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비류왕-개로왕(304-475)

<펌> 전지왕 (405-420)-나무위키

Chung Park 2020. 7. 12. 01:01

분류

 

百濟
백제 국왕
[ 펼치기 · 접기 ]

腆支王
전지왕
성씨 부여(扶餘)
전지(腆支) · 직지(直支)[1] · 영(映)[2] / 진지(眞攴)[3]
왕후 팔수부인 목씨(八須夫人)[4]
왕자 부여구이신(扶餘久尒辛), 부여비유(扶餘毗有)[5]
부왕 아신왕(阿莘王)
생몰연도 음력 ? ~ 420년 3월
재위기간 음력 405년 9월 ~ 420년 3월 (15년)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백제의 제18대 국왕이자, 건길지. 아신왕의 아들. 치세 기간 동안 이렇다 할 전쟁이나 사건이 없다.

임성태자(아좌태자)의 가문인 토요타씨 족보에는 백제 제2•4대 국왕으로 나와있다. 참고로 1대는 동명성왕이고 3대는 아신왕. 중국 측 사서에 백제열전이 따로 생기기 시작하는 시점이 이 왕 대부터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정확히 "백제"로서의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태자 시절 이름은 영이었다. 부왕인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한 후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뒤로는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아신왕은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태자 영(전지왕)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태자 영은 397년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일본에 머물게 된다.

405년 아신왕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갑자기 그가 승하한 것은 광개토대왕에게 연달아 털리고 내외적으로도 막장 가도를 달리는 와중에 발생한 국내 정쟁으로 인해 시해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자 영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아신왕의 동생인 부여훈해가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섭정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인 부여설례가 진씨 세력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왜에서 귀국하던 태자 영은 충신 해충(解忠)으로부터 숙부 설례가 찬탈했다는 국내 정세 변화를 전해들었고,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왜인의 호위를 받으며 어느 외딴 섬에 머물렀다.

 

진씨 세력의 지원을 받은 설례와 태자 영을 지지하는 해씨 세력 간의 정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해씨 국인(귀족)들이 설례를 제거하며 대치 상황을 끝냈고, 이후 태자 영이 도성으로 돌아와 전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해씨 세력의 지원 덕분에 전지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전지왕 즉위 후 해씨 세력 인사들이 대거 등용된다. 전지왕은 귀국할 때 도와주었던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内臣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측 친정인 해씨 집안을 국정에 맞아들이게 되었다. 전지왕을 왕으로 옹립한 해씨 세력들은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해씨 세력에 의해 옹립된 국왕 전지왕의 실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아신왕 때까지 권세를 누렸던 외척 진씨 집안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6]

한편 전지왕은 즉위 과정에서 해씨 세력과 더불어 동생 여신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그리하여 즉위 후 여신을 중용하여 상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는 최초의 상좌평 임명이었다.

한편, 대외 관계에 있어서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의 작호를 받았으며, 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유지하였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의 사자를 우대하고 또 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국인 고구려에 별다른 군사적 행동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매번 발리는 소식을 일본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전지왕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구이신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에,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한 목만치라는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고 횡포를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7] 한편『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지왕의 재위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5년(구이신왕 6)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428년(비유왕 2)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대에 차이를 보인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전지왕 본기


一年秋九月 전지왕이 즉위하다 (AD 405)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AD 406)
二年春二月 진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秋九月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다 (AD 406)
三年春二月 여신을 내신 좌평에 임명하다 (AD 407)
四年春一月 여신을 상 좌평에 임명하다 (AD 408)
五年 왜국에서 야명주를 보내오다 (AD 408)

 

공백 : 408-415  : 7년


十一年夏五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415)
十二年冬十二月 동진에서 왕을 책봉하다 (AD 416)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417)
十三年夏四月 가뭄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417)
十三年秋七月 사구성을 쌓다 (AD 417)
十四年 왜국에 사신을 보내 흰 포목을 선사하다 (AD 418)
十五年春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419)
十五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419)
十六年春三月 전지왕이 죽다 (AD 420)

[1] 《일본서기》에서도 직지라 써있다.

[2] 《송서》, 《양서》, 《진서》에서도 영이라 써있다. 다른 이명들과 비교해볼 때 오기로 인해 전(腆)이 영(映)으로 적힌 걸로 보인다.

[3] 《삼국유사》. 직지(直支)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4] 해씨 집안이란 설이 과거에 유력했으나, 전지왕 사후 목씨인 목만치와 전횡했다는 기록을 보면 오히려 목씨로 보는 것이 맞아 보인다. 충청남도 문화 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에선 이 설에 대해 확증할 수 없다는 선으로 상당 부분 판단을 보류하였다. 일본에서 장기간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바 있고 지금도 해당 분야를 연구 중인 김현구 교수는 팔수부인이 일본 황가 혹은 귀족의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당대 백제가 일본과 상당히 혼인 관계가 잦았던 개연성을 고려해보면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5]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6] 하지만 진씨 집안은 이때 한 번 졌다고 정계에서 아웃되는 게 아니라 백제 말기까지도 상당히 활약했다. 초기에 비해서는 포스가 꽤 약해지지만...

[7] 국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진위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백제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나마 가장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