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상(BC37-AD 391)/차대왕 - 봉상왕 (146-300)

<펌> 신대왕 (165-179 재위) - 위키백과

Chung Park 2019. 6. 25. 04:58

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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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신대왕
高句麗 新大王
지위
고구려 제8대 군주
재위165년~179년
전임자차대왕
후임자고국천왕
부왕고재사(高再思)
이름
고백고(高伯固)
신상정보
부친고재사(高再思)

신대왕(新大王, 89년~179년, 재위 165년~179년)은 고구려의 제8대 군주이다. 첩치가(妾置家)를 하였던 고추가 고재사의 서자(庶子)이며 태조왕(太祖王)과 차대왕(次大王)의 이복 동생이지만 태조왕과는 터울이 42살까지 나므로 이복 동생이 아니라 태조왕의 아들[1] 또는 차대왕의 아들[2]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의 이복 동생으로, 〈후한서 後漢書〉에는 차대왕의 아들로 나온다.

신채호에 의하면 차대왕, 신대왕, 인고(仁固) 3형제는 태조왕의 이복 동생이 아니라 서자라고 한다.[3] 는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이다.

생애

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 165년에 명림답부(明臨荅夫)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가계는 기록마다 서로 상이하며 삼국사기 내에서도 서로 다른 대목이 있어, 다소 불확실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신대왕은 태조왕의 이복 동생이지만 후한서에 의하면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들이라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그의 아들 산상왕의 이름이 위궁이며 태조왕의 증손자라 하여 가계가 서로 맞지 않는다. 위궁을 그의 아들 산상왕이 아닌 손자 동천왕으로 비정한다 해도 태조왕과 그의 관계가 형제가 아닌 부자로 설정해야 맞게 된다. 신채호는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보았다.


신대왕은 166년, 좌·우보(左·右輔)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임명하였으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후한(後漢)의 현도태수가 침공해 들어와 항복하였으며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4] 172년에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76년에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으며 179년 음력 12월에 91세로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 이복 형 혹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 태조왕
  • 이복 형 혹은 아버지 : 차대왕
    • 장남 : 고발기(高拔奇) - 신대왕의 맏아들로 어리석다고 하여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 차남 : 고남무(高男武) - 고국천왕
    • 3남 : 고발기(高發岐) - 신대왕의 셋째 아들로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켰다가 자살하였다.
    • 4남 : 고연우(高延優) - 산상왕
    • 5남 : 고계수(高罽須) - 신대왕의 막내아들로, 형인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대에 장수로서 활약했다.

각주

  1.  진수, 《삼국지(三國志)》, 3세기 / 신채호는 차대왕, 신대왕, 인고가 태조왕의 서자라고 주장했다.
  2.  범엽, 《후한서(後漢書)》, 5세기.
  3.  신채호,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48.
  4.  이 시기에는 실제 공손도가 요동에 세력을 잡기 이전으로, 이 기록은 오기로 보고 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