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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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원왕
高句麗 安原王재위대관식전임자후임자부왕휘이칭별호묘호시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왕조가문부친모친배우자
지위 | |
고구려의 제23대 국왕 | |
531년~545년 | |
안원왕(安原王) | |
전임자 안장왕(安臧王) | |
후임자 양원왕(陽原王) | |
부왕 문자명왕(文咨明王) | |
이름 | |
휘 고보연(高寶延) | |
이칭 연(延) | |
별호 ? | |
묘호 안원왕(安原王) | |
시호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안악상왕(安岳上王) |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출생지 ? | |
사망일 545년 | |
사망지 ? | |
왕조 고구려(高句麗) | |
가문 횡성(橫城) | |
부친 문자명왕(文咨明王) | |
모친 ? | |
배우자 정부인(正夫人) 중부인(中夫人) |
안원왕(安原王, ~ 545년, 재위 : 531년 ~ 545년)은 고구려의 제23대 군주이다.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안악상왕(安岳上王)이라고도 하며,휘는 보연(寶延)으로, 위서(魏書)와 양서(梁書)에는 안원왕의 이름이 연(延)으로 되어있다. 아버지는 문자명왕(文咨明王). 안장왕(安臧王)의 동생이다. 531년 안장왕이 죽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키가 크고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박왕(狛王), 곡향강상왕 등으로 기술한다.
목차
생애
장수왕 이후에 중국의 남북조에 대해 조공을 계속하였다. 북위(北魏)에는 532년에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散騎常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国公 高句麗王)으로 책봉 되었고 동위(東魏) 시대인 534년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더해졌다. 양나라(梁)에서는 안장왕대의 작호인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寧東将軍 都督営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을 그대로 계승했다. 재위 3년인 533년에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음력 8월에 누리(;우박의 옛말임)의 재해가 있었다. 재위 10년인 540년에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싸워서 물리쳤다. 542년 음력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음력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재위 15년인 545년 음력 3월에 죽었다. 재위 말년에 왕의 정부인(正夫人)에게 아들이 없자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는데, 이때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세력이었던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은 전투를 방불케 하는 무력충돌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세군측의 2,000여 명이 죽었다. 안원왕은 추군과 세군의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가계
- 부왕 : 문자명왕(文咨明王, ?~519 재위:491~519)
- 모후 : ?
기년, 연호
안원왕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서력 | 531년 | 532년 | 533년 | 534년 | 535년 | 536년 | 537년 | 538년 | 539년 | 540년 | 542년 | 542년 | 543년 | 544년 | 545년 |
단기 | 2864년 | 2865년 | 2866년 | 2867년 | 2868년 | 2869년 | 2870년 | 2871년 | 2872년 | 2873년 | 2874년 | 2875년 | 2876년 | 2877년 | 2878년 |
간지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 갑자 | 을축 |
기타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에 침투한 백제계 첩자들이 전한 정보가 일부 수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정부인에게는 자식이 없고, 중부인과 소부인에게 자식이 있었는데, 둘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서술되어 있다. 《백제본기》가 서술한 고구려의 사정에 대한 것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是歲, 高麗大亂被誅殺者衆.【百濟本記云 『十二月甲午(廿), 高麗國細群與麤群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 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廿四), 狛鵠香岡上王薨也.】]
이 해(545)에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주살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북을 치며 싸웠는데,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병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狛)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훙하였다.』고 하였다.】[1]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百濟本記云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麤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이 해에 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웠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 사돈)가 추군이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는 세군이었다. 박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은 각자 그쪽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했다. 때문에 세군측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고 하였다.[2]
참고
참조
전 대 안장왕 |
제23대 고구려 국왕 531년 - 545년 |
후 대 양원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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