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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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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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양(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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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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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읍 → 대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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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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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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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실권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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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 (대전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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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
화하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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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포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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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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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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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3.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3.2. 삼진 분립 후3.3. 초한쟁패기
1. 소개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안읍(安邑)이며 후기 수도는 대량(大梁).
2. 역사
본래 진(晉)나라의 일부였지만 진문공 때 공신인 위주[5]의 후손인 위씨(魏氏)가 조씨(趙氏), 한씨(韓氏) 등과 함께 주(周) 왕실로부터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해 세운 나라로 전국칠웅의 하나였으며, 춘추전국시대 때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전국시대 초기에는 자하, 오기, 서문표 등을 기용하여 서하 지방을 빼앗고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오기가 훈련시킨 정예 중장보병 무졸(武卒)이 유명했다.[6]
전성기에는 음진 전투에서 5만의 무졸로 50만 진(秦)나라 대군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고 나서부터는 상앙의 변법을 시행한 진나라에게 우위를 상실하는 면을 보이면서 야금야금 서하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서하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황하의 평야지대에 나라가 위치하여 인구가 많고 부국강병의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었지만, 또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많았고 따라서 외침에 불리하였다. 게다가 국력이 왕성할 때 점령했던 중산국은 애초에 위나라가 직접 통치하기에도 애매한 땅이었던 것이 위치상으로 조나라와 연나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월경지로 남았을 땅을 무리해서 점령했다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날려먹은 셈.
문후 이후 패권이 그나마 유지되던 위무후 시대에도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한 진나라의 기세를 제어하지도 못했거니와 위무후 사후에 일어난 군위쟁탈전으로 주위 강국들에게 허점만 보인 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혜왕(양혜왕) 때 잇따른 패전으로 하서 지역 등 방위에 필요한 지역들을 상실하였는데, 특히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반대로 상앙의 변법에 힘입은 진나라는 서하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고야 만다.[7][8]
문후 시절 그렇게 공을 들이던 인재기용에서도 실책이 잇달았는데 진, 제, 연의 주변국에서 재상 혹은 대장으로 중용되어 부국강병의 주역이 되었던 상앙, 손빈, 범수, 악의 등은 본래 위나라에 몸을 담았음에도 끝내 쓰이지 못했던 바 있다.[9] 기원전 3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을 보유하였으나 진나라에게 족족 패하며 국운은 기울어갔고 신릉군의 분전에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 왕의 의심을 산 그가 중용되지 못하면서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에게 멸망한다.
진말 초한쟁패기 진승·오광의 난 때 재건되었으나,~ 진승의 난을 토벌한 장한의 공격으로 다시 멸망하였다. 그리고 위표가 재차 위나라를 재건해 항우에게 복속하여 제후국이 되었다가 안읍 전투에서 패배하고 위표가 살해되면서 완전히 멸망한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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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
위씨종주(魏氏宗主)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무자(武子) |
주(犨) |
? |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
2 |
도자(悼子) |
과(顆) |
? |
무자의 아들. 결초보은 고사로 알려져 있다 |
3 |
장자(莊子) |
강(絳) |
? |
무자의 아들 |
4 |
헌자(獻子) |
서(舒) |
? |
소자의 아들 |
5 |
간자(簡子) |
취(取) |
? ~ 기원전 509년 |
헌자의 아들 |
6 |
양자(襄子) |
만다(曼多) |
기원전 508년 ~ 기원전 482년경 이후 |
간자의 아들 |
7 |
환자(桓子) |
구(駒) |
? ~ 기원전 425년 |
양자의 아들 |
3.2. 삼진 분립 후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사(斯) |
기원전 425년 ~ 기원전 387년 |
환자의 아들 |
|
2 |
격(擊) |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1년 |
문후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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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앵(罃) |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
무후의 아들 |
|
4 |
사(嗣) |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96년 |
혜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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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속(遬) |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7년 |
양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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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어(圉) |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43년 |
소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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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증(增)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
안희왕의 아들 |
|
8 |
-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5년 |
3.3. 초한쟁패기
8 |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
위나라 왕족 |
|
9 |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4년 |
위구의 동생 |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N-qʰuj-s/. 현대 발음은 Wèi.[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위나라 희성은 위씨(魏氏)다.[3] 기원전 344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위주의 할아버지 필만은 원래 희성이었다. 그는 서주 문왕의 15남 희고가 봉해진 곳으로 서융에게 멸망한 필(畢)나라의 후손이었다. 위(魏)나라를 진나라가 멸망시키고 필만에게 봉토로 하사해 씨를 위씨로 고쳤다.[6] 사기에서 무졸은 진나라 예사(銳士)에 버금가며 제나라 및 조나라보다 우위라고 했다. 현대적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합리적으로 양성한 정예병이었는데, 군장 구보, 강궁 날리기, 돌 나르기 등은 현재에도 사낭 나르기 등 정예 병력 훈련에 사용되는 커리큘럼과 유사한 점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퇴직 연금까지 받았는데 오죽했으면 이렇게 지불되는 연금이 기둥 뿌리를 흔들 정도라는 말이 나왔다.[7] 대량 천도 이후 50여 년간 밀당도 하고는 했지만, 완전히 지배하에 떨어진 건 기원전 293년 한나라와의 연합군 24만을 백기가 날려버린 이궐전역 이후.[8] 그리고 그 서위땅에 진나라가 설치한 것이 바로 난공불락의 전설을 써내려간 함곡관인데, 이후 진나라를 견제하려던 중원 제국의 합종군은 함곡관 앞에서 번번히 가로막히게 된다.[9] 특히 진나라로 간 두 명은 각각 서하지구 공략과 원교근공 정책을 통해 직접적으로 위나라의 몰락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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