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비류왕-개로왕(304-475)

<펌> 진사왕 (385-392)-나무위키

Chung Park 2020. 7. 12.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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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나라의 진사왕(陳思王)에 대한 내용은 조식(삼국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百濟
백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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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斯王
진사왕
성씨 부여(扶餘)
진사(辰斯) / 휘(暉)(?)[1]
부왕 근구수왕(近仇首王)
모후 아이부인(阿爾夫人)
사망지 구원 행궁(狗原 行宮)
생몰연도 음력 ? ~ 392년 11월
재위기간 음력 385년 11월 ~ 392년 11월 (8년)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4. 가족관계

5. 기타

1. 개요

백제의 제16대 국왕이자 건길지. 전왕 침류왕의 동생이자 근구수왕의 차남.

 

2. 생애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승하했는데 태자(훗날 아신왕)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침류왕이 죽자 왕자 아화의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고 직설적으로 적혀있다. 현대의 학자들도 일본서기 내용대로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했다고 간주하고 있다. 게다가 침류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한 것으로 보아 진사왕 또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침류왕을 시해한 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도 꽤 크다고 보고 있다. 침류왕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왕이기 때문에[2] 백제의 토착신앙이 없었을 리가 없는데 이 쪽 세력이 불교를 미는 침류왕에 반발해 침류왕이 그들 세력에 의해 시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 불교 공인 과정에서 토착신앙 세력과 대결이 벌어진 것은 신라나 일본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백제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름에 포함된 진(辰)이라는 글자가 아들 진손왕, 5대손 진이왕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글자를 진국의 진(辰)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들을 부여씨가 아닌 토착 마한인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진사왕은 비정상적으로 즉위했고 정통성에 문제가 있으므로 자신의 실력을 통해 신료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했다. 그 본인은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왕이 되고 나서도 꽤 실속 있는 정치를 보여주긴 했지만... 문제는 나중에 만난 상대가 나빴다는 거다. 일설에는 처음에는 강인한 군주였으나, 도중 나사가 빠져 버려(...) 놀고 먹으면서 통치하다가 광개토대왕 크리를 맞았다고도 한다.

386년(진사왕 2년) 봄,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靑木嶺)에서 북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關防)을 쌓았다. 7월에는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같은해 4월 동진은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 여휘(餘暉)를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해당기사에 나오는 백제왕세자 여휘가 침류왕이 받은 관직을 잇는 점으로 볼 대 휘(暉)는 진사왕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왕세자 신분이 아니었는데다가 잘 보면 백제왕세자를 왕으로 임명한 것이고[3], 음운상 유사성도 약한데다가 이후 즉위하는 아신왕이 별도로 봉작되지 않는 점 때문에 그와 동일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이 봉작은 침류왕 2년 행해진 조공에 대한 보상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이 비수대전 이후 혼란한 틈을 타 고국양왕이 384년 잠깐 요동을 먹었다가 후연이 강해져서 1년도 못 채우고 다시 빼앗겨서, 요동 진출은 불가능하니 칼끝을 남쪽으로 돌려 386년 8월에 백제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는 공격했다는 것만 있고 과정과 결과가 없다. 387년 9월에는 말갈이 쳐들어와 관미령에서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진사왕은 앞서 고구려 침공의 보복으로 390년,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진사왕은 대승리에 기뻤는지 390년부터 궁궐 증축과 사냥을 통해 여유를 즐기며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대로 이어지는 전성기 백제 분위기를 유지할 능력이 되어보이는 꽤 괜찮은 군주. 진사왕 본인이 생각해도 고구려가 백제를 개발살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얼마 안 가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멋지게 발렸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훗날 북진 정복 정책을 위한 사병 폐지 및 국군 통합으로 인해 군사력이 강력해진 상태였는데, 광개토대왕이 정예병을 추려 백제의 구원 행성을 392년 7월에 4만 병력으로 침공하자 진사왕은 그들이 본진일 거라고 생각하여 직접 나가 싸우게 된다. 그러나 그 때 광개토태왕은 별동대를 이끌고 나가 석현성을 치고 있었고, 석현성에서 보낸 구원 요청이 진사왕에게 도달했을 때는 이미 석현성은 함락된 후였다. 석현성을 비롯하여 한수 이북의 10성을 빼앗기고[4] 전략 요충지 관미성마저 빼앗기고, 진사왕이 쫄아서 제대로 대응을 못 하는 사이 나라의 북쪽이 제대로 털렸다.

이 관미성이 핵심이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기록을 보면 관미성은 사방이 험한 절벽이고 그 주위에는 바닷물이 있어서 군을 7방면으로 20일동안 총 공격해서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고 나와있다.  이 관미성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성(烏頭山城) 혹은 강화도[5]나 황해 옹진 반도 어딘가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에게 철저히 발리고 있을 때,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을 했다. 이 모습이 나라에 외적이 침입했는데 한가하게 사냥이나 즐기고 있는 무책임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고대 시대의 사냥은 실제 전쟁과 직결되는 기마술, 궁술, 팀워크 훈련을 갈고 닦는 것으로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군대 점검, 훈련 정도로 봐야 한다. 진사왕 나름대로 외침을 극복하기 위해 군대를 수습하고 점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냥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에 몰두하다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6]일본서기에는 조카 아신왕 세력에게 시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혹은 패전의 책임을 느껴 자살했다는 말도 있는데, 이 설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사냥터란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유인만 잘 한다면 사람 암살하기엔 더 없이 적합한 장소로 변하기 때문이다[7]. 재위의 시작과 끝 모두 삼국사기는 애매하게, 일본서기는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8].

결국 백제는 이때 잃은 황해도와 경기 북부 일대의 영토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백제의 안습 시절 스타트를 끊은 왕. 훗날 성왕 때 고토를 회복할 한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실패로 끝나고 만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진사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진사왕이 즉위하다 (AD 385)
二年 청목령 일대에 관방을 쌓다 (AD 386)
二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치다 (AD 386)
二年秋八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AD 386)
三年春一月 진가모를 달솔로 임명하다 (AD 387)
三年秋九月 관미령에서 말갈과 전투를 벌이다 (AD 387)
五年秋九月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다 (AD 389)
六年秋七月 혜성이 북하 성좌에 나타나다 (AD 390)
六年秋九月 진가모가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AD 390)
六年冬十月 구원의 북쪽에서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AD 390)
七年春一月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을 파다 (AD 391)
七年夏四月 말갈이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AD 391)
七年秋七月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 (AD 391)
七年秋八月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다 (AD 391)
八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392)
八年秋七月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석현성 등을 상실하다 (AD 392)
八年冬十月 고구려에게 관미성을 상실하다 (AD 392)
八年 구원에서 사냥하다 (AD 392)
八年冬十一月 진사왕이 죽다 (AD 392)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다수.

 

4. 가족관계

5. 기타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했지만 일본서기의 기록과 신찬성씨록속일본기 등에 왕인과 함께 입조한 귀수왕(=근구수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에 대한 기록, 그밖에 스가노(菅野)씨, 후지이(葛井)씨, 후네(船)씨 등의 집안이 근구수왕을 시조라고 하거나 근구수왕의 손자 진손왕을 시조라고 하는 것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알려지게 됐다.

진사왕의 아들 진손왕은 할아버지 근구수왕의 치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이미 15세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진사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진손왕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눌러앉는다.[11]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배우 박상규[12]가 맡았다.

 

[1] 진서 효무제편의 기록. 다만 세부적으로 안맞는 부분이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2] 사실 침류왕본기를 읽어보면 불교 도입 기록이 남아있는 '유일한' 업적이다.

[3] 전왕인 근초고왕을 봉작할 때는 분명히 백제왕이라고 칭했다.

[4]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담덕이  용병술에 능하다는 말에 쫄아 나가서 막지 못했다고 전한다.

[5] 윤명철의 '고구려 해양사', 실제로 강화도의 옛 이름이 '갑비고차'다.

[6] 단, 자연사인지 타살인지는 불명.

[7] 당장 삼국지에 나오는 손책이나 뒷날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가 대표적 케이스. 손책은 사냥 중에  문객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윌리엄 2세는 사냥을 간 숲속에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의문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8] 사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기록 자체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빈약한데다가 은유적인 표현이 상당하게 들어갔다. 게다가 백제가 망한 지도 이미 오래됐고... 그래서 당대에 남은 백제 측의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자세한 경우도 적지 않다.

[9] 국내 기록에는 없고,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된다.

[10] 진손왕의 아들.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됨.

[11]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사왕이 일본 천황에게 거만하게 굴자 백제의 조신들이 진사왕을 살해했다 한다. 진사왕은 형 침류왕이 죽자 조카들이 나이가 어려서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신왕은 삼촌이 찬탈한 것으로 간주했는 모양이다.[12] 태조 왕건에서 명주성주 김순식, 연개소문에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역할을 맡은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