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일성이사금 (재위 : AD 134-154)-나무위키

2020. 8. 10. 04:18신라 상(BC69-356)

1. 개요 2. 아버지는 누구? 3. 생애

3.1. 재위 기간 및 업적

4. 일성왕릉 5. 삼국사기 기록 6. 관련 문서

1. 개요

신라의 제7대 왕. 칭호는 이사금.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 지소례부인이다.

박씨 족보에서는 44년생이라고는 하는데 불분명하다.

2. 아버지는 누구?

삼국사기에선 유리 이사금의 장남 또는 일지(日知)[1] 갈문왕의 아들, 삼국유사에선 유리 이사금의 형 또는 지마 이사금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단 유리 이사금의 아들일 경우, 일성 이사금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 왕자 천일창일 가능성이 있다. 천일창은 신라 왕자로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일본에 넘어갔다고 하는데 이게 두 나라의 역사서를 대조해 보면 일성 이사금의 행적과 그나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기록에서 일성이사금은 아주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젊은 시절의 행적 기록이 비어있는 것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한편, 148년(일성 이사금 15년)에 박아도갈문왕으로 봉한 사실을 근거로 박아도가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역사학계에선 박아도가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데,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성이 박아도의 아들이라면, 즉위한지 15년이나 지나서야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삼은 것이 문제가 된다. 게다가 박아도가 파사 이사금의 손자라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도 문제다. 사실 파사 이사금부터가 유리 이사금의 차남 또는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해진다.

가족 관계에 대해 혼란스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의심하게 하는 단서 중 하나가 되고 있으며, 해석에 대해서도 각종 학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삼국유사까지 가져와 가족 관계를 따져보면 언뜻 보기에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여럿 있는데, 기록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에 대두되는 학설이다. 족보를 따지느냐, 씨족을 따지느냐에 의한 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설에도 허점이 있고, 실질적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대체 뭔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선 알기 힘들다. 성골진골을 나누는 기준도 100%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훨씬 앞 시대인 이때야 뭐...

그리고 일성 이사금과 파사 이사금 둘 다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라는 것이 맞다고 가정하고서 삼국사기 기록을 보더라도 조금 이상하다. 일성 이사금이 형, 파사 이사금이 동생인데 동생이 먼저 즉위했으며, 즉위한 것은 서기 80년. 이후 조카지마 이사금을 한 번 거쳐, 일성 이사금이 왕이 된다. 동생이 왕위에 오른 지 54년 만에 형이, 아버지가 사망한 지 77년 만에 장남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후 왕위에 올라 20년을 다스린다. 이쯤 되면 일성 이사금의 나이를 역으로 계산해 볼 수 있는데, 파사 이사금의 기록에 따르면 형보다 현명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더 똑똑한지 아닌지 알려면 그래도 최소한 8세 이상은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형은 서기 80년에 최소 9세 이상. 그렇다면 왕위에 오를 때는 최소 63세가 된다. 이후 20년 동안 더 살았으니 삼국사기 기록을 믿는다면 최소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말이 되며, 너무 최소에 맞춰 타이트하게 계산하지 않고 좀 더 현실성 있게 되려면 90세 이상 장수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아버지 유리 이사금이 죽은 해에 일성 이사금이 태어났다고 해도 최소 97세 이상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것도 타이트하게 계산한 것이니 실제로는 100세를 넘겼다는 말이 된다. 이런 비현실적인 수명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고구려 태조왕 등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다만 위에 나온 기록 중 형보다 현명하다는 기록은 표면상의 이유고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3. 생애

위에서 썼듯 왕이 됐을 때 꽤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즉위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남은 게 별로 없다.

3.1. 재위 기간 및 업적

134년 즉위 직후 다른 왕들처럼 시조 묘(나정)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한 뒤, 138년 금성(金城)에 국가 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州郡)이 제방(堤防)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다. 당시 금은과 주옥의 사용이 진한의 풍습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당시 귀속된 오환족의 고유 풍습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기록에는 오환족의 풍습 중 금은주옥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고 되어 있다. 146년에는 전 전왕 파사 이사금 때 항복했던 압독국(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고 주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남쪽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에 삼았다.

전왕과 마찬가지로 재위 중에 여러 번 북방 말갈족의 침입을 받아서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약 세 차례(137년 1번, 139년 2번)의 침입이 있었다. 138년 10월 왕이 친히 북쪽 영토를 순행하고 태백산에 들러 하늘에 제를 올리기도 했고 140년 2월 말갈을 막기 위해 장령 고개에 목책을 세우기도 했다. 말갈이 자꾸 쳐들어오자 142년 7월에는 아예 예방전쟁격으로 선제 공격해서 뿌리를 뽑자고[2] 대신들을 불러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찬 웅선이 반대해서 그냥 그만뒀다.

전왕과 마찬가지로 재위 기간 내내 천재지변도 잦았는데, 145년에 남쪽 지방 가뭄은 특히 심각했는지 타 지역에서 식량을 급히 옮겨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재위 21년인 154년, 붕어하였다.

그의 아들이 일성 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신라 초기 마지막 박씨 국왕인 아달라 이사금이다.

4. 일성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23번지 소재. 대한민국의 사적 제173호.

그런데 이 왕릉은 1960년도 정비 과정에서 석실분으로 밝혀졌는데 석실분은 6세기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짜 일성이사금의 능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신라왕릉 문서에도 있듯 고고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조선시대에 비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덤의 주인을 경애왕이나 효공왕으로 보는 설도 있다. 무덤의 정체와 별개로 주변 경치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일성 이사금 본기


一年秋八月 일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134)
一年秋九月 사면을 하다
二年春一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AD 135)
三年春一月 웅선을 이찬으로 근종을 일길찬으로 임명하다 (AD 136)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AD 137)
五年春二月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다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AD 138)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AD 138)
六年秋七月 서리가 콩을 해치다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AD 139)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AD 139)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AD 140)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41)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AD 142)
十年春二月 궁실을 수리하다 (AD 143)
十年夏六月 화성이 토성을 침범하다 (AD 143)
十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AD 143)
十一年春二月 제방 수리와 전야 개척을 명하고 민간의 금은주옥 사용을 금하다 ( 144)
十二年 기근이 들자 진휼을 베풀다 (AD 145)
十三年冬十月 압독의 반란을 토벌하다 (AD 146)
十四年秋七月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추천하도록 하다 (AD 147)
十五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득훈을 사찬으로 삼고 선충을 나마로 삼다
十六年秋八月 살별이 천시에 나타나다 (AD 149)
十六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다 (AD 149)
十七年夏四月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八年春二月 대선을 이찬으로 삼다 (AD 151)
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年冬十月 궁궐 문이 불타고 혜성이 나타나다 (AD 153)
二十一年春二月 왕이 죽다 (AD 154)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일성 이사금까지 삼국사기 1권이다.

6. 관련 문서

실제로 장수한 왕들

[1] 연오랑과 동일인물로 비정된다.[2] 고려조선 초기에 수시로 여진족을 털어서 이쪽으로 못 쳐들어오게 약화시켜놓았던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