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봉상왕 (292-300)-나무위키

2020. 9. 6. 01:34고구려 상(BC37-AD 391)/차대왕 - 봉상왕 (146-300)

1. 개요 2. 치세 3. 폭군이란 평가  4. 삼국사기 기록  5. 각종 매체에서

 

1. 개요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 않길 바란다.”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復言."


- 폭정을 그만두라는 창조리의 간언에 웃으며 답한 말.
삼국사기 中


고구려 제14대 군주.

2. 치세

초기 국상 상루가 사망하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았다. 명장 고노자도 등용하면서 국상 창조리의 건의를 수용하여 그를 신성 태수로 삼았고, 연(燕)의 모용외의 침략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 때 서진291년 팔왕의 난으로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293년 연나라가 쳐들어왔다.

293년의 1차 침공에서 연의 모용외는 수도로 바로 진격하는 작전을 감행했고, 이에 당황하여 신성(新城)으로 몽진을 떠난 봉상왕을 곡림에서 따라잡았으나 마침 신성 태수로 부임해있던 고노자의 500명으로 이루어진 기병대에 반격당하며 패퇴하고 말았고, 296년에 벌어진 2차 침공에서는 서천왕의 능이 위치한 고국원까지 도달하여 서천왕의 시신 및 부장품을 도굴하려 했으나 작업에 투입된 인부가 끊임없이 병사하고 무덤에서 풍악이 울린다며 그대로 도주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고구려군의 반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애초에 연은 고구려의 주요 방어선을 뚫지 않고 평양이나 고국원으로 그대로 달려가는 그야말로 어택땅 전략을 사용했기에, 수도 근교까지 적이 밀고 들어왔음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전의 동천왕이나 뒷날의 고국원왕의 경우를 생각하면 분명 선방했다는 것이 뚜렷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반역 음모를 경계해서 친족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던 시기인지라 할아버지인 중천왕, 아버지인 서천왕이 모두 왕위를 노린 자기 동생들의 반란을 겪었다. 더 앞으로 나가면 신대왕의 아들들 즉 두 고발기가 자기 동생들 즉 고국천왕산상왕의 즉위에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 결국 292년에는 숙신을 격파하여 국민적 영웅이 된 숙부 달가, 그리고 후에 동생 돌고를 주살하였다. 특히 삼촌 고달가는 재위하자마자(292년 3월) 바로 숙청했다. 그리고 1년 뒤 동생 고돌고의 목숨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래도 돌고는 훗날 아들 미천왕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해주긴 했다.

이러한 왕가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나라의 침공을 불러왔다는 해석도 꽤 제기된다. 그런가 하면 나라가 흉년을 겪고 있음에도 궁실을 대규모로 중축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창조리가 간언했지만 오히려 욕만 실컷 얻어먹었고 결국 봉상왕이 구제 불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창조리가 정변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폐위당한다.

폐위된 뒤 후환이 두려웠는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스스로 자진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다만 클레오파트라 등 다른 여러 경우처럼 자살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일각에서는 창조리 일파가 그들을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도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물증에 해당할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3. 폭군이란 평가

일단 삼국사기 내에서 봉상왕의 유년시절에 대해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라고 기록해서 어린 시절부터 폭군의 기질이 보였다고 평[2]하고 있기는 한데, 삼국사기 기록 자체가 매우 적어서 재위 7년 이전으로는 봉상왕이 확실한 폭군이었다고 하기가 애매하다. 자기 숙부나 동생을 처형한 기록이 있긴 한데, 이건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이 있으면 하는 거의 공통적인 행동이고, 창조리고노자를 등용한 것을 보면 능력없고 잔인하기만 한 군주라 보기 힘들다. 그보다 애초에 봉상왕 7년 이전에는 내정에 관한 기록이 창조리 등용한 일 빼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치세초기부터 막장이었는지 타당하게 판단할 근거 자체가 없다.

창조리 등의 신하들이 간언한 부분들을 보면 재위 7년 이후로 폭군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봉상왕 본기
一年 봉상왕이 즉위하다 (292)
一年春三月 안국군 달가를 죽이다 (292)
一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292)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293)
二年秋九月 아우 돌고를 자결하게 하다 (293)
三年秋九月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다 (294)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296)
七年秋九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298)
七年冬十月 궁실을 증축하다 (298)
七年冬十一月 을불을 찾아서 죽이려 하다 (298)
八年秋九月 귀신이 봉산에서 울다 (299)
八年冬十二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299)
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다 (300)
九年秋八月 봉상왕이 죽다 (300)
九年秋八月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오게 하다 (300)

5. 각종 매체에서

곽재식의 소설 모살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여기에서는 아버지인 서천왕의 후궁, 소 태후가 봉상왕을 공격하고자 옛날 애인이자 왕의 숙부인 달가를 찾아가 봉상왕이 자신을 고문하며 괴롭히고 있다고 사기를 치며 봉상왕을 공격하자고 충동질한다. 그런데 봉상왕 또한 숙부 달가의 명성을 질투하고 있어서, 달가를 제거하기 위해 달가가 소 태후와 놀아나거나 소 태후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음모를 꾸며서 몰아 달가를 사형시키고 소 태후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1] 서천왕이 왕후 우씨와 혼인한 해가 271년이라 그 이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2] 일반적으로 왕의 기록에 대해서는 미화하기 마련인데도 이렇게 적힌 것을 두고,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랬다고 보는 시각과 미천왕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코자 폭군의 프레임을 씌우는 과정에서 조작된 기록이라는 시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