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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진덕왕(眞德王) | |
연호 | 태화(太和)[1] | |
성씨 | 김(金) | |
휘 | 승만(勝曼)[2] | |
부왕 | 국반 갈문왕(國飯 葛文王) | |
모후 | 월명부인(月明夫人) | |
신장 | 7척 (172cm) | |
묘지 | 사량부(沙梁部) | |
생몰년도 | 음력 | ? ~ 654년 3월 |
재위기간 | 음력 | 647년 ~ 654년 3월 (8년) |
1. 개요 2. 외모 3. 재위 4. 평가 5. 진덕여왕릉 6. 삼국사기 기록 7.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7.1. 드라마 삼국기7.2. 드라마 선덕여왕7.3. 대왕의 꿈7.4. 미라쥬 메모리얼
1. 개요
신라의 제 28대 왕이자 신라 3대 여왕[3]들 중 1명. 진평왕의 동모제 국반(國飯)갈문왕의 딸.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이다. 연호는 태화(太和). 진평왕의 동생인 갈문왕 국반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전전 왕인 진평왕의 조카이며 전왕인 선덕여왕의 사촌 자매되는 귀한 아가씨.
다른 두 여왕과 마찬가지로 진덕여왕도 원래 신라~고려시대까지는 여(女) 자가 빠진 그냥 '진덕왕(眞德王)'이라 불렀고 기록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나중에 여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즉위한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성골 혈통이었기 때문이며[4] 그녀가 사망하면 더 이상 성골이 없으므로[5] 진골에게 왕위가 넘어갈 것이 암묵의 규칙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정치적 실권은 비담의 난 토벌로 비담파 귀족 세력을 제압한 김유신과, 차기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던 김춘추가 주도하는 세력이 사실상 잡고 있었다. 아직 알천을 중심으로 한 알천파 귀족들이 남아있었지만 이들도 김춘추파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신라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개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차기 국왕이 거의 확실했고 섭정에 해당하는 김춘추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연구서들이 진덕여왕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김춘추-김유신의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삼국유사에서 음갈문왕과 혼인했다고 하는 선덕여왕과 달리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시점에는 더 이상 성골 남자가 근친까지 다 포함해도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김춘추와 문희의 일화에서 나오듯 같은 골품끼리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면 역사 기록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혼인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골과 하위 골품 간의 혼인은 그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덜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고(中古)기 왕가 인물들이 다 그렇듯,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 역시 불교 세계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에서 승만부인은 석가모니로부터 장차 성불해 보광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여성으로 불경 승만경의 주인공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진흥왕부터 시작된 신라 왕가=석가족 관념과 그에 바탕을 둔 성골 관념을 배경으로 즉위했으며, 그렇게 즉위한 마지막 왕이다.[6] 참고로 가까운 시대 사람인 진평왕의 후비 승만부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성도 승만부인은 손씨고, 한자도 승만부인은 '승만(僧滿)'이고, 진덕여왕의 휘는 '승만(勝曼)'으로 다르다. 이승만도 '승만(承晩)'으로 다르다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아래에 서술하는 대왕의 꿈에서도 당시 31세였던 손여은이 진덕여왕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실은 진덕여왕이 즉위 당시에 30대 초반 이하의 젊은 여성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덕여왕은 국반 갈문왕의 딸인데 국반 갈문왕이 형인 진평왕과 몇 살 터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인 김동륜이 572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반 갈문왕을 김동륜의 유복자라고 가정하더라도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에는 (살아있었다 치면) 76세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국반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도 즉위할 당시엔 아무리 적어도 40대 후반이나 50대 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할머니로 불릴 연령대였다. 선대 왕인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역사상 확실하게 젊어서 즉위한 여왕은 51대 진성여왕 한 명뿐이다.[7]
2. 외모
기록에 의하면 자태가 풍만하고[8]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9]에 이르러 팔이 무척 길어 무릎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은 진덕여왕을 보살과 같이 묘사해서 그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또한 "팔이 길다"는 것은 덕 있는 이의 상징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유비도 키가 7척 5촌에[10] 팔이 무릎까지 내려간다는 묘사가 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묘사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는 게, 지증왕[11]이나 진평왕[12], 경덕왕, 경문왕 등 경주 김씨 신라 왕가는 체격이 크다는 묘사가 있는 인물이 실제로 많은 편이다.
3. 재위
647년 1월 비담의 난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긴 했지만 애당초 선덕여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일각에선 선덕여왕이 난리 통에 죽고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녀를 왕으로 추대한 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13] 훗날 김춘추 본인 역시도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직접 지명받은 게 아니라[14] 화백회의의 추대로 즉위했다. 아니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가뜩이나 여왕에 반대하던 비담 세력은 또 여왕이 즉위한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껴 여주불능선리[15]를 내세워, 즉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도 가능하다. 비담의 난 발발 직후에 선덕여왕이 사망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란 직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담의 난 진압으로 반 김춘추 세력이 싹 쓸려나가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진덕여왕의 치세에서 실권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천이 상대등이 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16]의 군주(軍主)로 임명하는 등, 비담의 난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치세를 시작했지만, 역시나 선덕여왕 때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마구 신라를 쪼기(…) 시작한다. 워낙 털리다 보니 당시 일본에서도 신라를 우습게 볼 정도.
즉위 직후인 647년에는 김춘추가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17] 일본은 이미 백제와의 동맹 관계가 굳건한 나라였기에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히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 백제계 가문 소가 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소가씨를 몰락시키는 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 카미타리(中臣鎌足)가 상대적으로 친 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에 조공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를 시켜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라고 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2년(648년) 겨울.
그리고 즉위 이듬해인 648년에는 당나라에 감질허, 김춘추 등을 사신으로 파견한다.
당 태종은 감질허를 사신으로 보낼 때만 해도 까칠했지만, 김춘추가 오자 반갑게 맞아들이며 여러가지 요구도 들어주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전 선덕여왕 때 신라는 여자가 왕이니까 그 꼬라지라고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과 다른 모습인데, 결국 김춘추와 회담 결과 적극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나당 동맹의 기초가 이뤄졌다. 당 태종이 나당 동맹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번 실패를 겪은 당 태종이 고구려 재침략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후방을 노릴 수 있는 신라와의 협공이 꼭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당 태종은 동맹국이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신라가 당의 요청에 응해서 원군을 파병했지만, 백제는 그 전부터 당이 고구려를 친다면 지원군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말을 바꾸어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지원하고 있던 신라의 옆구리를 빈집털이했다. 백제의 태도에 큰 분노를 느낀 당 태종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고[18] 당나라의 목표인 고구려 멸망에 백제가 걸림돌이 되니 고구려를 치려면 방해가 되는 백제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고구려, 백제, 일본)이 신라를 적대하는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반 신라 연합에 대응하고자 했다. 진덕여왕은 직접 비단에 수를 놓고 시를 지어 당에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그 아첨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서 일각에선 진덕여왕이 무슨 치어걸이라도 한 거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대당 (大唐)은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大唐開鴻業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巍巍皇猷昌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止戈戎衣定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文治)를 닦도다.
修文繼百王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理物體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深仁諧日月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撫運邁時康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幡旗旣赫赫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鉦鼓旣鎤鎤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外夷違命者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剪覆被天殃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淳風凝幽顯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遐邇競呈祥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四時和玉燭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維嶽降宰輔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維帝任忠良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德)을 이루니
五三成一德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昭我唐家皇[19]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추측할 수 있으며 후대 민족주의 사관에서야 굴욕적으로 보이겠지만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외세에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외교를 통해 국가와 왕조를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결코 치욕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스스로를 '요동 똥땅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치당태평송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유달리 배타적이고, 강해진 한국의 민족주의 때문에 굴욕 외교로 보일 뿐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나오는 표현들도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 않았다. 물론 전후 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 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니 나라가 망할 판인데 뭔 짓을 못하겠는가? 굴욕적이라고 해도 말로만 굴욕을 겪는 것이 진짜로 적 앞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는 것보단 낫다. 당장 동 시대 고구려와 당 사이에서 박쥐 놀음 하다가 망한 백제가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서 그렇지. 당시 신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선덕여왕 시기에 대야성이 무너져 압량주가 최전선이 되었는데 이거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연천군, 철원군 다 뚫리고 동두천시가 최전방이 된 격이다. 심지어 김춘추가 즉위하고도 고구려와 백제, 말갈 연합이 대군을 일으켜 공격하여 신라의 3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김유신은 수도가 위협받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워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해 지켜냈지만, 양면 전쟁에서 한계는 분명했다.
일본에도 김춘추가 직접 건너간 것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통한 상황 타개를 노리기도 했다. 652년 6월, 653년 4월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어차피 쟤네는 곧 망할 나란데 우리가 도와줘서 뭐합니까? 우리가 전력을 안 써도 먹을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다가 신라가 망할 때가 되면 우리가 낼름 먹어버리죠"[20]라는 반응였기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백제, 고구려 연합 공격에 30여 개의 성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신라는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공격에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 맞다. 문제는 예상과 달리 당나라가 방침을 바꿔서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멸하기 위해, 십만 단위의 대군이 황해 바다를 가로질러 참전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도박과도 같은 카드가 통한 것이다.
기왕에 비담의 난으로 귀족 세력이 약화된 이상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제도를 대거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진지왕의 폐위에서 알 수 있듯 진덕여왕 이전의 신라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뚜렷한 상하 관계가 아니었고 상호 견제가 강했지만, 이 시기부터 진골 귀족에게 신하의 상징물인 아홀(牙笏)을 갖고 다니도록 했고(650년)[21] 새해에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신정 하례를 시작하기도 한다(651년). 시랑(侍郞)이라는 벼슬 이름을 처음 사용한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런 제도들이 고려, 조선까지 천수백 년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덕여왕 시대에 바뀐 부분들이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진덕여왕은 비록 존재감이 약했지만 그녀의 시대는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이 되는 집사부가 설치된 것도 진덕여왕 때이다. 물론 이런 개혁 대부분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김춘추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평가
사실 신라 정치 제도 개혁이나 변화는 정작 선대인 선덕여왕 때보다 더 많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진덕여왕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김춘추와 김유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게 정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라서인지, 신라의 세 여왕 중에서 존재감이 제일 약하다. 바로 전대 왕이 똑같이 여왕인 선덕여왕이고, 게다가 선덕여왕은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과 온갖 설화를 더덕더덕 가지고 있어 이미지를 완전히 잡아먹히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뭐 재정 담당 품주를 집사부와 창부로 바꿨다는 정도가 전부다. 게다가 다음 왕인 태종 무열왕에까지 끼어 왠지 징검다리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뒷날의 진성여왕과 비교해도 진성 여왕은 후삼국시대의 발단으로 뭔가 개막장(?)스러운 나쁜 이미지(...)로라도 남아 개성이라도 강한 편인데, 진덕여왕은 그런 거 없다. 또한 재위 기간도 세 여왕 중에서 제일 짧기도 하고... 애초에 옆에 있는 실세인 신하들까지 김춘추와 김유신이고, 특히 김춘추는 진덕여왕 후의 왕이기도 했으니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 봐도 무방하다.
5. 진덕여왕릉
현재 경주시에 진덕여왕릉이 남아있다. 사적 제24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위치로 추정 중이다. 물론 그냥 추정이고 이게 진짜 진덕여왕릉인지는 무열왕릉처럼 뚜렷한 물증이 나온 것은 아니라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는 신무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진덕왕 본기
一年春一月 진덕왕이 즉위하다 (AD 647)
一年春一月十七日 비담을 죽이다 (AD 647)
一年春二月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다 (AD 647)
一年 당태종이 사신을 보내다 (AD 647)
一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647)
一年 연호를 태화로 바꾸다 (AD 647)
一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647)
一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AD 647)
一年冬十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AD 647)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648)
二年春三月 백제가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다 (AD 648)
二年 한질허를 당나라에 보내다 (AD 648)
二年 이찬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다 (AD 648)
三年春一月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다 (AD 649)
三年秋八月 백제가 7개 성을 함락시키다 (AD 649)
四年夏四月 진골에게 아홀을 갖게 하다 (AD 650)
四年夏六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650)
三年 왕이 태평송을 짓다 (AD 649)
四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다 (AD 650)
五年春一月一日 백관으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다 (AD 651)
五年春二月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다 (AD 651)
五年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다 (AD 651)
六年春一月 파진찬 천효를 좌리방부령으로 삼다 (AD 652)
六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652)
六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AD 652)
七年冬十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653)
八年春三月 왕이 죽다 (AD 654)
재위 1년차의 기록이 많은 것만 봐도 순조로운 즉위는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고 결국 당나라의 의관 착용과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22], 다음의 치당태평송까지 짓는 등 당시 신라의 급한 사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7.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7.1. 드라마 삼국기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 있을 법한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당나라를 찬양하는 시(치당태평송)을 직접 수를 놓아 바쳐야 한다는 사실 및 김춘추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자신은 얼굴 마담 수준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원래 정치나 권력에 관심있는 인물이 아닌데도 마지막 남은 성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뜻과 상관 없이 즉위했기 때문에 궁궐 생활에 무척 외로워한다. 그런데 원효의 설법을 듣고 그에게 반해서 마음을 고백했다가 완곡하게 거절당하고 슬퍼한다. 결국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승하하게 되는데, 자신의 장례식 불사를 원효에게 주관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겨 마지막까지 원효에 대한 연심을 간직했음을 보여준다.
정권을 장악한 김춘추를 은근히 싫어하면서도 김춘추의 딸 요석[23]과는 자매애 혹은 우정 비슷한 감정으로 서로 의지하며 무척 친하게 지낸다. 남편을 잃고 외롭게 지내던 요석도 진덕여왕 옆에서 원효를 만나고 같이 반한다. 마성의 원효 하지만 요석은 여왕이 원효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어서 여왕 생전에는 자기 마음을 내보이지 못한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 김춘추가 왕이 된 후에 역사에 기록된 대로 원효와 이어진다.
7.2. 드라마 선덕여왕
아예 짤렸다.
원래 극 초반 때는 그녀의 설정이 잡혀있었으나, 결국 아예 언급조차 되질 않았다. 해당 드라마가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끝나기 때문에 뒤에 왕위를 잇는 진덕여왕이 아예 안 나온 건 좀 부자연스럽긴 했다. 마지막화의 미 방영분 중에 선덕여왕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승만 공주에게 맡기고 좀 더 힘을 기르라는 장면에서 한 번 언급이 됐지만 이 장면이 통편집됐다. 뭐, 드라마 내용의 기반이 되었던 같은 이름의 소설에선 주요 조연 중 하나로 계속 등장하지만.
7.3.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손여은.
44화에서 김춘추가 선덕여왕에게 승만 공주를 후계자로 지명하라 주청하는 장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현재는 여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고 있으며 최근에 알천과 함께 백제에 사신으로 가서 김춘추를 데려왔다.
작중에서는 비담의 난을 진압할 때 김유신의 계책을 위해 연을 직접 만드는 데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즉위한 이후로는 큰 활약 없이 재위 기간을 보내고 알천이나 김춘추, 김유신 등의 보좌를 받다가 김춘추가 섭정이 된 후 곧 극 중에서 퇴장한다. 작중에서 승하하는 장면은 없이 내레이션으로 승하했다는 언급이 나오고, 바로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의외로 사극 비주얼이 폭발적이라 당시 인터넷에서 유일하게 대왕의 꿈을 달리던 디시인사이드 KBS 드라마 갤러리에서 캐스팅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7.4. 미라쥬 메모리얼
중국의 게임인 미라쥬 메모리얼에서 A랭크 미라쥬로 등장한다.
[1] 진덕여왕 4년부터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받게 되면서 독자적인 연호였던 "태화" 연호는 폐지되었다. 즉 신라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연호.
[2] 사촌자매인 덕만(德曼)과 항렬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천명은? 천명은 엉뚱하게도 숙모인 월명과 같은 항렬자를 썼다. 출생의 비밀?
[3]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
[4] 다만 그녀가 어째서 성골인지는 잘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실세였던 김춘추가 선덕여왕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백성들을 추스르기 위해 그 대신이 될 만한 여왕으로 승만공주를 추대했다는 설도 있고, 아예 김춘추와 김유신이 짜고 비담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승만공주를 허수아비 여왕으로 추대한 후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정설은 아니므로 너무 맹신하지 말 것.
[5] 자식도 없었고, 혹 자식이 있었다 해도 성골 남성이 없으므로 아이의 아버지는 진골 이하일테니 그러면 김춘추보다 골품이 높다고 할 수도 없다.
[6] 다음 왕이자 최초의 진골 왕 김춘추부터는 왕의 이름도 유교적인 이름으로 바뀐다. 신라 상대와 달리 중대~하대 왕들은 성이 김씨인 것까지 겹쳐서 현대 한국인 이름이라 생각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어감인 이름이 많은데, 한국인 이름이 유교적 사회의 작명법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 아름다운 여왕이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연령대는 젊은 여왕이었다. 즉위할 당시 나이는 10대 후반 ~ 20대 전반이었고 10년 재위한 뒤에 조카 효공왕에게 물려주었으니까.
[8] 여러 매체에서도 진덕여왕은 약간 살이 찐 통통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진덕여왕의 연령대를 고려하면 나잇살 때문에 살찐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40대 ~ 50대 여성 중에서 배 안 나온 사람 찾기는 정말 힘들다. 겉으로 보이기엔 날씬해 보여도 다들 나잇살이 있다.
[9] 진덕여왕 때부터 당소척이 사용되었는데 1척에 24.5cm이므로 7척이면 약 172cm 정도다. 현대 기준으로도 여자 키가 172cm면 꽤나 장신이다. 하물며 진덕여왕은 7세기 사람이다.
[10] 후한 시절 1척의 길이는 23cm이므로 유비의 키는 172cm가 된다.
[11]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체격이 크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그것'도 매우 크다고 나온다. 물론 그것과 전체 체격의 크기는 대체로 비례한다.
[12] 삼국유사에 따르면 키가 무려 11척이라고 하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m 53cm 정도다.
[13]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이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오를 수도 있었지만,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로 인한 혼란을 우려한 탓인지 어떻게든 성골을 찾아서 어거지로 왕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있긴 하다. 또한 하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상황도 의미심장하다.
[14]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648년의 김춘추가 동궁(東宮), 즉 태자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쓰고 있어서 이미 진덕여왕의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5] 女主不能善理.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비담의 난의 명분이었다.
[16] 오늘날의 춘천, 철원 일대.
[17] 일본서기에만 관련 기록이 있다.
[18] 백제가 중국에 고구려 좀 공격해달라고 징징대다 정작 진짜로 중국이 고구려를 치면 나몰라라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건 이미 백 년쯤 전인 수나라 수 문제, 백제 위덕왕 시절부터 시작해 여러 번 있었다. 백통수
[19] 원문은 昭我唐家光(소아당가황)이다. 이 시는 5언시로 2-3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 다른 모든 구절은 2-3으로 끊어 해석하였으나 해당 부분만 1-4로 해석을 하였다. 2-3으로 해석을 한다면 "우리에게 비추리라, 당나라의 빛이여!" 라는 뜻이 된다. 전후 문맥상으로 봐도 이 해석이 타당하지 않을까?
[20] 일본서기 권25 고토쿠 천황 652년 6월 기사.
[21] 신하들이 들고 다니는 길쭉한 상아 재질의 막대기.
[22] 김부식은 신라가 다시 중국의 연호로 복귀한 걸 보고 '중국의 신하 주제에 잘못된 짓을 하다가 이제야 바로잡았다'면서 삼국사기에 기술했다.
[23] 훗날 원효와 이어져 설총을 낳는 요석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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