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펌>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下)

Chung Park 2013. 10. 1. 15:31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下)

아스텍제국은 맥이족과 고리족이 합작해서 세운 나라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다다살리(tlatlazali) 풍습은 ‘모두 모두 살자’는 의미
⊙ 맥이족과 고리족의 싸움터 맥이가진고(Mexicatzinco)는 ‘맥이가 (전쟁에서) 진 곳’이라는 뜻
⊙ 殉葬 등 장례풍속, 윷놀이·공기놀이·팽이치기 등 민속놀이 흡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아스텍 전사들의 모습. 아스텍제국은 먼저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고리족과 후에 이주한 맥이족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다.
5일장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5일마다 장을 여는 풍습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풍습은 아직까지 이어져서 전국의 많은 곳에서 지금도 5일장이 열리고 있다. 시골에서는 장날에 농사일을 쉬고 장보러 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아스텍인들에게도 바로 이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초에 사하군이 쓴 《멕시코의 풍물역사서》에는 이 시장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림2> 1938년도 멕시코 오하카 지방의 5일장날 풍경이다. 몇십 년 전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 풍경과 흡사하다.
맥이족들, 즉 아스텍인들은 오랜 유랑생활 끝에, 1325년 마침내 자기 나라를 건설하고 정착하게 되자 바로 시장을 열었다. 시장을 처음 연 곳은 평민들이 중심이 되어 살던 다들올곳(Tlatelolco-모든 사람이 올 곳)이었다. 아스텍제국이 강성하여 주변을 정복하면서, 5일장은 멕시코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장에서 거래하던 상품은 금덩이, 옥, 짐승가죽, 담요, 담배, 귀한 새 깃털, 천, 옥수수 등 매우 다양한 물건이었는데, 거래방법은 처음에는 물물교환이었고, 후에 카카오를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스페인인들의 눈에 비친 5일장은 매우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4일 일하고 5일째 날은 시장에 가곤 했는데, 시장 가는 날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주일은 5일이었다”고 기록했다.

‘1주일’의 개념은 서양식 개념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칠일에는 쉬었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쉬는 날= 일요일’의 개념이 시작되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스페인인들이 아스텍제국을 정복하고 보니, 원주민들의 풍습에서 ‘5일마다 일은 안하고 시장 가서 친구를 만나거나 노는 모습’을 발견했다.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멕시코 원주민들은 일주일이 5일인 민족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도 원래는 5일장었으므로, 우리도 ‘일주일이 5일인 민족’인 셈이다.

<그림2>는 1938년도 멕시코 오하카 지방의 5일장날 풍경이다. 흰 옷을 주로 입고, 남자들은 밀짚모자를 쓴 모습의 시장 풍경은 몇십 년 전의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 풍경과 흡사하다.

<그림3> 음식을 먹기 직전에 화로에서 익은 음식을 아주 조금, 손톱으로 떼어서 주변에 던진 후 식사를 하는 아스텍 인디언의 다다살리(tlatlazali) 풍습은 우리의 고수레와 비슷하다.
멕시코 원주민의 음식 풍습 가운데 우리의 고수레와 같은 것이 있었다. 사하군 신부가 기록한 《최초의 기억들(Primeros Memoriales)》이라는 책에는 <그림3>과 함께 그들의 고수레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먹기 시작하기 직전에 화로에서 익은 음식을 아주 조금, 손톱으로 떼어서 주변에 던졌다. 그 후에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 풍습을 다다살리(tlatlazali)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두 모두 살자’로 해석된다.


장례 풍속, 고구려·부여와 유사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장례 풍습은 다른 민족과 매우 달랐다. 부여는 부모가 죽으면 매우 길고 풍성한 장례를 치렀고, 때로는 그 장례식이 다섯 달을 넘기기도 하여 손님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또 고구려의 장례식은 매우 특이하게, 상주(喪主)들은 울고 주변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신하나 노예를 함께 묻는 순장(殉葬) 풍습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삼한(三韓)의 장례식에서는 새의 깃털을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죽은 후에도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믿어서,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사체의 입안에 넣어 주기도 했고,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을 태워서 보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관을 땅속에 묻을 때 회(灰)를 뿌려 준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관 주변에 뿌려 주고, 경기도 지방에서는 활관하여 사체(死體)위에 직접 뿌려 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이러한 우리 민족 장례식의 독특한 풍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19세기 중엽까지도 그 일부가 남아 있었다. 특히 순장은 남북 아메리카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시행되었고, 부모의 장례식을 몇 달 동안 풍성하게 치르던 풍습도 캐나다 서해안 일대의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 중엽까지 행해졌다.

그곳에서도 너무 장례식을 오래 한다고 하여, 때로는 손님들이 그만하라고 권하기도 했고, 상주는 더 해야 한다고 실랑이를 벌였는데, 그것을 미덕으로 여겼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부여의 풍습이라고 기록된 것이 캐나다 서해안에서 부여가 망한 지 14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이어져 왔던 것이다.


아스텍王의 장례식

멕시코에 살던 원주민들에게도 이 모든 풍습이 있었다. 고마라 신부의 기록이나 다른 아스텍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장례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의 역사가이며 신부인 고마라는 아스텍제국의 왕의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이 죽자, 친척과 친구인 귀족들에게 알렸다. 그들이 4일 이내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4일 밤을 울고 곡하며 지새웠다. 다섯째 날, 왕의 입에 아름다운 옥구슬 한 개를 넣어 주었다. 왕의 얼굴 위에 귀신(악마)의 얼굴이 새겨지고 많은 옥(玉)으로 장식된 탈을 씌워 주었다. 사람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사원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갔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노래는 간결하고 매우 슬픈 곡조였는데, 사람들은 반복해서 불렀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제사장(무당)들은 200명의 노예나 포로들을 순장시켰다.”

우리는 아스텍 왕의 장례식에 관한 이 기록에서, ‘5일장, 저승길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입에 넣어 주기, 탈, 상여 노래’ 등과 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식 풍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마라 신부는 계속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더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자(死者)가 생전에 사용하던 보석, 담요, 방패, 무기, 깃발 등을 같이 태워 주었다

▲장례 마지막 날, 사자를 화장할 때, 집과 화장하는 장소에 많은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렸고, 무당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순장의 대상 중 일부는 왕과 함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고마라의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아스텍인들도 사자를 위한 제사상을 차렸고 순장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11대 동천왕의 장례식에 순장으로 희생될 사람으로서 지원자가 너무 많았다는 기록이 여기서 그들의 정신세계와 일치한다.

<그림4> 1520년경 아스텍제국 수도의 모습.

‘맥이가 진 곳’

아스텍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때 그 몸에 흰 흙을 뿌렸고, 새 깃털을 사용했다. 아스텍인들이 아직 유랑생활을 하던 1298년경, 지금의 멕시코시티 주변에서, 그곳에 이미 정착하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먼저 와서 정착해 살던 고리족임-과 전쟁을 했고, 패전(敗戰)하여 그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골와간(Cohuacan)이라는 도시국가로 끌려갔을 때 일이다. 아스텍의 지도자들이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 거냐? 왜 당신네들은 우리를 살려 놓으려 하는 거야? 우리가 죽도록 흰 흙과 새 깃털을 준비해 달라.”

그 후에 아스텍인들과 골와간 사람들은 골와간의 땅에서 함께 살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살던 어느 날, 아스텍인들이 골와간의 공주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골와간의 왕은 아스텍인들을 공격했고, 아스텍인들은 패하여 도망쳤다. 그 전쟁터를 지금까지도 맥이가진고(Mexicatzinco)라고 한다. 바로 ‘맥이가 (전쟁에서) 진 곳’이라는 우리말로 된 지명이다. 멕시코에는 숱한 지명이 우리말로 되어 있다.

그렇게 도망친 맥이족은 1325년 드디어 호수로 둘러싸인 나지막한 섬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골와간으로 찾아가서 골와간의 왕자를 모셔 와서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아스텍제국의 제1대왕인 아까만피치들(Acamapichtl)이다. 오늘날의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 까만 피 사람’을 뜻한다. ‘아’는 부여-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우리’를 뜻하던 말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Amur)강의 ‘아’가 바로 이 말이다. 아무르는 고대 우리말로서, ‘우리 물’이라는 뜻이다. ‘치’는 ‘이치, 저치, 그치,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에서 보듯이,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아스텍제국은 맥이족과 고리족이 합작해서 세워

그리고 얼마 후에, 맥이족이 세운 나라와 골와간은 한 나라로 합병해 아스텍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부분이 아스텍제국을 오늘날까지 200여 년간 연구해 온 전 세계 학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역사 내용이다.

그 당시 멕시코 원주민 사회는 전쟁 포로들을 무조건 노예로 삼고, 제사 때에는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삼던 시대였다. 그러나 골와간으로 끌려간 맥이족은 노예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았고, 골와간 사람들과 서로 형제라고 부르면서 시집장가를 갔다. 또 골와간의 공주를 죽여서 두 민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서로 원수처럼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이족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골와간 왕자를 데려와서 왕으로 모셨고, 결국엔 두 민족이 한 나라로 합쳐져서 살았다. 이 부분이 아스텍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학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골와간은 바로 먼저 멕시코에 와서 정착했던 고리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리족은 바로 부여-고구려를 세웠던 사람들로서, 맥이족과 함께 우리 민족의 뿌리였다.

골와간은 원래 ‘고리간’이었다고 밝힌 학자는 우리말이나 역사를 전혀 모르던 19세기 말의 독일학자 에드워드 젤러(Eduard Seler)였다. 그는 지금까지도 아스텍 역사와 고고학의 최고 대가로 칭송받고 있다. ‘간’도 ‘장소’를 뜻하던 고대 우리말이다. ‘정짓간, 헛간, 곳간, 뒷간’ 등의 말에서 나오는 ‘간’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골와간, 즉 고리간은 ‘고리족이 사는 곳’이라는 우리말이다.

같은 민족이 만주 남부와 북부로 서로 이웃해서 살았고, 아메리카로 건너 간 뒤에 수백 년 만에 멕시코에서 다시 만났다. 비록 전쟁터에서 만났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먼저 정착해 살던 사람들이 새로 온 사람들을 자기 땅으로 데려가서 살게 해 주고, 서로 시집장가를 가며 형제라고 불렀으며, 나라를 세운 후엔 먼저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의 왕족을 데려와서 왕으로 세우고, 결국엔 한 나라로 합쳐서 아스텍제국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 민족 맥족-고리족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서양과 아메리카 학자들이 어떻게 아스텍제국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제사 때에는 지방과 축문 불태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집에서도 지냈고, 무덤에 가서도 지냈다. 제사는 주로 밤 12시경으로 추정되는 깊은 밤에 지냈다. 제사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향을 피운 후에,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절을 하는 방식은 두 손을 땅에 짚고 무릎을 땅에 대며 고개를 숙여서 했다. 제사를 다 지낸 후에 제사장(무당)은 제사에 사용했던 종이를 불태웠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사에서 마지막 순서로, 신(神)을 전송하고 지방(紙榜)과 축문(祝文)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

아스텍제국의 제사는 크기도 다양했다. 국가적 신(神)에게 지낼 때에는 도시국가 신민 전체가 모여서 제사를 올렸고, 마을별로, 씨족별로, 가족별로도 제사를 올렸다.

아스텍제국의 가장 큰 제사는 다같이배왈리(Tlacaxipehualli)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다 같이 배우리’이다. 매년 한 번 드리는 이 제사에는 주변의 모든 나라, 속국과 적국의 왕들과 귀족들까지도 초청을 받고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제사가 끝난 후에 아스텍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제사의 목적은 ‘주변 속국과 적국이 아스텍제국의 풍습과 율법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데 있었다. 많은 인신공양이 이때에 있었는데, 적국과 속국에 대하여 ‘전쟁이나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의미도 있었다. 그야말로 다 같이 아스텍제국의 힘과 풍습을 보고 배우고, 아스텍이 내세운 질서에 따라 살라는 뜻이 있었다. 또 그들이 되돌아갈 때에는 많은 선물을 주는 화친정책도 함께 펼쳤다. 다같이배왈리 제사는 일종의 외교무대였던 것이다.


팽이치기와 공기놀이

<그림5> 20세기 초 미국인 학자 쿨린이 보고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팽이. 우리나라 팽이와 똑같다.
우리 민족은 팽이치기를 했다. 팽이는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고, 치는 막대기는 그 끝에 질긴 닥나무 껍질을 매달았다. 필자도 어린시절 팽이를 직접 깎아 만들어 치곤 했다. 팽이치기는 농사철이 끝난 겨울에 하는 놀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팽이치기를 했다. <그림5>는 20세기 초, 그들의 팽이치기를 미국인 학자 쿨린(Culin)이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한 것이다. 팽이 모양과 막대기도 필자가 어린 시절 만들어 놀던 것과 같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놀이 중에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공기놀이가 있다. 다섯 개의 돌을 가지고 하는 놀이로서, 첫 단계에는 땅에 흩어진 돌을 집는 행위로 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돌을 건드리지 않고, 왼손으로 만든 아치형 안으로 집어넣는 놀이를 한다. 필자도 어린시절 매우 자주 하던 놀이이다.

<그림6>은 멕시코 북부 지역에서 하던 공기놀이에 대한 관찰 보고서이다. 그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치형을 만들 때의 설명이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우리가 아치를 만드는 방법과 정확하게 같다.

<그림6> 멕시코 북부 지역의 공기놀이에 대한 보고서(왼쪽)와 ‘아치형 왼손’의 모습.
<여자들 두 명이 하는 놀이이다. 5개의 둥근 조약돌을 먼저 준비한다. 먼저 하는 여자가 그 다섯 개의 돌 중에 하나를 ‘나의 돌’로 골라서, 그것을 공중으로 던지고, 눈은 그것을 보면서 그 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땅에 있는 네 개의 돌중에 하나를 집는다.

이렇게 땅에 있는 돌들을 차례로 하나씩 다 집은 후에, 그 여자는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한 번에 두 개씩 집는다. 그 다음에는 세 개를 집고, 나머지 하나를 집는다. 그 다음에는 땅에 있는 돌 네 개를 동시에 집는다. 여기까지 성공하면 이긴다.

그 다음 놀이는 더 어렵다. 돌 하나를 선정하여, 앞의 게임처럼 공중으로 던진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과 중지가 만든 아치(원형 홀)-검지는 중지 위에 겹쳐 놓는다-속으로 땅에 놓인 돌을 밀어서 집어넣는다. 순서는 첫 번째 놀이와 같다(즉, 처음에는 하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세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은 후,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고, 마지막엔 네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는다). 세 개를 먼저 집어넣고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어야 할 때, 상대방이 돌 하나를 지정하면, 그 돌을 선택한다.>


윷가락은 네 개로 변모

<그림7> 북미 인디언들이 초기에 사용하던 3개 윷가락(왼쪽)과 네 단계 말판(오른쪽).
윷도 삼국시대에 이미 하던 우리 민족 고유의 놀이 중 하나이다. 항상 두 편으로 갈라서 하며, 나무를 쪼개어 네 개의 윷가락을 만들고, 말이 갈 길을 만든 판을 말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찍이 윷놀이를 연구했던 양주동, 박은용, 성병희 선생과 오늘날 민속학의 대가인 임재해 선생은 우리 민족의 윷놀이가 원래는 ‘도, 개, 걸, 윷’까지의 네 단계 놀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윷놀이의 명칭을 마지막 단계인 ‘모놀이’라고 하지 않고 ‘윷놀이’라고 부르는 점도 이분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윷놀이를 했다. 그리고 이들의 초기 윷놀이는 네 단계 놀이였고, 윷가락도 3개였다. <그림7>은 북미 지역에서 사용하던 3개의 윷가락과 네 단계 말판이다.

그리고 우리의 윷이 발전하여 네 개의 윷가락과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단계 말판으로 바뀌었듯이, 멕시코와 미국 원주민의 윷놀이도 바뀌었다. 그들도 윷가락이 네 개로 되었고, 말판은 열 단계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칸 뒤로 가는 훗도를 만들었듯이, 그들도 윷가락에 여러 가지 표시를 하여, 어떤 것은 2점, 어떤 것은 4점, 어떤 것은 6점식으로 점수를 다양화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림8>은 멕시코 북부 지역과 미국 남부 지역에서 사용하던 네 개의 윷가락과 열 단계 말판의 그림이다. 그들의 말판도 사각형과 원형이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 민족의 아메리카 이동이 10세기 전후까지 긴 세월 동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네 개의 윷가락은 만주에서 이미 그렇게 발전된 것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8> 미국 남부 및 멕시코 북부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4개의 윷가락(왼쪽)과 원형 말판(가운데) 및 사각형 말판(오른쪽).
윷놀이는 부여에서 시작됐는데, 말 경주를 본떠서 만들었다. 그래서 윷놀이 판을 ‘말판’이라고 부르고, 놀이에 사용되는 돌이나 나뭇조각을 ‘말’이라고 부른다.

만주에서 사라진 우리 민족이 대거 아메리카로 건너가면서 그들이 즐겨 하던 놀이가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놀이가 바로 윷놀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윷놀이에서도 말판에 사용된 돌을 ‘말(horse)’라고 불렀다. 돌을 보고 ‘말’이라고 부르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윷판에서만 그렇게 부르는 것까지 같으면서….


인디언의 윷놀이

아래는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州) 애리조나대학교 인디언 박물관에 보관된 인디언 윷놀이에 대한 설명이다.

▲윷의 모양은 한 면은 평평하고 뒷부분은 둥글다.

▲각 참가자는 자기 집에서 말을 출발시킨다.

▲움직이는 대상을 ‘말(horse)’이라고 한다(말로서 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말이 출발하는 곳을 ‘집(house)’이라고 한다.

▲윷을 한 손에 수직으로 잡고서, 그 밑을 다른 손바닥이나 땅에 평평한 돌 위에 탁 친 후 공중으로 던져 떨어지게 한다.

▲윷가락 가운데 서로 닿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던진다.

▲1점당 한 칸씩 움직인다.

▲점수는 최소한 5점을 넘어야 말이 집을 나올 수 있다.

▲윷을 던져서 옮긴 말이 상대편의 말 위치에 오면, 상대편 말을 잡는다. 상대편의 말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한다(상대편 말을 패퇴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낸다).

▲자기의 모든 말이 윷판을 돌아서 먼저 집으로 오는 자가 이긴다.

▲우리의 ‘모’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오면 ‘조오타(jouta)’라고 했다(특히 윷을 던져서 나온 숫자가 단번에 10이 나오면 이렇게 말했고, 한 번 더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인디언에게 직접 조사함).

<그림9> 멕시코 원주민들도 우리 민족처럼 달 속에 토끼가 산다고 믿었다. 사하군 신부의 아스텍 역사서에 실린 달 속 토끼 이야기 그림.
그 밖에도 아메리카 인디언과 우리 민족 간에는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달에는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1924년 일제(日帝) 강점기에 윤극영은 이 민족 설화를 이용하여 ‘반달’이라는 동요를 작곡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라는 가사가 있다. 그해 10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옛적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산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우리 옛이야기를 살린 점이 또한 훌륭하다’고 평했다.

멕시코 원주민들도 달 속에 토끼 한 마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림9>는 사하군 신부의 아스텍 역사서(7권2장)에 기록된 그들의 달 속 토끼 이야기를 소개한 부분에 실린 그림이다.


모카신과 막까기틀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에 가면 모카신(moccasin)이라는 가죽신을 파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모카신은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던 가죽신으로서 바닥이 평평한 것이 특징이다. 이 모카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20세기 초의 독일 인류학자 구트문트 하트(Gudmunt Hatt)였다. 그는 이 가죽신이 원래 아무르강 유역에서 신던 신발이었는데, 아메리카로 전해진 것이며, 눈에 빠지지 않도록 그물망 같은 눈발(설피)을 바닥에 받쳐 신기도 했던 신발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림10> 오늘날의 모카신(왼쪽), 모카신에 눈발을 받쳐 신은 인디언(가운데)과 눈발.

<그림11> 조선 시대의 목화신(왼쪽), 강원도의 눈발(오른쪽).
그런데, 우리 선조들도 가죽신을 ‘모카신’이라고 했다. 조선 초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왕과 사대부가 신는 가죽신을 ‘목화(木靴)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을 영어로 기록하면 바로 모카신(moccasin)이 된다. 또 우리 민족도 신발 바닥에 눈발(설피)을 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 아직도 그 풍습이 남아 있다.

<그림12> 멕시코 원주민의 막까기틀.
신대륙 발견 이전에, 아스텍제국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지 않았다. 철광산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대륙 발견 이전의 전쟁 무기로는 활, 창, 몽둥이 등을 사용했는데, 그중에도 대표적인 무기인 몽둥이를 그들은 막까기틀(macahuitl)이라고 불렀다. ‘막 까는 도구’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어휘가 부족했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도구를 ‘틀’이라고 불렀다. 필자도 어린 시절 부친께서 여러 가지 생활도구를 ‘틀’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했다. 그 당시에 ‘틀 가져오너라’ 하면 항상 무슨 틀을 말하는지 헷갈려서 ‘무슨 틀요?’ 하고 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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