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나라/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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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23. 7. 11. 04:42

1. 개요2. 역사

2.1 전기의 군제(부병제)2.2. 임시방편적 군제개편: 확기(彍騎)2.3. 군제변화 I: 단련, 단결병의 등장2.4. 군제변화 II: 군진제(軍鎭制)2.5. 군제변화 III: 장정건아제

3. 당 전기

3.1. 당 전기의 군사 체계
3.1.1. 군정 체계
3.1.1.1부병제3.1.1.2. 병모3.1.1.3. 기미지배체제3.1.1.4. 남아금군(南衙禁軍)3.1.1.5. 북아금군(北衙禁軍)
3.1.2. 군령 체계
3.2. 당 전기 군제의 붕괴
3.2.1. 당 전기 군제의 장점과 한계
3.2.1.1. 장점3.2.1.2. 한계
3.2.2. 기미지배체제의 약화

4. 당 중기(과도기)

4.1. 기미지배체제의 변화4.2. 확기(彍騎)

5. 당 중후기

5.1. 단련병(團練兵)5.2. 관건병(官健兵) : 직업적 정규군
5.2.1. 장정건아제(長征健兒制)5.2.2. 특징

6. 당군의 전술체계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당나라의 군대. 당나라는 통일 중화제국으로서 290여 년을 이어내려 왔다. 중국 통일 왕조로써는 상당히 기나긴 시간 동안 당은 세계 제국으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던 때도 있었고 심각한 내정 혼란 속에서 그 위상이 추락했던 적도 있었다.

2. 역사[편집]

<신당서> 병지에는 당의 군제 변천 과정을 기술하였는데, 이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당나라가 건국되었을 땐 부병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병제가 망해서 일단 확기라는 걸 땜빵으로 세웠습니다.'
'땜빵이던 확기도 망해버리자 절도사를 세웠습니다.'
'절도사가 날뛰어서 당나라가 망했습니다.'
중국의 군사제도의 변천사는 군령권(군사 훈련 및 작전 지휘권)과 군정권(군사 징집 및 군사 행정권), 그리고 지방 행정을 나누고 합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시대에 맞게 합치고 나누는 것이 군제개혁이며, 군사제도 변천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에 중국의 군제는 이러한 권한들을 결합, 하나의 관직명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동진시대 인물인 환온(桓溫)은 345년 형주로 부임하면서 '안서장군 지절 도독형사옹익양녕육주제군사 영호남만교위 형주자사'라는 관직을 받았는데, 이 관직명을 기능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
  • 안서장군(安西將軍)
  • 지절(持節)
    • 군령권. 전시에 이천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수 있다.
  • 도독형사옹익양녕육주제군사(都督荊·司·雍·益·梁·寧六州諸軍事)
  • 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
    • 외교권. 남방 이민족 관리.
  • 형주자사(荊州刺史)
    • 행정권. 재정의 취렴과 사용 및 행정, 사법, 감찰권.
즉 여러 권한을 필요한 만큼 결합한 것이며, 지방관이 행정권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군권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체계로 요약할 수 있다.

삼국지로 대표되는 후한 말 군웅들은 이처럼 긴밀하게 결합된 권한을 토대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을 구축하였고, 중간에 삼국시대를 마무리지은 사마염은 군사권과 행정권을 다시 분리하는 대신 이를 종실왕들의 군권으로 보완하려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말아먹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군제를 공부할 때 보통 나오는 '지방관이 군사 권한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병호제(병역 담당 호수 별도관리)와 이것이 발전된 세병제(병역의 세습)의 등장, 그리고 세력 난립을 막기 위한 지방관의 권한 축소와 군대의 확대를 추구하면서 변화한다. 그 결과물이 부병제이다.

2.1.  전기의 군제(부병제)[편집]

당나라는 수나라의 군제를 그대로 계승한다. 즉, 각지의 절충부, 절충도위가 경사(장안낙양태원 등 수도권) 숙위, 대외적 군사 활동(정행-征行), 변방 진수 지역 방위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관리하고(군정), '행군체계', 즉 중앙에서 파견한 관인이 행군총관-행군대총관직을 맡아 대규모 원정 시 군의 지휘통제를 맡는(군령) 것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전쟁이 터지면 중앙관이 내려가, 각지의 절충부에서 마련한 군대를 인수해 행군을 지휘하고, 전쟁이 끝나면 행군 해산하고 병력은 원래 있던 곳으로, 지휘관은 다시 중앙에 올라오는 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제승방략과도 유사하다.

이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 군정: 위(衛) 휘하 600여 개의 절충부에서 관할. 세부적인 숫자는 서적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른데 이는 절충부가 소멸했다가 재창설되었다가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당육전' 에 따르면 594개. 다시 규모에 따라서 상부(1천 2백 명), 중부(1천 명), 하부(8백 명)으로 나누어진다.[1] 이는 다시 대략 50개씩 나뉘어 중앙의 12위에 소속되어 있고, 공식적으로는 속해있는 위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다.(좌우위 소속은 효기, 좌우효위 소속은 표기, 좌우무위 소속은 웅거, 좌우위위 소속은 우림, 좌우영군위 소속은 사성, 좌우금오위 소속은 차비, 좌우위솔부 소속은 초승, 좌우사어솔부 소속은 여분, 좌우청도솔부 소속은 직탕) 그러나 대부분이 관내, 하남, 하동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다보니 그냥 관용적으로 '위사' 라 불린다. 소속 병사들은 자비로 무장해야만 했으며, 규모에 따라 진과 수(진이 300~500, 수가 30~50명이 주둔)에 주둔하는 부대가 변경을 방어했다.
이러한 절충위는 장안 중심의 경조부를 포함하는 관내도, 낙양 중심의 하남부를 포함하는 하남도, 태원을 포함하는 하동도에 절충부를 집중적으로 배치(80%, 이 중 관내도에 44%, 그 안에서도 경조부에 20%에 달하는 131개 배치)되어 있었다.
  • 군령: 상황에 따라 행군을 창설하고 중앙에서 지휘관(행군총관) 파견. 또한 전시에는 임시로 숫자를 불리기 위해 '병모'라 불리는 임시징집병들을 모집, 관리한다. 정관시기 중반부터 '도독'이라는 직책이 새로이 등장하는데, 이는 평시에 각 도의 주자사 및 군대를 감독하다가 전시에는 곧바로 이들로 행군을 편성하고 총관으로서 군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대총관/부총관/총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도독직의 등장은 군정과 군령의 분리라는 정책을 펴긴 했지만 어쨌든 현지상황에 밝은 현장지휘관들이 전시에 곧바로 지휘관으로 투입될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당전쟁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도독부'와 '도호부'도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수의 군제개혁을 그대로 내려받았기에 지방관은 군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따라서 대총관/부총관/총관에 행정관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다. 단, 평시의 직책인 대도독/도독의 경우 도독부, 도호부 등 기미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군권을 가짐과 동시에 일정부분 지방행정제도로써 기능하기도 했다.

부병제는 당태종~당고종 시기의 번영, 즉 정관의 치 시기에 당의 군사적 성공을 견인하면서 효과적인 제도였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부병제는 당나라 초기 이후 붕괴한다.

2.2. 임시방편적 군제개편: 확기(彍騎)[편집]

<신당서> 병지의 초두에는 부병제(府兵制)와 군진(軍鎭) 사이에 '확기(彍騎)' 라는 제도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신, 구당서 및 <당육전> 등에 따르면 이것은 개원연간에 창설된 군제로, 행군체제에서 군진체제로의 변환기에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확기는 당현종 시기 재상 중 한명이자 당시 병부상서를 겸하고 있었던 장열의 제안에 따라 개원 11년, 위사들 대신 절충부에서 새로이 편성한 병종이다. 기존의 부병제가 원칙적으로는 부유농가 및 정남이 많은 집에 우선 징병하도록 되어 있었다면 확기는 각 호수를 9등급으로 나누어 맨 아랫 등급에서 징병을 못하면 그 윗 등급에서 강제적으로 징병하여 규모를 채우는 병과였다. 총 규모는 12만. 운영 자체는 기존의 위사제와 거의 똑같이 돌아가서 한 번에 1개월씩, 1년에 두 번 의무 복무를 하였다. 또한 징병 범위는 장안과 냑양을 잇는 협향(狹鄕)[2]만이 범위에 속했다.

그러나 기존의 부병제가 한계를 보이고, 그로인해 경향을 방위하는 위사들 또한 그 세가 미약해졌는데 고작해야 징병 체계가 변한 확기가 제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장열은 이를 알고 있었으며 그때문에 처음 이 제도를 제안할때 모병제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시 논란 중에 결국 좀 더 체계적인 징병제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고작 2년 만에 확기는 황제의 친위대인 금군(禁軍)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며 사실상 유명무실해진다.

2.3. 군제변화 I: 단련, 단결병의 등장[편집]

기존의 부병제가 무너져가고, 그에 따라 변경 방위력이 떨어져가던 당고종 말엽~측천무후 집권기에 당이 이에 대처할 생각을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투쟁은 제도개선을 할 엄두를 못내게 만들었다. 임시방편으로 현지징집병인 '병모(兵募)'를 상설화하여 지방 방위에 힘을 보탰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이에 대응한 당의 방식은 어찌보면 매우 독특했다. 자경대 양성을 지원하는 것이다. 단련병(團練兵), 또는 단결병(團結兵)으로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

단결병의 시작은 측천무후 집권기에 산동, 하남, 하북에서 150호마다 병사 15명, 말 1필을 징병해 자경대를 구축하고 해당 지역을 방위하는 '무기단'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의 임무는 도적떼를 구축하고 번진의 예비대로써 기능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얼마 안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의 지방 치안과 유사시 예비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단련병을 통솔하는 관리로 단련사가 등장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무관이었으나, 현종 때가 되면 지방관인 주자사가 단련사를 겸임하여 민정권과 함께 지방의 군권을 겸임하게 된다. 즉 군권과 지방행정이 다시 결합하기 시작한 것.

2.4. 군제변화 II: 군진제(軍鎭制)[편집]

진수제는 본래 그것만으로 주변 세력들이 민족적 결집을 통해 당을 공격하는 것에 대응할 수 있는 방위체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전기에 이것을 해낸 것은 어디까지나 기미지배체제를 구축하여 다수의 부용 세력들을 당 자신의 방위에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미지배체제가 붕괴한 당고종 후기~측천무후 시기 당은 새로운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이에 대응해야만 했다. 그것이 군진제이다. 이 군진제 하의 병사들은 변방 요충지의 규모에 따라 군(軍), 수착(守捉), 성(城), 진(鎮)으로 구분되는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정규병사로써 건아를 배치했다. 여기에 기존의 징집병인 병모, 그리고 '방정' 이라 불리는 새로운 병종을 추가하여 군진병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부병과 비슷한 징병제를 채택하였으나 절충부가 존재하는 주(군부주)에서만 징병이 이루어진 부병제와는 달리 절충부가 없는 주(비군부주)에서도 징병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제하는 것은 각 주의 지방행정관이었다. 결국 이 또한 단련병과 같이 군정과 지방행정이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5. 군제변화 III: 장정건아제[편집]

당현종시기 전반기인 개원의 치 기간동안 당의 변방 방위를 담당하는 군진은 건아, 병모, 방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군은 확기와 금군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그래도 모두 징병제를 채용하고 있었기에, 부병제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 부병제의 근간을 이루는 균전제를 무너뜨린 요인인 심각한 계층분화가 다시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즉 병역이 하층 소농민에게로 전가되는 상황이 강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부병제, 확기가 그랬던 것처럼 군진제 또한 시작부터 상당히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거기다 기미정책이 파탄나면서 당은 더 많은 군사력을 확보해야만 했고, 그것을 근무연한의 연장으로 대처하면서 군을 이탈하는 것, 즉 배군 현상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당은 이에 대해 엄벌을 가하는 것으로 막아보려 했으나(하루당 장형 80대, 최고형은 유형 3000리였다.) 그걸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부족한 병사들의 수는 모병제를 통해 채워야 했으며, 모병제가 당의 군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개원 연간을 거처 계속 증가해 간다. 이에 당현종은 현실을 인정하고 개원 25년, 모병제의 일종인 장정건아제(莊丁健兒制)[3]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때의 조칙에 따르면 장정건아제(莊丁健兒制)는 현재 군진에 복무하고 있는 병마와 객호(호적을 벗어나 변방에 도주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 손님 객 자를 써서 객호이다.)로부터 우선적으로 모병을 실시하며, 징병제 시절처럼 모병에 응한 장정들에게는 조용조를 면제하고, 급여로 옷감을 지급하며, 군진 근처에 경지와 가옥을 지급하고 가족을 형성하는 것까지 모두 허가하였다. 경지를 지급한 이유는 말 그대로 그 자리 벗어나지 말라고 한 것. 당현종은 이를 통해 전체 인구의 1/4나 되었다는 도호들을 다시 당의 통치체제 하에 편입시키는 것과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 즉 두마리 토끼를 노리는 정책이었다 할 수 있다. 한편 군진에 속하지 않는 중앙군이나 척박한 지역에 주둔해야 하는 병력은 토지를 지급할 수 없었으므로 급여에 의존했으며 동시에 세금과 노역이 면제였다. 게다가 급여뿐만 아니라 장비도 국가에서 지급했기 때문에 이들을 관건(官健)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이들중에 토번을 방어하기 위해서 특별히 차출한 존재들을 방추병(防秋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정건아제는 당현종의 계획대로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두가지 화근을 만들게 된다. 즉, 단련병과 군진체제가 구축되면서 지방행정과 군정의 재결합이 더더욱 심화된 것(징병제에 비해 모병제는 사병화의 가능성이 더 크다.)과 이를 위해 당은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군사비를 지출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금과 비단을 분토처럼 여긴' 당현종 치세때는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비용이었으나, 당의 국력이 쇠한다면 자국을 지키기 위한 군사비에 오히려 자신이 짓눌려 버린다. 그래도 안록산의 난이나 황소의 난 당시 반란군에게 그렇게 피해를 보면서도 결국 진압에 성공한 건 돈으로 모은 지원병들 덕분이기는 했다.

이때 시점에서 중앙군은 장종숙위(長從宿衛)가 부(府)의 병사들을 대체해갔다.

3. 당 전기[편집]


7세기 고분 벽화

당 왕조의 전반기의 군사제도로는 부병제와 기미주, 병모가 존재한다.

3.1. 당 전기의 군사 체계[편집]

당 왕조의 군부는 병부에서 총괄하며, 그 아래에는 크게 둘로 나눠져 있다. 북아금군과 남아금군이 그것. 평시에는 이원적, 전시에는 일원적 구조로 운용되었다. 남아금군은 부병제를 관리하고 북아금군은 황실의 친위대과 기미주 병력들을 관리하였다.

3.1.1. 군정 체계[편집]

3.1.1.1. 부병제[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병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당은 부병제로 90여 개 주에 흩어져 있는 절충부(折衝府)에서 부병들을 관리하였다. 절충부는 지금의 병무청+훈련소+보충대+예비군의 국민개병제 및 징병제의 성격을 띤 병부(兵府)로써 각각의 절충부는 규모에 따라 상부(1,200여 명), 중부(1,000여 명), 하부(800여 명)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측천무후 시기에는 임시로 통폐합되어 1부에 1,500명이었다. 절충부의 개수는 대략 570~630여 개 사이었다. 일단 <통전>에 따르면 574부, <신당서> 병지에 따르면 634부, 마찬가지로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566부, <당육전> 에 따르면 594부이므로 대략 600개 정도가 존재했다.

이러한 절충부는 중앙의 금군인 위(衛)의 관리를 받았는데, 최초에는 16개의 위가 있었고, 좌·우위, 좌·우효위, 좌·우무위, 좌·우위위, 좌·우영군위, 좌·우금오위, 좌·우감문위, 좌·우천우위로 구성되었다. 후에 황제 직속인 12개 위와 태자를 경호하는 6개 솔부로 개편되고, 소속에 따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 이를 소속(명칭)으로 명기하면 다음과 같다. 좌·우위(효기), 좌·우효위(표기), 좌·우무위(웅거), 좌·우위위(우림), 좌·우영군위(사성), 좌·우금오위(차비), 좌·우위솔부(초승), 좌·우사어솔부(여분), 좌·우청도솔부(직탕). 이렇게 만들어진 12위는 각각 50~60개 정도의 절충부를, 6솔부는 3~5개 절충부를 관리했다. 이 모두를 총괄하는 '총위'는 가장 서열이 높은 좌·우위였다. 이 상위의 군지휘부인 위(衛)와 하위의 징병소인 절충부(府)가 합쳐져 부병제를 구성했다.

각각의 부병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무장은 자기가 갖추어야 했고, 매년 1~2개월에 걸처 3경(장안낙양태원)으로 상번해 경비임무를 맡아야 했으며 1차레 3년에 걸처 변경 방위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근무지를 이탈할 경우 변경방위라면 도망 하루에 장형 80대, 도망일수가 3일이 넘어갈 때마다 1등급씩 무거운 처벌을 가하고 수도 경비라면 하루에 장형 100대, 2일이 넘어갈 때마다 처벌이 1등급씩 무거워지게끔 하였다. 또한 자해를 통해 병역이탈을 기도한 것이 밝혀지면 장형 40대 후 법에 따라 추가처벌하도록 하였다. 대신 국가는 병역에 대한 보상으로 17결에 달하는 토지를 지급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당의 토지 측량 단위로 따진다면 총 100무(구분전 80무, 영업전 20무)에 달하며 세금, 즉 조용조에 대해서 면세 혜택을 누렸다.

절충부는 장안 중심의 경조부를 포함하는 관내도, 낙양 중심의 하남부를 포함하는 하남도, 태원을 포함하는 하동도에 절충부를 집중적으로 배치(80%, 이 중 관내도에 44%(288개), 그 안에서도 경조부에 20%에 달하는 131개 배치, 하동도에도 164개, 나머지는 하남도에 존재)되어 있었고, 대략 90여 개 주에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병의 최초 구성원은 태원에서의 거병시 동참했던 병사와 중국 통일 과정에서 편입된 병사들이었고, 통일 이후 부유한 정남들을 편입시켜 그 숫자를 확충하였다.

3.1.1.2. 병모[편집]

병모(兵募)는 주병(州兵), 모인(募人)이라고도 칭하는 병과로, 임시모행자(臨時募行者), 즉 전시체제시에 임시로 모집한 병사들을 뜻한다. 이들은 숫자가 한정될 수밖에는 없는 부병들을 지원하는 보조전력으로 동원된 병사들이었다.

병모의 가장 큰 특징은 모집 지역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부병제는 300여 개 주 가운데 절충부가 존재하는 90여 개 주에서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병모는 해당 전역이 펼처지는 곳 주변에서 주로 병력을 모집하곤 했지만 일단은 전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는 군부주, 즉 절충부가 존재하는 주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또한 다른 특징은 병력 징발 과정을 주, 현의 행정계통을 거처 리, 즉 마을의 촌장인 리정(里正)이 맡고, 현의 주관관원이 관할한다는 데 있다. 즉 지방관이 군사 업무에 관여하는 몇 안 되는 부분인 셈. 중앙에서 내려진 징병령을 지방 행정체계를 통해 수행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이때 가산이 넉넉하고 정남이 많은 집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징집하도록 되어 있고, 명령 하에 담당 겸직 문무관, 임기가 끝난 관원(직사관), 훈관이 말단 장교로써 이를 지휘한다. 물론 군령권은 행군체제 하에 존재하며 이 부분에서는 지방관의 개입이 배제되어 있다.

병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본래는 모병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추후 징병제로 변화하였으나 여전히 모병제의 특성이 일부 남아있으며, 빈천한 자들의 주요 출세 코스로 여겨지곤 했다. 즉 강제로 징집된 자들 외에 자원한 자들도 다수 존재하는 것. 당은 부병과 병모가 섞이지 않도록 군영을 따로 설치했으며, 자원 입대자와 강제 징집자도 별도로 대오를 편성하고 군영도 별도로 두도록 하였다. 또한 그 내부적으로는 다시 주별로 나누어 부대를 구성해 전투에 임했다.

병모는 숫자가 많긴 했지만 전투력이 부병보다 낮았기에 보조 전력에 불과했고, 임시로 편성했다가 전역이 종결되면 바로 해산되는 병과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주 교대해야만 하는 부병과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복무를 강요할 수 있었기에 차츰 상설화되고, 규모도 확대되어 갔다. 실제로 1~3년마다 교체해야 하는 부병에 비해 병모는 최대 5년까지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부병제와 기미지배가 무너지면서 병모의 규모는 더더욱 확대되어 갔고, 변방지역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3.1.1.3. 기미지배체제[편집]

당의 기미지배체제의 기초가 된 것은 당의 군사적 성공이라 할 수 있다. 한때 당 왕조 자신이 조공을 바치기까지 하던 동돌궐을 630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부터 시작된 당의 대외 정복활동은, 634년 토욕혼(吐谷渾)의 제압, 640년 고창국(高昌國)정복, 646년 설연타(薛延陀) 제압, 657년 서돌궐(西突厥) 정복,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百濟) 멸망, 668년 고구려(高句麗)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당은 이를 통해 동아시아 일대에 당의 강대한 힘을 널리 인식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이전시대의 대이민족 정책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통제정책을 시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당태종의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 문제도 결부되어 있다. 현무문의 변으로 대표되는 당태종의 즉위과정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는 당대 및 후대에도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당태종에게 컴플렉스가 되었고 이는 당고종 항목에서도 보듯 그의 후계자 선정 문제에까지 영향을 끼첬다. 즉 자치를 인정하고 '너그러운 인화'의 모양새를 취한 당태종 정책의 근간에는 이런 컴플렉스가 존재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미정책을 실행하여 그것을 '황제의 덕이 사해(四海)에 미친 결과'로 보여지게 해 스스로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구비하였다 주장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러한 당태종의 기미정책은 이후로도 이어졌고, 이것은 당의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기미지배의 본격적인 시작은 동돌궐의 붕괴 이후 당에 귀부한 돌궐항호(突厥降戶)의 처리 문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동북방 일대에서 그 전에 이미 기미주가 설치(거란기미주(契丹羈縻州), 619년)되어 기미지배의 시작을 알렸지만,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기미주의 설치가 시작된 것은 역시 돌궐 붕괴 후의 일이었다. 이때 돌궐항호를 어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두가지 방안이 이야기되었다. 하나는 이들을 아예 강남으로 사민시켜 농사를 짓고 풍속을 바꾸자는 것, 즉 '교화' 시키자는 의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그들의 풍속에 맞게 살게 하되 여러 부족들을 독립시키고, 각각의 군장들로 하여금 당과 종속관계를 갖추도록 한 후 이를 조절하여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다시 합치지 못하게 하자는 것, 즉 '기미지배' 하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태종은 처음에는 절충적 입장을 취해, 돌궐항호들을 하남에 집단이주시키고 새로운 6개 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내지로 이주하지 않겠다는 돌궐항호들에게는 동북방에서 했던 것처럼 기미부주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639년 이들 돌궐항호들에 의한 당태종 암살 미수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내지로의 이주와 동화는 불가능하다 판단, 이민족들은 그들의 본국 및 하북 일대로 옮기고 기미부주를 설치해 관리하도록 하였다. 즉 '내지 이주와 동화+기미부주 → 기미부주' 로 정책이 선회한 것이다.

기미주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궁극적으로 마땅히 하북에 거주시키고 추수(酋首, 우두머리)를 분치(分置, 나누어 둠)하여 부락을 통령(統領, 다스리다)케 해야 합니다. 절급(節級, 벼슬)의 고하와 지계(地界, 토지의 경계)의 다소(에 맞추어) 적절히 결정하도록 삼가 아룁니다.

돌궐이 비록 일국(一國)이라고는 하나 그 종류는 구분이 되고 각기 추수(酋帥, 추장)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그 이산된 처지를 이용하여 즉시 각각 본래의 부락에 군장을 임명하여 서로 신속치 못하도록 하고, 설령 아사나씨(阿史那氏, 당시 돌궐 가한 가문)를 존립시키려 해도 오로지 그 본족만을 남겨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나누어지면 약해지고 제어하기도 수월해지며 세력이 견줄 만하게 되면 서로 탄멸(呑滅, 서로 삼키어 멸망시킴)하기도 어려워져서 각자 온전히 지키게 되니, 필시 중국에 대항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 또한 정향성(定襄城)가운데 도독부를 두어 절도(節度, 지휘하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출처: <당회요(唐會要)>
이는 로마 제국의 금언인 '분리하여 지배하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즉, 기본적으로 기미지배는 부족 단위로 나누어 쪼개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를 통해 이민족 세력을 약화시켜 대외 위협을 감소시키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기미부주들은 당의 군사적 역량을 보강해 주었다. 당의 부족한 군사력을 이들 기미부주에서 자치를 행하던 유력자들이 자신의 부족군을 이끌고 동참하는 것으로 메꾼 것.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군의 유력한 장수로 활동한 글필하력아사나사이나당전쟁에서 당측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한 이근행은 모두 이런 기미부주의 주요 군장들이었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는 당 조정에 숙위하였고, 이는 기미부주 내부의 유력자들에 대한 인질적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인질이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들 개인도 유능한 지휘관들이었고, 당 황실 또한 이들을 신뢰하였기에 황궁의 경비를 맡기기도 했다.

당 왕조는 엄청난 숫자의 기미부주를 설치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당 고조 무덕 원년 이래로, 선종 대중연간까지 240년 내, 모두 기미부주 설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당현종 치세에 직접통치가 이루어지는 지역의 주의 개수는 315개, 그런데 기미부주는 856개에 달한다. 이러한 기미부주의 위치는,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관내, 하북, 농우, 검남, 강남과 영남 등 6도에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거중어경의 원칙이 적용되어 관내도에 설치된 기미부주는 총 119개(47개-영주도독부, 15개-하주도독부, 26개-경주도독부, 1개-연주도독부 15개-선우도독부, 15개-안북도호부)에 달했고, 이 안에는 철륵, 회흘, 설연타, 당항, 토욕혼, 돌궐 등이 속해 있었다.

당은 이들 기미부주와 그 일대의 여러 변방지역 주의 군정을 담당하는 도독부를 두었으며, 도독부의 상급기관으로 6개의 도호부(안동도호부안북도호부선우도호부안서도호부북정도호부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당은 가능하면 도독부까지는 현지의 유력자, 귀족, 왕족 등을 임명했지만(나당전쟁 기간 중 보장왕이 안동도독부 조선왕으로 임명돼 내려온 것이 대표적) 도호부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관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미부주들은 자치가 허용되었고, 당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자가 아닌 간접적인 보호국으로 존재하였다. 실제로 당은 본주, 즉 본국의 부, 주, 현 구조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영역만을 자신의 직속 영토로 인지하고 기미부주 지역에 대해서는 본국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직할 영토로 인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 지도를 보면 당의 영역이 매우 크고 아름다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미부주와 도호부 영역에 이르기까지 당의 영역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덤으로, 당의 기미지배체제는 이전시대의 그것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닌다.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인위적이었던 것. 물론 기미(羈縻)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한대였으나, 이때의 뜻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견제하면서 관계를 단절하지 않되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 시기의 대외인식이 철저한 중화와 이적에 대한 구별, 그리고 이적에 대해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언제 뒤통수를 치려 들지 모른다는 것이 한나라 시기의 이민족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는 흉노라는 강력하고 또한 자주 약속을 무시하는 통일 유목왕조를 끼고 지내야 했던 한나라의 대외 환경에서 나온 인식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시기의 '기미'는 때로는 아예 관심을 끊어버리고 국경을 봉쇄하자는 뜻으로 사용되기까지도 하였다.

반면 당나라의 기미(羈縻)는 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개입, 이민족도 또한 황제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기본적으로 군사적 역량을 과시하여 이민족들을 당에게로 복속시키고, 그렇게 복속된 이민족들의 상호 연계 고리를 인위적으로 끊어버린 후 각각의 토착수령들에게 당의 지방통치체제 하에서의 관직명을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이는 당나라가 한나라와는 달리 유목민족에 대해 강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서 기인하며, 또한 호한융합적 사회문화구조하의 왕조이기에 이민족에 대한 편견이 적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당은 각각의 기미부주들을 하나하나 독립적 정치조직체로 인식하였기에 아예 자국 내에 편입시켜 버린 것과는 차이가 있다. [4]

3.1.1.4. 남아금군(南衙禁軍)[편집]

남아금군(南衙禁軍)은 당의 정규 군사제도인 16위를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상번한 부병들로 편성되어 장안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은 군부였다. 16위와 그 소속 절충부, 상번한, 또는 국경 방위를 서는 부병들에 대한 관리 사무는 남아금군, 즉 16위에 맡겨져 있었다. 16위의 각 위를 지휘 통솔하는 총지휘관은 1명의 대장군(이후 상급직위로 상장군을 추가), 부지휘관은 2명의 장군이다.

절충부(折衝府)는 약 600여 개 정도 존재했다. 그 책임자는 절충도위였으며, 부사령관으로 좌·우과위도위가 존재했고 장사와 병조, 별장 등의 참모 및 행정직이 이들 지부를 보좌했다. 세부적으로는 교위가 지휘하는 200명, 또는 300명 단위의 단(團), 100명 단위로 여수가 지휘하는 여(旅), 50명 규모로 대정이 지휘하는 대(隊), 최소단위인, 10명으로 편성되고 화장이 지휘하는 화(火)가 존재했다. 절충부 하나의 지휘부의 인원을 보면 1,000명 규모인 중부를 기준으로 절충도위 1명, 과위도위 2명, 장사(長史)·병조(兵曹)·별장(別將) 각 1명, 교위 5명, 여수 10명, 대정 20명, 화장 1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절충부는 수도 인근에 집중 배치되어 군부의 수도권 집중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거중어경(居重御輕, 중앙을 강하게, 지방을 약하게)의 원칙이 존재했다고 이야기된다. 즉 중앙정부가 지방을 압도해야만이 지방 세력의 할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수도 근방으로 군부를 집중시켰다는 것. 실제로 측천무후는 측천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지방에서 발생한 두 번의 대규모 반란을 중앙군을 동원해 쉽사리 진압할 수 있었다.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된 부병들은 자신의 무장과 식량을 자비로 마련해야만 했다. 개인이 구비해야 하는 장비로는 활 1개, 화살 30발, 횡도(橫刀), 호록(胡祿, 활통), 여석(礪石, 숫돌)가 있었고, 그외에 맥반(麥飯) 9두(斗), 미(米) 2두와 같은 식량을 자비로 확보해야만 했다. 또한 최소 단위인 화(火)에서 공동으로 갖추어야 하는 장비도 존재했는데, 오포막(烏布幕, 군용 천막), 철마우(鐵馬盂, 말 여물통), 포조(布槽, 구유통), 삽, 곽, 착(鑿), 대, 광(筐), 겸(鉗), 거(鋸) 등 당나라 시대의 각종 공구류를 각 1개, 갑상(甲狀, 갑옷), 겸(鎌, 낫)을 각 2개, 짐말을 6필 정도 갖추어야 했다. 50명을 단위로 한 대(隊)에서는 화찬(火鑽, 발화기), 흉마승(兇馬繩) 각 1개, 수기(首羈), 족반(足絆) 각 3개를 갖추어 짐말로 수송하였다. 부유하고 신체가 건강하며 기사에 능하다면 월기(越騎), 즉 기병으로 편성되었고 나머지는 상황에 맞게 보병으로 군역에 종사하였다.

절충부(折衝府)의 관리를 받는 부병들은 20세에서 60세까지 조를 짜서 매년 돌아가며 수도로 상경해 경비와 훈련을 수행해야 했고(<군방령>에 따르면 '500리 안에서는 5번(番)으로 나누고 5백리 밖에서는 7번(番)으로 나누어서 각각 1개월씩 올라온다.'고 한다.) 이때 상경한 자들을 위사(衛士)라고 불렀다. 또한 3년 동안 국경에서 경비를 서야 했는데, 이들을 방인(防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변경 방비는 적절히 1년 단위로 나누어 복무하도록 했다. 즉 1년씩 3회라 보면 된다. 방인의 생계는 같은 절충부 내의 다른 부병들 2인이 1명의 방인을 먹여살리는 것으로 유지하였다. 국경지대의 방어기지는 진(鎭)과 수(戍)에서 담당했는데, 규모에 따라서 상, 중, 하로 나뉘어 진의 경우 상진은 5백 명, 중진은 3백 명, 하진은 3백 명 이하의 규모로, 수는 진에 비하여 약 1/10 정도의 규모로 알려져 있다. 당태종 시기에 이러한 진과 수착은 약 천여 개(10만여 명 주둔)가 존재했다고 하나, 당현종 시기가 되면 변방에 상진 20개소, 중진 90개소, 하진 135개소, 상수 11개소, 중수 86개소, 하수 235개소가 존재하면서 당태종 시기의 약 절반 정도(6만여 명 주둔)로 감소한다. 이들을 연결하는 봉화대를 설치한 후 각 개소당 봉수 1인과 봉부 1인을 배치하였다. 진과 수의 책임자는 진장(鎭長)과 수주(戍主)로 불렸다.

당은 국경 방위에 약 60,000~100,000여명, 수도인 장안, 낙양, 태원에 교대로 번상하는 인원을 약 100,000명정도 고정적으로 배치하였다 따라서 부병 중 유사시의 가용 전력은 많아야 300,000명이었고,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도 함부로 동원할 수 없었다. 이런 부족한 인력을 보조하는 것이 병모(兵募)였다. 지방관에 의해 징집되고 임시 장교들(직사관, 훈관)에 의해 지휘되며 별도의 대오와 군영을 짜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이 병모는 초기에는 임시보조전력이었지만 전쟁이 대규모화, 장기화되면서 상설부대로 여겨지게 된다.

3.1.1.5. 북아금군(北衙禁軍)[편집]

북아금군(北衙禁軍)은 황실의 직접적인 경호를 맡는 친위대이다. 당 전기에는 '좌·우우림군(左·右羽林軍)', '좌·우용무군(左·右龍武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관은 역시 대장군과 장군이다. 당현종이 위황후태평공주에 대항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좌·우용무군의 전신인 만기(萬騎)였고, 태평공주는 우림군을 장악하여 이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신당서 등에는 남아금군은 그냥 정규군으로 치부하고 북아금군만을 금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아금군(北衙禁軍)은 단순한 친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장안에 숙위하러 올라온 여러 이민족 군장들(번장)과 그들을 따라 온 전사집단, 각지의 기미주들은 남아금군에 포함시키기엔 상당히 난감했고, 이들을 당의 정규군인 남아금군에 섞었다가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기미지배체제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당 왕조는 이들 번장들을 북아금군에 포함시켰고 지휘관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용병들로 구성된 바랑인 근위대에게 맡긴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북아금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북아금군은 당 건국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3만여 명 정도 뽑아 현무문 밖에서 교대로 황궁 숙위를 맡긴 데서 시작했다. 이들은 원종금군(元從禁軍), 또는 북문둔영이라고 불렸고, 토지를 지급받으며 자식들에게로 직임이 계승되는 등 부병제와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지만 제도가 완비되지 못했기에 당태종이 일으킨 현무문의 변을 막지 못했다.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과 직후 돌궐이 장안 근교까지 침입한 사건을 통해 금군의 개편, 강화가 필요하다 여기고, 북아 7영으로 금군을 개편하였다가 정관 12년에 좌우영으로 정리한다. 이들은 당고종 시기에 좌·우우림군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측천무후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우림군(羽林軍)에 다시 부병을 포함시켜 규모를 늘리고 남아금군과 동일한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당태종은 또한 북아 좌우영 내에 비기(飛騎)를 설치하고, 여기서 다시 정예병력을 뽑아내 백기(百騎)를 편성했다. 비기와 백기는 기병 중심의 군영이었고 이민족 군장들은 대부분 이쪽에 포함되었던데다 모병제적 성격을 가진 이질적인 부대였다. 이후 무측천 시기에 백기가 증강되어 천기(千騎)로 명칭을 바꾸었고, 당중종시기에 다시 증강, 좌우영으로 분리되고 우림군과 비슷한 구조를 갖추어 좌·우만기(萬騎)이 되었다. 당현종은 이 만기영을 장악하고 위황후를 제거했으며, 좌·우우림군을 장악한 태평공주 또한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좌·우용무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북문사군으로 완성되었다. 당 초기의 북아금군은 이렇게 두 부대 4영(좌·우우림군, 좌·우용무군)으로 완성되었으며, 당현종 중엽에 확기가 창설, 우림군에 흡수된 것 외에는 안사의 난 기간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북아금군의 군정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당장 그 형성 과정에서 보듯 좌·우우림군은 부병제와 동일한 군정 체계를 갖추고 있다. 즉 병농일치 이념 하에서 균전제 체제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 것. 반면 좌·우용무군은 모병제+이민족 군장들의 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시에는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족병들을 동원, 이들을 지휘하여 당군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동원한 이민족 병력들은 전투력 측면에서 부병과 동급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강군으로 당에 의해 중시되었다. 북아금군의 최고 지휘권은 좌·우우림군의 최고사령관(대장군)에게 맡겨져 있었다. 좌·우용무군은 독립적인 부대였지만 종종 우림군에 포함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실제로 지휘권의 상당부분은 우림군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대의 규모에 대해서, <당육전>에 따르면 우림 금병이 갖추어야 하는 기치, 인원의 명칭과 수는 비밀이어서 알아서는 안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추정되기로는 당현종 즉위때 우림군의 규모는 1만 5천여, 용무군도 비슷한 규모로 편성되어 대략 3만 정도의 금군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비기가 우림군에 포함된 후인 천보 연간에는 약 5만 정도의 금군이 안사의 난 이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사의 난 이후에는 뒤집혀 버리지만.

3.1.2. 군령 체계[편집]

유사시가 되면 당은 수와 마찬가지로 '행군'을 조직하여 행군총관에게 지휘를 맡겼다. 다만 수는 행군을 총괄하는 상급 사령관으로 '행군원수' 를 두었지만 당은 '도행군'을 두고 '대총관'과 '부대총관' 의 지휘를 받았다는 명칭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당의 군령 체제에서 가장 큰 특징은 '총관' 이 복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즉, 당은 '행군' 을 담당하는 '총관' 밑에 기병과 보병을 담당하는, 직급이 낮은 '자총관' 들을 따로 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은 좀 더 유연한 병력 운용이 가능하였다.

<당육전>에 따르면 자총관은 1천 명, 총관은 5천 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평균적으로 1개 행군은 5천 명 내외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상, 이하로 볼 만한 사료도 존재한다.
황제(당태종)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만여인을 동원하여 보내 누선을 타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천 인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와 전함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간단히 찾아볼 수 있는 삼국사기를 봐도, 행군총관도 아니고 그 상급조직인 행군대총관이 1만, 3천 + a 정도의 병력으로 편성되기도 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지휘하기도 한다. 거기다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 당시에는 요동도행군은 6만에 달했다.

즉, 당나라는 1개 행군의 규모를 딱 정해놓지 않고,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편제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당이 기본 편제 단위로 삼은 것은 50명 단위인 '대(隊)'였고, 절충부 내에서 '대' 위의 상급 지휘부는 전시에는 상황에 맞게 적절히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대 위에는 5백명마다 압관 1명을 두었고, 1천 명 단위에는 자총관을 충임하였으며 5천명 단위에는 (행군)총관 1인을 두었다. 5천명 이상 1만명 미만의 부대라면 창조참군·병조참군을 각각 1명씩 두었는데, 창조참군은 군량, 공문서, 의식과 창고를 관할했고 병조참군은 병기류를 담당하고 변방 진지에서 주둔시 군 시설 또한 관장하였다. 병력이 1만이 넘어가면 장사, 사마가 임명되었다. 이는 행군총관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총관은 총사령관이었고, 절충도위 이상은 되어야 부임할 수 있다고 한다.

군령체계에서 병모는 별도로 대오를 형성, 부병과 동일한 형태의 지휘체계를 구축하였고 평시에는 북아금군 소속으로 되어 있는 이민족 번장들 또한 전시에는 상황과 자신이 거느린 병사 수에 알맞게 총관 및 대총관으로 임명하였다. 평시에는 이원적 관리, 전시에는 일원적 지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3.2. 당 전기 군제의 붕괴[편집]

3.2.1. 당 전기 군제의 장점과 한계[편집]

부병제와 기미지배체제로 대표되는 당 왕조 전반기의 군제는 수많은 군사적 성공을 가져온, 매우 성공적이고 강력한 체제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결국 당 왕조의 전성기에 무너지게 된다. 이는 이 체제의 장단점을 살피면 짐작이 가능하다.

3.2.1.1. 장점[편집]

부병제와 기미지배체제로 대표되는 당 왕조 전기 군제의 최대 장점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지닌 대규모 병력을 저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이 절충부 소속 병사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토지와 면세였는데, 수당교체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심지이자 절충부가 집중된 장안낙양태원에도 토지는 많이 남아돌았기에 사실상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은 조세의 면제 뿐이었다. 그 결과, 당은 대규모 군대 동원과 경작지 확대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질적 저하를 대비하여 농한기에는 각각의 절충부에서 훈련하게끔 하고, 포상체계를 철저하게 구축했다. 즉 공을 세우면 바로 출세가 가능하게끔 하여(일정한 공을 세우면 바로 품계를 내려주고 하급 관리가 될 수 있게끔 했다.) 출세를 위해 스스로 훈련하게 한 것. 여기에 다수의 기미주에서 당의 요청, 요구에 따라 지원되는 대규모 이민족 전사들이 또다른 축을 맡아 당군을 지탱하였다. 이 두 체제를 보조하는 병모에도 자원 입대자는 별도로 관리해 공적에 따라 포상과 출세를 보장해 줌으로써 질과 사기를 관리하였다. 또한, 기미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다수의 이민족들을 당의 영향력 하에 두었고, 이를 통해 당 왕조를 적대하는 이민족들의 수를 줄여 외적의 위협을 감소시켰다. 여기에 더해, 군정과 군령을 철저하게 분리시킴으로써 반란의 위험을 낮추었다. 그러면서도 지방관에게서 군사력을 박탈하여 지방 할거세력의 발생 가능성을 감소시켰고 군령과 군정을 분리시켜 군부의 반란도 억제했다. 이는 <신당서>를 집필한 북송의 학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정한 질을 갖춘, 대규모 병력을 저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으면서도, 그 군대가 반란세력이 되는 것은 최소화했다는 장점을 지닌 셈. 이러한 체제는 오랫동안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되어 후세에도 여러차례 이와 비슷한 병농일치적 군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3.2.1.2. 한계[편집]

부병제와 기미부주에서의 이민족 동원은 균전제와 기미지배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균전제가 무너지고, 기미지배체제가 무너지면, 부병제와 기미주에서의 이민족 통제 및 전사 동원 체계도 같이 붕괴한다.

대규모 자영농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농민층의 분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절충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감소하고 질적으로도 저하된다. 여기에,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에게 배부할 토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거기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동원 횟수와 기간이 길어지면 농업에 종사할 수 없는 부병들이 경제적 기반을 잃고 몰락하기 때문에 전쟁은 단기전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없으면 포상 체계를 매개로 한 자체적인 질적 수준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너무 안할 수도 없다. 즉, 국가는 귀족,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장기간의 전쟁은 피하면서 소속 부병들의 몰락을 막고 지속적으로 토지를 확보해 이를 나누어 주며, 병사들의 훈련도를 계속 유지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계속해야 부병제를 이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기미지배체제의 근본적인 기반은 당의 군사적 힘에 있으며, 따라서 당이 군사적으로 실패한다면 기미지배체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셈이 된다. 여기에 더해, 기미부주 체제 하에서 당은 해당 기미부주의 지지를 얻는 매개체로 그 지역의 토착 유력 씨족을 삼고 이들에게 적극적인 인적, 물적 지원을 했는데 이는 부족체제 하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확고한 지배세력을 만들어 주는 셈이 된다. 이들은 당의 후원 아래서 중앙집권적 행정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초부족적 통합을 위한 권력 구조를 당나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었다 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당이 군사적으로 실패한다면? 그래서 이런,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부족의 통치자들이 당에 반기를 든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기미지배체제는 그대로 무너지게 된다.[5]

또한, 여기에 더해, 당 전기의 군제의 특징, 즉 군령과 군정의 분리 또한 마찬가지로 악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군령과 군정이 따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전시의 군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의 인적 유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장교진이 제대로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지휘관은 자신에게 맡겨진 군대를 제대로 장악할 수도 없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디메리트를 커버할 수 있는 지휘관의 역량, 그리고 장교 및 하사관층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 전기의 당나라 군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물론 중기에 '도독'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분리와 결합의 장점만을 뽑아 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결국 이 제도는 현장을 잘 알기 힘든 중앙관이, 지휘관과 인적 결합이 단절된 군을 이끌고 전쟁을 치뤄야 하는 비효율을 낳는 제도였기 때문. 물론 당 건국 때 종횡무진 활약한 명장들이 존재했던 당태종 치세(이정 등이 대표적), 당태종의 여러 군사 활동을 통해 발굴한 새로운 장성들(설인귀와 같은)이 군부의 중추를 담당했던 당고종 치세때는 이러한 문제점을 지휘관들의 개인 역량으로 극복했지만, 그들이 대부분 사라진 측천무후 치세가 되면서 측천무후의 실정과 더불어 저 비효율을 극복할 역량이 없는, 어찌보면 평범한 역량을 지닌 지휘관들이 여러 전역에서 군사적 무능력을 보이게 된다. 또한, 이러한 군권의 분리와 분권화가 이루어지다보니 현장지휘관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약을 받았고, 이것이 다시 발목을 잡으면서 군사적 실패는 더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 결과, 토번의 발흥, 돌궐 제2제국의 재기, 거란의 반란과 발해의 건국 등 기미지배체제의 붕괴로 이야기되는 측천무후의 군사적 무능 사례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부병제의 운용을 통해 당 초기 이룩한 군사적 성공이 부병제의 붕괴와 함께 무로 돌아갔음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력으로 변경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기미지배채제가 붕괴하면서 당은 변경방위력을 더욱 증대시켜야 할 필요를 가지게 된다. 군사력이 무너졌는데 오히려 군사력을 이전보다 더 증강시켜야 한다는 모순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

이로인한 군사적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군진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게 된다.

3.2.2. 기미지배체제의 약화[편집]

당 전기의 군제가 붕괴된 것은 부병제의 파탄 뿐만 아니라 기미부주를 통한 기미지배체제가 약화된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부병제의 파탄이 당의 내부 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 기미지배체제는 당의 외부 상황 변화에 따른 것이다.

당 전기의 기미지배체제는 기존의 부족연맹체를 각각의 부족들로 잘게 나누고, 각 부족의 주요 유력자 가문을 친당적으로 유지하면서 기미주로 편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에는 당의 강력한 군사적 힘이 있었고, 부족별로 나누어 이이제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관리 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의 기미지배는 부족연맹체는 파괴했으되, 부족 내적인 사회구조는 좀 더 집권적으로 만드는 작용을 하게 된 것. 즉, 당이 부족과 당나라 사이의 '연결고리로 선택한 유력자들이 그 부족을 좀 더 강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들이 당에게서 등을 돌리면', '그리고 서로 연합하여 다시 부족 연맹체를 구축한다', 이는 좀 더 부족원들을 강하게 지배하고 동원할 수 있는, 통합된 대규모 연맹집단의 등장이 된다.

따라서 당은 이들 유력자들을 후대하고, 동시에 당의 군사력을 계속 과시하여 이들이 친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야 했다. 수나라처럼 풍부한 물자와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을 운용할 능력이 안되었던 당은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를 올리고 이를 과시하여 이민족들에게 경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당태종 후반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원거리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당의 군사력에 한계가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위험신호는 토번이 토욕혼당항족을 복속시킨 사건이다. 토욕혼과 당항족은 당이 서역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미지배체제 하에 존재하던 유력한 민족들로, 당은 이들의 보호국에 가까운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번이 무력으로 이들을 복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외교적 우위를 점하는 선에서 화친을 맺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당은 고창국으로 20만에 달하는 원정군을 보냈기에 군사 활동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주변의 이민족들은 당의 국력의 한계와 특정 지역으로 당이 장거리 원정을 나갈 경우 여타 지역에는 군사력 공백 상태가 일어남을 일깨워 주었다. 종합하자면 당이 한 놈을 신나게 패고 있을 때는 동시에 다른 녀석을 손볼 여유가 없으므로 기회만 잘 노린다면 당의 통제를 벗어나 광범위한 약탈과 신나는 영역 확장, 연맹집단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는 곧바로 이어진 고구려-당 전쟁 당시 이민족들의 군사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태종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친정을 한 1차 고구려 원정 , 당고종 때의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설연타, 철륵이 바로 반기를 든 것은 우연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토번의 가르친링에 의한 안서 4진의 함락과 거듭된 패전, 화전양면전술과 장기전을 시도한 신라의 승리로 끝난 나당전쟁은 본격적인 기미지배체제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는 부병제가 위기에 처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당의 국력이 상승함에 따라 동원력은 증가하였으되 균전제가 약화되면서 당의 군사력의 두 축, 부병제와 기미부주 중 하나인 부병제 하의 동원 병력의 질적 저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부병제가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의 질이 떨어지고, 기미지배체제 하의 이민족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나타나자 이민족들은 당의 군사력 약화를 틈타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다 부병제의 질적 저하는 군령과 군정의 분리로 인한 비효율을 심화시켰고, 당 건국시의 명장들(당태종 본인과 이정, 장손무기, 설만철 등)이 정치적 문제 및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후 비효율과 군대의 질적 저하를 극복할 능력이 부족한 장수들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설인귀소정방배행검 등 당고종 시기의 유능한 장성들, 그리고 이세적과 글필하력 등 당 건국기의 명장들 중 오랫동안 살아있었던 몇몇이 부지런히 노력했던 당고종 초창기 치세에는 서돌궐 평정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후기에는 패배가 많아졌고, 군사력 저하가 외부에 노출되었다.

결국 당고종 사망(682년) 직전인 681년, 일테리쉬 카간에 의해 돌궐 제2제국(후돌궐)이 성립되면서 광범위한 이민족 통제 체제는 최종적으로 붕괴한다. 기미지배체제의 본격적인 성립이 돌궐향호의 귀부에서부터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기미지배의 근본은 돌궐로 대표되는 북방 이민족에 대한 통제체제였는데 그것을 상실한 것이다. 일테리쉬 카간은 이후 하북을 부지런히 공략했고, 이는 그 동생인 카파간 카간(묵철 가한)에게 이어져 스텝 초원지대 유목민족을 대부분 아우르는 거대 연맹국가, 돌궐 제2제국의 전성기를 연다.

당의 군사력이 저하되고, 여러차례의 패전으로 이것이 알려졌으며, 이를 틈탄 돌궐의 재건은 여타 이민족들에게도 독립을 시도할 동기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 안서4진을 수복하고 거란의 대규모 반란은 돌궐의 힘을 빌려 저지하였지만 발해의 독립은 막지 못했고, 도호부들을 중국 본토 내, 또는 인근 지역으로 옮길 수밖엔 없었다.

당 초기의 기미지배체제는 이것으로 사실상 끝났다. 물론 이후에도 다수의 이민족들이 기미부주에 속하여 당의 영향을 받고 부족의 전사들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당태종~당고종 시기처럼 북방 유목민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권을 확보하지는 못했고 통합된 정치체를 무너뜨리고 부족 수준으로 쪼개어 통제하지 못했다. 단순히 기미부주를 확보하고, 이곳으로 부족들을 사민시켜 관리하는 것을 넘어 그 외곽, 사민되지 않은 이민족 세력들에 대해서도 도호부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등 통제력을 행사하며, 부족연합체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이다.

4. 당 중기(과도기)[편집]

 
 
8세기 당삼채

기미지배체제가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은 곧 외침의 증대를 가져왔고 부병제의 파탄은 그런 외적을 막아낼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에 보조전력이었던 병모를 상설화하여 대응하였지만, 임시징집병인 병모는 대규모 물량 동원은 가능해도 그 질적 수준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측천무후시기에 보이는 대규모 병력 동원, 그리고 그런 대군이 쉽게 격파되곤 하는 것은 당의 군사력이 이런 식으로 약화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제의 약화와는 별개로 당나라 자체의 국력은 상승 일로에 있었고, 따라서 전체적인 개편과 그 사이의 공백을 메꿀만한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현종의 개원의 치에서 시작된 당 후기의 군사제도가 나타난다.

4.1. 기미지배체제의 변화[편집]

특히 이 시기에 크게 변화한 것은 기미지배체제였다.

대외적인 측면에서, 당은 통합된 이민족 세력을 붕괴시키고 통치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고 대신 1기미주 1국가 정책을 시행한다. 즉, 결집된 정치체 하나를 명목상 하나의 기미부주로 여기고 책봉 형식을 통해 명목상의 우위를 인정받는 정도로 만족하기 시작한 것. 발해에 대한 책봉 교서를 보면 신라와 발해라는 국가 자체를 하나의 기미부주로 편성하고 왕위를 사후인정하는 형태를 보인다.(다만 발해의 경우 처음에는 '발해군왕'이었기에 국가로서의 실체를 인정했는지는 약간 이견이 있다. 신라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임을 나타내는 '신라국왕' 칭호를 내렸다. 즉 '신라는 완전히 독립된 국가이자 명목상으로만 당의 기미부주'라는 것.)

대내적으로는 사민시킨 이민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 기미부주의 규모를 더욱 잘게 쪼갰다. 고구려 유민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내지로의 사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당은 이 시기에 대외적으로는 거대 정치체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내적으로는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 이를 통해 이민족 병사들을 계속 당군의 주요 병력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4.2. 확기(彍騎)[편집]

개원 13년(725년), 당시의 중서령이자 병부상서를 겸임하던 장열(張說)은 기존의 부병제 체제 하에서 조정으로 올라와 숙위하던 것을 폐지하고 대신 이를 전담하는 부대를 창설하자고 건의한다. 이것이 확기이다. 이 확기의 창설은 부병제 유지를 위한 마지막 시도라 할 수 있다.

확기의 대상 인원은 장안 일대 여러 주의 절충부 소속 12만여 명이었다. 특히 장안이 속해 있는 경조부에서 절반 이상, 즉 6만 6천에 달하는 인원이 확기로 귀속되었다. 즉 확기라는 부대는, 이들 수도 근방의 절충부들을 별도로 관리해 국경 방위의 부담을 배제하고 오로지 당의 수도, 즉 장안의 방위만을 전담케 한 것이다. 기존 부병제처럼 1년에 2차례에 걸처 장안으로 상경해야 하는 부담은 여전했지만 대신 머나먼 국경으로 갈 필요는 없어졌다. 또한 그외의 지방의 절충부에서는 장안으로 상번하는 부담을 없애고 오로지 상황에 맞게 국경 방위 업무만을 맡도록 하였다. 즉, 장안 및 정권의 수호와 국경 방위 업무를 완전히 분리시켜 각 지역의 절충부들에게 한 가지 부담만을 지게 한 것이다.

1년 2차례, 각 1개월씩 교대로 복무하므로 확기로 인해 확보된 장안의 평상시 방위 병력은 2만여 명. 과거의 부병제 체제 하에서 상번하여 경비하던 병력의 규정상 규모는 10만에 달했으므로 거의 규모가 1/5로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당 전기 북아금군의 역사에서 보듯 빠져나간 위사(衛士, 장안으로 상번하여 경비하는 병사)의 빈자리는 당 황실의 직속 금군인 북아금군의 확충으로 메꿔지고 있었다. 거기다 기존 부병제 하에서 상번하는 위사들 상당수가 탈영, 즉 배군(背軍)해버리곤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당 초의 장안 방위병력 규모에 비해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얼마나 배군 현상이 만연해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충부에 속해 있는 인원의 징병도 좀 더 체계화되었다. 기존의 부병제는 부유농가, 정남이 많은 집에서 우선적으로 징병한다는 원칙은 존재했고, 전체 호의 등급을 3등급으로 나누었지만 이는 과도하게 등급 폭이 넓어 운영자의 재량에 맡겨진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확기는 전체 호수를 9등급으로 나누어 체계화했고, 징병의 강도를 강화해 설령 최하위 호인 9등호라 해도, 정남이 단 한 명밖에 없다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징병하게 하였다. 돈황 문서를 보면 농촌의 인구 대부분은 하하호, 즉 9등호와 하중호, 즉 8등호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이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아 징병한 것이다. 물론 이런 병역의 대가로서 조세와 노역의 면제도 당연히 이루어졌다.

확기는 북아금군, 개중에서도 좌·우우림군에 속해 있는 부대였다.(개원 16년(728년) 2월 25일 편입) 이 말은 곧 북아금군이 친위대, 즉 금군의 위치를 넘어 당의 중앙군으로 그 위상이 상승하고, 남아금군은 당의 정규군으로서 대부분 부대를 관리하고 상황에 맞게 동원하던 것에서, 지방군 관리와 동원만을 전담하는 정도로 그 위상이 하락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남아금군 소속 장안 수비병, 즉 위사가 확기 창설 이후에도 상당기간 존속하여 천보 8재(749년)에야 완전히 폐지되었기 때문에 남아금군의 위상이 바로 떨어져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기의 등장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분리 현상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려주며, 멀지 않은 미래에 지방군 통제력이 떨어지고 중앙군으로 대규모 군대인 신책군이 등장할 것임을 예고해준다 하겠다.

<신당서> 병지에서도 말하듯 확기는 부병제와 절도사 사이의 과도기적 체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부병제, 절도사와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중요한 부대이기도 하다. 확기가 어떤 의미에서 과도기적 군대인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절충부 소속 병사들을, 좀 더 엄격하게 관리하긴 하지만, 부병제와 동일한 방법으로 관리하고, 징병하여 부대를 편성한다. 즉 확기는 부병제 그 자체를 약간 변용한 것이고 사회변화에 맞춰 부병제를 계속 운영하기 위해 변화시킨, 부병제의 최종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확기는 당 전기의 군제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다.
  • 절충부 소속 병사이면서도 남아금군이 아닌 북아금군 소속이다. 이는 당 중후기를 넘어가면서 지방군과 중앙군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기는 한계를 가진다. 이는 과도기적 제도라는 점에서 나타난 한계라 볼 수 있다. 우선, 확기는 장열의 의도대로 갖추어진 군대가 아니었다. 장열은 부병제 자체가 실패했으며, 병농일치 원칙의 징병군인 부병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모병제를 실시하자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병농일치와 부병제 유지에 대한 미련을 끊지 않았던 당현종 및 여타 조정 대신들은 확기를 부병제와 동일한 형식으로 창설하였다. 이는 곧 부병제의 한계로 인한 군의 붕괴과정을 확기 또한 똑같이 밟아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위에서도 알 수 있듯 위사 제도 자체는 확기 창설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고, 어중간한 거리에 있는 부병들은 기존의 부병제 체제 하에서 부담해야만 했던 정권 수호와 국경 방위 업무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또한 중앙군과 지방군이 완전히 분리되었기 때문에 정권 수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당 조정은 차츰 지방군을 천대하고 중앙군의 관리에만 신경쓰게 된다. 그 결과 지방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천대하는 조정보다는 자신들을 후대하는 절도사들을 우선시하게 되며, 후기의 번진 난립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사전에 얘기되기도 했다.

결국, 확기는 실패로 끝난다. 부담을 대폭 경감한 부병제라 해도 어쨌든 소농민층에게는 무거운 부담인 건 매한가지였고, 도호와 배군 현상이 계속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우를 후하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천보 연간이 되면 대부분 시정부판(市井負販)이나 무뢰배들이었고, 제대로 훈련도 하지 않아 그 질이 바닥을 기었다고 한다. 이에 결국 당현종, 그리고 당시 당 조정 내 여러 인물들은 징병제적 성격이 짙은 부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 즉 장정건아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5. 당 중후기[편집]

부병제, 기미지배체제, 병모로 구성되어 있던 당 초기의 군제는 결국 여러 황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붕괴하였다. 이로 인해 기미지배의 붕괴로 당은 이전에 비해 훨씬 강력한 국경 방위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부병제의 붕괴로 인해 당은 부병을 대체할 새로운 군사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제도는 당현종 치세의 중후기인 천보 연간에 완성된다. 단결병(團結兵)(또는 단련병(團練兵)), 관건병(官健兵)이 바로 그것이며, 단결병은 징병제로, 관건병(官健兵)은 장정건아제(莊丁健兒制), 즉 모병제로 유지되었고 군진병(軍鎮兵), 아병(牙兵)으로 구분되어 불렸다. 지방의 이러한 병사들을 통솔하는 직책으로 절도사, 그리고 대규모의 군진인 번진이 등장한 것이 이 때다.

그러나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절도사들은 군벌화의 길을 걸었고 중앙에서는 지방 군권을 관장하던 남아금군이 사실상 소멸, 그 대신 황실을 보위하던 북아금군이 더욱 강화돼 치안 및 실질적인 중앙군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면서 신책군으로 일원화되고, 그 지휘권이 신책중위, 그리고 중앙의 추밀원과 지방의 감군(監軍), 즉 환관들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지방의 절도사와 중앙의 환관들의 난행으로 인해 결국 당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과정에서의 수탈에 반발한 황소의 난으로 치명타를 입는다. 황소의 난 이후 아병에서 한단계 더 진화한 가병(家兵)이 대대적으로 증가하면서 국가의 지배력을 대체하였고, 당의 멸망과 오대십국시대의 분열을 낳게 된다.

5.1. 단련병(團練兵)[편집]

단련병(團練兵)은 무주기(武周期)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병과로, 국내 치안, 향촌 자위 및 예비군 업무를 수행하였다. 최초의 단련병은 696년 산동 지방에 설치된 무기단(武騎團)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699년에 하북, 하남으로 확대되었으며 당현종시기에는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

단련병은 150호 단위를 하나로 잡고 병사 15명, 군마 1필의 비율로 징병되었다. 단련병이 최초로 설치된 지역이 돌궐의 침입이 극심했던 산동지방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향하는 향촌 자위적 민병대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들은 1년 2회 현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유사시 예비병력으로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고선지의 서역 원정시 정규부대라 할 수 있는 관건병에 더해 단련병도 수만명 가량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련병은 빠른 속도로 부병제를 대체하였다. 돈황 문서 중 하나인 차과부의 751년 문서에 따르면 차과부에는 부병 75명, 토진병(土鎭兵, 돈황지역의 단련병) 170명이 존재하여 부병보다 단련병이 2배 이상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거기다 그 연령대를 보면 부병의 경우 가장 젊은 자도 42세에 달했지만 토진병 내에는 23세의 청년이 존재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거진 20여년간 부병으로 징병된 정남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련병의 징병은 재지농민들 중 부유한 자들을 대상으로 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들은 마치 부병처럼 농한기에 훈련을 받고 식량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부병처럼 변경 방위나 수도로의 근번이 없다고는 해도 병역인 건 매한가지였기에 차츰 하층 소농민층에게 병역이 전가되었다고 한다.

단련병은 다시 세부적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기 전제했다. 도시의 단련병은 성방(城傍)이라 불렸는데, 단련병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조직되고 통솔된 반면 이들 성방은 주지사가 자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징병, 편성되었다. 이는 민간자위단, 즉 지역민의 자경대와 같은 사적 무장력을 주지사를 매개로 국가의 통제 하에 둔 것이었다. 또한 국경지대의 진과 도시에는 진방(鎭防)단결병이 단결병과는 별도로 존재했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단결병처럼 매년 2회씩 훈련받는 것과는 달리 상시적으로 둔전을 경작하며 군에 복무하는 단결병을 뜻하며, 절도사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다만 안사의 난 이후 내지번진이 다수 생겨난 후에도 이런 진방단결병은 국경지대의 번진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규모도 여타 단결병과 달리 대규모였다. 돈황 지역의 토진병도 이런 진방단결병으로 보인다. 또한 <당육전>에 따르면 서북 지역의 6개 주에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시켜 강족과 함께 단련병으로 편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기미지배가 사실상 붕괴되자 당 내의 이민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방위에 좀 더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원거리로의 강제이주와 상황에 맞춰 이민족 집단 중 몇몇에 대해서는 기미주가 아닌 주현체제로 집어넣어 직접적으로 통제하면서 단련병으로 편성해 지역 방위에 동원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들 단련병은 단련사(團練使)에 의해 통솔되었다. 초기 단련사는 중앙에서 내려보낸 파견무관이었지만 당현종시기가 되면서 주장관인 자사가 단련사를 겸임하기 시작했고, 이는 수문제의 개혁으로 분리되었던 지방관과 군대가 다시 통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향촌 자치적 민병대에서 시작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단련병들은 토착 지역에 깊이 매여 있었으며 지역을 매개체로 상급 기관과 엮이게 된다. 후의 절도사들 또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면서 자신의 관할영역 하의 단련병들을 통솔하였고 번진 영토의 방어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기록상 소규모 부대만을 거느린 번진들이 토벌에 대항하여 상당한 동원력을 보여준 것은 이들 단련병을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단련병은 공식적 군대이나 또한 자경대, 향촌 민병대로서의 성격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방어시 보조전력으로써 번진 군대의 규모를 크게 부풀렸으며 또한 지속되는 전란 속에서 전투에 익숙한 단련병도 많았기에 방어전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 기록을 보면 상비군으로 보유한 병력 이상이 번진에 존재했음직한 기록이 많이 존재한다.

5.2. 관건병(官健兵) : 직업적 정규군[편집]

관건(官健)이란 관(官)의 건아(健兒)라는 의미로, 국가가 지급하는 집과 식량, 계절옷을 지급받는 직업정규군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 관건병은 사실상 단련병을 제외한 모든 당의 병사들을 일컫는 말이 되며, 신책군, 군진, 아중병, 가병 등을 구성하는 기초 성분이 된다.

이들은 장정건아제(또는 병방건아제)로 모집되었고 군진에 주둔하였으며, 절도사에 의해 지휘를 받았다. 이는 지휘권을 제하면 신책군도 다르지 않다.

5.2.1. 장정건아제(長征健兒制)[편집]

관건병은 장정건아제를 통해 충원되었다. 이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기미지배의 붕괴로 당이 직면한 것은 초기에 비해 급격히 증가한 외침의 위협이었다. 과거 당의 이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당은 국경에 방인(防人)이라 불리는 국경방위병을 6~10만여 정도 배치하면 그만이었다. 기나긴 당의 국경선을 단 10만 정도의 정규군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던 것. 이는 기미지배체제를 통해 변경 방위에 이들 이민족들을 동원할 수 있고, 또한 동시에 영역 외의 이민족들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처 침공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미지배가 붕괴하자 변경 방어에 투입되는 인력은 몇배로 증가하였다. 당현종시기가 되면 대규모 군사기지인 군(軍)과 진(鎭)이 수십개씩 설치되면서 변경지대를 방위하는 병력은 60만에 육박하게 된다. 이는 기존 부병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인적 동원이었으며, 추가적인 모병, 즉 병모를 통해 이 인력을 충당하였지만 질적인 부족함에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 이런 인적 소요를 메꾸기 위해 방인들에게 군역을 담당하는 기간을 늘리자 오히려 문제는 심각해진다. 배군(背軍), 즉 요샛말로 하면 탈영이 빈번해지고 아예 절충부 자체에서 이름을 빼버리는 일까지 늘어난 것. 이는 심각한 악순환을 낳아, 과도한 병역으로 인해 그 부담을 부병들에게 지우면, 그 때문에 배군이 증가하고, 이는 더 많은 부병들을 동원하게 만들고 정기적인 교대를 힘들게 만들며, 이것이 다시 악영향을 주어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된 병사들이 또다시 배군의 길을 택하게 된다. 결국, 마지막 시도였던 확기까지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자 당현종은 개원 15년, 방위에 3년 더 종사할 경우 20단에 달하는 봉급을 약속하기 시작한다. 이는 장정건아제의 모태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원 25년(737년) 당현종은 장정건아제의 실시를 알리는 조서를 반포한다. 여기에 더해 천보 8년(747년)에는 부병의 징발 폐지, 즉 사실상의 부병제의 폐지를 결정한다.

당현종이 장정건아제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사회적 불안요소인 객호(客戶), 즉 변방지역으로 이주해 온 도호들, 무위도식자, 즉 불량배, 도적떼 등과 같은 자들이었다. 이는 이들을 군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체제 하에서의 관리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기존에 복무하던 숙련된 병사들에게도 이를 권고하여 높은 전투력을 갖춘 군대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장정건아제 하에서 모집된 병사들에게는 조용조를 면제하고, 급여로 옷감을 지급하며, 복무해야 할 군진 옆에 가옥을 지급하며 가족들을 불러오게 하였으며 여차하면 둔전 경작까지도 담당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받는 봉급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기에 포상과 약탈을 중요시했고 눈앞의 이익에 따라가는 성향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즉 부병제 시절보다 전체적으로 병사들이 포악해졌다. 또한 둔전 경작을 맡겼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군 복무 후에도 자신이 근무하던 군진 근처에 거주지를 차리는 경우가 많고, 이는 곧 유사시에 좋은 예비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장정건아는 병방건아(兵防健兒)라는 이름으로도 혼용되었다.

5.2.2. 특징[편집]

관건병은 처음부터 식량과 봉급을 제공받고 군에 종사하였으며, 그 모집 방식은 장정건아제, 즉 모병제였으며, 당 중후기의 군대의 주력을 이루게 되었다. 단련병을 제외한 모든 당의 병사들은 그 구조상 관건병에 해당하며, 따라서 당의 군사력은 사회 구조의 변화와 관계 없이 오로지 군을 보유한 세력의 재정력에 의해 유지되게 되었다.

이들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여 당현종 시기에는 60만, 당 말기에는 100만에 육박하였다고 한다. 이들 직업 군인들을 먹이고 봉급을 지급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고, 사실상 대부분의 조세 지출은 이들 직업병사들의 유지에 사용되었다. 이 말은 곧 충분한 재정력만 갖추어 진다면 당은 이제 얼마든지 직업적 상비군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현종시기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은 개원의 치와 그로 인해 쌓아올린 부를 바탕으로 하는 이들 대규모 상비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 당의 강력한 경제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각 지역의 절도사들이 조정으로 올리는 상공에서 자의적으로 군의 유지비를 빼냈는데, 그 결과 당 왕조는 조정의 재정 상황은 빈약해지고 있는데도 자립 번진들의 운영비를 자신이 제공하는 꼴이 되어 더더욱 지방 번진 할거를 야기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 번진들은 상공 뿐만 아니라 갖가지 방법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군을 자의적으로 증강시켜 반독립 군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당헌종의 원화중흥 직후 크게 해소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움으로써 사실상 황소의 난이라는 민중봉기를 야기하게 된다.

6. 당군의 전술체계[편집]

당 전기의 국력은 수나라의 그것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는 군사력 투사 능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실제로 수양제는 남조 평정시나 변방을 순시할때 50만 이상의 전력을 운용하였고 고구려 원정때에는 113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편성, 대외적으로 투사하였다. 그러나 당은 국력 측면에서도, 제도 측면에서도 그정도의 군사력 투사는 불가능했고, 무장도 수나라 때에 비해 빈약했다.[6] 물론 당태종과 이정은 이를 오히려 기동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요소로 삼았다. '육화진법' 으로 대표되는 당 초기의 군제개혁은 당이 처한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었고, 새로운 전술로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당 왕조가 전성기에 올랐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육화진법은 척계광의 원앙진 등장 이전까지는 줄곧 동아시아 일대의 주요 전술로 응용되어 왔으므로 당 중후기에도 비슷한 형태로 계속 사용되었다 말할 수 있다. 다만 육화진의 특성상 훈련도가 상당히 높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병사들의 질이 떨어진 중당, 만당 시기에는 전반기처럼 깔끔하게 운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당의 전략 전술, 병제는 이전에 비해 좀 더 자세하게 밝혀진 편인데, 이는 이정과 당태종의 문답으로 구성된 병서인 <이위공문대>(또는 이위공병법)와 <신당서>의 '병지(兵志)'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서는 중국의 정사인 25사 중 기전체의 구성요소인 <본기本紀>, <열전列傳>, <지志>, <표表>를 모두 갖춘 몇 안되는 사서인데다 구당서, 신당서 등이 동시에 존재하여 교차검증이 가능한 사서로 그 가치가 높다.


(육화진법의 기본 구성.)

당은 육화진법(六花陣法)을 기본 전술로 했다. 이는 전체 군을 부대 지휘부인 중군과 전·후·좌·우군, 좌·우우후군, 도합 7개 부대로 편성하며, 각각의 小군은 다시 7개 小부대로 편성하는 방식이다. 즉 기본적으로 7단위로 나누어지는 편제를 취한다. 가운데 원진을 6개 방진이 둘러싸는 모습이 되고 이것이 과 비슷하다 해서 '육화진(六花陣)'이라고 부른다.

<위공이정병법>에 따르면 이정이 이러한 편제의 기준선으로 삼은 부대 규모는 2만여에 달한다. 그러나 당군은 유연한 편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규모도 변동이 많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포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병력이 더욱 대규모라면 본대와 좌우익, 그리고 4개의 별동대로 나누어 마찬가지로 7개 부대를 편성하고, 소규모라면 무리하게 부대를 나눌 필요는 없다는 것. 실제로 당군의 편제 중 정확하게 규모가 정해진 건 기본단위인 '대(隊)'밖엔 없다.

아래 내용은 2만명일 때, 즉 육화진의 기본 편제 규모일 때를 기준으로 한다.
병사수(지휘관)
군 명칭
노수(弩手)
궁수(弓手)
마군(馬軍)
도탕(跳蕩)
기병(奇兵, 예비대)
치중병(輜重兵)
총합
중군
400(8)
400(8)
1000(20)
500(10)
500(10)
1200(24)
4000(80)
전·후·좌·우군
250(5)
300(6)
500(10)
400(8)
400(8)
750(15)
2600(52), 네 부대 총합은 10400(208)
좌·우우후군
300(6)
300(6)
500(10)
400(8)
400(8)
900(18)
2800(56), 양 부대 총합은 5600(106)
전 부대 총합
2000(40)
2200(44)
4000(80)
2900(58)
2900(58)
6000(120)
20000(80)
- 출처 : 학연사 전략전술병기사전 중국편

여기서 '도탕(跳蕩)'은 기병(騎兵)으로 여겨지는데 굳이 따로 센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명칭으로 봤을때 보통 기병보다 좀 더 정예한 병사들이거나, 전봉대(1열 최선봉)에 일부 편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병(奇兵, 예비대)의 경우 기보 혼합부대로 추측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군은 기병이 주력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검병 등 근접전을 벌일 보병이 편제상 확인되지 않는데, 노, 즉 쇠뇌를 운용하는 노수가 보조무장으로 검을 구비하고 근접전시 검병으로 운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당육전>을 보면 부병제가 제대로 작동했던 당 태종 당시의 부병으로 동원된 병사는 행군을 위해 각자 궁시류와 검을 구비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정확히는 활 1개, 화살 30발, 횡도(橫刀)[7], 호록(胡祿, 활통), 여석(礪石, 숫돌)) 훗날 고려도 각개 병사들이 지참해야 할 무장의 종류[8][9]가 <당육전>에서 규정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당육전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 당군은 3열로 군을 편성했는데, <이위공문대>에 따르면 2열(주대(駐隊)라고 한다)에는 전투 마차를 갖추었다고 하고 있다.



(당군의 주력 병종인 기병, 궁병, 노(쇠뇌)병 이미지.)
중국사이트에서 나오는 당군 기병 이미지

당군 편제의 기본 단위가 되는 것은 50명 단위인 '대(隊)'였고, 전시에 1개 대를 지휘하는 것은 '대두(隊頭)'였다. 이 '대' 의 특징은 3각 대형이라는 것이다. 맨 선두에 지휘관인 대두가 서고, 그 바로 뒤에 기수(집기, 執旗) 1명, 기수의 호위병인 대부 2명이 선다. 대부 뒤에는 5개 열이 늘어서는데, 1열은 7명이었고 한 열씩 뒤로 갈수록 1명이 증가해 5열에는 11명이 섰다. 대열의 최후미에는 부대장격인 대부(隊副)가 큰 칼을 들고 병사들을 감시하였다.

당군은 3열 대형으로 군을 편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군 4천(2만명 편제시 중군의 기준 규모는 4천이다.)을 기준으로, 선봉인 1열 15개 대 650명, 중군인 2열 31개 대 1550명, 후미인 3열 10개 대 500명, 그 뒤에 치중을 관리하는 1200명의 형태로 편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1열의 경우 3개 대를 삼각형 형태로 묶어 대대를 구성하였다. 중군의 경우 이러한 대대가 5개 존재했다. 최선두 대를 전봉대(戰鋒隊), 후방의 2개 대를 전대(戰隊)로 편성했으며, <전략전술병기대사전>에 따르면 전봉대와 전대는 둘 다 보병이지만, <위공이정병법>에 따르면 전봉대는 기병과 보병이 반반으로 섞여 있다고 한다. 전봉대는 최선봉 부대이므로 그만큼 정예한 부대였을 것이다.
2열의 경우 주대(駐隊)라고 불렀는데, 마찬가지로 <위공이정병법>에 따르면 이 주대는 전투 마차를 구비한 부대였으며, 이를 방어선으로 늘여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주대의 보병 대(隊)는 11개였다. 그리고 그 좌우에 마군 각 10대 500명을 배치하는데, 이들 마군은 보통은 하마해 있다가 기병 운용이 필요할 때에 말에 오른다.
3열은 기병(奇兵, 예비대) 10개 대가 위치해 있었다.

여타 부대는 중군에 비해 그 규모가 적으므로 그만큼 병력을 차감해 포진했을 것이나, 전열 편성 자체는 동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열로 중군+6개 군은 다양한 포진을 구축하여 상황에 대처하였다. 특히 대표적으로 알려진 기본 포진은 다섯 가지가 존재한다.

이 다섯가지 포진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원진이며, 실제로 당의 기본 포진 5가지 중 3가지가 원진 및 원진의 변형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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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의 기본 포진인 원진 구성도 및 보병 1개 대(隊)의 편성도)

이러한 육화진은 당의 기본 전술이었고 후세에도 기본적인 전술 편제로 이어져 내려왔다. 다만 당 중후기 이후에는 군마의 부족으로 인해 기병이 부족해 졌으므로 기병의 비율이 감소하고 그 자리를 보병이 채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 중후기에 당군의 전력이 약화된 것은 당의 정치적 혼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병종 편제의 문제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7. 관련 문서[편집]

[1] 단, 측천무후 시절엔 1개 군부에 1천 5백여 명이라는 사료도 있다.[2] 균전제 체제 내에서 구분전이 충분히 지급되지 못하는 지역.[3] 장행건아(長行健兒)/병방건아(兵防健兒)라는 명칭으로도 쓰였다.[4] 추가적이고 더 상세한 대외관계 설명에 대해서는 김한규 교수의〈7~8세기 東아시아 世界秩序의 構造的 特徵과 그 運營體制의 機能〉를 참조[5] 때문에 당의 기미지배체제는 고구려 정벌 및 고구려 멸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무너지게 된다. 고구려 정벌 및 멸망까지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 과정에서 당이 패배하기도 하는 등 당의 군사력에 체면을 구겼고,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자영농들이 몰락하면서 균전제가 붕괴되자, 이는 자연스럽게 부병제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는 곧 당 중앙군의 군사력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토번에 패배하여 실크로드를 상실하는 등 당의 군사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그간 당의 군사력에 대한 공포 + 적당한 회유 로 복속되어있던 기미주들이 본격적으로 당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게 된다.[6] 예를 들어, 수는 10만에 육박하는 중장기병을(http://lyuen.egloos.com/3755786) 동원할 수 있었지만 당은 그럴만한 돈이 없었기에 중기병 양성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수와 비슷한 규모의 기병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기병을 경기병 수준으로 경장화시켜야 했다.[7]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일본도 같은 곡검류가 아닌 환두대도처럼 직검류이다.[8] 검과 활, 방패[9] 출처: 고려의 무비(武備)와 전투, 한국콘텐츠진흥원[10] 상술했듯이 당나라 군은 그 당시엔 세계 최강의 군대로 손에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