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년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천문령에서
무주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천문령 전투 기록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록이 굉장히 별 것 없다.
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당군은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比羽不受命,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象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삭구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이 2가지가 천문령 전투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대조영에 대한 기록이 워낙 부족하고, 천문령 전투 기록은 더 별 것 없다. 여기에 뭔가 더 붙는 부분은 모조리 추측.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 당한 후 고구려의 유민들은
당의 감시를 받으며 여러차례 옮겨졌으며
대조영이 이끄는 집단은 당나라의 성방
[4] 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당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한 후였고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킬것에 우려하여 그들을 감시하였는데 이로 인해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696년, 상황이 급변하였는데 당시
거란족의
이진충이 당을 계승한 무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자 무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이 거란의 반란군과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성방의 이민족 집단을 유주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에 항거하였으며 대조영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같은 해 9월 거란군과 무주군이 전투를 벌이는 사이 대조영 집단은
걸사비우의
말갈족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서 세력을 점차 키웠다.
무주 조정은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당시 요동지방에서 대조영은 이미 세력을 크게 키운 후였고 이들과 정면충돌에 피해를 최소화 하고자 무주의
성신황제는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5]에 봉하였다. 한낱 유민들의 지도자인 대조영과 말갈족인 걸사비우에게 이러한 엄청난 조건을 내세운 점은 당시 이들의 세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걸사비우는 단호하게 무주 조정의 작위를 거절하였으며 걸걸중상 역시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았지만 얼마 안가 병사함으로서 결과적으론 받지 않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무주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행보의 의지를 명확히 했다. 그러자 무주는 이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거란군에서 항복한 거란의 장수
이해고를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겸 연공(燕公)
[6] 으로 삼아 공격해왔다.
최초 무주군의 공격을 받은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때 피해가 얼마나 컸나면 말갈의 수장인
걸사비우가 전사했다!지도부가 전사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가 되었고, 후퇴를 하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대조영 휘하 집단은 무주군의 추격을 피해 천문령으로 이동했다. 이해고와 그의 거란 기병은 천문령으로 진격하였고,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승리했다.
이 전투로 인해 무주군은 요동지방에서 물러났다. 무주 조정은 직접 중앙군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이들이 물러난 후 거란과 해가
돌궐에 복속되어 무주가 대조영 집단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이 막혔다.
[7]그 사이에 대조영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여 읍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오늘날의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동모산에 성을 축성하고 근거지로 삼았으며 그러자 말갈인들과 고구려인들이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 이를 발판으로 697년 세력을 다시 키운 대조영은 동모산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진국[8]이라 했다. 이 진국이 훗날
발해가 된다.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군을 격파함으로써 동만주에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이 강대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울러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대조영 집단을 중심으로 많은 고구려 유민이 결속되었으며 발해 건국의 초석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