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상(BC69-356)

<펌> 탈해 이사금 (57-80 재위) - 위키백과

Chung Park 2019. 6. 24. 11:32

탈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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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
지위
신라의 제4대 국왕
재위 57년 ~ 80년
전임자 유리 이사금
후임자 파사 이사금
이름
석탈해(昔脫解)
신상정보
배우자 아효부인(阿孝夫人)

탈해 이사금 (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재위: 57년~80년)은 신라의 제4대 국왕으로, (姓)은 (昔)이고, 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생애

출생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1]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 먼곳에서 왔다고 하며 북방 신화가 강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고구려 남쪽의 함경도,연해주 또는 우산국(울릉도)출신이라는 추측 설과 캄차카 반도 또는 인도에서 왔다는 추측 설 그리고 자신을 신성시하기 위해 동해 북쪽 멀리에서 왔다고 하며 용궁 전설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역사에 기록된 도이의 입구에서 보이듯이 고려인과 여진족계의 해적이 일본 큐슈 지방을 침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연해주와 남만주 지역의 한민족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그때 당시 왜국은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북 큐슈(九州)에 있다고 보는데 그 북 큐슈에 있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가 연해주와 남만주 지역이기 때문이다.

 

석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성국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캄차카 반도의 부족인 이텔멘 부족(Itelmens)의 신화에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을 보아 석탈해를 캄차카 반도에서 기원한 "이텔멘(Itelmens)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2] 

 

또한 석탈해가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로 보고 허황옥 신화처럼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월지족이 인도의 불교를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전파한 것을 신화로 나타냈다는 설이 있다.[3][4]

 

치세

24년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년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이 탈해 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 명정도의 군사를 내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또한,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늘 먼저 굴복하였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기록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5]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사후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6]

탄생 신화

탈해 이사금은 신라 제4대 왕으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다.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현재 영일(迎日) 지역)에서 고기잡이 할머니 아진의선이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8년(남해왕 5)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능은 양정(壤井, 경주 북쪽)에 있다.

가계

월성 석씨 선원세계도와 신라 김씨 선원세계도 등에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의 처가 되었다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의 이름은 강조(康造)라 기록되어 있는데 석탈해의 월성 석씨 족보에서는 강조(康造)가 아닌 구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광은 가야국왕 김수로왕의 딸의 이름이다. 즉 석탈해는 수로왕과의 관련성이 보아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성 석씨의 선원세계도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달라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에게 출가한 딸들이 각각 더 있었다.

 

같이 보기

탈해 이사금 등장한 작품

각주

  1.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탈해 이사금 條>
  2.  《오마이뉴스》(2011.1.21.)
  3.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 즉 ‘태양국(太陽國)’으로 당시 타밀인 나라 촐라 왕국의 별명이다. (《뉴스메이커》(2006.8.11.)) -판드야
  4.  《뉴스메이커》(2006.8.11.)
  5.  이 일은 삼국사기 거도 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확한 연대는 동사강목과 동국통감에 의거한다.
  6.  '벌휴이사금' -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