minor east of the Halys River, which was the border established with Lydia after a decisive battle between Lydia and Media, the Battle of Halys ended with an eclipse on May 28, 585 BC. Before Cyaxares was confronted with the threat of the Lydian army, Alyattes had previously campaigned in the eastern regions of Phrygia and Gordion.[14]

 

The conflict between Lydia and the Medes was reported by Herodotus as follows:

 

"A horde of the nomad Scythians at feud with the rest withdrew and sought refuge in the land of the Medes: and at this time the ruler of the Medes was Cyaxares the son of Phraortes, the son of Deïokes, who at first dealt well with these Scythians, being suppliants for his protection; and esteeming them very highly he delivered boys to them to learn their speech and the art of shooting with the bow. Then time went by, and the Scythians used to go out continually to the chase and always brought back something; till once it happened that they took nothing, and when they returned with empty hands Cyaxares (being, as he showed on this occasion, not of an eminently good disposition) dealt with them very harshly and used insult towards them. And they, when they had received this treatment from Cyaxares, considering that they had suffered indignity, planned to kill and to cut up one of the boys who were being instructed among them, and having dressed his flesh as they had been wont to dress the wild animals, to bear it to Cyaxares and give it to him, pretending that it was game taken in hunting; and when they had given it, their design was to make their way as quickly as possible to Alyattes the son of Sadyattes at Sardis. This then was done; and Cyaxares with the guests who ate at his table tasted of that meat, and the Scythians having so done became suppliants for the protection of Alyattes.

 


After this, since Alyattes would not give up the Scythians when Cyaxares demanded them, there had arisen war between the Lydians and the Medes lasting five years; in which years the Medes often discomfited the Lydians and the Lydians often discomfited the Medes (and among others they fought also a battle by night): and as they still carried on the war with equally balanced fortune, in the sixth year a battle took place in which it happened, when the fight had begun, that suddenly the day became night. And this change of the day Thales the Milesian had foretold to the Ionians laying down as a limit this very year in which the change took place. The Lydians however and the Medes, when they saw that it had become night instead of day, ceased from their fighting and were much more eager both of them that peace should be made between them. And they who brought about the peace between them were Syennesis the Kilikian and Labynetos the Babylonian: these were they who urged also the taking of the oath by them, and they brought about an interchange of marriages; for they decided that Alyattes should give his daughter Aryenis to Astyages the son of Cyaxares, since without the compulsion of a strong tie agreements are apt not to hold strongly together." (The Histories, 1.73-74, trans. Macaulay) 

 

After the subsequent interchange of marriage, fighting ceased between the Medians and the Lydians, yet Croesus would later refuse to send aid to Astyages when faced with conflict from Cyrus the Great.[14] Thus showing that while the resulting marriages may have prevented more fighting between the Medians and the Lydians, the two kingdoms were not joined in any type of alliance.

 

Cyaxares died shortly after the battle and was succeeded by his son, Astyages, who was the maternal grandfather of Cyrus the Great through his daughter Mandane of Media."

 

(source : Cyaxare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페르시아, 펌글 참조)

 

 

 

9) Cimmerian and Median King : Ishtivegu (BC 580년경)

 

Fritz Hommel은 키메리언왕 Ishtivegu가 메디언 왕 Astyages라 추정했다. 실제 아래 위키자료를 보면 메디언왕 Astyages는 Nabonidus inscriptions에서는 Ishtuvegu라 적혀있다고 하니, 동일인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키메리언왕이자 메디언왕인 Ishtivegu=Astyages에 대해 위키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자세히 알아 본다. 

 

- Median King Astyages (BC 585 - 549 Bc)

 

"Astyages (MedianR̥štivaigahBabylonianIštumegu; spelled by Herodotus as Ἀστυάγης Astyágēs, by Ctesias as Ἀστυΐγας Astyḯgas, by Diodorus as Ἀσπάδας Aspádas) was the last king of the Median Empire, r. 585–550 BC, the son of Cyaxares; he was dethroned in 550 BCE by Cyrus the Great

 

His name derives from the Old Iranian R̥štivaiga, which means "swinging the spear, lance-hurler".[1] In the inscriptions of Nabonidus, the name is written Ishtuvegu.[2]"

 

(source : Astyage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페르시아, 펌글 참조)

 

헤로도투스 기록에 의하면 Astyages에 대한 평판은 부정적이다. Astyages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딸 Mandane가 그의 제국을 파괴하는 아들을 낳았다 한다.

꿈의 계시가 무서워서 Astyages는 딸을 Ansan의 Cambyses I에게 시집 보냈다. 캄비세스I세는 조용하고 생각이 많은 왕자였으므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꿈에서는 Mandane의 후손의 위험을 경고했다. Astyages는 장군 Harpagus를 보내 어린 Cyrus를 죽이라고 보냈다. 헤로도투스는 Cyrus의 부모이름을 정확히 말했다. 단 캄비세스가 왕이라는 곳을 말하진 않았다. 현대 학자들은 Cyrus가 Astyages의 손자라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Harpagus는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이 내키지 않아 목동 Mitridates에게 건넸다. 마침 이 목동의 아내는 방금 아기를 출산하였다. Cyrus는 Mitrdates의 아들로 키워졌다. Harpagus는 Mitridates의 친자식을 죽은 Cyrus라고 Astyages에 내밀었다.  

 

Cyrus가 열살이 되어 살아 있다는 것이 발각되자, Astyages는 그의 Magi의 조언에 따라, Cyrus를 그들의 부모가 있는 Ansan으로 보낸다. 그리고 Harpagus에게 벌을 내려 연회에서 Harpagus의 친아들의 살점을 먹게한다.  

 

Cyrus는 아버지를 이어 BC 559년 왕이 된다.  그리고 BC 553년, 복수심에 불타는 Harpagus의 조언에 따라, Astyages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 3년의 전쟁후에 Astyages의 군대는 pasargade 전투에서 무력화 되고, Cyrus는 메디언제국을 정복한다.  

 

Astyages는 Cyrus의 궁정에서 죽을 때까지 잘 대접을 받았다 한다. Cyrus가 개젖을 먹고 자랐다는 유명한 신화 (개는 페르시언에게 신성한 존재이다. 로물로스와 레뮤스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와 유사하게, 사르곤신화도 늑대의 젖을 먹는다) 대신에, 헤로도투스는 목동 Mitridates가 Spaco 라 불리는 Astyages의 노비여인과 살았다고 설명하는데, Spaco는 메디아 말로 개 (Dog)를 의미한다.  

 

Astyages의 전쟁 패배원인에 대해서 Harpagus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Harpagus는 Pasargade 전투시 Astyages의 장군이었고, 전쟁후 Cyrus 제국에서 그의 가족들이 고위직에 올랐고, Harpagus는 Cyrus의 가장 훌륭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가 Astyages에 대한 반란에서 뭔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Cyrus는 이때 Astyages의 수도 Ecbatana를 취하러 갔을 때이다.  

 

고대 자료는 Cyrus가 Astyages에 대해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Ctesias는 Herodotus와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즉 Astyages는 Parthia지방의 governor가 되었는데, 후일 정치적 반대파인 Oebares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그러나 죽음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Astyages 몰락후, 리디아의 Croesus는 Astyages의 복수를 위해 Cyrus에게 진군하나, Harpagus와 함께한 Cyrus에게 패하고, BC 547년 Lydia는 정복된다. (아래 자료 참조)



Map of the Lydian Kingdom in its final period of sovereignty under Croesus, c. 547 BC. (source : Wikipedia)  

 

"In Herodotus

 

The account given by the ancient Greek historian Herodotus relates that Astyages had a dream in which his daughter, Mandane, gave birth to a son who would destroy his empire. Fearful of the dream's prophecy, Astyages married her off to Cambyses I of Anšan, who had a reputation for being a "quiet and thoughtful prince" and whom Astyages believed to be no threat.

 

When a second dream warned Astyages of the dangers of Mandane's offspring, Astyages sent his general Harpagus to kill the child Cyrus. Herodotus correctly names Cyrus' parents, though he fails to mention that Cambyses was a king.[5][6] Modern scholarship generally rejects his claim that Cyrus was the grandson of Astyages.[7] Harpagus, unwilling to spill royal blood, gave the infant to a shepherd, Mitridates, whose wife had just given birth to a stillborn child.

 

Cyrus was raised as Mitridates' own son, and Harpagus presented the stillborn child to Astyages as the dead Cyrus. When Cyrus was found alive at age ten, Astyages spared the boy on the advice of his Magi, returning him to his parents in Anshan. Harpagus, however, did not escape punishment, as Astyages is said to have fed him his own son at a banquet. Cyrus succeeded his father in 559, and in 553, on the advice of Harpagus, who was eager for revenge for being given the "abominable supper," Cyrus rebelled against Astyages. After three years of fighting, Astyages' troops mutinied during the battle of Pasargadae, and Cyrus conquered the Median's empire. 

 

Astyages was spared by Cyrus, and despite being taunted by Harpagus, Herodotus says he was treated well and remained in Cyrus' court until his death. Rather than giving the popular mythology that Cyrus was suckled by a dog (the dog was sacred to Persians. cf. also the legend of Sargon, or the similar legend of Romulus and Remus, suckled by a she-wolf (LatinLupa)) Herodotus explains that the herdsman Mitridates lived with another of Astyages' slaves, a woman named 'Spaco,' which he explains is Median for "dog,"[8][9] which gives both the legend and Herodotus' rationalized version.[10]

 

In the Book of Daniel

 

Chapter 14 of the deutero-canonical version of the biblical Book of Daniel, otherwise known as Bel and the Dragon, opens with the accession of Cyrus after the death of Astyages.[11]

 

Defeat

 


The contemporary Chronicle of Nabonidus refers to the mutiny on the battlefield as the cause for Astyages' overthrow, but does not mention Harpagus by name. However, since Harpagus was Astyages' general at the battle of Pasargadae and his family were granted high positions in Cyrus' empire after the war, and since Harpagus went on to become Cyrus' most successful general, it is possible he had something to do with the mutiny against Astyages.[12] Cyrus then went on to capture Astyages' capital of Ecbatana. Ancient sources agree that after Astyages was taken by Cyrus he was treated with clemency, though the accounts differ. Herodotus says that Cyrus kept Astyages at his court during the remainder of his life, while according to Ctesias, he was made a governor of a region of Parthia and was later murdered by a political opponent, Oebares. The circumstances of Astyages' death are not known. After Astyages' overthrow, Croesus marched on Cyrus to avenge Astyages. Cyrus, with Harpagus at his side, defeated Croesus and conquered Lydia in or after 547 BC.[13]"

 

(source : Astyage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페르시아, 펌글 참조)

 

 

10) BC 450년  Legendary Cimmerian Leader : Antenor II

  

BC 450년경 Antenor II는 흑해연안의 키메리언의 전설적 지도자이다. 그는 또한 후일  프랑크족 Sicambri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14세대이후 이 키메리언은 그들이 이동한 독일의 숲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기원전 1세기에 줄리어스 캐사르의 군사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아래 자료 참조)  

 

"Antenor II is a legendary leader of the Cimmerians on the Black Sea coast. He is also claimed by later legends as the ancestor of the Sicambri Franks. Fourteen generations of descendants later these Cimmerians are to be found in the forests of Germany to which they have migrated. There they fend off the military attentions of Julius Caesar in the first century BC."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흑해연안은 후에 프랑크족의 고향으로 주장된다. 이는 스칸디나비아가 고향이라는 전설과 혼동된다. 

The coast around the Black Sea was claimed as the original homeland of the Franks by later, medieval authors, further obscuring an already legendary origin in Scandinavia  (source : Kingdom of Anatolia-Cimmerians, The History Files)

 

 

11) Sicambri and Franks

 

프랑크족 신화에 의하면, Antenor왕의 증손자인 Priamus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키메리언은 그들의 부족이름을 Sicambri로 바꾸었다 한다.  그러나 Cambri/Cimbri는 별차이가 없어 바끤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일부 키메리언부족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Migration story는 중세학자들에게 이러한 창작의 핑계가 되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이자료에서는 또한 프랑크왕 Clovis I이 세례를 받을 때 Sicambrian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According to later Frankish legend, in honour of the mother of Priamus (great-grandson of Antenor) the Cimmerians change the name of their tribe to Sicambri (or, more probably, something closely resembling Cambri, which would suggest that there is no name change at all - Cambri/Cimbri is close enough to Cimmeri for this to be the very source of the later false link to the Germanic Sicambri). Whilst the link to the Sicambri can be discarded, this does seems to point to a specific tribe of Cimmerians rather than all Cimmerians. The migration story itself is likely to be an invention to explain to a medieval audience the similarity between the Cambri and Cimmeri names."

 

(Source : Kingdom of Anatolia - Cimmerians, The History Files,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immerians/Gomer, 펌글 참조)

 

이상으로 키메리언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 한다. I,II의 내용을 볼 때,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이 모두 키메리언, 스키타인들의 무대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케메네스제국도 결국은 메디아제국을 이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아케메네스제국은 파르티아제국으로 이어진다. 파르티아제국은 Dahae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이후 분석되는 Dahae도 Hyrcania지방과 함께 늑대와 깊은 연관을 보여 준다. 

 

따라서 트라코-키메리언 가설에 의한 키메리언의 서부로의 이동, 북유럽의 Cimbri의 관련성, 그리고 프랑크족의 Sicambri 연관성 등을 고려하면,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럽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스카타인, 키메리언과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드러 난다. 

 

필자는 해모수 단군의 '해모수' (Hammursuh)란 지역이름이 덴마크 동쪽 섬에 나타나고, 덴마크지역에서 'Dan'이란 이름의 왕들이 존재 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발칸반도에는 기원전 4세기에 Dardania왕국이 있었다. 심지어 갈리아 지방인 서부 프랑스지역에서도 Dardanian란 부족이 기원후 5세기 Attila시대에 위키자료에서 언급된다. 필자는 단군조선의 지역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의 키메리언 연구에서 스키타인 키메리언은 중앙아시아에서 흑해지역을 지나,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나, 발칸반도, 중동부 유럽, 이태리 북부, 북유럽, 심지어 이베리아반도, 프랑스지역까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Thraco-Cimmerians의 가설은 이러한 이동의 역사를 말해 주며, 유물로도 확인된다 한다. 

 

이러한 방대한 지역의 언급은 키메리언인 Gomerian, Magog, Gog 등의 언급과 더불어 노아의 홍수이후까지 거슬러 올라 언급된다. 성경에 의하면 야베의 후손이라 한다. 고트족의 조상인 Magog는 우리의 마고할미와 연결되는 것 같다. 즉 우리와의 천연성을 느낄 수 있다. 

 

지난 Massagetae 관련 글에서 스키타인 부족 여왕 Tomyris는 아케메니스제국의 창시자인 Cyrus 대제를 전쟁에서 패배시켜 죽였다고 했다. 즉 Massagetae, Dahae, 스키타인, 키메리언 모두 연결된다. 

 

필자는 이것이 과거 신비의 진국(辰國)의 정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단군조선인 낙랑조선일 수도 있고, 중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지역은 진국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태리 북부까지 키메리언이 연결되는 것을 감안하면, 마한, 진한, 변한의 전신 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대 12환국의 지역이 인도지역 (사납아국)에서 흑해 북부 (구막한국), 이란 이라크지역 (수밀이국, 우루국, 양운국), 발칸반도지역 (비리국?), 중동부유럽 (선비국, 월지국, 수에비족)에 걸쳐 있는 것으로 추정했으며, 광개토태왕은 이들 지역을 정복한 것으로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 참조). 스키타인, 키메리언의 상기 이동 상황과 상당히 일치하는 지역인 것이다. 즉 서구학자들의 연구결과가 필자의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할 수 있다. 한반도, 중국의 일부지역을 한민족의 역사 연구 지역으로 제한하는 재야 사학가들은 뭔가를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