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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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는 고대 중앙 아시아의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중반 경 ~ 기원전 1세기 중반 경, 북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과 그 국가를 이른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이 언제부터 등장했고 어느 인종 계통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만 해도 월지는 원래 중국의 감숙 성의 서부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역사
기원 전 3세기 중반 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당시 힘이 약한 흉노를 압박하고 인도에도 진출할 정도로 강세를 유지했다.
이후 사기에 따르면,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대패하여 중앙 아시아로 쫓겨나면서, 월지 지배하에 있던 서역의 나라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이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은 대월지(大月氏)라고 명칭을 변경했다고 하며, 남아 있던 부족들은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원 전 162년 묵돌(冒頓)의 아들,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왕이 살해되었다. 이때 노상 선우는 패배한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이 만들어졌다. 패배한 월지는 더욱 서쪽의 아무르강(阿母河) 주변 소그디아나로 쫒겨나고, 이어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중계 무역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때,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쿠샨 제국을 건국한다.
기원 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더이상 싸우고 않고 평화롭게 살고싶던 대월지는 단호히 동맹을 거절한다.
이후 기원 전 1세기 중반, 강대해진 토하라인의 쿠샨 제국(귀상)이 월지 땅을 지배하면서 동서교역도 지배하면서 대월지는 쿠샨 제국에게 동화되면서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이 쿠샨 왕조도 대월지라고 불렀다.
소월지는 강족, 한족과 섞여 살았으며 의복, 음식, 언어는 강족과 비슷했다. 크게 7개 부족이 있었는데 황중(湟中), 영거(令居) 일대에 살았다. 장액군(張掖郡)의 수백 호는 의종호(義從胡)라 불렀다.[1]
토하리인과의 관계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보고 있고, 고문헌의 토하라인(Tocharians)과 같거나 긴밀히 연결된 종족으로 믿고 있다. 중앙 아시아 연구가인 르네 그루쎄는 당시 중국 문헌과 서방 측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라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당시 그리스의 사가 프톨레마이오스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의 침략 민족을 토카로이(Tokharoi)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때는 월지가 대하를 정복하고 대월지를 세운 때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르네 그루쎄에 따르면 감숙 성에 남아있던 소월지는 이후 쿠차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당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실크로드 지역 최동부의 인도유럽어족 국가로 남아 있었다.
《사기》 〈대완열전〉에서의 언급
본래 월지국(월씨국)은 중국 감숙 성의 둔황과 기련산 사이에 나라를 세웠으나, 흉노가 묵돌(모돈)이 선우(단우)가 되고 강성해진후 그 아들 노상선우에게 패해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다. 서쪽에 정착한 대월지의 남쪽에는 대하, 서쪽에는 안식(파르티아), 북쪽에는 강거가 있었으며, 동쪽 3천리 떨어진 곳엔 대완(대원)이 있었다. 한무제가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할 당시의 흉노 영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염택(로프노르 호수)의 동쪽에서부터 한나라의 농서(섬서 성 서쪽)의 장성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강족(티베트, 사천 성)에 접하여 한나라의 서쪽 진출을 막고있는 형세였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