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72년과 184년에 고구려와 한나라가 좌원에서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승리해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72년(신대왕 8)과 184년(고국천왕 6)에 국내성(國內城) 인근의 좌원(坐原)에서 고구려 군대가 중국 후한(後漢)의 군대에 승리한 전투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신대왕·고국천왕 조와 ‘열전(列傳)’의 명림답부(明臨荅夫) 조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제1차 좌원대첩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65년(차대왕 20) 연나(椽那)의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荅夫)는 폭정을 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받고 있던 차대왕(次大王)을 살해했다. 그리고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 등과 함께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佰固)를 신대왕(新大王)으로 옹립했다. 신대왕은 166년(신대왕 2)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권을 맡겼다.
168년 신대왕은 후한의 현도군(玄菟郡) 태수인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복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화의를 청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이끄는 후한의 군대와 함께 부산(富山)을 토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한은 172년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다시 침공해왔다. 그러자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 밖의 식량과 사람들을 모두 비우고 국내성을 굳게 지키며 농성전을 벌였다. 후한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였다. 그러자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후한의 군대를 추격해 좌원에서 적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공을 치하하며 좌원과 질산(質山)을 그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한편,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현도군 태수인 경림이 고구려를 침공해 신대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168년이 아니라,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169년)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1차 좌원대첩에 대한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으며, 《삼국지》에는 오히려 후한 영제 때인 희평(熹平, 172〜178년) 연간에 고구려왕 백고(伯固)가 현도군에 복속을 요청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좌원대첩
179년 신대왕이 죽고, 민심을 잃은 그의 맏아들 발기(拔奇)를 대신해 둘째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했다. 184년(고국천왕 6) 후한의 요동군(遼東郡) 태수가 공격해오자 고국천왕은 동생인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했으나 패했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출병하여 좌원에서 후한의 군대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와 의의
고구려는 건국한 뒤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한나라가 그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漢郡縣)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리고 172년과 184년에 좌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잇달아 크게 승리하면서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넓힐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헌제(獻帝)가 즉위한 뒤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면서 한나라는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 이르렀다. 요동 지역도 공손도 이후 공손씨(公孫氏)의 독립국가처럼 되었고, 사회 혼란을 피해 한나라에서 고구려로 투항해오는 사람들도 늘었다. 이러한 후한 말기의 사회적 변동은 고구려가 세력을 넓히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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