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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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19. 8. 29.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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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원삼국시대

 

옥저 (沃沮)
(매구루, 치구루)

▲옥저와 주변국 지도
존속기간
기원전 3세기 ~ 244년(기원후 3세기)
(기원전 8세기)[1]
위치
함경도일대
간도
연해주
군주
군장 (읍군, 삼로)
종족
언어
사건
남옥저 위만에 의해 복속
한사군 편입
북옥저 주몽에 의해 복속
동옥저 태조왕에 의해 복속[3]
성립 이전
부족사회
멸망 이후
1. 개요2. 역사3. 주변국과의 관계4. 풍속5. 기타
 

1. 개요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까지 함경도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던 부족 국가 집단이다.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 등이 존재했으나 남옥저는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에 의하여 멸망했다.

2. 역사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합병된 뒤 세워진 한사군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과 합쳐졌고 이 중 7현을 낙랑군이 담당하였으나, 후에 한사군이 폐지된 뒤 7현이 독립하면서 부조현은 옥저로, 나머지 6현은 동예로 귀속되었다. 두만강 유역과 함흥 평야가 이들의 영역이었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했고, 영역이 동해 바다 연안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여 주변국에 조공하였다.

옥저에 대하여 학계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3옥저설(남옥저, 북옥저, 동옥저)이고 나머지 하나는 2옥저설(남옥저, 북옥저)이다. 4세기 후 옥저는 동예처럼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아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했으나, 대외적으론 고구려의 내지로 인식되면서 사라진 세력이 되었다. 어차피 중세 시대까지도 조선 왕조 이전에는 지방 수령이 그 고을 토호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미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중국 정사인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동옥저(東沃沮)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연해주 남부 내륙과 동해안 지역(함경도 포함)에 등장한 얀콥스키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 이후 연해주 남부, 수분하 유역, 동북한 지역에 위치한 단결 문화 / 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비정한다.

최씨낙랑국 미스테리와 관련하여, 최씨낙랑국의 정체를 조선과 낙랑군에 복속하였던 옥저의 일파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

3. 주변국과의 관계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주몽(동명성왕)이 개국 공신인 부위염을 보내어 정벌하였고, 마지막으로 동옥저는 신라국과 잠시 조공 관계를 맺었다가 57년 태조왕에 의해 정벌되었다. 이후 북옥저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가,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을 벌일 때 고구려의 동천왕이 북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복속되었다.

4. 풍속

한국사 교과의 고대사 파트에서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 약혼을 한 뒤, 신부가 신랑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신랑이 신부 집에 예물을 건네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민며느리 제도[6]와 시신을 산에 안치해두었다가 뼈를 추스려가는 골장제[7] 풍속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옥저가 언제 고구려에게 흡수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혼인, 장례, 특산품, 정치 제도가 옥저에 대한 문제로 출제된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構婁, 동옥저전), 매구(買溝, 관구검전), 미구루(味仇婁, 광개토왕비) 등으로도 불렸으며, 그 중심지는 훈춘(琿春) 일대로 추정된다. '구루'는 '골', '홀'처럼 성(城)을 뜻하며, 곧 치구루나 매구루가 고구려의 책성(柵城)이다.

5. 기타

  • 일설에는 여진족의 일부인 와지가 이들의 후손이라 한다.
  • 마종기 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도 주제로 등장한다.
  • 얀콥스키 문화의 기원전 8세기 ~ 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 ~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
  • 얀콥스키 문화 이후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유적에서는 한민족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된다.
 
[1] 고고학으로 확인했을 경우.[2] 삼한여진 등[3] 신라와 함께 조공도 하기도 했다.[4] 고구려로 다수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당대 고구려와 낙랑군의 위치상 최리가 있을 만한 가장 적절한 장소가 과거에는 옥저로서 독립적인 국가였고, 이후 고조선과 낙랑군 치하에서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 반독립적 형태의 국가로서 낙랑군의 위세만을 빌어 쓴 소국이었을 가능성 제시.[6] 현대의 연구에서는 견해가 좀 다르다.[7] 세골장이라고도 불리며, 가족 공동 무덤이라는 해석도 있다.[8] (동아시아 고대 철기 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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