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신라와의 전쟁
1. 개요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릇이 크고 넓으니 위망이 있었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삼국사기의 다루왕 소개.
백제의 제2대 국왕ㆍ건길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어 계보에 의심이 있기도 한다. 다루왕 혼자 길면 몰라도 앞뒤로 다들 40~50년 정도씩 재위한다고 써 있는데 계산해보면 아들을 가진 시기, 수명이 부자연스럽다.
2. 생애
즉위 전 기록으로는 아버지 온조왕의 재위 28년째인 서기 10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서기 28년에 온조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으로 즉위했다.
선왕인 온조왕과 마찬가지로 말갈[2]과 미친듯이 싸우면서도 계속 내정을 살피려 한 왕이다. 서기 29년(다루왕 2년) 시조 동명묘에 참배했고[3] 말갈과는 30년 10월에 동부의 장수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31년 8월에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러나 34년 마수성을 말갈에 빼앗기는 등 일진일퇴가 이어졌다. 55년에도 말갈이 쳐들어왔고 다루왕은 대비하기 위해 우곡성을 쌓았다.
다루왕 시대는 자연재해가 심해, 곡식을 아끼기 위해 38년 술 빚는 행위를 금지하고[4] 가난한 자에게 2섬씩 곡식을 나눠주는 등 민심 달래기에 힘썼다. 55년 심한 가뭄이 들자 사형수까지 모두 용서해 주기도 했다.
2.1. 신라와의 전쟁
다루왕은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왕들 중 최초로 신라와 칼을 맞댄 왕이다. 훗날 수백년간 다투고 협력한 애증의 관계가 이 때 시작되었다. 다루왕 재위 후반부 39년인 서기 63년 음력 10월에 지금의 청주인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만나려고 했지만, 탈해 이사금이 씹어버린 걸 계기로 악연이 싹트게 된다. 이듬해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하지만 같은 해 겨울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탈해 이사금이 기병 2천명을 보내는 바람에 졌다. 그후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서기 70년에 다시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기록이 누락돼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74년에는 신라의 변방을 공격했으나 탈해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졌다. 75년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음력 9월에 신라가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와산성을 다시 빼앗겼다.
하지만 정말로 다루왕 시대에 백제가 신라와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들이 많다. 일단 백제는 아직도 한강 유역에서 낙랑, 말갈 등과 투닥거리고 있었으며 신라 역시 왜, 구야국 등과 싸우기 바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둘 다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소백산맥 일대까지 아직 진출하지 못했다. 다른 역사서와의 기록 충돌도 있는데, 또 다른 사서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훨씬 이후 시대인 4세기 신라 왕 걸해 이질금(흘해 이사금) 때에 백제와 신라가 처음으로 군사적으로 충돌했다고 쓰고 있다.[5] 그래서 이 기록들을 해명하기 위한 수많은 썰들이 쏟아졌는데,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신라가 속한 진한과 백제가 속한 마한 사이의 충돌이다. 또는 마한의 소국과 진한의 소국이 싸운 기록인데 삼한의 기록이 전부 누락되고 백제와 신라로만 기록됐다.
- 소백산맥 일대의 철광을 두고 백제와 훗날 신라에 합류하는 김씨 족단이 전쟁을 벌인 것이다.
- 신라 쪽으로 남하하던 진국계와 백제 간의 전쟁이다(천관우).
- 후대에 있었던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끌어올린 기록이다. 선석열(1994).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 백제관계기사의 검토와 그 기년. 한국고대사연구, 7, 303-350에서는, 다루왕 시기의 신라와의 무력 충돌 기록이 위덕왕 대의 사실을 과거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 그냥 헛소리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마한 54개국을 거느리는 마한과 진한 소국 하나인 신라가 어떻게 전쟁을 하냐면서 전쟁을 부인했다.
- 이때의 전쟁은 일시적 무력 충돌에 가까운 것이며 후대의 정복 전쟁과는 다르다(임용한, '한국 고대 전쟁사').
- 신라 관련 사서에만 있던 기록을 백제본기에 옮겨적은 것이다. 백제보단 신라의 병력 상황 등이 더 자세히 묘사되며, 신라 측의 사람 이름들만 주구장창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라와의 전쟁 기록이 대다수지만 고구려와의 충돌 기록은 없다. 사실 초기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에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한사군, 동예, 옥저 등으로 막혀있었으니 초기에는 서로 못 싸우는 게 정상이다.
3. 여담
이름인 다루에 대해서는 '지배자'를 뜻하는 당시 말이며 몽골어의 '다루(daru)'가 어원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루는 오히려 부여계 언어에서 ~류, 삼한계 언어에서 ~로, ~리, ~례와 혼용되는 례가 많으므로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또한 부여왕 해부루(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고구려의 제 2대왕인 유리왕(해유류), 제 3대왕인 대무신왕(해주류)등 婁(별 이름 루),留(머무를 류)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비류는 流(흐를유)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婁를 쓰는 다루왕,기루왕,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해씨는 고구려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백제 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 개국공신 해루[6]도 있다.후에 해씨는 대성팔족중 하나가 된다.) 해부루 → 우태 → 비류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 '비류계'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과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과는 다른 왕통이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들이 물러나고 다시 온조왕계 왕들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노중국(1988)<백제정치사연구>)게다가 이후 초고왕이 집권한 후 고이왕이 집권해 이후로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투쟁을 벌이다 근초고왕 때부터 초고왕계가 집권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의 대거출현과 고이왕을 우태-비류계로 해석(천관우(1976)<한국의 국가형성>)(노중국(1988)<백제정치사연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온조왕계-초고왕계,비류계-고이왕계의 권력다툼으로 볼 수도 있을듯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다루왕 본기
一年春二月 다루왕이 즉위하다 (AD 28)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AD 29)
二年春二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AD 29)
三年冬十月 흘우가 말갈과 싸워 대승을 거두다 (AD 30)
四年秋八月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다 (AD 31)
四年秋九月 횡악 아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AD 31)
六年春一月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다 (AD 33)
六年春二月 주군에 명하여 쌀농사를 짓도록 하다 (AD 33)
七年春二月 흘우를 우보로 임명하다 (AD 34)
七年夏四月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나다 (AD 34)
七年秋九月 말갈이 마수성을 침입하다 (AD 34)
七年冬十月 말갈이 병산책을 습격하다 (AD 34)
十年冬十月 흘우와 진회를 좌보와 우보로 임명하다 (AD 37)
十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다 (AD 37)
十一年 술 빚는 것을 금하다 (AD 38)
十一年冬十月 백성을 위무하고 곡식을 나눠주다(AD 38)
二十一年春二月 왕궁의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죽다 (AD 48)
二十一年春三月 좌보 흘우가 사망하다 (AD 48)
二十八年 가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다 (AD 55)
二十八年秋八月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55)
二十九年春二月 우곡성을 쌓고 말갈을 방어하다 (AD 56)
三十六年冬十月 사신을 보내 신라 왕을 만나기를 청하다 (AD 63)
三十七年 신라의 와산성과 구양성을 공격하다 (AD 64)
三十九年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다 (AD 66)
四十三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AD 70)
四十六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73)
四十七年秋八月 장수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AD 74)
四十八年冬十月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75)
四十九年秋九月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다 (AD 76)
五十年秋九月 다루왕이 죽다 (AD 77)
신라와 말갈의 무한반복. 참고로 36년차부터는 전부 신라측 기록을 끌어다 채운 것이기 때문에 백제 단독의 기록은 29년차에서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고, 11년차~21년차 기록은 전부 말소되어 있다.
[1] 신찬성씨록 백제 단락에 동명성왕의 손자로 등장하는 사람.[2]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 쪽의 말갈이 아니라 2번 단락의 가짜말갈, 즉 동예 등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3] 고구려 동명성왕일 수도 있지만 부여 동명왕으로 보기도 한다.[4]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기록이 남아있는 금주령 기록이다.[5] 삼국유사 왕력편 "第十六乞解尼叱今: 昔氏. 父于老音角干, 即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十六年. 是王代百済兵始來侵." 제16대 걸해 이질금은 석씨이다.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으로 내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오년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이 왕 대에 백제의 병사가 처음으로 침공해왔다.[6] 첨언으로 이 해루도 별 이름 루를 사용하며 십제공신 10명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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