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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백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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比流王 비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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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부여(扶餘) / 우(優)(?)[1] | |
휘 | 비류(比流) | |
왕자 | 부여초고(扶餘肖古) | |
부왕 | 구수왕(仇首王)(?)[2] | |
생몰년도 | 음력 | ? ~ 344년 10월 (미상) |
재위 기간 | 음력 | 304년 10월 ~ 344년 10월 (41년) |
1. 개요
2. 계보상의 미스터리
2.1. 비류의 모델이 된 인물인가?
3. 업적
4. 자연 재해
5. 삼국사기 기록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드라마 근초고왕
1. 개요
백제의 제11대 국왕이자, 건길지. 백제의 시조 온조의 형인 비류나 제20대 왕 비유왕과는 다른 인물이다.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각각 한자 표기도 다르다. 윌리엄 백스터(William Baxter)와 로랑 사가르(Laurent Sagart)의 2014년 재구에 따르면, 沸流의 상고한어 발음은 /*Nə.p[u][t]-sru/이고, 比流의 상고한어 발음은 /*C.pijʔ.ru/로, 둘은 전혀 달랐다. 상고한어를 제시하는 까닭은, 당대 한반도에서의 한자음이 상고한어 발음과 유사했으리라고 학자들이 여기기 때문이다. 단, 비류의 다른 표기인 避流의 발음은 당시 한국어에서 比流와 변별력이 없었다. 避와 比가 만엽가나에서 모두 ヒ에 대응되기 때문.
2. 계보상의 미스터리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뒤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재위했다니... 구수왕이 234년에 죽었기 때문에 구수왕이 죽기 직전에 비류왕이 태어났다 쳐도 337년에 사망했으니 대략 110세에 죽은 셈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계보 조작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혹은 초고왕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이가 더 심하게 많아져 삐꾸난다. 초고왕이 구수왕의 아버지기 때문에 30살 정도 더 많아져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그 중간에 흑강공 사훌이라는 가공 인물을 등장시켜 그를 구수왕의 아들이자 비류왕의 아버지로 설정하기도 했다. 사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초기 왕들의 수명은 비상식적으로 길어서 정확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많으며, 비류왕 역시 그중 한 명이다.[3]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후손일 거란 가설도 있다.
일단 여기에 근거하여 비류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초고왕계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나오는 추정은 비류왕의 즉위 때 백제 왕실 지파(枝派)들 사이의 세력 교체[4]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비류왕의 혈족 관계와 재위년 사이의 모순도 그와 같은 왕실 지파 간의 세력 교체에 대한 역사 서술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구수왕과의 관계 외에도 비류왕 즉위기사에서 대놓고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이름을 떨쳤다(久在民閒, 令譽流閒)는 기록이 나오는데 분서왕 사망 당시 왕위계승과는 멀었던 인물인 점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모두 낙랑과의 분쟁에서 전사하거나 암살당했고, 이로 인해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이후 계왕을 거쳐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걸로 봐선 정황상 맞는 말.
분서왕의 죽음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련이 있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그가 즉위할 때 나이가 꽤 있었던 것은 맞는 듯 하다. 즉위 때 기록을 보면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오랫동안 평민 생활을 했는데도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암살당한 전왕 분서왕의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비류가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2.1. 비류의 모델이 된 인물인가?
때문에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백제 건국 신화와 비교해 온조왕과 동일시된 근초고왕의 형이자 일반명사로 부족장을 뜻하는 우태(優台)의 아들인 비류(沸流)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는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해석의 경우는 비류가 건국 시조가 되어야 하고 중국 측 사서도 존재하는데, 왜 김부식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온조왕 시조설을 주로 하고 비류 백제를 추가설로 더했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비류왕 재위 시기 시조 비류설이 우세하다가 비류왕이 계왕에게 살해된 뒤 즉위한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과를 감추기 위해 시조 온조설을 도입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3. 업적
즉위 기록에서 인자하며 힘이 세고 명성이 높았다고 추켜세운 것과 달리 이후 업적은 삼국사기만 보면 별다른 게 없어 40년 내내 평화 정책만 고수한 걸로 보인다. 전쟁이나 외교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고, 천재지변, 반란, 사냥, 선정에 대한 기록만이 전해진다.
그러나 비류왕 재위기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의 격변기였다. 당장 중국의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무너져, 오호십육국시대의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서진의 통제를 받던 한사군도 311년 8월 고구려 미천왕이 압록강 하구로 추정되는 서안평(西安平)을 정복해 중국 본토와 연결고리가 끊기고 급격히 약화해, 전왕 분서왕을 암살했다는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망하고, 다음 해 314년에는 대방군도 고구려에 의해 축출당하면서 백제 북변 거의 전체를 고구려가 차지한다. 이렇게 백제 북쪽에서 세력들이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비류왕 시대 백제에 전쟁이 아예 없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다못해 북쪽의 전란에 방어태세를 갖추고 대비한다는 정도의 기록은 당연히 있어야 할 상황인데 그런 게 없다.[5]
북쪽 외에 남쪽으로도, 이 시기는 원삼국시대를 이탈하여 삼국시대(사실 진변한 지역을 보면 4세기에도 진짜 3국은 전혀 아니지만..) 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시기인데, 비류왕 다음 세대인 근초고왕 대에 남해안의 마한 소국을 제압하고 변한 소국들 및 일본(야마토)와 마주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책계~비류 사이의 4세기 동안 충청과 전북 지역의 마한 지역을 통합해 나가면서 우리가 아는 고대국가 백제로서의 영역을 확립해 나가는 시대였을 가능성이 높다.[6] 뒤이어 나오는 벽골제의 건설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이 시기 근방에 해당 지역이 통제하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된 건 비류왕 시기에 있었던 일들 중 일부가 그 전 백제왕의 기사 혹은 그 후 백제왕의 기사로 넘어가서 생겼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밝혀진 일을 보자면, 책계왕 시대에 일단 복속되었으나 여전히 여력은 유지하던 목지국 세력이 크게 쇠락한 게 바로 비류왕 재위기에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동시에 청주 지역에서 백제 왕실과 직접 관계가 있어보이는 유물이 증가하는 걸로 보면, 비류왕 시기에 청주 지역을 의도적으로 개발하고 키워주면서 천안 잔여 세력을 완전 제압하는 데 성공했을 개연성이 크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들을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그러나 327년, 우복은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당했다.
330년에는 벽골제를 건설했다. 벽골제에 관련한 기록은 원래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21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벽골제가 있는 전북 김제 지역은 당시에 신라 땅일 수가 없으므로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간 걸로 본다. 다만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는 벽골제가 4세기 초 마지막으로 번성했던 마한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333년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337년 봄 음력 2월 신라와 수교하였다. 다만 삼국유사 비류왕-근초고왕 시기에 신라에서 재위했던 흘해 이사금 시기에 백제 병사가 처음으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존재해 신라와 충돌했을 가능성도 크다.
40년이나 재위했음에도 자연재해 기록이 대부분이다.
4. 자연 재해
업적보다 자연 재해 기록이 더 많다.
308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 : 일식이 발생했다.
316년 봄 : 가뭄이 발생했다.
321년 가을 음력 7월 :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327년 가을 음력 7월 :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331년 봄, 여름 : 가뭄이 크게 들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음력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33년 여름 음력 5월 : 별이 떨어졌다.
335년 겨울 음력 10월 초하루 을미 : 일식이 발생했다.
336년 봄 정월 신사 : 혜성(彗星)이 별자리 규(奎)에 나타났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비류왕 본기
一年冬十月 비류왕이 즉위하다 (304)
305-307 : 3년 공백
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308)
309-311 : 3년 공백
九年春二月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순회하다 (312)
九年夏四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312)
九年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312)
十年春一月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313)
314-315 : 2년 공백
十三年 가뭄이 들고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가다 (316)
十三年夏四月 수도에 우물이 넘치고 흑룡이 나타나다 (316)
317-319 : 3년 공백
十七年秋八月 대궐의 서쪽에서 활쏘기 연습하다 (320)
十八年春一月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임명하다 (321)
十八年秋七月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321)
322-324 : 3년 공백
二十二年冬十月 하늘에서 풍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다 (325)
二十二年冬十一月 구원에서 사냥하다 (325)
二十四年秋七月 이상한 모양의 구름이 형성되다 (327)
二十四年秋九月 내신좌평 우복이 반란을 일으키다 (327)
328-330 : 3년 공백
二十八年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일어나다 (331)
三十年夏五月 대궐에 화재가 발생하여 민가로 번지다 (333)
三十年秋七月 대궐을 수리하다 (333)
三十年冬十二月 우레가 치다 (333)
三十二年冬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335)
三十三年春一月 혜성이 규성좌에 나타나다 (336) (서쪽)
三十四年春二月 신라에서 사절을 보내 예방하다 (337)
338-343 : 6년 공백
四十一年冬十月 비류왕이 죽다 (344)
자연 재해, 사냥, 제사 기록을 빼면 8줄 뿐.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드라마 근초고왕
네가 원망하고, 욕하고, 안타까워 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온 마음을 바쳐야 될 대상은 나도, 여찬도 아니고, 여화도 아닌 오직 백제다!
배우 윤승원이 연기. 원래 제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인물이었으나 분서왕이 암살당한 후 그 아들인 부여준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흑강공 사훌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부여준과는 철천지 원수 사이. 아들 부여구가 태자를 제치고 왕의 기운이 흐른다는 말에 요서로 내쫓아 소금 장수를 시키고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등 비정한 아버지로 묘사된다.
고국원왕과 대방 분할 문제로 정상 회담을 하다가 고국원왕의 뒤치기에 죽을 뻔했지만 부여구가 달려와서 겨우 죽음은 면했다.
태자가 막장짓을 하여 국경의 성들을 고구려에게 깡그리 빼앗기고 태자까지 포로로 잡혀버린다. 고구려의 사신들이 대방 땅을 전부 내주면 태자를 석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오히려 태자를 죽여도 좋다는 폭탄 발언을 내뱉는다.
이후 부여구를 태자로 삼으려다가 태자 건으로 원한을 품은 제1 왕후와 계왕(부여준)의 음모로 독살당한다.
[1] 일단 초고왕계로 기록되어 있기는 한데 정작 이복동생인 우복은 우씨다.
[2]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3] 이는 고이왕도 마찬가지이다.
[4] 이 지파들은 비류+온조-초고왕계 / 구태-고이왕계로 보인다.
[5] 비록 한사군을 멸망시킨 건 고구려지만, 백제도 한사군의 한족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375년에 서기를 편찬하는 고흥이 한군현계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6] 중국 정사의 삼국지(2세기 말~3세기 초 기록으로 추정) 에서 마한은 54개 국이며 그 중 하나가 백제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2세기 말까지의 백제 역사로 기록된 것은 도시국가 백제의 이야기에 여러가지 주변지역 이야기를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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