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조선대륙사

2015. 3. 18. 03:59조선 (1392-1910)

 

· 우리역사 바로알기

조선대륙사

2012.05.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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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공 날조된 역사의 진실은 결국엔 드러난다

역사를 진실로 보려면 현재의 국제정세나 시각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오늘날 존재하는 지구촌 국가의 8할 이상이 19세기~20세기 들어와 분리되거나 새로 생겨난 신생국가들이다. 물론 그 배경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음모가 위치한다.

대략 19세기 초까지 THE COREA란 국가는 수천년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나라였다.

우리 민족을 흔히 동이족이라 이르는데, 동이와 서이를 가르는 말의 기준은 지중해다.

한 예로 제도역사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민족구성을 지배층 고구려인 10%에 피지배층 말갈인 90%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갈이란 종족 중에 흑수말갈이란 이들이 있다.

고구려의 전성기 영역은 동아시아에서부터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었고, 말갈족 군사를 앞세워 유럽의 서이를 정벌한 흔적이 강렬하게 남겨졌다. 오늘날 동유럽의 북해가 발(트)해, 그 남해가 흑해로 불리게 된 배경은 고구려-발해의 흑수말갈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다.

동이족은 그러니까 서이족(오늘날의 유럽인)이 칭한 지중해 건너편의 황인종을 일컫는 용어였다. 오늘날의 중화민국의 동쪽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동이와 서이를 가르는 기준은 동아시아대륙이 아닌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지중해가 그 배경이다.

헤르도토스의 ‘역사’와 함께 역사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가와 저서로 꼽히는 사마천 ‘사기’의 시기 오늘날의 유럽에서 자신의 역사로 각색한 지중해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부터 소아시아 반도와 크레타 섬과 이집트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규모의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기’와 중화민국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마무리하여 천하를 통일했다는 진의 시황제와 지중해 세계를 평정하여 서아시아와 인도 일부까지 정벌했다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일인물이다.

이 두 인물의 활약시기와 이들이 일궈낸 역사적 성과, 이상할 정도로 단명한 제국 등의 특별한 이야기는 사실 동일한 역사를 후대에서 다르게 각색한 것이다.

현재 중화민국에 있는 만리장성은 고려장성이고 시황제의 황릉이라는 병마용갱은 고구려의 유적이다. 시황제는 기껏해야 동이의 서쪽부분만을 공략했을 뿐이고 동아시아 조선대륙에는 들어오지도 못하였다.

아무튼 역사내내 동이에 눌려있던 서이가 가장 화려한 역사를 썼던 시기가 시황제(알렉산드로스 대왕)시기 이고 그 이후로는 다시금 동이의 변방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것을 유럽사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 이후 로마사, 비잔틴 제국사, 이집트사 등으로 개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의 역사는 중세이전까지는 사실 같은 문명권의 역사로 봐도 무방하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진나라) 이후 지중해 이동의 동이에 가장 강력하게 맞선 이들이 이집트로 실제 당시의 이집트가 중화민국의 역사에 나오는 수나라와 당나라이다.

삼국통일의 진실 역시 이러하다. 아시아대륙의 중부이북 지역에 널따랗게 펼쳐져 있던 고구려와 역시 그 북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나 동아시아대륙까지 장악하고 있던 백제에 맞서 아라비아의 사라센 제국(사로국 신라)이 인도(가야 연방)을 병합하고 이집트(당나라)를 끌어들여 아시아의 절반을 먹어치운 것이 삼국통일의 진실이다.

신라가 역사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점이 7세기경인데 이슬람 혁명으로 사라센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시점 역시 7세기로, 아라비아의 사라센 제국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는 물론 유럽의 남부지역과 모든 지중해 세계를 석권하게 된다. 이 사라센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휩쓴 역사가 사실 통일신라의 역사이다.

역사무대에서 변방이었던 유럽을 석권한 삼국통일의 주역 신라지만 실제로는 아시아대륙을 통일하지 못하고 발해와 남북국 시대를 열며 유라시아 대륙의 남쪽만을 점유하게 되었는데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동이족의 세력을 모아 신라를 쓰러뜨린 이들이 위대한 THE COREA의 시작이다.

고려의 진정한 아시아 대통일로 아시아 북방 민족인 돌궐족이 서진하여 사라센 제국의 영역을 흡수하여 셀주크-오스만조를 건설하여 고려의 제후국으로써 서이(기독교도 유럽인)를 막아내는 서역 방비를 담당하게 된다.

이것이 근대에 들어 서구 열강들과 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긴 중화민국 세력들과 결탁하여 갈아엎은 고대-중세사의 큰 흐름이다.

몽고 이후 이성계에 의해 THE COREA의 계속인 조선이 들어서고 왕자의 난 이후 조선은 이성계의 명과 이방원의 조선으로 갈라지긴 하나 큰 의미는 없다. 두 국가 모두 크게 봐서는 조선으로 오늘날의 연방국가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이 명나라는 실제로는 중화민국이 아닌 중앙아시아 역사에 나오는 티무르제국인데, 조선의 강역을 좁히기 위해 명나라의 강역도 휠씬 더 동쪽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청의 역사 역시 다르지 않다. 본시 명과 뿌리가 비슷한 청은 명을 남쪽으로 밀어내며 조선의 북쪽지역을 점하지만 조선과 청은 서로를 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명은 남하하여 인도지역에 무굴왕조(명나라의 계속)를 열게 되는데, 이때의 조선은 청나라와 무굴, 서역의 오손국과 새로운 대조선 연방을 형성한다.

이 기간 중 최초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유대 등이 조선대륙의 남해안가 왜를 지원하여 동양침탈적 성격의 세계대전인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실패하였으나 후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신진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의 제후국인 무굴(인도)에 들어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의 해양세력의 침투에 이어 대륙의 러시아 세력의 남하가 대조선 연방을 괴롭히는데 이에 중앙아시아 부근의 조선 북부지역과 청나라 서쪽 지역은 러시아에 흡수된다. 이것이 현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우즈벡, 카자흐, 투르크메니, 키르기즈 등)들의 민족 구성원들이 아시아 황인종의 뿌리를 망각하고 러시아계 성씨와 말씨를 구사하게된 이유이다.

아무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점차적으로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영불 등의 기독교도 유럽인들에게 포위되는 형국으로 몰리게 되는데, 수천년간 인류사를 선도했던 조선은 열등하고 탐욕스러운 양이와 왜들에게 타도와 절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제후국의 멸망, 누적된 피로와 압박으로 인해 쇠약해진 조선은 결국 내부의 모순 역시 심화되어 친일매국노가 활개치게 되면서 수도를 서안에서 남경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가 19세기 중후반 무렵의 일이다. 사실 대조선은 이때 패망한 것으로 보이며 대륙의 남경에서 코리아반도의 서울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후 임시정부가 대륙의 상해에 들어서게 되는데, 한 나라의 임시정부가 쌩뚱맞게 대륙의 타국에 들어선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그 곳이 마지막 대한제국의 영역이었으니 주로 대륙 동부지역 출신 애국자들이 남경 부근인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여기에 여운형 선생 같은 코리아반도 출신 애국자들이 일부 가세하기도 하였다. 짐승보다 못한 일제가 남경대학살이라는 대참사를 일으킨 장소가 남경이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세와 일제는 조선의 일부였던 코리아반도만을 조선의 전부라고 덮어씌워 반도를 대륙과 단절시킨 후 조선대륙에는 자신의 신분을 세탁한 앞잡이들을 이용해 중화민국을 세우는데 힘쓴다.

이로써 THE COREA 혹은 CHOSEN 으로 불리며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찬양했던 찬란하고 위대한 동방의 등불인 조선이 코리아반도에만 국한하여 KOREA로 남게된다

이 거대하게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알면 현재의 서구와 왜구들의 정체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선입견을 조금만 지우면 놀라운 진실들이 눈에 보인다. 하나 둘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섬라(태국)에서 꾸준히 조공을 바쳐옴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반도조선에서는 불가한 일이며, 의학 명서 동의보감에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작물의 효능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반도조선에서는 불필요한 서술이며, 조선의 특산물로는 과일 배가 유명했다고 하는데 코리아반도에서 배가 최초로 재배된 것은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의 땅끝 마을로 해남이 유명한데 대륙의 땅끝 역시 하이난(해남)이다.


2. 역사에서 조선에 중국이 있다면 코리안의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요즘 왜국에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신세계 질서에 대비해 우리 문화재를 가지고 흥정하는건지 목숨구걸하는건지 몰라도 지난해부터 문화재 관련 뉴스들이 많아 나오는데, 지금은 대장경 조판 1000년이라며 고려시대 문화재인 고려대장경에 관한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 아래의 기사 내용 중에는 국사 수업시간에는 절대 안가르쳐 주는 이런 특이한 대목이 있다.

http://www.ytn.co.kr/_ln/0106_201105082357483014Viewer

한문에 능한 사람도 하루 8시간씩 30년이 걸려야 다 읽을 정도로 방대한 고려 대장경은 불교만의 문화재가 아닙니다. 인도 철학은 물론 그리스 철학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로 '나선비구경'은 그리스계 왕과 승려의 논쟁을 담은 것입니다.

이상하다. 동북아의 동쪽 반도의 고려에서 지구 반대편의 그리스 왕의 이야기를 대장경에 새겨 넣었다? 제도역사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모두 역사내내 기껏해야 서역인이라곤 아라비아 상인 정도와만 협소한 범위 내에서 왕래했다고 하는데, 아라비아 보다 훨씬 서북쪽에 위치한 유럽의 그리스와도 왕래가 있었음을 숨긴 것인가.

아시겠지만 간다라 미술 양식이란게 있다. 전통적인 불교 양식에 그리스식이 더해져 새로운 미술 양식을 낳은 것이다. 이 간다라라는 것은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지류인 카불강 부근의 지역명이다. 이 간다라 양식이 우리나라의 고려시대 불상 제작 때 크게 유행했다고 하지.

우리나라의 불교 전래를 보면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불교를 받아들인다고 제도역사에 나오지. 물론 불교를 받아들이는 중간 과정에서는 중국이 위치하고, 당나라도 아닌 중국으로부터 수용해온다고 하지. 이 중국이 과연 당나라일까?

또 제도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코리아반도의 한강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게 정말 사실일까? 고구려 영토의 비중은 반도보다는 동북삼성이 훨씬 넓게 차지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무엇 때문에 반도의 한강을 못차지해 힘을 소모했을까?

2009년에는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고구려 유물에 관한 기사가 상당히 많이 나왔었지.

'중앙아시아까지 뻗어나간 고구려'

http://www.ytn.co.kr/_ln/0106_200910230757460832Viewer

기껏해야 동북삼성과 반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고구려와 고려 같은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의 유적·유물들이 우즈벡이니 카즈흐니 인도같은 중앙아시아와 자꾸 연결되어 나온다. 우리 민족이 반도에서만 수천년 멈춰있었다는 것을 이래도 믿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출생지와 불교의 발원지는 인도 북부에서 네팔 사이쯤으로 역사에서 풀이되는데, 붓다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신 종족에 관해서는 명확한 것이 없이 유럽 아리아인이라는 설과 전통적인 아시아 황인종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현재 불교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가 티베트인데 티베트는 인도 북부, 네팔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티베트인은 전통적인 황인종 민족이고 중앙아시아 국가이다.

티베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국가(?)인데 그 중 우리말과 흡사한 언어가 참 신기하다. 티베트어는 우리말의 할아버지를 할배, 할머니를 할매, 부엌을 정지, 밥 먹었나?를 밥 무운나?, 밥 먹어라를 밥 무우라, 맛있다를 마시다, 변소를 통시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이런 몇몇 단어와 말의 발음은 코리아반도의 경상도지역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티베트에는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 숫자가 1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중화민국이 감추려 했지만 서안과 집안에 대규모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으니, 중화민국에만 티베트와 서안, 집안에 가로로 나란하게 펼쳐져 엄청난 규모의 인류최대 문화유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동일한 양식의 피라미드는 과거에는 분명 동일한 문명권이었음을 방증해 주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이 문명의 주인은 이를 감추려 드는 중화민국과는 상관없음을 시사한다.

우리 코리아반도에는 엄청난 숫자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반도 북부의 동북삼성 지역에도 엄청난 숫자의 고인돌과 피라미드가 발견된다. 그리고 그 바로 서쪽인 서안에도 대규모 피라미드, 또 조금 건너편 서쪽의 티베트에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 하나로 연결된 거석문화다. 중앙아시아 지역과 반도는 원래 하나의 문화권 이었기에 고구려의 사신도가 반도 북부에서 발견됨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우즈벡에서도 발견되며 피라미드 같은 거석문화도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중앙아시아와 코리아반도가 하나로 연동되어 돌아갈 수 있었던 까닭은 고구려, 고려의 중국(중앙조정)이 중앙아시아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은 오늘날의 중화민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삼국의 중심지인 중국이었던 것이고, 삼국시대에는, 천자(황제)국으로 패권을 틀어쥔 고구려에 오랜기간 중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중국에 또한 한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사실은 인더스강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정신인 불교사상의 본류가 있는 중앙아시아 그곳에 패권의 상징적 가치가 있었기에 삼국은 그 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그로인해 고려시대에도 고려의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있었고 고려대장경에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리스풍을 대폭 받아들인 간다라 미술양식이 유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북쪽의 거란, 여진, 몽고 등이 순차적으로 고려를 괴롭히는데 거란인과 몽고인은 색목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색목인이라 하면 말그대로 눈동자에 색이 있다는 말로 푸른눈을 가진 백인을 지칭하였던 것이다.

칭기즈칸이 고려를 밀어내고 중앙아시아를 점유하고 색목인 우대 정책을 폈다고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가르치는데, 이 색목인이 현재 슬라브 러시아인의 조상쯤 되는 족속들일 것이다. 칭기스칸 또한 슬라브계 색목인과 혼혈된 야인이었기에 그러한 정책을 폈던 것이고, 하여튼 고려가 오늘날의 코리아반도에 있었다면 색목인이었던 거란이나 몽고와 전투를 치를 하등의 이유도 없고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반도의 북부 지역엔 서세동점의 역사를 지난 오늘날에도 색목인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몽고제국 시기 이 중앙아시아는 차가타이 한국의 일원으로 있다가 고려를 계승한 조선에 의해 다시 수복되어 조선의 중국 위치로 복원되나 이방원의 왕자의 난 후 함흥(사마르칸트)으로 도읍을 정한 이성계의 명(티무르제국)으로 갈려 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이 지역의 일부가 청나라에 떨어져 나간다. 19세기 중엽 들어, 차르 러시아의 제국주의 남하 정책으로 이 지역의 대부분이 러시아에 흡수(키르기스스탄 1864년 멸망, 우즈벡 1868년 멸망, 투르크메니 1888년 멸망, 타지크 1895년 멸망)되며, 이에 청은 러시아세력에 밀려 조선으로 남하한다.

조선은 북으로부터 러시아와 청에 압박을 받는 동시에 남으로는 영국, 프랑스 해양세력과 그들과 결탁한 일제에 위협을 느끼는데,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일제에게 직접적인 신변에 위협을 받고 조선의 친러관료들에 업혀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1896)한 후 다시 친일관료들의 압력으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이미 조선의 황도인 서안은 청에 병합되어 있었기에 남경으로 천도한 후 대한제국을 개국(1897년)하고 얼마 안가 내각을 장악한 매국관료들에 의해 강제퇴위되어 코리아반도의 서울로 유배(1910년)된다.

조선사는 19세기 중엽까지 조선, 삼국, 고려, 조선 모두 중앙아시아에 중국 혹은 한(칸)국을 두고 아시아대륙과 유럽,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조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면 우리 반도인은 무엇인가란 의문이 생길텐데 코리아반도는 역사 내내 조선의 성소로써 소도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정치적 기능은 거의 없었을테지만 대륙의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였음으로 꽤 의미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앞에서 티베트와 반도의 일부지역 방언이 일치하는 것은, 티베트 부근에 있던 왕조나 정치세력이 세력다툼에 패하여 소도로 피난했었기에 그 방언마저 유사하지 않나 생각되고 아마 그 세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맞은 김수로의 가야 세력일 것이다. 세력다툼에 패한 대륙의 정치범 뿐만 아니라, 대륙의 영향력 있는 왕조나 귀족 세력이 죽으면 그들을 부장품과 함께 코리아반도에 껴묻거리를 했을 것이고 그 세력이 강성한 황족이나 왕족은 집안이나 서안에 거대 피라미드를 조성했을 것이다.

고조선의 금법에서 소도를 훼손하는 자는 도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고조선을 계승한 동이의 권세가들은 정적이더라도 소도로 숨어들거나 묘지를 조성하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제도역사에 신라 유적으로 나오는 첨성대 같은 경우에도 사실 능의 도굴 방지를 위한 관측대였지 천문대는 아니었다. 물론 경주의 능이나 일부 사찰들은 신라의 유적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 곳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고 코리아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의 흔적이나 기록이지, 그게 신라의 살아있는 유적은 될 수는 없고 그로 인해 황궁이나 왕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일제와 서세는 이러한 조선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코리아반도를 강탈한 후, 이 곳에 조선의 모든 역사를 구겨 넣어 버린 것이다. 조선의 성지인 이 곳은 분명 조선의 축소판 이었으니.

대륙인과 반도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아마 19세기 중엽 정도까지는 대륙의 동북삼성은 물론이고 산서성 혹은 감숙성 정도까지는 조선옷(한복) 입고, 조선말 하는 우리 반도인과 동일한 혈통의 백성들 다수가 대륙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을 것으로, 실제 서양인 화가들이 구한말 서안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 조선옷 입은 조선 사람들이 대륙에 아주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륙의 이 조선인들은 코리아반도로 피난하지 못했다면 일제는 물론이고 중화민국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학살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침략 시기 즉, 대조선 해체 시기 왜 우리 민족인 코리아반도인 만이 조선이나 한국을 주장한 이유는, 19세기 중엽 이미 일차적으로 조선의 강역에 청이 러시아에 밀려 남하하여 대륙 동부와 북부, 반도만으로 좁혀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 직전의 조선 역사가 이미 왜곡되어 있었기에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즉 조선인들도 조선의 역사를 잘 몰랐을 것이다. 또 반도의 경우 조선황제의 정신적·종교적 직할지이다 보니 군왕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로 보이나 조선대륙 남부의 피지배 민족이라고 볼 수 있던 나라(?)들은 각기 자신들의 군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통치 연장선상에 이어 서세의 기독교적 통치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섬라(태국), 면전(미얀마) 등도 그 범주에 속하지만 대표적으로 안남(베트남)의 유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안남이란 국가(?)명은 황제가 있는 곳의 남쪽이란 뜻으로, 조선에서 서인, 북인에 밀려 소외된 남인 지역의 대륙 남부 지역이 기독교의 위협이 가장 심했는데 병인박해와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난 지역은 아마 이 안남 지역일 것이다. 1884년 안남은 프랑스에 병합되는데, 당시의 서세의 제국주의적 침공 전략을 유추하면 병인양요는 현재 꾸며진 소규모 전투의 역사와는 다르게 전면전 수준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에서도 대규모의 선교사 박해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불러왔고 그로인해 프랑스에 병합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가 문화재를 토해내면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장소는 코리아반도가 되었지만 외규장각을 약탈해간 강화도가 이 시기엔 이 안남지역이었을 수도 있는 것은, 서세는 19세기 아시아에 식민지를 경영하러 왔지 조그만 섬에 불장난 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세의 조선 포위는 조선의 해체와 멸망을 불러왔지만 민족주의 국가로의 이행을 부추긴 면도 있긴하다. 물론 그 민족주의는 자신들의 또다른 악랄한 식민지 경영의 수단이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서세의 민족주의 국가 형성은 프랑스 혁명에 이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벌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황의 승인하에 오스트리아 왕이 스페인과 동유럽 전부를 통치한다거나 카톨릭의 이름으로 스페인이 네덜란드나 독일 일부를 통치한다거나 하는 방식의 교황 신권주의에 저항하여 민족자결주의를 선물한다며, 민족 스스로 민주주의를 시행하라며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휘저었다. 물론 그 배후엔 유대인 자본가가 있었음은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 프랑스가 자본의 힘으로 유럽을 삼키려한 역사인데, 타대륙인 아시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가혹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동이족이라는 외래인의 통치를 받던 무굴(인도)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타고르가 영국의 통치를 받고서는 조선을 찬양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왕정에도 격이 있고 민주주의에도 격이 있으니. 좋은 정치제도가 우선적으로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정치지도자의 지혜나 덕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일테니 말이다. 서세와 일제는 기독교를 침투시키고 악덕군주를 몰아낸다는 구실로 남의 백성과 국토, 강산, 문화를 유린하고 짓밟은 세력들, 그들의 위선이고 기만적인 행태는 힘으로 제압하기 이전에는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서세와 일제의 기만적인 전술에 놀아난 이들이 갑신정변이니 갑오개혁이니 하는 개화운동가 들이었고, 반외세·반봉건의 진리를 노래한 조선독립군인 동학농민들을 청과 일제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무참히 짓밟은 친일매국 관료들은 원조 수구꼴통들이었다. 이들이 대륙에서 건너와 오늘날에도 이땅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을 보면 조선 백성들의 민족주의가 정치인들이 주입했거나 일제가 조장한 성질의 것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반추해보면 서세는 지들의 지배논리대로 가식적인 민족주의를 조장했지만 지구촌에 진정한 민족주의 국가가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3. 음흉한 일본의 조선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 승인.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입니다.

일본은 조선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데 그것이 러·일 전쟁(1904~1905)입니다. 전쟁 기간 일본은 영국과 두 번의 동맹, 미국과 한번의 비밀스러운 조약을 맺습니다. 일본과 영국이 두 차례의 영·일 동맹을 맺음은, 당시 일본이 영국의 괴뢰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미국과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는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미국이 승인하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일본이 승인하는 음험하고 매우 비밀스러운 조약이지요.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의 전투력이 일본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일본이 결국 승리합니다.

조선 지배권을 영국에게 빼앗긴 프랑스만이 예상을 깨고 자신들과 제국주의적 성향이 다른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지원합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일본을 지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개 전투력에서 더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 일본이 러시아를 패퇴시키며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영국-미국-일본이 하나의 몸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래서 반복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또 다르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본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필리핀의 역사를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리핀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무려 3백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로 사육되었다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1898년에 들어서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지만 이내 미국이 개입하면서 스페인과 미국간의 미·서 전쟁(1898년)으로 미국이 손 쉽게 승리하며 동년 12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필리핀과 괌이 미국의 영토로 옮겨 갑니다.

필리핀의 종주권을 스페인이 쥐고 있었다고 하는데 미국은 왜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야 했을까요? 역사의 진실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조선과 세계의 이면사를 잘 알고 계신 분들은 항상 그렇게 주장했지요. 왜의 원 거주지는 열도가 아니라 대만과 필리핀, 말레이-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으로 광범위 하다고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조선을 향한 일본과 미국의 시커먼 속내가 드러났을 뿐만아니라 일본의 정체성과 그 실체를 드러내 주는 매우 중요한 협잡으로, 20세기 초까지도 일본이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 왜의 근거지를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 해줍니다. 일본의 역사가 보통의 알려진 역사가 아니라면 조선의 역사도 제도권에서 말하는 그런 역사가 아닙니다.

일제 왜놈총독부의 마지막 개인 아베 노부유키가 말한 참으로 위대하고 찬란한 조선의 역사,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읊조린 동방의 찬란한 등불 조선! 역사는 위대합니다. 민족의 저력은 역사를 보면 됩니다. 우리 코리아는 과거 역사를 복본시키고 다시 한번 선한 인류를 위해 웅비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아프고도 쓰라리기도 하지만 19~20세기 왜양일체 제국주의에 의해 감춰지고 날조된, 국권피탈 시기의 우리 역사를 좀 더 정리해서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4. 문명시원국(?)인 중국의 체통은 왜 그렇게 가벼울까?

우선 현재까지 설정(?)되어 있는 역사와 정세로 말하겠다.

중국은 아시아를 대표해온 수천년의 문명국가요 문화국가요, 세계 사상의 은사이기도 하다. 그런 중국인지라 반도의 조선인은 물론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중국황제를 향해 절을 하고 중국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국일진데 현대들어 왜 그렇게 체신머리 없이 행동하며 아시아대륙의 아우들이 바라보기 민망할 행동을 연발하여 해대었을까?

역사에서 황제국 중국은, 반도 조선을 어여삐 여겨 중국황제에게 절하는 것과 조공물 바치는 것만 잊지 않거나 새로운 유학 철학만 잘 수용해 나가서 정신적으로 복종 잘하면 반도 조선을 정벌하는 일은 절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긴 세월 5천년간 말이다.

18~19세기, 산업혁명이라는 서세의 혁명적인 발전 후 아시아로 서세의 신무기가 포위하고 좁혀져 오는 힘의 열세를 느끼는 상황에서도, 중국 황제는 서세에게 친서를 하달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유학에 입각한 훈시를 두는 대범함을 보였고, 실제 영국은 이에 잠시 멈칫하였음을 서세들의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허나 오늘날의 중국은 어떠한가? 불과 얼마전까지 5천년 동안 절친한 아우로 대접했던 반도를 서세의 주구이자 괴뢰가 되어, 동북공정이란 정치공정을 해대며 못잡아 먹어 난리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5천년간 멸하지 않은 귀여운 아우 반도 조선을 수천년간 아시아를 대표해온 중국이 외세의 뜻에 의해 5천년간의 불문율을 깨려고 하였다. 국제정세와 힘의 이상 징후를 눈치채기 이전까지 말이다. 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가?

인류 철학사상의 뿌리이자 아시아 문명의 어버이인 황제국 중국이, 오늘날의 그 중국이 맞는가? 요즘 판 돌아가는 것 보니 중국은 언제든지 판세의 흐름을 살피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체통없고 부끄러운 아시아의 형님 모습을 못 감추고 있다.

역사에서 서세동점의 예비기에 중국황제는 깡구식 무기로 서세의 신무기 앞에 대놓고 꾸짖고 호통쳤다. 현대 중국이 미국을 비롯한 서세보다 힘의 상대적 열세를 느낀다 해도 현재의 괴뢰에 가까운 모습과 저 중국황제의 포효는 너무나 다르지 않는가?

아시아의 문명국 중국은 언제부터 서세의 괴뢰로 전락하였나?

나는 중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중화민국이라 칭할 뿐이지. 엄밀히 말하면 사실 중화라는 단어를 짱깨들이 내걸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그 어떤 중용의 덕을 찾아 볼 수가 있는가.

중국의 역사는 1911년 신해혁명 중화민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만 100년이 된 신생국가다. 7천년 역사? 웃기지 말라고 하라! 중화민국이 정부수립 후 남경을 도읍으로 정한뒤 곧 북경으로 옮겨간다. 장개석에게 승리한 모택동은 중국의 황금 문화유적이라는 자금성을 최초 손보기 시작하고 50여년간 가공하여 대중에게 열어 놓았다.

모택동 역시 사기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사상가로서의 진심이라도 있긴하니 전임자들인 손문이나 장개석, 후임자인 등소평, 강택민 따위 보다는 훨씬 낫다. 신해혁명 손문 정부가 남경에 도읍을 정한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곳에 일제의 괴뢰정부로 전락하고만 대한제국의 경운궁이 있었으니까. 한 마디로 조선 땅에서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삼민주의인가 뭔가하는 서구사상을 정치적 구호로 차용해 조선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이 그들의 급선무였다.

대한제국 멸망 1910년, 신해혁명 중화민국 정부 수립 1911년, 남경정부 1912년, 국제 역학관계에서 우연은 없다. 남경을 포함한 동중국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 시기에 혁명 정부의 수립이라?

문헌적 근거를 대라시면 못 댄다. 현재 역사가 국제역학 관계상 패권의 흐름대로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 있으니. 허나 우리의 통일조국에서는 아마 낱낱이 밝혀 주겠지. 다시 말하지만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전부 대륙에서 행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고, 임시정부가 남경 부근의 상해에 수립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서구열강이 제국주의 식민지 사업 경쟁 때와 같은 논리인, 위장된 민족주의를 조장하여 미국이 중국을 깨어보려는 것이 현대 중국으로써는 최대의 위협인데, 이점은 중국의 정체성을 아주 잘 말해준다. 한족이라는 허구의 민족, 허구의 중국 역사 즉 청나라와 중화민국의 민족과 지배층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국은 얼마간 미국으로부터 대륙 분할 음모를 방어해 내겠지만 결국 깨어질 것이다. 미국이 아닌 통일코리아에 의해 말이다.

20세기 중국이 핵무기 등을 보유하며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중·미 수교 등을 이끌어 내었기에 국제사회는 중국의 위용에 긍정적 평가를 내렸지만 글쎄, 모택동이 중국내부에서 왜 문화혁명이란 모험적 노선을 걸을수 밖에 없었겠는가? 일반 교과서적 학술서에 나오는 내용 외적으로 말하면, 애초 중국에게 있어 미국을 포함한 서세는 상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부의 모순이 그만큼 크고 그 모순을 중화민국을 건설해준 서세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

실제 중·미 수교 후 중국은 나아졌는가? 발전하였는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위협이 완전히 종식 되었는가? 물론 거품 경제로만 말하면 그러하지만 경제가 키워진 대신에 그로인해 서세는 더욱 더 중국을 얼마든지 제어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민족 분리 책동 아니어도 자본의 종속으로 말이다. 중·미 수교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굴복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등소평, 강택민 을 거치며 경제는 부풀려졌지만 굴복의 정도는 더 심화되었을 것이다.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탄생될 때부터 역사적 큰 모순을 안고 탄생했다. 모택동은 그 치명적 모순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이고, 자신들에게 대륙을 안겨준 서세에게 굴복하지 않고 대항하려 했겠지. 그러나 서세는 얼마든지 그들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미 수교 또한 그러한 큰 시나리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서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비는 무력이지, 수교 같은 위선적인 말장난이나 서세가 제어 가능한 거품 낀 경제력이 절대 아닌 것이다.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러한 면에서는 모택동이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긴 하다.

경제가 아니더라도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를 지켜 나가기 힘들다. 조선의 역사를 지우고 가공의 역사를 덧씌운 장본인들이 서세고 그것을 실천 이행한 것이 일본과 중국인데, 사정이 이러하기에 원숭이스러운 일본은 제 분수를 잘 알고 고분고분하지만, 이에 반해 잠시 저항하려 했던 중국도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위장된 역사와 소수민족 문제를 서세가 꽉 쥐고 있기에 중국은 끝까지 총대를 높이 올려 세워야 했다. 이렇기에 국제사회의 모든 문제는 그 어떤 이념보다 민족이 선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세의 압력에 의해 중국이 우리 코리아에게 가했던 동북공정은, 다시 말하지만 역사공정이 아니고 정치공정이다. 서세의 명에 의해 중국은 코리아를 붕괴시킬 명분이 필요했고 그것이 고구려 역사 문제였다. 역사는 살아있는 오늘날의 지표이지 과거만의 캐캐묵은 무용담이 아닌 것이다.

왜양일체가 전 아시아대륙에 걸쳐 있었던 우리 삼국의 역사를 반도로만 감쪽같이 이식시켜 놓았는데 고구려 역사만 어떤 모순이 남아 동북공정을 단행한 것일까? 그들은 우리 역사을 공기도 샐틈없이 거의 완벽하게 꾸며 놓았다. 중국은 인류문명사상 최고 가치를 지닌 피라미드 유적을 산으로 위장 은둔시켜 놓고 있다. 중국 내부의 역사와 관련한 움직임이 이러한 실정인데, 갑자기 순수 고대사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주장했을까?

동북공정은 중국과 서세의 누이좋고 매부좋은 협잡이다. 서세는 코리아를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짓밟아 놓으니 좋고, 중국은 주인없는(?) 티베트, 서안, 집안 등의 거대 피라미드 유적에 주인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서서 역사를 주장할까봐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역사 조작이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범죄가 드러날까봐 또다른 범죄로 그 범죄를 숨기고자 하는 치밀한 정치행위란 말이다. 그 파장은 단지 고대사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정체성의 존립문제로 이어질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비단 먼 과거의 고구려사만이 아니라 근세조선사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기에.

이런 주장을 펴면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사실이 그렇다 해도, 그럼 짱깨도 우리 민족 할꺼냐고? 그 부분은 난 다르게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역사에는 거짓이 없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리라 생각하며, 과거엔 그들도 조선의 백성이긴 했겠지만 현재 조선족 뿌리가 아닌 중국인이 우리 민족이 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근세)조선은 언젠가 깨어지고 각 민족간의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될 수밖에 없었을테지만 그것은 조선 내부에서 이뤄져야 했다는 것인데, 외세에 의해 우리 민족의 터전이 날조, 조작되는 바람에 대륙의 어디까지가 조선옷 입고, 조선말 하던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는지가 그 흔적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중국 정치인과 중국 학자에 의해 “중국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다, 우리 중국인이 조선인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 라는 말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실상이 이렇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고토회복이란 표현은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중국은 결국 깨어지고 말겠지만, 미국이 아닌 통일코리아에 의해서 그렇게될 것이리라. 통일코리아는 조선옷 입고 조선말 하던 우리 선조들의 터전을 되찾고, 중국의 각 민족은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할 것이다. 중국은 이제 참회하고 중국이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가야, 새로운 세상에서도 자신들 나름의 정체성과 역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소중화의 조선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왕자의 난 이후 갈려져나간 아버지 나라 이성계 명에 대한 조선의 유교적 겸손한 표현이었을 뿐으로, 이 명은 오늘날의 중화민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고 그곳에 ‘홍익인간’ 정신으로 인류를 이끄는 중용의 덕이 있었다.

중화민국과 통일코리아 중 그 누가 황제국에 걸맞는 위용을 인류 앞에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고, 또 수천년 인류의 사상철학적 은사 역할을 한 이가 어느쪽이었는지 드러나는 순간 전 인류는 조선의 참역사를 알게 될 것이고, 선한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통일코리아를 향해 우리식 예절로 절하며 답할 것이다.


5. 오천년조선은 어떻게 함락되었나?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호소문으로 글을 시작해 보려합니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조선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예수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우리말 중에 ‘장안의 화제’란 표현이 있다. 생활 속에서 누구나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 말의 유래를 모른다. 또 숙종실록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이고 (근세)조선은 지방이 고구려보다 배나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한다. 성씨 중 진양 강씨 분들이 많이 계실텐데 진양 강씨의 시조인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의 장군인데, 지역명 진양은 가야의 영역이고 고구려는 가야의 영토를 취한 적이 없다. 대륙의 어딘가에 진양이 존재한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선조들의 거대한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왜양일체 세력에 의해 갈갈이 찢겨나간 우리 민족의 혼과 얼, 그 역사를 한번 풀이해 보려고 한다. 강단사학은 조선이 근세 내내 중화민국의 전신이라는 청나라를 섬기는, 청나라에 반쯤 종속된 나라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직·간접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는 아시아 국가들의 멸망 혹은 국권피탈 과정과 비교하여, 조선 국권피탈 과정과 어떤 차이와 유사점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검정 글씨는 반도조선사 관점에서 사건을 요약하고 그 아래에 푸른 글씨로 나름의 이의제기를 해보겠다.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근세의 베트남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다가 직접 지배를 받기도 하였는데, 1802년 청나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뤄내고 응웬왕조를 창건한다. 그런데 응웬왕조의 2대 왕 성조명명제가 프랑스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1858년 베트남을 침공하기 시작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를 병합한다.

미얀마의 근세를 살펴보면, 베트남에 비하자면 명·청에 완전히 종속되지는 않고 독립 왕조를 유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세기에 그 세가 가장 강성해져 인접 국가인 라오스와 태국을 공략하였고, 1767년 들어서는 태국을 완전 점령하게 된다. 19세기 들어 영국의 침공을 받고 188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앙코르 와트라는 고도의 문명 유적을 보유한 캄보디아의 근세 이후의 역사는 예속의 역사인데, 좌우로 국경을 접한 태국과 베트남의 힘겨루기에 근세 내내 시달림을 당하였다. 그 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동시에 19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예속하고, 기존에 캄보디아에 종주권을 행사하던 태국의 반발을 사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완전 병합한다.

라오스의 역사는 원나라 시기 대륙 남부에서 라오스로 이주해온 라오족에 의해 시작되었다. 14세기 들어 캄보디아의 간섭을 받다가 18세기에는 베트남과 태국의 간접적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할 때 태국의 직·간접적 지배하에 놓인 라오스에 태국의 영향력을 제거한 후 괴뢰정부인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어 1893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한다.

인도차이나반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체에서도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영·미와 몇 차례의 통상조약(1926년, 1933년)만을 체결,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것이 태국이라 하고 그 이유를 태국왕의 외교력 등에서 찾고 있다.

그 외에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도 있지만 이 나라들의 역사를 비교해 볼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은 이들은 이미 근대가 시작되기 전인 근세 내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유럽제국에 의해 직·간접적 지배에 놓였던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필리핀의 경우는 아예 국가명 자체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에서 연유했으니 말이다.

의견을 덧붙이면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이곳이 (근대)일본 이전의 왜라는 것이다. 제도 역사에서 일본은 중화민국이나 코리아와는 다르게 이미 근세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며 유럽 문물을 받아들였다 한다. 당시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는 아메리카대륙에 식민지 경영 작업을 완수하고 아시아를 공략하려던 시점이었지만 대륙으로는 침투하지 못한다. 그 대륙의 주인이 명나라였건 청나라였건 조선이었건 간에 이들 유럽제국은 대륙황조의 영향력 때문에 인도차이나반도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동남아시아의 주변 섬에만 한정해서 식민지를 개척한다.

스-포-네 삼국이 인도차이나반도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하물며 동북아시아를 들어왔을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럼에도 일본은 동북아 국가 중 유일하고 정확하게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삼국과 교류하였다고 하지.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가 대륙의 중국(?)황제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하니 유럽 해양세력과 교류한 일본은 절대 동북아의 일본이 될 수가 없다. 그 실상은 열도로 이주하기 전인 말레이-인도네시아 섬 등의 왜구가 스-포-네 삼국과 교류한 것이 아닌, 그들의 반식민지로 잡혀 있었던 역사를 열도 일본의 역사로 이식하면서 동등한 외교관계로 각색한 것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 섬의 일부인 Java와 Japan은 직접 연관이 있고 현재의 일본어는 그 지배세력 일부의 언어가 변화한 것이다.

각설하고 교과서에 나오는 근대의 조선 내침사를 한번 살펴보자. 제도 역사가 기록하길 19세기 중엽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침략이 본격화 되었다고 하고 또 이 시기에 유럽제국과 처음 조우하였다고 쓰고 있다. 처음 일어난 사건은 1866년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병인박해로 이것이 빌미가 되어 같은 해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 병인양요를 맞게 된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강화성을 점령하여 외규장각 도서의 조선왕조의궤 등을 약탈해 간 것으로 결말된다.

병인박해와 같은 해 미국 상선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미국 상선의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부른다.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1871년 아시아함대를 끌고와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몇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백성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군은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사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은 아주 허약한 국가처럼 기록하고 있다. 명·청을 부모처럼 섬기며 조공을 아낌없이 바치는 반도의 작고 힘없는 나라라고 이르지 않았는가. 태국(섬라)이나 베트남(안남), 미얀마(면전) 등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래서인지 미얀마는 영국의 침공 한방에 식민지로 나가 떨어지고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 등도 너무나 쉽게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조선은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군사력을 보유한 막강한 국가였던가? 교과서에서는 조선의 상전 중의 상전인 청나라조차 아편전쟁(제1차 중영전쟁), 애로호 사건(제2차 중영전쟁)으로 영국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며, 굴욕적으로 원하지 않는 남경조약과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 물론 나는 이 두 차례의 전쟁 당사자가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라 믿고 있지만.

제국주의의 침공 방식은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르지 않다. 사건의 빌미를 조장하거나 때론 조작하여 상대의 시장 개방을 유도하고 응하지 않으면 침공한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전투 또는 전쟁이다. 프랑스는 병인양요와 똑같은 방법인 선교사 박해를 빌미로 베트남을 삼켰고, 영국 역시 신미양요와 유사한 방식으로 미얀마를 병합한다. 그런데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서는 왜 그러지 못했나? 또 미국은 왜 영국처럼 하지 못하고 헛물만 켜고 제국주의 군대를 일본으로 철수시켰는가? 조선이 정말 반도의 작고 허약하며, 청나라에 사대질만 해대던 나라가 맞는가?

1968년에는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거절당한 독일연방이 독일계 유대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로 하여금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게 하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일으켰다고 쓰고 있다.

1873년 강력한 양이배척 정책을 구사하던 대원군이 하야한 뒤인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탐측을 핑계로 강화도에 불법 침투하자 조선 수군이 방어적 공격을 하는데 일본 군함은 역으로 조선 수군을 무차별 공격하고, 조선 주민에게까지 방화, 살육을 저지르고 퇴각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운요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에 다시 조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우세한 근대무기로 무장한 채 무력시위를 벌이며 운요호 사건을 들먹이고는 도리어 조선에 책임을 물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나타났다.

위의 두 사건을 한번 들여다보자면, 서양제국 프랑스, 미국에 이어서 독일까지 조선을 집적이기 시작했나본데 통상 거부당한 뒤 독일인 오페르트는 무얼하려고 조선 왕족의 무덤을 도굴하였을까? 조선이 정녕 반도의 소국이면 군사력으로 두들겨 버렸어도 되었을텐데 황당한 도굴사건을 저질렀을까? 조선이 정말 반도의 힘없는 약소국이 맞는가. 또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다 한번씩 조선을 차지해 보려고 침략 책동을 벌였는데 당대 최강의 제국주의 영국은 조선이라는 존재를 몰랐던 걸까? 그게 아니라 영국은 이미 조선에 제일 먼저 침투하였던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자면 진실은 이러할 것이다. 영국에게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당해 남경조약과 북경조약을 체결한 당사자는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었고, 전략적으로 이미 우선적 이득을 취한 영국이었기에 제도 역사에서 영국은 조선에 대해 잠잠한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본다면 병인양요, 신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란 전제가 필요하다.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륙의 대부분을 청나라가 아닌 조선이 차지하고 있었고 대륙의 조선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건들을 대륙 청나라, 반도 조선 두 개로 갈라서 재구성한 것이라 생각한다.

1873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1875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함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일차적으로 조선을 차지할 대상이 정해졌음을 의미했다고 보인다. 당시의 제국주의 패권국가 영국이 일본을 사냥개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881년 청인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포하고 그 내용에는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연대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82년 조선과 미국간에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청나라의 알선 하에 체결되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1884년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펴며 조선과 조·러 통상조약을 얻어내고 이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1885년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다. 1888년에는 조선과 러시아간에 조·러 육로통상조약이 체결되는데 역시 치외법권 등의 조선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 내용들을 보면 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조선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뜻에 따라 조선이 미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남하는 막아낼 수 없었던 듯 하다. 허나 여기서 이상한 점은 청은 반도의 소국이라는 조선을 이용해서 러시아를 막아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반도의 조선이 그 정도의 능력이나 이용 가치가 있었다는 것인가? 조선이 반도의 허약한 소국이 맞는 것인가?

러시아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남하정책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영국이 반발한듯 하다. 그런데 영국이 왜 반발하는가? 아니 영국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오는건가? 앞에서 기술해 왔지만 영국은 조선과 그 어떤 이해관계가 없었다.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 독일과 차례대로 충돌하였고 일본과 충돌한 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청으로 인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그런데 갑자기 쌩뚱맞게 영국이 튀어나와 러시아의 남하에 반발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반발을 하더라도 일본이나 미국이 하는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겠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그래서 영국과의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피해자는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 중 최우선적으로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서구의 자본착취적 제국주의 국가들인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부터 내부적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후 자신들의 앞잡이인 일본에게 일시적 지배권을 부여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신들과는 제국주의적 성격이 조금 다른 러시아가 조선에 눈독을 들이자 큰 위협을 느끼고 우두머리인 영국이 스스로 뛰쳐나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해 버린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한다고 하는데 그 육로의 위치는 어디일까? 연해주를 말하는 것일까? 러시아는 1860년 들어서야 겨우 청과 북경조약을 체결한 뒤 연해주를 손에 넣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이 반도에 있었다면, 청의 동북삼성이 조선과 러시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을텐데 그 좁디좁은 연해주 샛길로 조선과 육로통상을 하고 또 조선의 국토로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면 반도조선과 국경을 99% 이상 접하고 있었던 청은 무엇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성과 상식으로는 조선이 반도 외에도 다른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 밖에 내려지지 않는다.

영국이 불법 점령한 거문도는 어디일까? 반도의 거문도는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에 달린 아주 조그만 섬이다. 면 단위도 아닌 리다 리! 리 단위에 속해 있는 아주 작은 섬, 예를들어 울릉도 처럼 크지 않은 섬도 군 단위로 설정되는데 거문도는 군도 아니고 면도 아니고 리 단위의 섬이다. 이 작은 섬을 점거해서 무엇을 할 것이란 말인가? 오늘날 처럼 핵무기가 있어서 그 곳에서 핵미사일 발사 하는 것도 아닐텐데 그 작은 섬에서 러시아를 견제한다고? 또 러시아가 남하한다 해도 연해주라는 반도의 최북부에서 내려 올텐데, 거문도는 반도의 최남부이다. 그 거문도는 정녕 반도의 거문도가 맞는 것인가?

위의 여러가지 사건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본견적인 침탈 움직임을 보이고 그 결과는 1889년 방곡령 사건 등으로 나타났고, 이에 조선 민중은 일본에 대한 저항 움직임이 거세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저항의 움직임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표출되었고 조선 정부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 중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고 이에 청이 반발하여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94년에서 1895년까지 두 해간 치러진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그 결과 일본과 청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다.

동학농민운동의 이념 골격은 반봉건·반외세라는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 기치를 내걸고 있었고, 구체적 실천 구호인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집강소 설치를 통해 실천하였다. 제도권 역사에서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이미 매국적 관료들로 가득 차 있었기에 친청파 못지않게 친일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이 일어나자 친청세력과 친일세력은 각각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족인 조선독립군 동학을 외세로 짓밟는다.

청도 엄밀하게 보면 외세이지만 동이계의 그들을 양이나 왜와 같은 선에서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중화민국이 청을 계승하였다지만 분명 실상은 아니리라 본다. -일본군의 최초 전투 대상은 동학군이었겠지만 동학군을 진압하던 청군과 조선에서의 알력 다툼이 발생하여 청·일 전쟁으로 번져간 것인데 동학군은 동년 9월 재봉기를 일으켜 청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을 개시하였을 것이다. 결국 일본이 청·조선 연합군에 승리한 듯 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확실하게 행사하게 된 것이다.

동학군이 외세에 짓밟히는 순간 민족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동학군의 혁명적 독립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우리 민족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경술국치도 민족분단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민족 자주의 힘으로 혁명적인 진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으리라.

1895년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행사하려 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을 견제하며 간섭을 해오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적고 있다. 이들 삼국 중 러시아의 세가 가장 강했던 것인지 조선 정부에는 친러 내각(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고 한다. 일본과 친일파는 이에 반발했기 때문인지 동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을미개혁(제4차 김홍집 내각)이 실시된다. 이듬해인 1896년, 일본과 친일 내각에 신분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 고종이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인 아관 파천이 발생한다.

동학군이 일본군에 짓밟힌 후의 조선은 외세 앞잡이들의 이전투구의 장이었다. 역사가들이 명성황후를 평가하는 견해는 매우 극명하게 엇갈리는데 일본 왜노에게 시해된 사실만 놓고 봐도 명성황후의 정체성은 보증될 것이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어떠했었나? 집권 초창기의 강력한 외세배척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임오군란 등을 일으켰었나? 아니면 권력에 대한 추한 집착이었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을미개혁 뒤엔 항상 일본이 있었다. 개화란 명분은 허울뿐이었고 결국 매국행위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조선에게 있어 동학농민운동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한편 청·일 전쟁 승리 후 사실상 조선의 종주권을 일본이 거머쥐었는데도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삼국연합을 맺어 일본에게 제동을 건다. 프랑스와 독일이 연합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차르 지휘하의 제국주의로 뭉친 러시아와도 연합을 한다. 조선이 무엇이길래 이들은 저렇게까지 집요했던 것인가? 조선이 정말 조그마한 반도의 허약한 소국인데 저들이 그 반도를 손에 못 쥐어 그렇게 집요했을까? 반도조선과 규모가 비슷한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가 홀로 다 차지해도 열강들은 아무런 군소리 없었다!

삼국이 일본을 견제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여기에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철저한 주구이자 괴뢰라는 것을 확실히 엿볼 수 있다.

1897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 파천한 고종을 경운궁으로 환궁케 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 이후 한일 의정서(1904. 2), 한일 협정서(1904. 8), 을사늑약(1905), 한일 신협약(1907), 기유각서(1909) 등을 체결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지며 조선의 반만년은 역사 속으로 저문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반도-동북삼성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다투게 되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한다. 이 배후에는 음험한 조약들이 있었는데 제1차 영일동맹(1902)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제2차 영일동맹(1905)이 그것이다. 그 중 그 악명 높기로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오랜기간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상·하, 좌·우의 협공을 받은 고종은 이미 오래전에 무기력해져 있었을 것이다. 아관 파천 후의 대한제국은 이전의 내각보다도 훨씬 더 친일 매국적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고, 보다 확실하게 일본의 괴뢰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을 것이다. 그로인해 조선은 시간표가 짜인 것처럼 아주 손쉽게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굴욕적인 경술국치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조선이 이렇게 확실하게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러시아는 조선 병합의 손을 놓지 않는다. 러시아의 이토록 집요한 집착은 조선이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그런 하찮은 조선이 아니었으리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해준다고 여겨진다.

한편 두 번의 영일 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보면 훨씬 이전에도 개인적 견해를 썼지만 일본과 영국, 미국이 한 몸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괴뢰를 배후 조종하는 이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었던 것 같다. 러·일 전쟁시 러시아를 지원한건 프랑스이고 일본을 지원한 것은 영국과 미국일텐데, 일본을 지원한 제국주의 세력은 역사적으로 드러난것보다 그 숫자가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우세한 전투력을 보유했던 러시아가 일본에 나가 떨어진 이유가 그에 기인한다.

조선의 향후 운명이 외세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인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외에도 일본의 정체성에 관한 숨은 진실이 있다. 이를 알기 위해 잠깐 필리핀의 역사를 보자. 필리핀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무려 3백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로 사육되었다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898년에 들어서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지만 이내 미국이 개입하면서 스페인과 미국간의 미·서 전쟁(1898년)이 발발, 미국이 손 쉽게 승리하고 동년 12월 파리조약을 체결 한 후 필리핀과 괌이 미국의 영토로 편입된다.

필리핀의 종주권을 스페인이 쥐고 있었다고 하는데 미국은 왜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야 했을까? 역사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 조선사와 세계사의 이면사와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왜의 원 거주지는 열도가 아니라 대만과 필리핀, 말레이-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으로 광범위 하다고 주장하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조선을 향한 일본과 미국의 시꺼먼 속내 뿐만아니라 일본의 정체성을 까발려 주는 매우 중요한 협잡으로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동남아 일대의 왜구 근거지를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종이 아관 파천 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고 한다. 앞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대한제국은 조선의 친일관료들이 일제에 부역하다시피 성립시킨 괴뢰에 가까운 정부였다. 대한제국의 실정이 이러했는데, 조선왕이 황제로 즉위한다?

갑오·을미 개혁을 거치며 조선은 개화한 것이 아니라 처참하게 일본의 식민 괴뢰로 나아가고 있었고, 이러한 패망직전의 조선왕이 황제로 옹립되는 것은 역사적 전후 상황을 너무나 무시한 우스운 날조 조작극이다. 고종은 애초 조선의 황제였고 대륙의 깊숙한 서안의 경복궁 황제로 있다, 조선의 패망을 앞두고 아관 파천되었다가 친일 매국관료에 업혀서 하는 수없이 남경으로 천도한 후 경운궁에 입궁하였을 것이다. 현재 경운궁을 반도 서울의 덕수궁으로 설정해뒀지만 이는 역사조작의 일환이다. 경운궁은 대륙의 남경 어딘가에 있었으리라.

맨 앞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장안의 화제’라는 단어도 이러한 역사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말이었다. 대륙의 서안(실제로는 장안)과 반도는 하나의 민족 문화권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현재의 코리아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시선을 주목하듯 반도의 조선인들의 생활상이 대륙 서안의 조선인들의 생활과 연동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장안의 화제’의 장안이란 장터나 시장이 아니다. 조선시대 ‘서울의 화제꺼리’라는 뜻의 조선 백성의 영혼에 배어있던 언어였던 것이리라.

오늘날의 조선의 후손들인 우리 겨레는 이렇게 치밀하게 이뤄진 역사 조작으로 인해 자랑스러운 진실을 스스로 아니라고 손사래 치고 있는 형국이 반복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께서 목숨 걸고 찾으려 했던 조선, 인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타고르가 그토록 찬양했던 찬란한 동방의 등불 조선, 왜구총독부의 개 아베 노부유키가 그토록 지우고 싶어했을 참으로 위대하고 찬란한 조선, 조선의 후예인 우리는 조선을 몰라도 왜-양은 위대하고 찬란한 조선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지은 죄가 너무나 커 위대한 코리아가 깨어나는 것을, 다시금 인류의 등불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있다. 목전에 둔 그 시간이 더뎌 보여도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6.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

오늘날 세계 종교를 구분할때 흔히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의 4대 종교로 구분한다. -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를 굳이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모두 기독교로 설명하겠다. - 이 네가지 종교는 지역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는데,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 대륙은 기독교,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은 이슬람교, 동아시아지역은 불교, 인도의 힌두교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불교 지역인 동아시아에 지속적으로 기독교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 중 대립이 가장 심한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십자군 전쟁부터 현재까지 천년 동안이나 전쟁 중에 있다. 기독교도들은 이슬교도들을 매우 호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무슬림으로의 개종이나 죽음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인데, 기독교도 유럽인 특유의 과장된 묘사다.

만약 기독교도 유럽인들의 표현처럼 서아시아 이슬람교도들이 호전적이라면 동아시아의 불교도와는 왜 그러한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까? 기독교도 유럽인들이 숨긴 역사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이를 풀이하기 위해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4000년 전 하늘의 자손인 단군이 건국한 한국은 ‘신들의 도시’를 건설했고 세계 최초의 활자와 천문관측대를 발명했다.” 지난 해 이스라엘 대통령 페레스가 FTA를 빌미로 한 연설문의 일부이다. 이 유대 수장의 발언은 참 묘하다. 이 짧은 발언을 통해서도 우리의 거대한 역사가 다 드러나고 있다. 단군조선의 역사는 실사이고 우리 민족은 실제 천손민족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정고금예문, 직지심체요절, 무주정광대다라니경의 세계 최초 활자설 모두 사실임을 증언해 주고 있다.

한가지 새로운 것은 발언 말미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대를 발명했다는 것인데, 현재 코리아반도에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대가 존재하는가? 또 단군은 ‘신들의 도시’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복수형이다. 건설한 도시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 점은 국사시간에 배운 고조선은 연맹왕국 이라는 표현을 상기하시길 바란다.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대가 발명된 국가와 지역으로는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과 아라비아 북부의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기존 역사에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최초의 천문관측대를 발명했다니 무슨 소리인가?

동북아시아에서 갑골문자와 거대 피라미드 유적이 출토되고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부근과 이집트에 동북아시아와 흡사한 양식의 수메르 문자와 거대 피라미드가 출토된다. 기존 학계에서 이 지역에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대가 발명되었다고 설명하였는데, 유대 수장은 세계 최초의 저 천문관측대가 단군조선의 후손인 우리 것이라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반도의 조그마한 연맹왕국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거대한 연방국가일 것이다.

아직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영역이 감이 안오시는 분들을 위해, 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삼국의 영역을 통해 한번 더 설명해 보겠다.

신묘년에 왜가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이다. 백제가 왜를 끌어들이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는 반도의 상황이 아니다. 반도 사관에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없다. 북의 고구려와 남의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 이것은 서아시아의 카스피해를 말해주고 있다.

‘5월 중에 고구려 대왕이 신라의 매금(왕)을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다지기 위해 중원에 왔으나......’ 고구려 중원고구려비의 비문이다. 역사에서 중원 혹은 중토는 중국과 동일안 의미의 단어다. 반도의 고구려 왕이 반도의 신라 왕을 만나기 위해 대륙의 제 3지대인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또한 말이 안된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중원이라 불리는 중국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국은 어디인가?

국내의 어느 미술사학자는 코리아반도에서 출토되는 백제 유물과 동일한 유물이 페르시아 일대에 대량 출토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페르시아가 실제 백제라면 그 북해는 카스피해가 된다. 그 북쪽에 고구려가 있었다면 저 위의 광개토대왕릉비의 지리적 상황이 정확하게 설명이 된다.

얼마전 글을 올렸듯 우즈벡-카자흐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고구려의 유물이 대량 발굴, 출토되고 있다. 또 그와 동일한 유물이 동북아시아 일대에 드넓게 출토되고 있다. 고구려의 영역을 잘 알 수 있는 증거들인데,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움켜쥐고 있었다면 당연히 카자흐스탄의 서해인 카스피해를 두고 페르시아의 백제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제도권 반도 사관의 역사에서 삼국은 반도의 한강을 점령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다툰다고 하였다. 한강은 반도 내에서 삼국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페르시아의 백제와 중앙아시아의 고구려가 만나는 동시에 신라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여기에서 신라의 위치를 한번 추정해 보자.

최근에 국내의 어느 학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찬기파랑가’의 기파랑이 신라의 화랑이 아니라 서역의 승려라고 주장하였다. 서역이라는 것을 제도권 역사에서는 중화민국의 이서 지역 즉 서아시아나 유럽으로 설명한다. 반도 신라의 화랑이라고 여겨졌던 기파랑이 서아시아의 승려라니?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신라는 삼국 중 유달리 서아시아와 관련된 것이 많다. 고려 초기 신라시대의 풍경을 노래한 ‘처용가’의 경우도 대표적이다. 이 처용가에서 처용은 아라비아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반도 신라에서 아라비아인이라니? 물론 학계에서 처용가를 해설함에 있어서 코리아반도로 들어온 아라비아 상인으로 각색한듯 하지만, 반도 신라가 아라비아와의 왕래가 그토록 많았던 것일까? 시, 향가, 가사, 가요 다 합쳐도 고대문학의 숫자는 많지 않은데 아라비아인이 떡하니 문학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라? 또 물건 팔러온 상인이 현지인 여자와 간통을 저지른다?

처용가의 배경 무대는 반도가 아닌 아라비아다. 단군조선이 동북아시아에서 지중해에 걸처 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 연방국가를 세웠다면, 지중해 일대의 단군조선 후예가 아라비아에 신라를 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처용가를 통해 아라비아의 신라인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처용가에서 나와 아내는 평소 처용과 같은 아라비아인과는 어느정도 단절된 생활을 하였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시엔 신라와 아라비아인이 다문화 잡탕 짬뽕 사회를 이룬 것은 아닌것 같다. 골품제도로 대표되는 신라의 신분제도는 삼국 중 유달리 엄격했는데, 그 골품제도는 신라인과 아라비아인의 구분을 위해 존재한 제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페르시아가 백제, 아라비아가 신라,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까지가 고구려라면 이 세 국가가 만나는 곳은 중앙아시아 일대가 될 수밖에 없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이 곳을 한강을 낀 경기도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실제의 그 곳은 인더스강을 끼고 있는 중앙아시아인 것이다. 이 곳이 중원이고 중토이며, 곧 중국이다. 고구려 왕과 신라 왕은 삼국의 중립 지역인 중앙아시아 중국에서 교류하였던 것이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삼국이 각기 한강을 차지한 시기에 전성기로 나아갔다고 해석했는데, 그 한강과 경기도라는 것을 인더스강과 중앙아시아의 중국으로 해석하면 왜 그 곳을 차지한 나라가 전성기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쉽게 된다. 백제는 3~4세기에, 고구려는 5세기에, 신라는 6세기에 한강을 틀어쥐게 된다. 제도권 역사에서 말한, 5세기 고구려 최전성기의 장수왕이 왜 대륙으로 뻗어가지 않고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정책을 폈는지 이해가 되시는가? 사실 고구려는 동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서남아시아만 점령하면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것이었고, 고구려 최전성기의 장수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남하정책의 고삐를 조인 것이다. 중국을 얻으려고 말이다.

고구려가 중국을 차지하지만 페르시아의 백제와 아라비아의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고 결속하니 삼국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6세기 신라의 반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중국이 신라의 손에 넘어가고 이어, 중앙아시아 이남 인도지역의 가야를 신라가 병합한다. 7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등에 위치한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나·당 전쟁을 치러 아시아 남부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다. 이것이 삼국통일의 진실이다. 이 삼국통일의 역사가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는 아라비아사로 각색되어 있다.

신라의 초기 국호는 신라가 아닌 ‘사로’다. 이 때문에 서양사나 서아시아사에서는 이슬람 혁명 후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유럽을 석권한 이슬람 제국을 사라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로국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시기는 7세기이고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아라비아가 제국으로 나아간 시점도 7세기로 동일하다.

실제의 역사가 이러하니 신라가 통일한 삼국은 반도의 삼국이 아닌 유라시아 전체의 통일이었던 것이다. 단, 북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제외하곤 말이다.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세력은 고구려 멸망 즉시 그 세를 모아 발해를 일으켜 신라에 맞선다. 제도권 역사에서 발해에 대해 기록하기를 지배층 고구려인 10%, 피지배층 말갈인 90%로 기록하는 것은, 현재 러시아 근처의 북아시아에 슬라브인과 혼혈된 말갈인에 더하여, 순수 조선 계열의 고구려인이 규합해 세운 나라란 뜻이다. 근세조선의 한치윤이 발해의 역사서인 해동역사를 펴냈는데 여기서 해동이란 중화민국과 코리아반도를 가르는 서해가 아닌, 서역과 동방을 가르는 지중해와 흑해를 가리키는 것이다.

제도권 역사에서 기록하길 신라에는 신라도라는 교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8세기 초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 실크로드다. 실크로드가 활성화 된 것은 7세기 중반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서역을 통일한 신라가 동방의 고구려를 허물었으니 동서교통로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 교통로를 본격적으로 닦은 것이 7세기 중반의 일로 삼국통일의 시기와 일치한다. Silla Road를 Silk Road로 가리려 했지만 쉽게 드러난다.

종교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샛길로 빠진 감이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종교는 무엇인가? 저기 위에서 ‘찬기파랑가’의 기파랑이 서역 승려란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서역 승려라 함은 서역의 불교 승려가 아닌 이슬람 승려를 말한다. - 서역에 불교도는 없지 않는가? - 이슬람교가 본래 아브라함의 유대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고 불교가 변모한 것이란 말이다. 서역의 불교는 이슬람교이고 동방의 불교는 보편적인 정통 불교란 말이다. 현재 중앙아시아를 기점으로 그 서쪽은 이슬람교가 우세하고, 그 동쪽은 불교가 우세한데 이슬람이 우세한 지역은 전통적인 신라의 지역이거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역이며, 정통 불교가 우세한 지역은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이다.

사라센 제국인 신라의 전성기가 쇠할 즈음 발해의 유이민 세력을 흡수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동방이 신라을 재흡수 하여 통일하니, 이들이 진정한 아시아의 통일국가를 성립시킨 고려다. 종교적 색채로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니, 정통 불교를 선호했을 것이고 이것이 고려의 팔관회나 연등회의 불교장려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영역인 동방엔 황제령으로 직접 다스리고 서역 불교인 이슬람 지역엔 제후국을 세워 관할하게 하였으니, 이들이 제도권 역사에서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등으로 기록된 돌궐족 왕조다.

실제 역사가 이러하니, 제 아무리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라도 불교도와는 전쟁이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라센 제국 시기인 통일신라 시기까지는 기독교도 유럽인들은 이슬람교도 아래 숨죽여 지냈다. 이후 동방 불교도 고려가 신라를 흡수하고 신라지역에 제후국 돌궐왕조를 옹립시킬 즈음, 카톨릭 교황청이 이에 응전을 해나간 방식이 유럽에서 이슬람교도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이에 유럽 남부의 스페인 등이 이슬람으로부터 독립하며 카톨릭 교황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지만, 동유럽 발칸반도의 나라들은 여전히 대부분 이슬람교도 돌궐왕조 지배하에 있었다.

카톨릭 교황은 동유럽 수복의 소극적 응전이 아닌 전면적 침공으로 국면을 전환시키는데 이것이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나, 중세내내 수백년간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가 이어졌는데 여전히 돌궐왕조의 이슬람교도가 우세했다. 이어 동방에서는, 흑해연안에서 슬라브 백인과 혼혈된 말갈인들의 후예인 몽고인들이 아시아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사이, 고려를 무너뜨린 달단(타타르)인 이성계 세력이 새로운 유라시아 천자국을 세운 것이 근세조선이다.

근세조선 창건세력은 달단인이었기에 동방의 정통불교 대신 서역불교인 이슬람교를 신봉했을 것이고, 이것이 숭유억불 정책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식 정통 불교가 몸에 배인 백성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고, 유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서역불교 이슬람교는 의제화 되는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왕자의 난을 계기로 중앙아시아의 명과 동방의 조선으로 조선이 분열되었는데, 이에 명은 더욱 서역화 되고 조선은 동방화 되어 갔을 것이다. 물론 도중에 태종, 성종 등이 도첩제 실시, 도첩제 폐지 등으로 이어지는 강경한 불교 억압정책을 시행했지만, 민간에 뿌리깊이 박힌 동방식 정통 불교를 들어낼 수는 없었다.

이 긴 역사의 흐름이 깨어진 것이 근대 기독교의 침투이다. 고려시대 이후 고구려식 정통 불교가 신라식 서역 불교에 승리하며, 서역의 이슬람교도가 보다 더 서쪽의 기독교도 유럽으로부터 동방을 방어하는 제후의 역할을 수백년간 해왔다. 허나 돌궐 왕조 오손국이 17세기를 기점으로 국력이 쇠하며, 기독교도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에 밀리기 시작한다. 나폴레옹 시기, 전략적 민족주의의 침투에 의해 발칸반도의 동유럽 국가들과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알제리 등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19세기 들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손국은 700여년의 역사를 마감한다.

오손 돌궐이 무너지면서 조선은 기독교도 유럽에 무방비 상태에 빠졌고 카톨릭은 보다 손쉽게 기독교를 유포시키며 조선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19세기 기독교가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조선 정부의 박해는 물론이며, 풀뿌리 민초들까지 기독교, 서학에 저항하는 대종교와 천도교, 동학 등을 창시하며 총궐기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카톨릭이 천주교라는 기만적인 이름을 차용하고 전략적으로 제한된 제사를 허용하는 순간, 단군 하느님을 섬기던 조선의 백성들은 야훼에 속아 넘어가고 샤머니즘과 불교로 이어졌던 조선의 반만년 역사는 저물고 말았다.


7. 명과 청은 조선에게 있어 무엇인가?]

이 글은 이전에 게시했던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를 읽고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혹시 안 보신 분은 그 글을 먼저 읽는게 순서상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대개 오천년으로 말한다. 한편 상고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설명으로는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를 합해 최장 일만년 정도는 된다고 한다. 우리는 경술국치 이전까지 외세에 피정복 되어 역사가 끊겼던 기간도 없다. 많이 양보해서 우리 역사를 오천년으로 잡아도 지구상에서 우리와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이라는 외세로부터 문명과 문화를 수혈 받기만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세계의 질서는 힘으로 유지된다. 이는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힘이 없는 나라는 주변국에 정복되어 역사의 맥은 끊어지고 민족은 정복 민족에 동화되거나 사라진다. 넙죽 엎드리고 사대질만 해댄다고 역사가 지속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통용되겠지만 굴종은 더 큰 굴종을 낳고 결국엔 치욕을 맛보게 된다. 세계의 각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그 운명을 피해 갔을까?

지구촌에서 역사기간으로 우리와 어느정도 견줄 수 있는 나라들로는 중화민국과 이집트, 인도 정도가 있다. - 예시적 차원에서 이들을 열거하지만 실제 역사로는 중화민국은 역사가 없는 백년짜리 나라고, 이집트와 인도의 역사는 객체의 역사이고 그 주체는 따로 있다. - 그런데 이들의 역사도 우리처럼 지속적으로 이어진 적은 없고 외래인에게 끊임없이 정복당한 피지배의 역사이지 자민족에 의한 주체적인 역사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지구상에 피지배나 피정복 없이 이 정도의 역사를 유지해온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약소 나라이며 민족이라고 세뇌되고 있다. 이게 사실일까?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하게 되는게 당연한것 아닐까? 지구촌 유일하게 반만년의 역사를 자민족의 힘으로만 유지해온 나라. 하지만 힘이없어 항상 조공만 바치면서도 오천년간 한번도 멸하지 않고 타민족의 노예가 되어 본적이 없는 나라. 참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역사 논리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우리의 역사가 명나라와 청나라에 절반정도 종속되어 독립국가의 체면만 겨우 유지했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데, 이 명·청의 역사를 통해 중화민국 짱깨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서 진실은 무엇인지 확인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과 청의 역사는 조선의 지방정권 정도에 불과한 역사이고 중화민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역사이다. 이를 아래에서 설명해 보겠다.

우선 과거에 비행기나 텔레비전 같은 현대식 물품들이 없었다고 세계의 흐름이 단절되었으리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국제관계의 흐름과 세계사가 존재하듯 과거에도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와 그에 이끌려 가는 나라들이 있었고, 세계사의 흐름은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다만 현재와는 대조적으로 아시아가 중심이고 유럽 등은 주변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대륙에 있었건, 반도에 있었건 세계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현 중국은 만으로 딱 백년된 역사가 없는 나라다. 역사가 없으니 주변의 역사를 전부 도용하거나 일부를 짜깁기하거나, 소설처럼 창작한 역사가 대부분으로, 굵직굵직한 흐름이나 연대를 제외하곤 별로 참고할 만한게 없다. 때문에 현재 중국에게 나라와 역사를 도둑질 당한 이웃나라들의 역사를 분석해 보면 중국이 차용하고 있는 역사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우선 명과 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몽고제국 말엽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의 지나대륙은 본래 고려대륙이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영역이었고, 아무튼 현 지나대륙에 몽고의 원이 쇠할 시점을 한번 들여다보자. 먼저 버려야할 편견은 내외몽골에 있는 몽골인이라 불리는 종족은 사실 몽고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조선의 강역을 좁히는 조작질을 하는 통에 카자흐스탄의 북부지역에 있어야 할 몽고인이 저들로 둔갑된 것으로, 저들은 전통적으로 고려-조선의 구성원 중 하나였던 종족이다. 몽고인은 고서에서 말하길 푸른눈에 붉은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라고 했으니 백인의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의 피지배계층 중 하나였을 것이고, 발해 당시 말갈이라 불렸던 족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몽고제국은 현 지나대륙에 있던 천자국 고려를 코리아반도로 밀어내고 스스로 새로운 천자이길 과시하듯 원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네 개의 한(칸)국을 연방국 형태로 관리하며 유라시아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차가타이 한국을 두었고 차가타이 한국의 북부에는 오고타이 한국을, 서아시아 지역의 일한국과 슬라브 유럽과 맞닿은 지점에 킵차크 한국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은 고려황제가 있던 동아시아대륙이었다는 것이다. 몽고는 당시 세계를 지배했다고 하는데 몽고제국의 본산인 원을 동아시아대륙에 두었고, 유럽의 중심인 서유럽에는 한국을 세우지도 않았음은 유럽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중화민국 역사에서 명의 전신 국가로 나오는 송이란 나라는 하나의 역사를 대륙과 반도의 둘로 구성하기 위해 대륙에 있던 고려의 역사를 송으로 창작한 것이고, 몽고 침략으로 인해 고려가 대륙을 잃고 강화로 천도할 즈음엔 고려의 역사는 당연히 지속되지만 송은 소멸되는 것이다. - 1279년 멸망으로 기록한다. - 대륙의 고려가 천도한 곳 강화는 당연히 코리아반도다. 코리아반도는 역사 내내 동이족 영토의 최후의 보루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원을 소탕하고 대륙을 수복하는 나라는 명이 아니라 고려다.

고려의 공민왕 재임 시기인 14세기 중반, 몽고제국의 국력이 급격히 쇠한 틈을 타, 고려는 반원 자주정책을 펼치며 코리아반도에서 급속도로 대륙으로 뻗어 나갔을 것이고,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 탄생했을 것이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만리장성을 명나라 초기, 몽고에 대비해 재축조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명 초기라면 고려 공민왕 재임 시절과 시기상 일치한다. 실제 만리장성은 기력이 쇠한 몽고를 몰아 부치고 대륙으로 북진한 고려가, 대륙의 서북방으로 퇴각한 몽고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고려장성이다.

그렇다면 명은 무엇인가? 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달단인 이성계와 위화도회군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성계가 역사 무대에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 계기는 오로산성 점령 사건이다. 이 오로산성 점령이 무엇이냐면, 고려 공민왕이 몽고의 잔재가 남은 동녕부의 소탕을 명했고 이성계는 그 명을 받아 동녕부를 치고 오로산성을 함락 점령한 사건이다. 동녕부란 것은 고려의 서경에 원이 세운 통치기관으로 대륙에 있던 고려의 영토에서 볼 때 중앙아시아 근처의 어딘가가 될 것이다.

명나라의 창건 시기를 1368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중앙아시아의 그 유명한 티무르제국의 창건 시기도 이와 거의 비슷한 136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공민왕의 명을 받아 고려의 서경을 수복한 오로산성 점령이 일어난 시기도 1369년이다. 나는 이 세가지 사건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명의 창건시기를 1368년으로 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중화민국 역사창조의 목적성으로 인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조작하기 위해 연대를 1년 정도 당긴 조작이라 생각한다. 고려가 대륙을 수복하였다면 명나라가 들어선 곳은 어디일 수가 있겠는가? 그곳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원나라의 멸망을 1368년, 중앙아시아 몽고제국인 차가타이 한국의 멸망을 136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360년 차가타이 한국이 멸망했을 때에 권력의 공백기가 한동안 이어졌을테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여러 지방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여기에 달단인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지 말란 법이 없는데, 마침 이 지역에서 달단계 고려장수 이성계가 오로산성을 함락하는 영웅적 면모를 과시하였고, 동향인 달단 군벌은 이성계를 흠모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이성계는 다른 야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훗날 위화도회군이라는 계획적인 반란을 설계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장수로 동녕부를 소탕하고 몽고를 밀어냈다지만 그곳에 신진 세력이 등장한 것이 이성계의 동족인 달단인이었던 것이고 이것이 역사에 1369년 티무르 제국의 건국으로 기록된 것이리라.

티무르 제국이 곧 명이다. 티무르 제국의 역사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로 편입되어 나오는데, 이 우즈벡의 역사는 근세조선의 초기 역사와 이야기가 매우 비슷하다. 티무르가 이성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은 무엇이냐고? 고려-조선의 강역을 반도로 좁혀서 구겨 넣어려다보니 조선의 서쪽 국가인 중앙아시아 명을 반도의 서쪽 국가로 재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명이 곧 티무르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제국의 역사를 명의 역사로 대폭 수정·창작하여 대륙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중화민국의 전신 역사로 말이다.

이성계는 오로산성 함락 이전에도 출정한 모든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탁월한 무인이었는데, 동녕부 파괴, 오로산성 함락을 계기로 고려에서 이성계의 유명세는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 이성계 내심의 숨은 계략은 알 수 없었을테니까. 이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후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란 사건이 나오게 되는데, 제도권 역사에서 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를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의 외교가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뀐 것을 그 원인으로 삼고 있다. 역사 조작이 여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우왕의 즉위 시기는 1374년이고 원의 멸망시기는 1368년이다. 우왕이 즉위했을때 이미 원나라는 소멸되고 존재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동녕부까지 박살내고 몽고 잔재를 완전히 밀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뜬금없이 우왕 즉위시 친원 정책으로 환원된다라? 어이없게도 제도권 역사에서는 이렇게 멸망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원에 대한 친원 정책 때문에, 명나라와 영토 분쟁이 발생하고 고려는 명에 대해 요동정벌로 대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참 어이없는 역사 조작으로 논리도 없고 선후 관계도 없는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다.

계속 제도권 역사의 입을 빌려 보자면 요동정벌 출정군의 우군도통사로 임명된 이성계 휘하의 부대가 요동정벌은 불가하다며 위화도에서 휘하의 군대를 돌려서 요동정벌 출정군의 팔도도통사인 최영과 내전을 치른 후 승리하여 우왕을 강화도로 쫓아내고 조선 창업의 기반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 연대가 1388년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순수하게 믿어도 될까? 요동정벌군의 최고사령관은 팔도도통사인 최영인데, 우군도통사인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만으로 자신보다 더 큰 규모의 고려군을 그렇게 손쉽게 제압하고서, 고려라는 나라를 큰 힘 안들이고 저렇게 멸할 수 있었을까? 또 명과의 전쟁이 불가하다고 고려군으로 고려군을 치는 것은 무슨 심보였을까?

역사의 진실은 이러할 것이다. 요동정벌은 우왕의 친원 정책 때문에 명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아니다. 원나라는 이미 완전히 소멸하고 없었기에 친원 정책은 있을 수가 없고 고려는 고려의 서경 일대에서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달단인의 명을 정벌하라고 최영과 조민수, 이성계에게 명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달단계 이성계에게 달단인의 명을 정벌하라고 한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된 것이다. 이성계는 이미 오래전에 동녕부 소탕시 중앙아시아의 달단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후 야심을 달성키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고, 요동정벌이란 기회가 오자 중앙아시아의 달단인 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를 멸한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이은 역성혁명(?)은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지 절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성계는, 고려대륙의 대부분을 수복하고 몽고제국 침략이전의 고려영토인 중앙아시아까지 수복하려한 우왕의 의지에 배신의 마각을 드러내며 고려를 무너뜨린다. 그 후 이성계와 달단인 세력은 순차적으로 우왕을 강화로 설정된 코리아반도로 유배시킨 뒤, 창왕, 공양왕이라는 허수아비를 고려황제로 옹립시켜 배후조종을 하다가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자신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며 조선을 개국한다.

이성계 일파가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천자국 고려를 이유없이 무너뜨린 부족한 명분을 동이족의 시조격 되는 단군조선에서 찾아 정통성을 인정 받으려한 자기위안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군부쿠데타로 나라를 뒤집고 민주 운운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 것이다. 역사가 이러하니 중앙아시아의 달단 세력은, 위화도회군 이전에는 완전한 국가를 수립하지는 않았던듯 여겨지며, 위화도 회군 이후 지속적으로 천산이동을 넘어가 고려대륙에서 조선의 창건세력으로 활약했을 것이다. 이들이 조선 초기에 훈구파를 형성했을 것이며, 또 그 후에는 서인을 형성했을 것이다. 현재 신강 위구르인들의 독특한 생김새와 문화, 종교(이슬람교) 등은 이 달단 세력과 연관이 있으리라.

조선이 1392년 공식적으로 개국한 뒤,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지만 얼마 뒤인 1398년 왕위 계승을 두고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성계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다고 제도권 역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오늘날에도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오지 않을때’를 비유해서 흔하게 쓰는 말로 자리잡았다. 이 뜻은 이성계가 함흥으로 간 뒤 조선의 실세가 된 이방원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함흥으로 여러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사신을 죽이거나 잡아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음에 연유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성계는 왜 하필 함흥으로 갔을까? 함흥은 어떤 곳일까? 제도권 역사에서는 숨겼지만 함흥은 이성계 세력의 본향이다. 이성계는 홀연히 함흥으로 향한게 아니라, 조선의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 세력에 밀려난 정도전 세력과 자신을 따르던 세력을 대동하여 달단인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로 돌아간 것이다. 즉 왕자의 난 시기에 조선이 분열된 것이다. 이성계 일파가 그들의 본향인 중앙아시아에서 세운 나라가 명(티무르 제국)이고, 이성계의 자식 중 왕자의 난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이 명의 후계를 이어 나갔을 것이다.

정종을 배후에서 움직이다가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방원에 의해 조선의 모든 것이 설계되었고 이에 세종이라는 위대한 군주가 탄생하게 된다. 왕자의 난 이후 갈라진 명과 조선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명의 입장에서는 조선과의 전쟁 불사의 원한을 품었겠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조선의 품으로 명을 품고 싶었을 것이다. 이게 함흥으로 보낸 사신의 의미인데 실제의 함흥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말한다. 이곳에 고구려 유적이 무지하게 많이 나오고 있고 고대부터 근대까지 역사기간 내내 동북아시아와 역사가 연결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서세는 이러한 진실된 역사를 가리고 싶어한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와 이성계의 기록을 보면 매우 흡사하다. 둘 모두 전설적인 무인출신이고 티무르는 전투 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로 불렸는데, 이성계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당했다 기록하고 있다. 티무르의 출생은 1336년으로 전해오고 이성계의 출생은 1335년으로 전해온다. 생을 마감한 날짜도 비슷하게 티무르는 1405년으로 전해지는데 이성계는 1408년으로 전해진다. 이 둘은 동일한 인물인데 조선 역사의 조작·축소에 의해 두 사람으로 따로 각색한 것이다. 한·두해 정도의 기록은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또 후에 조선의 역사를 축소 조작한 서세가 손을 봤을 수도 있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제도권의 티무르 제국 역사에서는 티무르는 죽는 날까지 동방을 정벌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이 동방을 명으로 조작하여 설정해 뒀지만 사실 이 동방은 이방원의 조선을 의미한다. 즉 이성계는 이방원이 사마르칸트로 보내오는 사신을 매번 죽여버렸던만큼의 격노한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뜻이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에도 사신을 죽이는 일은 국제적 외교관례에서 드문 일이다. 아무튼 이후 조선은 조선 내의 달단 세력 때문에 명에 사대 아닌 사대를 하게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점점 동방화 혹은 고려화 되어간다.

중화민국 역사에서 조작해 놓은 남명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명나라가 망한 후 지나대륙의 남부지역에 명나라의 잔존세력이 세웠던 나라로 설명한다. 연대는 17세기 중반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나라로 처리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중화민국의 명나라 역사에서 명은 많은 동란을 겪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은 중앙아시아에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몽고의 발원지는 전통적으로 차가타이 한국 북부에서 오고타이 한국, 킵차크 한국의 동부 등으로, 현재의 카자흐스탄 북부, 슬라브 러시아의 남부 지역으로 이 지역은 중앙아시아 명나라의 북부지역이 된다. 명은 북의 몽고 잔당에 매번 시달렸을 것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 모두를 방어하는 고된 국방업무를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역사에서 티무르 왕조 즉, 이성계 후손들의 왕정의 마지막 시점이 15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명나라의 역사는 1644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냐면 명나라의 이성계 왕조가 명나라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동란 중 한 사건에 의해 왕조가 전복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성계 왕조 중 어떤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에 투항해 명나라를 지속시켰고 이성계 왕조의 다른 세력은 세력다툼에 패해 남쪽으로 남하하여 남명을 세웠는데, 그게 인도의 무굴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가리기 위해 저 위 중화민국의 남명과는 연대 등을 완전히 다르게 꾸며놓았지만 남명과 무굴은 동일한 나라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이성계 왕조의 계속인 이 남명 혹은 무굴이라는 나라의 창건자인 바부르는 티무르의 5대손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맞는 설명일 것이다. 당시의 인도 세계는 중소규모의 이슬람 왕조들이 난립하는 어지러운 시기였기에, 북쪽의 중앙아시아 명에서 쿠데타를 맞은 이성계 후손들이 남하하여 남명을 세울 수 있는 시·공간이 허락되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성계 왕조가 1508년까지 존재하였고 1526년경 남하하여 인도에 이성계 왕조를 지속시켰다.

중앙아시아의 명에서는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국호는 바뀌지 않고 북명과 남명의 남북조 시대를 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의 국력은 쇠했고 이로 인해 또 한차례의 동란을 겪는데, 1616년 청나라가 일어난 것이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축소하기 위해 청을 여진족의 나라, 만주족의 나라라며, 현재의 동북삼성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로 꾸며 놓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여진의 일파인 것은 사실이고, 만주에서 일어난 국가인 것도 맞다. 하지만 16~17세기 만주로 불렸던 지역은 카자흐스탄-남부러시아 일대로 코리아반도와는 상관이 없는 지역이란 것이다. 청나라는 그곳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다. 현재 동북삼성 지역에는 여진족도 만주족도 거의 없다. 만주는 대륙에 있던 조선서북부의 평원을 칭하는 표현이다. 조선의 강역이 날조되어 좁혀지면서 만주라는 지역명도 따라 움직이며 뒤바뀐 것이다.

1644년을 기점으로 명이 굴복하니 조선의 서북방인 중앙아시아 지역은 청나라가 자리한다. 조선의 서인들이 명과의 결속을 강조하는 바람에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맞고 임진왜란의 피해가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피해가 누적되긴 해도, 제도권 역사에서 꾸며 놓은 것처럼 조선이 청에 굴복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아시아의 천자국은 조선이었다. 청나라의 초창기 국호는 후금인데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 후금 이전에는 금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고려 초기 고려의 서북부 지역에서 고려를 많이 괴롭힌 바가 있는데, 후금이라 했으면 당연이 고려시대의 그 금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 신라는 서아시아의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설명했었는데, 동방의 고구려를 멸하고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으며 북아프리카는 물론이며 역사의 변방인 남유럽 등을 평정하는 등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라가 고구려의 후예인 동방의 고려에게 무너진 것인데, 이 금나라는 이 역사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신라는 김씨 왕조였는데 금나라가 국호 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들이 신라의 후손과 직간접적 관련이 있기 때문이고, 고려 초기 신라를 멸한 고려와 대립했던 이유도 금이 신라의 계속이었기 때문이다. 후금인 청은 그러한 금을 계승한 국가다.

청나라의 태조인 누르하치에 대해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이다. 그 누르하치의 성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애신각라’다. 애신각라의 뜻을 풀이하면 ‘애각’, ‘신라’ 신라를 사랑하며 생각한다는 뜻이다. 금과 청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연히 청의 태조뿐만아니라 그 계승자들의 성도 ‘신라를 사랑하며 생각하는’ 애신각라들이다. 지나대륙의 주인도 조선이었고 명도 중앙아시아에서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며 명을 대신한 청도 신라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인데, 이들의 역사를 어떻게 근본도 없는 중화민국 짱깨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8. 코리아와 중화민국

이 글은 <명과 청은 조선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읽은 후 보시면 보다 이해가 쉽습니다.

지금까지 조선 정치사의 중심은 대륙에 있었다고 누차 설명하였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인 경술국치 직전까지, 단군조선부터 근세조선까지 수천년간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반도의 우리는 누구인가?

반도의 현재 코리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엔 조심스러운 감이 있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 고려-조선의 정치사가 남겨진 곳은 대륙이었기에 현재의 우리 민족 터전인 이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추정에 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생각을 한번 적어본다.

중화민국은 역사가 없는 나라다. 중화민국 뿐만아니라 역사가 없는 나라는 지구촌에 꽤 많다. 현재의 세계 4대 문명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명은 동이족이 창시한 문명이다. 이에 관한 글은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며칠전 게시하였다. 인류 문명사의 출발은 단군 민족인 우리 선조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중화민국이라 불리는 한족은 누구인가? 한족이라 불리는 세력을 이끄는 정치 세력과 한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주축 민족은, 대대로 아시아의 북방 민족인 동이족에 의해 지배를 받던 남방계 민족임이 확실하다. 이 민족은 근세조선 시대엔 대륙의 서남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민족이다.

중화민국의 창건 세력 중 한 인물인 장개석이 현재 이종걸 의원 할아버지 되시는 이시영 임시정부 부통령에게 “중국 전체가 당신들 조선인의 역사무대인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한 핀잔에 그들의 정체성과 우리의 진실된 역사가 다 드러난다. 장개석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다.

겨우 동북쪽 3개의 성만이 문제가 아니다. 코리아가 웅비하면 그날로 중화민국 짱깨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예전에 <동북삼성이 낙후된 이유와 조선족 동포의 정체성>이라는 글을 올려 말한 바 있지만, 우리 민족을 경술국치 식민지배 하에 직접적으로 몰아넣은 이들은 왜구와 서구이지만, 그들과 동조하여 우리 역사와 혼을 팔아치운 이들이 중화민국 짱깨임은 매한가지다.

중화민국과 청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19세기 중후반의 조선대륙을 말하자면 이미 남방이 영국과 프랑스 등 해양세력에 밀려 혼란한 상황인데다 러시아의 남하가 시작되면서 남과 북이 대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계획된 인류의 시원 민족에 대한 말살적 압박이었다.

중화민국이 대륙의 주인이 된 경로를 대략 추정하면, 청나라도 러시아에 밀려 남하해 왔을 것이고 신강 위구르 지역과 감숙성 일대와 내외몽골 지역이 청과 러시아에 의해 어지러워졌을테고 19세기 후반에는 대륙의 서북부와 남부 지역은 대부분 서구열강에 의해 어지러워졌을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고 영국 유학파인 손문 등이 서세의 지원 하에 대륙의 서남방에서 북진하였을 것이고, 러일간의 세력 다툼의 종속변수인 조선인 친일파와 친러파 사이에서 고종은 꼭두각시 노릇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의 압박, 족보를 청인으로 세탁한 대륙 서남방 족속인 손문 세력의 북진에 의해 조선은 황도인 장안을 버리고 남경으로 천도하게 된다.

남경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수립 되었을 즈음, 코리아반도와 동북삼성 일대와 대륙의 동남부 등은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을 것이고, 대륙의 북방은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곳을 제외한 대륙의 대부분을 일본과는 또다른 서세의 괴뢰인 손문 세력이 차지하게 되었을 것임을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대한제국이 1910년 공식 멸망하고 손문 세력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공식적인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대한제국의 황도가 있던 곳인 남경에서 1912년 중화민국의 수도를 건설한다. 서세는 왜구와 대륙 서남방의 족보세탁 세력을 동시에 지원했지만 사냥개의 한축인 왜구의 통제가 어렵게 느껴지자,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을 지원하는만큼 일본을 응징하기로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지자,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을 개전하며 사냥개 일본 버리기에 들어간다. 결국 서세가 보다 손쉽게 제어 가능하리라 점찍었던 중화민국이 대륙을 차지하고, 모택동 군벌이 장개석 세력에게 승리하며 대륙을 접수하여 위탁 관리한다.

서세의 입장에서는 국공의 양자 모두 제어가능하리라 예측했지만 모택동 세력은 생각보다 강경하였고, 서남방 피지배 민족 최초로 대륙을 먹어 본지라 쉽게 뱉어낼 생각을 않고 핵무기 등으로 무장하며 강경하게 대응하니 사냥개로서의 약효가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곧 등소평, 강택민 등의 후임자들이 서세에게 굴복한 것이 중·미 수교와 개혁·개방의 진실이다. 이런 짱깨들이 대대로 대륙의 주인이란 날조를 믿으라고?

우리 역사를 한번 보자면 역사 교과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소도는 신성 지역이므로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더라도 그를 돌려보내거나 잡아갈 수 없다.’

소도는 삼한의 어느 지역 중에 있다고 했다. 소도는 솟대다. 솟대는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 광범위 하게 분포했던 흔적이 있다. 그렇다, 코리아반도는 단군조선 시기 삼한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삼한은 독립적인 국가를 지칭하는 것인가?

삼한은 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삼한 중 소도가 있는 곳은 제사장인 샤먼이 관할하는 곳이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삼한은 단군조선의 어떤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지역이지 단군조선 내의 특정 국가가 아니란 뜻이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반도와 동북삼성 지역에 고인돌과 거대 피라미드가 어마어마하게 출토되는 이유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고인돌이 이렇게 출토되는 지역은 코리아반도를 제외하고는 영국의 스톤헨지 정도가 있는데, 그 곳은 반도의 고인돌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다.

삼국의 유적, 유물이 출토되는 이유도 같은 배경이다. 저기 위의 교과서 인용 글귀인 ‘소도는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 이라는 의미와 같은 규정이 단군조선의 금법에도 있는데 ‘소도를 훼손하는 자는 도형에 처한다.’인데 이는 코리아반도가 조선의 성지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국법이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는 사실 정치범을 말한다. 조선이나 조선의 후예인 삼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전쟁을 하거나 권력다툼을 해서 정치범, 외교범이 생겨나면 소도로 피신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하니 코리아반도가 조선의 정치사의 주무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유적이 또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경북 지역의 신라 유적지를 보면 그 양식이 다른 동이족 국가의 유적과는 조금은 다름을 알 수 있다. ‘첨성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동아시아에서 이런 유적양식은 흔치 않지만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매우 흔한 양식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첨성대와 유사한 양식의 축조물이 다수 존재한다. 이것은 경북 일대가 서아시아에서 동이족 왕조를 세웠던 신라에게 할당된 제사 지역임을 의미한다.

코리아반도는 이 외에도 왕조나 귀족 등 고위층의 유배지로도 쓰였던 것 같다. 강화도령 철종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실 것이다. 조선황족인 철종은 일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대륙의 순정왕후 명을 받아 헌종에 이어 즉위하는데, 철종이 유배되었던 강화도도 실제는 아마 코리아반도일 것이다.

대몽 항쟁기 임시 황도를 정했던 곳도 이곳 코리아반도일 것이고, 이성계 일파에게 밀려났던 사실상의 고려의 마지막 황제인 우왕이 유배된 곳도 코리아반도일 것이다. 이로 인해 코리아반도는 고려적 색채가 특히 많이 배였다고 본다.

당연히 고종이 장안과 남경을 거쳐 유배된 곳도 이곳 서울인데, 서울에 조선시대의 왕궁으로 설정해 놓은 고궁들은 대부분 대몽항쟁기의 고려의 임시 황궁이고 삼국의 왕궁이 코리아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런 조작된 역사 때문이다.

천손민족인 동이족이 본래 두뇌가 뛰어나지만, IQ지수에서 세계 1위에 남과 북 우리 민족이 동시에 오르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도 한 몫 한다. 유라시아에 문명을 선물하고 문명사를 이끈 동이족의 축소판이 코리아반도이고, 왜양은 이 역사를 아주 잘 알기에 코리아반도에 대륙의 조선사를 구겨 넣어 놓았다.

이런 추악한 왜양 때문에 대륙의 동이족들은 모두 토끼몰이 당해 혼혈화되거나 뿌리를 잊었고 그도 아니면 학살되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혼혈책동의 뿌리는 이렇게 깊다.

코리아는 사실상 마지막 남은 동이다. 역사적 임무가 가볍지 않다. 왜양에 의해 역사와 민족혼이 조각 조각난 상태로, 민족의 성지가 민족의 정치적 무대로 바뀌었다. 민족이 분단된 채로 말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알아야 한다!


9. 붕당정치와 기독교 침투

조선에 기독교가 유입된 경로를 살펴보려 한다. 보다 원활한 이해를 위해 지난번에 올린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를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근세조선 통치이념의 큰 골격 중 하나가 숭유억불 정책이다. 유교를 국시로 내걸고 강경한 불교 억제정책을 펴는 것인데, 이러한 정책이 나온 배경은 조선 창건세력의 정체성과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지난글에서 설명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은 성종 때에 가장 강경하게 시행되어, 도첩제를 폐지하며 불교승려가 되는 길을 법적으로 완전히 폐쇄해버리는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속과 융화된 불교는 민간에서 꾸준히 살아남았다. 반면 국시로 내건 서역불교인 유교(이슬람교)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주로 관습적인 여성에 대한 제약의 형태로 나타난다.

조선은 표면적으로 유교국가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불교국가에 가까웠고, 이것이 근세조선을 지탱하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18~19세기,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민간에 유입되기 시작하고 급속도로 전파되어, 조선의 근본을 완전히 뒤흔들기 전까지 조정은 불교적 전통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의 기독교 침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중요하게 숙지해야 할 것이 그 유명한 붕당정치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에 대해 우선적으로 간략히 이야기 해보겠다.

붕당은 근세조선사에 있어 복잡하면서 길고도 지루하다. 이 복잡하고 지루한 정치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이들이 왜-양의 역사 날조자들이다. 붕당정치의 실제 내막을 읽어내면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조선이 개국했을때 신권을 주도한 이들은 훈구파이며 붕당의 발단이 되는 사림파들은 조선 초기 훈구파에 억눌려 지방에서 성리학에만 골몰하고 있었는데, 16세기를 기점으로 훈구파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중앙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제도권 역사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목적의 가장 큰 차이를 중앙집권 지향과 향촌자치 지향으로 나눠놓고 있는데 이는 사실인듯 하고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사림은 본래 지방의 서원과 향약 등에서 지식인 노릇하던 성리학도들로서, 훈구파가 100여년이 넘게 중앙정계에서 권력을 누리는 동안 부패한 틈을 노려 사화를 일으킨 후 훈구파를 숙청하고 중앙정계의 요직을 장악한 무리를 일컫는다. 이 사림들이 향촌출신의 향촌자치지향적 정치세력이란 사항을 잘 눈여겨봐야 한다.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의 4대 사화를 거치며 훈구파를 완전히 쳐내고 사림파로 신권을 완전히 틀어쥐지만 이내 곧 붕당이 발생하여 사림 내부가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되고 만다. 교과서 등에서는 이를 훈구파 처리문제에 대한 의견대립에서 찾고 있는데, 과연 그 이유가 전부일까? 훈구파 처리문제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사림파가 각 지방의 향촌세력임을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분열된 사림 중 서인은 훈구파 처리에 있어서 보수 온건적이었던 반면, 동인은 보다 급진적 개혁 지향적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서인과 동인이라는 당파명을 정의함에 있어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역사조작이 드러난다.

무슨 얘기냐면 훈구파 처리에 있어 온건적 인물 중 하나였던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에 있어서 그와 의견을 같이한 이들을 서인이라 칭했다하고, 그와 반대로 급진적 인물이었던 인물인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에 있다하여 그와 의견을 같이한 인물들을 동인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이는 대륙에 있던 조선을 반도로 구겨 넣어면서 생겨난 아주 우스운 역사 창조다.

당시 서인과 동인에는 심의겸, 김효원 못지않은 이이나 유성룡 같은 거두들도 다수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들러리인가? 왜 하필 심의겸이나 김효원의 집 위치를 따와서 중대 국론을 논하는 정치세력의 공식적 당파명으로 붙여졌을까?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이니 이이 등도 서인이 되어버리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이니 유성룡 등은 동인이 되어버린다? 어이없는 역사 조작이다.

앞에서 사림은 향촌에서 지방의 세력을 몰아 중앙으로의 진출에 성공,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를 유념해서 보면 서인과 동인이라는 당파명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은 이러하다. 대륙은 넓고 지역색도 다양하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이들이 각 지방의 세력을 빌려 의기투합해 중앙의 기득권인 훈구파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훈구파를 대신하는 국정 주도권을 누가 가지냐를 두고서 지역색을 위주로 파벌이 발생한 것이다.

지역색이라는 것이 반도의 상황이라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대륙에서라면 상황이 다르다. 조선의 도성은 장안(서안)으로 대륙 동서남북의 정중앙이다. 서인은 그 서쪽 광범위한 지역 출신의 세력이고 동인은 그에 속하지 않는 반대편의 광범위한 지역 출신의 세력인데, 이러한 실사를 반도에서는 사실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반도의 동서는 좁고 서울은 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있으며, 또 서인과 동인을 따로 가를만큼의 지역색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대륙의 조선사를 반도로 구겨 넣어면서 심의겸과 김효원의 집 위치가 어쩌구하는 말로 역사 조작을 해 놓은 것이다.

훈구파 처리에 있어서 서인이 온건적 태도를 취한 점에도 역사의 숨은 진실이 있다. 훈구파는 조선의 개국 공신들로 이성계와 이방원을 따라 중앙아시아의 서쪽에서 고려를 치러 넘어온 세력가들의 직계 후예들이다. 물론 보다 더 친 이성계적 세력들은 이성계를 따라 중앙아시아 명나라의 함흥으로 돌아갔겠지만, 향촌의 사림보다는 훨씬 더 명나라와 가까운 인물들이란 말이다. 또 그 중에는 이성계와 그 세력과의 혈족이나 친인척도 있을 것이다. 즉 훈구파의 주도 세력은 달단인이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사항들이 훈구파 처리 문제에 있어 왜 서인의 근심거리가 되냐면, 이 서인들 역시 지역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점에서 볼 때 다른 사림에 비해서 이성계의 명나라와 좀 더 친숙한 사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주류 세력도 달단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사정이 이러하니 친 명나라적 정치선배들인 훈구파들을 과격하게 내 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사에서 붕당세력 중 서인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배경도 이러한 명나라와의 친분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에 비해 명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크지 않은 나라이고 조선이 드넓은 고려대륙의 대부분을 이어받은 나라지만 이성계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라는 명분이 훈구파에 이은 서인으로의 권력 집중화로 이어지고 명에 대한 조선의 사대 아닌 사대로 이어진 것이다. 서인들의 출신 지역은 아마 오늘날의 신강 위구르나 청해성, 감숙성 일대로 추정된다.

동인은 서인에 비해서 여러모로 복잡한 구성을 띠고 있었을텐데, 훈구파 숙청에의 강경한 명분론이 국론합의에 있어 우세했는지, 붕당 초기 동인이 정국을 주도한다. 하지만 곧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분열하여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새로운 당파가 형성되는데, 이들의 당파명 역시 인물 개인의 집 위치에서 연유했다고 제도권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 황당할 뿐이다.

제도권 역사에서 설명하길 이산해의 집이 강북이었기에 이산해를 포함한 조식의 학통을 따르는 이들을 북인이라 하고, 반면 유성룡의 집이 강남이었기에 유성룡을 포함하는 이황 학통을 남인이라 이르고 있다. 실제의 역사에서 강북과 강남이란 서울의 한강이 아니라 아마도 대륙의 황하강을 가리키며 황하강 이북의 백성들을 북인, 황하강 이남의 백성들을 남인이라 칭하였을 것이다.

조선의 황도가 괜히 대륙의 정중앙인 장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안의 동서 양쪽으로 황하의 깊고 넓은 물줄기가 흐르는데, 이 심대한 강이 대륙의 민족색을 어느정도 구분해주고 있었고 고려시대 까지는 북인으로 불린 북방계 민족이 대륙을 지도하고 있었으리라. 중앙아시아에서 천산이동으로 넘어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대륙의 서쪽을 장악한 달단계 서인에 의해 그 모든 흐름이 깨졌고 그러한 의식이 조선의 붕당으로 나타났으리라.

실사가 이러하니 조선의 붕당은 단순한 파벌싸움이 아니라, 민족(?) 혹은 족속간의 세력다툼이라 칭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서인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달단계 세력으로 그들의 힘은 아마도 명나라와 이웃한 신강 위구르지역에서 솟아났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륙에서도 타 지역에 비해 가장 이질적 색깔이 두드러지는 신강 위구르 지역의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이 지역이 완전히 이슬람화된 것은 15세기의 일로 숭유억불의 조선 개국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들이 근세조선 창건세력과 훈구파, 서인들의 달단계 후손에 가장 가까울 것이리라.

고려 주도세력의 후예로 여겨지는 북인은 전통적인 북방계 동이족으로 여겨지며 동북삼성과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등을 포함, 내외몽골 일대에서도 세력을 형성했으리라. 과거의 이 지역 북인들이 오늘날 코리아반도인의 혈통과 가장 유사한 대륙의 조선인들이었을 것이다. 남인의 경우는 조선의 개국 공신과도 거리가 먼데다 조선 이전까지 북인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을 확률이 높고 정치적으로 가장 소외되었을 법한 지역인들이리라. 그로인해 근세조선에서 주류 기득권을 형성한 서인들에겐 북인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며 남인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리라.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지만 임진왜란시 구국을 주도하는 북인이 큰 업적을 남기게 되고, 이를 계기로 북인은 광해군을 옹립하며 중앙정계를 휘어잡는다. 실리적인 광해군과 북인은 훈구파와 서인의 맹목적인 친명·종명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북인의 입장에서는 그에 더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대륙내의 주도권을 가로챈 외래인인 서인이 곱게 보였을리가 만무하다. 또 서인에 기대어 권력을 얻고자 하는 남인 역시 적으로 여겨졌을테니 철저한 서인과 남인 배제 정책을 구사하여 이황 배척, 인목대비 축출 등을 시도하나 모두 실패하고 역풍의 조짐이 보인다.

위 사건들에 더하여 한편으로 국제정세도 급변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왜란의 피해로 인해 조선과 명의 국토 대부분이 피폐해졌는데, 이를 틈타 중앙아시아에서는 여진인 후금 세력이 명나라를 위협하며 일어났다. 광해군과 북인은 명과 후금의 상황을 관망하며 철저하게 조선 중심적 실리 외교를 펼치지만 이러한 외교 정책이 서인의 입장에서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인은 명나라와의 혈통 관계와 족속 관계를 과시하고 으스대며 조선에서 권력을 누려왔는데, 후금에게 명나라가 함락되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도 사라지는 것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손에 쥐고 명나라를 지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서인은 남인을 꼬드겨 인조반정이라는 반동적 쿠데타를 일으키고 실리 자주적 정부인 광해군과 북인을 무너뜨리는 발악을 보인다. 서인 세력은 광해군과 북인을 정계에서 영구적으로 완전히 축출시키고 역사적 기록으로도 음해한다. 권력을 손에 쥔 서인은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고 명나라에 아낌없는 군사적 지원을하지만 후금은 명을 제압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호란을 안긴다. 뼛속까지 권력 지향적 사대 세력이었던 서인과 그에 기생한 남인은 삽질만 연거푸 한 셈이고, 광해군과 북인이 옳았던 것이다. 광해군은 근세조선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지만 서인의 모략질로 인해 권력을 쥐고서도 권력의 공백을 느끼며 역사 속으로 쓸쓸히 퇴장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명을 밀어내고 청이 들어섰으니, 북쪽의 명에서 쿠데타를 맞고 갈려나와 인도에서 무굴왕조를 세웠던 남명만이 명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 셈이다. 조선에서 가장 껄끄러운 북인을 숙청한 서인은 중앙아시아의 명 본산이 사라졌지만 일찍이 명에서 갈려나왔던 인도의 무굴을 여전히 마음속의 조국 정도로 여기는 사대 근성을 버리지 않고, 이를 이용해 효종, 현종 시기까지 권력을 누린다. 숙종 시기에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남인과의 다툼이 크게 번졌는데 이를 계기로 남인을 정계에서 숙청한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서인의 권력도 시들해지는 시기가 다가오는데 서구 제국주의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동진하여 서인들의 마음속 조국인 무굴을 덮쳐버린 것이다. 무굴이 동인도회사를 가장한 영국 제국주의에 무기력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며, 서인 내부에서는 무굴과 선을 긋자는 세력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는 세력으로 나뉘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이에 경종 시기에는 소론이 기용되고 영조의 시기에는 노론이 등용되었지만 국내외적으로 분열된 서인은 예전의 막강한 서인이 아니었고, 정조 시기에는 남인의 일부 시파가 중용되어 노론이 견제를 당하게 된다.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계기가 되어 다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나 정순왕후 사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조선의 붕당정치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붕당정치에서 유념해서 볼 문제는 붕당 후기인 영·정조 시기부터 나타나는 기독교의 침투에 관한 것이다. 세종과 함께 조선의 가장 위대한 개혁 군주로 꼽히는 정조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내내 명과 유착하여 조선 내에서 기득권을 구축하였던 서인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남인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조의 빛나는 혜안도 기독교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지는 못한듯 하다. 카톨릭 신자가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에 불을 지른 진산사건 발생시 카톨릭 박해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관용을 베풀고 카톨릭에 심취한 남인들을 적극 기용한다.

조선 후기 기독교의 유입은 남인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중농학파 실학자 이익이 카톨릭을 학문적으로 검토한 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세 형제가 이익을 이어받아 카톨릭 신봉자가 되고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이 예수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영세자가 되는데, 이들이 모두 남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남인이란 제도권 역사에서 말하는 특정학자의 집 방향이 어쩌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조선대륙 황하강 이남의 족속들을 칭한다. 저 유명한 이익, 정약용 등의 중농학파 실학자들 모두가 조선 남부지방 출신 인물들이란 말이다.

이 시기 기독교가 침투된 남부지방이란 아마도 현재의 인도차이나반도나 광동성, 호남성, 운남성, 귀주성 등이 될 것이다. 지리적으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투하기 용이한 지역이며 이 지역들은 전통적으로 고려-조선 주류인 북방 동이족에 사실상 피지배 되어 오랜기간 권력에서 소외된 지방이었다. 이러하여 남인들은 조선에 대한 충성도가 상대적으로 덜했을지도 모르고 서세의 새로운 사상에 더 관심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서인과 남인이 연대하기도 경쟁하기도 했지만 남인은 서인의 진정한 연대자도 경쟁자도 될 수 없었다. 서인에게 있어 진정 위협적인 경쟁자는 고려의 후예들인 북인들이었고 그들을 인조반정으로 내친뒤에 하찮게 여겼을 남인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정조 시절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 등의 남인은 정조 사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서인 노론에 의해 정계에서 숙청되고 신유박해를 당한다. 근세조선 내내 명과의 유착으로 기득권을 구축하며 과오를 남발했던 서인(노론)은 기독교의 조선에의 위협을 실감하고, 그 속내와 진심이 어찌되었건 아주 단호하게 대응해 나간다. 정순왕후 사후 정조와 사돈 관계인 김조순 등에 의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는데 그들은 기독교에 상대적으로 관대하였기에 이때 기독교의 교세는 대폭 확대되었고 조선의 위험도는 급증하였다.

순조에 이어 어린 헌종이 즉위할 즈음 조만영을 주축으로 세력을 키운 풍양조씨가 안동김씨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는데, 이 시기 조선 해안가에 이양선의 출몰 빈도는 더욱 증대되어 풍양조씨에 의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가 일어나지만 조선에 대한 서세의 기독교적 사상전은 이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철종이 즉위하자 김문근에 의해 안동김씨가 다시 득세하였고 기독교는 전 대륙으로 뻗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큰 위협을 느낀 민간의 지식층은 기독교에 저항하는 동학을 창시하게 된다.

조선의 위기가 최고조에 오른 시기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필연적으로 병인박해를 가하게 되고 이에 병인양요를 맞는다. 제도권 역사에서 이에대해 쓰기를, 병인양요를 맞고 프랑스군은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의 조선왕조의궤를 약탈해 간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베트남에서도 발생하는데 결과는 너무 다르다. 카톨릭 박해로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베트남은 단방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사로잡힌다. 베트남의 본래 지역명은 안남인데 편할 안(安)자가 붙는 곳은 황제와 관련이 있다. 안남이란 황제가 있는 곳의 남쪽이란 뜻으로 본래 안남인 베트남은 대륙황조의 일부란 뜻으로 조선의 남부지방임을 말한다.

병인양요와 베트남 함락,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의 사건이 비슷한 규모의 나라에서 일어났는데 결과는 정반대다. 병인양요란 것이 정말 코리아반도의 인천 앞바다에 일어난 소규모의 국지전이 맞을까?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쌍두마차의 세계최강 제국주의 국가였고, 지구촌의 거대한 식민지 건설 진행에 있어 정점을 찍던 시절이었다. 외규장각은 정조 시기의 유적으로 규장각을 손질하여 복사본 형태로 규장각이 아닌 바깥의 어느 곳에 보관한 것인데, 그 곳이 어디냐 말이다. 정말 코리아반도의 인천 앞바다가 맞을까?

정조는 서인을 견제하며 정약용 등의 남인을 총애했고 정부 내각의 요직은 대부분 남인들이 수장으로 있었다. 당연히 규장각 손질 작업을 한 이들도 남인이고 외규장각을 따로 보관한 이들은 남인 관료나 학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외규장각이 남인들의 지역에 따로 보관되어 관리되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 것이다.

정약용 등의 남인 세력이 카톨릭을 들여온 주체이며 신봉자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는데, 그렇다면 대규모의 카톨릭교도 박해인 병인박해는 남인세력의 지역에서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 그 남인의 지역 중 하나가 안남지역인 인도차이나반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로 불리는 사회주의 혁명가 호지명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애독자로 그의 사상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코리언에게도 드물게 읽히는 고전인 목민심서를 베트남 인물이 읽다니? 참, 묘하다. 호지명은 어떤 경로로 정약용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을까? 반도에 있던 근대조선의 정약용이란 인물이 그렇게 세계적인 인물이었을까?

호지명이 베트남 독립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시절, 세계는 이념전쟁이 극에 달아올라 있었다. 호지명은 물론 교조적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닌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도입한 유연한 혁명가로 통상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봉건시대의 서적에 애착을 보이며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타국의 잘 알지도 못하는 봉건시대의 학자와 저서를 탐독한다라?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호지명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소지하고 탐독하였을까?

병인박해와 베트남의 카톨릭 박해, 병인양요와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각색한 것일 확률이 높다. 조선에서 기독교를 최초 들여오고 그 기독교 신봉자들로 가득차기 시작한 곳은 조선대륙의 남부지역인 인도차이나반도와 광동성, 운남성 일대로, 그 곳에 병인박해가 가해졌고 고로 프랑스는 그 곳을 침공하여 식민화하였다. 병인양요의 피해를 본 곳은 베트남 뿐만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현재의 인도차이나반도 대부분의 곳일테고 그 때문에 그 지역 대부분이 프랑스로 편입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제국주의군은 19세기 당시 한가하게 고서나 약탈하러 아시아로 진입한게 아니었다.

정조가 신뢰했던 남인들에 의해 인도차이나반도 어딘가에 외규장각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고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후 조선의 남부 지역은 프랑스로 이관되었고, 그 곳에서 프랑스는 외규장각을 포함한 조선의 유물을 약탈해 갔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보면, 조선대륙에서 전국구 정치가와 학자로서 이름을 떨친 남인 정약용에게 호지명이 존경을 표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리라.

조선의 붕당정치를 큰 흐름에서 보자면 근세조선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훈구파와 서인으로 대표되는 달단계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과의 결속을 강조하는 수구적인 모습을 취했지만, 서세의 조선침공의 기운이 일자 단호하게 대응하는 정통 보수우파적 면모도 보였다. 위대한 정조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었다. 서인을 쳐내야 조선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들을 쳐내면 외세에 의해 조선이 어지러워 질 수밖에 없는 이치인데, 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조는 권력의 시녀가된 서인을 배제하고 남인을 중용하는 정공법을 펼쳐나가지만 결국 남인들은 조선대륙을 기독교로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남인은 너무 오랜기간 권력에서 소외되는 사실상의 피지배에 놓여있었고 기독교가 침투되면서, 순수하게 기독교를 이용해서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과 기독교로 조선을 허물고 새판을 짜자는 여러 세력이 혼재한 상황이었을테다. 물론 이들은 이내 곧 추악한 속내를 드러낸 서세의 종속변수로 활용되고, 이들의 사상을 이어받는 이들로 구한말 매국적 개화세력이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서인은 그야말로 조선의 개혁적 군주에겐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계륵같은 존재였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수구 반동적이었지만 서세의 기독교적 침공에 있어서는 날 선 검과 같았으니까. 후에 족보를 세탁하고 서세에 업혀서 대륙을 차지하게 되는 중화민국의 손문 등의 세력은 달단인을 매우 혐오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만큼 달단인으로 대표되는 서인들이 서세 등을 가장 강경하고 단호하게 배척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좋은 실례일 것이리라. 끝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조선 내부의 정치세력 중 가장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색깔을 갖고 있던 고려의 후예인 북인들이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로 실각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을까?


10. 유럽에 대한 단상

<아라비아와 신라>

「아라비아에는 1세기 경 팔미라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가산 왕국, 라흠 왕국이 사라센 제국으로 이어지는데 신라도 1세기 경 건국되었다. 아라비아의 사라센은 7세기 중엽 제국화되고 신라는 7세기 중엽 전성기를 맞는다. 사라센 제국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하고 신라는 7세기 중엽 백제를 멸한다. 사라센 제국은 900년경 별파에 의해 분열되었고 신라는 935년 멸망하였다. 사라센 제국에는 ‘메디나’라는 당대 제일 번성한 대도시이자 이슬람교 성지가 있었고, 신라에는 1000년 고도의 금성이라는 이름난 종교도시가 있었다. 사라센 제국은 실크로도(Silk Road)를 장악하며 상업이 번성했으며 신라에는 신라도(Silla Road)가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백제>

「사산조 페르시아는 226년 아르다시르 1세가 건국했고 백제는 234년 고이왕이 건국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651년 사라센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백제는 660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란의 페르시아 유물은 코리아반도의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

<쿠샨왕조·굽타왕조와 가야>

「인도에서는 쿠샨왕조와 굽타왕조가 공존하였고 가야에서는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연맹국가로 공존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의 왕후 허황옥은 인도인으로 전해온다. 쿠샨왕조의 건국시기는 기원전후로 추정되는데 금관가야의 건국시기 역시 기원전후로 추정된다. 쿠샨왕조는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는데, 가야는 4세기에 백제와 동맹을 맺는다. 쿠샨왕조는 5세기 말 서쪽의 에프탈족에 멸망하였고 금관가야는 6세기 초 신라에 멸망하였다. 굽타왕조는 6세기 초 서쪽의 에프탈족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고 대가야는 6세기 초 신라와 결혼동맹을 체결하였다. 굽타왕조는 550년 서쪽의 에프탈족에게 멸망하였고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

<게르만 대이동과 고구려>

「훈족의 왕 아틸라는 406년 태어나 453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은 394년 태어나 491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게르만의 한 일파인 색슨족은 5세기 훈족에 쫓기어 유럽본토에서 브리타니아(영국)로 이동하였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398년 숙신족을 정벌하였다. 훈족은 동이족(Eastern People)이라 불렸으며 활쏘기에서 탁월했고 그 형상이 유럽 성당의 벽화에 남겨져 있는데 고구려의 벽화와 매우 유사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조선/한국인을 훈족의 후예라고 말했다.」

<바이킹과 발해>

「바이킹은 8세기 말에서 11세기 초까지 활약한 것으로 전해지며, 발해는 8세기 전후에 건국되어 10세기까지 이어졌다. 바이킹의 지배계층으로는 노르만족, 피지배계층으로 슬라브족이 있었는데, 발해의 지배계층은 고구려인, 피지배계층은 말갈인이었다. 바이킹은 역사 후기에 사라센과 교류하였고 발해는 건국초기 신라를 적대시하다가 후에 제한적인 교류를 하였다. 11세기 바이킹은 해상왕국으로 불렸고 10세기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바이킹은 발(트)해를 따라 유럽을 정복했으며 흑해 주변 슬라브 지역을 복속시켰는데, 발해의 종족 구성원으로 흑수말갈이 있었다. 18~19세기 경 스칸디나비아인들의 흑백사진에 황인종의 얼굴이 매우 또렷하다. 바이킹의 표식은 우두머리(소뿔) 투구인데 고구려의 표식 역시 우두머리 투구이며,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시 황제>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암살되자 20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시황제 역시 부왕이 죽자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폴리스를 통일했고, 시황제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모든 도서관을 불태웠는데 시황제의 분서갱유는 너무나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의 곁에는 너무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는데, 시황제의 곁에서 조언한 철학자 이사 역시 너무나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지중해 세계의 문자를 알파벳으로 통일했는데, 시황제 역시 문자를 통일시켰다. 알렉산드로스가 사후 즉시 거대한 제국은 붕괴되었는데 시황제 사후 진나라 역시 동시에 붕괴되었다.」

서세동점의 기운이 휘몰아치던 19세기, 서양은 처음으로 동양을 군력에서 앞서기 시작했다. 힘으로만 동양을 제압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지독하리만큼 역사학이란 학문에도 집착한다. 문화적·정신적으로 수세기를 앞서서 살아왔던 동양을 자신들 서양이 다스리려니 역사라는 옷이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게 낡고 볼품없는 헌옷을 갈아입혀줄 필요가 있었고, 자신들은 화려한 새옷으로 갈아입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 역사조작의 발단이었을 것이다.

서세동점기 아시아의 초강대국은 단연 조선이었다. 유라시아사의 역사적 주체 역시 조선이었고, 때문에 조선의 역사가 조작되어 축소·은폐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역사는 어떻게 확대·과장하였을까?

현대 서구인의 역사의 토양이자 정신의 근원은 그리스·로마와 기독교이다. 그리스와 로마에 집착하는 것은 간단하다. 고대에 아시아에 복속되지 않고 어느정도의 독립된 역사를 살았던 시절이 그리스와 로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로마의 문명 자체는 동방으로부터 건너왔을 것이다. 그 고대사를 우선 간략히 살펴보자.

그리스의 아테네·스파르타·트로이 등의 폴리스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하는 춘추전국시대이며, 이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시황제의 진(秦)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동시에 거대한 제국은 붕괴되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셋의 알렉산드로스 계승국으로 분열되고, 진나라 역시 시황제 사후 즉시 붕괴되고 한나라로 이어지나 이후 위, 촉, 오 셋으로 분열된다.

중화민국이 도용하고 있는 고대사에서 위나라에서 나온 진(晉)이 다시 위, 촉, 오의 삼국을 통일하였고, 후에는 서진이 멸망하고 동진만이 명맥을 유지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사가 사실 로마제국의 이야기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분열된 지중해 세계를 재통일한 것이 남유럽의 알렉산드로스 계승국인 로마제국인데 이 나라가 위나라이며 곧 진나라이다. 그 유명한 로마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악티움 해전이 위와 촉의 전투란 것이다. 악티움 해전으로 인해 이집트는 로마에 복속되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위(진)에 의한 삼국통일이다.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는 것은 위(진)가 서진과 동진으로 갈리는 것이고, 200여년간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다가 혼란스러운 시대가 열린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진(위)에서의 4조와 6조 시대, 5호 16국 시대 등 어지러운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진(위)에서의 어지러운 시대가 지나간 뒤 북위와 송의 남북조시대가 열린다고 중화민국이 도용한 고대사에서 말하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이 내치가 혼란스러워져 지중해 아래쪽의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이제 우리 역사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북위와 송의 남북조시대 이전에 (서)진이 멸망했다고 하는데, (서)진이 누구에게 멸망했을까? 그 유명한 흉노에게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진은 (서)로마에 해당한다고 얘기했는데 (서)로마는 훈의 압박을 받은 게르만에게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게르만이 훈의 통치를 받았음을 감안하면 사실 훈에게 멸망했다는 것을 가린 것이다. 훈이 사실 흉노라는 학설이 있고 그 진위여부를 두고서 학자들은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하는데, 역사가 이러한데 훈과 흉노가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서)진과 (서)로마의 역사는 같은 역사이고 흉노와 훈 역시 같은 역사이다. 그런데 이 흉노는 과연 뭘까? 현재 제도권 역사에서 장수왕 시절 고구려의 서쪽 북에는 북위가 있고 남에는 송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누차 위나라가 진나라라고 했다. 로마는 동쪽에서온 훈의 압박에 의해 멸망했는데 진(북위)의 동쪽에는 누가 있는가? 고구려다. 서진(북위)과 (서)로마는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

중화민국이 도용한 고대사에서 송의 남조가 북위의 북조를 통일하여 수를 세운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사실 로마가 고구려의 압박에 멸망하고 지중해 남쪽의 이집트만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이집트가 수나라와 당나라가 되는 것이다. 후에 고구려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괴멸시키는 지역도 지중해 어디엔가 있으리라.

이후의 역사는 신라(사라센 제국)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당전쟁으로 당나라(이집트)까지 함락시키고 발칸반도와 이베리아반도 등 남유럽까지 복속시키니 사실상 유럽의 역사는 맥이 끊긴 것이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 유럽은 인문주의에 입각한 찬란한 고대시대를 살고 일천년의 긴 암흑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의 근대를 맞아 다시 고대의 찬란한 인문주의를 맞이한다고 뻥치는 것은 이러한 역사 때문이리라.

유럽은 중세에 암흑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되며, 유럽이 그토록 자랑하는 그리스·로마의 문명사 또한 지중해 이동이나 이남의 아시아에서 건너온 문명이니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문명이 백색인지 갈색인지 아니면 황색인지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현재의 서양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한 논쟁과 비판이 이뤄지고 있다.

어느 서양학자는 서양사는 고대·중세가 없고 근세·근대부터 비로소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했는데, 실제 유럽의 역사는 10세기 이후에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카톨릭 교황청이니 비잔틴(동로마)제국 황제니 하는 것은 10세기 이전에는 허울뿐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북유럽과 발칸반도 이북의 동유럽 등지에 기독교(카톨릭과 동방정교 포함)가 포교된 것은 10세기 이후에 이뤄진 일이다.

일천년 동안 북유럽과 동유럽 등지에는 왜 기독교를 포교하지 못했을까? 이는 스페인·포르투갈 등의 이베리아반도의 남유럽이 본래에는 무슬림 지역이란 역사적 사실과 같은 이치이다. 유럽 전체가 이천년간 기독교 지역일 것이란 편견만 버리면 진실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발칸반도에서는 오늘날에도 무슬림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적어도 10세기 이전의 기독교는 카톨릭 교황청이나 비잔틴 제국(?)과 가까운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포교를 했을 것 같다. 남쪽으로는 사라센 제국의 지배를 받고 북쪽으로는 바이킹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킹은 북유럽과 동유럽은 물론이며, 이탈리아 지역 등 남유럽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프랑스 지역과 브리타니아 섬 등에도 나라를 세운다고 되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온전한 카톨릭 국가가 들어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고대~중세사는 성공적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사라센과 바이킹의 역사들도 대폭 축소·은폐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 신라는 삼국통일 후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와 남북국을 이룬다고 했다. 신라는 유라시아의 거대제국인 사라센 제국이다. 그렇다면 동시대에 사라센 제국과 남북국을 이룰 정도의 힘을 가진 나라는 어디일까? 세계의 역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세력은 바이킹 밖에 없다. 이 바이킹이 서쪽의 발해세력이라 여겨진다. 바이킹의 주요 근거지인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발칸반도 부근의 바다 이름이 발트해와 흑해로 불리게된 배경도 발해의 흑수말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바이킹의 우두머리 표식은 고구려의 표식과 일치하며 바이킹과 발해가 활약한 시기역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카톨릭과 동방정교 등의 기독교 교세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것이 10세기 이후인데 이는 신라·발해의 멸망시기와 일치한다. 바이킹이 소멸되는 시점에 기독교가 포교되는 것은 기독교 세력과 바이킹은 완전히 이질적인 세력임을 증명하며, 바이킹이 활약하던 시절 기독교 세력은 그들 아래에 숨죽여 있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기독교 포교를 한다는 것은 드디어 어느정도의 독립을 이루고 자신들의 역사시대를 시작한다는 것인데, 그 시발점이 11세기 동방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지금까지 대략 살펴본바와 같이 유럽은 볼품없는 자신들의 고대~중세사를 아주 세세하게 소설화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 같고, 양심상 중세의 암흑기라는 솔직한 단서를 살짝 붙여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유럽이 역사시대를 길게 살지 않았음은 그들의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를 쉽게 증명해주는 아주 친숙한 용어가 바로 ‘봉건제도’다. 일반적으로 봉건제도니 봉건시대니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민주시대 이전의 왕정시대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봉건제도의 주요 요소는 영주와 기사, 농노 등으로 구성된다. 영주가 땅을 소유하고 기사는 영주 주위를 지키며 농노는 영주의 땅에서 농업노동에 종사하며 삶을 영위한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물론 허용되지 않고 농업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법도 없다. 모든 것을 영주가 소유하니 농노들은 사실 영주의 소유물과 비슷하다. 그래서 당시 유럽의 농업종사자를 농민이 아닌 농노라 부르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혜택이 있긴하다.

봉건제도의 주요 요소는 영주와 기사, 농노 등으로 구성된다. 영주가 땅을 소유하고 기사는 영주 주위를 지키며 농노는 영주의 땅에서 농업노동에 종사하며 삶을 영위한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물론 허용되지 않고 농업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법도 없다. 모든 것을 영주가 소유하니 농노들은 사실 영주의 소유물과 비슷하다. 그래서 당시 유럽의 농업종사자를 농민이 아닌 농노라 부르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혜택이 있긴하다.

영주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전쟁 발생시나 외부의 적이 침략해 들어올때 기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전쟁 발생시 영주가 기사를 이용해 농노를 보호해준다? 국가의 역할을 영주가 대신한다? 그럼 국가는 무엇을 하는가? 이 지점에서 의문이생긴다면 봉건제도를 바르게 이해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봉건제도가 발달한 지역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영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봉건제도라는 것이 전 유럽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고 천년이상 지속된 지역도 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서유럽 지역이 이 지역에 해당된다. 이런 지역에서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국가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역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10세기 이후 카톨릭 교황청은 전유럽으로 기독교 교세를 확장하며 아시아로부터 어느정도 독립을 이루긴 하나 여전히 세계 문명사의 진행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반동적인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주란 신분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카톨릭교황청의 권한이다. 왕이란 신분계급도 교황의 재량권 내에서 임명(?)·교체 될 수도 있는데 카톨릭 사제들의 영지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 카톨릭 사제는 선망의 직업이었고 높은 서열의 사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다녔다. 유럽의 모든 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이뤄졌다. 국가란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카톨릭교황청이 유럽 내의 모든 사회분야에 관여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카톨릭교황청 자체가 유럽인 것이고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카톨릭교황청과 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민이었다. 이러한 유럽이 근대시기 동양에 쳐들어와서 봉건제도와 인권을 구실로 침공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가 존재하는가? 봉건제도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는가? 우리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국 대부분에 지방관을 파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모든 지역에 지방관을 배치하였는데, 이런 봉건제도가 존재했겠는가?

역사발전 법칙상 시대적 한계로 우리에게도 물론 고약한 신분제도라는 것이 백성들의 삶을 옥죄었지만 저 유럽의 농노와 우리의 농민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며, 우리 역사에 나오는 향·소·부곡 따위의 특별지역도 저 농노만큼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저들은 천년 이상을 신민으로서 농노로서 신에게 봉사한 셈이고 그런 미개한 역사는 유럽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인들에게 친숙한 공작이나 후작, 백작 같은 용어가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리는 이유도 이러한 역사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왕도 사실상 봉건영주에 불과했고 공작령 등을 거느린 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유럽의 국가와 역사의 허구성을 좀 더 얘기해 보자면, 뤽 베송 감독의 ‘잔 다르크’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신 분이 있으실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 중인데 소녀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아 ‘신의 이름’으로 영국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인데, 오늘날 이 영화를 감상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떨쳐 일어나야할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고 신을 위해서 싸운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너무나도 모르는 이들의 반응이다. 뤽 베송은 잔 다르크를 매우 사실적으로 잘 연출했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백년전쟁을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재구성해 놓았는데, 백년전쟁은 민족주의적 전쟁이 아니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유럽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영국왕위를 프랑스계가 계승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오스트리아 왕이 유럽 반대편의 스페인을 통치한다거나 스페인 왕이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역사적 사실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백년전쟁은 민족주의적 색깔을 띤 전쟁이 아니다.

백년전쟁을 보편적 역사에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그의 모계를 이유로 프랑스 왕위에 오르려 했던 것이 전쟁의 발단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발단 자체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유럽엔 민족주의 자체가 없다! 영국왕위나 프랑스왕위란 것이 별게 아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왕이라는 존재는 단지 카톨릭교황청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였다. 아무튼 전쟁의 발단은 그러했는데 소녀 잔 다르크가 왜 갑자기 참전하냐고? 당시의 프랑스에는 ‘아비뇽 유수’라고 로마의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유수되어 있었고 카톨릭 소녀 잔 다르크는 신에 대한 참된 봉사를 위해 프랑스에 위치한 아비뇽 교황청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무모하게 신을 위해 싸우는 저들을 이해 할 수가 없지만 당시 유럽이란 땅이 저 정도로 카톨릭 권력이란 것이 전지전능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가 없는 유럽이 근대시기를 지나면서 민족주의가 필요해지자 역사에 민족주의란 옷을 입힌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조차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럽은 카톨릭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해야 유럽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카톨릭교황청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의 역사적 실례는 무궁무진하다. 한 예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토르데시야스조약이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 조약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신대륙이라고 공갈쳐서 만행을 부리기 시작한 시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국경선 문제가 불거졌는데 교황청이 개입하여 칙서 한 장으로 해결한 사건이다. 이로인해 오늘날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나머지의 모든 중앙·남아메리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니 카톨릭교황청의 위세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카톨릭교황청의 권위도 시들해지는 시기가 다가오는데 이것이 16세기에 대두한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카톨릭으로부터의 프로테스탄트 분리 운동이다. 이 종교개혁 운동이 종교전쟁으로 번져 카톨릭교황청 아래 통제되던 왕들이 실질적인 독립적 왕국으로 거듭나게 되고, 이 시기에 들어서 유럽각국은 단일국가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종교개혁 후 카톨릭교황청을 수호하는 지역은 사실상 이베리아반도와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정도만이 남게되고,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한 각각의 프로테스탄트 왕국은 종교개혁·종교전쟁에도 물밑에서 개입한 것으로 보이는 상업자본가 세력과 제휴하여 자본주의를 잉태하는 기반을 조성한다. 이들 중 신생국 네덜란드가 유대계 상업자본가와 가장 먼저 제휴했던 것으로 보이며 1602년의 동인도회사가 그 결과다. 이들이 말레이-인도네시아 섬 등의 왜와 교류한 이들이며, 조선의 제주도에 들어온 하멜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 물론 여기서 조선은 반도가 아닌 대륙을 말한다.

네덜란드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물꼬를 틀고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이다. 이 유명한 명예혁명을 보편적 역사에서는 프로테스탄트로 선회한 영국을 카톨릭으로 회귀시키려한 제임스 2세의 폭정에 대해 반발한 시민혁명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명예혁명의 결과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이 집권한 영국은 급속도로 자본주의가 촉진되고 비대해져 훗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는데, 그 원인은 명예혁명에 네덜란드의 유대계 상업자본가 세력이 실질적으로 개입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주로 유대계인 상업자본가 세력들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세력을 옮겨가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촉발시켰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발표하였듯 그 이전의 스페인·포르투갈에서 제국주의적 식민지경영이 번성했던 이유도 이들이 영향을 준 것임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며, 그 곳의 자본가들이 카톨릭교황청의 간섭을 피해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옮겨온 것은 물론이며, 그 이전의 종교개혁에도 실질적으로 개입했다면 이제 순서가 무엇이겠는가? 카톨릭교황청과 그 휘하의 국가를 허무는 것이 순서이며 그 실행결과가 프랑스대혁명(1789년)이다.

프랑스대혁명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침투한 자본가 세력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과 순수혁명가, 진보적 시민(?)들이 뒤범벅이 된 상황에서 벌어진 마지막 유럽개조 작업이었다. 프랑스대혁명 후, 카톨릭교황청의 지원 아래 수백년간 지속된 왕정을 하루아침에 직접민주주의로 전환하려니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공포정치와 총재정부, 통령정부로 이어졌지만 프랑스의 상황은 어수선해졌으니 이 순간 등장한 이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거대한 힘의 배후는 나폴레옹 같은 인물의 등장을 원했을 것인데 이에 부응하듯 나폴레옹은 900여년간 이어진 카톨릭교황청의 방어선인 신성로마제국을 패퇴시켰고 온 유럽을 누비며 왕정을 허물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카톨릭교황청 옹호의 최후보루인 스페인의 끈질긴 항전의지와 러시아원정의 실패로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날개는 일시적으로 꺾이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빈회의에서 유럽의 군주들에게 심판을 받는 메테르니히 체제가 가동된다.

유럽 왕국의 군주들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억누른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구세주처럼 보였겠지만 프랑스에서는 곧이어 7월 혁명과 2월 혁명이 터지고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혁명의 기운이 번져 전 유럽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로 달아오른다. 당시의 보편 다수의 유럽인들이 원한 방향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유럽은 상업자본가 계급이 원하는 방향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되었다. 곧이어 프랑스 역시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며 영국에 버금가는 식민지를 경영하게 된다.

이 민족주의의 기운을 빌려 1822년 발칸반도에서 그리스가 돌궐 왕조를 밀어냈으며 유럽은 대외적으로 본격적인 팽창의 기운을 드러낸다. 프랑스는 돌궐 왕조의 일원인 이집트와 알제리 등에게 민족주의를 부추겨 독립을 유도한 후 알제리를 병합하였고 영국도 유사한 방식으로 아라비아반도 남부를 점령한다. 1853년 발발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에 승리한 영·불 연합군은 돌궐 왕조가 쇠퇴한 틈을 타 서아시아를 마음대로 유린했으며, 1857년엔 무굴을 완전히 병합하는 등 아시아의 굵직굵직한 왕조를 차례대로 붕괴시킨다.

임진왜란(1592년) 전후 아메리카대륙 침공, 남아시아 섬 병합, 오세아니아대륙 병합 등 조선대륙의 주위만 집적거리던 서세가 결국 오손 돌궐과 무굴 등을 무너뜨렸으니 동양의 심장인 조선 침공이 그 마지막 순서였고, 무력 침공 이후 지속적인 정신적 지배를 위한 복안으로 조선의 역사를 조작하여 축소·은폐하는 작업을 계획한다. 물론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으로의 역사 부풀리기가 이미 완료된 상황에서 말이다.

서양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아시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게르만민족이다. 하지만 통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학적 동류의 족속이지만, 한민족이란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의식이 없는 이유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이란 나라가 최초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1866년이다. 그 이전의 독일은 각 도시들마다 왕이나 봉건영주들이 카톨릭교황청에 충성하며 독자적인 세월을 걸었다.

이탈리아는 또한 어떠한가? 좁은 반도국가인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다. 피렌체, 베네치아 등은 과거에 항상 서로 다투었던 지역들이고 사르데냐는 문화적으로 프랑스와 가깝고, 시칠리아는 사실 아라비아 혹은 그리스의 역사가 더 많이 배어있다. 이러한 다양한 특색 역시 이탈리아의 고유한 역사없이 나폴레옹 시기의 민족주의에 힘입어 급하게 통일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가 있다면 각 도시들의 역사를 취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비단 독일과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유럽국가 대부분의 역사는 이러하다. 이들의 눈으로 우리의 역사가 해석이나 가능할까? 오스트리아 왕이 스페인을 다스려도 스페인 사람은 환영하고 아니, 자신이 스페인 사람이나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유럽인들의 민족주의를, 가진 것 하나없는 조국에서도 왜놈들 싫다며 의병운동 전개하는 우리의 민족주의와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역사적 세월의 깊이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몸에 배어 나타난다. 축구 같은 유희적 스포츠만 보더라도 유럽인들은 우리와 다르게 클럽 경기에 열광한다. 자신들의 지역 클럽이 다른 지역의 클럽에 지는 것이 자신들의 국가대표팀이 타국의 국가대표팀에 지는 것보다 더 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100년도 더된 축구클럽의 역사와 통일국가 역사의 시간이 별로 다르지 않다. 역사의 세월이 길지 않으니 국가나 민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은 덜할 수밖에 없는 반면 자신들이 항상 부딪히고 생활하는 지역사회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애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관념이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세동점기 서세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짜여진 화려한 역사의 새옷을 입을 필요가 있었고, 반면 동양에 대해서는찬란한 역사의 옷을 벗겨내고 누더기 같은 옷을 덮어 씌워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동양이란 것이 사실 조선과 고려의 다른 이름이었으니 우리의 역사를 가만두지 않은 것이다.


11. 왜구는 어떻게 우리혼을 조작했을까?

일제는 조선의 혼인 조선의 역사를 왜 죽이려 했을까?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을 한번 더 들여다보자.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역사를 지배하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사람은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살며 또 그것을 바탕으로 내일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어제의 우리가 볼품없는 존재였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할까? 아마도 오늘의 우리를 비관하는 것은 물론이며, 내일도 별 희망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역사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외래인의 간섭을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는 노예근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노예근성이라는 패배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 일제와 그 배후의 거대한 서양제국주의 세력이 노린 것, 그것의 핵심이 역사조작이다.

누차 마지막 왜구총독인 아베 노부유키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 속에 우리 역사의 그릇 크기와 일제의 노림수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가 우리를 공식적으로만 36년 이상을 지배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사서 26만권을 압수하여 불태우거나 약탈해갔으며 ‘조선사편수회’란 단체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인간은 어제의 추억을 통해 오늘의 나를 살고, 그 위에 서서 내일의 나를 꿈꾸지만, 민족이나 국가의 차원에서는 어제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민족이 영위되고 내일의 더 나은 역사가 설계된다. 하지만 만약 역사가 패배주의와 사대주의로 구겨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온전한 민족 공동체, 국가 공동체가 영위될 수 있을까?

아베 노부유키는 과거의 조선을 재차 찬란하고 위대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손을 거친 현재의 우리 역사가 정말로 찬란하고 위대한가?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을 몇 번이고 찬란하고 위대했다고 반복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는데!

아베 노부유키는 이어서 실로 찬란하고 위대했던 조선이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통해 노예로 전락했다고 조소하고 있다. 또 식민교육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우리를 짓눌러 다시는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찾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 왜놈의 짧은 몇마디에서 느껴지는 옛 조선의 그릇이, 정말 현재 우리가 아는 옛 조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가? 허구한 날 사대질만 해대던 그런 못난 조선으로 보이느냔 말이다.

일제와 일제를 지원한 배후세력들은 우리를 영구히 노예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손봤다. 그 때문에 저 아베 노부유키는 저런 확언을 거리낌 없이 내 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저들이 조작·날조한 역사를 진실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역사는 분명 가공되고 조작되었다. 그런데 그 역사가 어떠한 식으로 가공, 조작 되었을까? 그 방법론적인 부분을 한번 풀어보자.

일제가 우리를 공식적으로 유린했던 기간은 36년인데 그 이전의 몇 해 역시 사실상 일제에 의해 자주권을 상실했음을 감안하면, 일제에 직·간접적 지배를 당한 기간은 대략 50~60여년 정도 될 것이다. 저들이 우리 역사를 손볼 수 있었던 시간이 최장 반세기 가량 정도 된다는 뜻인데, 저들이 역사를 조작하는 방법론에서는 어떠한 방법이 가장 쉬웠을까?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봐야한다. 반세기라는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다. 반세기라면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반대로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찬란하고 위대했던 조선을 노예 조선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어떠한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을까?

위대하고 찬란한 조선이 노예 조선으로 둔갑되려면 첫째, 조선사의 성격 개조가 필요하다. 조선사의 성격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둘째, 필시 조선의 군력이 조정되어야 한다. 군력의 조정은 왕정시대의 역사 흐름상 반드시 강역의 조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베 노부유키가 증언한대로 셋째, 식민교육을 통해 조선인을 세뇌하여 노예화하는 단계로 완성된다.

요약하자면 군력 축소를 통해 조선의 강역 축소를 도모하고 위대한 조선을 사대 노예국 조선으로 전락시키는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으로 대륙과 지구를 호령하던 조선의 역사가 조선의 일부였던 반도로 이식된 것이다.

왜-양은 제한된 시간 내에서 위대한 조선을 사대 노예국 조선으로 바꿨어야 했기에 최단시간, 최고효율의 조선사 조작을 실시했고 실제 조선사편수회는 최단기간에 조선사 조작을 완성하여 1930년대에 식민교육을 실시한다.

예상되는 그 방법론을 한번 살펴보자.

코리아의 역사에는 고대부터 ‘중국’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데, 이것이 역사조작의 핵심 단어다

삼국은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운다고 제도권 역사는 말한다. 또 근세조선의 위대한 군주 세종은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훈민정음을 창제한다고 말한다.

실제 역사에서의 중국은 나라가 아니다. 사서에서 중국은 중원이나 중토와 혼용되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중국과 중원 등의 단어는 특정 국가 이름이 아닌, 전략적 요충지나 황제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실사에서 삼국은 국가가 아닌 전략적 요충지인 중국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것이고, 조선의 위대한 군주는 조선의 드넓은 대륙에서 한자를 읽는 소리가 저마다 달라, 황제는 황제 자신이 있는 중국의 발음으로 조선의 한자음을 통일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아는 서세가 조선을 사대 노예국으로 만들기 위한 식민학의 논리로 탄생시킨 것이 족보 없는 신생국가 중국이다. 현대인은 오늘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러하기에 조선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현대중국을 삼국의 상전으로 치환시켜 세뇌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세종이 있는 조선 내의 황도인 중국을 현대중국으로 치환시켜 세뇌한 것이다.

조선 내에 황도로써 존재한 중국이, 20세기 들어 서세에 업혀 족보를 세탁한 세력들에 의해 국가로써 탄생되고, 이때 이미 이 거대한 역사조작의 9할 이상이 완성된 것이다.

조선의 황제들은 역사 내내 자신이 있는 중국을 강조하는데, 이 중국이 근현대에 들어 조선과 전혀 상관없는 국가로 떨어져 나오고, 조선의 역사가 조선의 일부인 코리아반도로 이식되는 순간 조선은 꼼짝 못하고 현대중국의 사대 노예국으로 전락하는 이치다.

후속작업은 무엇이 되겠는가? 서세는 역사가 없는 족보세탁 괴뢰국인 현대중국에게 역사의 옷을 입혀주는 작업을 실시한다. 물론 하청 수공작업은 일본과 현대중국의 몫이다.

근세조선 시기, 대륙에 있던 조선의 서부지역인 중앙아시아에 시간 순으로 명과 청이 존재했다. 그런데 조선이 조선의 일부인 동북부 반도로 강역이 좁혀진 채 이동되면서 조선의 서부지역인 명과 청도 역사적 인과관계에 맞게끔 동쪽으로의 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명과 청의 역사가 조선의 본토이자 코리아반도의 서쪽인 현대중국으로 옮겨와야 했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에는 명의 역사와 판박이인 티무르제국의 역사가 자국의 역사로 전해온다. 티무르제국이 명인데, 명의 역사를 서쪽의 현대중국이 도용하면서 대폭 수정·창작해서 티무르제국의 역사와 명의 역사를 쉽게 식별하지 못하도록 손질해 놓은 것이다.

청은 명이 있던 곳에서 명을 무너뜨리고 일어난 나라다. 그러니 청도 곧 명이 있던 중앙아시아에 세워진 나라다. 현대중국은 청의 역사 역시, 역사가 없는 자신들의 역사로 도용하여 잘 못알아보게끔 꾸며놓았다.

현대중국이 도용한 중앙아시아 명과 청을 중국으로 설정하고, 그 뒤 일본이 코리아반도의 조선 후손들에게 세뇌교육을 실시했으며, 현재의 겨레는 그 거짓 역사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상태다. 역사조작은 이러한 절차대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고려의 영토를 이어받았지만 조선 내부에서 왕자의 난이라는 사건이 터져 중앙아시아의 명과 동방의 조선으로 영토가 분열되었지만 고려는 중앙아시아에 서경을 두고 그 지역을 직접 관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고려 서쪽 나라의 역사를 현대중국이 도용해 오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에 시도한 것이 고려사를 복사한 후 대폭 수정·창작하여 송의 역사로 소설화한 후 현대중국의 역사로 배치한다.

몇몇 연구자에 의해 고려가 송의 다른 이름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것의 사실여부는 역사조작의 본질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송이 고려의 다른 이름이건 가상의 나라이건 그 역사의 실체는 고려사의 복사·수정·창작판이란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우리의 사서 교열작업을 통해 지구를 호령하던 조선사가 사대 노예사으로 전락했는데, 만약 일본이 훔쳐간 정본 사서들마저 교열작업을 단행했다면, 이 쪽바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위대하고 찬란한 조선이 이러한 작업을 통해, 노예국 조선으로 전락했음이 분명한데 일부 연구자들은 명과 청의 역사마저 실체가 없던 나라라고 부정한다. 왜-양이 이렇게 빠르고 쉬우며 효율적인 조작 과정을 내팽개치고 명과 청이라는 나라마저 새로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나도 모르는 말이다.

조선의 사서에는 명, 청과 얽혀 돌아가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아무리 일제가 많은 교열작업을 거친다고 해도 이러한 이야기를 모두 창조할 수는 없다. 또 애써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중간, 중간에 손을 봐서 주변국과의 지리적 위치,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조정하고 조선의 웅대한 성격을 사대적으로 격하할 뿐이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역사를 보는 관점을 똑바로 세워야한다. 세세한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양에게 조선이 어떤 나라였을지 상상이나 되시는가? 조선은 이렇게 위대하고 찬란한 나라였다. 왕조시대 신분제 사회로서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겠지만 근세조선이 타국의 철학자에게 그토록 찬양받은 이유를 조선의 후손인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대륙조선사를 말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다양하기에 자칫 역사가 소설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왜-양이 조작질 해놓은 틈새로 진실의 인과관계가 아주 선명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들을 조금만 바르게 보려하면 누구나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12. 형제의 나라(?) 터키와 김부식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려면 터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거 고려-조선과 가장 긴밀한 역사적 관계를 맺었던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 중국(?)이 아니라 돌궐(투르크) 왕국이다. 현재 제도권의 보편적 역사는 중세-근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 중 하나로 이 투르크 왕국을 꼽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인의 관점일 뿐으로 그들에게는 투르크 왕국이 거대한 산과 같았지만 우리에겐 이 돌궐 왕국은 고려-조선의 충직한 제후일 뿐이었음을 아래에서 말해 보겠다.

터키의 근현대사는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 역사를 진실되게 알려면 서세동점기를 알아야 하듯 터키에 대해 알려면 서세동점기를 알 필요가 있다. 보편적 역사에서도 설명하지만 터키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남유럽 등의 세 대륙을 점유하며 거대한 왕국을 일구었는데, 19세기 들어 영·불 등의 유럽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지배당하면서 소아시아반도와 발칸반도 일부로 영토가 좁혀졌고, 무스타파 케말 파샤라는 서방주의자에 의해 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돌궐 왕국의 나머지 영토는 서세에 의해 제 멋대로 그어진 국경선에 의해 수많은 이슬람 신생국들이 탄생되었고 이스라엘 같은 나라도 들어서게 되었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 분쟁의 발단도 이 돌궐 왕국의 붕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세동점기를 지나며 거대한 돌궐 왕국이 소멸되고 서방화된 현재의 터키가 탄생되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터키는 코리아를 ‘형제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표현을 역사적 이유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코리아를 형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발해의 남북국 시대 말기와 고려시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지난번 글들에서 설명했지만, 신라(사라센 제국)는 유라시아의 서남방을 위주로 거대한 제국을 일으켰고 그 북방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대항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10세기 초엽 발해는 새로이 일어나는 거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망하고 신라는 또다른 고구려 계승세력인 동방의 고려에 의해 멸망한다.

고려는 유라시아 대제국 신라를 무너뜨렸으니 동방에 주요 근거지를 두고 서방으로의 영토를 대폭 확장한 셈이었고, 발해의 일부지역은 거란이 빼앗았으니 유라시아의 거대제국 고려에 거란이 대항하는 형세로 국제사회는 재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유라시아에 수많은 제후를 거느린 고려를 가장 먼저 위협하는 것은 이 거란족의 ‘요’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이 거란이란 존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거란은 서양에서는 키타이, 케세이 등으로 칭해졌는데, 이 키타이는 고대의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다. 스키타이는 현재 러시아의 역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기원전 러시아 지역에서 강성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기원전후 사르마티아에 의해 밀려나며 역사에서 일시적으로 소멸된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 후에 역사에 다시 등장한 이 키타이가 스키타이의 후예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키타이가 일어난 지역도 동유럽에서 서북아시아 지역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유라시아대륙에 있던 고려의 서북쪽과 일치한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고려가 반도로 한정되어 설정되니 역사의 인과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키타이를 현재의 요녕성과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것으로 설명하지만, 현재 요녕성과 하북성은 물론이고 중화민국의 전체에 키타이나 거란의 후예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키타이는 동유럽과 서북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난 세력이고 그 곳에서 ‘요’를 세웠다고 본다. 그 곳에서 서쪽의 발해를 멸했으리라 여겨지는데, 발해의 고구려계는 고려에 흡수되고 말갈계는 정안국을 세우는데 이내 곧 다시 거란에 멸한다.

발해를 멸하고 고려에 대항하는 이 키타이는 과연 뭘까?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멸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 대항하는 키타이, 그리고 이들은 후에 여진의 ‘금’과도 적대관계를 형성한다. 개인적으로 이 키타이는 황색문명이 전이된 백인종족이라 생각된다. 즉 슬라브나 게르만이 거란일 확률이 높다는 뜻으로, 아마도 서양사에 나오는 후기의 비잔틴 제국이 거란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역사에서 10세기경 러시아 등의 슬라브 지역(동유럽)으로 기독교가 전해진다. 이전의 글에서 말했지만 이 시기는 고구려와 같은 ‘우두머리 표식’의 바이킹이 쇠락해져 가는 시점이다. 기독교가 포교된다는 것은 백색문명이 세력을 어느정도 회복한다는 뜻인데, 이 시기는 발해가 거란에 멸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역사에서 남의 신라와 남북국을 이뤘던 북의 발해, 신라인 사라센 제국은 유럽의 남부를 지배하였고, 바이킹은 그 윗선의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바이킹이 소멸되고 유럽에서 기독교가 통용되는 시기와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하는 시기는 10세기로 일치한다.

고려는 유라시아 거대제국 신라를 멸했지만 발해 일부의 영역만큼은 거란에게 내어줘야 했다. 제도권 역사에서 거란은 고려의 서북쪽에서 발흥했는데, 실제의 고려는 유라시아 대제국이므로 고려의 서북쪽이라 하면 유럽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실사에서 고려 태조의 북진정책이란 발해를 무너뜨린 유럽을 정벌하는 것이었으며, 유럽에 해당하는 ‘요’와의 전쟁 구실은 ‘만부교 사건’에서 비롯되는데, 이 사건 후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해 들어오는데 이 사건을 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기록한 것 같다.

거란의 세 차례의 침입과 네 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보편적 역사에서 보면 1세기 정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두 전쟁의 정황을 잘 살펴보면 같은 사건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은 총 네 차례 행해졌는데 고려에서는 거란이 세 차례 침략한 것으로 기록한 이유는, 3회 이후의 십자군은 고려에 침략한 것이 아닌 후에 일어난 ‘금’과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금을 주목해보자.

제도권 역사에서 여진의 금은 반도 고려의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설명하는데, 실제 고려는 유라시아 대제국이므로 고려의 북부라면 중앙아시아나 북아시아일대를 이를 것이다. 이 지역에서 여진인 아골타가 세력을 키워 ‘금’을 건국하는데, 이들이 국호를 ‘금’으로 내세운 이유는 김씨왕조인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한 것이다. 고려는 동아시아대륙에 평양을 황도로 두고 직접 관할한 대신 신라의 영역을 흡수한 서역에는 여러 제후국을 두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 신라의 후예를 자처한 여진이 1115년 ‘금’을 세워 고려에 대항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신라의 후예 ‘금’이 고려의 서쪽 영토이자 신라의 고토인 서역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니 자연스레 서북방의 거란과 만나게 된다. 때문에 이 시기부터는 남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거란의 요와 맞서는 이는 고려가 아닌 여진의 금이 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십자군 전쟁의 4회차 전투를 금이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금이란 나라의 역사를 서양사에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서양에 의해 기록된 이 금이란 나라가 사실 그 유명한 셀주크 투르크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금나라의 역사는 1115년에 시작되어 1234년 끝나는데, 셀주크 투르크는 1037년 시작되어 1194년 끝난다. 두 왕조의 시작 연대는 차이가 조금 있지만 1세기 가량의 짧은 기간의 역사와 몽고제국에 함락당한 역사는 일치한다. 또 반도 고려의 북부에서 발흥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금의 역사를 실제의 대륙고려로 치환하면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발흥하여 서역으로 세력을 넓혀간 셀주크 투르크의 역사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기에 더해 금은 고려북부에서 발흥해 서쪽의 요와 부딪히고, 셀주크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 서역으로 세력을 넓혀 서북쪽의 비잔틴-유럽과 부딪히는 역사도 일치한다.

금은 여진이 세운 나라고 셀주크 투르크는 돌궐이 세운 나라니 서로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여진이나 돌궐이란 것은 단일 민족명이 아니다. 역사에서 여진이라 불린 족속은 매우 많고 돌궐계로 분류되는 세부종족도 무척 다양하다. 이 시대의 유라시아는 고구려를 계승한 동방의 고려와 신라의 부흥을 꿈꾼 서역의 금, 발해를 무너뜨린 유럽의 요의 세 세력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금이 건국되기 전인 고려와 요의 대결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고려와 요의 전쟁의 발단이자 앞서 언급한 만부교 사건을 한번 들여다 보자. 만부교 사건이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 942년에 거란이 사신과 낙타를 고려에 보내어 교류를 원하자 태조 왕건은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이기에 국교를 맺을 수 없다.” 면서 사신들은 유배보내고 낙타는 개성의 만부교에 매달아 굶어 죽게하였다.’ 는 유명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사건 내용 외에도 눈에 띠는것은 ‘낙타’라는 조공물품이다. 이 사건으로 거란의 위치 추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제도권 역사에서 거란의 요는 요녕성과 하북성 등지에서 일어나 고려를 괴롭힌 나라라고 하는데, 요녕성과 하북성에 낙타가 있는가? 또 반도의 고려에 낙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 상황은 분명 코리아반도의 상황이 아니다. 낙타가 서식할 수 있는 곳은 유라시아 내에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정도가 있다. 고려의 주변상황은 분명 대륙이고 고려시대의 개성이란 낙타가 서식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거란은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난 나라인가? 그것도 아닌 것이 대륙의 고려북부지역에서 발흥하여 서역인 서아시아로 세력을 넓힌 금이 자신들의 서북쪽 요와 치열하게 싸운다는 것은, 요의 위치가 고려와 금의 지역과는 다른 제 3지역에 있다는 것이고 이는 유럽을 말하는 것이다.

만부교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아마 요와 고려가 국경을 마주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아시아반도(터키 아나톨리아반도) 정도로 생각된다. 이 만부교 사건으로 인해 세 차례 맞게되는 요의 침입을 잘 방어해 명성을 떨친 이들이 각각 서희, 양규, 강감찬이다. 이들 중 고려와 요와의 전쟁 성격을 가장 또렷하게 밝혀주는 사건이 서희의 외교 담판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한번 보자.

요의 소손녕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소.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 나라가 침식하였고......” 고려의 서희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를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소?” 여기서 서희가 평양을 언급한 것은 동방의 고구려 본토를 고려가 물려받았음을 말한 것이고, 소손녕이 신라를 언급함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신라의 서역 땅까지 모두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요가 유럽이 맞다면 당시 유럽은 고구려(훈)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요의 침입을 방어하고 있을 즈음, 고려 내부에서 떨어져 나온 신라부흥 세력인 금이 고려를 대신해 요에 대항하는데, 1125년 급기야 금이 요를 멸해버린다. 요의 멸망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상응하는데 이를 서양사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냐면, 비잔틴 제국은 12세기 이후 과도한 영토확장 전쟁과 여러 민족간의 갈등, 종교의 분열, 이민족의 침입 등이 잇따라 스스로 붕괴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비잔틴 제국은 한창 셀주크 투르크와 전쟁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역사적 인과관계가 맞으려면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서양사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이민족의 침입 외에도 이런저런 자잘한 이유를 들며 내부 붕괴한 것처럼 기록하였다. 이는 이슬람교도인 셀주크 투르크에게 기독교도인 비잔틴 제국이 침몰한 역사를 가린 것이라 보인다. 아무튼 이 기록에서 보면 1125년 멸망한 요와 12세기 멸망한 비잔틴 제국의 멸망 시점은 일치한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이렇게 모호하게 기록한 서양이 십자군 전쟁의 역사에서 비잔틴 제국의 멸망 원인을 또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4회차 십자군 전쟁 중 교황청의 서유럽 세력이 1204년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을 멸한다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유럽 사이의 내전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서양사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를 소탕하고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성전으로 설명했는데, 급기야 내전으로 기독교도가 기독교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아무런 성과없이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린다?

오늘날은 서유럽이 남유럽이나 동유럽보다 훨씬 선진지역에 속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유럽보다 지중해연안이나 동유럽 등이 아시아의 선진문화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기에 훨씬 선진지역이었다. 이는 낡은 봉건제도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랜기간 지속되었음이 증명한다. 그런데 유럽 내에서 나름의 역사가 깊은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 성전을 벌이다가 ‘아군인 기독교도에 의해 무너지거나’, ‘스스로 붕괴한다’는 일치되지 않는 두 개의 역사가 전해진다? 또한 멸망 시점도 다르고? 이는 17세기 이후 급격히 팽창한 서유럽이 자신들의 역사를 손질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비잔틴 제국을 포함한 유럽은 실제 이슬람교도인 셀주크 투르크에 멸망한 것인데 이를 숨기려니 모호한 두 개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기록할 때 1회에서 4회차 까지는 대규모로 행해졌다고 기록하지만 5회차 이후의 십자군은 흐지부지하게 이뤄진 것처럼 흐리게 기록하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사실 네 번째 십자군 전쟁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함락된 것이기에 이후의 십자군 전쟁은 사실상 국지적인 독립전쟁이라 생각되는데, 후에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를 가리고 인과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이 역사를 흐릿하게 처리했다고 보인다.

물론 십자군과 셀주크 투르크가 벌인 전쟁의 횟수와 연대가 요와 금이 벌인 전쟁의 횟수와 연대와는 서로 정확하게 맞지는 않는다. 이 두 역사의 횟수와 연대가 일치하지 못하는 이유는 초기의 십자군은 실제로는 고려와 벌인 전투인데, 고려의 역사를 축소·은폐하려니 처음부터 셀주크 투르크가 고려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결말이 다른 두 개의 역사 중 비잔틴 제국은 12세기에 멸망한 것이 사실이라 보이며 이는 1125년 금이 요를 멸한 것과 같은 역사다.

고려의 북진정책의 대상이었던 요를 고려에서 떨어져나간 신라의 후예 금이 대신 멸했으니 이제 천하는 서역의 금과 동방의 고려 양자 간의 대결구도로 좁혀진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의 대결구도의 연장선이며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와 불교의 대결구도인 것이다. 고려의 대장경이 거란 침입시부터 몽고 침입시까지 지속적으로 조조되는 것은 당대 불교의 본산이 고려이고 거란 등의 침입자들은 고려의 불교도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 초기의 신라식 서역불교인 이슬람교가 당시의 동방 불교와 얼마나 이질적이었을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금이 요를 멸하기 직전 그러니까 금의 세력이 강성해지기전, 고려는 고려 땅이자 신라의 고토에서 일어선 금에 대하여 통합정책인 회유와 동화를 권하다가 금이 강경하게 나오니 곧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이에 고려는 윤관으로 하여 별무반을 편성하기로 하고 9성을 축조하여 여진(돌궐)족을 토벌하기로 한다(1107년). 하지만 금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요를 멸한 이후에는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제안했다고 제도권 역사는 말한다. 이 시기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그 유명한 이자겸과 김부식이다.

금은 김씨왕조의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에 대해 어느정도의 적개심을 품었겠지만, 금이 요를 멸했다하여 천자국 고려에게 정말 군신관계까지 제안했을지는 모를 일인데, 이자겸과 김부식은 정권유지를 위해 금과의 사대관계를 수락하는 것으로 제도권 역사는 설명하고 있다. 이에 그 유명한 묘청의 난(서경천도운동)이 발생한다. 묘청은 김부식 일파의 친금정책에 저항하며 고려의 황도를 서경으로 옮겨 금 정벌론을 주장하였다. 묘청이 주장한 서경이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 어디엔가 위치할 것이고, 묘청은 그 곳에서 금과 국경을 맞대고 공세를 펼쳐 굴복시킬 것을 원했다.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고려를 이끌려 했지만 곧 김부식 세력에게 진압 당한다. 여기에 아주 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제도권 역사에서 묘청은 자주적인 반면 김부식은 사대적으로 취급하고, 묘청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했으나 김부식은 신라를 계승하려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묘청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불교주의자였지만 김부식은 유교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 아시는 부분일텐데 김부식이 유교를 숭상했다는 것에는 기존의 해석 외에 또다른 의미가 있다.

김부식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씨신라의 후손이다. 하지만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근간을 이뤄 신라를 흡수한 나라이므로 기본적으로 불교국가이다. 그런데 고려 내부에는 신라 게승세력 역시 강경하였는데 이들은 고구려 계승세력과는 달리 유교주의자라는 것이다. 김부식 역시 당연히 유교주의자였는데 이 유교가 보편적 역사에서 가린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서역불교인 이슬람교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묘청이 내세운 고구려의 불교와 김부식이 내세운 신라의 유교(이슬람교)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금은 사라센 제국인 신라를 계승한 나라니 당연히 이슬람교 국가이며 셀주크 투르크이다. 이러하니 신라의 후손 김부식이 금을 정말로 대국으로 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부식 세력은 최소 금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리라. 김부식 등은 아마도 금을 형제의 나라 정도로 여겼겠지만, 반대로 묘청과 정지상 등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후예들은 고려 내부의 유교주의자인 신라 후예들을 숙청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만아니라 고려를 분열시킨 반란국가 금은 당연히 함락시켜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신라 유교주의자들이 고구려 불교주의자를 숙청하니 서역의 금과 동방의 고려는 세력 균형을 이룬다.

얼마 후 금이 일어난 중앙아시아의 북부지역에서 다시 몽고가 일어나니 고려와 금의 세력 균형이 깨지고, 금은 몽고에 멸하고(1234년) 고려는 대륙을 내어주고 강화도로 밀려난다. 금이 몽고에 멸한 역사가 서양사에서는 당연히 셀주크 투르크가 몽고에 멸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1194년 셀주크 투르크는 내부모순에 의해 스스로 붕괴되지만 그 잔존 셀주크가 13세기 몽고에 완전히 멸한다고 흐릿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역사는 금이 몽고에 멸한 역사를 다르게 설명한 것이다.

제국화된 몽고는 동방의 고려대륙에는 천자국인 원을 세우고 금의 영역에는 일 한국과 오고타이 한국 등의 제후국을 세우는데, 이를 봐도 고려의 신라계가 전적으로 금에 사대를 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몽고가 전통적인 고려 영역에 황제령인 원을 두었음은 몽고 직전까지 고려가 천자국임을 증명한 것으로 이는 고려와 금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지 증명하고 있다.

고려가 금을 사대한 국가로 날조된 것은 서세동점기의 왜-양에 의한 것으로, 지구를 호령하던 고려-조선을 사대 노예국으로 격하시켜야 했기 때문에, 고려내 신라계가 정국을 주도하여 금을 인정한 역사를 보다 더 노골적인 사대주의에 찌든 고려로 손질해 놓은 것이리라. 물론 그렇다손 치더라도 고려 내부에서 자주적인 고구려계를 내치고 친금정책으로 일관한 신라계의 역사적 과오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몽고제국이 유라시아를 휩쓸고 지나간 후 고려를 대신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금의 자리에 오손국(오스만 투르크) 들어서 고려 때와 비슷한 형세로 조선과 오손이 유라시아를 평정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천자국은 조선이고 오손국은 유라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조선의 제후였을 것이다.

이러한 긴 역사 때문에 돌궐계(투르크계)를 대표하는 나라인 터키는 고려-조선의 후예인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것이다. 김부식이 금(셀주크 투르크)을 형제로 여겼듯 말이다. 서세동점기를 지나며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빼앗겼고 터키 역시 지나치게 서방화되어 과거의 모습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은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거대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13. 분별없는 안중근 의사 음모론자들에게 답한다.

역사의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안중근 의사의 카톨릭 배후 음모론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부류의 사람들이 꽤 있다.

근대조선은 안중근 의사가 출생하기도 전에 사실상 무너져 있었다. - 강화도 조약 1876년, 안중근 의사 1879년 출생 - 근대조선이 영·불에 의해 찢겨지고 일본에 의해 신음하고 있던 때에 안중근 의사는 출생했고 거사를 행할 즈음엔 대륙의 조선 영토가 상당히 좁혀져 있는 상황은 물론이고 사실상 자주국가로서의 지위도 완전히 잃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롭게 떨쳐 일어났고 역사 속으로 산화했다. 대륙에 있던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다며 이 사건과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말하길, 안으로는 대륙의 조선을 지우고 반도의 조선을 세우기 위함이고 밖으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교황청을 받들어 동북삼성 일대에 유대국을 세우는데 협력했다는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떠나서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찬란한 대륙의 조선 영토와 역사의 진실이라 그거 참 좋다. 세 치 혀로는 뭘 못할까?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현재의 국제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역사만 입증하면 역사가 절로 굴러 들어올 것만 같다.

불과 100여년 전의 국제 정치적 상황도 파악 못하면서 역사 기간 내내 유라시아의 땅이 모두 우리의 땅이요, 역사라고 주장하며 그걸 지식이라고 뽐내는 꼴이란......

물론 대륙에 있던 조선의 역사는 대륙조선설이 아닌 우리의 참역사이고 이 역사는 반드시 찾고 지켜야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이론적 설계도일 뿐이다. 설계도를 완성했다고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제국주의의 협공으로 대륙의 조선이 반도로 좁혀졌다는 것이 참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인데, 그렇게 어머어마한 힘에 의해 조선이 작살이 났음에도 안중근 의사가 홀로 대륙의 조선을 회복시키지 못했기에, 흑백논리로 카톨릭 예수회 프리메이슨의 앞잡이로 등극시킨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과연 카톨릭 예수회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 그런데 이런걸 정말 살펴봐야 하나 싶은 것이 참 안타깝다.

근대조선은 1860년대~1880년대 사이에 프랑스, 미국, 일본, 독일,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에 지속적으로 침공과 압박을 당한다.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삭제·이기되었겠지만 영국의 침공은 이미 이 시기 이전에 이뤄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서세와 일본의 침공으로 조선은 1880년대에 들어 자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다.

이후의 1890년대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채우기 싸움터로 전락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1896년 러시아의 광산채굴 이권침탈, 1896년 미국의 철도부설 이권침탈, 1896년 프랑스의 철도부설 이권침탈, 1897년 독일의 금광채굴 이권침탈, 1900년 영국의 금광채굴 이권침탈, 1897~1904년까지 일본의 철도부설 및 금광채굴 이권침탈 등 처참한 상황이었다.

1890년대를 지나며 이미 조선의 영토는 갈기갈기 찢기고 벗겨져 있었는데, 그보다 10여년 이후에 청년으로 성장하며 분개하여 떨쳐 일어난 안중근 의사에게 대륙을 회복해 달라고?

이 시기를 지나며 사이좋게 각각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교하며 조선을 함락시켜 대륙을 나눠 먹으려던 프랑스와 영·미 사이에 이견이 생긴듯 하고, 제 3의 세력인 러시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관계에 의해, 영·미와의 세력균열을 보인 프랑스는 러시아, 독일과 연맹하여 영·미의 괴뢰국인 일본에 대해 삼국간섭(1895년~)을 하고 후에 결국 러·일 전쟁(1904년)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2회(1902년, 1905년)의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을 직접 지원하였고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맺고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으니, 프랑스는 1891년 이래 지속된 불·러 동맹으로 러시아를 지원하며 대응하였다.

전쟁 결과는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패전국 러시아와 프랑스는 당연히 조선에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후 조선의 반도를 일본이 완전히 식민경영하게 되고, 조선의 대륙에는 일본의 통제변수로 중화민국(1911년 건국)이 기용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심판한 해는 아시다시피 1909년으로 러·일 전쟁 이후 4년이 더 경과한 시점이었다. 프랑스가 영국에 의해 사실상 패퇴된 이후의 시점이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거사를 음모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거사를 카톨릭의 배후 조종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카톨릭은 무엇을 얻었나?

1870년 건국된 허약한 신생국가 이탈리아가 카톨릭을 대리할 수 없었기에 프랑스가 카톨릭과 제휴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카톨릭의 군대인 프랑스군은 이미 러·일 전쟁에서 패퇴되어 조선에서 사라졌고 영국의 괴뢰인 일본이 잠정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으로 합의된 상황이었다.

카톨릭과 프랑스 등은 이 사건으로 인해 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 이후에도 일본의 조선에서의 행보에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카톨릭과 프랑스는 이 역사에서는 등장조차 않는다.

또 한가지 이유로 드는 안중근 의사와 괴뢰 만주국의 말도 안되는 연결설을 보자. 괴뢰 만주국과 이스라엘 건국 연결설을 사실로 놓고봐도 안중근 의사 음모주의자들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심판 후 일본의 괴뢰 만주국 건설의 행보는 달라졌나? 카톨릭이 괴뢰 만주국 건설에 개입하게 되었나? 아니다. 둘 모두 아니다.

괴뢰 만주국은 표면적으로 일본의 주도하에 이등박문 심판 후에도 지속적으로 건설이 진행되어 1932년 그 문패를 성공적으로 내걸었다.

카톨릭이 괴뢰 만주국을 건설한 주체 세력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같은 유대인 국가를 세운 주체 세력인가? 아니다. 둘 모두 아니다.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국가는 영국으로 1917년의 밸푸어 선언은 너무나 유명하다. 당시의 일본은 영국의 괴뢰였다. 이렇게 보면 카톨릭이 아니더라도 영국과 일본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잘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다시피 안중근 의사 음모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 중에 들어맞는 논리는 아무것도 없다.

역사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국권이란 것이 있어야 역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대륙을 찾으려 했건 조선의 일부 영토라도 지키려했건 그 분은 그 최소한의 국권회복을 위해서일지라도 스스로의 목숨을 내 놓으셨다.

경거망동 하지 마시라.

카톨릭 즉 서학에 맞서 동학이란 혁명적인 농민의 봉기가 일어난 것을 미루어 봐도 근대조선에의 기독교 위험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허나 안중근 의사가 그 카톨릭의 이면을 잘 보지 못했다고 숭고하신 그 분을 욕보여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14. 조선에 복속되었던 일본의 역사]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의 거짓 역사는 그 속된 이름인 쪽바리에 다 나와 있다. 쪽바리의 어원인 쪽발은 ‘두 쪽으로 나누어진 짐승의 발’이란 뜻으로 이것은 이들이 끌고 다니는 게다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게다를 ‘왜나막신’이라 한다. 왜나막신을 신은 왜구들의 모양새가 두 쪽으로 발이 나뉜 짐승과 같다는 뜻이다.

쪽바리들의 상징이 왜나막신이란 것인데 현재 쪽바리들은 동북아시아의 비교적 추운 지역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차려놓고 있다. 열도의 일본에서 이 왜나막신이란 것의 효용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오늘날에는 왜나막신과 비슷한 모양의 슬리퍼가 여름에만 지구촌의 각 지역마다 유행을 하는데 열도일본의 기후도 예외는 아니다.

왜구들의 호칭이 쪽바리로 통용되었을 정도라면 외부인의 눈에는 이들이 이 독특한 왜나막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구들이 이 독특한 나막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왜구들의 거주지는 오늘날의 열도는 절대 될 수가 없고 더운 열대지방이어야 가능할 일이다. 왜나막신을 애용하여 쪽바리로 불려온 왜구들의 본래 거주지는 어디일까?

쪽바리와 짱깨 양자 모두 서세동점 시기 서세에 업혀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고 역사를 도용·조립하였기에, 쪽바리들의 역사만으로는 왜와 일본의 역사와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 생각되므로 서양과 얽혀 돌아가는 이야기로 쪽바리의 역사(?)를 추론해 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대로라면 고대부터 일본은 왜로 언급되는데 이 왜들은 일정하게 정해진 족속이나 나라가 아니고 시대별로 그 위치도 달라진다는 이유에서 이 왜구들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의 애로사항이 적지 않다.

삼국이나 고려-조선의 황제들은 바닷가의 문화와 풍습이 미개한 족속들을 왜라고 통칭했던 것으로 여겨지니 왜라고 불린 족속들은 매우 광범위할 텐데, 오늘날의 일본과 직접 연결된 왜구들의 정체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등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를 아래에서 논해 보겠다.

현재의 일본사에는 두 개의 역사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의 역사고 하나는 JAPAN의 역사다. 본래 일본과 JAPAN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일본은 일본이고 JAPAN은 왜다. 그런데 오늘날의 열도일본은 일본과 왜의 역사를 취합하여 자신들의 역사로 삼고 있다.

오늘날의 보편적 일본인들은 국가명 일본의 뜻은 알아도 JAPAN의 뜻과 그 어원의 연유를 전혀 모른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부분인데, 인도양-태평양에 있던 JAPAN의 역사(?)를 숨기고 조작했으니 그들이 그 연유를 알 리가 있겠는가.

우선 중세기의 일본사를 살펴보면 다른 동양사와 달리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막부와 주종제도(봉건제도)다. 이전의 글 <유럽에 대한 단상> 등에서도 말했지만 유럽의 역사와 국가의 허구성을 봉건제도에서 찾았는데 이 봉건제도가 일본에서도 존재하였다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에서 영주와 기사, 농노의 신분계급이 등장하듯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신분계급이 존재했는데 유럽 영주의 역할을 장군(쇼군)이 맡고 기사의 역할을 가신(고케닌)이 대신하는 것으로 이들이 무신정권(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를 구성한 것이다.

유럽과 일본의 봉건제도 구성요소는 이름만 다를 뿐 그 역할과 성격은 매한가지인데, 이러한 봉공과 어은의 관계를 수백년 이상 혹은 지역에 따라 천년 이상 지속하기도 했다는 것은 그 곳에 정상적인 국가가 들어서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봉건제도가 중앙집권적 국가가 확립된 지역에서 발달할 수나 있겠는가? 정상적인 국가의 중앙정부에서 지역영주나 군소장군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갈취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고로 봉건제도가 발달한 지역은 정상적인 국가가 들어선 지역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역사도 존재할 수가 없다. 막부라는 말을 보라. 막부(幕府)는 천막정부(天幕政府)의 준말이다. 천막에서 정사를 논하는 놈들에게 역사다운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700여년간 이어졌던 이 일본막부라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일본막부라는 것은 그냥 지역의 백성들과 봉공과 어은의 계약을 맺은 봉건자치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봉건정부인 일본막부를 움직이는 것은 누구라는 것인가?

조선이다. 조선이 일본막부를 움직였고 일본막부는 역사 내내 조선에 복속되어 충성했다. 일본막부의 시작은 1192년의 겸창막부(가마쿠라막부)인데 주목해 볼만한 시기의 막부는 실정막부(무로마치막부)다.

실정막부의 시대가 열린 시기는 1333년인데, 이 시기의 동아시아는 매우 혼란한 시기로 몽고의 국력이 쇠해져 가는 대신 고려가 다시 일어날 채비를 갖추고 있던 때였다. 대륙이 혼란한 만큼 이 실정막부도 남북으로 갈려 혼란스러웠다고 하는데 족리의만(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실정막부가 통일된다.

여기서 실정막부가 통일된 시점이 흥미로운데 그 해가 1392년이다. 1392년 생각나는 것이 있으실 것이다. 1392년은 태조 이성계가 근세조선을 세운 해다. 조선 건국일과 일본막부 통일일이 일치한다는 것인데, 이는 근세조선에 의해 혼란스러운 실정막부가 정리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륙의 여·몽 권좌 교체기에 들어선 실정막부는 대륙의 정세가 요동치는 틈을 타 그에 복속된 그들 역시 자신들의 지위를 놓고 대립한 것인데, 조선이라는 새로운 천자국이 들어섬과 동시에 이 실정막부 또한 깨끗하게 정리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에 복속된 이 일본막부의 정체와 역할, 기능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은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주종관계가 확고한 봉건제도 국가라고 했으니 마찬가지의 경우인 유럽을 보자. 유럽의 봉건영주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왔나? 아시다시피 교황청이다.

봉건제도에서 봉건영주 같은 주군은 자신의 봉토에서의 권력은 무한하지만 주군을 제어할 수 있는 교황청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신세다. 물론 교황청도 아주 오랜기간 동안 아시아의 그늘 아래 있었으니 일부의 서유럽 지역에서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같은 봉건제도 지역인 일본막부에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일본막부를 제어하는 것은 조선황실이다. 일본막부는 일본 지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 조선황실에 충성해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삼국시대에 중앙집권국가를 성립시킨 역사를 이어온 근세조선은 왜 일본막부를 허물지 않고 일정의 자치권을 허용했을까?

이는 조선인과 판이하게 다른 일본인 특유의 기질과 더불어 고려-조선의 제일 걱정꺼리인 왜구 때문일 것이다. 조선은 남방계 특유 기질의 일본을 완전히 감싸 안는 것보다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이 내치에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이 일본막부가 조선의 걱정꺼리인 왜를 제어하는데 효과적이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지역의 막부 즉 장군(쇼군)체제와 무인(사무라이) 문화가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일본은 대륙의 조선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아마 왜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조선이 일본막부에게 왜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준 것으로 가정하면 쉽게 추론 가능한데, 이 일본의 구체적 위치를 알아보기 이전에 서두에서 JAPAN이라고 말한 왜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왜가 일본사에 등장하는 것은 전국(센고쿠)시대(1467년~1573년)다. 이 전국시대를 현재 일본사에서는 실정막부의 후기 100여년간의 혼란을 직전신장(오다 노부다가)이 수습하여 1573년 일본을 재통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직전신장이 사실 일본인이 아닌 왜인이다.

한편 일본사에서 일본은 이 전국시대부터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일본은 열도가 아니다. 포르투갈-스페인 등의 초기 서구제국주의 세력이 만약 동북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혀왔다면 열도만 집적일 수가 없다. 열도를 집적댔다면 반도나 대륙의 일부는 반드시 집적여 봤을 것이다.

15~16세기 당시까지만 해도 서구는 군력에서 아시아를 앞서지 못했다. 이는 보편적 역사대로 보더라도 유럽에서 오손 돌궐이 건재한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군력에서 아시아를 이겨낼 확신이 없다면 조선의 대륙과 반도 즉 황제령에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스페인 등이 교류한 당시의 일본은 어디였을까? 포르투갈-스페인 등이 교류한 당시의 일본은 일본이 아니고 왜다. 당시의 왜란 어디를 말할까? 아시아 지역 중 이 포르투갈-스페인 등과 특별한 역사를 가진 지역이 있는데 그 곳들이 당시의 왜를 말하는 지역이다. 그 곳들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등을 일컫는다.

인도네시아는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공동경영 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말레이시아는 1511년 포르투갈에 병합되었다. 필리핀은 16세기 초 스페인에 병합되었고 파푸아뉴기니는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에 의해 경영된다. 이 역사가 사실 일본이 전국시대에 포르투갈-스페인 등과 교류한 역사의 진실이다.

인도네시아의 섬들 중에 JAVA라는 섬이 있는데 일본이 JAPAN이란 국호를 내건 것을 보면, 이 왜들의 세력 중 JAVA지역이 가장 강성했던 것 같다. 역사에서 이 동남아시아 섬들 즉 왜(JAPAN)가 서세에 의해 식민 경영되는 시점과 동시에 일본의 실정막부에서는 대혼란이 시작되고 전국시대로 진입한다.

5~16세기 실정막부가 붕괴된 후 일본의 전국시대에서는 100여년간 하극상이 만연하여, 하루가 멀다고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는 대혼란이 이어졌다고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의 왜들이 서세에 의해 일본막부 지역으로 침투하여 실정막부를 전복시킨 뒤 막부를 지속시키려는 일본과 긴 전투를 벌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극상의 주체는 당연히 외부인인 왜인 것이다.

일본막부와 왜의 힘겨루기 상황인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이가 직전신장(오다 노부다가)이며 적전신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왜가 일본막부를 완전히 제압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해가 1573년이며 이 직전신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1590년 등장한 이가 임진왜란의 원흉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풍신수길은 집권 후 즉시 임진왜란(1592년)을 일으켰으니, 서세와 왜가 얼마나 임진왜란을 고대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서세가 15세기 초부터 동남아시아 섬들의 왜를 식민지로 사로잡고 부추겨 일본막부를 무너뜨린 후, 직전신장-풍신수길 등이 왜의 세력으로 대륙의 일본지역을 통일하고 대륙 전체를 침공한 것이니, 임진왜란의 준비기간만 실제 100여년 이상 걸린 셈이다.

이러하니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의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서구제국주의 시초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조선과의 거대한 전쟁인 것이다.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는 절강성 일대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막부가 들어서 있던 곳이 복건성을 중심으로 광동성과 절강성 남쪽 일대를 포함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복건성 일대의 일본지역에 정주한 왜구가 북진하여 절강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이고 7년 전쟁 기간 동안 동남아시아 섬의 왜 본거지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해 왔을 것이다.

일본막부 지역을 복건성 지역과 광동성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대만과 마카오 등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복건성과 마주한 대만에 16세기에 적지 않은 수의 포르투갈인들이 유입되었으며 광동성의 마카오에도 같은 시기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와 정주하였다. 이 지역들을 제외하면 같은 시기 서세들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지역은 없다.

1598년 임진왜란이 막을 내리고 왜는 조선의 대륙에서 쫓기어 자신들의 본거지인 동남아시아의 섬 등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일본지역에는 1603년 강호막부(에도막부·도쿠가와막부)가 들어서고 조선에 복속된다. 임진왜란 후 서세는 조선의 위용을 확인하였으니 왜 역시 잠잠해졌고 일본막부 역시 조선으로 복속되니 200여년간 조선의 남부는 평화를 되찾았을 것이다.

이후 일본의 외교사를 보면 17세기 들어 포르투갈-스페인 등과 교류를 단절하고 네덜란드와만 교류한다고 하는데, 이 역사가 동남아시아 섬나라들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경영한 나라가 17세기 들어 포르투갈-스페인 등에서 네덜란드로 교체되는 것이다.

이는 유럽에서의 종교개혁에 따른 자본의 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서구제국주의 1기라면 네덜란드가 2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흐름이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집중되니 영국과 프랑스 등에 보다 더 노골적인 제국주의가 촉발된다. 그래서 이 영국이 왜구들의 본거지인 동남아시아 섬을 두고 네덜란드와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에서 영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네덜란드와 부딪히고, 그 기세를 몰아 과거 임진왜란 때 스페인-포르투갈 등이 구상했던 일본막부 전복 전략을 영국이 다시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편전쟁(1840년~1842년)으로 나타났다. - 이 역사를 청의 역사로 각색해 놓았지만 사실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보인다.

아편전쟁의 결과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은 광동성의 향항(홍콩)을 경영하게 되고 광동성 일대에 영국인들의 유입이 급증한다. 광동성 일대의 강호막부가 아편전쟁으로 비틀거리던 1853년, 영국에 이어 미국이 공세를 펼치며 개항을 요구해오고 강호막부가 이에 굴복한 것이 일본사에 미·일 화친조약으로 기록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이어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도 강호막부에 공세를 펼치며 통상조약을 받아내는데 이것이 명치유신(1853년~1877년)으로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이후 막부 세력과 반막부·천황친정 세력이 대립하였는데 반막부·천황친정 세력이 승리하여 1868년 일본제국이 탄생되었다.

명치유신 일본제국의 탄생에 기여한 반막부 세력의 정체는, 직전신장-풍신수길 당시에도 그랬듯 영국과 네덜란드 등이 끌고 온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왜로 여겨진다. 물론 강호막부내 반막부적 권력 지향세력도 이들과 결탁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 시기에 역사 내내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가 서세의 지원을 받은 왜에 의해 독립하게 된다.

막부를 폐기했으니 막부를 대신하는 일본의 상징이 필요해졌고 이에 조선의 천자(황제)를 모방한 천황이 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천황친정을 지향한 명치유신의 일본은 이 시기 들어 비로소 봉건제도가 폐지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화가 실시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일본제국'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만 실상은 서세의 괴뢰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서세들의 거대한 계획의 행동대장으로 낙점된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1876년)을 체결한다. 이 운요호 사건을 비롯한, 서세동점기 일본의 침공과 임진왜란의 전쟁 준비 계획과 전쟁 배경은 거의 흡사했지만,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공 규모가 임진왜란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고 조선의 힘도 당시와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다 아시다시피 서세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은 일본이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과 왜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조약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들여다보자. 러·일 전쟁 시기 일본은 미국과 이 음흉한 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본래 영·미의 괴뢰로 탄생된 국가니,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미국이 왜 일본에게 필리핀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내야 했을까?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경영되고 있었으니, 미국은 이 문제를 스페인과 해결해야 했을텐데 일본의 승인을 얻고 필리핀을 지배했다.

결론적으로는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하고 필리핀을 경영하게 된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에 필리핀을 두고 일본과 조율을 한 이유는,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이자 스페인의 아시아 침공의 전략적 교두보였고 필리핀의 왜들은 그 침공수단이었다는 것인데, 동남아 섬의 왜구들이 영·미에 의해 일본과 결합하여 대륙의 영토를 얻어냈으니, 이때 비로소 자신들의 본거지를 비우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동시에 새로운 주인인 영·미를 위해 과거의 주인인 스페인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1930년대에 일본은 조선대륙에서 과욕을 부리며 자신들의 주인인 서세와 맞서고, 그 결과 서세들의 또다른 괴뢰이자 통제변수인 중화민국과 중·일 전쟁(1937년~)을 치르게 되고, 이 전쟁이 제 2차 세계대전 동아시아 전장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 일본은 자신들의 본래 근거지인 동남아시아 섬으로 전장을 확전하지만 결국엔 미국에 굴복하게 되고, 대륙과 동남아시아의 근거지를 모두 비우고 일본열도만을 보유하게 된다.

이러하니 현재의 일본인은 대륙의 동남부 광동성과 복건성, 절강성 일부를 포함하는 일본지역 사람과 동남아시아 섬들의 JAVA 사람(JAPAN)인 왜들의 결합체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열도에 본래 거주했던 고려-조선계 사람들도 이들 왜구들에게 다수 동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현재의 일본열도에 JAPAN 왜구가 언제부터 침투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대륙의 일본인들이 일본열도로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은 명치유신(1853년~)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현재 일본인들의 문화와 풍습은 동남아시아 섬과 대륙의 남방계가 결합한 모양새다. 같은 대륙 남방계인 현대중국과 일본의 식습관이 일치하는 이유가 이해되시는가?

역사 기간 내내 이렇게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이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정말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쪽바리들은 우리의 막부로 다시 복속될 차례가 아닌가?


1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

현재 세계의 각 국가 성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나온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1918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대한 힘이 주도하는 세계 재편에 무지했던 세계 각지의 제 민족들은 이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환영하였지만, 이 선언으로 사실 세계는 거대한 힘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민족자결주의 제창은 프랑스대혁명이 완전히 매듭짓지 못한 전략적 민족주의에 의한 세계 재편을 완성 짓기 위한 도구였다. 잠시 이 시기 이전의 역사를 복기해 보자.

15~16세기 아시아에 짓눌려 있던 유럽이 십자군 전쟁(11세기~)의 삽질 후에 또다시 저항한 것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팽창으로 나타났고, 아메리카대륙을 병합(1492년~)한 후 인도양-태평양 섬나라들에 영향력을 행사(1511년~)하여 아시아대륙을 침공한 사건이 임진왜란(1592년~1598년)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으로 하여금 대아시아 침공을 유도했던 힘은 그와 같은 시점에 종교개혁으로 유럽 내부 개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진행될 무렵 유럽의 내부 개조속도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어 종교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예들이 위그노 전쟁(1562~1598), 네덜란드 독립전쟁(1572∼1609), 30년 전쟁(1618∼1648) 등인데, 이 전쟁들은 단순한 카톨릭(천주교)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종교분리 운동이 아니다.

프르투갈과 스페인 등을 제국주의화 했던 힘은 자신들의 욕망을 카톨릭교황청과 나누기 싫어졌을 뿐만아니라, 보다 거대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체제와 종교체제가 필요해진 것이었다.

종교개혁·종교전쟁의 결과 유럽 내에서 카톨릭교황청의 권위는 반감되었고, 유럽 내 카톨릭교황청의 충직한 제후이자 가장 강성한 제국주의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에 성공한 네덜란드는 표면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왕국을 성립(1648년)시켰으며, 그 이면에 거대한 욕망 실현의 꿈을 가진 자본가들과 자본이 집중된다.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1640년~1660년)이 일어나 공화제가 채택되었으며 곧이어 명예혁명(1688년)이 일어나 의회주의 이념이 더욱 강화되었다.

위의 종교개혁·종교전쟁에서 알 수 있듯 종교개혁은 표면적으로는 카톨릭으로부터의 프로테스탄트 분리 운동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를 동반했고, 카톨릭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한 각각의 프로테스탄트 왕국의 수장은 자본가 세력과 권력을 제휴하게 되었다. 만일 자본가 세력과의 권력 제휴를 거부하게 되면 혁명을 맞아 권좌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7세기 당시 보편 다수의 유럽인들이 공화제와 의회제를 얼마나 반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본가 계층은 공화제나 의회제를 열렬히 숭배하였을 것이다.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이 가져온 의회제도는 자본주의를 촉진시켰고, 그에 따라 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대륙 주변부의 식민지 경영사업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에서 네덜란드와 영국 등으로 교체된다.

당시 유럽의 상황은 네덜란드와 영국 등의 프로테스탄트 왕국이 시민혁명과 공화제의 도입으로, 카톨릭 세력을 압박해 가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두 힘은 팽팽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은 여전히 카톨릭의 충직한 제후였고 게르만 지역(통일 이전의 독일 지역)은 카톨릭 봉건 도시국가들이 여전히 건재하였으며, 위그노 전쟁 후의 프랑스 지역에서도 여전히 카톨릭이 우세하였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으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트 신흥 제국주의는 우선적으로 유럽에서 카톨릭교황청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동양을 허물고 세계를 경영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에 유럽개조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인데 이것이 프랑스대혁명(1789년~)의 서막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의 근간 이념인 인류사회의 진보 실현의지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시민을 위해 복무했는지 자본을 위해 복무했는지를 판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프랑대혁명은 자본가들의 부 증진과 제국주의를 촉발시켰다.

혁명 후의 혼란한 프랑스를 수습하기 위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구원투수로 등장하였는데, 혁명이념에 복무해야 하는 운명의 나폴레옹과 혁명이념의 전파를 막아야하는 카톨릭교황청과 그 제후국 또는 절대왕국 사이에서는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개전 초기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전 유럽의 군주들을 겁박했고, 카톨릭교황청 친위대 스페인의 항전 의지와 러시아 원정에서의 실패로 인해 나폴레옹과 프랑스는 메테르니히 체제(1814년~)에서 심판받지만, 이미 거대한 힘이 고안해 낸 전략적인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는 전 유럽으로 전파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성공한 것이었다. 유럽 반대편의 오스만투르크(돌궐왕국)에 복속되어 있던 그리스에 민족주의의 기운이 일어 독립(1822년)하였고, 후에 이탈리아(1861년)와 독일(1866년) 역시 민족주의에 자극 받아 역사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카톨릭교황청의 가장 충직한 제후인 스페인에서도 나폴레옹 프랑스에의 저항 운동이 변모하여 1820년대부터 혁명으로 바뀌어 1830년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결과적으론 프랑스대혁명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이념이 전 유럽으로 유입되어 대부분의 봉건제도가 철폐되니, 자연스럽게 카톨릭교황청은 유럽 내의 지분을 대부분 상실했고 그 지분이 고스란히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모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 스며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계획 실현을 위한 채비를 마친 시점, 영국과 프랑스 등은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며, 민족주의의 기운에 의해 비틀거리던 오스만투르크의 주변부인 남아라비아를 영국이 점령하고 북아프리카를 프랑스가 점령한다.

이들이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한창 식민주의를 뿌리내리던 시점인 19세기 중엽, 뒤늦게 민족주의 국가로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가 제국주의에 가담하는데 영·프에 이 독일이 변수로 작용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을 내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그 본질적인 성격이 같았는데, 독일은 이들과 달랐다. 영·프의 권력 구조는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를 기반으로 자본가들이 득세하는 구조였는데, 그에 반해 당시의 독일은 황제와 재상을 융커(대지주, 봉건귀족과 비슷)가 지지하는 구조로 여전히 국가중심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즉 자본가와 국가수장의 권력 제휴가 본격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권력구조로 인해 영·프는 독일을 쉽게 통제할 수 없었는데, 독일보다 한층 더 강한 황제 위주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연대하여 팽창해 오니, 영·프와 뒤늦게 이들에 가세한 미국은 매우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차르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러시아마저 아시아로 남하해 들어오니 영·프는 제국주의 정책에 큰 애로점을 느끼고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또다른 거대한 계획을 모의하였을 것이다.

19세기 말미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경영 정책에 이견이 생겨 프랑스가 영국과 연대관계를 깨고 러시아와 일시적으로 동맹관계를 맺지만, 1907년 곧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관계는 복구되고 독일·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프는 차르체제의 러시아와도 타협하는 3국협상 관계를 맺는다.

3국협상 관계가 무르익었을 즈음 오스트리아의 팽창정책과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남하정책, 오스만투르크의 기존 지배권이 부딪히는 발칸반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를 향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제1차 세계대전이 개전(1914년~)된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를 겨냥한 자는 세르비아에서 밀파한 자객이니 그 배후에는 러시아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3국협상 관계인 영국, 프랑스와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니, 영·프의 독·오를 향한 계획된 도발이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이 계획한 제1차 세계대전의 목표는 중앙집권적 절대왕권을 분쇄하여, 자본의 제휴나 지배가 용이한 세계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백여년간 남유럽을 지배한 기존의 오스만투르크는 물론이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도 반드시 체제 전복이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러시아 역시 그 범주에 해당했을텐데, 러시아와는 급한 불을 먼저 끄기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연대했을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영국과 프랑스 뒤이어 참전한 미국 등이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 전선에서 독일군을 축출했는데, 그것보다 눈여겨 볼 대목은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제국주의에 너무나 눈이 어두워 이를 피지배 민족을 위한 독립의 메시지로 해석했는데, 이 민족자결주의야 말로 제국주의의 세계경영 정책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낸 발언이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목적성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

‘민족자결주의’는 사실 ‘분열하여 지배하라’의 다른 표현으로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상황에서 쉽게 나타났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남유럽의 세 대륙에 걸쳐 거대한 왕국을 세웠던 오스만투르크는 전쟁의 결과, 1920년 세브르 조약을 받아들여 영토 대부분을 잃고 결국 공화제로 이행(1922년, 터키)되고, 과거 오스만투르크의 영토에는 수많은 신생국이 들어섰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도 전후 즉시 공화제를 시행하고 1919년 생제르망 조약을 받아들인다. 오스트리아의 영토에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분리되어 독립하니,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독일의 경우 전후 즉시인 1918년 독일혁명이 터져 공화제로 이행되었고,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되는데 혁명의 시점이 아주 절묘하다.

이 세 왕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모두 공화제를 받아들였고 영토는 협소하게 축소되었다. 공화제는 분명 보편적 시각에서는 왕정보다는 훨씬 진보된 정치체제지만 다르게 본다면 자본의 침투와 지배가 훨씬 용이한 체제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선택은 그 국가의 민족 구성원이 선택해야할 문제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을 탄생시킨 독일혁명이 정말로 자발적인 혁명이었을지 궁금하다.

영토 면에서 보면 700여년의 왕국인 오스만투르크의 광대한 영토에는 아주 많은 숫자의 신생국이 출현하였다. 이 지역의 이후 역사를 보면 이 신생국들의 탄생 배경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적용된 것인지 ‘분열하여 지배하라’의 원칙이 적용된 것인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방의 승전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절대왕권 국가를 대부분 허물고 공화제로 이행시켰으며 그들의 영토 대부분은 분쇄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에서 3국협상으로 서방에 가담했던 절대왕권의 러시아는 1917년 3월 혁명에 이어 볼셰비키 혁명을 맞고 사회주의 국가로 이행되어 스스로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이로써 전 세계의 모든 절대왕권 국가는 소멸되었고,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은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 각 국가의 성립 완성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촉발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거 완성된 것이다. 서세는 제어 불가능한 왕국의 경우 붕괴시켜 입헌공화제를 시행하였고 제어 가능한 왕국에는 입헌군주제 등을 선물하였으며, 거대왕국의 영토는 소국으로 분쇄하였다.

하지만 지구촌에서 거대왕국의 영토분쇄 원칙이 적용되지 않은 지역이 딱 한 곳이 있다. 그 곳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을까? 제1차 세계대전의 주 전선이 아니었다고?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었으면 서방은 얼마든지 대륙의 소수민족 지역에 민족주의적 혁명을 부추길 수 있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일본을 두들기며 중화민국에게 대륙 전체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반세기 가량이 지난 후인 오늘날 현대중국의 소수민족에게 민족주의적 분리 운동을 부추기고 있다. 그 이유는 왜일까? 한번 생각들 해 보시길.


16. 모택동의 고백

최근 지구촌 여기저기서 학자니 전문가니 하는 이들에 의해 현대중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전문가 그룹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중국 붕괴설의 근거로는, 대부분 경제적 요인과 내치의 모순과 부패 등을 꼽지만 실제 현대중국이 붕괴한다면 그 원인은 필시 역사의 부재가 가장 큰 작용을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겐 그 유명한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발언의 실천의지와 관철의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역사가 있다면 일시적으로 국가가 붕괴해도 민족은 지속되고 독립의지도 고양될 것이지만, 현대중국의 역사는 현대사가 역사의 전부다. 고로 어떤 방향의 힘이나 세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붕괴되든 간에, 현대중국의 붕괴는 일시적 붕괴나 함락이 아닌 영구적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모택동이 총구를 강조한 것은 국제정치학의 원론적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심각한 고민이기도 하다. 정통성 없는 국가, 정당성 없는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모택동은 강한 총구로 단지 이념전쟁에서만 이겨내려고 발버둥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거대한 힘에게 강한 총구로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즉 모택동이 말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일 뿐이다.’라는 말의 진의는 솔직한 자기 다짐이며 자기 고백이라는 뜻이다.

위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19세기로 돌아가서 당시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엽부터 조선대륙에서는 남부 해안가를 위주로 이양선이 쉴새없이 출몰하고 카톨릭이 급속도록 전파되는 가운데 헌종이 즉위하고 안동김씨를 대신한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실시되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영국은 비슷한 시기 조선대륙 동남부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에 집중적으로 아편을 침투시키고 이에 대한 일본막부의 대응이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발생한다. 일본막부가 패한 이 전쟁의 결과로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이 이뤄지고, 일본막부 광동성의 향항(홍콩)이 떨어져나가고 광동성 일대에는 영국인의 출입이 빈번해진다.

철종 재위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인 1856년에는 영국 상선과 조선 관헌과의 분쟁이 다시 전쟁을 불러오니 이 사건이 애로호 사건인데,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군을 이뤄 조선의 북경과 천진을 침공하여 북경조약을 이끌어내고 조선 내 기독교 포교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한다. - 위의 두 역사를 청과 현대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지만 사실 조선의 역사일 것이다.

앞서 말한 아편전쟁의 분쟁이 시작된 광동성 지역, 복건성과 절강성의 일부 지역이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 지역인데, 이 일본막부 지역에서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의 영향력이 증대된데 이어 1853년에는 미국이 개항을 요구해온다.

조선에 충성하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일본막부가 영·미 등의 서세가 부추긴 반막부 세력이 이들이 끌고온 동남아 섬의 왜에게 전복된 것이 명치유신(1853년∼1877년)으로 나타났다. 이어 조선에 반기를 든 반막부와 왜구의 결집이 서세의 괴뢰국 일본제국(1868년)으로 탄생된다.

1864년 고종 즉위 대원군 집정시, 조선은 기독교에 급속도로 물들고 있었는데 이에 민간에서는 동학이 창시되고, 관 위주로는 조선 남부지역에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난다. 이 병인박해를 구실로 동년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병인양요로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의 안남 지역(인도차이나반도)이 프랑스에 병합된다.

1875년에는 서세의 부추김에 의해 조선에서 막 독립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을 요구해오니 조선은 굴복하고 만다.

1882년에는 조선의 서북방 중앙아시아 청의 제안에 의해 미국과의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게 되는데, 청이 미국과의 연대를 제안한 실질적 이유는 스스로를 러시아로부터 지켜내는데 조선을 이용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남하하여 1885년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조선의 영토를 불법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이 발생한다. - 영국은 이 거문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제도권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를 조작하면서 영국과 조선과의 많은 관계를 은폐하거나 중국사로 옮겨 보낸 것이다.

1880년대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키 위해 ‘조선책략’을 유포하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조선을 이용하지만, 결국엔 러시아에 등 떠밀려 청의 본영인 중앙아시아를 넘어 조선의 신강성과 내외몽골 주위까지 밀려들어 왔을 것이다.

1894년 조선에서의 이해관계 대립이 청과 일본의 전쟁으로 불거지는데,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은 청을 패퇴시킨다. 이때 청은 사실상 멸망하여 러시아에 병합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역사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의 러시아에의 병합(1895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대륙 동남부에서 북진하여 조선의 중심지역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며, 그로인해 고종은 조선의 황도인 장안(서안)을 비우고 남경으로 천도 후 대한제국(1897년)으로의 국호변경을 받아들이는데, 일본은 북진한 그 곳에서 남하하던 러시아와 부딪혀 러·일 전쟁(1904~1905년)이 발발한다.

서세의 배후지원으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북삼성 일대와 코리아반도는 물론이며 조선대륙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시기 서세는 일본의 통제세력으로 또다른 괴뢰를 내세우는데 이것이 손문 중심의 중국혁명동맹회(1905년)로 나타났다. - 중국이란 말은 고대부터 대대로 동이의 황도나 전략적 요충지 등을 일렀는데, 반조선 세력에 의해 이 시기 처음으로 국가명으로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1907년 남경 경운궁에서 고종이 강제퇴위 되고, 1910년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공식 소멸되어 조선의 성소인 코리아반도로 넘어온다. 이어서 1911년 중국혁명동맹회의 손문 등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남경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세우고, 1927년에는 남경이 중화민국의 공식적 수도가 된다.

서세는 러·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본과 영·일 동맹(1902년·1905년)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체결하여 대륙의 일시적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하고, 배후 지원·조종을 했기에 조선대륙은 사실상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또한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지원했기에 중화민국은 그 나름대로 대륙에서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대한제국 멸망 후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 시기의 조선대륙은, 그러니까 왜와 결합한 대륙 동남부 출신 일본의 영향력이 가장 큰 가운데, 대륙 서남방 출신들로 여겨지는 중화민국이 양자강이남 지역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한국독립군이 섬서성 이동 일대를 종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니 세 부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중화민국의 성립 초기 손문은 일본에 망명(?)해 중화혁명당(1914년)을 결성하는 등 일본과 크게 대립하지 않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일본과 서세의 관계가 원만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편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념이 대륙으로 넘어오고, 중화민국의 내부에 이념 분쟁이 일게 되자 손문은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후 공산주의자를 끌어안는데, 그 결과를 제1차 국공합작(1924~1927년)으로 명명하고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의의를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국민혁명(북벌)을 펼쳐 대륙의 모든 중국(?)인들을 중화민국의 깃발 아래 통일하자는 것이라고 제도권 역사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진실은 신생 괴뢰국 중화민국의 양자강 이북으로의 영토확장과 북부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는 조선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리라.

1925년 손문 사후 중화민국의 실세로 장개석이 떠오르고 이내 곧 상해쿠데타(1927년)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탄압한다. 이 탄압에 서세도 직접 가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중화민국 내의 국·공 분열시 서세는 자신의 이념성과 부합하는 중국국민당을 더 선호한 것이라 여겨진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에도 장개석은 “내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외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발언을 하며 사실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다. 이 발언을 유추해 보면, 서세는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동시에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30년대 들어 국민당 장개석 세력은 일본보다 오히려 공산당 세력과 지속적으로 대립하다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국·공합작(1937년)으로 일본에 저항한다.

일본이 중화민국을 침공한 이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과 중화민국 양자 모두 서세의 지원을 받아 대륙의 조선을 지우는 사냥개들로 볼 수 있는데, 일본이 이 사냥개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한 것이고,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30년대 조선/한국독립군은 망국 후 일본과 중화민국의 대륙 점령으로 장개석에게 “중국 전체가 조선인의 역사 무대요.”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조선의 실체를 다 알지는 못했기에, 중화민국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알 리가 없었을테고 우선 시급한 일본에 저항하고자 중화민국의 국·공과 연대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벌여나간다.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예측보다 잘 버텨내니, 서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개전하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확대하며 대응한다.

일본은 이 시기 자신들의 전통적인 근거지인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섬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등 과거 자신들의 주인들을 몰아내더니, 파죽지세로 인도차이나반도에까지 들어와 1942년 동조영기는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한다.

서세는 대전 초기 이렇게 강경하게 저항하는 사냥개 일본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지만,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갈아엎고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영·미는 자신들의 사냥개의 다른 한 축인 중화민국을 데리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을 발표하며 일본의 처리문제를 제시한다.

또 이 회담 선언 후 동년 8월에는 차르에서 소비에트로 옷을 갈아입었던 러시아 역시,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의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의 마무리에 이어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신세계 질서에 호응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굴복하고 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되고 동시에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도 중화민국의 승리로 귀결된다. 서세가 주도하는 신세계 질서에 의해 중화민국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고 일본은 대륙과 동남아시아 섬 등에서의 모든 근거지를 잃고 일본열도만을 지킬 수 있었다.

대륙의 조선/한국독립군 역시 이 거대한 신세계 질서의 힘에 의해 대륙 영토수복에 실패하고 코리아반도로 귀환(?)하여 두 개의 코리아로 분열되고 만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대륙영토 수복의지를 확인 할 수 있는데, 임정은 1919년 상해, 1932년 항주, 1937년 남경·한구·장사·형양·광주, 1938년 유주, 1939년 귀양, 1940년 중경 등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 경로를 볼때, 임정은 광복이 가까워올수록 오히려 코리아반도의 반대 방향인 내륙의 깊숙한 곳으로 서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세계의 흐름은 이념전쟁으로 재편되었고 그 큰 흐름의 연장선으로 서세가 안겨준 중화민국 내부에서도 1946년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하였으나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패퇴시키며,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1949년 공산당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서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주석으로 모택동을 옹립한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독립과 투항의 역사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켜야 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세는 현대중국이라는 신생국가를 짱깨들에게 선물한 것이니 모택동은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사냥개로서의 운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고, 이념전쟁의 구도를 빌려 독립을 꾀한 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수호동맹(1950년)으로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모택동 초기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평화·반패권·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자주외교를 내세웠지만, 이것은 이념전쟁의 노선을 빌린 서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에 의해 반서방·반미·친소 정책을 추구한 것인데, 1960년대 들어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국주의를 목격하게 되니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 결과물들이 핵무기 보유와 1968년 중·소 국경분쟁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내부의 저항에 의해 사임과 복권을 거듭하다 1970년 다시 최고지도자 위치에 오른다. 1970년대 들어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방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미국과 일본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모택동은 역사와 정통성이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고, 다시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서방과 협력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노선 추구는 대륙에서 조선을 지우고 서세의 괴뢰로서 출발한 현대중국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1976년 모택동 사후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문혁파 4인방과 화국봉 세력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화국봉은 문혁파 4인방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1977년 최고지도자에 오르지만, 이내 곧 등소평 세력에의 저항을 받고 긴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1981년 결국 등소평이 승리하여 화국봉을 숙청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뒤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구한다.

화국봉과 등소평의 권력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인 1978년에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79년에는 미국과의 국교수립과 관계정상화가 이뤄지는 등 서방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등소평 시대인 1980년대에는 여러 개혁조치로 인해 경제가 급성장했는데 1980년대 말엽에는 보다 더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추구하게 되고,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러시아와도 관계개선(1989년)을 착수한다.

등소평에 이어 1990년 강택민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 등 서세와 중화인민공화국 내 인권문제로 대립하다가 갈등을 해소하였고, 또 티베트 등의 분리독립 문제로 갈등과 갈등해소를 거듭하기 일쑤였고, 그 와중인 2001년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단행한다.

이렇게 현대중국의 현대사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독립과 투항의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서세의 괴뢰로 출발한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현대중국을 독립시키려한 모택동,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핵무장을 하고서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서세의 양자사이에서 실리와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그 한계가 엿보인 것이, 등소평 시대에 와서는 서세에게 대문을 열어젖히며 완전한 독립의 의지는 꺾은 것이며, 그 대가로 표면적인 경제성장을 동반하였다

강택민 시대 이후 현대중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가파른 성장을 보이지만, 인권문제 제기와 티베트, 위구르 분리독립 문제 등 냉전시대의 이념전쟁과는 또다른 수세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에서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실시한다. 현대중국은 태생자체가 이렇게 서세와 코리아 양자 모두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총구의 한계가 엿보였을 때부터 그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냥개로서의 예정된 운명을 맞든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수천년간의 역사를 모조리 빼앗기고서도 다시 일어설 코리아에 의해서 그보다 더한 운명을 맞든지, 어떤 방향이든 그들의 미래는 불분명한 것이다.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발언의 진의와 동북공정 단행의 진실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택동의 명언은 사실 현대중국의 생존 방법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간도 혹은 현재 동북삼성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땅은 고토가 될 수가 없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 대륙 전체가 근대조선의 땅이었는데, 그 조선의 동북지역이 어찌 고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17. ‘한’ 님에게 답합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얘기하셨으니까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한문으로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원문들이 왜 일치하지 않을까요? 버젓이 ‘절강성’이란 단어가 언급되는 원문이 왜 존재할까요?

또 임진왜란시 선조가 북쪽으로 천도하지 않고 서쪽으로 천도했다는 원문은 왜 그리 많이 존재할까요?(한반도 전쟁이라면 서천하지 않고 반드시 북천해야 하지요. 서천하면 그 곳은 바다지요.)

또 임금의 명령을 적는 ‘교유서’라는 곳에서 선조는 왜 이순신 장군을 산서 사람이라 칭했을까요? 강단학계에서는 임진왜란을 한반도 남해의 동과 서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했는데, 같은 원문에서 왜 선조는 조선의 북쪽이 아닌 서쪽에는 ‘전쟁의 화’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을까요?

일제에 의해 교열을 거쳤던 거치지 않았던 현재의 사서에도 저러한 원문이 다수 존재하지 않습니까? 대륙의 흔적이 저토록 많이 발견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단학계의 주장이 진실된 역사라면 이러한 논란 자체가 없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재야학인들이 어느 세력의 사주를 받아 이런 논란이 생겨난 것일까요? 일본이 역공작을 위해서 저러한 사서들을 교열하였던 것일까요?

보편적 강단학계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신경이나 쓰고 있나요? 왜 이러한 원문에 대한 손쉬운 반박을 하지 않을까요? 시원하게 논란을 불식시켜 준다면 저같은 사람도 마음 편하게 신뢰할 것 같은데요.

심지어 강단학계에서 해석하여 편집해 놓은 서적 등에서도 한반도에 낙타가 출현하기도 하지요. 이것이 한반도에만 한정된 역사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이러한 사료가 현재 각종 국가고시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님이 댓글로 주신 질문은 제가 며칠전 올린글 <조선에 복속되었던 일본의 역사> 말미에 추론해 적어 봤습니다. 물론 추론이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제 글을 다 읽지 않고 질문 하셨나 보군요.

그리고 어떤 놈들이 왜가 아닌 일본에게는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던가요? 그거 미친놈들이네요. 임진왜란 때도 경술국치 때도 결과적으로 왜와 일본이 결합해서 조선을 침공한 것이고, 또 지금은 왜와 일본을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런 것은 저의 글이나 주장과 하등의 관련이 없으니 상당히 불쾌한 질문이고 무례입니다

저야 이전의 제 글에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원문해석이 가능한 학자가 아니니 강단학계와 재야학계의 해석과 해설을 둘 다 비교해 봤습니다. 이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요. 또 강단학계의 보편적인 주장은 일제에 의해 추진된 ‘조선사편수회’에서 기인한 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 수십년 전과 현재의 역사 전공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크게 변한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왜 아직까지 쪽바리들이 보유하고 있을까요? 이와 함께 또 이놈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26만여권의 우리 사서를 보유하며 반환 못한다고 개기고 있을까요? 또 우리는 왜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는 이 조선왕조실록을 사본 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쪽바리는 지난해부터 이러한 사서들을 구걸협상의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또 프랑스 놈들은 한세기 반이 지나고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은 오늘날의 시점에 왜 조선왕실의궤 등의 우리 문화재를 반환한다며 구걸하고 있을까요?

더하여 짱깨들은 왜 이집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장안(서안)과 집안의 피라미드를 산으로 은둔시켜 두었어야 했을까요? 또 짱깨들 역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왜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거듭하고 있을까요.

어제 ‘고단한 시대’님 덕분에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지우셨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조선의 지도 원본을 왜 쪽바리들이 보유하고 있고, 또 그 사본을 왜 쌩뚱맞게 말레이시아가 보유하고 있을까요? 왜 우리의 교수님으로 불리는 많은 사학자 분들은 이러한 현상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 않을까요? - 저는 이전의 저의 글에서 말레이시아 역시 왜의 본거지라고 추론하였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님이 강단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믿으시듯 저는 아주 당연히 이러한 현상들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답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18.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진실된 역사를 보면 프랑스대혁명(1789년~), 제1차 세계대전 민족자결주의(1914년~)로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국가와 세계가 성립, 완성되었다.

분명 초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의 대항마로 떠오른 사회주의, 모두 민족주의적 국가 생성 후 파생된 이념들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생성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진정 인류의 진보를 원한 희생적 사상가와 자본의 하수인으로 복무한 위정자를 구분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튼 서구제국주의는 세계경영 전략의 수단으로 민족주의와 그에 파생되어 나온 여러 정치·경제 사상·이념들을 퍼뜨렸고, 이에 동반된 군력으로 신세계 질서를 완성했다

그 구체적 결과들이 거대왕국 분쇄와 중앙집권적 왕정폐지, 공화제의 민족단위 국가 성립 유도로 나타났다.

분명 민족단위의 국가 성립은 제국주의의 불순한 의도에 의해 전략적으로 조장된 측면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사상·이념 자체가 나쁜 것인가?

제국주의 서세는 오손과 조선을 분쇄하여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시켰고, 그 종지부를 찍기 위해 현대중국을 분쇄하려했지만 다른 변수에 의해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조작은 반드시 거쳐야할 요소였다. 이러하니 ‘역사 바로알기’는 ‘제국주의 바로알기’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복원’을 ‘영토복원’ 혹은 ‘종족통폐합’과 똑같은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서세의 세계경영 전략에 의해 일본이 ‘가해자’로 조선의 후예인 우리를 짓밟았고, 현대중국은 ‘가담자’로 그 일정의 몫을 거들었다. 결국 ‘피해자’는 우리다.

‘역사를 바로알자’며 수백년, 수천년 전의 역사를 챙겨가며, 이러한 역사를 간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발상이다. 저 현대중국이나 일본이 어떻게 우리와 다같은 조선의 백성인가?

일본과 현대중국이 ‘가해자’와 ‘가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세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과거가 자랑스럽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신세계 경영 질서에 호응하고 동조한 것 아니겠는가?

조선/한국의 독립을 외친 분들이 대륙 출신이건 반도 출신이건 중요하지 않고, 그 조선/한국 독립의 지분이 오늘날 코리아에 다 남겨졌으니, 옛 조선의 지분은 오롯이 우리 코리아가 다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거대왕국들은 민족주의 국가가 아니고 주류족속이 비주류족속을 이끄는 역사가 수천년간 반복된 셈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신분계급이란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조선의 주류족속이 오늘날의 우리민족과 분명 관련이 있고 일본과 현대중국과는 관련이 적다. ‘가해자’와 ‘가담자’ 그리고 ‘피해자’의 역할 구도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일본과 현대중국에 의해 희생된 한복입고 우리말 하던 대륙의 조선인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러한 비교적 최근의 역사를 간과하고 또 인류의 역사 발전법칙을 무시하며, 다같이 대륙의 조선으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제국주의이며, 다문화·잡탕 문화와 다를 것이 없다.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지, 정치로 바로 환원할 문제는 아니다. 역사를 통해 진실을 확인하고 또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면 그 목적은 온전히 다 이룬 것이다.

의도와 동기야 어찌되었건 인류는 민족주의로 이행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조선의 후예인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제국주의 경영 수단의 일환인 전략적 민족주의를 쳐부수고, 진정 수평적 관계의 참된 민족주의 국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이지 또다른 제국주의를 잉태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주장하여 드넓은 고려-조선의 모든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고자 한다면, 그 끝은 결국 큰 비극이 따를 것이다.

서세 제국주의 위정자들에 의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사상·이념들이 우리에게 전략적으로 침투된 면이 크지만, 그렇다고 이 사상·이념들 자체를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할 필요도 없다.

‘홍익인간’의 더 큰 이념으로 이러한 사상들의 좋은 점을 포용하고 제국주의 음모세력의 협잡을 더욱 강한 힘으로 짓누르기만 하면 전 인류는 진정 널리 이로워질 것이고, 과거와 같은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인류의 등불’로 세계의 존경을 얻을 것이다.

서세의 제국주의 잡놈들과 쪽바리, 짱깨들을 단죄하고 대륙의 영토회복은 현재의 우리 겨레와 직결된 부분만 회복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진정 각 민족이 수평적으로 그 고유 문화와 풍습을 지켜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 단군의 후예인 우리가 이뤄야 할 세상이 아닐까.


19. 유럽에 대한 단상(보충글)

현재 국내의 많은 대륙사 연구자들이 훈의 역사를 고구려의 역사로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 신라의 역사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훈의 역사는 분명 고구려의 역사로 여겨진다. 거대한 힘의 우위로 유럽을 정복했지만, 그 역사의 기록은 파편처럼 남은 것이 전부인 이 훈의 역사의 상징은 그 유명한 아틸라다. 이 아틸라가 다름 아닌 고구려의 장수왕인데, 이 역사를 아래에서 추론해 보겠다.

훈족은 유럽의 고대시대와 중세시대를 관통하던 시점에 유럽을 평정했던 세력이다. 그런데 이들의 역사는 파편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단일체계로 기록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보다 더 오래된 시기의 그리스사나 로마사 혹은 비잔틴사는 아주 세세하게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거나 꾸며져 있다.

그러한데 왜 이 거대한 훈의 역사는 장막너머에 가려져 버렸을까? 서구의 학설에 의하면 훈족은 국가체제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던 것처럼 설명되고 있는데, 이러한 훈족에게 몰락한 로마의 역사는 믿을만한 것인가? 훈족의 역사는 정말 서구학설처럼 아틸라 개인의 위대한 승리일 뿐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 훈 이전의 유럽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서양이 유럽 역사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반도 일대에 새겨졌다는 그리스, 현재 이 그리스사의 시작을 보편적으로 기원전 7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 폴리스의 역사에 대응되는 역사가 현대중국에서 고대사로 차용하고 있는 기원전 8세기 경에서 기원전 3세기 경까지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다. 춘추전국시대의 역사 무대가 동아시아대륙이 아닌 지중해 일대의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반도라는 뜻이다.

도시국가 형태의 그리스의 폴리스는 사실 소국들이 난립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인데, 그리스의 폴리스를 통일한 이는 그 유명한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인데 이에 대응하는 역사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의 역사다.

그리스의 폴리스 역사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이며 알렉산드로스제국의 역사는 시황제 진(秦)의 역사라는 것이다. -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는 국내의 미술사학자 박용숙 교수가 ‘샤먼제국’이라는 저서를 통해 밝혀 놓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아주 해박하고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내용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알렉산드로스제국에 대응되는 춘추전국시대-시황제 진의 두 역사가 동일한 하나의 역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평소 개인의 견해도 일치하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참고하실 분은 이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의 폴리스를 통일한 것이 기원전 221년 진(秦) 출신의 시황제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역사와 같은 역사인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를 통일하고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를 격파하여 동방으로 영토확장을 이뤘지만 젊은 나이에 역사 속으로 잠들며, 그 거대한 제국도 동시에 역사 속으로 저물고 말았다.(기원전 323년)

시황제의 진(秦) 역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흉노를 격파하며 거대한 영토를 움켜쥐지만 비교적 단명한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진 역시 시황제의 죽음과 동시에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기원전 210년)

참고로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의 플리스를 통일하고 대면했던 최대의 적인 페르시아와 시황제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여 대면했던 최대의 적인 흉노 역시 사실 동일한 역사주체며 이들이 사실 ‘동이’다.

고대의 페르시아 지역은 대대로 조선-부여-백제 계열 동이의 역사무대이며, 흉노라는 이름은 단순한 종족명이 아니다. 흉노는 고구려에도 있고 신라에도 있고 또한 백제에도 있다. - 흉노라 하면 꼭 오늘날의 지역색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있는데, ‘사기’와 ‘한서’에서 언급되는 흉노의 시조 ‘모돈’이 고구려 주몽의 어머니인 ‘가마구지’이다. 즉 흉노가 고구려라는 뜻이다. 이를 송동건 교수가 ‘고구려와 흉노’라는 저서에서 자세히 밝혀 놓았으니 이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알렉산드로스대왕과 운명을 같이한 알렉산드로스제국 멸망 이후 이 지역에 들어선 나라들이 남유럽의 마케도니아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서아시아의 시리아다. 한편 시황제와 운명을 같이한 진(秦) 멸망 후 이 지역에 한이 들어섰다가 결국 위, 촉, 오 셋으로 분열된다. - 한의 역사와 그 정체성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것 같으니 이에 대해서는 현재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옳은듯 하다.

알렉산드로스제국-진(秦) 멸망 후 들어선 마케도니아가 위에 대응되고 이집트가 촉에 대응되며, 시리아가 오에 대응된다. 그런데 남유럽의 마케도니아 지역을 새롭게 통일하며 일어선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지역과 서아시아의 시리아 지역마저 재통일하게 되는데, 이 역사가 사실 위에서 떨어져 나온 진(晉)이 촉과 오를 멸하며 삼국을 통일한 역사와 동일한 역사이다.

그러니까 로마제국이 사실 위와 진이라는 것으로, 여기까지가 훈 이전의 유럽의 역사가 아닌 지중해의 역사다. 이 지중해의 역사무대에 이제 훈에 대응되는 고구려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삼국을 통일했던 진(晉)의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진(晉)의 서북쪽에 흉노가 위치하고 동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했다고 보편적 역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세기(?) 들어 진(晉)은 흉노의 침공을 받아 서진은 멸망하여 서쪽 영토를 내어 주고는 동진하여 동진을 세워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서진을 멸한 이 흉노의 정체가 사실 고구려다. 고구려와 흉노는 본래 다른 것이 아닌데 고구려의 거대한 역사를 반도로만 좁히기 위해 고구려와 흉노를 분리시켜 두 개의 역사로 손질해 놓은 것이리라.

위 역사에 대응되는 서양사가 4세기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어, 5세기 들어 훈의 압박을 피해 침략해온 게르만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하는 역사다. 후에 게르만 지역을 평정하여 이 일대를 관할하는 세력은 훈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사실 서로마가 훈에 쫓긴 게르만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훈에 직접 멸망한 것을 가린 것이라 생각된다.

서로마가 훈에 직접 멸망했건 훈에 쫓긴 게르만에 의해 멸망했건, 어쨌든 훈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했다는 것은 확실하고 이 훈이 흉노라는 것은 보편적으로도 인정되고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 흉노가 고구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훈이 서로마를 멸하는 과정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4세기 후반 로마제국이 서와 동으로 분열될 즈음 게르마니아 지역과 흑해와 발트해 연안의 제 종족과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종족들이 서진해오는 훈에게 쫓기어 서로마의 본토와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하여 북아프리카, 브리타니아(영국) 등으로 대거 이주, 침략하였고 이것이 서로마의 붕괴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보편적 역사에서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설명되는 이 역사에 등장하는 게르만의 제 종족은 매우 다양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고트족, 반달족, 랑고바르드족 등 매우 다양한데, 주목할 필요가 있는 종족은 게르만의 대이동 시기 브리타니아로 이주하여 현재 영국인의 조상이 된 색슨족으로, 이 색슨족이 우리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숙신족이다.

그러니까 숙신족은 동북삼성 일대에서 활약한 동아시아 황인종이 아닌 북유럽의 백인종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398년 숙신족을 소탕하고 정벌하였다고 기록되었는데, 색슨족은 유럽본토에서 브리타니아로 5세기에 이주하였다고 설명한다.

광개토대왕(실은 광개토태제)의 시호에서 알 수 있듯 광대한 영토를 연 주역이라는 뜻으로 그의 업적이 여기에 다 드러난다. 광개토대왕은 동북삼성 일대의 영토를 조금 확장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에 제법 자주 등장하는 숙신족과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숙신족은 사실 게르만의 일파인 색슨족이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숙신족을 정벌했다는 것은 유럽의 색슨 등의 게르만을 정벌했다는 뜻이고, 이것은 고구려가 본영인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영토를 광대하게 넓혔음을 의미했기에 그에 적합한 시호가 붙여졌을 것이다.

한편 서양사에서는 훈의 영토에 대해서 중앙아시아 지역이 동쪽의 끝, 유럽 동부를 서쪽 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논해보자. 현재의 보편적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의 고구려 유적·유물을 두고 고구려의 외교적 결과물로 설명하고 있지만, 아무튼 중앙아시아 지역에 반도 북부와 동북삼성 일대의 것과 동일한 양식의 고구려 유적·유물이 존재한다.

서양사에서는 고구려와 동일한 시기에 존재했던 훈의 역사 강역을 동으로 중앙아시아 일대까지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서양이 자랑하는 실증주의 사관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당시 훈의 유적·유물을 실증적으로 검토해 봤을까? 그렇다면 그 시기의 유적·유물과 우리의 고구려 유적·유물의 차이가 존재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실증사관에 의하더라도 고구려의 최소 강역은 반도에서 중앙아시아까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양사에서는 고구려와 동일한 시기에 활약한 거대제국 훈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석권했다고 하니, 사실상 고구려의 전성기 최대강역은 유라시아 전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되돌아가서 결론적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확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서진이 흉노에게 멸한 역사와 서로마가 훈에 쫓긴 게르만에 의해 멸한 역사는 동일한 역사이며, 훈과 흉노라는 단어는 고구려를 가린 것이리라.

그렇다면 서양사에서는 훈의 역사 중에서도 특정 인물인 아틸라만을 유달리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주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서로마가 멸망할 당시의 훈의 왕, 즉 고구려의 왕이 장수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사에서 훈의 강역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유럽으로 설명하는데, 이 역사가 아틸라가 혈혈단신 창조한 역사일까? 아닐 것이다. 이 거대한 역사를 일구는 데는 분명 짧지않은 역사적 힘의 축적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역사가 아틸라 재위시절의 순식간에 이뤄진 것은 아닐 것이다.

406년 태어나 453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지는 아틸라는 동이족(Eastern People)을 이끌고 유럽 정복을 완수하였고, 394년 태어나 491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지는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을 마무리한 후 남하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두 인물은 동일 인물이며, 선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해낸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세종대왕은 사실 태종 이방원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었다.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이방원이지만 근세조선 대부분의 설계도는 사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그려졌고, 세종대왕은 이를 아주 잘 실천 이행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태종보다 세종을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변방 지역인 유럽에서는 그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광개토대왕 보다 그 역사를 마무리한 장수왕이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장수왕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지도자다. 장수왕이 분명 아틸라다.

추가적으로 이후의 역사를 현대중국이 차용하고 있는 고대사를 통해 살펴보면, 서진이 멸망한 후 5호 16국 시대를 거쳐 동진 지역에 북조인 북위가 들어서고 그 아래에 남조인 송이 들어선다고 하는데, 이 역사가 북의 비잔틴제국(동로마)과 남의 이집트 역사다.

위에서 떨어져 나온 진(晉)이 촉과 오를 병합한 후 서진과 동진으로 분열하였는데, 동진이 다시 위인 북위로 회귀한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앞에서 진(晉)은 로마제국에 대응되고 위는 알렉산드로스제국의 남유럽 계승국인 마케도니아에 대응된다고 하였다.

동진이 북위로 회귀한 것은 서로마의 훈에 의한 멸망으로 동로마가 보다 더 그리스-마케도니아적인 비잔틴제국으로 회귀한 것을 말한다. 물론 비잔틴제국의 역사가 오늘날 서양사에서 설명하는 것만큼 자주적이었을지는 모를 일이고, 또 비잔틴제국의 역사 주역이 오늘날의 유럽인들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남조의 송을 이은 수-이집트가 북조 북위-비잔틴제국의 영토 일부를 병합하여 통일하고, 또 북위의 북쪽에 위치한 돌궐(?)-고구려 또한 북위-비잔틴제국의 영토를 일부 병합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 역사가 사실 고구려와 수의 대립이다.

참고로 이 글은 요청에 의해 예전에 올렸던 <유럽에 대한 단상>에서 언급한 역사를 좀 더 구체화 시켜 본 글입니다. 설명이 좀 더 길어졌을뿐 내용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20. 만주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청의 사서인 ‘만주원류고’에 만주가 본래 신라의 영토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편적 반도사관에 입각한 역사에 의하면 신라의 영토는 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런데 청이라는 신라와 무관한(?) 나라의 사서에 신라가 언급되고, 또 청 자신들의 고유영토인 만주를 외국(?)인 신라의 고토라고 기록했다니 이 어찌된 영문일까?

진실된 역사를 앎에 있어서 이 만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너무나 중요한 만주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추론해보자. 이 글은 이전의 글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 <명과 청은 조선에게 있어 무엇인가?>, <붕당정치와 기독교 침투>, <형제의 나라(?) 터키와 김부식>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으니 그 글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오늘날 만주라고 부르는 동북삼성 지역은 본래의 만주가 아닌데, 실제 만주의 위치를 추정하기 위해서 일백여년 전의 역사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19세기 중엽부터 동아시아대륙에서는 본격적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1905년에 이르러 중화민국 국민당의 전신인 동맹회에서 손문 등은 당강6조라는 강령의 제1조에 ‘멸만흥한’이라는 구호를 공식적으로 내걸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멸만흥한’이라는 구호는 모두 아시다시피 ‘동아시아대륙에서 만주족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라는 구호이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을 건국하여 실제 만주족의 지배를 끝낸다.

한족(?)의 정치세력인 중화민국 창건세력이 새로운 국가수립에 있어 그토록 걸림돌로 여겼던 만주족은 과연 누구일까? - 한족은 실제로 존재하던 특정 민족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쉽게 표기하기 위해 한족이란 단어를 쓴다.

보편적 역사나 현대중국의 설명처럼 동북삼성 지역이 본래의 만주이며 그 곳의 원주민들이 만주족일까? 또 청나라는 그 곳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일까?

현재의 동북삼성 지역 일대에는 퉁구스계의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현대중국은 이 퉁구스계 민족에 속하는 어느 한 민족에게 만주족이라는 민족명을 붙여줬다. 이 만주족(?)을 포함한 퉁구스계 제 민족은 모두들 우리와 마찬가지로 샤머니즘에 매우 익숙하며, 우리와 거의 흡사한 전설이나 민담을 간직하고 있다.

개인적 생각으로 동북삼성의 이들 퉁구스계 소수민족은 청의 건국세력인 만주족의 후손이 아닌 조선의 성지인 코리아반도의 주변 민족으로 조선의 소수민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샤머니즘과 전설·민담 등을 우리와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내외몽골 지역의 경우도 실제의 몽고인이 살던 지역이 아니다. 우리의 사서와 외국의 사서에도 몽고인은 색목인이었다고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반해 내외몽골 지역의 사람들 다수가 여전히 황인종의 순혈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외몽골의 주민들이 왜-양에 의한 역사조작으로 인해 몽고인으로 둔갑되었듯 동북삼성 지역 퉁구스계의 조선 소수민족 역시 같은 목적으로 인해 만주족으로 둔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화민국을 창건하며 한족이라는 민족명을 내세운 손문 등으로 대표되는 대륙 남방계 피지배 민족은 ‘멸만흥한’이라는 구호와 함께 ‘달단인은 오랑캐다. 오랑캐를 몰아내자.’라는 구호 역시 함께 외쳤다. 여기서 이 ‘달단인’이란 것이 본래의 만주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단어다.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여겨지는 손문이지만 표면적으로 ‘삼민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워 진보적 혁명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시절에, 손문이 같은 대륙의 민족 구성원인 특정의 ‘달단인’을 혐오하는 듯한 인종주의적 발언을 정치적 구호로 내걸었다. 혁명가가 인종주의자라니 이 어찌된 영문일까?

그 해답은 아주 쉬운데 달단인이 만주족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지배를 끝내자’라는 정치구호와 ‘달단인을 몰아내자’라는 정치구호는 사실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그린 근세-근대의 세계지도를 보면 아시아의 대부분이 타타리아(TATARIA)로 표기되어 그려져 있다. - 서양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는 비슷한 시기에도 표기된 그 국명이나 지명이 서로 달라 참고자료 정도로만 활용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참고적으로 이 지도를 언급하는 것이다. - 그런데 타타리아는 청이 아닌 조선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이성계의 선대 무덤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무덤이 속한 곳은 달단인의 땅이라 되어 있다. 이는 이성계가 본래 달단인이라는 뜻으로 서양에서 말한 타타리아라는 국명은 ‘달단인이 세운 조선’이라는 뜻이다.

청의 경우에도 만주족이 일으킨 나라이긴 하지만 손문 등이 만주족 중에서도 달단인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함은, 중화민국 창건세력의 최대 장애물은 청이 아닌 조선을 의미한 것이리라.

만주족이란 것은 본래 단일적 민족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본다. 근세에 만주족이라 부른 민족을 중세에는 여진이라 불렀으며, 그 이전에는 말갈, 읍루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만주라는 광활한 초원지대를 누비는 유목민들에게 완전한 순혈적 민족성이란 것이 존재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달단인도 만주족에 속하는 하나의 족속이었으리라 여겨지는데, 현재 현대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달단인이 거주하는 곳은 현재 보편적으로 만주라고 인식되는 동북삼성의 정반대편인 신강성 지역이고, 또 달단인을 위구르인 등과 마찬가지로 돌궐족(투르크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신강성 지역의 돌궐계 소수민족들은 본래 그 뿌리를 중앙아시아 지역에 두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탄’ 국가들은 대부분 돌궐계이니, 신강성의 돌궐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인들과 근친이다. 그런데 달단인 또한 만주족인데 현대중국은 달단인을 돌궐족으로 분류하고 있으니, 본래 만주족은 돌궐족과 동일한 의미이며 여진족 또한 돌궐족과 동일한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실제의 만주족인 돌궐족이 분포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이 역사 속의 진짜 만주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앙아시아 북부와 남러시아의 초원지대가 만주이며, 국가로 말하자면 카자흐스탄 일대가 대표적으로 해당된다.

조선의 강역이 역사조작으로 인해 반도로 좁혀지면서 대륙의 조선 북부지역인 중앙아시아의 만주가 반도의 조선 북부지역인 동북삼성의 만주로 이동하게 된 것인데, 이를 서두에서 말한 청의 사서 ‘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만주는 신라의 고토라는 명제에 대해 간단히 추론하여 검증해 보겠다.

<오천년조선 함락 원인은 기독교> 등의 글에서 설명했지만 복기하자면 신라가 사라센 제국이란 것만 알면, 중앙아시아 지역이 신라의 고토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의 초기 국호는 ‘사로’ 또는 ‘사라’로도 불렸는데 사라센 제국은 사로센 제국으로도 일컬어진다.

신라는 7세기에 삼국을 통일했으며(실제로는 유라시아를 통일), 사라센 제국은 7세기에 제국화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을 통치한다. 후에 신라는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와 남북국 시대를 이뤘으며, 사라센 제국은 북방의 바이킹과 대치하였다.

사라센 제국은 실크로드(Silk Road)를 장악했으며 신라에는 신라도(Silla Road)가 있었는데,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에서는 신라도의 유적·유물이나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신라는 10세기 멸망하였는데 사라센 제국은 10세기에 분열되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사라센 제국은 아시다시피 이슬람 제국인데 신라 역시 보편적으로 인식된 것과 같은 동방식 정통 불교국가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에 국내학자들이 신라를 노래한 고전문학 등에 등장하는 승려를 서역 승려라고 밝혀내고 있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서역이라면 서아시아지역을 일컫는데, 이 지역의 종교는 명백하게 이슬람교다.

신라의 종교가 초기 이슬람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 물론 오늘날의 이슬람교와는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훗날인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후예들은 불교를 주장하였고 신라의 후예들은 유교를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 역사적 사건이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선생이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상 1천년내의 제1대 사건’이라고 주장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인데, 신라계가 주장한 유교는 이슬람교와 관련이 있다. 이는 다음글에서 좀 더 논해보겠다.

우리가 알고자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이 사라센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시기는 8세기 초엽으로 현재의 역사에서 풀이되는데, 이 시기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와 비슷하다. 또 북아프리카 등도 같은 시기인 8세기 초엽 사라센 제국에 정복되는데, 이 시기 역시 신라의 당 세력 축출 시도인 나·당 전쟁(671년~676년) 시기와 비슷하다.

위의 시기에 중앙아시아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화 되었고 사라센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게 되는데, 사라센 제국에 정복되기 전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북아프리카 지역이 당의 영토였다. 그런데 역사적 문제는 고구려의 고유영토인 중앙아시아 지역을 신라-사라센 제국이 정복하면서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10세기 들어 신라가 고려에 멸망하며 고려가 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일한다. - 이 역사는 10세기에 사라센 제국이 파티마 왕조 등으로 분열된 역사에 대응된다. - 그런데 12세기 들어 만주 지역에서 새로 일어난 금이 고려를 괴롭히는데, 이 금의 실체가 신라의 계속이란 점에서 의문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신라는 박혁거세와 석탈해의 뒤를 이어 종국적으로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가계가 신라를 대표하는 왕족이 되었는데, 금(金)나라는 신라 김(金)씨의 부흥을 표방한 나라다.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인 금이 코리아반도 남부의 신라를 계승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어서 조선 중기인 17세기의 상황을 보면, 만주에서 금을 계승한 후금이 일어나 조선을 위협한다고 현재의 역사에서 설명한다. 후금은 건국 직후 국호를 청으로 고치지만, 신라 계승의식은 ‘신라를 사랑하며 생각한다.’는 청 왕족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에 다 드러나 있다.

이처럼 만주족의 신라에 대한 구애는 매우 집요했다. 이는 신라가 만주에 역사적 뿌리를 두었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청의 ‘만주원류고’라는 사서는 직접적으로 만주가 신라의 고토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반도사관에 입각해서는 ‘만주원류고’에서 말한, 만주는 본래 신라의 고토라는 대목의 기록과 금과 청의 신라 계승의식을 절대 설명하지 못한다. 신라가 사라센 제국임을 인지하고 또 고구려의 영토인 중앙아시아 북부-남러시아 일대의 만주를 7세기 이후 신라가 복속시켰음을 인지해야, 만주족의 신라에 대한 애착과 만주땅이 신라인의 고토라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금을 둘러싸고 묘청과 김부식이 대립했던 대목도 이 지점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내부의 고구려의 후예인 불교주의자 묘청과 신라의 후예인 유교주의자 김부식의 대립은, 불교와 유교의 대립이자 고구려와 신라의 대결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다.

셀주크투르크에 대응되는 금, 이후의 오스만투르크와 청 모두 신라의 연속이며 중앙아시아의 만주 지역에서 일어나 서진한 나라이다. 즉 서역은 유교-이슬람교의 신라 역사이며 동방은 불교의 고구려 역사다.

고려 내에서 불교와 유교의 대립이 거듭된 동방에서도 15세기 이후, 중앙아시아-만주 세력인 이성계 일파가 천산 이동을 넘어 동방으로 진출하여 고려를 무너뜨리며 ‘숭유억불’이란 통치이념을 내걸고 고구려와 불교를 종식시키려 한다.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음글에서 다룰 수 있다면 다루도록 하겠다. 서아시아의 아랍인-이슬람의 역사가 어찌 신라인의 역사냐고 묻지 마시길 바란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남유럽 일대를 일천년 가까이 평정했던 셀주크투르크와 오스만투르크의 지도층은 황인종의 돌궐인이었다. 이 돌궐인들은 신라의 후예이며 동이다.

물론 오늘날 중앙아시아 지역의 명·청 직계 후예인 ‘스탄’ 국가의 돌궐계 동이족들은 러시아의 오랜 지배로 인해 슬라브인과 혼혈되거나 슬라브 식으로 창씨개명을 당해 동이의 정체성을 모두 잃은 듯 하다. 이처럼 제국주의의 혼혈책동은 위험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가 만주로 인식하고 있는 동북삼성 지역은 코리아반도와 마찬가지로 동이의 전통적인 성지인 소도이며, 중앙아시아 북부-남러시아 일대의 광활한 초원지대가 본래의 만주이다!


21. 근세조선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티무르 제국의 태조 티무르는 1336년 태어나 1405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은 1369년에서 1405년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35년 태어나 1408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은 1392년에서 1398년이다. 티무르와 이성계 둘 모두 전설적인 무인 출신의 군주이며, 티무르는 전투 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로 불렸는데, 이성계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무르 제국의 3대 황제 샤 로흐는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1377년 태어나 1447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은 1409년에서 1447년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 태어나 1422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은 1400년에서 1418년이다. 샤 로흐는 군사와 정치, 문무 모두를 겸비했으며 티무르 제국의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하였다. 이방원은 무예는 물론 학문에 매우 뛰어났으며 강렬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후 즉위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4대 황제 울루그 베그는 샤 로흐의 아들로 1393년 태어나 1449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은 1447년에서 1449년이다. 조선의 4대 왕 세종 이도는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1397년 태어나 1450년 생을 마감했으며 재위기간 1418년에서 1450년이다. 울루그 베그는 역사가, 신학자, 천문학자로서 학식이 매우 풍부했으며, 특히 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천문대를 세우고 천문표를 만들었다. 세종 이도는 학문에 관심이 깊은 대표적 학자군주로서 수많은 학술연구를 통하여 다양한 연구서적을 편찬했으며, 천문·역법에 관심이 커 천체 관측기구 혼천의·해시계·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게 하였다. 울루그 베그 재위시 티무르 제국은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열었는데, 문화군주 세종 이도는 정치·경제·문화·국방 모든 방면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치적을 남겼다.

티무르 제국은 1369년 투르키스탄을 점령·통일한 후 통치하였고 1380년부터는 서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1389년에는 페르시아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1401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사실상 서방 모두를 정복했는데, 조선은 1402년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 지도를 제작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1508년 우즈베크 샤이반 왕조에 멸망했는데, 우즈베크 샤이반 왕조는 1599년 부하라 한국에 멸망했으며, 부하라 한국은 1920년까지 지속되었다. 명은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세력을 키운 청에 의해 1644년 멸망했으며, 청은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근세조선의 통치이념은 ‘숭유억불’이다. 이 ‘숭유억불’의 통치이념을 파악하는 것은 진실된 역사에 접근하는데 있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난 글에 이어 ‘숭유억불’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자.

근세조선 최대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역성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천명의 대행자이지만 천명, 천심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민심에 의하여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만약 군주가 자기의 의무와 책임인 인정을 저버려 민심을 잃게 되면, 천심, 천명이 바뀌고, 천심, 천명이 바뀌면 군주는 교체될 수 있다.”

정도전은 근세조선 개국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쿠데타의 다른 이름인 ‘역성혁명’을 저렇게 옹호했지만, 정도전 등의 근세조선 창건세력이 내건 ‘숭유억불’ 정책이 정말로 민심과 천심이 원한 방향이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등은 근세조선을 개국한 후 철저한 ‘숭유억불’ 통치이념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왜 유교에 그토록 집착하는 동시에 불교를 억압했을까? 태조 이성계에 이어 태종 이방원은 한술 더 떠 전국의 불교사원 대부분을 철폐한 뒤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불교승려가 되는 길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도첩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에서 불교를 완전히 뿌리뽑으려한 의도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국가정책의 제시가 아닐 것인데, 근세조선 초기의 국가지도자들은 왜 이렇게도 불교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은 이들의 출신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지난 글들에서 이성계를 비롯한 근세조선 창건세력은 고려황조의 직계나 적통 족속이 아닌 중앙아시아 지역의 달단계 출신이라고 여러차례 말했는데, 이들의 억불정책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종교와 직결된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지역의 종교는 무엇인가? 이슬람교다. 보편적 역사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이 이슬람화된 시점은 7~8세기 경으로 이는 사실 신라-사라센 제국이 삼국을 통일한(실제로는 유라시아 통일) 시기라고 지난 글에서 설명했는데, 그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종교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성계 세력은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고려는 내부적으로는 유교가 불교와 공존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 국가였다. 불교 국가인 고려 땅에서 이성계 세력이 ‘역성혁명’을 시도하고 조선을 세운 것인데, 만약 중앙아시에서 넘어 온 이성계 세력이 불교도와는 전혀 다른 이교도라면 향후의 국정운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숭유억불’의 통치이념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성계 세력은 불교도가 아닌 이슬람교도였으며 이 이슬람교가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유교다. 이 역사를 추론하는데 있어 이해의 도움을 얻기 위해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선생이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상 1천년내의 제1대 사건’이라고 주장한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묘사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묘청의 천도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아시다시피 신채호 선생이 학문하던 시절은 서세동점의 기운이 절정에 치닫고 있었는데, 조선의 강역은 좁혀지고 조선의 역사는 한창 왜곡이 진행된 시점이었기 때문인지 신채호 선생 정도되는 석학도 우리의 역사를 다 알지 못했던듯 하지만,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진단한듯 하다.

많은 분들이 위의 문구가 아니어도 묘청과 김부식이 대립한 역사에 대해서 잘 아시겠지만, 위에 표현된 바와 같이 묘청은 불교주의자며 김부식은 유교주의자다. 신채호 선생은 결론적으로 김부식이 묘청에게 승리하여 고려가 보수적, 속박적 유교사상에 정복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는 아시다시피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불교 국가인데 정치적으로는 유교사상을 대폭수용 하였으니 고려 내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신라계 유교주의자 김부식이 고구려계 불교주의자 묘청을 숙청하면서 고려는 보다 유교적인 보수·반동의 사회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김부식 등의 신라계가 유교를 주장했던 이유와 동시에 이들이 묘청 등의 고구려계 불교주의자의 ‘금국정벌론’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유는, 금은 신라를 계승한 유교 국가이며 이 금의 역사가 실제로는 사라센 제국의 후예로서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투르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부식 등의 신라계의 입장에서는 금-셀주크투르크가 신라에서 나뉜 형제였던 것이며, 신라의 종교 실체는 유교이며 이는 이슬람교라는 것이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 통일신라의 문화 기반을 삼국의 문화에 당과 인도의 문화가 더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코리아반도에서 중앙아시아-남아시아의 인도의 문화 수용이라? 현재의 코리아반도에 일제 등이 신라 유적·유물로 설정해 놓은 문화재에 인도적 요소가 얼마만큼 존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전의 글에서 누차 말했지만 실제의 당은 북아프리카에 대응되고 인도는 가야에 대응된다고 하였다. 통일신라-사라센 제국에 당과 인도의 문화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사라센 제국의 강역으로 치환하면 쉽게 풀이가 된다. 사라센 제국은 동으로는 인도 등의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였고 서로는 북아프리카를 복속시켰다. 그러하니 당연히 인도-가야, 당-북아프리카의 문화가 통일신라-사라센 제국의 문화에 스며든 것이리라.

여기서 잠시 말도 안되게 꼬아 놓은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종교사와 문화사에 대해 언급해 보면, 삼국이 불교를 전래받은 지역은 중국이지만 이 중국은 오늘날의 국가명 중국과 무관함을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의 중국은 불교가 융성했던 인도북부 일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여겨지고, 고구려 등은 이곳에서 직접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불교를 수용한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소수림왕 재위기인 4세기에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으며, 백제 역시 침류왕 재위기인 4세기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가장 늦은 5세기 눌지왕 재위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 삼국은 환국과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온 천신, 일월신, 산신, 해신 등을 숭배하는 태양신 사상에서 유래된 샤머니즘을 믿어왔다고 보이는데, 위의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 사상이 샤머니즘에서 불교로 교체된 것이라 여겨진다. 역사의 진실이 이러하니 샤머니즘을 대체한 불교를 완전한 외래종교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의 불교 중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백제와 다른 면모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랑제도의 정신적 기반이 된 업설과 미륵불 신앙인데, 미륵불 신앙은 서역의 미트라 신앙에서 발원하여 전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가 반도의 남부에 한정된다면 왜 신라의 불교만이 이러한 서역의 신앙과 연결되는 것일까?

미트라 신앙은 배화교(조로아스터교)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배화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원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편적 역사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각종 사서에서는 진한(辰韓)의 사람들이 신라로 이주해 들어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진한(辰韓)을 진(秦) 혹은 진(晉)과 동일하게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위의 관점을 개인적으로는 아직 판단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진(秦)과 그 직전의 춘추전국시대는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그리스 폴리스에 대응되며 그 실제의 역사무대는 지중해의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반도 등이라고 누차 말했는데, 종교사와 문화사의 진실은 이 지중해 세계와 신라의 연관성에 있다.

신라의 불교가 고구려·백제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서역의 미트라 신앙과 배화교의 영향과 더불어 지중해 세계에서 발원한 유학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신라의 역사 강역이 본래 코리아반도의 동남부가 아닌 서아시아의 아라비아반도 일대였기 때문이다.

서역으로 진출했던 동이의 후예인 신라인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들여온 정통 불교에 발칸반도-소아시아반도에서 수용한 유학에 미트라 신앙과 배화교가 더해져 유교를 낳았다고 생각되며, 이 유교가 초창기의 이슬람교로 보인다. 물론 이 모든 서역 신앙의 근원에는 동이의 태양신 사상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우리의 역사에서 신라의 후예들은 고구려의 후예 등에 비해 유달리 유교를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진실된 역사대로라면 이 유교가 사실 신라의 종교이기 때문이며 이슬람교 본래의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라의 다른 국호가 사라·사로이며 이의 역사가 사라센·사로센 제국의 역사와 동일한 역사임을 알면 이는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고려시대에 신라 유교주의의 김부식 세력에 고구려 불교주의의 묘청 세력이 패하긴 했지만, 고려가 여전히 불교 국가에 가까웠음은 거란 침입시부터 몽고 침입시까지 지속적으로 조조된 고려대장경이 증명하는데, 이성계 세력이 고려를 허물고 근세조선을 창건하여 ‘숭유억불’을 제창하면서 동방은 공식적으로 유교 국가로 진입하게된 것이다.

‘숭유억불’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일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이어지며 민간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인 불교를 유교-이슬람교로 교체하려했던 무서운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한 정책의 시행에도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성행하였으니 민중에게 뿌리깊이 박힌 종교를 교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문화적으로 유교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신채호 선생의 표현처럼 유교는 조선 사회를 보수적·속박적으로 정복했으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된 사회의 변화는 다소 반동적이었다. 종교적으로는 고려시대에 허용되던 불교는 물론이며 도교 및 토속신앙 등을 모두 음사로 규정하여 이단시 했으며, 오로지 유교식으로만 사회를 개편하려 하였다.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양천과 반상의 구분이 보다 엄격해졌으며 보다 더 가부장적 사회로 나아갔는데 그 예들은 아주 많다. 남귀여가혼(혼인 후에 남자가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제도)이 친영제도(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혼례를 올리고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형태)로 바뀌었으며, 재산의 상속은 자녀균분상속에서 적장자 위주로 바뀌었다.

제사는 원래 자녀가 돌아가면서 모시거나 책임을 분담했으나 장자가 전담하게 되었으며,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입양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가정 내의 여성 지위는 바닥에 떨어져 남존여비 풍조가 심화되었고, 과부의 재가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혼인형태는 일부일처제가 기본이던 질서가 처첩제가 일반화되었으며 서얼의 차별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시대 들어 여성들에겐 외출시 장옷이란 것을 두르고 머리와 상반신을 가리는 풍습도 생겼는데, 이 지점에서 무언가 연상되는 것이 있지 않으신가. 이것은 오늘날의 이슬람 지역에서의 히잡이란 것과 매우 비슷하다. 위에서 열거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생겨난 사회·문화적 변화의 성격들도 이슬람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매우 유사하다.

거듭 말하지만 근세조선을 창건한 이성계 세력이 내세운 유교란 것이 사실 이슬람교다. 다만 고려-조선은 샤머니즘과 불교적 전통이 너무 뿌리가 깊어 유교-이슬람교가 종교적으로는 깊숙히 침투하지 못하고, 관이 주도하는 만큼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시대에 없었던 일신교적 관념과 여성에 대한 제약이 조선시대 들어 출현·강화된 것은 이슬람교의 대표적인 특성이 빚어낸 현상이다.

이쯤에서 또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부분이 붕당정치와 대륙 신강성 지역 위구르인·달단인을 비롯한 돌궐계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붕당정치와 기독교 침투>라는 글에서 이를 논한 적이 있지만 이 붕당은 현재 알려진 역사와는 달리 실제로는 정치색 뿐만이 아닌 지역색과 족속색(민족색)을 띤 조선내부의 정치적 전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 초기 국정을 주도한 세력은 훈구파였지만 16세기 들어 지방의 사림파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붕당정치의 시대가 열린다.

붕당정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세력이 서인인데, 이 서인이 오늘날 신강성 위구르자치구의 돌궐계 민족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강성 지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겠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보편적 역사에서 이 지역이 완전히 이슬람화된 시기를 15세기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슬람교를 보급한 이들을 티무르와 티무르의 아들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역사무대에 전설적 인물로 등장하는 티무르가 우리 역사의 이성계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누차 말해왔기에 티무르가 이성계에 대응되며 티무르 제국은 조선에서의 ‘왕자의 난’ 이후 갈려나간 명에 대응된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런데 신강성 지역은 15세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이슬람화 되었다고 했다. 15세기라면 ‘숭유억불’의 근세조선 개국 초기이며, 티무르와 티무르의 아들은 당연히 이성계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대응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신강성 지역의 돌궐계 민족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돌궐계 국가의 민족과 근친이다. 그런데 중앙아시아 지역이 이슬람화된 시기는 7~8세기 경인 반면 천산산맥 너머의 신강성 지역은 그 보다 수백년이 지난 후에 이슬람화 되었다. 이것은 15세기 경 중앙아시아 지역과 그 천산산맥 너머의 동방인 신강성 지역에 크나큰 국제정치적 사건이 있었음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국제정치적 사건이 다름 아닌 ‘위화도 회군’에 이은 근세조선의 창건이리라.

그러니까 신강성 지역이 동아시아대륙에서 유일하게 본격적인 이슬화의 길을 걸을 것은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에 이은 근세조선 창건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돌궐계 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 역사가 신강성 지역의 역사에 티무르와 티무르의 아들에 의한 이슬람화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성계 등이 ‘숭유억불’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러하며, 이러한 역사를 잘 살펴보면 유교와 이슬람교의 관계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 역사를 붕당정치와 관련지어 논해보면, 이 신강성의 이슬람교도들이 훗날인 붕당정치기에 접어들면서 훈구파를 대신해서 근세조선의 국정주도권을 좌우하며 기득권인 서인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넘어 온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대륙의 서북부를 제외한 이들이 동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이 동인들이 분열하여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것이 붕당정치 세력형성의 큰 틀이라고 보이며, 추론컨대 그 나뉨의 지리적 기준은 조선의 중국인 장안을 낀 섬서성 좌우와 황하강의 남북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족속적으로 보면 서인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강성 지역의 달단인·위구르인을 위시한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의 돌궐계가 대표했을 것이며, 서인의 최대 정적이었던 북인의 경우는 전통적인 고려계였을 것이다. - 개인적으로 추론하기로는 이 북인들이 상투 틀고 한복 입었던 이들로 오늘날 코리아반도의 우리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현대중국에서 우리 조선족 동포가 소수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참고로 재야연구자들 중 현대중국 모택동 집권기에만 해도 가공할 숫자의 조선족이 희생된 것으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남인의 경우 황하강 이남 지역의 광대한 지역의 세력으로 추론할 수 있겠는데, 이들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양자강 이남의 남방계 지역인은 조선의 주체 세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남방계들은 백제-고려 때부터 북방계 동이에 의해 정복당한 피지배민에 가까웠으리라 보이며, 조선시대에도 기득권 세력인 서인에게 남인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서인의 유일한 정적은 조선개국 이전까지 고려를 이끌어왔던 지혜로운 북인들이었을 것인데, 임진왜란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즉위, 집권한 광해군과 북인을 서인이 남인을 동원하여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서인은 조선 후기까지 기득권을 누리게 된다. 이 와중에 서인 자신들의 집권의 기반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의 근친인 명-티무르 제국과의 결속 강조가 역사 속에 명에 대한 사대 아닌 사대로 비쳐졌을 것이다.

서인의 장기적인 집권은 유교-이슬람교적 질서를 더욱 강화했을 것이고 이는 조선 사회가 보다 보수적·속박적으로 나아가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근세조선을 찬양했다는 것인데, 만약 고구려-고려의 후예인 북인이 인조반정을 맞지 않고 서인에게 승리했다면 얼마나 더 나은 역사를 써 나갔을지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에 인조반정으로 고려계의 북인이 유교주의자 서인에게 패한 역사는 고려시대에 ‘금국정벌론’을 놓고 묘청 등의 불교주의자가 김부식 등의 유교주의자에 패한 역사와 너무나 비슷하다. 이러한 중차대한 역사적 사건 등을 토대로 우리의 역사를 큰 맥락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 내부에서도 고구려와 신라의 정통성 경쟁이 치열했던 것인데 진취적인 고구려계가 보수적인 신라계에 번번히 패하며 고려-조선의 내부적인 사회 발전을 지체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조선 외부적으로도 신라가 남긴 친척뻘 되는 셀주크투르크-금과 오스만투르크와 무굴, 청 등이 고려-조선과 함께 유라시아를 장악하며 역사를 써 내려갔으니, 서역의 신라와 동방의 고구려의 역사구도가 근대까지 지속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신라의 후예인 조선대륙 서북지방의 돌궐계가 근세의 우리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너무 뚜렷해서, 왜-양은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로만 한정하면서도 돌궐계와 대륙의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도 근세조선사에 위구르인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위구르인의 문자가 한글을 창제하는데 기여했으며 조선의 ‘예궁’이라는 곳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종교행사를 치르기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위구르인들의 지도자들은 조선에서의 사회적 위치가 매우 높아 조선의 궁정 행사에도 빈번하게 참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이 반도에 한정된 조선에서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일들인가? 대륙 서북지역 돌궐계의 위구르인들이 반도의 조그만 유교 국가까지 산과 강을 넘어와서, 반도의 조선에서는 낯설기만할 이슬람식 종교행사를 치르다니? 게다가 빈번하게 궁정행사에 참가하는 귀빈 대우까지, 이러한 기록들이 반도에 한정된 조선에서 가능할 일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길 위구르인들이 조선의 조정에 나와 군주를 알현하고, 조선 군주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낭송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군주들은 이를 ‘회회조회(回回朝會)’라 이름하여 정례화 하였으며 이들의 축원의식을 ‘회회송축(回回頌祝)’이라고 일렀다고 한다. 특히 위대한 군주 세종은 이를 매우 즐겼다고 하는데, 조선은 이슬람 국가였는가?

이 모든 기록은 반도의 조선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로, 조선이 대륙과 반도 등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있었음을 인식하고 유교가 바로 이슬람교임을 인지했을때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사들인 것이다. 근세조선의 통치이념인 ‘숭유억불’의 역사적 진의는 이러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숭유억불’의 무시무시한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근세조선은 널리 찬양된 것 같지만 고구려-고려계의 불교주의자가 신라계의 유교-이슬람주의자에 패한 역사는 아쉽기만 하다. 물론 조선 대부분의 백성들은 종교로서의 유교-이슬람교를 거부하고 샤머니즘에 융화된 불교적 전통을 지켜나갔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건너 온 신라의 종교가 고구려의 땅인 조선을 정체시킨 부분이 적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22. 투르크제국은 신라의 후예다.

청의 사서 ‘만주원류고’에는 청이 일어난 만주는 본래 신라의 영토이며, 청 스스로 금과 청이 신라계이며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음을 밝혀 놓았다. 반도사관에 의하면 신라는 만주에서 역사를 쓴 적이 없다. 반도사관은 거짓이다.

이것을 현대중국 학자 주학연의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에서 해당 증거가 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설명하면...

<사기><대완열전>에 등장하는 서역 민족 오손은 하서주랑을 통해 진출한 유목부락으로, 사실은 퉁구스계 애신씨족이다. <금사><백관지>에서는 애신을 아선으로 적고 있고, <만주원류고>에서는 거꾸로 아선을 오신으로 적고 있으니, 오신은 확실히 오손으로 사용되기도 한 셈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오손이 애신이며, 황제는 ‘황금 성씨’ - 김씨 성의 애신-헌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서역 민족 오손이 애신이라는 얘기이다. 이전에 개인적으로 추론하길 신라를 계승한 애신 씨족의 금이 서역의 셀주크투르크에 대응된다고 했다. 셀주크투르크는 오스만투르크(오손돌궐)로 이어졌으니, 결국 애신이 오손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래도 신라의 서역 기원설을 무리라고만 볼 수 있을까?

계속해서 같은 서적에서 발췌해 보면...

하서주랑은 월지, 오손의 발상지로서, 저거·걸복·독발 등의 부락이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위서>에서는 “선비족의 독발오고는, 그의 8대조 필고가 북쪽 변경에서 하서 땅으로 옮겨왔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독발이 오르도스에서 도래한 선비계 부락임을 방증하고 있다. 즉 월지·오손·저거·독발은 곧 올자·애신·여직·차말·탁발로서, 이상의 여러 종족이 하서 일대에서 어우러져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평량의 잡호’라고 통칭한 것이다. 아사나는 애신 또는 오손의 발음이 변형된 경우로 저거에서 유래했으니, 여직 민족인 김씨 씨족의 일파라고 할 수 있겠다.

“후에 (북)위의 태무제가 저거씨를 멸망시키자, 아사나는 500호를 이끌고 여여로 도주하여 대대로 금산에 살면서, 쇠를 벼리는 일에 능하였다.” 는 내용은 5세기 초 몇백 호의 무리만 이끌고 곳곳을 전전하던 여직-애신씨가 알타이산에 이르러 처음에는 유연에 복속하여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세기 중기, 때를 기다리던 이들은 마침내 투르크 칸국을 세우고 중원을 침공하는 한편, 유연의 잔여세력을 쫓아 멀리 동유럽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6세기 말에는 동투르크와 서투르크로 분열되었는데, 비잔틴의 역사서에는 매서운 언사로 비잔틴을 질책하는 등, 돌궐의 명성을 유라시아에 크게 떨친 서투르크의 국서가 전해지고 있다.

주학연이라는 이 현대중국 학자는 현재의 보편적 사관을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신라를 코리아반도에 한정된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니 저 역사가 신라의 역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애신 김씨 씨족의 역사라고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저 역사가 신라의 역사다. 애신 김씨 씨족이라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그리고 애신이 곧 여직(여진과 동일한 종족명)이며 애신·여직이 돌궐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현재 역사에 관심있는 많은 분들이 돌궐이라면 무작정 고구려라고만 판단하거나 심지어 고려라고도 하는데, 이 중 후자는 매우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돌궐은 사실 신라와 더 많은 역사를 만들었다.

현재 돌궐계 민족이 많이 분포하는 곳은 중앙아시아 지역인데, 개인적으론 얼마 전 그 북부 지역이 만주라고 추론했었다. ‘만주원류고’에서 만주는 신라의 고토라고 기록된 부분을 이해하실 것이다. 여직(여진)이 돌궐이 되었다고 했는데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는 여진을 만주족이라 이른다. 중앙아시아 북부-만주의 돌궐계가 만주족과 다른 것이 아니다.

돌궐 그러니까 셀주크투르크나 오스만투르크의 역사는 사실 신라를 계승한 역사다. 서역에 신라의 역사적 유산이 많이 남겨졌고 우리 동방에 고구려의 역사적 유산이 많이 남겨졌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흉노 후예의 별부가 돌궐이라고 했는데 신라 김씨의 흉노 기원설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직접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이다. 신라 역사의 서역 기원설은 거짓이 아니다.


23. 몽골과 러시아 그리고 타타르스탄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는 중세에 유라시아를 휩쓸었던 몽골 제국의 몽골을 타타르와 병기해서 사용하고 있다. 몽골 제국 역사의 주체를 몽골 혹은 몽골 타타르 아니면 그냥 타타르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표기가 옳은 것일까? 그리고 몽골과 타타르가 동일한 것일까?

아니다. 몽골과 타타르는 다르다. 현재 몽골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북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구성원인 몽골인은 몽골 어군의 몽골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다. 그에 반해 타타르인은 중앙아시아 국가의 여러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또 러시아 연방 내에 타타르스탄이라는 자치국으로도 위치하고 있는데, 이 타타르인은 몽골인과 다르게 투르크 어군의 민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몽골인과 타타르인은 지역과 언어, 족속 모든 것이 일치하지 않는 이질적인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보편적 역사에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이러한 민족명을 왜 혼용하거나 병기하여 표기하였을까? 또 이러한 표기는 몽골 제국의 역사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이를 알려면 몽골인과 타타르인의 실체가 필요한데, 먼저 몽골인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 정조 때 이갑이 쓴 기행문집인 ‘연행기사’의 ‘견문잡기’에 나타난 몽골인의 기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 그릇에 먹는다. 강한하고 추악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고서에 나타난 몽골인의 특성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몽골인의 특성과 매우 다르다. 청인과도 외형적·문화적으로 매우 다른 몽골인, 그 구체적 생김이 눈이 푸르고 수염이 붉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몽골인의 실체가 색목인(백인)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몽골인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색목인적 특성을 쉽게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오늘날의 그 어떤 지역의 황인종에 비해 북방계의 순혈적 황인종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다. 오늘날의 몽골인이 정말 위의 고서에서 말한 몽골인과 같은 족속인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계속해서 같은 서적의 기록을 살펴보자.

‘대비달자는 곧 아라사인데, 몽고의 별종으로 나라가 사막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 영악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 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인들은 극히 두려워하여 방수하기를 극히 엄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갑군이 반드시 따라다니나 오히려 제재하지 못한다.’

아라사는 러시아를 말한다. 그런데 러시아인의 특성을 푸른 눈과 광대뼈, 붉은 수염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몽골인의 특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러시아인을 몽골인의 별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 이제 몽골인의 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시는가? 본래의 몽골인은 색목인이었으며 러시아인과 그 형상이나 습성에서 거의 일치를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몽골인으로 설정된 내외몽골 지역의 몽골인은 누구인가? 전형적인 북방식 황인종의 순혈적 형상을 지닌 현재의 몽골인은 샤머니즘과 융화된 티벳식 불교를 믿는데 티벳과 마찬가지로 ‘삼태극 문양’을 중시하고 있다. 샤머니즘에 융화된 불교와 삼태극 문양이란 것은 우리의 전통과도 거의 일치를 보인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몽골인은 외형적인 형상 뿐만아니라 그 내면의 문화적 전통까지 모두 전형적인 동방식이며, 색목인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오늘날의 몽골인들은 서역인과 피를 섞은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들이 천산 산맥을 넘어 신강성 지역으로 넘어 오기 전까지는 티벳인과 문화를 깊이 공유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 제국은 몽골인 제일주의로 유라시아대륙을 통치했으며 몽골인을 제외하고는 색목인을 가장 우대했다고 하는데, 색목인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 역시 색목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투르크계의 이슬람교도 역시 존중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늘날의 황인종의 불교도인 몽골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모순이 없으려면 오늘날의 몽골인이 색목인의 이슬람교도여야 한다.

현재 몽골인으로 설정된 민족은 전통적인 고려-조선의 지역인들 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실제의 몽골인은 누구일까? 실제의 몽골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저 위의 ‘연행기사’에 나타난 청인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연행기사’는 청인을 색목인의 특성을 지닌 몽골인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청인이 전형적인 황인종의 형상을 지녔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또 청인들은 추악한 몽골인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매우 천시하고 있었음을 무척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몽골인과 그 형상과 생활 습성이 비슷한 러시아인에 대해서도 청인들은 비슷한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다른 사항은 청과 몽골, 러시아의 지리적 위치 관계인데, 청인은 몽골인이나 러시아인 같은 색목인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곳에 거주했던 것 같다. 보편적 역사대로 청이 오늘날의 현대중국 전신국가로 동아시아대륙에서 존재했었다면 청인은 색목인을 쉽게 목격할 수는 없다. 청의 실제 위치는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현재의 보편적 역사대로라면 러시아 지역의 역사를 처음 열어간 이들은 고대의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 등인데 이들은 오늘날의 러시아인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중세기엔 노르만의 지배에 이어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러시아인이 최초 독립한 시점은 1480년의 모스크바 공국 시기로 설명되는데 약소한 모스크바 공국은 얼마가지 않은 시점인 1610년 폴란드에 의해 멸망했다.

러시아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613년 로마노프 왕조 이후의 일인데 러시아의 본격적인 역사의 시작은 짧게는 이 시점으로 잡을 수 있으니, 러시아의 역사는 400여년 정도 되는 셈이며 길게 모스크바 공국 시기를 역사의 시작으로 보아도 500여년을 넘지 못한다. 물론 17세기 들어 겨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러시아는 모스크바 주변의 동유럽 일대에만 찌그러져 있던 소국으로 설명된다.

그러던 러시아가 18세기 이후에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 표트르 대제에 의해 팽창하기 시작했으나, 어디까지나 당시 역사의 변방 지역인 유럽으로의 북진 정책과 서진 정책에 불과했다. 이후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로마노프 왕조의 8대 차르인 예가테리나 여제에 의해 겨우 동진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그러니까 러시아인이 동방으로 이주해 온 시점은 아무리 빠르게 봐도 18세기 말엽 이후란 것이다.

‘연행기사’가 쓰여진 시기는 18세기 후반의 일인데, 당시 청이 동아시아대륙에 있었다면 청인들은 러시아인을 쉽게 목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청의 본영은 동아시아대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색목인의 몽골인과 러시아인을 흔히 볼 수 있었을 청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를 추정하기 위해서 1689년 청과 러시아가 국경선을 확정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보편적 역사에서 네르친스크 조약을 오늘날의 만주(동북삼성) 지역의 흑룡강 부근에서 청과 러시아에 의해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이를 정리한 조약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이 네르친스크 조약은 모순되는 부분이 큰 것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러시아가 동아시아 부근으로 진출해온 시점은 18세기 말엽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데 네르친스크 조약이 그보다 한 세기나 이른 시점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체결되었다니?

이 모순을 분석해 보면 사실은 이러할 것이다. 17세기 후반 청과 러시아가 국경선을 확정한 조약을 체결한 것이 실사라면, 네르친스크와 흑룡강의 위치는 오늘날의 동북삼성 지역이 아니라는 것으로 지명 이식의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에 대한 방증을 러시아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러시아가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시점은 18세기 후반이지만 중앙아시아 부근으로 남하한 시점은 17세기의 일이라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국가들에 러시아인 등의 슬라브계 민족이 최초로 이주한 시점은 17세기로 설명되며, 투르키스탄 국가 중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선을 마주한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의 카자흐스탄에는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전의 글에서도 누차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인 카자흐스탄 일대가 실제의 만주며 청은 이 곳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론한 바 있다.

네르친스크 조약과 관련해서도 청을 카자흐스탄 등의 투르키스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치환해 보면 저러한 역사의 모순도 쉽게 풀린다. 실제의 네르친스크와 흑룡강도 오늘날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경계 지역에 존재했을 것이며, 대륙 그 자체였던 조선의 강역이 반도로 좁혀지면서 대륙의 조선 북부 지역에 있던 청-만주의 위치와 흑룡강 등의 위치도 반도의 북부지역으로 이동되었던 것이리라.

청의 역사 강역을 위처럼 놓고 보면 카자흐스탄 지역 등에 거주하던 청인들이 ‘연행기사’가 쓰여진 18세기 후반에 러시아계 색목인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참고적으로 살펴볼만한 역사적 사건이 보편적 역사에서 러시아와 우리가 최초로 충돌했다는 ‘나선정벌’이 될 텐데, 이 ‘나선정벌’의 경우도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상당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선정벌’은 1650년대 효종 재위기 연해주 부근의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조선과 청이 연대하여 격퇴시킨 사건을 말하는데, 그 전투 장소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가 동방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해온 시기와 ‘나선정벌’이란 전투 발생 시기가 너무 크게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후에도 러시아와 청의 국경선 지대로 예상되는 남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북부 지역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있었을테고, 이러한 분쟁들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17세기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뻗어온 것이고, 이를 거점으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것일텐데 그 시점이 18세기 말엽이란 것이다.

‘나선정벌’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또 다른 역사의 진실은 조선과 청의 관계인데, 보편적 역사에서는 조선이 청에 종속되었던 국가처럼 설명되는데 실제의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힘겨워지자 조선에 출병 요구를 하는데 조선의 총수병 출병 즉시 러시아군을 두 차례나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이 ‘나선정벌’만 봐도 17세기 당시 아시아의 패자가 누구였는지 쉽게 확인되지 않는가. 당시의 청은 조선에게 출병 요구를 한 것이 아닌 구원병 요청을 조아렸으리라 보는 것이 역사의 전후 관계를 봤을 때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이렇게 청은 당시 실제의 만주인 카자흐스탄 등에 본영을 두고 러시아와 대치하며 러시아계 색목인을 목격해 왔으리라 보는데, 그렇다면 청인이 목격한 몽골계 색목인은 누구일까? 이해의 도움을 위해 현대중국의 학자 주학연의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말해 보겠다.

몽골족에 관한 중요한 저술인 <몽골비사>와 <집사>에서는 몽골과 달단(또는 타타르)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1253년 8월 볼가강에 도착한 서양 선교사 르부르크는, 칭기즈칸의 손자 발도를 알현하기 직전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

궁정의 일부 서기관들이 우리에게 말하였다 : “당신들은 우리 주인님을 기독교도라고 불러서는 안 되오. 그는 기독교도가 아니라 몽골인이시니까.” … 그들은 타타르인으로 불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타타르인은 다른 종족이기 때문이다.

몽골어를 한자로 전사해 기록한 <몽골비사>에 등장하는 마아리혹 즉 마르크 역시 말갈로, 이와 발음이 유사한 것이 멸리걸 즉 미리키이다. 그리고 파아올은 족명 백악오와 대응된다. 따라서 칭기즈칸의 11대조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멸리걸-백악오 부족의 후예인 셈이다. 그의 선조는 아마도 힐일사(하카스) 지방 - 예니세이 강 상류 겸하 유역의 견곤국으로, <신당서>에 따르면, 그곳 “사람들은 모두 크고 머리칼이 붉으며 얼굴이 희고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으로 친출했다가 피정복 토착민들의 혈연에서 인도-유럽인종의 외모를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위 글을 보면 원래의 몽골인과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의 가계가 색목인이었음을 말해주는 문헌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몽골인과 타타르인은 처음부터 같은 족속은 아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몽골인과 타타르인은 거의 같은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몽골과 타타르가 서로 동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두에서 말했지만 오늘날 몽골 제국의 후예로 거론되는 국가로는 몽골과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인 타타르스탄이 있다. 이들 중 몽골과 그와 동일한 의미로 쓰여지는 타타르 양자를 계승한 나라는 당연히 타타르스탄이다. 오늘날의 몽골은 역사 조작의 희생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리나 인종, 종교 등 그 어떤 부분에서도 문헌에서 말하고 있는 몽골 제국과 일치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타타르스탄은 대부분의 면모에서 문헌에서 말하는 몽골과 상당수 일치한다. 타타르스탄은 16세기 이전까지 몽골 제국을 이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지배하였으며, 이슬람교를 믿는 색목인이다. - 몽골 제국은 이슬람교를 존중하였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색채를 담은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 또 이 타타르스탄은 몽골 제국과 관련된 문헌에서 자주 언급되는 볼가강 유역에서 대대로 거주해왔으며 오늘날도 그 유역에 자치국을 세워 놓고 있다.

볼가강-카마강 유역의 타타르스탄은 지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 지역과 연결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북부인 카자흐스탄이 실제 역사 속 청의 전신 지역이라면, 청인들은 타타르스탄 지역의 몽골-타타르계 색목인을 아주 쉽게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주를 비정하는 것은 모든 동양사를 푸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는 해법이며, 중앙아시아 북부 지역인 카자흐스탄-남러시아 일대가 실제 만주임을 숙지하면 진실된 역사는 쉽게 보인다.

16~17세기 이후 비로소 완전히 독립하여 역사를 시작하는 러시아는 타타르스탄의 몽골-타타르인을 가혹하게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후대에는 이러한 일들을 두고 러시아인이 타타르스탄의 타타르인을 몽골인으로 착각하여 저질러진 실수이며 헤프닝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러한 해명이 과연 진실일까?

몽골 제국의 역사는 실제로는 색목인의 역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몽골 타타르의 역사가 왜 황인의 역사로 각색되었을까? 찬란한 문화 대국 고려-조선의 역사에 비해서는 한 뼘의 역사도 되지 않던 몽골 타타르의 역사를 올려 세우고, 고려-조선의 역사를 조작하여 축소·은폐한 것 역시 서세동점, 색목인의 세계 지배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24. 역사를 바로 알아야 조선족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족은 정말 구한말 코리아반도에서 대륙으로 넘어 간 사람들일까? 이는 사실이 아니리라 본다. 현재로서는 현대중국에 조선족 사회가 형성된 시기를 1860년대로 잡고 있는데, 그 인구가 1870년대 7만명이며 이후 차츰 증가하여 1900년대에는 22만명, 일제강점기 이후엔 170만명 가량 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이렇게 동북3성 일대에 조선족이 집중된 이유를 코리아반도에 있던 조선-대한제국의 국권이 흔들림에 따라 생활고가 힘들어진 조선인들이 대거 반도에서 (현)만주로 국경선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위의 보편적 인식대로라면 식민지로 사로잡힌 코리아반도의 조선-대한제국 인구는 크게 감소되어야 했겠지만, 오히려 당시 코리아반도의 인구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시점에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옛 자료에 의하면 1900년대에 코리아반도의 인구는 500만명 가량 되었는데, 1910년대에는 1300만명을 상회하였다. 그 중 특정 2년간 그 인구가 500만명 이상 급증했는데, 이는 인구의 자연적 증감률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으며 외부에서의 인구 유입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북3성의 조선족이 코리아반도의 난민이란 것은 거짓이 된다. 조선족은 사실 대륙의 조선인이었으며, 특히 1900년대 특정 2년간 총인구의 2배에 달하는 500만명 이상 인구가 급증한 대목은, 당시의 불안정한 정세에 따라 대륙의 조선인이 반도로 급속도로 피난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를 보다 매끄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긴 흐름의 역사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의 북인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고려인이라고 해야 한다. 구한말 이전 코리아반도의 토착 조선인들도 넓게 보면 조선의 북인이었겠지만, 사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 고구려, 고려의 후손들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연해주의 조선인이 괜히 고려인으로 불린 것이 아닐 테다.

고려에 귀화한 여진계 가문 출신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허물고 조선을 세운 후, 여말선초의 문신 권근으로 하여금 조선지도이자 사실상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를 제작케 했다. 이 지도의 특징은 코리아반도의 비현실적 확대와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과감한 축소인데, 이는 당시 조선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이성계가 근세조선을 창건하며 새로운 세계의 천자(황제)로 등극한 후 - 이는 우리가 오늘날 ‘조선천지’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 고려대륙에 (실제의)만주 중앙아시아로부터 여진인(돌궐, 달단, 몽고)들이 천산을 넘어와 섬서성 이서인 신강성, 감숙성 등에 서인으로 자리잡으니, 기존의 고려인들은 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 난 후 산서성,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등지에서 북인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근세조선의 최대 기득권 세력은 분명 서인이었고 그들의 최대 정적은 북인이었는데 이는 새로운 ‘조선 세력’과 기존의 ‘고려 세력’간의 정치적 대결인 것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영흥(우즈벡 케쉬) 출생의 이성계가 고향인 영흥 주변의 대도시 함흥(우즈벡 사마르칸트)으로 돌아간 것이 ‘중앙아시아의 명’과 ‘동아시아의 조선’으로 분열된 것이며, 이것이 조선이 명을 사대한 이유이며 동시에 서인이 국정을 주도하는 기반이다.

서인은 같은 북방계인 북인을 견제하는 만큼 남인을 무시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남인 중에서도 특히 양자강 이남의 남인은 사실 왜에 가까웠기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두 열등했는데, 이러한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선조에게 허위(?)보고를 하며 조선이 ‘임진왜란’을 방비하지 못했던 이유를 제공한 것이 사실 남인이었으며, 왜란 당시에도 가장 무기력한 세력이 남인이었는데 이는 남인의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인 반해,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경하게 대응한 세력이 북인이며 이 역시 북인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

남인은 고려-조선의 주도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본래 백제의 피지배층이었고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사실상 복속되었던 족속이었고, 지역적으로도 동남아시아의 왜와 어느정도 문화와 혈통을 공유하고 있었으니 이는 북방계 서인, 북인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의 정통후예인 북인이 왜에 대해서 가장 강경한 것은 오랜기간의 그 문화적, 역사적 우월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 조선은 재주있는 이들을 ‘산서 사람’이라곤 했다. 이 ‘산서 사람’이란 조선의 산서성 사람 즉 북인을 말하는 것일 테다.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북인은 광해군을 옹립하여 국정을 주도하지만 그것도 잠시인 것이, '임진왜란'에서 서인 세력의 정치적 모국인 '중앙아시아 명'이 조선에 지원병을 보낸 여파로 국력이 쇠잔해진 사이 명의 북쪽에서 후금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명의 위기이자 조선 서인 세력의 정치 기반의 위기이도 했다.

반면 조선의 광해군 북인 정권이 명과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며 중립 실리적 태도로 일관하자, 명에 대한 지원군 증원을 소리 높이던 서인은 더욱 다급해진 나머지 남인을 직접 꼬드겨 ‘인조반정’을 일으키고서는 광해군과 북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해 버린 뒤 정계를 장악하지만, 서인 정권의 조선은 곧 명을 이겨낸 후금에게 ‘정묘호란’을 맞고 이어서 후금에서 국호를 바꾼 청에게 ‘병자호란’을 맞는다.

연속된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한 충격의 여파는 적지 않았듯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은 건재하였고 명을 함락시킨 청의 주요 강역은 여전히 중앙아시아였던 것 같다. 이후 청은 차츰 영향력을 확대해 조선의 북부지역인 외몽골 이북의 시베리아 지역과 남으로는 무굴(북인도) 지역에도 그 세를 뻗쳐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단코 청은 동아시아대륙에 중화민국의 전신국가를 세웠던 나라는 아니다.

청의 상징적 복식은 영화 ‘황비홍식 변발’인데, 청을 묘사한 듯한 옛 그림에는 이러한 ‘황비홍식 변발’을 한 청인으로 황인과 백인, 아시아 흑인, 아랍인 등 매우 다양한 인종이 등장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고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니, 청의 위치는 조선의 서북방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특히 그 중에서도 카자흐스탄 지역이 그 본영일 테다.

그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시베리아로 강역을 넓혀 조선의 북부지역까지 위치했던 전성기의 청을 조선에서는 아마 북청이라고 일렀을 것이다. ‘북청 물장수’, ‘북청 사자놀음’, ‘북학’ 등의 용어와 문화가 생겨난 것은 이 지점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조선대륙의 서북방인 투르키스탄 지역과 북방의 시베리아 지역에 있었던 청이 언제 조선으로 침투해 왔을까? 이는 아마도 19세기 조선의 멸망을 전후한 시점에 이뤄진 일일 것이다.

청은 오랜기간 러시아를 두려워했다. 17세기에도 청은 러시아의 침공에 비틀거린 적이 있고 이를 조선이 구원해준 것을 ‘나선정벌’이라고 하는데, 19세기의 러시아는 당시 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동진해 오니 청은 독자적으로 살아남기가 힘들어졌을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 조선의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해양 제국주의로부터 불거졌는데, 이러한 문제를 초래한 내부의 조선인들은 임진왜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남인이었다. 초기의 조선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남인이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병인양요가 발생했으며, 현재 청의 역사(중국사)로 편입된 아편전쟁 역시 조선의 남인 지역에서 발생한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조선의 남인, 특히 양자강 이남의 남인들은 국적은 조선인이었지만 사실 족속적으로 보면 왜에 가까웠기에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렇고 임진왜란의 제2라운드라고 볼 수 있는 19세기 서세동점기에도 지속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며, 왜에게 무기력하거나 심지어 왜와 내통하기도 한 것이리라.

그러한 맥락에서 19세기 중엽 영국과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등의 침공을 받은 복건성, 광동성 등의 족속적으로 왜에 가깝던 ‘일본 강호막부’가 ‘동남아시아 왜’와 그에 의해 식민 경영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일본열도 왜’가 서세와 합세하여 조선으로 총구를 돌린 것이 명치유신이며, 그 결과가 ‘운양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이니 조선은 1876년 이 때에 사실상 자주권을 상실했다.

청이 조선으로 침투해 들어온 시점도 아마 이러한 이러한 혼란기를 지날 시점인 19세기 중엽일 것이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흥선대원군은 수 많은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는 아마 단순한 왕궁의 재건축을 의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19세기 중엽은 조선이 제국주의의 침공에 가장 극심하게 노출된 상태였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국난의 상황에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한가하게 왕궁 재건 공사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는 아마 조선이 해양 제국주의에 침공을 받고 혼란한 틈을 노려, 밀고 들어오는 북방의 러시아는 물론 그와 함께 밀려오는 청을 방어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급히 천도하니 마땅한 황궁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 황도를 옮겨온 장소는 아마 오늘날의 북경 자금성일 확률이 높다.

자금성은 본래 고구려의 성곽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계속 성곽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대중국이 수십 년간 남방식으로 개조해 놓고서 황궁이라 잡아떼는 이유는, 그 곳이 조선의 마지막 황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이란 도시 이름은 19세기 이후 경복궁 중건 후인 근대에 붙여졌을 확률이 높고, 본래의 북경 이름은 천안이었을듯 하다.

아무튼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어마어마하게 혼란한 시대였을 것이, 양자강 이남의 남인 지역은 아편과 기독교로 물들고 태평천국운동의 혼란, 서세의 침공과 명치유신 일본의 분리와 침공 등으로 아비규환 상태에 빠졌을 것이고, 이들 중 일부 세력은 서세에 투항하여 정치 세력을 키워 나갔을 것인데, 이것이 조선과 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남인들의 분리·독립인 것일 테다.

같은 시기 그 북쪽인 조선의 중심지역 황하강 부근의 서인과 북인 지역에서는 러시아의 동진과 남하, 청의 침투로 인해 경복궁 중건과 함께 어마어마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기운으로 인해 이러한 민족 대이동의 움직임은 아마도 전인종적, 전유라시아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는 본래 대대로 동이족의 종교지역 혹은 피난지였기에 일반 백성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1870년대부터 동북3성 지역에 조선족 인구가 급증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기운과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북성, 산서성 등의 조선인들이 전통적인 피난지인 동북3성 일대로 이동한 것이며 후에 더 안전하게 코리아반도로 피난한 것이다.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이 대륙보다 더 안전했던 이유는 초기 명치유신의 일본제국은 대륙의 동남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일본은 대륙에서 북진한 이후 코리아반도를 점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 대륙의 주인이었던 조선인 특히 북인들이 하남성에서 하북성 등지로 하북성에서 동북3성으로, 동북3성에서 코리아반도 등으로 순차적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의 인구가 동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리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즈음의 조선 영토는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을 제외하면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강소성과 하남성의 일부, 절강성의 일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빠져나간 감숙성, 청해성, 섬서성 등에는 청인들이 터줏대감 행세를 하였을 것이며, 대륙의 나머지는 대부분은 북진해온 일본이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일본이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 일대만을 점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북으로는 청과 러시아가 찍어 누르는 것이며, 남으로는 일본을 사냥개로 앞세운 서세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수천년간 지구를 호령하다가 쓰러진 늙은 호랑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 할 수 밖에 없는 이치였으며, 그 주요 전장은 실제로는 동북3성 일대가 아닌 섬서성이나 하북성 등이었을 확률이 높다.

‘청·일전쟁’ 이후 ‘을미사변’이 발생한 뒤 친일내각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일본과 적대적인 러시아에 의지하며 ‘아관파천’ 했으나, 일본에 의해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경운궁으로 환궁했다는 것은 단순히 황궁 혹은 왕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일본에 의한 강제 천도를 말한 것이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 천도된 경운궁은 아마도 당시 대한제국의 영토 최남단인 강소성의 남경이었을 것이다. 역사 내내 북방계 민족인 조선의 군주는 대륙의 북부지역에 위치했었지만, 일본이 고종의 러시아로의 아관파천을 목격하고서는 조선과 러시아와의 밀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등의 일본 본거지와 가장 가까운 곳인 강소성 남단에 고종을 가두어 놓고 감시한 것일 테다.

경운궁 환궁 즉 대한제국 이후의 신식군대 사진자료를 보면 대한제국 군인의 얼굴이 전통적인 조선인의 얼굴과 달리 대륙 남방계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훗날 상해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이유 역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도에서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고.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부 서인계가 포함된 대부분의 북인계열일 것이며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로 이주해온 이들도 대부분 전통적인 고려계 조선인인 북인계열이다. 양자강 이남의 왜와 가까운 남인들은 훗날 대부분 일본이나 중화민국에 가담하여 대륙의 주인들인 북방계 조선인들을 도륙하는 역할을 했겠지만, 강소성의 남경이나 상해 등의 남인계 대한제국인은 일부 예외였던 것이다.

현대중국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 손문은 광동성 출신이고 장개석 절강성 출신이며 모택동은 호남성, 등소평은 사천성 출신이다. 이들 모두 양자강 이남이나 그 언저리의 남방계 족속이다. 이들이 한족 혹은 화하족 등으로 스스로를 칭한 짱깨들인데 이들의 출신 지역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이들은 본래 황하강 이북에는 거주한 적이 없는 족속들이다.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에도 황하강 이북에는 조선인과 청의 유민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3·1운동도 코리아반도의 천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륙의 천안인 북경에서 발생하여 조선인이 거주하던 온 대륙과 동북3성, 코리아반도까지 퍼져 나갔던 구국운동일 확률이 높다. - 북경 천안문에서 시위하는 현대중국의 시위 기저는 족속은 대거 교체되었지만 그 문화적 전통은 일부 남아있는 현상이라 본다.

일제강점기에 대륙에서 조선/한국독립군이 활동한 지역은 모두 본래 조선의 땅이지 현대중국의 땅이 아니었다. 장개석 등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이 옛 백제의 땅이요, 대륙전체가 조선인의 역사무대라고 설명했음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엄청난 민족이동과 일본의 폭압적인 통치로 인해 그 첫 세대의 조선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동성 출신의 손문도 그렇지만 절강성 출신의 장개석은 출신 성분이 매우 불분명한 짱깨다. 장개석은 열도일본이 아닌 자신의 고향 부근에 있었을 대륙의 일본사관학교를 나왔을 것이며 오히려 모택동 세력 보다 일본에 대해 더욱 유화적이었는데, 이는 정치적 노림수는 물론이며 장개석의 개인적 혈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하니 화하족 혹은 한족은 실체가 없는 민족이다.

장개석의 절강성이나 모택동의 호남성, 등소평의 사천성 등의 족속은 동일한 민족이라 보기에는 그 문화의 공유 정도가 미개했던 것이며, 과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모두가 국난시의 골칫덩어리 남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역사 내내 조선과 동남아의 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족속들이며, 이러한 사실들을 잘 꿰고 있던 서세가 결국 이들을 매개로 조선을 도륙한 것이다.

이러한 미개한 일본 쪽바리와 중화민국 짱깨들이 번갈아 황하강 이북을 점령하고서 양자강 이남의 남방계를 집단 이주시켜, 미처 동북3성이나 코리아반도로 피난하지 못했던 조선인을 학살 또는 동화시켰을 것이며, 청의 유민을 끌어안음으로써 대륙의 역사를 청의 역사로 날조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세는 보다 손쉽게 통제 가능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세력다툼을 관망하였고, 의외로 자신들에게 거칠게 저항한 절강성과 복건성, 광동성 등지의 일본과 왜는 오키나와를 지난 왜의 다른 근거지인 열도일본으로 쫓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현대중국은 코리아전쟁 당시 대륙 내에 남은 조선인을 위주로 지원병이란 명분으로 총알받이화 한 것이니, 일본과 현대중국의 근본은 다른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보편적 역사대로라면 동북3성은 청의 뿌리인 만주족의 터전이어야 하는데, 왜 그 곳에 청인 혹은 만주인은 없고 조선인만 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동북3성은 본래 만주가 아닌 조선의 종교지역이었으므로 승려나 피난민을 제외하고는 주민이 거의 없는 곳이었고, 본래의 만주는 카자흐스탄과 남러시아 등의 중앙아시아 북부 초원지대이므로 만주족과 청인은 그 곳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남북 간의 평화, 통일 문제를 그냥 남북 간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은 400년 전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아주 긴박한 대결구도가 형성되어왔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냉전의 대치선으로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사적인 대결구도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지금도 그 대결적 질서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 공백으로 인한 과는 차치하더라도 긴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혜안은 아주 정확했다. 물론 진실된 대륙조선사를 인지하고 발언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해양세력’을 ‘왜양일체’로 바꾸고 ‘대륙세력’을 ‘대륙조선’으로 바꿔 읽어보면 발언의 요지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조선족 동포들을 포함한 우리 민족의 모든 아픔은 이러한 긴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25. 조선왕조실록의 이상한 기록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후략)” - 태조 1권

달단(韃靼) 화척(禾尺)에게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 - 태종 11권

조선의 북쪽 국경이 달단과 접해 있으며 또 그 달단의 일부가 조선과 조선인에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달단은 무엇인가? 달단은 타타르다. 오늘날 이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인 카스피해 북부 볼가강 일대에 타타르스탄이라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그 시원을 13세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이 쓰여진 14세기~15세기 조선의 북계에는 달단이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 한반도 북부에는 달단이 없다. 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한정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래는 태조 이성계가 거느렸던 북방종족들이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 태조 8권

이렇게 나열하기도 쉽지않은 많은 북방종족이 태조 이성계를 따랐다고 하는데, 현재의 보편적 역사는 이 많은 종족들을 한반도 내에서 자생했던 종족이거나 한반도 북부의 국경지대에서 존재했던 세력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상식적으로 봤을 때 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반도는 저 정도 규모의 유목민이 생활할 수 있는 초원지대가 없으며, 이 역시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대륙 전체로 놓고 보면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또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북방종족들을 이끌고 조선의 동쪽과 서쪽을 정벌했다고 기록했는데, 조선이 한반도로만 한정되었다면 동쪽의 어디를 어떻게 정벌했을지 모르겠다.

래의 사료에서는 아주 적나라하게 조선이 천자(황제)국 임이 드러나는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신종호(申從濩)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사이(四夷)를 통치하시면서 공물[貢]을 바치지 않으면 명분을 닦고 왕(王)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는다 하였으니,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만둘 만한 것을 그만두지 않고 위험을 꾀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금수(禽獸)같은 무리와 이기고 지는 것을 비교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성종 252권

세조가 사이를 모두 통치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이라 하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의미한다. 사이가 모두 조선에 조공하여 왕으로서의 명분을 인정받았다고 하니, 조선이 북적에 해당하는 북방종족을 통치한 것 정도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 세종 1권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세종 36권

회회교 혹은 회교는 이슬람교를 말한다. 위와 같이 조선에는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의 대조회시 이슬람교도에 의한 이슬람식의 ‘회회송축’이라는 기도 의식을 행했음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이슬람식 의식을 즐겨온 세종이 백성과 신들의 우려와 반발의 뜻을 받아들여 이슬람식 행사를 폐지함을 말하고 있다.

또 위 사료에서 ‘숭유억불’ 사회인 조선의 조정은 기존의 일반적 조선인과 복식 문화가 완전히 이질적인 이슬람교도의 혼인정책을 장려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고 이를 기존의 일반 다수의 조선인들이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한반도에는 회교도와 회교인 혹은 회교 문화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기록 역시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가 아닌 대륙으로 가정하면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조선 지리를 살펴보면,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셨고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니, 강토가 날로 개척되어 8도(道)로 정하였으니 사방의 복판에 처한 것을 경기(京畿)라 하고, 서남을 충청, 동남을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을 전라, 정동을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永安 함경(咸鏡)),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경(京)이 둘이고, 부(府)가 넷,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넷, 목(牧)이 스물, 도호부가 마흔 넷, 군(郡)이 여든 셋, 현(縣)이 백 일흔 셋이니 안팎 산하(山河)의 세로와 가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동국여지승람 위 사료에 드러난 조선의 경기 지역은 동서남북 사방의 정 중앙임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의 경기 지역은 반도 남북의 중앙이긴 해도 동서의 중앙이 아닌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또 강원 지역이 조선의 정동이고 황해 지역이 조선의 정서라고 하니 경기의 좌측에 황해 우측에 강원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한반도의 황해는 경기의 좌측이 아닌 북쪽에 위치해 있다.

또 조선의 서남에 충청 지역이 조선의 동남에 경상 지역이 있기에 전라는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충청과 경상이 동서 방향으로 마주하고 그 이남에 전라 지역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반면 대륙에 조선의 8도를 놓고 보면 저러한 지리적 요건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사방의 정 중앙인 서울과 경기 지역을 장안(서안)과 섬서성 일대로 놓고 그 정서 지역인 황해를 티베트와 청해성 일부 등으로, 그 정동 지역인 강원을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으로, 서북 지역인 평안을 중앙아시아 부근과 신강성 일대로, 동북지역인 영안(함경)을 하북성과 동북3성 일대로, 서남 지역인 충청을 사천성 일부와 운남성, 귀주성, 광서성 등으로, 동남 지역인 경상을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광동성 등으로, 남쪽으로 치우친 전라를 해남성과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놓고 보면 조선의 8도 방위와 지리가 일치한다.

이렇게 보면 먼저 열거한 저기 위의 기록에서 태조 이성계가 거느렸던 무수히 많은 북방종족이 현재의 중앙아시아, 몽골, 시베리아 지역 등에 해당하는 유목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고, 실록에서 말한 조선의 회교와 회교인이 신강성의 위구르를 일렀음을 추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대륙 그 자체가 우리의 역사 무대임을 아래에 계속해서 기술해 보자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곽연성(郭連城)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인(野人)과 왜인(倭人)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藩籬)이고, 모두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王)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武力)을 사용기도 하고, 혹은 성식(聲息)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은 폐단 때문에 그들의 내부(來附)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즉위(卽位)한 이후에 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서 내부(來附)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모두 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 아니다.(중략) 흑룡강(黑龍江)·속평강(速平江)의 올적합(兀狄哈)과 화라온(火剌溫)·건주위(建州衛) 올량합(兀良哈)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 등 심처야인(深處野人)과 삼위달자(三衛撻子)가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그 종인(從人)을 줄여서 후대(厚待)하여 올려 보내라. - 세조 8권

야인과 왜인이 모두 조선의 신민이고 속지이며, 남만과 북적 모두 내부해오며 조선의 속지가 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이 천자국임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북적 즉 야인 지역은 현재의 중앙아시아·몽골 북부의 남러시아나 시베리아 지역이라고 추정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의 속지인 남만은 어디를 이르는 것일까? 이를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남만(南蠻)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日本國)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세조 27권

남만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으며 일본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가 조선의 전부라면 이 두 기록은 모두 틀린 것이 된다. 한반도의 정남쪽에는 남만은 커녕 그 어떤 나라도 없으며, 일본열도도 한반도의 동남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북쪽까지 뻗어 있으니 정동쪽으로 기록해야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기록은 반도의 정황이 아닌 대륙의 정황이며 나라 밖의 정황이 아닌 나라 안의 정황이다. 앞의 사료에서 왜와 남만이 모두 조선의 신민이며 번리라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래 부사 이원진(李元鎭)이 치계하였다. “차왜(差倭) 등지승(藤智繩)이 역관을 불러 말을 전하기를 ‘지난해에 귀국이 잡아 보낸 당선(唐船) 안에 과연 예수교도의 당 5인이 있었으므로, 도주(島主)에게만 광영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백(關白)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만(南蠻)의 섬라(暹羅) 사이에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에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마치 달자(㺚子)와 같이 생겼습니다.(후략)’ - 인조 46권

실록은 섬라가 남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라는 현재의 태국을 말한다. 오늘날 태국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으니 섬라가 속한 남만이 곧 인도차이나반도인 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 이 곳이 대륙에 있던 조선의 정남쪽이며, 곧 동국여지승람에서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 말한 조선의 전라 지역이다. 남만에 속한 섬라, 곧 인도차이나반도가 조선의 속지라는 기록을 몇몇 더 살펴보면,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乃)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 태조 3권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겁탈되어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 태조 6권

섬라 즉 태국에서 조선에 조공하던 기록들 중 조공 물품에 흑인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데, 더 흥미로운건 두 번째 기록에서 섬라 사절이 조선에 조공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일본에 이르렀다가 봉변을 당하고 다시 조선의 조정으로 돌아 왔다는 일화인데, 한반도만이 조선의 전부이고 일본이 열도에 위치했다면 섬라의 사절이 귀국길에 일본에 이를 일이 없다.

하지만 조선이 대륙 그 자체이고 섬라와 조선 조정 사이의 대륙 어느 지점에 일본이 위치했다면, 섬라의 사절은 귀국길에 반드시 일본을 거쳤어야 했을 것이다. 앞의 세조실록 사료에서 남만은 조선의 정남쪽에 있고 일본은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적용하면 일본은 조선의 경상 지역이 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위치는 절강성과 복건성, 광동성과 강서·광서성의 일부 지역이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조선의 전라 지역은 조선의 충청 지역과 경상 지역 이남에 있다고 했으니, 조선의 중앙조정이 있는 경기 지역에서 전라 지역으로 육로와 양자강 등을 통해 이동하려면 반드시 충청 지역이나 경상 지역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일화는 인도차이나반도가 한반도에 조공하다가 돌아가던 길에 열도에 붙들려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닌, 전부가 대륙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조선과 남만의 관계가 그러하다면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어떠할까? 실록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 일기도(一岐島)의 중(僧) 건철(建哲)이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 갔던 남녀 2백여 인을 돌려보내고, 이내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말하였다. “먼 곳에서 정성을 표합니다.” - 태조 3권
일본국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의 사자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중 범명(梵明)과 함께 와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남녀 659명을 돌려보냈다. 또 범명이 원숭이를 바치니, 사복시에 두게 하였다. - 태조 6권
일본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중 원정천(原正泉) 등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국 일향주(日向州) 사람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국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와서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다다량(多多良)이 사람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日本)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과 감자(柑子)·매화(梅花)를 각각 한 분(盆)씩 바쳤다 - 정종 5권
일본국(日本國) 사자(使者) 12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5권

일본이 조선에 조공한 기록은 일일이 나열하기 귀찮을 정도로 방대하게 남아있다. 그 중 한가지 흥미로운 기록은,

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 정종 2권

일본 관리가 조선에 내놓고 스스로를 백제의 후손이라며 잘 봐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대륙 동남부의 일본 지역은 본래 백제에 복속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일본 지역은 위의 기록처럼 소수의 백제계와 다수의 대륙왜인들이 어우러진 사회였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광동성과 광서성 등의 지역에 ‘백제향’ 이라는 지역명 등이 남겨져 있는 것과 일본사관학교 출신의 장개석이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이 옛 백제의 땅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번리에 해당하는 속국이었다면 왜는 무엇일까? 일본과 왜의 관계는 어떠할까? 일본과 왜는 정말 원래부터 같은 집단이었는지를 실록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중략) 처음에 삼도(三島) 왜구(倭寇)가 우리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무인년에 태상왕이 명하여 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었는데, 박돈지가 명령을 받고 일본에 이르러 대장군과 더불어 말하였었다.

“우리 임금께서 신에게 명하기를, 우리 중외(中外)의 군관(軍官) 사졸들이 매양 청하기를, ‘육지에는 진수(鎭戍)를 두고 바다에는 전함을 준비하여,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시석지간(尸石之間)에 붙여 초췌(憔悴)하고 노고하기가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른 것은, 삼도왜구(三島倭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신 등은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내어 삼도를 쳐서 도적의 남은 무리가 없게 하고, 우리 국가에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한다. 대장군이 오래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평소에 위엄과 덕망이 있어 삼도지경(三島之境)에 미치니, 감히 군사를 가만히 행하여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하를 보내어 좌우(左右)에 고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이 정(精)한 병갑(兵甲)과 엄한 호령으로 어찌 삼도의 도적을 제압하여 이웃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겠는가?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 정종 1권

위의 기록은 조선 통신관과 일본 대장군의 대화인데, 조선이 삼도에 할거하는 왜구를 일본에게 소탕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다.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일본국(日本國) 대상국(大相國)이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배타는 일을 정파(停罷)할 것을 의논하였다. - 정종 2권

일본은 지속적으로 왜를 소탕한다. 당시의 일본과 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륙의 동남부 조선의 번리 속국이며 왜구란 도서의 해적 집단들을 이르는데, 이들이 삼도왜구라 불린 이유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필리핀의 필리핀제도 등의 세 제도에서 주로 할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주로 필리핀제도를 통해 대륙의 동남해안인 절강성, 복건성 등을 주로 침략했을 것이기에,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명치유신 이전까지 무인정권인 막부 체제가 수백년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명을 받는 번리 속국인 일본막부의 정권 존재 이유 자체가 왜적 방어에 있었지만 이 일본인의 본질 역시 대륙왜인이므로 왜의 힘이 강성해지면 왜에 투항하여 도리어 조선을 공략하는,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들이었을 것인데, 이러한 역사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사다. 임진왜란 직전의 전국시대는 일본과 왜의 결합 혹은 투쟁 과정이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의 강호막부는 조선의 힘에 의한 전후정리에 해당할 것이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오량합(吾良哈)의 사람들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東班)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西班)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從者)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 태조 2권

유구 국왕(琉球國王) 상원(尙圓)이 범경(梵慶)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는데,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유구 국왕 상원(尙圓)은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엎드려 아룁니다. 삼가 우리 작은 부용(附傭)의 나라를 큰 섬이라고 여겼었는데, 근래에 일본(日本)의 갑병(甲兵)이 와서 빼앗고자 하므로, 이로 인하여 전사(戰死)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후략)” - 성종 279권

유구는 현재의 대만과 오키나와 등을 말하는데, 위의 실록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유구 역시 조선에 공손히 조공하던 나라이며, 일본의 무도함을 조선 국왕에게 극진히 엎드려 고하고 있으니, 대륙의 패자가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유구를 침략하여 땅을 빼앗은 무도한 일본 역시 수천리 바다 건너의 열도가 아니며 뱃길로 몇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는 복건성 일대에 있던 일본을 말했을 것이며,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조선의 조정 역시 한반도로만 한정된 작은 나라가 아닌 대륙의 지배자를 일렀던 것일 테다.

참고로 정유재란 중 왜군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왜국에서 환란의 세월을 보낸 조선인 강항은 '왜국지도'를 필사했는데, 그 지도 속의 왜국은 분명 오늘날의 일본열도처럼 남북이 긴 제도가 아닌 동서가 긴 제도인데, 이는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는 먼저 허의후(許儀後)를 통하여 역시 왜적의 음모를 듣고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유구(琉球) 등과 결합하여 병사를 합쳐 일본을 정벌하여 무찌르도록 하였다. - 선조 27권

위의 기록 역시 임진왜란의 주요 전장이 한반도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사료인데, 한반도와 열도의 전쟁에 수천리 건너의 유구라는 대만 군대나 만리 건너의 섬라라는 인도차이나반도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주요 전장이 복건성과 광동성 등의 지역이었다면 그와 지리적으로 밀접한 유구와 섬라의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아주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이 대륙 그 자체였을때 그 군대들을 동원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놈들이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아무리 숨기고 가리려 했어도 그 판때기가 너무나 커 다 가릴 수가 없다. 결국엔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26. 동북아의 역사가 세계사였다는 기록들

쭝궈사에 빈번히 쓰이는 ‘북로남왜(北虜南倭)’ 역사 용어가 있다. 다 아시겠지만 이는 북녘 북(北) 오랭캐 로(虜), 남녘 남(南) 왜적 왜(倭)가 더해진 용어로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를 뜻하며, 이들 ‘북로남왜’가 명나라 때 동아시아대륙의 남과 북에 외환을 안겨줬음에 기인하여 생성된 용어이다.

그런데 역사 기록에 이 ‘북로남왜’가 조선의 남과 북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또 왜구는 현재의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일본열도에 있어야 하는데, 왜 동아시아대륙의 남쪽에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모순들을 아래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국(日本國) 사자(使者) 12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5권
왜인(倭人) 정대량(井大良) 등 3명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문종 9권
기남보국(紀南寶國)의 객인(客人)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왜놈[倭奴]의 별종(別種)이었다. - 태종 11권
자바국[爪蛙國] 아열(亞列) 진언상(陳彦祥)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쳤으니, 유구(琉球)의 별종(別種)이었다. - 태조 23권
유구 국왕(琉球國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전(箋)을 받들고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王世子)에게 예물을 바쳤다. - 정종 6권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乃)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 태조 3권

실록의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의 조공국들인데, 이에 일본과 왜구는 물론 자바(말레이시아?), 유구(대만? 오키나와?), 섬라(태국?) 등도 포함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의 세력권이 동아시아 전체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는 ‘북로남왜’의 남쪽의 왜라 하면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말했던 것이며, 왜구가 동아시아대륙의 남쪽에 있었다면 당시의 일본 역시 동북아시아 지역의 열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열도가 일본 혹은 왜구였다면 이들은 ‘남왜’가 아닌 ‘동왜’로 불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방의 왜구들은 명나라와 조선에 동시에 조공하였나?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천하에 천자는 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올량합 만호(兀良哈萬戶) 낭보아한(浪甫兒罕)과 대호군(大護軍) 낭이승거(浪伊升巨) 등 1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야인 부만호(野人副萬戶) 가을헌(加乙軒)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알타리 만호(斡朶里萬戶) 동망내(童亡乃) 등 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여진(女眞)의 지휘(指揮) 권아룡(權阿龍)과 부사정(副司正) 김자라로(金者羅老) 등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세조 6권

‘북로’ 즉 북쪽의 오랑캐 역시 조선에 조공했다는 기록들이다. 이들 역시 조선과 명에 동시에 조공하였을까? 아니다. 명이 만약 천자국이고 조선이 제후국이었다면 조선은 조공을 받을 권리가 없다. 조공은 천자국에게 행했던 명분이었기 때문에 제후국과 번국의 의무이지, 권리가 아니다.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당연히 천자국에게 정벌 당하게 된다. 그러하니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이 천자국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곽연성(郭連城)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인(野人)과 왜인(倭人)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藩籬)이고, 모두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王)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武力)을 사용기도 하고, 혹은 성식(聲息)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은 폐단 때문에 그들의 내부(來附)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즉위(卽位)한 이후에 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서 내부(來附)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모두 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 아니다.(중략) 흑룡강(黑龍江)·속평강(速平江)의 올적합(兀狄哈)과 화라온(火剌溫)·건주위(建州衛) 올량합(兀良哈)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 등 심처야인(深處野人)과 삼위달자(三衛撻子)가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그 종인(從人)을 줄여서 후대(厚待)하여 올려 보내라. - 세조 8권

위 사료에는 조선은 북쪽의 야인 북적과 남쪽의 왜인 남만을 모두 통치하는 천자국임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아래에서 계속 보면 조선이 천자국이며 명의 역사는 짝퉁임이 보다 선명해지는데,

오도리(吾都里) 천호(千戶)·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건주위(建州衛) 백호(百戶) 각각 1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27권

건주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건주위란 무엇인가? 보편적 사관대로 해석했을 때 건주위란 명대에 만주 길림 지역에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명나라가 설치했던 지방행정 단위라 한다. 그런데 그 건주위에서 왜 조선에 조공을 한단 말인가? 조선이 명이란 말인가?

이렇듯 ‘북로남왜’라는 것은 대륙에 있던 조선의 남과 북에 위치한 오랑캐와 왜구를 일렀던 것이며, 현재의 명사(明史)는 짝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전체가 근세조선의 세력권이었다면 세계사적 흐름에서 비추어 볼 때 조선의 위치는 어디 정도가 되었을까? 아래의 사료에서 그 천하제일의 지위에 있었던 조선이 확인된다.

정덕(正德 : 명 나라 11대 임금 무종(武宗)의 연호, 1505~1521) 이전에 포도아(葡萄牙)의 가노(嘉奴)라는 사람이 품청(稟請)하고 배 5척으로 동쪽으로 행하여 빙 돌아서 서쪽에 이르러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갔다. 돌아가는 날에 임금이 은으로 주조한 소지구(小地球)를 하사하였는데, 그 위에 각자하여 이르기를‘처음 지구를 돌아보고 돌아간 사람이 가노이다.’하였다. 지금은 바닷길이 더욱 익숙하여 서양의 선박이 동으로부터 서로 가거나 서쪽에서 동으로 돌아 지구를 돌기도 하는데, 8~9개월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으니, 모두 앞사람들이 발명한 공이다. - 추측록 6권

16세기 포르투갈(포도아)인 가노가 조선임금에게 의견을 여쭙고 청하여 지구 항해를 했으며, 조선임금이 그에게 소지구를 하사하며 치하했다는 기록이다. 이는 당시 조선임금이 세계를 관할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아래의 조선관원과 영국인과의 대화가 기록된 사료에서도 조선의 세계사적 최고 지위를 알 수가 있는데,

“너희들은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 거주하는가?” 
“우리나라 이름은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하고, 난돈(蘭墩 런던)과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이웃 나라에 소영국(小英國)이 있어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인가?”
“있지 않습니다. 세 나라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황상(皇上) 한 분이 주관하기 때문에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나라의 이름은 무엇 무엇인가?”
“영국, 애란국(愛蘭國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 스코틀랜드)입니다.”
“황상 한 분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 영국 임금입니다.”
“너희 나라에서도 대청(大淸)을 아는가?”
“북경(北京)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서로 통상하며 또한 가져다 바치는 것이 있는가?”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청에 가 교역하는데, 두 나라가 고루 크고 세력이 같으므로 진공(進貢)하지 않습니다.”
“군신(君臣)의 분별이 없는가?”
“흠차(欽差)가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단 아래에서 고두례(叩頭禮)를 행하지 않습니다.” - 연원직지 1권

순조 32년(1832년)에 기록된 위의 대화에서 영국인은 영국과 청은 교역을 할 뿐 조공(진공)은 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영국과 청의 대등한 위치를 설명했는데, 그러한 영국이 조선에 대해서는,

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이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치계하였다. 수본에 아뢰기를, “영길리국(英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국 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 - 정조 38권

위의 기록처럼 조선에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위의 기록들은 조선과 청 중 힘의 우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있은 사료일 텐데, 그렇다면 그 청은 어디에 있었을까? 정말 오늘날의 동북3성에서 일어난 쭝궈의 선대 국가였을까? 연원직지의 조선관원과 영국인의 대화 기록을 이어서 보면,

“영국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되며, 우리나라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북경과의 거리는 약 7만 리인데, 수로(水路) 4만 리에 육로 3만 리이며, 귀국과의 거리는 수로로 7만 리입니다.”

“너희 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

“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프랑스), 둘은 품송(品松 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 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 오스트리아)입니다.” - 연원직지 1권

위의 기록에서 영국에서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4만 리이며 영국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7만 리라 하였는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청의 북경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3만 리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쭝궈대륙의 청과 한반도의 조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쭝궈의 북경에서 한반도까지의 수로는 길게 잡아도 3천 리 정도가 될까 말까인데, 3만 리라니?

영국에서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4만 리, 청의 북경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3만 리. 청의 북경과 조선의 거리는, 영국과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와 엇비슷할 정도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니 당시 조선이 한반도로만 한정된다고 하더라도 청은 동아시아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이 동아시아대륙 전체에 걸쳐 있었으니 그 청나라는 어느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라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청과 그 이전 몽고의 원 모두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이를 아래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 문견잡기 이 기록을 보면 몽고인은 오늘날의 몽고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은’ 색목인(백인종)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청인은 몽고인과 아주 다르게 생겼으니 황색인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청나라에서는 청인은 몽고인을 아주 하대했었던 기록을 보면, 청나라는 청인(황인종)과 몽고인(색목인 백인종)이 공존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보편적 사관에 대입해 볼 때 청이 일어났다는 동북3성 지역이나 쭝궈대륙에는 백인종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청은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나라가 아니다. 오늘날 황인종과 백인종이 공존하는 지역은 투르키스탄 즉 중앙아시아가 있을 뿐이다. 아래에서 계속 보면,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48부(部)의 왕이 해마다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나라 풍속이 귀천이 없이 다 누런 옷을 입는데 황제의 의복 빛깔과 같다. 건륭(乾隆)이 황화요(黃花謠)를 듣고부터는 더욱 견제하고 있다 한다. - 삼전고 2권

몽고가 달단이라는 기록이다. 몽고가 색목인이므로 달단도 색목인이다. 달단은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남부 볼가강 부근에 타타르스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지역은 투르키스탄을 접하고 있다.

몽고(蒙古)는 곧 원(元) 나라의 유종(遺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타타르)이다. 동쪽은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북은 장성(長城) 밖을 따라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이르는 사이가 모두 그들의 소굴이다. 우리들의 역로(歷路)로 말하면 산해관 이동은 몽고 지방이 가장 가까운데 큰길에서 먼 것이 50리에 불과하다. 청인(淸人)에게 복속(服屬)한 것이 모두 46부(部)인데, 청인이 처음 일어나자 그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와서 붙은 것이었다. 청 나라에서는 특별히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여 이들을 영솔하는데 상서(尙書)와 좌우시랑(左右侍郞)을 두기를 한결같이 육부(六部)의 제도와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청인과 몽고인으로 충당하여 출척(黜陟)ㆍ상벌(賞罰)ㆍ조회(朝會)ㆍ왕래(往來)에 관한 일을 맡기고 각각 그 땅을 지키게 한다. 세시(歲時)에는 직사(職事)를 맡은 대가로 말[馬]를 바친다. 청리사(淸吏司)에 속한 것 넷이 있는데, 그것은 곧 훈구(勳舊)ㆍ빈객(賓客)ㆍ유원(柔遠)ㆍ이형(理刑) 등으로서 각각 해당 낭중(郞中)ㆍ원외(員外)ㆍ주사(主事)가 나누어 다스린다. - 문견잡기

위의 기록 역시 몽고는 달단이며, 청나라에는 청인과 몽고인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청나라는 황인종(청인)과 색목인(몽고인)이 공존한 나라였다. 그리고 몽고의 위치에 관한 부분에서, 동쪽은 흑룡강에서 서쪽은 바다에 이른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몽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몽고가 투르키스탄 지역이나 볼가강 지역 부근의 러시아 지역에 있었다면, 그 서쪽은 흑해나 발트해와 같은 바다에 이르렀을 것이다.

강희(康熙)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大鼻㺚子)는 흑룡강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에까지 북쪽이나 서쪽이 모두 몽고의 영토이며, 그 넓이는 중국의 몇 갑절이나 된다. 서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ㆍ서ㆍ남ㆍ북의 황제라고 부른다. 황태극(黃太極)과 청태극(靑太極)은 중국 서남쪽에 있으며, 액라사(厄羅斯)라는 것은 곧 대비(大鼻)이고, 객이객(喀爾喀)이라는 것은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 - 성호사설 1권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몽고는 15세기 이후 멸망했다고 하니 그 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건만, 위의 기록에 보면 몽고는 청의 강희 재위 말기인 18세기까지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강대해 강희가 아주 염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토 역시 흑룡강과 중국(청?)을 기준으로 그 서쪽과 북쪽, 서남쪽까지 매우 광대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흑룡강의 위치다. 위의 두 사료에서는 18세기 까지 존속한 몽고와 청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흑룡강이라고 말하고 있다. 몽고는 흑룡강의 서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청?)의 서남쪽을 지배했다고 하니 몽고는 흑룡강 동쪽의 영토를 취하지 못했으며, 청은 그 몽고를 염려했으니 청의 영토는 흑룡강 동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흑룡강은 동북3성 북쪽에 있으며 아무르강이라고도 이른다. 18세기 당시에 기록된 흑룡강이 오늘날의 흑룡강을 가리킨다면, 18세기의 몽고가 흑룡강을 경계로 그 서쪽 끝 바다까지와 중국(청?)의 서남쪽을 지배하였다고 하니, 18세기까지 아시아 전체가 몽고였는가?

또 그렇다만 반대로 청은 흑룡강의 동쪽과 동남쪽이 그 강역이라는 것인데, 청은 동북3성과 한반도만을 다스린 나라였는가? 아니다, 조선의 사서나 문집에서 말하는 흑룡강은 오늘날의 흑룡강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많은 모순들은 역사조작을 위해 지명이 이식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사료에서 보면 몽고의 부족 가운데 흑룡강 북쪽에 대비달자라는 부족이 있는데, 이들이 곧 액라사라고 한다. 액라사는 곧 악라사이며 아라사라고도 한다. 이들이 오늘날의 러시아다. 그런데 이 액라사가 몽고의 한 부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몽고의 후예란 말인가? 아래에서 다른 기록들을 한번 비교하며 살펴보자.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인들은 극히 두려워하여 방수(防守)하기를 극히 엄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갑군(甲軍)이 반드시 따라다니나 오히려 제재하지 못한다. - 문견잡기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관소는 옥하관(玉河館)의 곁에 있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 높은 코에 천성이 사나워서 흔히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건륭(乾隆) 때 그중의 몇 사람을 찢어 죽이게 하였더니, 그 뒤부터 자못 두려워하여 규칙을 지킨다고 한다. 청인은 그들을 천하게 여겨 개돼지로 대우한다. 그 나라에서 나는 석경(石鏡)이 가장 좋다. - 계산기정 5권

위의 여러 기록들을 놓고 비교해 봐도 악라사는 몽고의 별종 중 하나이며, 푸른 눈에 붉은 수염, 높은 코와 검은 얼굴의 색목인(백인종) 혹은 서역인(서아시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고는 달단이며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의 색목인이며, 몽고의 별종인 악라사 역시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기른 색목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흑룡강을 경계로 그 서쪽과 북쪽에는 색목인이 살았으며, 그 동쪽인 청나라에는 청인(황인종)과 색목인이 섞여 산 것이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 유관잡록

위 기록으로 역사에서 말한 흑룡강의 위치가 오늘날의 흑룡강이 아님을 알 수가 있는데, 흑룡강의 북쪽에 위치한 악라사가 중국(청? 조선?)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흑룡강의 위치를 고려하면 매우 모순된 기록이 된다.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동북3성 지역은 청의 강역에 속하며 흑룡강 역시 동북3성 부근에 있기에, 흑룡강의 북쪽에 위치한 악라사는 청과 2만 리나 떨어져 있기는커녕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악라사가 현재의 흑룡강 북쪽 훨씬 바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2만 리가 터무니없는 것은, 오늘날의 흑룡강에서 북극까지도 2만 리가 채 못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흑룡강은 역사에서 말한 그 흑룡강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역사 속의 진짜 흑룡강은 어디일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실제의 흑룡강은 러시아의 볼가강이 그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위 사료에서 ‘혹룡강의 북쪽에 있는 악라사가 중국에서 2만 리나 된다’는 기록에서의 중국은 청나라가 아닌 조선의 중국(중앙조정)을 말한 것이기에, 섬서성의 장안에서 흑룡강(볼가강?)까지의 거리가 대략 2만 리는 되는 이치이다.

흑룡강의 위치를 볼가강으로 비정하면 몽고와 청, 조선의 위치와 강역이 대략 그려진다. 몽고는 흑룡강(볼가강?)의 서쪽과 북쪽, 청의 서남쪽과 동북쪽이 그 주요 강역이라고 했으니, 전통적인 러시아 지역이 된다.

청은 흑룡강(볼가강?) 동쪽과 동남쪽이 그 주요 강역이니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투르키스탄 지역이 된다. 또 그 청의 서남쪽도 몽고의 강역이라고 했으니 서아시아 지역의 일부 역시 몽고 강역이었을 것이다.

위 사료들에서 말한 몽고의 동쪽 경계는 흑룡강이며 서쪽은 바다에 이른다고 한 기록도, 볼가강이 실제의 흑룡강이었다면 저러한 기록과 지리가 서로 잘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흑룡강을 경계로 세력을 형성했던 몽고(달단)의 후예 타타르스탄이 볼가강에 존속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역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한 부족인 악라사가 세력이 강성해져 몽고를 재통일하며 러시아라 칭하고, 기존의 몽고를 작은 나라로 봉해버린 것이 러시아연방 내 타타르스탄일 확률이 높다. 오늘날의 보편적 사관에서 쓰여진 러시아사에도 러시아인이 달단(타타르)인을 학살한 것이 언급되고 있다.

볼가강(흑룡강?) 서쪽과 북쪽은 오늘날에도 색목인이 거주하며, 투르키스탄 지역에는 황인종과 색목인이 공존하거나 혼혈지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의 사서나 문집에서 말한 기록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연원직지에서 영국인이 말한 영국에서 청까지 수로 4만 리, 영국에서 조선까지 수로 7만 리라는 황당해 보이는 기록은, 투르키스탄에 있던 청에서 동아시아대륙에 있던 조선까지 수로로 3만 리를 의미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근세에는 아시아에 3개의 강대한 나라가 있었으니, 서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의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청, 동아시아의 조선이 그들이며, 해적 두목 영국이 조공하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이었으니,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의 중심은 조선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제대로 아시고 독립운동하시는가요?” - 장개석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아베 노부유키

이들의 발언에는 이처럼 무서운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리라.

끝으로 이익의 성호사설의 일부를 보면,

중고시대에 북적(北狄)에는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북호(北胡)의 종락(種落 같은 종족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잡다하여, 하(夏) 나라 때에는 훈육(獯鬻), 주(周) 나라 때에는 험윤(玁狁),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에는 흉노, 당(唐) 나라 때에는 돌궐(突厥), 송(宋) 나라 때에는 거란이라 하였다. 한 나라 때부터 흉노가 강성하였고, 흉노가 미약해지자 오환이 일어났는데, 한말(漢末)에는 선비가 오환을 멸하였다. 후위(後魏) 때에는 유유(蠕蠕)가 강성하였고, 유유가 멸망하자 돌궐이 일어났는데, 이정(李靖)이 돌궐을 멸하였다. 오대(五代)와 송 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그 작은 별부를 몽고(蒙古)라 하였는데, 뒤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에 들어와서 임금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설이 《통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흉노 이외에 다시 동호ㆍ거란ㆍ오환 등이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동호의 후예인데, 어찌 거란을 흉노라고 지적해서야 되겠는가?원(元) 나라 이후로는 몽고가 가장 강성하여 북막(北漠)을 겸병(兼倂)하였으므로 사적(沙磧 사막)에서 요동 지경까지를 모두 몽고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 가운데에도 저(氐 전연(前燕))는 바로 서융(西戎)이고, 갈(羯 후조(後趙))은 바로 흉노의 별부이다. - 성호사설 11권 동호, 오환, 거란, 선비가 몽고의 조상으로, 이들은 모두 색목인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