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유리이사금 (재위 : AD24-57)-나무위키

2020. 8. 10. 04:02신라 상(BC69-356)

 

신라 제3대 국왕
儒理 尼師今
유리 이사금

시호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별호

노례 이사금(弩禮 尼師今)
세리지 이사금(世里智 尼師今)

출생
(음력)

기원전 20년(?)[1]

사망
(음력)

기원후 57년 10월

능묘

사릉원(蛇陵園)

재위
(음력)

기원후 24년 9월 ~ 57년 10월
(33년 1개월)

성씨

박(朴)

유리(儒理) / 치리(治理) / 치리(齒理)

부모

부왕 남해 차차웅, 모후 운제부인

형제

여동생 아효부인

자녀

왕자 박일성(朴逸聖), 박파사(朴婆娑)
왕녀 2명

 

1. 개요2. 일생과 업적3. 삼국사기 기록4. 관련 기록

"내가 모자란 몸으로 군림하매 백성을 먹여살리지 못하여 노약자들을 이런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으니, 이는 내 죄이다."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5년조#

1. 개요

신라의 제3대 . 이사금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남해 차차웅운제부인의 장남으로, 남해 차차웅이 왕이었을 때 태자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치리(治理) 또는 치리(齒理)가 있다. 다른 이름으로 노례 이사금(弩禮尼師今), 간혹 유리왕(儒理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도 한자가 다른 유리왕이 있고, 삼국사기 기록 상으로는 살았던 시대도 비슷하기 때문에[2] 그냥 유리왕이라고 하면 헷갈릴 여지가 있다. 두 유리왕이 비록 이름의 한자는 다르지만, 둘 다 순우리말 '누리'의 음차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 이사금은 한자까지 똑같은 유리라는 이름과 유례라는 이름 두 설이 있는데, 김부식도 어느 쪽이 맞는지 옛 기록을 봐도 알 수 없다고 삼국사기에 써 놨다. 다만 14대 왕은 석씨 왕이라 '석유리'고, 이 왕은 박씨 '박유리', 고구려의 2대 왕은 '고유리'다.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딸, 혹은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3]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2. 일생과 업적

남해 차차웅이 후계자를 확실하게 정해주지 않고 둘 중 현명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유언했는데, 일단 태자라서 좀더 계승 서열이 높았던 유리는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지만, 석탈해와의 유명한 잇자국 대결(?)을 통해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서기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기록에서는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또 다른 해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치아 갯수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4]에 따라, 서로 을 문 후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 즉 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여기(잇금)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대적 관점에 따라 야만적이고 미신이며 어린아이들 노는 문화라고도 볼 수도 있다. 이빨 갯수와 덕망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연구(...)는 없겠으나, 최소한 초기 신라에서의 왕위란 가문배경이나 정통계승권, 군주로써의 행정력, 카리스마보다는 '덕망'이 상위에 있는 가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다른 동양권은 물론 서양권에서도 찾아보긴 힘든 아주 독특한 초창기 신라만의 문화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효율적이랄 수도 있는데 어차피 원삼국시대인 신라 초창기에 지리상 한반도 남동쪽 구석에 있는 신라는 인구유입도 적었겠고 각 씨족 중에서 누가 군장이 될거냐 서로 싸우다가 인구가 줄어들거나 한쪽이 이긴다고 해도 감정이 틀어져 결속력이 약해지기 보다는, 덮어놓고 미신을 만들어서(..) 이빨 개수 기준에 따라 군장을 뽑아 최대한 수평적으로 통치하는게 낫을 수 있다, 그러다 물산이 풍부해지고 규모가 커지면 주변 씨족들이나 야만인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되려 이사와서 인구가 늘었을 것이다.[5][6]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 문화를 만든 것 이외에는 참 별 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승하할 때까지 15년 정도 기간 동안의 역사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문서를 참고할 것.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저 주요 한국의 성씨들이 유리 이사금 대에 정립됐다는 것. 물론 고대 한국에는 아직까지 성씨 개념이 거의 없었고, 6촌 → 6부 개념은 분명히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훗날 신라 중대 이후 어느 시점에 가문의 조상까지 소급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한민족 명절추석의 여러 풍습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유리이사금 때다. 추석 문서 참조.

5년(서기 28년) 겨울에는 유리 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는 느낀 바가 있어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먹인 뒤,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 가족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펼치자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에까지 나서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이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새로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전근대 시대는 인구가 많아서 생산력이 높은 나라가 거의 무조건 유리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주시 일대의 성읍국가였던 초기 신라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북방에서는 고구려 제3대 왕 대무신왕 무휼낙랑군을 격파하자 5천여명의 낙랑 사람들이 피난 왔는데 낙랑이 예전에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음에도 유리 이사금은 낙랑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이 역시 초기 신라의 인구 증가(=국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사실 신라의 전신 6촌이 고조선 유민이었고, 낙랑인은 고조선 멸망 후 설치한 낙랑군 사람, 즉 대부분은 한나라 지배를 받는 고조선 유민이므로 신라 입장에서는 오는 사람을 받지 않을 이유도 없다.

33년을 재위한 후 중병에 걸리자 두 아들(일성, 파사)보다 매제 석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해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낸다. 아무튼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평가와는 별개로 훗날 늦게나마 각자 왕에 오르긴 한다.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여러번 공이 있다. 짐(朕)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따라오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 대위(大位)를 있게하라. 내 유훈을 잊지 말라."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가족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5대 국왕 파사 이사금, 첫째 아들이 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이다. 그리고 한가위의 유래를 설명할 때 2명의 딸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 이사금이 즉위할 때 '일성이 적자'라는 언급이 있는 탓에 유리 이사금에게 또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역사학계에선 그리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한데다 왕위에 오르는 순서가 좀 이상하기 때문에, 저 둘이 정말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유리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4)
二年春二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AD 25)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AD 28)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AD 32)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AD 34)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AD 34)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36)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AD 37)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AD 40)
十九年秋八月 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AD 42)

43-53 : 11년 공백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AD 54)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AD 56)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56)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57)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AD 57)

일부 기록은 진흥왕 시대의 것을 상대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기록

 

[1] 이도 다만 추측이다. 남해 차차웅의 유력하게 추측되는 생년으로 보아서 이다. 매제가 되는 탈해 이사금 보다는 많았거나 비슷햇을 것으로 추정한다. [2] 고구려 유리명왕 쪽이 한두 세대 앞의 인물로, 재위 기간은 겹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유리왕의 사망년도와 신라 유리 이사금의 즉위연도는 채 10년이 차이나지 않는다. 사실상 동시대라고 봐도 무방하다.[3] 이 사요왕의 '왕'은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있다. 허루 갈문왕이 '허루왕'으로, 마제 갈문왕이 '마제국왕'으로 적힌 경우가 있어 사요왕의 '왕'이 국왕이 아니라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정설에 가깝다.[4] 정확히는 이가 많다 = 나이가 많다 = 현명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옛날 동양에는 치아가 많으면 더 존귀하다는 인식도 있었는데, 1천 년 쯤 뒤 송나라 시대에 쓰여진 관상학 서적 마의상법(麻衣相法)에서는 '치아가 38개면 이나 제후이고, 36개면 관료갑부, 32개인 사람은 중인(中人), 30개는 보통 사람, 28개는 하층의 가난한 부류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석탈해 일화와는 시대 차이가 상당히 나지만, 치아가 많을수록 현명하고 존귀하다는 인식이 하루아침에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참고할 만하다. 참고로 따로 병이 없다면 일반인의 치아 개수는 사랑니까지 포함해 32개다. 32개를 넘어가면 현대에는 과잉치라고 해서 질병으로 취급한다. 기록대로면 유리 이사금은 치아 생성 세포 DNA에 변이가 일어나, 과잉치를 가진 질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5] 이 시기는 역사학적으로 아직 국가로 분류하지 않는데다 호패법도 없어서 이민이 아주 자유로웠다.[6] 이는 물론 인구가 적었을 때 얘기다. 인구가 많아짐에 비례해 점점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며 그것을 보좌할 각종 제도,법,군대 등이 없으면 통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을 신라에 장착한 세력이 김알지 계통의 경주 김씨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