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나라/당나라

<펌>석국 전투 - 문화원형백과

Chung Park 2023. 7. 9. 01:04
분류
군사/외교 > 실크로드 개척사 > 석국, 탈라스전투

소발률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고선지는 이후 몇 차례 중앙아시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사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신·구당서』 「고선지열전」에 749년(천보; 8년)에 입조()하여 현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있음을 볼 때, 소발률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고선지의 행적을 미루어 볼 수 있는 기사는 아래와 같다.

① 천보 8년(749), 조정으로 들어와 현종을 뵈었는데 특진시켜 좌금오위 대장군 동정원()을 겸하게 하고 이어 아들 한 명에게 오품()의 관직을 주었다.(『구당서』 권104 「고선지열전」) 구당서 고선지7

② 얼마 뒤 고선지를 좌금오위 대장군()에 승진시키고 그 아들 한 명에게는 오품()의 관직을 주었다.(『신당서』 권135 「고선지열전」) 신당서 고선지6

이와같이 고선지는 천보 6년(748) 소발률 전투에서 토번의 세력을 약화시킨 이후, 중앙아시아의 72개국이 조공을 받칠 정도로 그 위세를 떨리고 있었다.

즉 당은 서역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 서북방향에 위치한 석국을 공격하여 중앙아시아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장악하려 하였다.

석국은 북위시대에는 자설국(者舌國), 그 이전에는 강거국(康居國)으로 불리웠으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쉬켄트이다. 그런데 고선지가 타쉬켄트를 공격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신·구당서』 「고선지열전」에서는 관련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신당서』 「석국전」에는 다음과 같은 관련 기사가 보인다.

"천보 초, 당은 석국 왕자 나구차비시를 회화왕으로 봉하면서 철권을 주었다. 얼마 후에 안서절도사 고선지는 석국이 번신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을 탄식해, 이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석국의 왕이 항복의 뜻을 전달해 왔다. 고선지는 사자를 보내어 석국왕을 붙잡아 개원문까지 호송해 갔다. 그런데 장안성에서 석국왕을 베어 죽이자 이 때부터 서역의 제국들이 이를 원망하였다."

상기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석국은 당에게 번신의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이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석국은 수(隋) 대업(大業) 연간(605~617)에는 서돌궐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당과 교섭하면서 개원() 초기에 책봉을 받는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점차 강성해지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자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파병 요청에 대해 당은 어떠한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그러자 석국은 당에 불만을 품고 신하의 예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고선지는 이슬람세력에 동조하려는 석국을 정벌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당회요』 권99 「석국전」) 이와 관련하여 『구당서』 「이사업전」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인다.

"천보 10년(751) 이사업은 또 고선지를 따라서 석국을 평정했다. 이 때 오랑캐 아홉 나라와 함께 배반한 돌기시를 쳐부수었다. "

즉 석국이 독자적으로 당에 대해 번신의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제국들이 점차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편입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석국은 동방으로 진출하는 이슬람 세력과 서방으로 진출하는 당의 세력이 충돌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고선지는 천보 9년(750) 석국 정벌에 성공한다. 먼저 석국 정벌에 관한 관련 기사를 열거해 보자.

① 천보 9년(750), 병력을 이끌고 석국()을 토벌하여 평정한 뒤 그 나라의 왕을 붙잡아 돌아왔다.(『구당서』 권104 「고선지열전」) 구당서 고선지7

② 천보 9년(750), 석국()을 토벌하였다.(『신당서』 권135 )「고선지열전」)
신당서 고선지6

고선지의 석국 정벌은 중앙아시아에서의 당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747년(천보 6년) 소발률 정벌에서 시작한 고선지의 중앙아시아 원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소발률과 석국으로 대변되는 이 기간 동안의 대표적인 고선지의 원정은 당초 치하에서 중국의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이 정점에 이른 것이다.

이 시기 당은 타림과 일리 분지와 이식쿨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고 타쉬켄트의 주군이었다. 한편 파미르 계곡을 점령하여 카불·카쉬미르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다.

쿠차에 본거지를 둔 고선지는 이처럼 사실상의 중앙아시아의 맹주였던 것이다.

<신당서 고선지6>또 왕도 등을 불러오게 하여 꿇어앉힌 뒤 욕을 보이려 하였다. 한참 뒤 모두를 풀어주면서 말하였다: "나는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 이리하여 온 군사들이 안정되었다. 얼마 뒤 고선지를 좌금오위 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에 승진시키고 그 아들 한 명에게는 오품(五品)의 관직을 주었다. 천보 9년(750), 석국(石國)을 토벌하였다. 그 나라의 왕 거비시(車鼻施)가 항복을 청하였는데 고선지가 포로로 잡아 궁궐에 바치자 목을 베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서역(西域)이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석국의 왕자는 대식(大食)으로 달아나 병력을 빌려 탈라스성에서 고선지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원한을 되 갚았다. 고선지는 사람됨이 탐욕스러웠는데 석국을 격파하고 슬슬(瑟瑟) 10여 곡(斛), 황금, 5~6마리 낙타 짐을 획득하였으며, 명마(名馬)와 보옥(寶玉)도 매우 많은 양을 얻어 가산이 막대한 금액에 이르렀다. 그러나 또한 그다지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요구하면 바로 베풀면서 액수를 묻지 않았다. 뒤이어 무위 태수(武威太守)에 제수 되었고 안사순(安思順)을 대신하여 하서 절도사(河西節度使)가 되었다. 여러 오랑캐들이 안사순의 유임을 굳게 청하자 고선지를 다시 우우림 대장군(右羽林大將軍)에 제배하였으며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하였다.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왕(榮王)을 원수(元帥)로 삼고 고선지를 부원수로 삼았다. 비기(飛騎)와 광기 및 삭방(朔方) 등지의 병력을 거느리고 궁금(宮禁)에 저장하였던 재물을 내어 관보(關輔)에서 군사 5만을 모집해서 봉상청(封常淸)을 이어 동쪽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황제가 근정루(勤政樓)에 거동하여 영왕을 인도해 명령을 받도록 하였으며 고선지 이하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구당서 고선지7>고선지가 이미 절도사의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는데 정천리를 불러 말하였다: “공은 얼굴은 남아다운데 마음은 아낙네와 같으니 왜 그런가?” 필사침에게 말하였다: “저 자식이 감히 왔네! 내가 성 동쪽의 1천 석 종자를 파종할 수 있는 면적의 장전(莊田)을 너에게 빼앗겼는데 생각나느냐?” 필사침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중승께서 제가 고생하는 것을 알고 빌려준 것입니다." 고선지가 말하였다: "그때는 네가 권세를 부릴까 두려워 주었던 것이었다. 어찌 너를 좋아해서 준 것이겠느냐? 내 말하고 싶지 않지만 네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을까 생각되어 말하는 것이다. 이제 말이 끝났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또 왕도 등을 불러오게 하여 붙잡아 꿇어앉힌 뒤 매질을 하려 하다가 잠시 뒤 모두 풀어주었다. 이리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안정되었다. 천보 8년(749), 조정으로 들어와 현종을 뵈었는데 특진시켜 좌금오위 대장군 동정원(左金吾衛大將軍同正員)을 겸하게 하고 이어 아들 한 명에게 오품(五品)의 관직을 주었다. 천보 9년(750), 병력을 이끌고 석국(石國)을 토벌하여 평정한 뒤 그 나라의 왕을 붙잡아 돌아왔다. 고선지는 성격이 탐욕스러워 석국에서 큰 크기의 슬슬(瑟瑟) 10여 가마[石], 진금(眞金) 5, 6 짐, 그리고 명마(名馬)와 보옥(寶玉)도 이에 상당하는 양을 획득하였다. 처음에 아버지 고사계는 고선지가 나약했기 때문에 자신을 보존조차 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큰공을 세운 것이었다. 집안에 재산이 수만이었는데 베풀기를 매우 잘하여 사람들이 요구하면 주지 않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타슈켄트 호텔 서북방향 정경>타쉬켄트 호텔 서북방향 정경-우즈베키스탄의 수도로서 인구 212만명 정도의 도시. 천산산맥[天山山脈]에 있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시르다르야강(江)의 지류에 접한다. 아시하바드 철도·오렌부르그철도와 그 밖에 두 지선(支線) 철도가 집결되며 천산산맥으로 가는 자동차 도로의 기점이기도 하다. 또한 모스크바·트빌리시·바쿠·알마타·부하라·뉴델리 등지로 가는 공로(空路)가 있다. 7∼8세기에는 투르크계 문화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0세기에는 사만왕조가 지배하였다. 뒤에 몽골의 지배로 바뀌어 차가타이 한과 티무르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부터 남하하는 우즈베크인의 셰이바니왕조 치하에 들어갔다가 코칸트와 부하라의 양 한국에 귀속되었다. 1865년 러시아군이 점령하여 1867년부터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진은 타쉬켄트 한 호텔에서 바라본 시내의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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