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대무신왕 (18-44)-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20. 9. 6. 03:53고구려 상(BC37-AD 391)/동명성왕 - 태조왕 (BC27-146)

대무신왕(大武神王)

고대사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제3대(재위: 18~44) 왕.   

 

이칭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무휼(無恤)분야고대사유형인물시대고대-삼국-고구려성격왕성별남출생일기원후 4년(유리왕 23)사망일기원후 44년(대무신왕 27)경력고구려 태자(기원후 14년), 고구려 제3대 국왕(재위: 18∼44년)관련사건대무신왕 32년에 낙랑군 동부도위 영동7현 공취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제3대(재위: 18~44) 왕.

키워드

개설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기간은 서기 18∼44년이다. 이름은 무휼(無恤)이며,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4년(유리왕 33)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다.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대외적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생애 / 활동사항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고, 이어 이웃의 구다왕국(句茶王國)의 항복을 받았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해왔으나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32년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樂浪)을 공격하는 등 성장된 국력을 과시하면서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런데 대무신왕 32년에 고구려가 공취한 낙랑군(樂浪郡)은 평양 일대의 낙랑이 아닌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와 관련된 옥저 등 영동7현(嶺東七縣) 세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원래 이 지역은 임둔군(臨屯郡) 폐지 후 낙랑군의 동부도위에 의해 관할되다가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30년에 낙랑인 왕조(王調)의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동부도위 세력 역시 독자화하면서 중국 군현세력의 배후 지원이 사라졌고, 고구려가 이러한 상황에서 옥저 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한 군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낙랑보다는 현도군(玄菟郡)의 이치(移置)가 고구려의 성장과 직결되어 있었다.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다시 동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지만, 대무신왕대에는 아직 현도군의 기능 강화와 재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당시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담당한 것은 28년 요동태수의 침략에서도 보듯 요동군(遼東郡)이었다.

한편 32년 고구려는 후한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44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그의 본기(本紀)에는 「적오설화(赤烏說話)」·「부정설화(負鼎說話)」·「초인설화(草人說話)」·「이어설화(鯉魚說話)」·「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고구려(高句麗)의 국가형성(國家形成)과 한(漢)의 대외정책(對外政策)」(여호규,『군사(軍史)』54,2005)

  •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임기환,『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34,2004)

  • 『고구려사 연구』(노태돈,사계절,1999)

  • 「고구려 초기(高句麗 初期)의 좌·우보(左·右輔)와 국상(國相)」(이종욱,『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79)

집필자

집필 (1996년)김용선개정 (2009년)김선주(중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