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상(BC37-AD 391)/차대왕 - 봉상왕 (146-300)

<펌> 신대왕 (165-179)-나무위키

Chung Park 2020. 9. 6. 07:25

1. 소개2. 쿠데타, 그리고 재위3. 내정4. 삼국사기 기록

1. 소개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외친 말.

고구려의 제8대 군주. 휘는 백고 혹은 백구.

태조대왕차대왕의 관계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 탓인지 신대왕 역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기록마다 다르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범엽의 《후한서》에는 차대왕의 아들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정설은 없는 듯. 일단 한국백과사전 등에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동생라는 설을 먼저 기술하고서 나머지 2개의 설도 같이 언급하는 편이다. 기록된 시기를 생각해보자면 《후한서》 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으나, 딱히 그렇지도 않은 편. 그런 경우라면 차대왕을 몰아내고 그 아들인 신대왕을 옹립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태조왕 - 차대왕 관계도 분명하지 않으니, 맥락상으로는 사실 삼국지의 태조왕계 쪽이 더 깔끔한 편. 삼국지에선 고국천왕이 나오지 않는 오류가 있으나, 그렇다고 후한서가 더 옳다고 보기엔 정황이 어긋나 있다. 그런데 위진 남북조시대의 사서인 《북사》에는 신대왕의 자손인 산상왕 또는 동천왕을 태조왕의 증손이라고 기록한 내용도 있다. 신채호는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더 현실적이라 보고 신대왕도 차대왕과 같이 태조왕의 서자로 봤다.

일단, 현재로선 차대왕이든 신대왕이든, 계루부 지파 내의 "형"관직을 차지하던 유력자들이었고 이것이 혈연 관계로 정리되었다는 설명도 있다.[7]

한편, 아들이 5명이 있었는데, 그중 차남 고남무가 고국천왕, 4남 고연우가 산상왕이다.

애시당초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원래 당시 중국 기록에선 그 이전 태조왕이 121년에 사망한 뒤 122년부터 165년까지 차대왕이 재위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실제보다 24년을 줄였다. 그리고 차대왕도 실제 나이는 삼국사기 기록보다 24살은 젊어야 맞다. 신대왕도 차대왕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줄여야 한다. 삼국사기에서 차대왕과 신대왕의 18년정도 나이차를 감안하면 실제보다 18살은 더 많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의심된다.

2. 쿠데타, 그리고 재위

등극한 고추가 재사의 아들

6대

7대

8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차대왕(次大王)

신대왕(新大王)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으키자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백고를 임금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다. 당시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차대왕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4년전인 122년에 즉위하였고 실제 재위기간도 삼국사기보다 24년이나 많은 43년 정도다. 그래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재위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업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나이 차를 감안한다면 차대왕의 출생연도는 113년 쯤으로 추정되며 신대왕은 차대왕과 형제가 아니라 차대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165년) 국조왕(태조왕)의 나이가 109세였는데, 두 선왕(태조왕 & 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라는 기록도 있다.

차대왕 시기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립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그를 안심시키고 왕위에 올렸다 한다. 아무래도 아버지(혹은 형, 혹은 삼촌인)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듯하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8] 형 또는 아버지인 차대왕처럼 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 내정

신대왕의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였는데 1차 좌원전투이다.

명립답부를 매우 신뢰했으며 그가 워낙에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답부가 죽은 이후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하였고 이후 둘째 아들 남무(고국천왕)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기록이 남겨진 아들이 다섯 명이나 되고, 그중에 두명이 왕이 되었다. 다만 장자 계승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두차례나 골육 상쟁이 있었던건 좀 안습. 아들 다섯의 이름이 장남부터 발기(拔奇), 남무(男武, 고국천왕), 발기(發岐), 연우(산상왕), 계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165)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국상으로 삼다. (166)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167)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167)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168)
五年 현도 태수 공손탁을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169)

170-171 : 2년 공백


八年冬十一月 명립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172)

173-175 : 3년 공백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176)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176)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178)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179)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붕어하다. (179)

[1] 둘째 아들.[2] 맏아들. 기록상 모순이 보인다.[3] 셋째 아들.[4] 넷째 아들.[5] 다섯째 아들.[6] 당시 중국사서들의 내용을 미루어보아 실제로는 실제 생년은 113년경이 맞을 듯 하다.[7] 동북아 역사 재단의 초기 고구려 정치사 참조.[8] 중국기록을 참고하면 사실 53살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