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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12. 14:32백제 온조-개루왕(BC18-166)

1. 개요 2. 건립에서 파괴까지 3. 어원에 대하여 4. 하남위례성 위치 문제

4.1. 가설 1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4.2. 가설 2 :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4.3. 가설 3 : 몽촌토성 - 풍납토성 이원설4.4. 가설 4 : 천안시 성환읍4.5. 가설 5 : 왕성 이동설

5. 그렇다면 하북위례성의 위치는?6. 위례신도시와의 연관점?

1. 개요

백제 왕조의 도성. 이 시기 백제를 "한성백제(漢城百濟)"라고 한다. 위례성은 서울(한강) 일대인건 확실하나, 그 위치가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최초로 성을 쌓았고, 475년 문주왕웅진성[1]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92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위례성은 하남, 하북 두 성이 있었다.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몽촌토성, 둘 중 하나인 듯하지만[2] 하북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과 달리 전통적으로 위례성은 지금의 충남 직산 일대에 있었던 곳으로 인식되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모두 지금의 직산의 옛 이름이 위례성이라 하고, 한강 이남의 백제가 수도로 두었던 곳은 한성으로 불렀다.

2. 건립에서 파괴까지

졸본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이탈한 세력인 소서노비류, 온조 등이 남부로 내려와 한사군마한의 땅에 거점하게 된다. BC 18년,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에서 건국을 선포하고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세운다.

이 곳에서 말갈족과 전쟁을 벌이고, 성을 세워 낙랑군을 견제하는 등 국력을 불려나갔지만, 백제의 성장을 두려워한 말갈, 낙랑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수세에 밀리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 소서노도 죽자 온조왕은 결국 천도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BC 6년, 온조왕 재위 13년에 한강 이남으로 위례성을 옮기게 된다. 마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성곽을 세웠다. 이 때 새로 쌓은 위례를 하남위례성, 기존의 위례를 하북위례성이라고 구분한다.[3]

새로운 위례성은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붙잡혀 처형되는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로서 존재하였다. 백여 년 뒤 백제가 중흥하고 고구려가 약화된 성왕 시대 551년에 잠깐 고토회복에 성공했지만 곧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된다.

3. 어원에 대하여

위례성(慰禮城)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제기된 상태다. 우선 한자의 뜻 자체를 풀이하여, 예를(禮) 다하는(慰) 성(城)이라는 추측이 있다. 온조 등 고구려에서 탈출한 난민들의 정착을 도와준 마한 임금에 대한 성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초창기에도 그들의 도성을 위례성으로 칭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견이지만 마한 멸망 이후에도 계속 썼음이 걸린다.

또한 '울'(울타리)이라는 고유표현을 음차해 위례라고 쓴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이것은 몽촌토성에서 목책 흔적이 나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힘을 얻은 의견이다. 정약용도 이 설을 지지했지만, 현대에 풍납토성이 등장한 후 이 의견도 상당히 모순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서라벌의 뜻과 마찬가지로. 큰 성, 또는 왕성이라는 뜻이라는 추측이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어라하라고 불렀는데 이 어라하의 음차를 위례로 파악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떻게 어라하의 음차가 위례가 되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4. 하남위례성 위치 문제

초창기 십여년 잠깐 자리해 흔적을 찾기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하북 위례성은 둘째치고, 오랫동안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조차 그 위치가 불명확해 이를 알아내기는 백제 멸망 이후 한국 고대사의 큰 이슈였다. 현대는 물론이고 고려나 조선시대 때도 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후보지도 여러 군데가 꼽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남 위례성은 북으로는 강, 동쪽으로는 높은 산,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있다. 근데 문제는 한국 서해안에 이같은 입지가 수두룩하다는 것.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위례성을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