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시호 | 안장왕(安臧王) | |
성씨 | 고(高) | |
휘 | 흥안(興安) | |
생몰연도 | 음력 | ? ~ 531년 5월[1] |
재위기간 | 음력 | 519년 ~ 531년 5월[2](12년) |
1. 개요
2. 생애
2.1. 최대 강역(?)
3. 최후
4. 안장왕의 연애 전쟁
4.1. 삼국사기에서의 언급
4.2. 조선상고사의 해당 내용
5. 평가
6.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고구려의 제22대 왕. 전성기를 이룩한 선왕들의 치적에 가려 과소평가받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군주이다. 오히려 부왕 때 백제에게 여러 번 패전하며 전세가 미묘해진 것을 그대로 갚아주며 다시 우세를 되찾았다. 그러나 안장왕 사후 왕위에 오르는 동생 안원왕 시기부터 왕위 계승을 두고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떨어지고 중앙 정부의 혼란은 가속화된다.
2. 생애
문자명왕 7년인 498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문자명왕이 승하한 519년에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구휼하는 동시에 장수왕 때부터 유지되었던 중국 남북조에 대한 양면 외교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때문인지 북위와 양으로부터 고구려 왕에 봉해졌다. 근데 옛 후연의 수도였던 북위의 평주 용성을 습격해 약탈을 한 기록도 전해져온다(...)
백제를 상대로 523년 8월, 패수 전투를 치루면서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529년에는 혈성 전투, 오곡원 전투[3] 등 교전을 빈번하게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면서 백제에 대한 우세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4]
2.1. 최대 강역(?)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를 언급할 때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안장왕의 치세까지도 고구려의 전성기가 유지되었다. 아니 오히려 후술된 설화에서도 보이듯 백제를 공격하여 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5], 북위의 평주 용성[6]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과정에서 요서로 진출하는 등 정복 전쟁을 계속한 것을 보면 단지 기록이 부족한 것일 뿐 실제 고구려의 최대 강역은 문자명왕이 아닌 안장왕 때일 가능성도 꽤 있다. 물론 추측의 영역이라, 일부에선 이때가 아니라 더 후대인 여수전쟁을 치른 영양왕 시기를 고구려 최대 영토 시절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최후
《삼국사기》에선 그가 승하한 해를 531년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서 틀렸다고 지적한) '양서'에선 52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술되어있듯 연혁을 계산해보면 평균적으론 꽤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사가 없었는지 나이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동생 안원왕이 왕위를 잇게 된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藏王【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藏王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13년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안장왕(安藏王)이라 하였다.【이때는 양나라의 중대통(中大通) 3년이요, 위나라의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梁書)》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普通)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삼국사기》 안장왕
(25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덴노를)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葬事)지냈다.【어떤 책에는 덴노가 28년 갑인(甲寅)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 "신해년(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高麗)는 그 왕 안(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덴노와 태자(太子), 황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신해년(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교감(校勘)하는 자는 알라】.
《일본서기》 안칸 덴노 25년(531년) 12월조.
그런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안장왕이 시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안장왕이 시해당한 것이 맞다면, 안원왕 때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혼란상이 좀 더 쉽게 설명 가능한 측면은 있다.[7] 다만, 시해를 당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언급이 되어있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애초에 양서 등 다른 나라의 기록 뿐 아니라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사서에는 직접 언급은 커녕 간접 암시조차 일체 없는 내용이라[8], 무조건 진실이라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9]
어쨌든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의 치세를 끝으로 이후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부터 내려오던 명군의 맥이 끊기고, 몇몇 반등을 제외하면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4. 안장왕의 연애 전쟁
그 유명한 춘향전의 소스가 된 인물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그에게 어떤 일화가 있는지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1. 삼국사기에서의 언급
왕봉현(王逢縣)【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던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중략)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정사인 삼국사기 지리지에 한씨 미녀에 대한 언급이 지나가는 듯이 2번 나온다. 이 외에는 삼국사기에서 한씨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
달을성현(達乙省縣)은 현재의 고양시 구일산 지역이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때 백제 아신왕이 시비를 걸자(...) 대대적으로 백제를 침공하면서 고양시 일산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달을성현을 설치했다. 개백현(皆伯縣)은 백제가 고양시 능곡역 일대에 설치했던 지명이다. 이 지역은 장수왕이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면서 고구려 땅으로 편입되어 왕봉현(王逢縣)이 된다. 즉 고양시는 광개토대왕 ~ 장수왕 시점에는 구일산, 구능곡지역으로 분단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수왕이 능곡지역까지 함락했다가, 백제 동성왕이 나제동맹으로 밀고 올라올때 개백현(왕봉현)과 달을성현을 도로 빼앗았다. 그러다가 안장왕이 다시 물리치고 고양시 일산 지역(달을성현)을 수복했다.
4.2. 조선상고사의 해당 내용
근대에 쓰여진 조선상고사에서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단재 신채호는 이 내용을 해상잡록(海上雜錄)이라는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해상잡록은 조선 숙종 시기 쓰여진 야사집 서곽잡록(西廓雜錄)에도 인용되는 책인데 다만 현재는 실전되었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가 되었을 때에 상인 행장을 하고 개백현(皆伯縣)으로 염탐을 갔다. 당시 그 지방의 장자(長子)인 한(韓)씨의 딸 주(珠)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안장왕이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한씨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한주를 보고는 놀라고 기뻐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 후 은밀히 한주에게,"나는 고구려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귀국하였다. 그런데 개백의 태수가 한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녀를 첩실로 맞이하려 했으나, 한주는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면서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하였다. 태수는 한주를 옥에 가두어 사형시키겠다고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감언으로 꾀려고 했다. 안장왕은 왕위를 이어받은 후 개백을 점령하고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천금의 금과 만호후(萬戶侯)의 직위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장군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안장왕의 동생인 안학공주(安鶴公主)를 사랑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녀를 달라고 하였고, 안장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서 을밀에게 수군 5천을 내주어 개백을 치게 한다. 이후 개백에 다다른 을밀은 정예 20명을 뽑아서 성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 개백 태수가 잔치를 벌이며 한주를 꾀려다가 실패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찰나 을밀과 정예병들은 잔치에 난입해서 태수와 빈객들을 죽이고 고구려병 10만이 나타났다고 외쳤다. 성내는 크게 동요했고, 안장왕이 대군을 몰고 남진하니 한강 일대의 각 성읍들이 항복했다.
《조선상고사》
결국 이렇게 승리한 안장왕이 핍박 받던 한주를 구해주고 그 약속을 지켜낸다는 내용. 이 내용과 춘향전과 비교하기 위해 이몽룡을 안장왕, 성춘향을 백제 한씨 미녀로 바꾸면 춘향전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안장왕의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6년 1월 31일 방송에서 안장왕의 연애 전쟁과 관련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방영되기도 하였다.[10]
위의 기록은 을밀 항목과 함께 보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한편, 신채호는 포은 정몽주가 불렀던 유명한 '단심가' 역시 사실 옥중에서 한주가 지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로선 가설 정도로 보고 있다.
현재 고양시에서도 이 이야기를 홍보하고 있으며, 안장왕과 한씨의 딸인 주의 러브스토리가 적힌 표지판도 간간히 보이기도 한다.
5. 평가
전성기를 지낸 다른 왕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기록을 지닌 왕이지만, 고구려 전성기의 말기를 이끈 현군이라 칭할 만하다. 기록이 적어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편이지만, 당대에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부터 시작된 국력의 쇠퇴가 외부로 드러나던 시기였다.
문자명왕 말엽부터 백제와 여러 전투를 벌였지만 승리를 거둔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 특히 한강 유역을 빼앗긴 것으로 보이는 사료들도 있을 정도로 공세에서 수세로 변화되어 있던, 어찌보면 고구려 입장에서 위기라고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또한 주변국의 통제력 역시 상실하여 북방 영토들의 강역이 줄어들었던 대외적 위기 속에서 집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장왕은 국력을 재정비하여 백제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확보해 다시 한강 이남으로 밀어붙였으며 북위의 풍성을 공격해 약탈하는 등 주변국과의 정세를 공세로 전환했고 결국 전성기의 국력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안장왕이 회복시킨 국력은 안원왕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고구려의 중앙 조정이 점차 분열되면서 왕권이 조금씩이나마 흔들리는 조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 본인부터가 자연사가 아닌 시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마찬가지로 백제본기를 인용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자면 안장왕의 승하 이후 집권한 안원왕 말기에 들어 고구려는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나며 그야말로 나라가 두 동강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안장왕 본기
一年 안장왕이 즉위하다 (519)
二年春一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春二月 양이 보낸 사신이 북위 군대에 붙잡히다 (520)
二年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秋九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521)
三年夏五月 가난한 자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다 (521)
五年 가뭄이 들다 (523)
五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523)
五年冬十月 기근이 들다
五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523)
八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526)
九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527)
十一年春三月 사냥을 하다 (529)
十一年冬十月 오곡성 전투에서 백제에 승리하다 (529)
十三年夏五月 안장왕이 죽다 (531)
[1] 증조할아버지 장수왕의 연혁을 보면 아버지 문자명왕도 거의 8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안장왕 역시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는 7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늦둥이면 이 계산도 틀리긴 하지만 승하 당시 최소 6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2] 《일본서기》에 의하면 3월. 양서에는 526년이라고 기록되어있다.
[3] 다만 오곡원의 위치 등으로 인해 실제 여부를 의심받고 있지만 전왕인 문자명왕 때 백제가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 있어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4] 기록에는 백제 동성왕 때부터 한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정도. 아마 동성왕~무령왕 시기 백제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가, 안장왕이 다시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5] 게다가 당시 그의 상대는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군주 성왕이었다.
[6] 과거 후연의 수도였다. 참고로 용성은 이미 북연 멸망 시 장수왕이 한번 털었었다.
[7] 백제에서 꽤 장수했던 위덕왕도 정황과 여러 사료들로 인해 시해당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8] 시해설이 도는 임금들 중 백제의 아신왕이나 비유왕 같은 경우에도 시해의 징조인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죽기 전 나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신왕, 비유왕 항목 참조.
[9] 애초에 고구려의 본격적인 혼란 및 쇠퇴가 시작된 것이 후대의 안원왕 정확히는 말엽부터다. 그렇기에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이 맞는 것인지 어느 정도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0] 과거 고구려 관련 만화를 많이 출판하던 2000년대에도 이 이야기가 작가들에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안장왕-한씨의 딸 주&을밀선인-안학공주 간의 능글능글한 러브스토리가 나온다. 예를 들어 위 이야기의 후반부로 안장왕과 한씨의 딸인 주가 드디어 결혼해 왕궁을 걸어다니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왕궁 구석진 곳에서 을밀선인과 안장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와 징그러울 정도로 러브 분위기가 풍기자 "무엄하도다! 너무 대놓고 하는 거 아니냐?!"라고 안장왕이 꾸짖자 을밀선인이 "마마! 소신, 왕비마마의 목숨을 구해주신 을밀선인이옵니다! 눈감아 주시옵소서!"라며 농담어린 결말로 끝내버리는 전개가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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